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많이 버는 일보다 더 어려운 일이 잘 쓰는 일이다. 큰 자산을 모은 사람은 많아도 잘 쓴 사람은 많지 않다. 그냥 잘 쓰는 것을 넘어 의를 위해 잘 쓰는 일은 더욱 어렵다. 자신이 가진 재산을 줄이는 데 그치지 않고 위험을 불러들이는 일에 나서는 일이 어찌 쉽겠는가. 그래도 자신이 누리던 것을 포기하고 의를 위해 가진 것과 누리던 것을 내놓은 사람들이 없지는 않았다. 나라를 일본에 빼앗겼던 식민지 시대에도 그런 드문 의인들이 있었다. 이제 사람들에게 제법 알려진 이회영 형제가 대표적이다. 삼한갑족으로 불리던 이회영의 6형제는 막대한 재산을 모두 처분하고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이회영의 형제와 함께 신흥무관학교 설립해 수많은 독립군을 양성하고 이끌었던 안동 권문세가의 종손 이상룡도 아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이회영 형제와 이상룡..
정부가 장애인의 취업 기회를 늘리기 위해 1991년부터 시행해 온 장애인의무고용제도를 공공기관들마저 아직도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있다. 심지어는 ‘장애인고용 촉진’이 주요 업무인 한국장애인고용공단의 장애인고용률이 지난 5년 사이 반토막 났다는 어이없는 현상까지 폭로됐다. 경기도 산하 공공기관들의 행태도 다르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장애인고용 대신에 부담금으로 때우면 된다는 비뚤어진 인식부터 확실하게 개선해야 할 것이다. 경기도의 장애인 의무고용 대상 공공기관은 모두 24곳이다. 이들 중 경기도의회와 경기의료원 등 13곳이 올해 의무고용률을 채우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지난해 경기도인권센터의 조사 결과 장애인의무고용제도를 어겨 시정 권고를 받은 기관은 모두 5곳이었다. 그런데 지난해 권고를 받은 기관들 가운데 경기도의..
‘아~베`마리~~아(Ave Maria)!~’ 한국어로 번역하면 ‘안녕하세요 마리아님!’이다. 천사 가브리엘이 동정녀 마리아를 찾아와 예수를 수태한 사실을 알리며 건넨 인사라고 한다. 이를 모태로 슈베르트가 ‘아베마리아’를 작곡했고, 카치니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아름답고 손색이 없지만, 아베마리아는 역시 ‘구노의 아베마리아’가 으뜸이다. 이 곡은 천재 작곡가 샤를르 구노(Charles Gounod)가 1853년 바흐의 서곡에 가사를 넣어 만든 것이다. 듣고 있노라면 마음이 진정되고 영혼이 맑아진다. 프랑스 그랑 오페라의 가장 뛰어난 작곡가 구노. 그는 1818년 파리에서 화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다섯 살 때 돌아가셨고, 어머니가 피아노 선생을 해 생계를 유지했다. 어린 구노는 어머니께 레슨을 받는 학생들 사이에 끼어 피아노를 배웠다. 그 후 파리음악원에 들어 가 앙뚜안 레이체의 지도를 받으며 화성을 공부했고, 스무 살 때 이미 로마 대상을 받았다. 구노는 초년기 종교음악에 몰두했다. 하지만 세속적 영감으로 눈을 돌렸고 오페라를 작곡했다. 그가 첫 오페라 사포(Sapho)를 작곡한 건 1851년. 그로부터 5년 후 걸작 ‘파우스트’를 발표했다. 하지만 당시의 대중과 비평가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뒤 이어 작곡한 ‘필레몽과 보시스’, ‘시바의 여왕’도 마찬가지였다. 숱한 시련이 계속됐다. 그때 구노의 펜이자 당대 최고의 작가인 프레데릭 미스트랄이 그를 생레미드프로방스(Saint-Rémy-de-Provence)로 초대했다. 이곳에서 구노는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여기는 내가 사고하기에 안성맞춤이오. 집에는 아무도 없고 빛으로 가득 차 있소. (...) 창공은 푸르고 나의 창문은 열려 있소. 내게 들리는 건 마당에서 노는 비둘기들의 울음소리뿐.” 구노에게 심호흡을 가능하게 했던 생레미드프로방스. 