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광고를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티브이와 잡지와 온라인에서 네온사인처럼 번쩍이는 메시지들. 그 현란한 세 치 혀에 설득되어 필요도 없는 물건에 돈을 쓸 것 같은 막연한 불안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런 취급을 받아도 싸기는 하다. 멀쩡히 잘 사용하던 기존제품에 싫증을 느끼게 만들고 새 물건을 구입하도록 부추기는 일종의 요물이니까. 밤을 낮 삼아 아이디어 짜내는 광고인들이 이런 평가를 들으면 억울할지 모른다. 하지만 광고사에 아로새겨진 업보가 분명하다. 특히 2차 산업혁명이 증기기관차처럼 질주하던 19세기 중엽 이후가 그랬다. 미국과 유럽의 광고산업 규모가 커지고 광고가 일상생활에 미치는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사회적 부작용이 심화되기 시작했다. 허위와 과장을 써서라도 물건만 팔고 보자는 판매지상주의가 도를 넘은 것이다. 이 같은 흐름이 광고에 대한 광범위한 불신을 불러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예를 들어 1850년대 미국 대중신문은 수익의 3분의 1 이상을 광고수익으로 벌어들였다. 이런 재정적 기여에도 불구하고 광고는 신문발행인들에게조차 일종의 ‘필요악(必要惡)’ 취급을 받았다. 광고의 이러한 처지는 순수 예술과 명백한 대조를 이루는 것이었다. 음악, 미술, 문학 등은 오랫동안 문화적 귀족의 반열에 오른 존재였다. 반면에 광고는 저 높은 무대를 향해 경배를 드리는 하층민에 불과했다. 그만큼 광고와 예술의 간격은 동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2. 19세기 말이 되자 사건 하나가 벌어진다. 광고가 순수 예술과 처음으로 관계를 맺은 것이다. 빅토리아조(朝) 라파엘 전파(前派)를 대표하는 최고의 화가 존 에버렛 밀레 경. 당시 영국 최대의 광고주 피어스 비누가 그의 회화작품을 광고에 사용한 것이다. <그림 1>이 밀레가 그린 원본이다. 나무 둥치에 앉은 금발의 미소년이 눈을 들어 비누거품을 바라보고 있다. 이 작품은 1886년 ‘아이의 세계(A Child 's World)’라는 제목으로 처음 발표되었다. 밀레는 (훗날 해군제독이 되는) 자기 손자를 모델로 한 그림을 윌리엄 잉그램에게 팔았다. 신문사 경영주였던 잉그램은 이듬해 크리스마스를 맞아 밀레의 작품을 자기 신문에 전면화보로 실었다. 이 시기 영국인들은 크리스마스 시즌 신문에 실린 멋진 그림을 오려내어 액자 형태로 벽에 거는 걸 좋아했다. 거품(Bubble)이라 이름을 바꾼 밀레의 그림을 게재한 신문은 공전의 히트를 쳤다. 충분한 효과를 본 잉그램은 2,200파운드를 받고 작품을 다시 피어스 비누회사 소유주 토마스 배럿에게 판매한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발생했다. 장사의 귀재로 불리던 배럿이 이 그림을 광고로 만들어버린 것이다(그림 2). 순수 회화를 천박하기 짝이 없는 광고에 사용한 이 행위는 사람들을 격분시켰다. 당시로는 감히 상상할 수 없던 금기를 깨트렸기 때문이다. 두 그림을 한번 찬찬히 비교해 보시라. 별달리 고친 게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다만 원본의 위쪽, 비누거품 좌우로 ‘피어스 비누(Pear’s soap)’라는 상표명을 추가했을 뿐이다. 그리고 아이의 왼쪽 신발 아래 (거무스레한 색깔의) 비누를 살짝 배치했다. 토마스 배럿은 막대한 광고비를 투자하여 영국의 모든 일간지에 전면 광고를 노출시킨다. 순수 예술과 상업 광고를 결합시킨 이 최초의 사건은 대중들의 폭발적 주목을 끌었다. 피어스 비누가 경이적 판매고를 달성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곤경에 빠진 것은 원작자 밀레였다. 왕립학술원 회장까지 지낸 이 초일류 화가는 고귀한 예술혼을 돈 몇 푼에 팔아먹었다는 조소와 비난을 뒤집어쓴다. 자기 그림을 광고에 쓰겠다는 말을 전해들은 들은 밀레는 (물론) 격렬히 반대했다. 그러나 거액의 돈을 지불하고 소유권을 사들인 바렛의 시도를 막지 못했다. 에버렛 밀레는 1896년에 세상을 떠난다. 하지만 그가 죽고 난 후에도 오랫동안 영국의 유명 신문들에는 밀레의 ‘부도덕한’ 행위에 분노하는 독자 투고가 쏟아져 들어왔다. 3.