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이 지역구인 더불어민주당 정춘숙 의원(원내대변인)이 최근 ‘아동학대범죄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개정안은 아동학대치사 범죄의 기본 형량을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으로 높이고, 아동학대중상해죄는 ‘5년 이상의 징역’으로 강화했다. 현행법상 아동학대치사죄의 형량은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 아동학대중상해죄의 형량은 ‘3년 이상의 징역’이다. ‘아동복지시설의 종사자 등에 대한 가중처벌’도 ‘아동학대 신고의무자에 대한 가중처벌’로 바꿔 신고의무자의 책임을 분명하게 명시했다. 저항할 힘이 없는 아동들을 대상으로 한 끔찍한 학대 범죄가 빈발하고 있다. 최근 충남 천안시에서 학대당하던 9살 초등학생 남자 아이가 친부의 동거녀에 의해 가로 44㎝·세로 60㎝ 여행용 가방에 7시간이나 갇혀 있..
무역이란 국가 간 필요한 물건이나 서비스를 사고팔며, 교환하는 행위를 말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대표적인 수출품으로는 반도체, 컴퓨터, 가전제품, 자동차 등이 있다. 반면에 에너지, 식량, 원재료, 기계의 핵심 부품 등을 주로 수입한다. 보호무역은 국가 권력과 간섭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유롭게 다른 나라와 무역하는 자유무역과 대립되는 개념이다. 국가마다 국민의 안정적인 경제 활동을 위해서, 또는 국가 안보를 위해 보호되어야 하는 산업이 있다. 누구나 위험하고 불리한 상황에서 자신을 보호하려는 본능이 있듯이, 국제 경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국가 간 거래를 하면서 불리한 점이 생기면 자기 나라 경제를 보호하기 위한 제도를 만들게 된다. 예를 들면 국가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거나, 많은 국민이 종사하고 있는 핵심 산업의 경우, 해당 산업이 해외 기업으로 인해 붕괴가 된다면 국가 경제 위기로 이어질 것이다. 이러한 경우를 막기 위해 몇 가지 보호무역을 할 수 있는 장치가 마련되어 있다. 가장 대표적인 보호무역 제도로 자기 나라의 상품과 경쟁하는 수입품에 대해 높은 세금을 매겨 가격을 비싸게 만드는 ‘보호 관세’가 있다. 또 정부가 미리 수입량을 정해 놓고 그 범위 안에서만 수입을 허락하는 ‘수입 할당제’와 특정한 상품의 수출을 북돋아 주려고 정부에서 보조금을 주는 ‘수출 장려금 제도’ 등도 보호무역의 한 종류이다. 그동안 자유무역주의는 20세 후반부터 국제 경제의 트렌드로 인식되어 왔다. 선진국의 주도로 세계무역기구(WTO)를 통해 무역자유화가 추진됐고, 여러 나라가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했다. 그러나 세계 경제의 회복이 더디고 각국의 경제 구조가 바뀌면서 이러한 상황들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실업자와 빈곤층이 늘어나고 무역 불균형으로 인한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하자, 자유무역이 모두를 잘 살게 할 수 있다는 믿음은 깨지기 시작한다. 결국 현 단계 세계 경제는 한편으로 자유무역주의의 확산, 다른 한편 보호주의 강화라는 상호 모순된 경향이 혼재돼 있다고 볼 수 있다. 각국의 사정에 따라, 또 산업에 맞춰 보호와 개방을 저울질하게 되면서 각국의 고민도 깊어지는 상황이다. 특히, 미국은 한국의 2대 무역국, 한국은 미국의 6대 무역국이다. 미국은 자국의 경쟁우위 산업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새로운 통상질서를 강요한다. 앞으로 미국의 보호무역 정책은 한국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특히 자동차, 무선통신기기, 일반기계, 자동차부품, 반도체, 가전, 섬유류 분야의 타격이 예상된다. 