노스트라다무스(Nostradamus)의 고향이다. 알필의 작은 수도로 아비뇽과 아를, 타라스코 세 도시로 휘감겨 있어 너무 아름답다. 게다가 원시의 야생들과 역사유적지가 그득하고, 소성당과 수녀원이 꾸불꾸불한 골목길을 누비고 있어 신비스럽기 그지없다. 예술가들이 영감을 얻으러 오는 곳으로 유명하다. 빈센트 반 고흐도 여기서 무한한 산책을 즐겼고 150여점의 그림을 그렸다. 그밖에 글라뉨 지역은 고대 유적지가 그대로 남아 있다. 멋진 지구의 메종 안에 있는 알필 박물관에는 이 지역의 민속학 자료가 총집합돼 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생레미 올리브오일과 자연산 포도주 보드프로방스까지. 매주 수요장터에는 이것들을 사러 오는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룬다. 전통을 보물로 여기는 이 마을에는 아직도 투우경기와 양 양떼이동 축제가 벌어지고, 말 시장과 고물시장이 열린다. 어느 것 하나 빠진 게 없는 생레미드프로방스. 완벽한 여행지가 아닐 수 없다. 만약 프로방스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이곳을 꼭 리스트에 챙겨 넣으시라고 권하고 싶다.
정치권이 극심한 혼돈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최측근으로 알려진 김용 민주연구원 부원장이 19일 긴급 체포됐고, 이와 관련해 검찰이 민주당사 내부에 있는 민주연구원에 대한 압수수색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검찰이 민주당을 압수수색하려고 하자, 민주당 의원들은 "검찰이 제1야당 당사에 압수수색을 나왔다.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무도한 행태"라며 적극 저지에 나섰다. 그런데 이런 주장은 정확한 팩트가 아니다. 2006년 노무현 정권 당시에도 당원 불법 모집 혐의와 관련해 당시 제1야당이었던 한나라당 중앙당사를 압수수색하려 한 바 있기 때문이다. 현재 민주당은 압수수색의 부당성을 주장하며 “보여주기식 수사”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첫째, 김용 부원장이 취임한 지 열흘도 지나지 않아, 김 부원장은 지금까지 총 세 차례의 회의에 참석했을 뿐이며, 당사에 머문 시간은 3시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 둘째 민주연구원 내에는 김 부원장 개인 사무실은 없고 다수가 함께 쓰는 공용 공간이 있기 때문에, 개인 소장품이나 비품도 당사 내 갖다 놓지 않았다는 점을 들고 있다. 이런 주장도 설득력은 있다. 또한, 중앙당사 압수수색에 대해 저항하는 것도 이해할 수는 있다. 2006년 당시 한나라당은 반발은 했지만, 압수수색을 받아들이는 대신, 검찰이 찾는 자료들을 보여주기는 했었다. 하지만, 야간 수색영장이 없다는 이유로 자료 압수는 거부했었다. 대신 다음 날 해당 자료를 충남 도당으로 보내 검찰이 그곳에서 그 자료들을 압수하도록 했었다. 법치 차원에서 보자면, 압수수색이란 검찰 단독의 판단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고, 사법부인 법원도 수색의 필요성을 인정해야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이를 거부하는 것은 법치를 앞장서서 구현해야 할 공당의 정당한 행위라고 보기는 힘들다. 2006년 당시 “반발 후 간접적 수사 협조”를 했던 한나라당도 잘한 것은 없고, 지금의 더불어민주당도 잘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민주당은, ▲ 당사 압수수색 시도 중단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법무부 장관의 대국민 사과 ▲이원석 검찰총장 사퇴 ▲송경호 서울중앙지검장과 강백신 반부패수사3부장 등의 문책을 요구하면서 국정감사를 거부했는데, 이런 입장도 문제는 있다. 국정감사는 입법부가 행정부를 견제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다. 