부천시의 60대가 ‘사람고기 좀 먹어볼까’라는 협박성 내용 등 모두 954차례 문자메시지를 다방업주 여성에게 보내거나 전화를 거는 등 스토킹을 한 혐의 등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신당역 살인사건 이후 스토킹 범죄 심각성이 재확인됐고 피해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지난 13일 ‘직장갑질119’가 발표한 설문조사 결과에서도 심각성은 드러난다. 회사 사람으로부터 스토킹을 당한 적이 있다는 여성이 13%(남성 9.3%)나 됐다는 것이다. 피해 유형도 다양해서 ‘일상생활 장소에서 기다리거나 지켜보는 행위’(6.9%), ‘접근하거나 길을 막아서는 행위’(6.4%), ‘물건을 훼손하는 행위’(5.0%) 등이었다고 한다. 이에 더불어민주당이 10일 열린 의원총회에서 스토킹피해자보호법안을 당론으로 추진키로 했다. 법안의 골자는 ▲반의사 불벌죄 조항 등 폐지 ▲스토킹 피해자 자원 센터 운영 ▲피해자 정보 삭제 지원 등이다. 얼마 전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속 김승원 의원(민주‧수원 갑)도 “신당역 살인사건을 계기로 재범 우려가 높은 스토킹 범죄의 특수성을 고려해 구속영장 청구와 발부에 대한 인식을 제고”하라고 검찰과 법원에 촉구했다. 아울러 2차 가해나 보복이 두려운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는 경우도 있는 만큼 사안에 따라 보다 적극적으로 스토킹 범죄자에 대한 구속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의원이 경찰청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스토킹 처벌법이 시행된 지난해 10월21일부터 지난 8월까지 경찰에 검거된 스토킹 범죄자는 총 7152명이었다. 이 가운데 경찰이 구속영장을 신청한 건수는 377건이며, 실제 발부된 건수는 254건(67.4%)으로 집계됐다. 32.6%는 구속영장이 발부되지 않았는데 사유는 검사 불청구 16.5%, 판사 기각 16.1% 등이었다. 김 의원실의 스토킹 범죄자에 대한 경찰의 송치‧불송치 현황 분석 결과 전체 스토킹 범죄자 7152명 중 63.7%가 송치됐고, 36%는 불송치, 기타 0.3% 등으로 나타났다. 불송치 이유는 ‘피해자의 처벌불원’이 1879건으로 이는 전체 불송치 건수의 73%나 되는 것이다. 전기한 것처럼 2차 가해나 보복이 두려운 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는 경우도 적지 않을 것이다. 김 의원은 “이번 10월 국정감사를 통해 대법원과 법무부, 경찰청 등 관련 부처와 국회가 스토킹 가해자에 대한 능동적 감시가 가능하도록 위치추적 전자장치를 부착하거나, 피해자에 대한 접근 및 연락 금지 등을 조건으로 하는 조건부 석방제 등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한변호사협회 역시 “법원이 스토킹 범죄 구속영장을 기각하면 가해자 활동 반경을 제한하고 능동적 감시가 가능하도록 위치추적 전자장치를 부착하는 등 선제적인 공권력 개입과 제한조치를 감수하도록 하는 ‘조건부 석방 제도’도 강구할 필요가 있다”는 성명을 낸 바 있다. 지난 2월 서울 구로구에서도 40대 여성이 전 남자친구가 휘두른 흉기에 찔려 숨졌다. 지난해 12월에는 전 여자친구 집을 찾아가 여자친구의 어머니를 숨지게 하고 남동생을 중태에 빠뜨린 사건이 발생했다. 스토킹 범죄는 당사자 간의 사랑싸움이 아니다. 개인과 가정을 파멸에 빠뜨리는 심각한 범죄임을 우리사회와 검찰·법원이 인식해야 한다.