보호무역은 단기적으로 자국의 산업을 보호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서로에게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1920년대 미국이 높은 관세를 부과하면서, 국가 간 보복 관세가 이어지고 세계 무역 규모가 60%나 줄어든 사례를 기억해야 한다. 오랜 기간, 글로벌 무역은 자유무역주의와 보호무역주의의 대립을 통해 발전해왔다. 한때는 세계화를 거스르는 것이 마치 시대의 흐름에서 벗어나는 것처럼 받아들여지던 시기가 있었다. 그러나 바야흐로 자유무역의 시대가 저물고 보호무역의 시대가 다시 다가오고 있다. 아마도 당장은 자유무역과 세계화의 바람이 잠시 주춤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각국이 다시 빗장을 걸어 잠그는 과거로 돌아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무역으로 인해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물자가 풍부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보호무역에 대한 논쟁은 진행형이다. 세계 경제가 어려워지자 무역장벽을 높여 자국의 이익부터 우선시하는 움직임도 점점 뚜렷해진다. 한쪽에서는 결국 보호무역이 모두를 파멸로 몰고 갈 것이라고 경고가 끊이지 않는다. 수출 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도 보호무역 확산에는 절대 반대 입장이다. 2020년대에도 자유무역과 보호무역의 격돌이 예상된다. 보호무역주의의 확산은 세계 경제에 또 하나의 불확실성 요인이 되어가고 있다. 세계경제와 긴밀하게 연결된 우리로서는 어려운 상황임이 틀림없다. 과연 우리는 이 어려운 난관을 어떻게 극복해 나갈 것인가. 미국과 중국의 무역 분쟁 속에서, 높은 무역 대외의존도를 갖고 있는 우리는 어디로 가야하는가. 확실한 해결방안을 찾는 것 자체가 어려울 수 있지만, 적어도 그 방향성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끊임없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21대 국회가 또다시 ‘정치력 부재’의 초라한 현주소를 드러냈다. 설마 이렇게까지 할까 싶었는데, 더불어민주당이 15일 국회 본회의에서 18개 상임위원회 중 법제사법위원회(법사위) 등 6개 상임위 위원장을 단독으로 선출했다. 시급한 국정과제를 빨리 해결하고 싶은 여당의 조급증이나 절대 소수인 통합당의 막막한 처지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이런 시작이라니 참담한 일이다. 제1야당을 배제한 단독 원(院) 구성은 1987년 이후 약 33년 만에 처음이다. 이해찬 민주당 대표는 15일 오전 최고위원회의에서 “21대 국회의 원 구성에 대해 민주당의 뜻은 분명하다. 단독으로라도 21대 국회를 일하는 국회로 만들겠다”고 강조했다. 정권이 바뀐 다음의 여야 행태는 ‘개구리가 올챙이 적 기억 못 한다’는 말을 새록새록 떠오르게 한다. 그 이중 논리는 그릇된 관행을..
새끼를 낳고 기르기 위한 남극의 황제펭귄 부부의 노력은 눈물겹다. 암컷이 알을 낳고 몸에 먹이를 비축하기 위해 바다로 떠나면 수컷은 발 위에 있는 주머니에 알을 넣고 품는다. 알을 품고 있는 기간이 무려 64일 안팎이다. 그동안 수컷은 수분 보충을 위해 눈(雪)을 먹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섭취하지 않는다. 워낙 혹독한 날씨여서 잠시만 자리를 벗어나도 알이 얼어 터지고 말기 때문이다. 이런 모습 때문에 수컷 황제펭귄은 부성애의 대명사처럼 일컬어진다. 새끼가 부화하면 수컷 펭귄은 자신의 위 속에 있는 소화된 먹이를 토해서 먹인다. 새끼가 부화한 지 열흘 정도 후에 암컷이 돌아와 같은 방식으로 먹이를 주고, 이후로 수컷과 암컷은 번갈아 가며 하나는 새끼를 품고 다른 하나는 바다로 나가 먹이를 비축해 돌아온다.