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배리 호프먼은 예술과 광고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근대 광고의 탄생 이래 둘 사이에는 깊고도 넓은 경계선이 그어져 있었다는 거다. 예술은 삶의 진실을 관통하는 최고급 창조의 소산이었다. 그에 반해 광고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물건만 팔아치우면 된다는 조잡하고 부정직한 행위였다. 하지만 광고를 바라보는 세상의 눈에 서서히 변화가 일어난다. 산업 자본주의 난숙(爛熟)에 따라 광고와 순수 예술의 엄격한 경계가 무너진 것이다. 미학자 볼프강 하우크는 자신의 책 ‘상품미학비판’에서 그 이유를 다음처럼 설명한다. 자본주의라는 괴물의 무제한적 식욕이 상업적 파괴력을 얻기 위해 순수 예술의 대중적 공감능력을 무서운 속도로 흡수했기 때문이라고. 이 같은 과정을 통해 대중 사회에서 차지하는 광고의 위상이 자연스레 높아진 것이다. 수준급의 회화 작품이 광고에 활용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에 들어오면서부터였다. 이 흐름을 선도한 것은 프랑스와 스위스 등의 유럽이었다. 스위스의 고기통조림 회사 '율리우스 매기 앤 시에(Julius Maggi & Cie)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1911년 이 회사는 이탈리아의 석판화 대가 레오네또 까삐엘로를 초빙해서 광고포스터를 만든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빨간색 정육각형 패키지의) 통조림 '쿠브(Kub)' 포스터는 유럽 예술계에 일대 충격파를 던진다. 아래에 “K에게 물어보세요(Exiger le K : Ask the K)"라는 독일어 슬로건이 쓰인 까삐엘로의 작품이 있다. 이 포스터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증거는 파블로 피카소다. 그가 대상물을 기본적 입체 형태를 전환시켜 재창조하는 입체파의 대가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1912년에 그린 ‘바이올린과 포도(violon et raisins)’가 유명하다. 같은 해 화가는 입체파 작품을 하나 더 그린다. ‘포스터가 있는 풍경(Paysage aux affiches)’이다. (그림 4). 그런데 이 작품에는 매우 희귀한 형상이 포착되어 있다. 광고를 자세히 살펴보시라. 화면 왼쪽 아래에 정육각형 입체로 묘사된 선화가 하나 보일 거다. 그 안에 무슨 글씨가 적혀있는가? ‘Kub’다. 즉 당시 판매되던 ’쿠브' 통조림의 패키지를 그려 넣은 게다. 천하의 피카소까지도 자기 작품에서 특정 제품 브랜드를 소재로 삼은 것이다. 조금 믿기는 어렵지만, 광고역사가 핀카스는, 심지어 피카소가 참여한 큐비즘(Cubism)이란 명칭이 통조림 쿠브(Kub)와 연관이 있을 거라는 주장까지 내놓고 있다. 4. 광고와 순수 예술이 경계선을 허물고 본격적으로 결합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싹을 틔운 팝아트(pop art)가 일등 중매쟁이 역할을 한다. 이 새로운 대중예술(popular art)은 하위문화인 만화, TV콘텐츠, 영화포스터 그리고 광고 디자인을 적극적으로 도입해서 변형시켰다. ‘작은 금발 폭탄(That little blonde bomber)’이라 불린 메리 웰스 로렌스가 광고에 음악, 패션, 팝아트를 접목시킨 대표적 크리에이터였다. 광고와 예술의 밀월은, 오일쇼크가 세계를 지배한 1970년대에는 조금 잠잠했다. 그러다가 1980년대가 시작되면서 예술계를 선도하던 유명 팝아티스트들이 대거 광고와 관계를 맺는다. 이들이 광고에서 예술적 이미지를 빈번히 차용한 것은, 광고야말로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본질을 보여주는 가장 이상적인 소재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광고를 작품 속에 도입하거나 한발 더 나아가 광고제작에 직접 참여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 작업을 통해 예술이란 존재가 일상적 삶과 동떨어진 곳에 고고하게 존재하는 범접불가 영역이 아님을 폭로하려 한 것이다. 