이런 견제는 민생을 위해 필요하다. 그런데 민생을 외치는 민주당이 국감을 거부한다는 것은, 스스로의 주장을 부정하는 셈이 된다. 국감 거부 역시 긍정적으로 비쳐지지는 않는 것이다. 또한 이번 압수수색의 원인이 되는 김용 부원장의 체포영장을 보면, 검찰은 이 돈의 성격을 '대선자금'이라고 적시했다고 하는데, 대선 자금 의혹은 중차대한 범죄 의혹이다. 즉, 민주당이 반발한다고 해서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민주당의 입장에서는, 시련의 시기가 닥친 것인지 모른다. 자연에서만 겨울이 오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근래 북한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도발 행태를 보이고 있다. 허둥지둥 대처하는 정부 당국의 태도는 국민들의 불안을 더욱 크게 하고 있다. 대놓고 러-우크라이나 전쟁을 언급하지는 않지만 서민들의 일상의 대화에서 잠재적인 전쟁 공포심을 엿볼 수가 있다. 특단의 대책을 시급히 내놓아야 할 시점이다. 명의(名醫)는 정확한 병의 원인에 대한 진단을 가지고 처방을 한다. 지금의 한반도 상황에 대한 바른 판단을 해야 옳은 해결책이 나올 것이다. 먼저 북한을 보자.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북의 핵보유 목적이 남한 적화통일이나 경제적 지원 확보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핵이 공갈 협박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자신들의 체제 정권의 안전담보라는 사실은 북한의 일관된 주장과 핵개발을 시작한 후 이제까지의 행태에서도 알 수 있다. 우리 대통령에게 자신들의 주민 15만 명 앞에서 핵을 떠난 평화를 연설할 기회를 주는 행위, 북미수교를 간절히 소망하는 행동, 식량 등 인도적지원에 대해 비본질적 문제라고 거절하는 행태는 바로 그 증표다. 둘째로, 미국의 행태를 보자. 말로는 대화의 문이 열려 있다고, 조건 없는 대화를 하자고 북에게 제안한다. 그러나 문제는 북이 미국의 제안을 절대 신뢰하지 못하는 데에 있다. 핵 포기가 전제된 대화라는 사실을 북한이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은 굴복을 죽음으로 생각한다. 사실 미국의 입장에서는 북한 비핵화 문제가 그리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북이 굴복하면 NPT체제의 유지, 패권국으로서의 위상에 도움이 되어서 좋고, 그렇지 않고 현 상태가 유지된다면 한반도에서의 긴장을 통해 일본과 한국을 자신들의 영향권 하에 확실하게 잡아 둘 수 있어 미중갈등상황 관리에도 이롭고, 한국과 일본의 무기 수요를 증가시킬 수 있어 자국의 군산복합체 이익에 도움이 되는 그야말로 꽃놀이패를 쥐고 있는 형국이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경우는 어떤가. 핵보유, 전술핵 도입, 나토식 핵 공유 모두 현실성 없는 주장을 하거나 미국의 핵 확장억제 정책에 목숨을 거는듯하다. 그러다보니 일본을 독도 인근 연합훈련에 참여시키는데도 반대 의견을 낼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정책, 우리의 용기가 요구되는 상황이다. 북한의 안보불안을 해소해 주기 위해 먼저 남북간의 교류를 재개하고 확대발전하는 길이 거의 유일한 길이라 생각된다. 그 길로 가기 위해 북한과 대화 테이블에 앉아야 한다. 미국 의존적 정책에서 탈피하겠다는 의지와 함께 한미연합훈련의 잠정적 중단이 ‘남북기본합의서’를 탄생시켰다는 1992년의 경험을 되살리고, 2018년의 평양공동선언의 실질적 이행을 약속하면서, 싱가포르 북미공동선언이 이행되도록 미국을 설득하겠다는 약속을 한다면 북한도 흔쾌히 받아 드릴 것이다. 북한의 도발에 초점을 두지 말고 도발의 원인을 제공한 우리와 미국의 행동을 돌아보아야 한다. 제재만으로는 이 난국에서 벗어날 수 없음은 이제까지의 경험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대화만이 살 길이다.
