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 감소에 따른 학령인구 급감 여파로 경기도에서도 대학교들이 통폐합을 통해 몸집을 줄이려는 움직임이 늘어나고 있다. 인구 감소에 따른 이 같은 추세는 세계적인 현상이다. 일단 통폐합으로 구조를 조정하는 대응이 불가피하지만, 잉여시설과 남아도는 지식자원에 대한 중장기적 활용 대책은 범국가적인 과제다. 평생교육의 수요에 맞춰서 국민의 교육 욕구를 충족시키는 자원으로의 선용 등 보다 적극적인 ‘사회적 대안’ 모색이 필요한 시점이다. 안성 한경대학교와 평택 한국복지대학교는 2023년 3월부터 ‘한경국립대학교’로 새 문패를 단다. 교육부는 지난 1일 국무회의에서 이런 내용의 ‘국립학교 설치령’ 개정안이 통과됨에 따라 두 대학을 통합하고 학생·교직원의 소속 변경을 추진하기로 했다. 한경국립대는 기존 한경대 건물을 안성 캠퍼스로 활..
12월 2일 밤, 월드컵에서 대한민국대표팀이 포르투갈과 맞붙는 시간을 앞두고 저녁반주에 얼콰해진 나는 고민했다. 축구를 볼 것인가? 잘 것인가? 당일로 예정된 철도노조의 파업은 잠정합의가 나와 철회되었다. 고로 내일 새벽 예정된 기관차승무를 위해 출근해야 한다. 잘 시간도 문제지만 더 큰 고민은 지금껏 대한민국 축구가 중요한 경기에서 내가 중계를 지켜볼 때 이겨본 기억이 거의 없다는 것. 축구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끊기 힘든 응원유혹이지만 차라리 안보는게 우국충정이니 이 징크스를 익히 아는 지인은 술먹고 일찍 자란다. 그래,. 애국하는 심정으로 잤다. 현실은 늘 드라마보다 극적이라더니 새벽에 일어나서 “내가 대한민국을 또 한번 구한게야”라는 뿌듯함을 얻었다. 그날 새벽부터 지금까지 뉴스는 태반을 붉은악마들의 기적이 차지했다. 마치 월드컵경기 없을 때 우리가 어떻게 살아냈나 싶을만치. “그래, 월드컵이니깐..”하면서도 지나친 들뜸을 스스로 경계하게 되는 것은 마음 한 켠에 자리잡고 있는 미안함 때문이다. 솔직히 파업철회 소식에 내 가슴은 물먹은 솜마냥 무거웠다. 파업현장에 고립된 채 홀로 십자포화를 견뎌야 할 화물연대조합원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추가 업무개시명령을 검토한다, 화주들의 손배소송을 대행한다”등 정부와 집권여당의 살벌한 말들이 언론에 도배된다. 심지어 용산에서 스승으로 모신다는 천공이라는 도사는 “노동자 없애면 데모가 없어진다. 대한민국은 노동자를 없애야 한다”고 일갈했단다. 아.. 지금 우리는 어느 시대에 살고 있단 말인가? 파업을 좋아서 하는 노동자는 없다. 파업은 전쟁과 같아서 치명적인 최후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파업도 정치도 국민들의 지지가 좌우하는 것, 월드컵이 모든 것을 삼켜버린 지금 길거리 화물연대조합원들의 막막한 가슴은 아무도 관심이 없다. 어디 그뿐인가? 전국이 “대~한민국!!”