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하면 어떤 단어가 떠오르는가? ‘1950년, 남침, 피난, 인천상륙작전, 휴전’ 등의 명시적이고 역사적인 사실 중심의 단어들이 먼저 떠오를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소년병, 전쟁고아, 객사, 전사자’ 등 전쟁의 참상을 보여주는 단어들을 덧입혀 생각해보자. 14세~17세라는 어린 나이에 강제 징집되어 전쟁 트라우마에 시달리게 된 소년병들, 폭격으로 폐허가 된 집주변을 서성거리며 울부짖는 부모 잃은 아이들, 3여년 간의 긴 전쟁 기간 동안 굶주림과 추위에 몸부림치다 객사한 피난민들, 전쟁터에서 피흘리며 쓰러져간 누군가의 아버지며 형제이며 자녀였을 17만 여명의 전사자들이 바로 그곳에 있었다. 이렇듯 6·25전쟁은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일어난 전쟁’과 같이 객관적 사실의 열거만으로 풀어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는, 우리 민족의 참혹한 비극이 점철된 역사적 사건이다. 2020년 6월 오늘은 6·25전쟁 발발 이후 70년이라는 긴 시간이 흐른 시점이지만, 우리 민족이라면 누구나 위와 같은 전쟁의 단상을 이야기나 글로만 전해 들어도 가슴 한 켠이 아려올 것이다. 그런데 그 시절, 그 아픔의 기억을 고스란히 갖고 계신 참전유공자분들이 아직도 생존해 계신다. 이처럼 소중한 보훈의 시간과 기회가 어디에 있을까? 그 분들의 용기와 투혼, 사명감은 더욱 존경받아야 마땅하며, 그에 따른 합당한 예우와 보상이 뒷받침되어야 할 것이다. 국가보훈처에서는 2020년 6월, 6·25전쟁 70주년을 맞아 뜻 깊은 행사를 진행한다. 참전유공자의 희생과 헌신에 감사하는 의미로 은화 모양의 감사 메달을 참전유공자 8만 4천여 명에게 수여하고, 전사자 17만 5천801명(국군 13만 7천899명, 유엔군 3만 7천902명)을 기억하기 위한 ‘호국 영웅 다시 부르기’ 온라인 롤콜(roll-call) 캠페인을 진행한다. 아울러 경기북부보훈지청에서는 ‘625, 70’이라는 숫자의 상징성을 담아 달리는 온라인 마라톤 이벤트, 스마트폰 배경화면을 통해 6·25를 기억하게 하는 나라사랑 스케치 앱 출시, 유명 유튜버와 함께하는 6·25전쟁 70주년 알리기 행사 등을 통해 6·25전쟁을 널리 알리고 유공자분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표하고자 한다. 올해는 6·25전쟁 70주년 외에 일제시대 나라의 독립을 위해 봉기한 역사적인 전투, 봉오동·청산리 전투 전승 100주년을 맞는 해 이기도 하다. 또 4·19혁명 60주년, 5·18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은 뜻 깊은 해이다. 나라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고 기꺼이 하나뿐인 생명을 던져 희생한 그 분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자유 대한민국이 있다. 독립·호국·민주로 이어지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를 되새기는 한편, 국가유공자분들의 희생과 헌신을 존경하고 본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자.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한 번은 들어봤을 ‘우리의 소원’이라는 제목의 노래다. ‘우리의 소원’은 몇 차례의 개사를 겪었는데, 여기에는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담겨있다. 일제 강점기 삽화가, 만화가, 문학가, 영화 각본가 겸 영화감독으로 활동했던 안석영(본명 안석주)이 그의 아들인 작곡가 안병원의 곡에 글을 써준 것이 ‘우리의 소원’이다. ‘우리의 소원’은 1947년 3월 1일 한국방송의 삼일절 특집 라디오 드라마의 주제곡으로 발표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이 1948년이고 한국전쟁의 휴전으로 분단체제가 시작된 것이 1953년이니 노래가 발표될 시점에는 ‘통일’을 부르짖을 이유가 없었다. 분단되지 않은 조국에서 ‘우리의 소원’이 통일이라는 것은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연히 ‘우리의 소원’에도 ‘통일’은 없었다. 원래 노랫말은 '우리의 소원은 독립/ 꿈에도 소원은 독립'이었다. ‘우리의 소원’은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출신이었던 안석영이 좌우익 세력 사이의 충돌이 극심했던 미·소 군정기 조국의 진정한 독립을 꿈꾸며 써내려간 가사다. 그런데 이승만 정권에서 “우리의 소원은 독립”이란 대목이 “우리의 소원은 통일”로 바뀐다. 이후 노랫말은 다시 “통일이여 오라”가 “통일을 이루자”로, “이 나라 찾는데 통일”은 “이 나라 살리는 통일”로 바뀌게 된다. 