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는 속담이 있다. ‘자식 둔 부모는 알 둔 새 같다’는 말도 있다. 오랫동안 익히 들어온 이런 말들을 우리는 굳건히 믿고 살아왔다. 대개의 부모가 그 이치에 딱 맞는 따사로운 모습으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귀한 상식이 가차 없이 무너지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비극들이 연거푸 일어났다. 여행용 캐리어에 의붓아들을 가둬 숨지게 한 천안 계모 사건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창녕에서 계부가 아홉 살 된 의붓딸에게 학대를 뛰어넘는 고문을 상습적으로 저지른 끔찍한 아동학대 사건이 또 드러났다. 쇠사슬에 목이 묶인 채 베란다에 갇혀 굶주림에 시달리던 이 9살짜리 여자아이는 가까스로 지붕을 타고 옆집으로 아슬아슬 탈출하여 야산에 숨어 있다가 해거름에야 산길을 걸어 나와 구조됐다. 아이가 털어놓은 계부와 친모의 학대는 상상을 초월한다. 쇠사슬로 목을 묶어 가둔 것도 모자라 불에 달궈진 쇠젓가락으로 발등과 발바닥을 지지고, 지문을 없앤다고 달궈진 프라이팬에 손가락까지 지졌다니 듣기만 해도 등골이 오싹할 지경이다. 해마다 서른 명 안팎, 지난 2016년부터 3년 사이에 무려 102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각종 아동학대로 숨졌단다. 학대 행위자와 피해 아동과의 관계는 부모가 1만8천919건(76.9%)에 달한다니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만큼도 여기지 않았다는 뜻이다. 친부가 학대 행위자인 경우가 1만747건(43.7%), 친모 7천337건(29.8%), 계부 480건(2.0%), 계모 297건(1.2%) 등이었다. 절대다수의 학대는 친부모에 의해 일어난다는 얘기다. 도대체 왜 이런 비참한 일들이 끊임없이 발생할까. 우리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기에, 행복하게 자라야 할 아이들이 부모의 모진 학대 끝에 숨지는 비극이 계속되는 것일까. 권력다툼에 여념이 없으신 정치권에서는 이런 일이 벌어지면 무슨 관성처럼 ‘엄벌’만을 외친다. 국회에 수두룩한 법조출신 정치인들은 할 줄 아는 일이라고는 이것밖에 없다는 듯이 “처벌이 솜방망이여서 그렇다”며 형벌 강화를 부르댄다. 현대사회의 모든 일이 그렇게 범인을 잡아 손 자르고 발목 끊는 야만 시대의 형벌이면 해결될까. ‘아동학대’는 그렇게 간단히 풀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아동학대 처리 시스템’ 전반의 부실 때문이라는 전문가들의 견해는 현실적으로 옳다. 감시망을 확대해 신속히 학대 아동을 찾아내어 확실하게 구출해야 한다. 하지만 문제의 부모는 그냥 두고 딴 예기만 하는 것은 해충의 발원지는 그냥 두고 벌레만 잡는 어리석음과 다르지 않다. ‘부모’가 되려는 사람들에게는 별도 교육이 필요하다. 아무렇게나 아이를 낳고, 또 아무렇게나 키우는 현상을 방치하는 한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 가뜩이나 ‘인구절벽’이 시대의 난제로 떠올라 있다. 국가가 나서야 한다. 그냥 아이 낳았다고 돈 주는 일에만 몰두하지 말고, 아이를 가졌을 때부터 의무적으로 ‘좋은 부모’ 교육을 받도록 해야 한다. ‘부모’의 자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도 모르고 아이를 낳은 뒤 화풀이 대상 삼아 말 안 듣는다고 두들겨 패고 밥조차 굶기는 악순환을 언제까지 모른 척할 셈인가. 정신병자에 가까운 부모들이 양산되는 이 악순환의 고리를 확실히 끊을 정밀한 종합대책이 만들어져야 한다. 자기들을 ‘엄마’, ‘아빠’라고 부르는 보석처럼 귀한 아이를 가방에 가두어 죽이고, 손가락 발가락을 지지다니…. 차라리 눈을 감고 귀를 씻고 싶다. 짐승들도 그렇겐 하지 않는다.