이란 함성에 뒤덮힌 가운데 법원은 서훈 전국가안보실장에게 서해공무원 사망사고 관련으로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손흥민이 질주하기 몇시간 전, 검찰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에게 징역 5년을 구형했다. 우리가 월드컵으로 들썩일 때 그렇게 많이 해먹었다는 대장동 도적들은 모두 풀려났고, 풀려난 자들은 하나같이 검찰과 입을 맞춘 듯이 "이랬다 하더라", "저랬다고 들었다"는 말들로 야당대표를 겨냥했다. 그리고 그들이 비우고 나온 구치소의 빈자리를 이재명의 사람들이 메꾸었다. 검찰이 청구하면 법원이 발부하는 속칭 ‘구속영장 자판기시스템’은 또 누구를 겨냥할 것인가? 검찰왕국이라 불리우는 정권은 검찰권을 지렛대로 화물연대파업 강경대응과 전정권 수사, 이재명대표 수사를 디딤돌로 지지율 반전을 노린다. 지지율이 확보되면 민주당내의 호응세력과 더불어 정계개편까지 밀어붙일지도 모른다. 이 과정들이 월드컵의 열광을 등에 업고 탄력을 붙이고 있다면 내가 너무 민감한 탓일까? 땅거미 내리는 황혼녁, 언덕 위에서 다가오는 동물이 내가 기르던 개인지, 날 물어뜯을 늑대인지 분간이 어려운 때를 일러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 일컬었다. 월드컵의 눈부신 열정이 사그라들고 나서야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 지금 이 시간이 개의 시간이었는지 늑대의 시간이었는지를.. 그렇다고 매사에 진지충이 되어 월드컵을 보지말자고 할 수는 없는 노릇. 이처럼 무도한 시대에 그나마 월드컵이라도 보며 위안을 얻어야 할게 아닌가? 맞는 말이다. 그러나 볼 때 보더라도 매 순간 깨어있는 정신으로 보자. 겁박에 내몰린 화물연대노동자가 눈물을 삼키며 다시 운전대에 오르듯이, 이태원 유족들이 피눈물을 뿌리며 길거리를 떠돌듯이 누군가는 고통의 강을 건너고 있는 시간임을 잊어먹지만 말고 보자. 그래야 늑대의 시간을 견딜 수 있을테니 말이다.
가을은 진홍빛 와인 색깔로 다가온다고 한다. 하지만 가을도 깊어지면 첫눈을 기다리게 된다. 첫눈은 첫사랑의 가슴 같은 설렘과 그리움의 해갈 같은 기쁨을 안고 온다. 산중에 살다 간 법정은 1 미터 가까이 쌓인 눈을 헤치고 나가기에 엄두가 나지 않고 들짐승들도 얼씬하지 않을 때는 ‘글은 곧 사람이란 말이 있지만 글씨 또한 그 사람을 드러낸다.’는 마음으로 다산(茶山) 선생의 복사된 글씨를 압핀으로 빈 벽에 붙여 놓고 보면 방안이 한결 고풍스런 품격이 있어 보인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흰 눈이 펄펄 내리면 종남산 아래 눈 덮인 들길을 걸어 산속 어느 집 오두막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싶다. 그런데 요즘 우리들 삶의 주변과 국가의 역사적 참사를 보면 한가한 이야기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닌 것 같다. 시인이란 누군가의 아픔을 대신 앓아 주는 환자가 되어야 한다고..