반공을 국시로 내세웠던 이승만 정권이 통일을 쟁취하자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노랫말을 바꾼 것이다. 반공이 통일을 앞서는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이후 오랫동안 우리는 통일 보다 반공이 우선되는 사회에서 살아야 했다. 1986년 10월 14일 대구 중구·서구에서 당선된 신한민주당 유성환 의원은 대정부 질문에서 “총리, 우리나라의 국시가 반공입니까?”라는 말을 꺼냈다. 그러나 의원석에서는 “무슨 소리야?”라는 고성이 터졌다. 이어 유성환은 “이 나라의 국시는 반공이 아니라 통일이어야 한다”고 발언했다. 이 한 마디로 그는 국회의원 면책특권에도 불구하고 구속까지 당해야 했다. 이른바 유성환 국시론 파동이다. 통일 보다 반공이 우선되던 시대, 통일은 “오라”가 아닌 “이루자”여야 했고, “이 나라 찾는”것이 아닌 “이 나라 살리는” 것이어야 했다. 좌우익의 극한 대립 속에서 조국의 진정한 독립을 꿈꾸며 ‘우리의 소원’을 써내려간 안석영 선생이 자신의 노랫말이 남과 북의 대립을 조장하는 의도로 바뀌었다는 것을 알았다면 어떠한 심정이었을까? 아마도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은 평화통일을 지향하고(제4조) 침략적 전쟁을 부인한다(제5조). 헌법은 통일은 전쟁을 수반하지 않은 평화적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헌법은 이승만 정권 때나 지금이나 동일하다. 평화적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북한을 통일의 파트너로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반공이 통일을 압도하는 상황에서 북한은 통일의 파트너가 될 수 없다. 수십 년 동안 우리 사회는 헌법을 무시하고 살아왔던 것이다. 지난 6월 16일 14시 50분경 북한은 개성공단에 위치한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해 버렸다. 표면적인 이유는 남한 일부 단체의 대북전단 살포였다. 북한이탈주민들이 주축이 되어 활동하는 몇몇 단체들은 수 년 동안 군사 분계선 인근에서 북한 정권을 비난하는 내용의 대북전단을 북쪽으로 날려 보내는 행사를 진행해 왔다. 북한 정권의 정당성을 따지기에 앞서 자신들 정권을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전단을 날려 보내는 행동이 북한에 모욕적인 것은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대북전단을 날려 보내는 단체들은 남북공동연락사무소가 폭파되는 상황으로까지 남북관계가 악화되는 상황에서도 대북전단 살포를 계속하겠다는 입장이다. 심지어 정부의 강력한 단속 경고에도 지난 22일 밤 다시 대북전단을 살포했다고 한다. 이들은 아직도 반공이 통일을 압도하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통일이 “이 나라 살리는” 것이 아닌 진정한 “이 나라(를) 찾는” 것인 시대는 아직 요원해 보인다.
퍼스널모빌리티의 인기가 늘면서 전동킥보드를 사용하는 인구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퍼스널모빌리티란 전동휠, 전동킥보드, 전기자전거 등 전기를 동력으로 하는 1인용 이동수단을 말한다. 특히 길을 가다보면 전동킥보드를 타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는데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전동킥보드를 보고 깜짝 놀랄 때가 있다. 실제로 전동킥보드 이용자가 늘어나면서 교통사고 위험도 높아지고 있다. 전동킥보드를 안전하게 이용하려면 킥보드에 대한 바른 이해와 주의가 필요하다. 우선 먼허 유무 등 이용에 관련된 올바른 정보를 숙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전동킥보드는 도로교통법상 ‘원동기장치자전거’에 해당된다. 따라서 원동기 면허 또는 2종 보통 이상의 운전면허가 필요하다. 면허를 취득할 수 없는 청소년의 경우 킥보드 이용이 제한된다. 전동킥보드는 차도에서만 운행 가능하며, 안전모 착용은 필수다. 또한 술을 마시고 전동킥보드를 타면 음주운전에 해당해 처벌받는다. 하지만 실제 관련법규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타는 이용자가 많아 우리 주변에서 안전수칙을 준수하여 운행하는 사람을 보기 힘든 게 현실이다. 전동킥보드 사고가 해마다 늘고 있다. 전동킥보드 이용자의 안전이 위협받고 있는 상황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안전대책 등 관리·규제할 수 있는 구체적인 법안과 더불어 전동킥보드 이용자의 안전의식 개선이 필요하다.