지금 세계는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한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와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 모두가 알다시피 바이러스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인간은 본래 보이지 않는 존재물에 공포를 느껴왔다. 예를 들어 잡귀 잡신이 그러했다. 귀신은 보이지 않으니 조금만 부정한 일을 저지르면 재앙을 불러온다고 믿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귀신을 몰아내는 온갖 비방술에 애를 썼다. 문명이 발전하고 첨단기술이 만연한 오늘날에도 우리는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 앞에 국력을 소모하고 있다. 정체는 알고 있으나 그걸 막을 방도가 없다. 기껏 할 수 있는 게 마스크를 쓰고 바깥출입을 삼가는 것이다. 사람을 만나도 거리를 두고 만나야 한다. 이 고약한 질병 앞엔 강대국도 맥을 못 쓴다. 어떤 강대국의 지도자도 이번 사태를 잠재울 수 없었다. 영웅이 필요한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똑똑하고 영리하며 유능한 사람이 우매한 민중들을 인도하던 시대는 이제 지나갔다. 지금은 각자도생(各自圖生)이다. 가장 안전한 길은 자신이 자기를 지키는 길밖에 없다. 기업도 나라도 나를 지켜주지 못한다. 이럴 때 생각나는 우화가 있다. 어느 왕국에 나이 많은 임금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임금은 한 신하를 거느리고 정원을 걷고 있었다. 그때 정원 연못 위에서 한 무리의 까마귀들이 우짖고 있었다. 왕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까마귀들이 노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왕이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궁금해서 그러네. 자네 혹시 우리 왕국에 까마귀가 몇 마리나 사는지 아는가?” 그 말에 신하는 서슴없이 대답했다. “까마귀 말씀이오니까! 우리 왕국엔 모두 칠만 육천 오백스무 두 마리의 까마귀가 살고 있습니다.” 임금은 신하의 망설임 없는 대답이 미심쩍었다. 그래서 신하에게 말했다. “그 말이 정말인가?” “어찌 거짓말을 아뢰오리까?” 임금은 신하를 믿지 못해 다시 물었다. “그보다 많은 까마귀가 산다면 어찌하겠나?” 그러자 신하는 또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보다 많은 숫자라면 그들은 이웃 나라에서 놀러 온 까마귀들입니다.” 왕은 그 말이 또 못 미더워 되물었다. “그럼 그보다 더 적은 숫자라면?” “보나 마나 우리 까마귀들이 이웃 나라에 여행을 간 것입니다.” 왕은 그만 할 말을 잃었다. 그렇다. 창궐하는 바이러스를 저지할 백신도 치료제도 없는데 이 질병을 물리칠 명쾌한 명약을 찾는 일은 마치 나라 안 까마귀 숫자를 헤아리는 일만큼 우매한 일이다. 형체도 없는 이 질병이 두려워서 사람도 만날 수 없고 하던 일도 멈추고 있다. 한두 달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하던 바람도 허물어졌다. 날이 밝으면 아침인가 하고, 해가 지면 또 하루가 저무는구나 하고, 모두가 그렇게 고독병과 투쟁을 하고 있다. 희망도 바람도 안개 속에 머물고 무기력증에 젖어있는 우리의 일상은 언제쯤에나 활기를 되찾을 수 있을는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균에 스러지는 목숨이 참 허망하다. 우리 모두 개인위생에 신경 쓰면서 밀집 밀폐된 공간을 찾지 않는 길만이 이 질병에서 벗어나는 방도이니 인간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
15일 공개된 일본 도쿄 신주쿠구에 위치한 산업유산정보센터의 전시물들이 당초 설립 취지와 달리 조선인 강제노동으로 악명 높은 하시마(군함도) 강제징용을 정당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확인돼 파문이 일고 있다. ‘일본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 관련 전시시설인 이곳에 조선인 강제징용에 대한 전시는 ‘(한국인이) 하시마에서 좋은 환경에서 생활했다’는 식의 왜곡 전시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일본의 야비함이 또 한 번 적나라하게 드러난 셈이다. 지난 2015년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할 즈음 일본의 약속은 이게 아니었다. 당시 사토 구니 주(駐) 유네스코 일본대사는 “(하시마 등 일부 산업시설에서) 과거 1940년대 한국인 등이 ‘자기 의사에 반해’ 동원돼 ‘가혹한 환경’하에서 ‘강제노역’했던 일이 있었다… 희생..