제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화위)”의 위원장 임기가 12월 9일 종료되고 정부는 새로운 위원장 후보로 극우적 인사로 지명했다. 진화위는 과거 국가폭력으로 억울한 피해를 본 사건의 진실을 밝히고, 국가의 손·배상과 다시는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게 하는 목적을 가지고 출범한 단체이다. 이를 위해 진화위는 항일독립운동, 해외동포사,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 권위주의 통치 시에 일어났던 다양한 인권침해,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 등을 조사하고 진실을 밝히고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설립된 독립적인 조사기관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성립된 신생 국가들 대부분이 수많은 국가폭력과 인권탄압에 많은 희생자를 발생시켰다. 우리나라 역시 그 피해사례로 따지면 만만치 않다. 해방 이후 냉전과 분단 그리고 이념대립으로 그리고 군부독재와 권위주의 정권 시대를 거치면서 국가폭력은 다양한 형태로 피해자들을 양산했다. 우리의 진화위와 비슷한 기구로 대표적인 것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진실과 화해위원회’이다. 300년 동안 흑백분리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를 실시한 남아공의 국가폭력은 세계적으로도 악명이 높았다. 그러나 1994년 국민투표로 집권한 넬슨 만델라 대통령은 아픈 과거사를 정리하기 위한 전담 위원회를 설치하고, 과거사의 진실을 밝혀 화해를 위한 방법으로 가해자의 반성과 피해자, 유가족의 용서를 꾀했다. 세계가 찬양한 남아공의 과거사 정리는 이렇게 완성될 수 있었다. 우리도 진실과 화해를 기다리는 제주도 4.3항쟁과 6.25 전쟁의 참화 속에서 발생한 보도연맹 등 민간인 학살, 인혁당 사건처럼 사법부를 이용한 살인행위 그리고 광주민주화운동과 세월호 참변까지 그 사례들이 일일이 열거하기도 부족하다. 지금껏 진화위는 화성시 선감학원의 인권탄압 사례를 발굴하는 등 실적이 많았지만, 아직도 남은 과제가 1만 8천여 건이다. 시급히 조직을 보강하고 조사요원의 증원이 필요하지만, 위원회 활동 시한은 겨우 1년 5개월 남았다. 문제는 차기 위원장 후보이다. 뉴라이트 운동을 앞장섰던 그는 아픈 우리의 과거사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자이다. 이미 독재자로 판정이 난 이승만과 박정희를 찬양하고, 제주 4.3항쟁을 ‘반한·반미·반유엔·친공투쟁’이라는 막말과 희생자들은 제주도민 유격대에 의해서 발생하였고, 친일청산이 안된 것은 공산세력 때문이라는 등 도저히 민주화운동에 대한 이해 자체가 없는 자이다. 이런 지명은 민주화운동 전체에 대한 모욕이고 폭거이다. 그동안 각종 위원회에서 위원장의 행태에 따라 위원회의 구성과 노선이 결정되어 파행을 겪은 일을 숱하게 보아온 입장에서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정부는 다른 기구의 장은 자신의 코드에 맞는 자를 임명하더라도 진화위의 위원장만은 민주주의가 무엇이고 왜 지켜야 하는지를 정확히 아는 사람으로 임명해 주어야 한다. 우리가 아픈 과거사를 정리하는 이유는 그 시대가 우상의 숭배가 아닌 이성적 사람들이 살았다는 역사적 기록 때문이다. 후세가 어떻게 기록할지 역사를 두려워해야 한다.