대표적 사례가 앤디 워홀과 키스 해링의 압솔루트(Absolut) 캠페인이다. 투명한 유리병의 이 스웨덴 산 보드카가 미국에 첫 수출된 것은 1981년이었다. 4년이 흐른 후 보드카 수입회사 CEO 미셀 루가 자기 친구이자 초절정의 인기 팝 아티스트 앤디 워홀을 부른다. 광고에 사용할 압솔루트 병을 좀 그려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워홀은 6만 5천 달러를 받고 광고 그림을 만든다. 그리고 이 작품이 세상을 뒤흔들게 된다. 워홀로부터 시작된 예술가들과의 공동작업은 갈수록 범위를 넓혀갔다. 전설적 그래피티(Graffiti) 미술가 키스 해링이 만든 압솔루트 캠페인(그림 6)은 광고의 예술적 성취를 대표하는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1990년 서른 두 살의 나이에 요절한 그는 일생동안 인종차별과 동성애 박해에 대하여 저항한 사회 운동가였다. 전통 예술의 귀족주의를 무너뜨리고 일반인들도 예술을 즐기고 누려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그러한 귀결이 광고제작 직접 참여였다. 흥미로운 것은 해링이 만든 압솔루트 광고 시리즈가 대중에 공개된 것은 그가 에이즈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난 후였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숨은 스토리가 더욱 화제를 끌고 압솔루트의 인기를 상승시켰다. 5.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광고와 예술의 관계는 최고 수준으로 격상된다. 광고가 오히려 예술을 도구화시키면서 대중문화를 선도하는 위상을 차지한 것이다. 그토록 오랫동안 대중의 천시를 받던 광고가 거꾸로 대중문화에 영감을 부여하면서 유행과 패러디를 이끄는 진원지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1992년 발표된 화가 조지 로드리그(George Rodrigue)의 ‘푸른 개(blue dog)’ 시리즈가 상징적이다. 광고주는 역시 압솔루트 보드카. 로드리그는 자신의 광고 일러스트레이션에 늘 ‘푸른색 개’를 등장시켰다. 이 작업을 통해 광고와 예술의 독특한 혼종(hybrid)을 탄생시킨다. 그는 자기가 만든 광고를 회화의 자격으로 갤러리에 전시했다. 이 전시 이벤트는 광고와 예술의 경계를 완전히 무너뜨리며 당대 미술계의 화제를 집중시켰다. 글을 마치려 하니, 문득 다시 19세기가 떠오른다. 온갖 수모 끝에 세상을 떠난 존 에버렛 밀레 말이다. 그의 사후 소설가 메리 코렐리는 자기 작품 주인공의 입을 빌려 이렇게 화가를 비난했다. “나는 밀레가 피어스 비누의 거품을 부는 작은 녹색 소년을 그릴 정도로 스스로를 타락시킨 순간, 예술가로서 명성이 돌이킬 수 없이 망가졌다고 확신해. 어떻게 광고에 예술을 팔아먹을 수 있어?” 상상을 해본다. 광고에 대한 멸시와 폄하가 일상적이던 그 시절 사람들이 오늘날 광고가 예술과 맺은 관계를 보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자기도 모르게 입을 딱 벌릴 게다. 두 장르가 유전자 결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자유로이 쌍방을 넘나들고 있기 때문이다. 광고와 예술이 펼치는 화려하고 성대한 결혼식이 일 년 내내, 사시사철 벌어지고 있다. 그야말로 상전벽해의 시대가 온 것이다.
내년 4·10 총선을 앞두고 국회가 30일 현역의원 전원이 참석하는 전원위원회를 가동하며 ‘선거제 개편’ 움직임에 본격 나섰다. 전원위는 모든 국회 의원들의 의견을 수렴해 법정시한인 4월 중에 여야 합의로 단일한 수정안을 처리한다는 계획이다. 그동안 정치개혁특위를 통해 3개안이 마련돼 있다. 1안은 도농복합식 중대선거구제와 권역별·병립형 비례대표제, 2안은 개방명부식 대선거구제와 전국·병립형 비례대표제, 3안은 현행 소선거구제를 유지하되 권역별·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하는 방안이다. 그러나 여야와 국회의원 개인별로 이해관계가 얽혀있어 과연 합의를 이뤄낼지 회의적인 시각이 많은 게 사실이다. 승자독식 방지 등의 명분을 내세우며 김진표 국회의장이 시동을 건 선거제 개편은 시작 단계부터 국회의원 증원 방안이 여론의 거센 비..