필자는 어느 한 연극 웹진에 일 년에 세 네 번 공연 관람 후 리뷰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지난봄부터는 리뷰를 쓰지 못하고 있었다. 여전히 안전 수칙을 지키며 조심스레 공연을 올리고 있는 극장이 있긴 하지만, 막 학교를 입학한 딸과 이웃을 생각하면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공연장을 방문하기가 망설여졌다. 바이러스가 문화행사와 공연, 전시를 멈추게 했다는 소식이 속속 들려왔고 적막감을 느꼈다. 어렵다, 어렵다 했어도 굴러가기는 했던 전시장과 공연장이었는데 그나마도 멈추고 나니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그대로만 멈추고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 최신 공연 영상이라도 보고 리뷰를 쓰자고 마음먹었다. 그랬더니 ‘극장 용’에서 하는 어린이 작품이 가정의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친김에 온라인 인터넷으로 온라인 공연과 전시 소스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이름 모를 가수의 한 유행가 가사가 머릿속을 강타했다. 온라인에서 꽤 많은 콘텐츠들이 나돌아 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롯데콘서트홀, 국립현대미술관, LG아트센터에서 공연 생중계를 하고 있었다. 심지어 베를린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공연이 며칠간 유저들에게 무료로 제공되고 있었고, 일부 공연은 적은 금액에 온라인 관람이 가능했다. 필자는 평소 신문물의 유행에 아주 늦게 편승하는 편이었고, 지금까지는 그것에 그다지 불편함을 느끼진 않았지만, 이번에는 그 점을 깊이 반성했다. 정보가 없었던 탓에 지난 한 달간 좋은 콘텐츠들을 여럿 놓쳤기 때문이었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듣보잡’ 바이러스였던 코로나가 우리의 일상을 짓눌러 버리고 있다. 하지만 바이러스 덕분에 실제로 보기 어려운 귀한 공연·전시 콘텐츠들을 집안에서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게 되었으니 뜻밖의 수확이라고 해야 하나. 이처럼 발달된 통신망과 매체는 코로나로 완전히 공백이 되어버릴 뻔했던 일상의 영역을 조금은 채워주고 있다. “거봐 내 뭐라고 했어. 대중매체가 반드시 우리 삶에 해로운 것만은 아니랬잖아~” 미디어 아티스트 백남준이 살아 돌아온다면 씩 웃으며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을까. 소설가 조지 오웰은 ‘1984’라는 작품에서 대중매체가 독재의 수단이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하지만 백남준은 그 예견이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고 했다. 대중매체가 우리 삶을 서로 연결해 주고 대중들의 삶에 창조력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1984년 1월 1일 정각 ‘굿모닝 미스터 오웰’라는 제목의 대대적인 쇼를 텔레비전에 송출했다. 한국, 프랑스, 미국의 방송국과 함께 했던 쇼였다. 1984년이 암울한 독재가 아닌 유쾌한 쇼로 시작되었다는 것을 고인이 된 조지 오웰과 대중들에게 널리 알리는 쇼였다. 1984에 상연된 쇼를 당연히 본방사수하지 못했지만 2014년 백남준아트센터에서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라는 전시를 관람했던 덕분에 당시의 유쾌한 분위기를 충분히 즐길 수 있었다. 실제로 매체들이 대중들에게 쉽게 접근되도록 열려있는 덕분에 우리의 삶은 많은 변화를 겪었다. 톡톡 튀는 아이디어만 있으면 누구나 콘텐츠를 만들어 매체에 올리고 스타가 될 수 있다. 학생이나 유치원생도 예외는 아니다. 뉴스를 방송국 정규 편성 프로그램이 아닌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접할 수 있게 되었다. 거짓 뉴스도 많아졌고 그것을 폭로하는 뉴스도 많아졌으며, 진실공방도 치열하다. 다행스럽게도 우리 사회는 조지 오웰이 예견한, 독재자가 대중매체를 장악한 암울한 세상은 아니다. 우리 역사에서 그럴뻔했던 적은 있었지만 말이다. ‘와우!’를 연거푸 외쳐야 할 만큼 기쁜 일이 아닌가. 1984년 1월에나, 2020년 6월 15일에나 말이다. 물론 몇몇 공연·전시 콘텐츠가 온라인으로 소개되고 있다고 해서 마냥 좋은 상황은 물론 아니다. 온라인 생중계는 자금력과 시스템을 갖춘 일부 공연장이나 기관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형편이기 때문이다. 콘텐츠도 일부 장르에 편중되어 있는 상황이다. 온라인 중계는 입장 수입을 내지 못하기에 이러한 상황이 장기화된다면 열악한 단체들은 물론 국공립 기관들마저 자립이 어려운 상황이 되어버릴 것이다. 무엇보다 현재 작품들은 ‘아우라’를 충분히 관객에게 전하지 못하고 있다.