그는 최초의 여성 의병장이었으며, 중국으로 망명하여 25년 동안 시아버지, 남편, 세 아들과 함께 목숨을 바친 독립운동가다. 같은 시기에 3대가 일심동체로 국권회복에 헌신한 집안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 위대함, 또는 특별함에 비추어 기록도 빈약하고 훗날 우리 정부가 그에게 내린 훈장은 너무나 초라했다. 모욕적이다. 희순은 1860년(철종 11년) 꼿꼿한 선비 윤익상의 장녀로 지금의 남산 밑 회현동에서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생모와 다정한 계모를 연이어 잃는 아픔을 겪는다. 열 여섯 살에 아버지의 친구인 유홍석의 아들 제원과 결혼했다. 시댁은 강원도 춘천을 대표하는 선비집안이었다. 한 스승의 문하에서 공부한 친구들이 사돈이 된거다. 스승은 위정척사(衛正斥邪) 그룹의 우두머리였던 화서 이항로였으며, 그 제자들은 전라도와 경상도의 위쪽에서 일어났던 거의 모든 의병을 거병했다. 제천에서 일어난 의암 유인석과 춘천의 유홍석은 6촌간이다. 1895년. 왜놈들이 명성황후를 잔인하게 살해한다. 이 을미사변에 이어서 단발령이 포고되었다. 전국에서 의병이 우후죽순으로 일어났다. 희순은 춘천지역에서 시아버지와 남편이 주축이 된 의병대를 뒤에서 도왔다. 세탁, 취사, 모금, 화약과 탄약제조 등이었다. 왜놈 대장 보거라! 조선의 안사람이 경고한다. 우리나라 욕심 나면 구경이나 할 것이지 우리 임금을 괴롭히고 국모를 살해하고도 살아서 가기를 바라느냐. 이 마적떼 오랑케야 좋은 말로 할 때 용서를 빌고 떠나가라. 우리 조선 사람들 화 나면 황소호랑이와 같으니라. 후회하기 전에 너희 나라로 가거라. 좋은 말로 달랠 적에 너희 나라로 가거라. 왜놈 대장 보거라. 조선 안사람이 경고한다. 조선 선비의 아내 윤히순 이 경고문과 '안사람 의병가' 등 그가 남긴 16편의 글 ㅡ노래 가사 8편, 경고문 4편, 기타 자전적 기록들ㅡ에서 본인의 이름 '윤히순'을 밝힌다. 잡혀가더라도, 당당히 응할 것임을 선언하는 것이다. 이웃들에게는 "나는 이렇게 목숨을 내놓았다. 그대들도 동참하라"는 호소다. 결국 30여 명의 '안사람 의병단'을 결성, 의병대장이 되었다. 왜놈들은 1905년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했다. 1907년에는 고종을 폐위하고 군대를 강제해산했다. 1910년 8월 29일 마침내 국권을 강탈했다. 선비들 일부는 자결하거나 숨고, 상당수는 이듬해 1911년부터 왜놈 지배를 거부하고 만주와 간도로 망명한다. 이 때 희순의 가족도 떠난다. 시댁 유씨집안과 사돈네 집안 합하여 45세대가 함께 망명한다. 자리 잡자마자 600여명의 부대로 조선독립단을 결성한다. 윤희순 가족 전원이 전사였기 때문에 '가족부대'로 불리웠다. 윤의사는 일흔이 넘어서도 군사훈련에 참여했다. 그리고 '노학당(老學堂)'이라는 학교를 세워 망명객들의 자녀를 취학시켜 독립운동가들을 양성한다. 큰 아들 돈상이 독립단 활동으로 종횡무진 하던 중에 제사 지내러 들렀다가 왜경에게 잡혔다. 밀고였다. 한 달 동안 고문을 당했다. 나오자마자 세상을 뜬다. 희순도 지쳤다. 그날부터 곡기를 끊고 자서전 '일생록' 집필을 마친 뒤, 시아버지와 남편, 아들이 있는 곳으로 떠난다. 1935년 8월 1일. 아들이 죽고 열흘만이다. 76세. 자결이었다. 첨언:침략전쟁은 무한의 창공을 날으는 독수리들을 새장에 가두는 일이다. 그 점에서 왜놈들은 금수만도 못한 족속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더럽고 흉포한 패륜을 국가전략으로 채택했다. 살광(殺光), 소광(燒光), 탈광(奪光)이 이른 바, '三光정책'이다. 여기서 '광(光)'은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이란 뜻이다. '殺光'은 조선이든 중국이든 그 어디든 공격할 때, 민간인이든 군인이든, 어린애건 노인이건 그 누구든 가리지 말고 닥치는대로 '순식간에' 죽여버리라는 말이다. '燒光'은 어딜가든 먼저 목표지역의 집들을 불질러 그 동네 전체를 '번개치듯' 태워버리라는 거다. '奪光'은 놋수저든 금괴든 송아지든 강아지든 그 뭣이든, '삽시간에' 약탈하라는 말이다. 일본 주류는 여전히 이 정신세계 위에 서 있다. '3光작전'은 폐기되지 않았다.