미국 서부영화는 대개 한 명의 빠른 총잡이가 다수의 악당과 싸워 이기는 구조로 돼 있다. 한두 번 보면 식상할 만도 한 단순한 패턴인 이 서부극은 오랫동안 세계를 열광시킨 미국 영화산업의 총아였다. 뻔한 결말에도 관객들이 연속해서 찾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존 웨인’, ‘클린트 이스트우드’ 같은 걸출한 주연 배우들의 매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장 중요한 요인은 악당들을 시원하게 물리쳐주는 주인공에게서 느끼는 ‘대리만족’일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참모로서 백악관 안보보좌관을 지낸 존 볼턴의 ‘그 일이 일어났던 방’이라는 자서전 한 권이 세상을 뒤흔들고 있다. 볼턴은 코로나19 창궐 이후 가뜩이나 코너에 몰리고 있는 트럼프에게 연일 직격탄을 날리고 있고, 트럼프 역시 카운터펀치를 노리며 전전긍긍이다. 볼턴은 그동안의 백악관 경험담을 토대로 트럼프가 얼마나 엉터리 지도자인지를 까발리는 데 열중하고 있다. 사적인 가치 기준과 개별적인 오감을 기반으로 작성하는 게 회고록인 까닭에 볼턴의 이야기가 사실인지, 그렇지 않은지는 판단하기란 쉽지 않다. 볼턴의 폭로나, 트럼프의 반격에서 우리를 짜증스럽게 하는 것은 세계정세의 엄중함에 걸맞지 않은 정책 결정 프로세스의 이면에 있는 형편없는 인식의 가벼움이다. 한반도의 절박한 운명마저 그 유치한 논리에 휘말아 왈가왈부했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볼턴의 회고록에 근거하면, 트럼프는 오직 올 11월에 있을 대선에서의 재선에 모든 초점을 맞춰놓고 움직여왔다고 한다. 8천만의 생사가 달린 한반도 비핵화 문제마저도 트럼프는 사진 찍을 기회쯤으로만 취급했다는 폭로다. 우리가 열광하면서 염원을 실었던 김정은 위원장과의 판문점 회동마저도 사진 찍기용 이벤트로 다뤘다는 게 볼턴의 주장이고 보면, 실망을 넘어서 분노마저 치솟는다. 우리의 분단비극이 어떻게 저들에게는 한낱 사진찍기 놀잇감일 수 있나. 볼턴의 난사(亂射)는 문재인 대통령에게도 유탄을 날리고 있다. 볼턴은 2018년 6월 싱가포르 1차 북·미 정상회담을 처음 제안한 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아닌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라고 주장했다. 문 대통령이 2018년 3월 판문점에서 김 위원장과 회담한 후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에게 “김 위원장에게 1년 안에 비핵화를 하도록 요청했고, 김 위원장이 동의했다”고 전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말하자면, 트럼프 대통령이 상황을 ‘오판’하게 한 원인 제공자가 문 대통령이라는 뜻이다. 판문점 북미회담에 동행하기를 원하는 문 대통령을 트럼프와 김정은이 처음엔 한사코 거절했다는 이야기는 모욕감을 부른다. 방위비 협상의 경우 트럼프가 ‘미군 철수를 위협하라고 주문했다’는 내막도 참담하긴 마찬가지다.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비참한 현실이 다시 한번 새록새록 느껴진다. 결국 장사꾼 트럼프는 권력 연장에만 혈안이 돼 있고, 미국 국수주의(國粹主義) 네오콘의 일원인 볼턴은 트럼프의 옆에서 고춧가루 뿌릴 궁리만 했다는 얘기다. 존 볼턴의 폭로 칼춤이나 그런 사람을 안보보좌관으로 거느렸던 일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대거리에 여념이 없는 트럼프나 후안무치하기는 마찬가지다. 볼턴의 자서전이 미국의 국제적 위상을 한참 떨어뜨릴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이쯤에서 우리는 평정심을 잃어서는 안 된다. 다시 알게 된 미국 정치지도부의 행태, 백악관 돌아가는 패턴은 참으로 한심하다. 갈라진 나라에서 신음하며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그 모순이 야속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옳고 그름’만으로 결판나는 역사가 어디 그리 흔하던가. 국제관계를 지배하는 ‘힘의 논리’는 잠시도 간과할 수 없는 상수(常數)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슬기롭게 살아남아야 한다. 솟구치는 분노에 쉽게 이성을 저당 잡혀서는 안 된다. 존 볼턴이 등장하는 서부활극, 한심한 ‘뒤끝’ 드라마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존 볼턴은 과연 라스트 신에서 쌍권총 총구에서 나오는 화약 연기를 불어 날릴 수 있게 될까. 아니면 트럼프가 권총을 멋들어지게 두 바퀴 돌린 다음 총집에 꽂게 될까. 유탄이 날아다니는 전장(戰場), 선악(善惡)의 이분법만 가지고 조마조마 가슴 졸이며 ‘대리만족’에나 빠질 수도 없는 구경꾼의 처지란 참으로 딱하다.