2022년 11월 30일은 역사적인 날이 되었다. 이날 공개된 인공지능 채팅로봇인 쳇지피티는 바로 인간의 일상과 인간관계, 산업구조를 근본적으로 뒤바꿀 게임체인저로 등극했다. 출시된 지 단 두 달 만에 쳇지피티의 월 사용자수 1억을 돌파했다. 쳇지피티가 가장 먼저 판을 뒤흔들어놓고 있는 분야는 아이러니하게도 기술로 대체할 수 없는 인간의 마지막 영역으로 여겼던 예술분야다. 화가와 음악가들은 경악하고 있다. 이미 AI가 그린 그림이 미국의 공모전에서 1위를 차지했다. 쳇지피티를 개발한 오픈AI가 내놓은 ‘달리2’와 미드저니AI연구소가 내놓은 ‘미드저니’에 ‘일본 강제징용 피해자 양금덕 할머니를 고흐 화풍으로 그려줘’라고 요구하면 30초만에 그려준다. 음악AI에 ‘연인을 잃은 사람을 위한 슬픈 발라드풍 노래를 만들어 줘’라고 요구하면 그럴듯한 가사까지 붙인 노래를 작곡해준다. 당혹스럽기는 언어를 다루는 문예창작학과의 강의실도 다르지 않다. 학생들은 쳇지피티라는 이 낯선 경쟁자가 어디까지 자신의 미래를 위협하게 될지 짐작하지 못한다. 교수들은 당장 학생들이 제출한 작품의 어디서 얼마까지를 쳇지피티가 써준 것인지 알기 어렵다. 문학이 직면한 당혹스러움은 쳇지피티가 인간 고유의 문자언어를 기반으로 한 기술이기 때문이다. 언어는 다른 동물과 인간을 구별해주는 특별한 능력이었다. 인간은 언어로 역사를 갱신해왔다. 언어로 만든 신화와 전설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했고, 언어로 정한 법률로 질서를 유지하고, 언어로 과학과 기술을 개발하고 전승해왔다. 그런데 순식간에 세계의 수많은 언어를 모두 학습하고 사용하는 쳇지피티가 출현했다. 며칠 전에 내가 몸담은 학교에서 쳇지피티 특강을 연다는 공지가 떴다. 소설전공 학생들과 같이 들으려고 바로 신청했는데 어느새 마감이었다. 대형 강의실로 바꾸고 추가신청을 받는다고 했는데, 이번에도 공지가 뜨자마자 마감이었다. 쳇지피가 몰고 올 변화는 우리가 어떤 상상을 하던 상상 그 이상일 것이 분명하다. 지금의 교육체계와 인간의 일상을 바꾸는 근본적인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다. 인류의 문명을 창조하고 발전시켜온 언어의 새로운 사용자의 출현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다. 언어가 인간에게 주어진 영혼의 집이라고 하는 말이 더는 유효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런데 세계가 새로운 언어사용자의 출현에 긴장하는 지금, 우리 대한민국의 언어 현실은 어떤가. 온갖 무논리와 혐오로 가득한 언어들이 크고 작은 언론을 도배한다. 가장 역동적인 청년들의 나라였던 한국의 젊은이들은 주춤거리고만 있다. 반면에 지나간 역동의 시대를 다 살아낸 노인들은 30년, 40년 전에나 통했던 비이성적인 언어에 기대어 기득권을 움켜쥐고 내놓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스프 리플렉스』, 현직 내과의사인 소설가 김강이 쳇지피티3.5의 출시에 맞추어 내놓은 소설책의 제목이다. 그래스프 리플렉스는 신생아가 무엇이든 반사적으로 움켜쥐는 생존본능을 가리키는 의학용어다. 소설 『그래스프 리플렉스』는 모든 부를 움켜준 노인들이 노인들의 표로 권력을 획득하고 세상을 지배하는 한국의 근미래 사회를 그리고 있다. 모든 장기를 인공으로 교체한 노인들은 130세가 되도록 살며 움켜쥔 부와 권력을 내놓지 않고, 청년들은 한탄한다. - 노인들이 신 같아요. 그런 청년들에게 세상을 지배하는 노인들은 말한다. - 자네들도 언젠가 늙을 거 아닌가. 아직은 쳇지피티가 쓰지 못할 이야기를 담은 소설 『그래스프 리플렉스』를 읽으며 쳇지피 시대를 거꾸로 가는 한국사회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탐욕과 망상과 사치와 분노를 다스리는 것이 지혜의 원천이다. 