북한은 2022년 들어 단거리 중거리 대륙간 탄도미사일 발사 등 무력시위를 계속하는 가운데 이에 대응한 한미합동군사연습과 국제사회 및 우리정부의 대북제재 강화 움직임에 대해 거친 언사를 동원해 비난하고 반발하고 있다. 최근 북한이 공개한 ‘화성포 17형’ 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를 계기로 유엔중심의 대북 제재 강화 움직임은 중국과 러시아의 거부로 결과를 얻지 못했다. 이에 따라 미국을 비롯한 서방권 국가와 우리가 나서서 북한의 주요 외화 조달처인 광물 수출과 사이버 해킹을 제한하고자 하는 움직임을 보이자 북한은 김여정을 내세워 막말에 가까운 단어를 써가며 비난하는 등 원초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북한의 반응은 2005년 6자회담에서 핵프로그램 폐기에 합의했지만 비슷한 시점에 취해진 미국 재무부의 돈세탁 방지 차원의 북한 통치..
본보는 지난 10월 27일자 사설을 통해 공동화된 옛 경기도청사 주변 지역 상인들의 어려움을 전하고 당장 상권 침체를 벗어날 효과적인 대책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상인들을 위한 단기적인 계획을 조속히 마련하라고 촉구했다. 도청이 광교 신도시로 이전한 후 지역 공동화 현상이 심화하면서 지역경제가 나락으로 떨어졌다. 지난 11월 2일 도의회에서 경기도·도의회 주최로 열린 ‘2022 경기도 정책토론대축제 경기도청 구청사 활용 방안 토론회’에서는 기존 상권 슬럼화를 방지하기 위한 대책이 시급하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도청이 신청사로 이전하면서 인근 지역이 느끼는 상실감이 매우 크며 상권의 급격한 매출 감소와 부동산 가격 하락 등 경제적 타격을 입고 있다는 것이다. 수원팔달연합회 장금식 회장은 “도청 이전 이후 지역 공동화 현상이 심화하면서 지역경제 활성화가 시급한 정책과제로 대두되고 있다”며 “도가 복합단지 조성 시점으로 밝힌 2025년까지 기다리기는 너무 늦기 때문에 가능한 빨리 기존 시설을 활용해서 지역경제에 활력을 도모할 대책을 모색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도는 팔달산 옛 청사를 2025년까지 '경기도사회혁신복합단지'(가칭)로 조성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옛 청사의 11개 동(연면적 5만8659㎡) 가운데 6개 동(3만8707㎡)은 문화예술관(의회동), 사회혁신1(신관)·사회혁신2(구관)관, 아이놀이동(민원실동), 스포츠건강동(인재채용동), 몰입경험콘텐츠존(충무시설) 등으로 활용하겠다는 것이다. 사회혁신복합단지 완공 시점은 2025년이지만, 내년부터 순차적으로 공간 조성을 완료하면서 상주 인력이나 유동 인력이 늘어나도록 할 계획이다. 주민에게 회의시설이나 잔디광장을 개방하고 행사나 축제 등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계기도 마련하기로 했다. 실제로 옛 도청 주변 상권 활성화를 위한 도의 노력은 진행 중이다. 지난 11월 19일엔 ‘기회의 영수증 음악회’를 개최했다. 옛 경기도청사가 소재한 수원시 팔달구 소재 음식점, 상점, 전통시장 등에서 2만원 이상 소비한 영수증을 음악회 입장권과 교환해 입장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또 11월 29일엔 영화·드라마 제작자, 감독, 피디(PD) 등 영상산업 관계자 20여 명을 초청해 옛 경기도청사 촬영 지원을 위한 '로케이션 팸투어(홍보 목적 현지답사)'를 개최하기도 했다. 옛 경기도청사를 영화·드라마 촬영지로 띄우기 위해서다. 그러나 밥차나 커피차를 따로 부르는 것에 대해서는 엄격히 금하기로 했다. 주변 상권 활성화를 위한 조치다. 이런 도의 계획에도 불구, 주민들은 심각한 공동화 현상에 우려를 금치 못하고 있다. 슬럼화를 막기 위한 ‘수원특례시 랜드마크 신청사’를 건립하고 ‘가로수길’을 조성하자는 주장도 나왔다. 경기도청 이전 슬럼화대책 협의회는 경기도와 수원시에 공문을 보내 ▲옛 청사 부지를 활용한 수원특례시 랜드마크 신청사 건립 ▲옛 청사 지역 통과 시내버스 노선 개설 ▲옛 청사 정문~도청오거리 가로수길 조성 ▲도청오거리 교통불편 해소 위한 교통광장 조성 ▲팔달산 관광을 위한 공용주차장 확충 등을 제안하기도 했다. 슬럼화로 어려움을 겪는 구청사 인근 지역 주민들에게 더욱 와 닿는 현실적인 방안이 빨리 마련되면 좋겠다.