벚꽃이 활짝 피던 작년 4월, 서울대공원으로 꽃구경을 갔다. 벚나무를 ‘소리나무’라고 했던 철학자의 말이 생각나 벌들이 있는지 관찰했지만,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올해 코로나19로 일상이 멈춰있던 4월에 활짝 핀 벚꽃을 보다가 벌들의 모습을 관찰하게 되었다. 벌들이 수없이 날아와 날개 짓하며 윙윙 거리는 소리를 직접 들으니 왜 소리나무라고 하는지 알 수 있었고, 지금도 윙윙거리는 소리가 귓전에 맴돈다. 흔히 위기가 기회라고 한다. 위기는 늘 존재하고, 누군가에게는 위기가 누군가에게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올해는 자기의 진로와 삶의 방향에 대해 성찰하며 미래를 준비하여 모두가 기회를 얻길 바란다. 50년의 삶을 살았다면, 엄마 뱃속에서부터 첫돌까지 1년을 제외한 49년은 후회하는 삶이라고 하니 순간순간 현재를 소중히 하여 후회 없는 삶을 살기를 희망한다. 1997년도 IMF사태 이후 우리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대량부도로 인해 실직된 가정의 아이들을 위한 개별프로그램이 필요함에도 학생 한 명 한 명에게 맞는 맞춤형 교육을 준비하지 못하고, 열린교육에만 매몰되어 놓친 부분이 많았다. 내일의 주인공이 될 아이들이 상처받지 않고 성장할 수 있도록 세심한 교육프로그램과 상담 등이 더 중요했으나 그런 교육사다리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올해는 IMF때의 상황보다 더 심각하다. 코로나19로 오랜 시간 아이들이 학교를 갈 수 없고, 사이버수업을 병행하고 있다. 이런 때일수록 교육격차와 학업결손이 생기지 않게 다양한 프로그램과 생활교육 등에 세심한 지도가 필요하고, 진정한 혁신교육으로 모든 학생들의 삶의 역량을 길러주는 교육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코로나19로 어려운 시기에 ‘앙, 단팥인생이야기’라는 영화가 생각난다. 한센병 환자 요양시설에서 허락된 삶의 대부분을 보냈던 할머니는 어느 날 세상으로 나오게 된다. 벚꽃향기에 끌려, 바람을 맞으며, 햇빛이 이끄는 대로 걷다가 수심에 가득 찬 표정으로 서 있는 빵가게 사장을 만나 처음으로 ‘사회’안에서 경제 활동을 해볼 수 있게 된다. 할머니가 만든 단팥으로 손님들이 많아졌으나 그녀의 손이 어떤 병을 앓은 손인지 알게 된 손님들에 의해 할머니는 일을 그만두게 된다. 어떤 병에 걸리는 순간 ‘환자’라는 수식어가 붙게 되고, 완치판정이 될 때까지 이 수식어는 떼어낼 수가 없다. 코로나19 확진자가 되면, 실시간 모든 동선과 신상까지 공개되는 요즘, 추가적인 감염예방과 모두의 건강을 지키기 위함이라는 애초의 취지가 무색하게 모든 것을 감내해야 한다. 본인의 두려움과 어려움, 그리고 당연히 자신을 지키고 싶은 미확진자들의 어설픈 견제와 비난까지도 감내하지만 어느 누구도 언제 똑같은 처지가 될지 아무도 모른다. 학교 안과 밖 어디서든지 어떤 장애나 질병으로 인해 인간으로서의 존엄이 훼손되어서는 곤란하고, 내가 아니면 된다는 생각마저 위험하다. 이 세상에 완전한 인간은 없기에 서로 배려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질병을 가진 그 누구는 남이 아닌 평범한 우리의 이웃이기 때문이다. 팥과 조곤조곤 대화를 나누는 귀여운 할머니, 빨갛게 잘 익은 팥알 하나가 머금었을 그 모든 햇살과 물 그리고 바람을 상상하며 정성스레 단팥빵에 들어갈 팥을 만드는 그 정성은 모두가 똑같은 한 인간임을 영화는 깨닫게 해준다. 위기가 기회다. 교육의 본질을 다시 생각해 보고, 진정으로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원점에서부터 살펴볼 때이다. AI와 구별되는 인간의 특징은 질문을 하고, 희망을 가진다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가장 아픈 사람은 후천적 질병에 걸린 사람들이기에 어려움에 처한 사람일수록 더 배려해야 한다. 