만일 네가 진심으로 정욕을 극복하고자 하는데도 불구하고 때때로 정욕에 지배당할 때가 있더라도 너에게는 정욕을 이겨낼 힘이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마부가 단번에 말을 세우지 못하더라도 고삐를 내던지지 않고 계속 잡아당기면 말은 언젠가는 서게 되어 있다. 정욕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자기 자신을 이기는 자는 싸움터에서 백만 군대에 이기는 자보다 위대한 승리자이다. 모든 타인을 이기는 것보다 자신을 이기는 것이 훨씬 낫다. 타인과의 싸움은 언젠가는 질 때가 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이기는 자는 영원한 승리자로 남을 것이다. (법구경) 남을 자기 자신처럼 존경하고, 자기 자신을 이기며, 내가 원하는 것을 남에게 베푸는 것이야 말로 인애의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 이보다 더 높은 가르침은 없다. (공자) 젊은이여! 유흥이나 사치 등의 온갖 욕망의 만족을 멀리하라. 설사 온갖 욕망을 완전히 물리치겠다는 생각이 아니더라도, 뒤로 미루면 미룰수록 커지는 즐거움을 위해서라도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 그러한 관능의 향락을 절제하고 미룸으로써, 네 즐거움은 더욱더 풍성해진다. 즐거움이 수중에 있다는 의식은 그 향락에 의해 채워진 감정보다 훨씬 더 풍요로운 결실을 거둘 수 있다. 왜냐하면 즐거움은 욕망의 만족과 함께 당장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칸트) 사람의 마음속에 사는 정욕은 처음에는 거미줄 같지만, 나중에는 굵은 동아줄처럼 돼 버린다. 정욕은 처음에는 남과 같다가, 다음에는 손님처럼 되고, 마지막에는 그 집의 주인이 되어버린다. 방종은 죽음으로 가는 첫걸음이다. 이것은 집 밑을 흐르며 얼마 안 가 집의 토대를 무너뜨리는 수맥과 같다. (블래키) 나의 간절한 소망은 절대로 화를 내지 않는 것, 언제나 진실을 말하고 그 진실을 사랑함으로써 누구도 상처받지 않도록 말하는 것, 성미가 급한 사람을 인내심으로 대하는 것, 정욕에 사로잡힌 사람들 속에서 정욕으로부터 자유로운 것, 이것이 바로 나의 간절한 소망이다. (법구경) 모든 인간의 삶은 정욕의 강화가 아니라 약화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시간이 그러한 절제와 노력에 큰 힘이 되어줄 것이다. 현대에 와서 질서도 의미도 마비되고 행복의 추구만을 하는 생활을 하다 보면 인간을 한데 묶는, 그리고 만물 앞에서 스스로 영장으로 책임을 지던 그런 생각은 다 없어지고 모든 사람이 저 본위가 되어버렸다. 사실상 우리는 하나의 세계를 잃어버렸다. 그러고 보면 이 어지러움이 온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이제라도 인류가 멸망을 면하려면 가슴속에 하나의 세계를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세계의 통일성을 믿는 사상이 나와야 한다. (함석헌)/ 주요 출처 : 톨스토이 『인생이란 무엇인가』