언어는 대립되는 말에 의해 의미가 부각된다. 자유에 대립되는 말은 규제다. 개인적으로 규제받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모두가 자유를 선호할 것이다. 그러나 자유주의라고 할 때는 말이 달라진다. 역사적으로 자유주의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적용되는 개념으로 등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다. 부와 권력을 누리는 자들에게 독점된 자유였다. 재력가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원리로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이를테면 선거권과 피선거권도 재력을 갖춘 남자들에게만 부여되었다. 언론 · 출판의 자유나 거주 · 이전의 자유 등도 마찬가지다. 시민혁명에 동참했던 노동자들이 각성하면서 민주주의를 요구했다. 노동자들은 정치참여를 요구하면서 사회주의 이념으로 무장했다. 노동자 서민들의 지난한 투쟁의 결과 민주주의가 자리를 잡았다. 자유주의가 민주주의로 승화된 것이다. 민주주의의 내용은 시장의 독점배제와 같은 대기업에 대한 규제와 노동자들의 정치참여를 골자로 한다. 경제민주화와 정치민주화의 구현인 것이다. 사회주의 이념의 상당 부분이 민주주의 제도에 수렴되었음은 물론이다. 걸음마 수준으로 시작한 민주주의는 느린 걸음으로 진화를 거듭하는 중이다. 민주주의의 운영 원리는 수(數)에 있다. 선거제도, 투표, 여론조사 등이다. 그리고 수시로 여론의 동향을 수로써 파악한다. 여론조사는 샘플을 추출해 묻는 형식을 취한다. 샘플 조사에는 표본오차가 발생한다. 1천명을 조사했을 때 표본오차는 ±3.1%다. 표본오차를 넘어서는 결과가 나왔을 때를 유의미하다고 한다. 선거에서 투표는 대표성을 담보하는 샘플링이 아닐 수 있다. 여론조사가 그렇듯이 전수 조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투표율과 참여자의 성향이 결과를 좌우할 수 있다. 결선투표 제도를 도입하는 까닭이다. 결선투표가 없이 다수 득표자가 당선되는 것으로 하는 경우에 차점자를 유의미하게 따돌린 경우가 아니라면, 당선자는 각별히 다른 후보에게 투표한 유권자의 선택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임해야 한다. ‘협치’가 거론되는 까닭이다. 평소의 여론조사도 마찬가지다. 수시로 하는 여론조사에서 오차범위를 벗어나는 지지를 받지 못하는 정당과 정치인은 겸허한 마음으로 상대의 의견을 존중하는 정치를 해야 한다. 트럼프가 대선에서 박빙의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론을 무시하고 독단적인 국가운영을 한 결과 재선에 실패했고, 이번 중간선거에서도 사실상 패배했다. 현재 대통령과 정부여당의 여론조사 지지율이 낮은 편이다. 그렇다고 해서 민주당의 지지율이 높아진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 다 자기네 강성 지지층만 염두에 두는 정치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유권자들은 누가 먼저 민심에 따르는 정치를 하는지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민심을 거스르는 정치가 성공할 수는 없다. 답은 숫자에 있다. 수는 우주와 자연, 그리고 사람 사는 세상의 법칙이요 민주주의의 바로미터다.
내가 강의하는 곳에서 10 년 넘게 공부하며 지내온 분이 농장에서 수확했다며 감과 사과를 한 상자 주었다. 상자 안 사과는 아직 더 자라도 될 것처럼 풋풋하고 싱그러웠다. 강의실 인연으로 더욱 친밀해지고 내 입장을 잘 이해하는 동창은 자기 집 뜰에 있는 감나무에서 따왔다며 권투 선수 주먹 같은 먹감 홍시를 선물로 주고 갔다. 과실수와 곡식을 거두는 논과 밭은 밑거름이 필수이다. 거름은 흙의 영양제요 보약이다. 농부는 땅을 논과 밭이나 토지라고 불렀다. ‘땅’이라는 명칭은 부동산투기자들 입에서 나왔다. 내 부모는 삶의 대부분을 논밭에서 땀 흘리며 보냈다. 덕분에 나는 곡식은 밑거름인 퇴비(거름)의 열매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퇴비는 자연에서 얻은 풀이나 짚 등을 두엄자리에서 썩도록 하여 논과 밭으로 가져가 고랑을 파고 묻어준 것이다. ‘인문학’은..