어려울수록 늘 질문하고 희망을 노래하며 우리 모두 존엄한 인간임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국내에 잘 알려진 외국 유통회사가 있다. 한국에 들어와 맥을 못 춘 다른 선진 유통회사들과는 달리 이 회사는 높은 경쟁력을 자랑한다. 이 회사 한국지사에 레전드로 통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뛰어난 경영능력과 겸손한 품성으로 사내에서 좋은 평판을 얻고 있다. 그가 서울의 한 지점에서 부점장으로 있다가 대도시 점장으로 간 것이 40을 갓 넘긴 나이였다. 그곳에서 5년 동안 일하며 그는 괄목할 만한 매출성장을 기록해 경영진을 놀라게 했다. 그는 소비자 입장에서 편리하도록 상품을 배치해 분위기를 새롭게 했더니 매출이 증가했다고 말했다. 회사는 그를 차출해 다른 도시의 개점 작업을 맡겼다. 그는 설비 점검에서 시작해 상품입점 기획, 상품배치, 홍보, 회원 확보까지 총력을 쏟았다. 회사 측은 신규시장이어서 우려를 많이 했고, 5년 정도 적자를 예상했다. 그러나 그곳은 개점 첫 해부터 흑자를 기록했다. 그가 레전드급 반열에 오른 더 큰 이유는 빛나는 실적보다도 고졸 학력으로 점장, 그것도 잘 나가는 점장이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스펙보다도 능력을 중시하는 회사의 기업문화가 바탕이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는 고향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직후 상경했다. 형과 함께 자취를 하며 잡은 첫 직장이 명동의 한 사진현상소였다. 1년 후 군에 입대했고, 제대 후 다른 현상소에서 2년간 일하다가 지인의 소개로 외국계 회사에 경력사원으로 들어갔다. 그 회사는 지금의 회사에 흡수 합병되었고, 그는 2년간 사진을 현상하는 일을 하다가 계산대로 발령을 받았다. 그는 3년간 계산대 업무와 주차관리 등을 하다가 인사총무팀장으로 승진발령을 받았다. 그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일’이라고 했다. 그의 특출한 성실성을 인정받은 결과일 터다. 그때부터 그는 승승장구한다. 인사총무팀장으로 3년간 일한 후 그는 서울에서 가장 매출이 큰 지점의 부점장으로 가서 14년간 그곳에서 일했다. 그리고 대도시 점장으로 발탁되었다. 그는 자신이 ‘밑의 사람을 강성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솔선수범하는 편’이라고 했다. 고맙게도 직원들이 잘 따라 준다는 겻이다. 독자들 중 눈치 챈 사람도 있을까. 그는 내 막내 동생이다. 나는 10남매의 장남이고, 그는 10번째 막내다. 자신이 승승장구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자 ‘열정과 책임감을 가지고 최선을 다 한다’고 그는 대답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매일 매순간 감사하는 마음으로 산다고 했다. 한번은 사장과 만나는 중 사장이 ‘김점장은 목표가 뭔가’고 물었다. 그는 ‘현재에 만족한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사장은 ‘김점장은 그게 문제다. 사람이 꿈이 없어서야 되겠나. 더 좋은 자리를 꿈꿔야지. 안주하지 마라’며 질책성 권유를 했다. 그렇다. 그가 승승장구하는 비결은 바로 감사하는 마음이다. 그는 감사의 능력을 몸으로 체득한 감사의 전문가다. 감사는 좋은 학벌, 좋은 스펙을 뛰어넘는 힘을 가지고 있음을 그의 사례를 통해 보여준다. 그는 “아직까지 감사, 감사, 무조건 감사하는 마음으로 일해 왔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감사를 앞세워 최선을 다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목표에 대한 집념과 야심보다도 감사하기가 더 강한 경쟁력임을 그는 자신의 삶을 통해 웅변한다.