“경기도지사와 출자‧출연 기관 등 산하기관장의 임기가 일치돼야 한다” 경기도의회가 경기도지사와 산하기관장의 임기를 일치시키는 조례안을 추진 중이다. 지난 17일 경기도의회 문병근(국힘‧수원11) 의원은 이런 내용이 담긴 ‘경기도 정책보좌공무원, 출자·출연 기관장 및 임원의 임기에 관한 특별 조례안’을 입법예고했다.(본보 18일자 2면) 조례안은 11월부터 12월까지 열리는 제365회 정례회에서 통과될 경우 경기도에 전달된다. 도지사가 이를 공표하면 도 산하 27개 공공기관장과 임원은 도지사와 함께 임기를 끝내야 한다. “산하기관장과 임원의 임기를 도지사 임기와 일치시킴으로써 인사 폐해를 해소하고 불필요한 소모적 논쟁을 원천적으로 차단해 원활한 도정 운영을 도모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조례안을 추진 중인 문의원의 설명이다. 같은..
한 곡의 음악이 여행을 부르기도 한다. 기타곡,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 그 예다. 스페인을 처음 여행했을 때 3박 4일의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남단 도시 그라나다까지 간 것은 그 연주곡의 탄생지를 직접 딛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곡을 만든 전설적인 기타리스트, 프란시스코 타레가(Francisco Tarrega 1852-1909)의 작곡 배경을 들으면 음악이 더 사무친다. 타레가는 음악을 배운 제자, 콘차 부인을 사랑하게 된다. 유부녀였기에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다. 고백조차 못한 상처를 품고 여행길에 오른 타레가는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에 이른다. 사랑에 빠지면 아름다운 모든 것은 임을 떠올리게 한다. 어둠 내린 알함브라 궁전 위에 뜬 달을 바라보다, 콘차 부인을 생각한 타레가. 그 풍경이 가락을 만들어냈고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탄생시킨다. 사연을 알고 들으면 옥구슬 굴리는 듯한 트레몰로(Tremolo)멜로디가 타레가의 눈에서 끊임없이 떨어지는 눈물방울을 표현한 듯 느껴진다. 타레가의 작품과 연주는 19세기까지 별 볼일 없는 악기였던 기타의 황금시대를 열었는데, 그 중심에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 있다. 알함브라 궁전은 스페인 영욕의 역사를 상징하는 건물 중 하나다. 기원전 13세기 이후, 페니키아인, 그리스인,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인에 이어 로마인의 땅이 된 이베리아 반도는 기원 후 5세기에는 게르만족 일파인 서고트족에 점령된다. 711년, 북부 아프리카의 무어족, 우마이야 왕조가 바다를 건너 침탈, 서고트 왕국을 무너뜨리고 이슬람 왕국을 세운다. 이슬람 세력에 의해 북쪽 끝으로 쫓겨간 이베리아 반도의 주민들은 기독교 깃발을 꽂은 작은 왕국들을 건설, 길고 긴 국토회복 전쟁을 시작한다. 이를 레콩키스타(Reconquista)라 한다. 800년 가까이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했던 이슬람 세력은 13세기 초반, 북쪽에서 힘을 키워온 기독교 연합군에게 대패하고, 14세기 초반, 최남단의 그라나다 왕국만 남기고 쫓겨난다. 알함브라 궁전은 그라나다의 술탄 무함마드 1세가 1238년, 수도를 건설하기 시작, 100여 년간에 거쳐 형성한 곳이다. 1492년, 스페인 연합왕국은 그라나다 왕국마저 멸망시켜 레콩키스타를 완성한다. 레콩키스타 이후, 스페인의 피바람 나는 역사가 시작된다. 자국 내에서는 종교 재판소를 만들어 이슬람, 유대인 등을 박해했고, 나라 밖에서는 아메리카 대륙을 침략, 원주민들을 대거 살상하며 식민지화한다. (1492년, 이사벨 1세 여왕의 후원을 받은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침략이 시작이었다 ) 막대한 아메리카 식민지에 네덜란드, 포르투칼 등을 점령, 16세기 들어서 초강대국이 된 스페인의 내리막은 1588년, 영국과의 전쟁, 1618년의 30년 종교전쟁 참전 등, 잦은 전쟁으로 인한 것이었다. 설상가상, 아메리카 각지의 독립운동으로 돈줄이었던 식민지를 상실해 가던 와중, 1898년 쿠바 독립을 둘러싼 미국과의 전쟁에서 완패, 결국 영국보다 먼저 ‘해가지지 않는 나라’ 였던 스페인의 시대는 저문다. 