모래 커피를 제대로 내려주는 곳이 홍대 근처에 있다는 말을 들었다. 우리나라에 들여온 모래 커피의 맛은 어떨까. 모래 커피의 나라, 튀르키예에서 직접 맛본 것은 텁텁하고 달아서 내 입맛에 맞지 않았다. 하지만 모래 커피를 내리는 과정은 흥미로웠다. 커피를 주문 받은 주인은 주문대 옆의 테이블에서 퍼포먼스를 벌인다. 300-400도로 달궈진 모래 위, 체즈베(Cezve)라는 커피 추출용 주전자를 이리저리 옮기며 데운 끝에 달걀 크기 잔에 커피를 담아내준다. 다 마신 후에는 커피점 치는 것을 도와준다. 튀르키예 미신인데 과정도 내용도 사랑스럽다. 커피 마신 잔을 엎어서 돌린 후, 잔 속에 남은 무늬를 보고 예언을 한다. 예를 들면 강아지 모양이 나오면 인기가 많아지고, 물고기 모양이 나오면 일자리를 얻거나 돈이 들어오고, 하트 모양이 나오면 사랑을 이루거나 결혼 하게 된다는 식이다. 그런데 커피는, 튀르키예인의 사랑과 결혼 과정에서 관례로도 오랫동안 뿌리내렸다. 이슬람 문화권이라 자유연애가 쉽지 않았던 과거, 튀르키예에서는 신랑 어머니들이 며느리감을 찾아다녔다. 청혼 받은 신부는 상견례 때 커피를 내오는데, 커피 타는 실력으로 요리 솜씨를 짐작했다. 그 과정에서 신부는 신랑감에 대한 호감 정도를 커피를 타며 표현했다. 마음에 들면 설탕을 듬뿍 넣는 것으로, 마음에 들지 않으면 소금을 탔다. 더 재미난 이야기. 옛날, 가장인 남편이 하루 할당량의 커피를 준비 못하면 이혼청구 권리를 여성에게 법적으로 주었다나? 사랑과 결혼, 그리고 삶에 커피가 이렇게 깊이 관련된 나라가 튀르키예 말고 또 있을까. 궁금증은 커피의 역사를 통해 풀린다. 커피의 탄생에 대한 여러 설 가운데, 6세기 무렵, 아비시니아( 지금의 에티오피아 ) 양치기 칼디 이야기가 가장 유명하다. 빨간 열매를 먹은 후 밤낮으로 뛰노는 염소들을 본 칼디는 직접 맛본 후, 정신이 각성되는 체험을 한다. 칼디의 이야기는 수도원에 알려졌고, 이후 수도사들은 이 빨간 열매를 물과 섞어 마시며 공부와 기도에 효율을 얻는다. 에티오피아의 커피는 전쟁, 무역, 무슬림 순례자 등을 통해 아라비아 반도로 전파되는데, 예멘의 모카 지역이 생장의 적지였다. 예멘은 전 세계에서 처음으로, 유일하게 커피 농사를 지은 곳이자 커피문화를 태동시킨 곳. 이 예멘을 16세기 이후, 오스만 제국이 점령하면서 커피 문화는 세계로 확산된다. 그도 그럴 것이 오스만 제국은, 약 600년에 걸쳐 발칸 반도와 아나톨리아를 중심으로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등 3개 대륙에 걸쳐 광대한 영역을 지배하지 않았던가. 카페의 시작도 오스만 제국이다. 오스만 제국에서는 커피를 '카흐베(Kahve)’라고 불렀는데, 1475년, 선보인 '카흐 바 하네(커피 집)' 라는 가게를 카페의 원형으로 본다. 커피만을 위해 존재하는 도구인 커피 포트의 시작도 오스만의 체즈베라 할 수 있고, 오랫동안 대화 하며 커피를 마시기 위해 개발된 오스만의 '자르프'라는 잔은 커피잔의 시작이었다. 커피문화를 발흥 시켰던 오스만 제국의 후예인 튀르키예에서 커피 문화가 삶과 뒤섞인 것이 이해 된다. 조만간 '모래 커피 카페'를 찾아가 튀르키예와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봐야겠다. 모래 커피를 마시며, 터키 팝의 여왕이라고 불리는 세잔 악수( Sezen Aksu )의 노래를 들으면 어떨까. 오스만의 영화와 폐허, 이슬람의 영성이 느껴지는 그 목소리와 말이다.