요즘 흔히들 차를 탔을때의 안락한 승차감보다 내릴때 주위의 부러움섞인 시선에서 뿌듯함을 느끼는 하차감을 더 중시하는 시대라고 한다. ‘차보다 집’이 ‘인생 1순위’였던 기성세대들 입장에선 이들의 비현실적이고 실속없는 경제행태가 그야말로 치기어린 시행착오 혹은 무모함으로 치부되겠지만 하차감 못지않게 ‘신분상승의 발로(發露)’로 집에 집착하는 요즘 기성세대들 역시 ‘속물’(?)이라는 비판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을 듯하다. 빈부격차가 극심해지면서 경제적 수준에 따라 사람을 차별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예전의 ‘집없는 설움’보다 오늘날 강남아파트에 살지못하는 무능함과 비애감에 더 절망하면서 자조섞인 탄식을 쏟아내고 있는게 요즘 풍속도다. 삶의 공간인 집이 본연의 존재 이유를 벗어나 가장 효과적인 재테크 수단으로 인식되고, 나아가 인생성공의 척도로까지 자리매김하는 등 ‘가치 왜곡’이 당연시되는 시대를 결코 제대로 된 사회라고 할 수 없다. 이런 와중에 최근 문재인정부가 야심차게 내놓은 6·17 부동산대책을 놓고 세간에선 설왕설래와 일희일비가 계속 엇갈리고 있다. 이번에 발표된 ‘주택시장 안정관리 방안’을 들여다보면 서울집값 상승에 따른 풍선효과를 차단하고자 사실상 수도권 일대 전지역을 부동산 거래 규제지역으로 확대하고, 규제지역내 전세대출과 처분·전입 의무 규제를 대폭 강화하는 등의 초강력 대책들을 담고있다. 그동안 짧지않은 인생동안 숱한 부동산·주택정책을 겪어왔지만 아직도 부동산 투기 근절, 불로소득 원천 차단, 공평과세 및 평등사회 실현 등 허울좋은 미사여구들이 여전히 남발되는 것을 보노라면 기존의 부동산 및 주택정책들이 그야말로 ‘정치적 수사(修辭)’였고, 모두 허사(虛事)였음을 오히려 반증하는것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아울러 이번에도 역시 ‘태산동명 서일필’(泰山動鳴鼠一匹)이란 말처럼 계획과 약속은 거창했지만 결과는 여전히 맹탕일지 모른다는 강한 의문부호도 남는다. 예의 부동산 및 주택시장 정책 실패는 어쩌면 법제도의 미비나 잘못에서 기인한게아니라 정책대상에 대한 부정확한 접근이나 운영주체의 부적격성 등 원초적 결함과 태생적 한계를 지녔기때문일지 모른다는 의구심 또한 들기도 한다. 즉, 부동산 투기의 실체적 주범(?)과 이익실현의 구체적 단속 대상이 해당지역에 살고있는 속칭 고관대작이거나 정치인,아니면 이를 아우를수 있는 학계.금융계.언론계 등 흔히 사회지도층이라면 애시당초 정책의 실효성을 담보하기란 무리일 수 밖에 없지않을까. 굳이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긴 격’이라는 진부한 표현을 쓰지않더라도, 내눈을 스스로 찌르는 어리석은 공직자가 있을리 만무하고, 내가 마실 우물물에 독을 푸는 정신나간 정치인 혹은 지식인 또한 없을진대, 어찌그리도 수십년을 한결같이 칼과 방패의 자가당착적 모순게임을 계속 되풀이하고있는지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아니 어쩌면 민주주의국가에서 헌법에 버젓이 보장된 사유재산권을 침해하는 규제정책을 입안하는것 자체가 뻔한 결말이 예고된 ‘제스처’(?)에 불과했고, 경제개혁정책 추진을 가진 자들의 손에 맡긴 것 또한 ‘넌센스’라는 생각을 솔직히 지울 수 없다. 어차피 흐지부지 일관성없는 부동산 정책과 법제도에 또다시 실망하느니 차라리 인간적으로 참다운 삶에 대한 성찰과 함께 ‘철학의 빈곤’을 설파하는 것이 오히려 더 현명한 대안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불현듯 스쳐지나간다. 이런 맥락에서 강남에 산다는 자부심 혹은 자존감을 위해 살인적(?) 은행 대출이자와 자녀들 고액과외비를 감내하면서 생활고에 허덕이는 ‘신분 세탁자’들의 이중적 작태는 그야말로 웃픈(?) 꼴불견의 극치라 아니할 수 없다. 삼시세끼 일용할 양식을 걱정하고 지친 육신을 누일데가 없어 하염없이 거리를 헤매이는 홈리스 못지않게, 내집 마련에 인생의 전부를 탕진하고 노년에 마음둘 곳 없어 하릴없이 방황하는 하우스푸어의 고단함이 과연 무엇이 크게 다를 바 있겠는가. 그럼에도 마음 한켠에 서울 강남·서초·송파구의 황족과 그 주변지역에 사는 귀족들, 그리고 나머지 지역들 사람들을 평민으로 규정짓는 시대착오적 서울공화국에서 ‘어쩌다 천민’ 신세가 된 나자신에게 분노와 화닥질이 치미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인지상정(人之常情)이 아닐까.