사회참사로 인한 희생자 이름 공개로 사회가 시끄럽다. 일부 언론매체가 희생자 이름을 공개했고, 정의구현사제단은 공식집회에서 희생된 이들의 이름을 한분 한분 불러 애도의 뜻을 기렸다. 예로부터 일반 사건사고나 참사와 달리 사회참사에 있어서는 유족의 특별 요청이 있지 않는 한 공개된 합동추모장에서 애도된다. 건강한 사회에서는 이를 위한 지원을 아끼지 않으며 국민들도 자원봉사 형태로 참사를 겪은 유족들 아픔에 동참한다. 이는 참사의 슬픔을 공유하는 유족들이 함께 고통을 나누고 서로를 위로하는 치유의 과정을 갖게 하고, 충격 속에 함께 슬픔을 공유하며 마음에 상처 입었던 사회구성원들에게도 치유 경험을 준다. 천재지변이 아닌 인재인 경우, 필수적 원인 규명과 함께 참사와의 관련 여부를 떠나 행정상의 총괄책임자가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사퇴하는 것 역시 사회적 치유 과정의 하나다. 이처럼 사회참사는 개인을 넘어 사회적이다. 유족이 겪은 일과 고통은 유족만이 아니라 사회구성원 모두의 것이다. 사회 참사를 통해 상처 입은 사회구성원들 역시 유족과 다를 바 없이 집단 치유가 필요하며, 이는 무고한 희생자에 대한 각자의 슬픔과 분노를 구체적으로 충분히 표현하고 나눌 수 있을 때 이뤄진다. 사회참사에서 고인 이름의 공개가 기본이자 공적 기념물 조성까지도 자연스런 이유이다. 사적 영역을 존중하는 미국에서도 911 사태의 모든 희생자 명단이 기념 공간에 새겨져 있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유족과 사회구성원들의 상처는 집단기억으로 승화되어 역사의 교훈이 된다. 사회참사에서 공개를 원하지 않는 유족 의사가 존중되어 비공개할 수는 있어도, 그 반대의 논리는 성립하지 않는다. 이번 참사에서 희생자 시신과 유족은 정부에 의해 신속하게 뿔뿔이 흩어졌다. 합동추모식에서 영정과 이름은 지워졌고, 심지어 참사와 희생자를 사고와 사망자로 부르라는 지침마저 공식 하달되었다. 그리고 이제 희생자의 이름만 말해도 유족 허가나 법까지 들이대면서 비난한다. 사회참사가 마치 유족만의 문제인양 몰아가며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치유도 무시하면서 오직 축소하려고만 하는 정치적 접근이다. 참사 희생자의 개인 층위에서 보아도 이들이 천인공노할 흉악한 범죄자가 아닌 이상, 공개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평판이나 여러 문제가 있는 이라도 고인이 되면 더 이상의 잘잘못을 따지기보다는 입장을 떠나 명복을 빌어주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무고한 10.29핼러윈 희생자들의 명단 공개를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참사 희생자들을 흉악한 범죄자 취급하는 셈이고, 이는 희생자를 사망자로 부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행정공백에 의한 사회참사에 있어서 책임을 회피하려는 애도관리자들이거나 정치적 계산이나 하는 자들이 법과 규정을 가장해 유족과 사회구성원을 분리하고, 우리가 겪은 집단상처 마저 억압해 이중으로 사회를 병들게 하는 정치 폭력을 행사 중이다. 각각의 무고한 희생자들이 158이란 수치에 가려질 것이 아니라 자신 이름으로 당당하게 호명되어 애도 받고, 함께 슬퍼하는 우리 모두의 상처도 치유되기를 기대한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로서 공감능력을 지닌 집단 구성원이면서 동시에 각 개인의 고유성은 무엇보다 존중되어야 하는 것이 생명 감수성의 기본임도 기억하자.
여성 노동자 4명 중 1명이 근무 중 성추행을 당하고, 3명 중 1명은 성희롱을 겪는 등 직장에서의 성평등 의식이 여전히 미달 수준이라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다. 또 여성 노동자 13%, 비정규직 여성 16%가 직장에서 스토킹을 경험했다고 응답했다. 일부에서 젠더폭력을 개인의 일탈로 여기는 경향이 있지만, 이는 오류임이 명확하다. 아직도 미개한 조직문화 혁신을 위해서 ‘성폭력’ 근절 노력에 좀 더 고삐를 죄어야 한다는 여론이다. 최근 (사단법인)직장갑질119가 전국 만 19세 이상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 성차별과 비뚤어진 젠더의식의 심각성을 대변한다. 우선, 여성 노동자 25.8%가 직장에서 성추행·성폭행을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로 대상을 좁히면 29.5%에 달한다. 가해자는 주로..