세계 양차 대전에 참전하지 않아 전쟁의 참화는 피했지만,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의 쿠데타에 의한 약 3년간의 스페인 내전, 이후 38년간의 프랑코 독재정권 시대 등 참혹한 시절을 겪어야 했다. 민주화가 이루어진 것은 프랑코의 사망 후, 그 뒤를 이은 후안 카를로스 1세 왕이 입헌군주제를 확립하는 신헌법을 받아들이면서다. 전쟁과 식민, 독재, 식민지 학살 등으로 피비린내 나는 스페인의 역사를 알고 나면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 타레가의 사랑음악으로만 들리지 않는다. (인터넷 창에서 www. 월드뮤직. com을 치면 소개된 음악을 유튜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연일 언론에서 보도되는 가정폭력의 실상은 참으로 안타까움을 금치 못한 일이다. 혈육관계 등으로 형성된 배우자(사실상 혼인관계에 있는 사람 포함), 자기 또는 직계 존비속, 계부모의 자녀관계, 적모(嫡母)와 서자(庶子) 등 가족 구성원 사이에 발생하는 신체적, 정신적 폭행. 상해가 이루어지는 행위를 말한다. 그간 필자가 경험했던 가정폭력 현장의 유형을 보면, 음주상태에서 흉기(칼)를 소자하여 가족들을 위험하므로, 이를 본 자녀들은 극한 공포심과 트라우마를 겪고 아들이 노모에게 금전 등을 요구하는데 주지 않는다고 가정 내 물건을 부수며 폭력행위, 이혼 후 사실혼 관계로 같이 거주하며 상호 폭행, 다문화 가정의 남편이 부인을 반복적으로 폭행하는 행위, 재혼한 가정의 남편이 부인과 자녀 간의 갈등으로 폭행, 이혼한 전 남편이 재 결합을 요구하며 부인..
“나는 남의 민족에게 식민지화되고 노예가 되었던 민족은, 그 상태에서 벗어나는 순간에 「부정을 부정」하는 전민족적 작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환시대의 논리』와 함께 1970년대 한국사회에 충격을 주었던 리영희 선생의 저서 『우상과 이성』에 수록된 ‘다나까 망언(妄言)에 생각한다’(1978)에 나오는 핵심적인 구절이다. 일본은 우리의 역사와 언어, 심지어 우리의 민족적 자질과 경험을 그들보다 열등한 것으로 만들고 가르침으로써 우리 민족을 부정했다. 그렇다면 해방 후에는 그 부정을 부정함으로써 노예에서 주인이 된 자아를 긍정해야 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고, 그 결과가 다나까 일본 수상의 “일본의 한국 통치 교육이 한국인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망언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일제시대 교육을 받은 정관계, 재계, 교육계 등의 인사들은 일본인들과의 회합에서 유창한 일본어로 대화하며 친선을 도모한다. 부정을 부정하기는커녕 노예근성이 내재화된 모습이다. 한일협정 회담 당시 식민정책을 합리화했던 구보다 망언 이후 일본 관료들의 망언은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그 사람들도 나쁘지만, 우리 내면의 자세도 살펴보자는 것이 선생의 뜻이었다. 같은 책에 수록된 ‘광복 32주년의 반성’(1977)도 같은 취지의 내용이다. 그 후로 45년, 광복 77년이 지난 지금은 반성을 토대로 ‘주인이 된 자아’를 회복하고 ‘부정의 부정’이 이루어졌을까? 그동안 정부 차원에서 ‘역사 바로 세우기’도 있었지만, 그 작업을 뒤집는 역주행도 있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사무처장을 맡았던 정운현은 지난 대선에서 윤석열 후보를 지지했다. 일본은 조선과 전쟁을 한 적이 없고, 내부의 자멸로 식민지가 되었을 뿐이라고 주장하는 여당 대표의 발언도 있었다. 일본의 정치인들이 한국을 얕잡아보는 작태는 지금도 여전하다. 아베는 말할 것도 없고, 지금의 기시다 수상까지 대한민국 대통령을 말로나 행동으로나 제대로 대우해준 적이 없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배경은 일본 국민들의 반한(反韓) 정서에 있다. 왜곡된 역사교육의 영향이다.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언사를 내뱉을수록 추앙을 받고 표가 되게 만들어놓은 것이다. 최근 동해에서 한미일 합동군사훈련이 있었다. 