코로나바이러스19의 전지구적 전파 이후 시민의 일상은 어찌 변할까. 세 가지 증후군을 골라 본다. 먼저 사회의 풍토 변화다. 교육의 부재 상황에서 대중은 전통적인 학교가 무용해지는 것을 간파했다. 대학의 기능상실이 뒤따를 것이다. 개인들이 지식을 공유하는 열린 시민대학이 는다. 자주적인 개인학습, 직접 현장에 참여하는 실습, 학습공동체와 지식동아리, 동호회가 자조적으로 꾸려가는 습작, 문제의식을 느낀 당사자들의 직간접 체험, 일하면서 배우는 노작, 교수 없는 터득 방법, 조사와 토론으로 직능인이 되는 습득가정 같은 창의적 성장 기술이 자리잡아간다. 다음은 개인의 행동 변화다. 자기계발의 풍습이 극단적으로 바뀌는데, 나는 ‘방목(放牧)’의 증후군이 나타난다고 말한다. 학교의 틀에 갇히지 않고 이것저것 내키는 대로 배우고, 몸소 익히고, 스스로 얻고, 알아서 깨닫는다. 취미와 특기, 전공에 있어 유기된 상태에 놓인 사람들 중 적극적인 개인들은 가장 유목적인 존재, 유희적인 존재로 거듭난다. 분산적이면서 전인적인 능력을 가진 인물들이 속출하고, 몇 가지 분화된 영역에서 전문적이면서도 여러 분야에 지식을 걸친 융합적 인재들이 드러난다. 이들은 교육현장, 학계와 직업세계보다 재야에서, 특히 개인들의 서재와 침실 책상에서 나온다. 본격적으로 사람이 콘텐츠인 시대가 왔다. 제도의 변화와 관련된 인식 변화도 있다. 위에 이야기한 두 경향에 따라 학교 없이 학습과 연구를 한다든지, 자신이 정한 취미와 특기, 전공을 마음껏 익히는 식으로 우리 의식이 변하면서 소득에 대한 경제관념이 변한다. 행정과 의회에 요구하는 지배적인 요청도 달라져간다. 세금의 사용을 혁신하자는 주장이다. 20세기를 지배한 늙은 서구 선진국을 중심으로 전국민 기본수당, 약자를 위한 기본소득, 미래세대를 위한 청년배당 논의가 급부상했다. 이것은 좌파 우파의 늙은 이념문제를 냉정하게 넘어서는 현실이다. 보수적인 청년들조차 20세기에 진보적 사상이 주장했던 복지국가, 사회적 보장 개념을 수용하는 경향이 강하다. 사회복지와 사회안전망에 대한 요청은 기본이고, 생활 속에서 사회적 배당을 연구하고 토론한다. 이런 세대가 부상하면 세금을 걷는 방법도 달라질 것이다. 기본소득을 나누자는 주장을 넘어 기본자본을 분배하자는 이야기를 당연하게 논의하고 수용하는 시민문명이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시민은 코로나 사태가 예방과 방역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를 생각하는 개인행동의 문제임을 깨달았다. 공공영역에서 함께 답을 찾으며 우리는 어느 정도까지 공동체가 가능한지 질문을 던졌다. 사실 시민보다 사회적 경제 조직이 이런 접근을 하기 바란다. 사회적 경제 조직은 사회를 살리고 경제의 체질을 개선하는 노력을 한다. 그러자면 손가락 끝에 걸린 사회문제만 바라봐서는 안 된다. 손가락이 가리키는 저곳에 위치한 시민들의 삶을 응시해야 한다. 익명의 대중 같은 시민이 아니라, 살아가는 평범한 개인들의 한계와 고달픔,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범상하기 그지없는 생명력을 보아야 한다. 첫 번째 징후는 교육제도나 재택근무시대의 원격직장 문제가 아니다. 성장으로 자기증명을 하면서 초라해지고 싶지 않은 건강한 현대인의 욕구해소 문제다. 두 번째 징후 역시 평생학습과 사회복지의 문제만은 아니다. 여전히 생존경쟁에 내몰리는 불안한 현대인의 초상 문제다. 세 번째 것을 행정과 국세, 그리고 입법의 문제로 보면 피상적이다. 시민의 생계와 활로 문제, 또 국가의 존립이유 문제다. 사회적 경제를 이뤄가는 시민 소비자의 고민인 것이다. 코로나 위기 이후 개인의 삶에 불어닥친 징후들은, 정작 사회적 과제만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안 보인다. 그런데 개인의 삶에 나타나는 필요와 욕구를 지켜보면, 오히려 우리 사회에서 해결해야 할 결핍들이 제대로 보인다.