언론에 난 최근 글 ‘이재명 긴급 기자회견 자처’의 뜻을 톺아보고자 한다. CBS노컷뉴스 김기용 기자의 기사를 비롯한 몇 개 언론의 보도다. 하나를 인용한다. 《최측근 영장 청구에 이재명 긴급 기자회견 자처 / 이재명 "특검은 지금까지 제기된 의혹들 망라해야" / "거부할 경우 민주당이 가진 힘 통해서라도 반드시 해야" / 민주당, '특검 카드'로 당대표 '사법리스크' 국면 전환 시도》 ‘자처’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으면 아기집 자궁(子宮)을 한방(韓方)에서 이르는 의료용어인 자처(子處)와 함께, 자처(自處)라는 말이 나온다. 한자가 다른, 아기집 子處 얘기는 아닐 터이니 自處가 (흔히) 쓰는 말이겠다. 풀이가 세 가지다. 1. 자기를 어떤 사람으로 여겨 그렇게 처신(處身)함, 2. 자기의 일을 스스로 처리함, 3. 의분(義憤)을 참지 못하거나 지조(志操)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음 등이다. 언론은 이 중 어떤 뜻으로 자처라는 단어를 썼을까. 국립국어원 국어사전의 이 풀이를 저 기사와 함께 살피니 꽤 고민스럽다. 저 글은 《이재명=긴급 기자회견》이라는 ‘수학적 논리로 세상을 묘사한’ 등식(等式)일까? 이재명이 기자회견을 스스로 처리했다고? 또는, 설마 긴급 기자회견이 자살(自殺)과 관련됐을까? 이 얘기가 풍자적이며 비꼬는 묘사임을 여태 알지 못한 사람이라면, 공부부터 좀 해야 한다. 하긴 공부는 모두가 늘 할 바이긴 하다. 하여간 말은 그 의도하는 바가 잘 드러나야 한다. 특히 언론(기자)의 말이나 글은 명확(明確)해야 한다. 공공(公共) 즉 모두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자문(自問)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찬찬히 또렷하게 설명해야 한다. ‘이재명 긴급 기자회견 자처’는 무슨 뜻이고, 나는 왜 저 단어를 선택했던가? ‘나’에게 설명이 안 되면, 나를 이해시키지 못하면, 독자도 이해시킬 수 없다. 언론 책무(責務)의 도구는 ‘말’에서 시작되며 끝나는 지점도 거기다. 이를 무시하고 ‘급해서 오타(誤打)친 것’ 등으로 둘러대고서 자문의 이번 기회를 버린다면, 책임을 버리는 것이지 싶다. 스스로 자(自)에 살 처(處), 두 글자 뜻을 따로 나눠 푼 다음 다시 이를 합쳐볼 필요가 있다. 이 방법은 어쩌면 이런 ‘말의 혼란’의 먹구름을 걷어줄 처방전일 수 있다. 말의 속뜻 또는 어원(語源)을 말하는 것이다. ‘말밑’이라고도 한다. ‘말에, 소리 말고도 (속)뜻이 있다.’는 말에 의아해 하는 이도 있다. 예를 들어, 표시가 ‘표시한다.’는 뜻을 가지게 되는 이유를 생각해 본다. 標示(표시) 한자어의 標와 示가, 표를 써서 보여준다(示)는 말이, ‘표시’의 그 뜻을 보듬어낸다는 것을 생각하자는 것이다. 혹 저 自處는 자청(自請)을 잘못 쓴 걸까? 기본 단어가 엉키면 그 글과 언론사 모두를 믿기 어렵게 된다. 생각의 틀은 말과 글이다. 그 틀을 잘 짓는 것이 지식(언론)의 첫걸음이다.
북쪽은 2012년 11월 16일을 어머니날로 제정했다. 어버이날은 없고 어머니날을 제정한 이유가 무엇일까. ‘사회주의 대 가정’이라는 사회에서 기초 단위인 가정에 여성역할이 중요했고, 사회갈등 해결에 여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1961년 11월 16일 제1차 전국 어머니 대회가 있었다. 대회에서 여성을 가정과 사회를 돌보는 일군으로 호명했다. 만일 여성이 없었다면 전쟁의 폐허에서 오랫동안 머물었을 것이다. 부족한 노동력을 채웠고, 그러면서 아이를 키우고 공부시키고 직장생활을 했다. 인구가 많아지자 산아제한을 하면서 두 명 이상 아이를 키우지 말라고 했다. 인구가 적어지니 이번에는 아이를 낳으라고, 많이 낳고 잘 키운 여자는 ‘모성영웅’ 칭호를 주었다. 사회와 가정일을 하면서 살아온 여성은 강하다. ‘고난의 행군’ 시기를 거치면서 더욱 강해졌..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할 사건이 벌어졌다. 모든 국민이 가슴 아파하는 이태원 참사다. 하루속히 이를 극복하고 일상으로 돌아가길 희망하면서도 정보적 측면에서 아쉬움이 크다. 필자는 평소 정보는 수집이나 분석보다 ‘예측’ 또는 ‘예측과 판단, 그리고 실행’이라는 소신을 갖고 있다. 현대 사회는 한마디로 VUCA사회다. Volatility(변동성), Uncertainity (예측성), Complexity(복잡성), Ambiguity(모호성)의 약자로 혼돈과 복잡성, 그리고 모호성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사회다. 