사회주의적 도시는 계획된 도시이다. 국가는 도시를 계획하고 건설하면서 사회주의적 이념을 공간에 투영한다. 사회주의적 도시의 가장 큰 특징은 도시 중심에 광장이 있고 기념비나 동상, 문화시설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자본주의 도시와 반대로 사회주의적 도시는 금융시설이나 소비를 위한 쇼핑센터보다는 문화시설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사회주의적 도시 설계자들의 생각이다. 그럼에도 식민시기 최초의 기업도시를 만들었던 흥남은 일본인들이 이주하여 쾌적하게 살 수 있는 공간을 기획하고 건설되었다. 고급시설을 갖춘 일본인 거주지는 구역으로 나뉘어 등급에 따라 거주했다. 이를 ‘흔히 보는 도시의 모양과 다른 소련식 신흥도시였다’고 기록한다. “흥남은 20년도 안 되는 사이 흥남부(府)로 되고 인구 약 18만 명의 함남도 제1의 대도시로 되었다. 일본인 인구는 조선 전체에서 제3위이고 물동량은 하루 1만 톤에 이르렀다. 쇼와(昭和)초기부터 동양 제일의 화학공장이 생겨난 것은 대 수력 발전에 의해 풍부하고 싼 전력이 개발된 것과 더불어 일본 질소 노구치(野口)사장의 강렬한 의욕과 젊은 기술진의 총결집 나아가 개발을 지원하는 자금원이 일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공장의 부대설비로는 스스로 건설한 조선제일 병원을 비롯하여 학교 우체국 관청 사무소 경찰 집회소 대 체육관등이 있었다. 사택은 수세식 변소와 증기남방 까지 완비하는 등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공장 도시로서 종합계획 하에 건설되었다.” 해방되어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난 전쟁으로 함흥-흥남은 폐허가 되었다. 특히 흥남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전후 함흥-흥남의 공장복구에는 구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국가들이 참가했다. 공장의 복구와 신설에 소련기술자들이 참가했고, 함흥-흥남의 도시건설에 1954년부터 1962년까지 동독도시기술자들의 지원을 받았다. 당시 통역으로 참여했던 2019년 출간된 신동삼의 저서 『함흥시와 흥남시의 도시계획』에 상세히 소개되어 있다. 동독인들은 함흥의 중심거리와 일부의 살림집을 건설하고 철수했다. 김일성은 전쟁이 끝나고 함흥을 체제 선전을 위한 ‘로동계급’의 도시로 만들려고 했다. 함흥-흥남은 화학공업 중심지로 산업시설이 밀집해 있어 근로자들이 많다. 이러한 특성으로 소 도시 계획과는 예외로 대규모 화학공업 도시가 되었다. 그리고 사회주의적 도시는 1980년대 형태를 갖추었다. 1980년대 도시중심에는 대극장과 함께 광장과 기념비가 세워졌다. 도시중심에 있어야 할 김부자 동상은 동흥산 언덕(반룡산)에 위치해 있다. 함흥-흥남은 일제강점기부터 반체제 세력인 국내 공산주의자들의 거점으로 ‘지방주의’ 색채가 강한 지역이다. 해방 후 김일성은 이러한 세력과 권력을 다투어야 했던 시기도 있었다. 사회주의 화학공업도시로 계획된 함흥-흥남은 ‘고난의 행군’이라는 어려운 시기를 거쳐 현재는 물류유통의 중심지로, 해양과 대륙을 잇는 동해안의 중요한 도시로 자리잡고 있다.
‘수원형교육 지원사업’이란 게 있다. 수원시 관계자의 설명에 따르면 “학교 안팎에서 수원시 특성을 반영한 다양한 교육사업을 운영해 학생들의 학교생활을 지원하고, 창의·융합 역량을 갖춘 미래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사업이라는 것이다. 2023년 사업으로는 수원시 특색을 반영해 다양한 교육과정을 운영하는 ‘수원특례시와 함께하는 학교교육’ 지원을 비롯해, ‘1학생 1악기 뮤직스쿨’(음악학교), ‘글로벌(세계) 다문화 특성화학교’, ‘꿈이 있는 방과후 활동’, ‘수원형배움터’, ‘경기 이룸학교’, ‘친환경 아토피 특성화학교’, ‘배움터지킴이’, ‘초등학생 생존수영 강습’, ‘초등학교 돌봄교실’ 지원 등 10개다. 총 44억2870만원을 시내 초‧중‧고등학교, 특수‧평생학교 등 205개교에 지원한다. “학생들이 미래사회 주역으로 성장하..