1920년대에 미국 유학생은 아주 특별했다. 경기도 파주 출신의 정태진은 그 특별한 유학생 중에서도 특별히 똑똑했고, 특별히 가난했다. 장학금과 아르바이트로 우스터대학을 수석졸업하고 컬럼비아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귀국한 정태진은 친일파들이 득실거리는 경성에 뒤로하고 유학 전 재직했던 함흥의 영생여고보(현 수원 영생고)로 돌아갔다. 조선어와 영어과목을 맡은 그는 수업을 마치면 우리말 채록(말모이)에 온 힘을 기울였다. 학생들은 그를 존경하고 따랐다. 그때 정태진에게 배웠던 소설가 임옥인은 ‘일본어 사용이 강요되고 우리말 교육이 맥을 못추던 때 우리는 선생님을 통해 모국어의 아름다움과 국문학의 정수를 접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1938년, 일제가 조선어교육과 사용을 전면금지하면서 정태진의 담당 교과는 조선어와 영어가 아닌 ‘대수’와 ‘수신’으로 바뀌었다. 학교를 그만둔 정태진은 조선어학회의 <조선말 큰사전>편찬 작업에 뛰어들었다. ‘일본이 지도상에서 조선을 지워버린다고 해도 조선어가 남아 있는 한 조선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조선말 사전이 있는 한 조선어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생각으로 사무실에서 먹고 자며 일을 했다. 그런 정태진과 조선어학회를 일제는 가만히 두지 않았다. 과거에 정태진으로부터 배운 여학생의 일기장을 털어 정태진이 금지된 한글과 민족정신을 가르쳤다는 정황을 포착한 일제 경찰은 정태진을 필두로 조선어학회 간부들을 모두 잡아들이고 가혹하게 고문해 이른바 ‘조선어학회사건’을 만들었다. 1년 넘게 취조, 고문하며 친일을 강요했지만 아무도 굴복하지 않았다. 이들의 투쟁은 항일무장 투쟁의 최정점인 ‘봉오동-청산리 전투’에 비견할 수 있는 ‘항일문화 투쟁’의 최정점이었다. 이 과정에서 이윤재, 한징선생이 옥사하고, 가장 먼저 잡혀들어가 가장 오래, 가장 가혹하게 고문을 당했던 정태진은 해방된 1945년에야 함흥형무소 문을 나섰다. 미군이 진주하고, 미군정이 시작되었다. 영어 몇 마디만 해도 행세를 하는 시대에 친일의 티끌 하나 묻히지 않은 미국 우스터대학의 수석졸업생으로 4개국어에 능숙한 정태진의 앞길은 탄탄대로였다. 그러나 그는 미군정청 장관도, 국회의원도 다 마다하고 만들다 만 우리말 큰사전을 끝내는 일에 매달렸다. 한글을 망가뜨리려는 이승만에 맞서며 전쟁의 포성 속에서 편찬한 사전을 조판 인쇄하다가 최후를 마쳤다. 작은 공적도 큰 공적으로 꾸며대고, 심지어는 친일매국노들의 덮을 수 없는 죄악마저 가소로운 업적으로 가리며 기념까지 하는 시대에 단 한 번도 자신을 앞세우지 않았던 참 지식인, 진정한 애국자 정태진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자신을 앞세워 스스로 이름을 높인 자들은 앞다퉈 기념하면서 나라의 말과 글을 지키는 일에 생애를 고스란히 바친 정태진을 기념하는 추모행사를 여는 단체, 기관 하나 없다. 올해 경기도가 기획한 ‘문화예술 일제잔재 청산 공모’사업이 눈물겹게 고맙고 반갑다. 해방 75주년이다. 친일, 이제는 청산할 때도 되었다. 국민의 이름으로 기리고 기념할 것을 기념하는 나라다운 나라로 가는 길을 경기도가 보여주고 있다.