그러기에 정보와 판단의 중요성은 더해간다. 정보는 노이즈(noise)가 섞이기 마련이고, 그 가치의 판단과정에 인간의 편견과 인지적 나태함(집단사고, 희망적 사고 등)이 끼어들어 실패와 실책으로 이어진다. 이 중 필자는 특히 정보의 예측적 역할을 중요시한다. 비스마르크가 “정치인 등 지도자들은 역사 속에서 순간적으로 지나치는 신의 옷자락을 잡아채는 능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듯이, 불확실성이 넘치는 이 시대에는 ‘순식간에 지나치는 정보’를 잡아채고 실행하는 능력이 더없이 절실하다. 이태원 참사의 저변에는 지난 문재인 정부의 국가정보기관들의 ‘정보관련 부서’ 무력화와 관련이 있다. 일부 정보활용에 부적절한 면이 있다고 해서 국가기관들의 정보관련 부서를 사실상 형해화시킨 것이 이태원 참사의 먼 요인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정보감각과 실행능력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랜 경험과 전문성이 뒷받침되어야 정보감각이 배양된다. 예측적 능력을 기르려면 작은 변화에 주목하고 큰 흐름을 동시에 읽는 다차원적 사고가 필요하다. 디테일에 약하고 대의만 읽을 줄 알았던 관우 같은 스타일 粗心大意(조심대의)는 불확실성 시대에는 맞지 않는다. 이에 문재인 정부의 정보관련 업무 형해화는 정보감각 마저 상실하게 만들고, ‘빈대잡자고 초가삼간 태우는 격’이 되었다. 일본의 사례는 모범이 된다. 국가적 정보기관이 없음에도 막강한 정보력을 발휘하는 데는 일본인들의 습관화된 정보감각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청나라 말기 일본이 중국 대륙 침략을 앞두고 보여준 정보수집 행태는 단연 압권이다. 중국 대도시의 일본 영사관 관원은 말할 것도 없고 각종 단체와 민간조직, 상인, 종교인, 낭인들까지 중국에서 정보수집에 매진했다. 지역 고위관료 취향과 인간관계, 도로, 기후, 문화, 종교 등도 자세히 수집했다. 일부 무관은 명승지 유람 명분으로 베이징과 후난성을 샅샅이 훑었다. 이번 이태원 참사를 계기로 정보업무에도 변화가 필요하다. 빈사상태인 국내정보 업무를 활성화시켜야 한다. 정보는 예측력과 예고적 기능을 수행하기에 그 활성화 필요성은 더하다. 문제점이 나타나면 그 부분만 도려내면 된다. 국내와 국제를 구분할 수 없는 ‘정보의 무경계 시대’이다. 지도자들의 분발과 과감성을 고대한다.
경기도의 ‘초등학교 돌봄교실’이 수요에 비해 여전히 부족한 것으로 드러나 이에 대한 해결책이 시급히 마련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초등 돌봄교실은 학교 내에 마련된 별도 교실에서 각 시도교육청 또는 학교에서 채용한 돌봄전담사가 방과 후부터 아이들을 돌봐주는 제도를 말한다. 이 제도는 저소득층과 맞벌이 가정을 위한 복지제도인 동시에 저출산 문제를 해소하는 방안으로도 평가되고 있어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여론이다. 교육부의 돌봄교실 수용 인원 자료에 따르면 경기도의 2020년 지역 내 돌봄교실 신청자는 6만7482명이었으나 이 중 5975명(약 8.9%)이 이용하지 못했다. 지난해에도 6만9759명이 신청했지만 7264명(약 10.4%)이 이용 혜택을 보지 못했고, 올해도 신청 학생 6만9560명 중 3784명(약 5.4%)이 돌봄교실 배정에서 탈락했다. 경기..
1. 그날 밤은 일찍 잠들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뉴스를 듣자마자 나를 덮친 것은 공포였다. 2가지가 뒤섞인 두려움이었다. 첫 번째는 만에 하나 서울 있는 아이의 안전에 대한 그것. 핏줄을 향한 본능적인 감정이었다. 두 번째는 예전에 분명히 느낀 적이 있는, 국가 시스템에 대한 선명한 공포감이었다. 세월호 참극이 데자뷰처럼 떠오른 것이다. 어떤 거대하고 더러운 힘이 종이장처럼 세상을 구겨 부수는 것을 목격하는 심정. 아들아이에게 전화를 했다. 안 받는다. 초조한 심정으로 다시 재발신 버튼을 눌렀다. 이번에는 전화를 받는다. 아비의 초조함과 달리 아이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이른 시각에 왜 전화를 했는지 아는 눈치다. 이태원에는 안 갔다고 집에 있었다고, 먼저 나를 안심시키고 위로한다. 무능과 기복적 망상에 전적으로 의지한 박근혜 정권에 이어 윤석열 정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