“한국리서치가 지난 2월 전국 만 18세 이상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인식조사 결과, 사람들은 MZ세대를 ‘Z세대’로 잘못 인식하고 있었다. 연령대 정보를 제공하지 않은 상태에서, 위아래로 몇 살까지를 MZ세대라고 생각하는지 물었더니 하한선의 평균 나이는 16.1세, 상한선의 평균 나이는 30.7세로 나왔다.” 《미디어 오늘》 올 9월 13일자 기사 ‘MZ세대라는 말은 어딘가 잘못됐다’는 기사에서 소개된 내용이다. 언론이 편의적으로 개념 없이 사용하고 있는 MZ세대라는 세대구분이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는 진단이다. Z세대는 M세대와 하나로 묶이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토로하기도 했다고 한다. 교수들의 비판도 소개되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밀레니얼 세대와 Z세대 사이의 유사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언론이 과도하게 일반화하거나 남용하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세대론이 전면에 등장하는 것은 진짜 원인이 가려질 수 있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미디어 오늘》 박재령 기자는 11월 29일자에도 ‘10대 아이돌부터 40대 부모까지 MZ? 카오스에 빠진 MZ 활용법’이란 제목으로 아젠다를 이어갔다. 이 기사에 따르면, Z세대를 처음 만든 미국의 퓨리서치센터(Pew Research Center)는 1980~1996년생(27~43세)을 밀레니얼(M) 세대, 1997~2012년생(11~26세)을 Z세대로 구분했다고 한다. 대체로 X세대는 소위 586세대, Y세대는 밀레니얼(M)세대, Z세대는 1990년대 중반 이후 태어난 세대로 구분된다. 따라서 'MZ = Y(M) + Z'가 된다. Z세대에 해당하는 누가 M세대와 함께 묶이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토로했다고 해서 MZ라는 묶음이 잘못됐다고 해석하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다. 11월 29일자 기사에서는 “많은 사회학자들이 문제의 진짜 원인이 가려질 수 있다고 우려했지만 언론의 보도행태는 전혀 바뀌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진짜 원인, 즉 본질은 무엇일까? 윗세대와 구별되는 MZ세대의 가장 중요한 차별적 특징은 퍼스널 컴퓨터와 인터넷, 모바일 폰, SNS, 유튜브에 익숙하다는 특징을 공유한다. 특히 Z세대는 태어나면서부터 인터넷과 친숙해진 상태에서 청소년기에 스마트폰을 만났다. 그러나 지금은 M세대도 모바일 환경에 매우 익숙하다. 뿐만 아니라 그 경향은 전 세대로 확산되고 있다. 따라서 “10대 아이돌부터 40대 부모까지”를 MZ세대라 한다고 해서 크게 잘못된 것은 없다. 60대 이상 연령대에서는 아직까지 인쇄 미디어를 고수하고 있기는 하지만, 대세에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다. 모바일 스마트 미디어는 사람들의 사고와 행동과 인간관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호모 사피엔스가 첨단의 전자 미디어에 최적화되어가는 현실을 감안하여 ‘호모 일렉트리쿠스’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생각한 것이다.