생존. 요즘 들어 이 생존이라는 단어가 많이 들려온다. 코로나19 이후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지에 대한 전략을 논하는 학자나 전문가들의 코멘트도 많아졌고, 굳이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SNS를 통해 각자의 삶의 영역에서의 생존에 대한 의견을 피력하는 경우도 부쩍 늘었다. 이는 창업, 부동산의 투자나 주식의 매수, 매도 시기에 관한 이야기를 하던 어제의 경제적 생존 전략과는 다른 의미와 무게감으로 다가온다. 매일 같이 아침 TV 방송에서 보이는 전문의들의 건강 상식에 관한 이야기도 생존의 관점에서 보면 그 궤를 같이 하지만, 이전과 비교하면 건강이라는 부분 역시 그 피로도가 상당히 증가했다. 우리 모두가 경험해 보지 못한 세상을 살고 있는 지금, 생존 전략이라는 것에 대한 실마리와 해결책을 찾기 위해 각자가 치열한 사투를 벌이고 있다. 펄(Pearl)이라는 드럼 브랜드가 있다. 1950년대에 설립되어, 야마하(Yamaha), 타마(Tama) 등과 함께 일본을 대표하는 드럼 제조사 중 하나이다. 전 세계적으로도 수많은 엔도서(Endorser)를 가지고 있는 회사이며, 전설적인 밴드 토토(Toto)의 제프 포커로(Jeff Porcaro), 딥 퍼플(Deep Purple)의 이안 페이스(Ian Paice), 키스(Kiss)의 에릭 싱어(Eric Singer) 등이 펄 드럼을 사용했다. 이 회사의 공식 명칭은 펄 악기제조 주식회사(パ-ル樂器製造株式會社)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악기를 만드는 회사다. 드럼 이외에도 기타, 피아노를 비롯해 대부분의 관현악기를 만드는 야마하와는 달리, 펄은 드럼과 그에 관한 하드웨어 그리고 타악기 등을 위주로 제조하고 취급한다. 이런 곳에서 새로운 하이 햇(Hi-hat) 스탠드가 나왔다. 하이 햇이란 드럼 세트의 부속품 중 하나로 열고 닫히는 심벌즈를 고정된 심벌즈 위에 얹은 악기인데, 하이 햇 스탠드는 하이 햇 심벌즈가 설치된 스탠드 하단에 페달이 달려 있어, 두 장의 심벌즈가 여닫히는 동작을 하게끔 만들어져 있는 장치를 일컫는다. 드럼과 타악기를 만드는 회사에서 새로운 하이 햇 스탠드가 나온 것은 그리 큰 뉴스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이번에 나온 제품은 드럼 연주를 위해 나온 것이 아니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하이 햇 스탠드가 아니라, 손 소독제 스탠드이다. 기존 드럼 세트에 사용되던 하이 햇 스탠드의 상단에 심벌즈가 아닌 손 소독제 거치대를 놓고, 하단의 페달을 발로 밟아 용기에 담긴 소독제가 나오게 만든 장치인 것이다. 처음 이 기사를 접하고 마치 만우절의 장난처럼 사실 여부에 반신반의했지만, 공식 블로그에도 게재가 됐음을 확인했다. 발상의 전환이라고만 생각하기에는 감정이 복잡해진다. 이것저것 다 만들고 취급하던 회사였으면 그러려니 했겠지만, 타악기 전문 제조 회사에서의 이런 행보는 다소 놀라웠다. 이번 제품이 회사의 매출에 얼마의 영향을 가져다줄지는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의 생존 전략으로 이런 제품을 내놓았다는 사실이 내게는 꽤나 고무적이었다. 많은 학자들이 더 이상 코로나19 이전의 세상으로 돌아가기 힘들다고 예측 한다. 이런 의견이 반갑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부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입시 전쟁, 스펙 경쟁, 취업 전쟁, 이념 대립과 각 세대의 갈등, 성 대결 등, 그 이전부터 우리는 생존을 위해 충분히 몸부림치며 살아오지 않았나 싶다. 여기에 하나 더 추가된 코로나라는 미증유의 장애물이 버겁게 느껴지지만, 지금의 사회를 살아가는 생존 기술과 전략에 대해 유연한 사고가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시민이 주인이 되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가권력은 시민 개개인으로부터 위임받아 형성된 위임권력이다. 위임권력은 시민의 그것에 군림할 수 없다. 다만 국가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일정한 경우 법률에 의해 제한 될 수 있을 뿐이다. 그마저도 본질적인 부분에 대한 제한은 불가능하다. 이것이 헌법 제37조 제2항이 규정한 법률유보의 원칙이다. 근래 들어 헌법 제37조 제2항이 대한민국 사회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바로 ‘대북전단살포’ 때문이다. 최근 북한의 김여정 조선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 군사적 행동까지 언급하며 강력히 반발하고, 경기도가 대북전단 살포를 강행 할 경우 현행범으로 체포하겠다고 나서면서 갈등이 극에 달하고 있다. 대북전단 살포를 강행하겠다는 주최 측은 표현의 자유를 내세우며 이 역시 자신들의 권리라고 주장한다. 