사람 사는 일이라는 것이 변화무쌍하여 사람이 짐작하기가 어려운 법이다. 나 역시 삶에서 자유롭지 않기에 오랜 시간 동안 호구지책이었던 연구자의 길을 잠시 접어두고 공공행정이라는 업무 영역에서 일하게 되었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업무 분야를 이동하게 되니 낯설기도 하고 업무에 대한 기대도 가지게 되었다. 내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게 된 화성시는 전형적인 도·농복합도시이며 경부선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의 생활환경이 매우 다른 지역이다. 내가 일하게 된 재단에서는 이러한 지역적 격차를 해소하기 위한 교육적 방안을 찾는 곳이기도 하다. 재단에 대한 개략적 업무 파악은 연구자적 호기심을 전제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내가 가진 정체성의 한계이기도 하고 새로운 교육적 환경을 접하는 일에 대한 흥미이기도 했다. 재단에서 하는 사업은 다양했는데 나중에 기회가 되면 소개할 기회를 가지고 싶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접했던 사업인 ‘이음터’는 내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학교와 마을을 연결하는 이음터는 제법 규모가 있는 건물 형태이다. 주 출입구쪽으로는 마을의 시민이 드나들며 이음터에서 진행하는 사업에 참여하고 있으며 학교와 연결된 통로쪽으로는 학생들이 넘어와 수업을 진행하고 있었다(학교와 연결된 통로는 잠겨져 있으며 필요시 학교쪽에서만 열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곳에서 학생과 보호자가 만나 각자 다른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도 하고 함께 귀가를 하기도 한단다. 더 바람직한 일은 학교가 채워주지 못하는 시설물의 한계를 이음터가 보완해 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실내체육관, 음악실, GX실(춤을 배우는 공간), 무대 공간 등이다. 학교는 사전에 이음터에 사용 신청을 한 후 이용하고 남는 시간은 마을 주민에게 개방하는 방식이다. 시설은 깨끗했고 잘 관리되고 있었다. 이음터를 이용하는 시민의 만족도도 매우 높다고 한다. 다만 아쉬운 점은 이러한 이음터 사업이 더 확장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신설학교가 만들어지면서 교육청의 학교부지에 화성시의 재원으로 만들어지는 이음터 사업에 많은 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이며, 이음터 사업의 혜택이 통로로 연결된 학교에게만 돌아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방의 학교에서도 사용 빈도가 높아지고 있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다. 이음터는 보다 많은 학생과 시민에게 훌륭한 공간을 제공하고 좋은 교육적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것이 궁극의 목표일 것이다. 그러나 이용하는 학교가 한정되어 있고 더 많은 시민이 이용할 수 없다고 해서 이음터의 존재 이유가 희석되지는 않는다. 한 사람의 시민이라도 이음터의 이용에 만족을 느낀다면 그 존재 이유는 충분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MBC 프로그램 《PD수첩》에서 교사와 관련된 방송이 하나 송출되었다. 제목은 ‘나는 어떻게 아동학대 교사가 되었나.’ 제목처럼 아동학대범이 된 교사들의 이야기였다. 방영 직후 교사 커뮤니티가 술렁거렸다. 초반 내용을 보고 심장이 떨려서 차마 영상을 끝까지 보지 못했다는 사람이 있었고, 교사가 아동학대범이 되는 건 교통사고를 당하는 것과 비슷하게 운 나쁘면 생기는 일이 되었다는 의견도 있었다. 전반적인 분위기가 침통 그 자체였다. 파급력이 예전만 못하다지만 공중파 방송의 힘은 대단했다. 평소에 교직 관련 이야기를 나눈 적 없던 친구들이 먼저 연락해왔다. “정말 요즘 교사는 방송에 나온 것처럼 서비스 받으시는 분들 기분 나쁘면 아동학대범 되는 거야?” “응, 저것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단다.” “나는 나중에 애 낳으면 안 저럴게.” “좋은 자세다. 그 마음 잊지 않도록.” 처음으로 교사 아닌 사람들에게 진심 어린 공감을 받는 순간이었다. 가뜩이나 학교를 생각하면 힘이 빠지는 일만 잔뜩 있는 시기였다. 여기에 인터넷에 교사 관련 부정적인 이야기들이 넘실대는 걸 자꾸 보니 마음이 돌덩이를 매단 듯 무거워지며 머리가 아파졌다. 새 학기에 어린이들과 어떻게 관계 맺기를 하느냐가 1년을 좌우한다. 이대로 우울하게 학년 초를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학교에서 행복해지는 순간들을 찾아 크게 확대해서 좋은 점만 보려고 노력했더니 몸과 마음이 한결 나아졌다. 교실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은 아이들과 사랑과 친절을 나눌 때이다. 저학년 담임을 하면 예쁘고 쓸모없는 물건들이 책상에 쌓인다. 나를 캐릭터로 만들어서 그려주기도 하고, 약 봉투와 알약 모양, 캐릭터 모양의 편지지에 짧은 내용을 담아서 주기도 한다. 가끔은 달려와서 안기고, 칭찬해주면 세상 행복한 표정을 짓기도 한다. 감정을 정제하거나 숨기는 방법을 모르는 어린이들을 보면 작은 인간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새삼 깨닫는다. 역시 아이들과 함께할 때가 제일 행복하다. 또 다른 즐거움을 주는 순간들도 있다. 수업을 열심히 들으려고 눈을 반짝이는 아이들을 볼 때 신이 난다. 발표를 너무 하고 싶어서 계속 손을 들면서 팔 아파하는 모습, 문제 하나를 열중해서 바라보는 모습도 즐겁다. 아직은 교사의 말이 절대적이라고 믿고 규칙을 지키려는 마음들이 느껴질 때 힘이 난다. 또, 재밌는 수업을 계획하며 뿌듯함을 느끼고 실제 수업했을 때 아이들 반응이 좋으면 성취감을 얻는다. 생각해보면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순간들은 모든 교사들이 매일 하는 일들이다. 일상의 습관이 행복하지 않으면 회색빛 회사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채로 교단에 서야 한다. 억지로 교단에 서 있기엔 2023년의 교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교사로서 행복하려면 작고 소소한 일상 하나하나를 닦아 반짝반짝하게 바라보는 관점이 필요하다. 교직의 어두운 면만 보고 있기에는 교사를 바라보는 작고 투명한 눈들이 너무 많다. 힘을 내야 한다.