발랄한 활약으로 언론동네 틈새 파고든 유튜버 등 ‘크리에이터’들, 놀랍다. 거칠 것 없이 제 하고 싶은 말 다 동영상에 눅여 인터넷 선반에 얹으면 신문 방송 부러울 것 없다. 황당한 ‘소리’도 하고, 일부는 돈도 잘 번단다. 언론사들도 아예 이런 세태 따라 한다. 고고학과 골동품의 세계에는 광적(狂的)인 마니아가 많다. 재미있는 분야이니 응당 크리에이터들도 많겠고, 그중엔 ‘고인돌유튜버’들 활동도 만만치 않다고 한다. 고인돌 관련 크리에이터들 사이에서 ‘지석묘가 일제 때 건너온 일본말이니 쓰지 말자.’는 얘기가 근자에 있었던가 보다. 왜색(倭色), 일본풍(風) 지우자는 갸륵한 뜻으로 이를 받아들인 동조자도 꽤 된다고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 근거 없는 낭설(浪說)이다. 일본에서도 고인돌을 지석묘라고 한다. 중국에서도 그렇다. 과문(寡聞)한 탓일지 모르나 일본말에서 支石墓라 하니, 우리는 순우리말인 ‘고인돌’을 써야 할 것이란 정도의 논리로 보인다. 일본서 젓가락으로 밥 먹으니 우리는 젓가락 쓰지 말자는 것인가? 10여 년 전 인터넷 공간에, ‘바다의 순우리말이 아라’라는 밑도 끝도 없는 말이 퍼져 한동안 유행했던 경우와도 흡사하다. 아라뱃길 아라온호(號) 아라바다 아라카페 따위 희한한 몰지성(沒知性)의 그 ‘상처’는 아직 공사(公私) 공간의 여기저기에 남아있다. 支石墓는 일제 때보다 훨씬 이전의 우리 문헌에 기록이 있다. 고려의 문호(文豪) 이규보가 1200년에 남긴 글이다. 사학계는 이를 ‘우리나라 지석묘 최초의 기록’으로 본다. 그 유튜버들은 이를 몰랐을 것이다. 논란 끝! “다음날 금마군(金馬郡)으로 향하려 할 때, 소위 지석(支石)이란 것을 구경했다. 민간에 전하기로 이는 옛 성인(聖人)이 고인 것이라 하는데, 과연 기적(奇迹·기이한 유적)으로 이상한 점이 있었다.” (明日將向金馬郡 求所謂支石者觀之 支石者 俗傳古聖人所支 果有奇迹之異常者) 이규보 문집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과 조선 때 우리나라 명문장 모은 ‘동문선(東文選)’의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가 원전(原典), 금마는 미륵사(지) 있는 익산 부근 지명이다. 지금 한글인 훈민정음을 세종대왕이 반포(頒布)하기 전, 선조들이 ‘고인돌’이라는 물체를 문서에 적을 때 어떤 방법을 썼을까? 古人乭(고인돌), 이런 식으로 적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뜻 지닌 한자를 써서 ‘지석’, 또 묘지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당시 금석학(金石學)의 통찰에 따라 支石墓라고 적었을 것이다. 역사의 기록에 엄연한 것이다. 서양에서 돌멘(dolmen)이라고 부르는 물체를 우리는 ‘고인돌’이라고도, ‘지석묘’라고도 불렀다. 한글 이전, 이를 적을 때는 支石墓라고 썼다. 언어는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 그 변전(變轉) 오묘하다. 그러나 여러 ‘썰’ 난무해도, 아닌 건 결코 아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