미국의 핵항모가 참여한 대규모의 군사훈련이었다. 통상적인 한미훈련에 일본이 참여한 것에 대한 각성이 없다면, 아직까지 내부적으로 부정의 부정이 되어 있지 않다는 증거다. 미국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는 부정의 부정이 필요하다. 친일파 못지않게 정신적인 미국인들이 적지 않다. 한미일 합동군사훈련에 대해 남한은 아무런 문제의식이 없고, 북한은 미사일을 쏘고 9·19 합의를 무력화시키는 수준의 전투 훈련을 했다. 북한의 핵무장은 이제 선제타격은 물론이고 미국의 핵우산도 대책이 되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 마당에 전술핵 배치 타령이라니. 잘못된 역사에 대한 '부정의 부정‘은 여전한 과제다.
역사란 무엇인가. 영국의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Edward Hallet Carr)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언명하였다. 그저 시간이 흘러 역사가 되는 것이 아니고, 사건이나 인물이 현재와 미래 관점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끊임없이 탐구하고 커뮤니케이션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최근 독도 인근에서 일본과의 해상 훈련이 여론의 관심되면서 이 훈련이 ‘한반도에 욱일기 휘날릴 우려’라는 행태로 비판을 받자 한 정치인이 일본은 조선과 전쟁을 한 적이 없고 조선은 내부에서 썩어서 무너졌다고 발언하여 논란이 되었다. 식민사관을 여실히 드러낸 것이라는 비판이 이어졌다. 조선이 무능하고 부패하여 내부적으로 붕괴된 것이며, 일본과의 전쟁을 통해 패망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조선의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일본의 식민사관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조선이 내부적으로 무너지는 상황이라면 힘에 의한 일본의 한반도 침탈은 정당화되는 것인가. 이 같은 식민사관적 발언에서 역사의식의 부재(不在)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일제의 강점으로 국권을 잃은 나라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핍박받고 피눈물을 흘렸는가. 상해로 하얼빈으로 또 만주벌판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떠날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애국지사들은 또 얼마나 많았는가. 얼마 전 일제가 90년 전에 끊어놓았던 서울의 종묘와 창경궁을 잇는 사잇길을 12년 공사 끝에 다시 복원했다고 한다. 창경궁, 창덕궁과 함께 하나의 숲으로 이어진 공간이었지만, 일제가 광화문에서 창덕궁 돈화문을 지나 서울대병원으로 연결하는 종묘관통도로(율곡로)를 내면서 그동안 쪼개진 공간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종묘와 창경궁의 연결을 차단한 배경에는 풍수적 견해를 참고할 수 있겠다. 창경궁에서 종묘로 흘러가는 북한산의 주맥을 차단하려는 일제의 의도가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것이다. 종묘는 조선조 역사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장소이고 공간이기 때문이다. 건축학적으로도 전통 건축의 의미가 깊은 곳이다. 일제가 냈던 이 도로는 지하로 만들면서 90년간 끊어졌던 하나의 공간을 연결한 것은 단순한 이어짐을 넘어서 역사복원의 의미가 있겠다. 우리는 역사적 사건과 인물, 장소와 공간을 그저 시간의 과거에 머물게 해서는 안 된다. 역사를 망각한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고 한다. 역사적 공간과 장소, 건축은 우리가 과거와 대화하는 미디어이다. ‘끊어진 것’을 다시 ‘연결’하고 역사와 커뮤니케이션해야 한다. 식민사관적 발언을 접하면서 끊어짐에서 연결을 회복한 종묘와 창경궁 연결 사잇길을 걸으면서 과거와 현재의 대화를 나누어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