‘빚더미’에 올라앉은 한국전력공사와 한국가스공사의 방만 경영 행태가 점입가경이다. 산업통상자원부가 한국전력공사, 한전KDN의 임원이 외유성 해외 출장을 총 12차례 다녀온 사실을 적발했다. 지난해 최악의 실적을 기록한 한전과 가스공사 임직원들의 급여가 오히려 큰 폭으로 오른 사실도 입줄에 오르내리는 판이다. 민심을 자극하는 에너지 공기업들의 경영 행태는 혁신돼야 한다. 국민과 동고동락할 줄 모르는 공기업 풍토가 국익에 무슨 보탬이 되나. 지난해 1억원 이상 연봉을 받은 직원은 한국전력공사 3589명(15%), 한국가스공사 1415명(34%)이다. 한전의 경우, 지난 2018년 1752명(7.8%)에 불과했던 연봉 1억 이상 직원은 2021년 3000명 돌파를 비롯 최근 5년간 연속 증가했다. 한전의 경우, 2018년 1조952억원, 2019년 2조5950억원의 당기..
국민연금공단은 2022년 5월 제도 시행 34년 만에 ‘수급자 600만 명 시대’를 열었다. 현재 매월 수급자 622만 명에게 매월 2조 8000억 원의 연금을 적기에 정확하게 지급해 국민에게 신뢰받는 기관이 되고자 노력하고 있다. 수급자의 급속한 증가는 고령화 시대를 맞아 국민연금이 국민의 노후생활 안전망으로서의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음을 의미하나, 이런 성장의 이면에는 팍팍한 생활로 보험료 납부가 부담스러워 못 내는 분들이 아직 많다. 매월 내야 하는 보험료가 부담스러워 납부를 기피하기도 하며 소득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아 사각지대에 놓이기도 한다. 한편 지역가입자인 국민은 연금보험료 중 일부를 사업주가 내주고 있는 근로자와 달리 보험료 전부를 본인이 내고 있어 보험료 부담이 상대적으로 크다고 볼 수 있음에도 그간 지역가입자인 국민에 대한 국가의 지원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 복지당국과 공단에 형평에 대한 문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돼 왔다. 또한 사업 중단 또는 실직 등으로 연금보험료 납부예외를 신청하신 분들은 대표적인 국민연금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분들로서 소득이 발생해 보험료 납부를 재개하는 경우에도 경제적 사정상 다시 납부예외를 신청하는 경우가 빈번해 이런 분들에 대한 우선 지원이 절실했다. 이에 작년 7월부터 ‘지역가입자 보험료 지원제도’가 시행되고 있다. 그동안 영세사업장에만 적용된 보험료 지원이 지역가입자인 국민까지 확대된 것이다. 지역가입자 보험료 지원제도가 국민에게 월 최대 4만 5000원의 혜택을 드릴 수 있어 다행이다. 사업중단 또는 실직하신 분들의 보험료 부담도 최대 12개월까지 경감하게 돼, 제도 시행 6개월 만에 약 4만 명이 48억 원의 보험료를 지원받아 든든한 노후를 위해 다시 납부하고 있다. 이제 공단은 지역가입자 보험료 지원제도를 사각지대 해소의 초석으로 활용해 더 많은 국민들이 연금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하고자 한다. 가능한 모든 국민이 ‘1개월 이상’ 가입하고 가입자는 최소 ‘10년 이상’ 가입해 월 ‘100만원 이상’의 연금을 받을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해나갈 것이다. 긴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경제적 안정이 뒷받침돼야 하는데, 그 기본이 바로 국민연금이므로, 연금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겨 보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