이제는 당황스럽다. 코로나19 바이러스의 파장이 어디까지 일지? 이미 경계의 선을 넘은 지는 오래다. 전 세계의 모든 국가와 산업전반이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그 끝을 예상할 수 없는 것이 더 큰 걱정이다. 종식을 선언하는 국가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 국가는 재유행을 걱정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수도권뿐만 아니라 중국의 베이징도 최근 징후에 민감한 이유이다. 재유행에 대한 걱정과 우려가 있지만, 사회 전반에 걸쳐 미래준비를 위한 포스트 코로나를 대비하고 있다. 관광 또한 코로나로 인한 트렌드 변화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한국관광공사에서 이달 16일 의미 있는 분석자료를 발표했다. 비대면(Untact) 시대의 국내 관광행동 변화이다. 지난 1월 20일부터 5월 30일까지 21주간 통신사의 빅데이터로 국내 관광객의 이동패턴과 행동변화를 분석했다. 근거리(Short distance), 야외활동(Activity) 가족 단위(Family), 자연 친화(Eco-area), 인기 관광지(Tourist site) 관광 수요회복 조짐은 아직(Yet)이란 키워드를 뽑아내 SAFETY(안전)란 말로 정리했다. 이처럼 코로나19의 영향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수원화성의 관광도 변화시키고 있다. 수원화성은 한국관광공사에서 분석한 안전(SAFETY)의 대표적인 관광지의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수원화성 내 대표적인 장소는 행궁동 감성카페이다. 낙후된 원도심이었던 과거에 2013 생태교통 페스티벌을 통한 기반시설 조성, 2016년 수원화성 관광특구 지정에 따른 규제 완화, 루프탑(옥상) 허용 등이 큰 영향요인이었다. 다양한 카페와 특색있는 먹거리가 입점되기 시작했고, 이후 성황을 이루었다. 부정적일 것 같았던 코로나 영향은 특색있는 원도심 감성 콘텐츠와 수원화성이라는 장소적 특성이 시너지로 작용하여 더더욱 주목받고, 독특한 여가문화공간으로 자리잡았다. 다음 장소는 용연이다. 용연은 수원화성 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간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최근에 큰 변화가 있다.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실내보다는 야외활동을 선호하는 관광트렌드 변화와 주변 상권의 절묘한 마케팅전략에서 시작되었다. 화홍문 인근 카페에서 방문 고객들을 위해 바이러스 영향이 덜한 야외공간에서 즐길 수 있는 커피, 와인, 돗자리, 꽃 등이 포함된 감성 피크닉 세트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대성공이었다. 주말뿐만 아니라 덜한 주중에도 많은 방문객과 카페 고객이 용연 주변을 수놓고 있다. 푸르름이 더해지고 있는 현재는 용연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까지 확장되고 있는 분위기다. 보고 있자면 옛날 추억의 감성 소풍이 재연되고 있는 것 같다. 요즈음 새롭게 유명 SNS의 해시태그가 급격하게 상승하는 곳이 있다. 창룡문, 연무대이다. 초등학생 자녀를 둔 학부모들이 자녀 생일 등을 기념하기 위해 사진을 찍어 주는 대표적인 장소로 급변모되고 있다. 부모와 자녀가 같은 옷을 입고 고즈넉한 옛것을 간직한 창룡문과 연무대를 배경으로 함께 힐링하고 기념하기 위해 기억을 사진으로 남기고 있다. 수원화성은 코로나19가 만든 관광트렌드, 안전(SAFETY)의 대표적인 장소이다. 참 힘든 시기이다. 수원화성은 삶의 활력 창출을 통해 코로나를 극복할 수 있는 관광지의 역할을 지역 커뮤니티와 함께 진행하고 있다. 현재 멈춰있기는 하나, 밤이 주는 즐거운 정감 화성행궁 야간 재개장, 2020 한국관광공사의 야간관광 100선으로 선정될 만큼 뛰어난 수원화성 야경과 연계된 성곽길 야간투어, 8월에 예정되어 있는 수원문화재 야행 등을 준비하고 있다. 특히, 용연에서는 특수조명과 영상이 어우러진 야간 상설 특별 콘텐츠를 제작하고 있다. 주간의 감성 피크닉과 야간의 성곽길 투어까지 연계할 예정이다. 아직 우리 생활은 코로나와 함께하고 있다. 수원화성의 운영은 코로나19의 확산방지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이 힘든 시기를 이겨낼 수 있는 활력을 수원화성에서 얻을 수 있도록 준비하고 제공하고 싶다.
한동안 온 겨레를 기대에 부풀게 했던 한반도 평화 시계가 북한의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를 기점으로 거꾸로 돌고 있다. 일부 탈북인들의 대북 전단 살포를 맹비난하던 북한이 이번에는 1천200만 장의 대남전단을 살포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북한의 ‘삐라’ 전쟁 선언의 배경에 대내적 목적이 더 짙다는 사실이 허탈감을 부른다. 시대착오적이고도 무의미한 남북의 전단 살포는 즉각 중단돼야 한다. 이런 유치한 소모전은 그저 미래를 망칠 따름이다.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22일 1면에 ‘분노의 격류, 전체 인민의 대적 보복 열기’ 제목으로 “중앙의 각급 출판인쇄기관들에서 1천200만 장의 각종 삐라를 인쇄했다”며 “22일 현재 3천여 개의 각이한 풍선을 비롯해 남조선 깊은 종심(중심)까지 살포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살포기재·수단이 준비됐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