앞서 언급했듯 민주주의 사회에서 시민의 권리는 최대한 보장되어야 한다. 특히 표현의 자유는 여타 다른 권리보다 더욱 두텁게 보호 되어야 한다. 표현의 자유는 민주주의 작동의 기본 원리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시민들이 공동체의 의사결정 과정에 자유롭게 참여함으로써 유지·발전된다. 좁게는 시민들이 살아가는 마을 공동체 넓게는 지방자치단체에서 국가까지, 공동체의 정책적 결정 사항에 시민들이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민주주의는 작동된다. 이를 넓은 의미에서 정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는 시민이 정치에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을 때 원활히 작동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시민이 정치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즉 표현의 자유가 두텁게 보장되어야 정치가 원활히 작동할 수 있고 그래야 민주주의가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표현의 자유는 최대한 보장되어야 하고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 한해 제한되어야 한다. 대북전단살포 역시 자신들의 의견을 전단지, 소책자, SD카드 등의 매체를 통해 북한의 주민들에게 전달하는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표현의 자유에 의해 보호되어야 하는 권리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표현의 자유라고 하더라도 보호의 필요성이 강조될 뿐 제한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표현의 자유가 제한될 수 있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어떤 이의 표현이 다른 공동체 구성원의 표현의 자유를 현격히 억압하는 경우와 공동체에 즉각적인 위해를 야기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대북전단은 북한 정권에 대한 원색적 비난을 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3대째 권력을 세습하고 있는 북한 김정은 정권을 옹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 헌법은 평화통일을 추구하고(제4조) 전쟁을 반대한다(제5조). 그렇기에 당연히 한반도의 통일은 전쟁을 수반하지 않는 평화로운 방식을 추구해야 한다. 평화로운 방식의 통일을 위해서는 북한과의 대화가 전재되어야 한다. 북한을 대화 상대방으로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북전단을 살포하고자 하는 이들의 방식대로 한다면 북한은 대화의 상대방이 아닌 대결의 대상이 된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대북전단을 살포하고자 하는 이들은 북한 주민들에게 전단을 날려 보내는 데서 그치지 않고 남한 내부에서도 정치적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러한 북한에 대한 극한의 혐오 표현은 남한 공동체 내에서 평화통일을 추구하는 이들을 억압하는 방식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이들의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다. 표현의 자유가 민주주의 근본적인 작동원리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오히려 다른 이의 표현의 자유를 억압함으로써 민주주의를 훼손한다면 당연히 제한되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공동체에 즉각적인 위해를 가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민주주의는 공동체를 운영하기 위한 방식이다. 그렇기에 공동체에 위해를 가하는 행위는 민주주의와 공존하기 어렵다. 그동안 북한은 끊임없이 대북전단 살포에 대해 민감한 보여 왔다. 급기야 최근에는 대북전단 살포가 계속된다면 군사적 행동도 배제하지 않겠다는 성명까지 발표한 바 있다. 이처럼 군사적 충돌까지 우려되는 상황에서 대북전단 살포를 강행하겠다는 것은 공동체에 즉각적인 위해를 가하는 행위일 것이다. 대북전단 살포가 표현의 자유에 포섭되는 권리임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것과 공동체의 이익을 비교형량 할 필요도 없이 대한민국에서 함께 살아가는 이들에게 즉각적인 위해를 가한다면 당연히 제한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