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진'검색결과
상세검색안타깝게도 국내외 모두에서 흥행에 실패한 실사영화 ‘인어공주’는 몇 가지 지점에서 다른 면을 지니고 있다. 그것도 두드러질 만큼 아주 다른데 짐작하는 것과는 달리 인어공주가 흑인이라는 점이 제1의 요소는 아니다. ‘공주=흑인’은 차이라기 보다 비교적 단순한 특징, 캐릭터의 외모 설정에 불과하다. 인어공주가 흑인이기 때문에 내용이 달라지거나 극 전체의 톤 앤 매너가 달라지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냥 피부가 까매서 처음엔 다소 ‘신기하게’ 느껴지다가도 이내 그건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란 걸 알게 된다. 이번 ‘인어공주’가 안데르센의 원작이나 1989년에 나온 애니메이션 ‘인어공주’와는 궁극의 지점에서 각각의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1) 원작과는 결말을 완전히 다르게 갔다는 것이고 2) 1989년 애니메이션과는 왕자의 캐릭터가 아주 다르다는 것이다. 이번 실사영화에서 왕자는 ‘백마를 탄’ 이미지가 아니다. 그는 다른 선원들과 함께 갑판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백성처럼, 일반 국민처럼 살아가려는, 그래서 ‘보통 사람의 정치학’을 깨달아 가려는 꽤 괜찮은 덕목의 지도자 청년으로 나온다. 심지어 왕자는 그리 잘생기지도 않았다. 외모상 아주 매력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의도적으로 평범한 인물로 그리려 애쓴다. 덴마크 작가 안데르센의 원작은 비극이었다. 이번 실사 영화는 해피 엔딩이다. 인어공주는 원작처럼 물거품이 돼 사라지지 않는다. 원작에서 왕자는 다른 여자(우아한 옆 나라 공주)를 선택해서 인어를 배신하지만 이번 실사에서는 다시 인어공주인 에리엘(할리 베일리)에게 돌아간다. 왜냐하면 다른 여자가 곧 흉측한 문어 마녀 울슐라(멜리사 매카시)인 것이 밝혀지기 때문이다. 이건 꽤나 진부한 선택인데다 안데르센이 지닌 잔혹하고 우울한 취향을 ‘배반한’ 것이어서 작품을 완전히 다른 지점에 갖다 놓은 최고의 동력이 된다. 감독 롭 마샬(뮤지컬 전문 감독으로 ‘시카고’와 ‘나인’, ‘메리 포핀스 리턴즈’를 만들어 성공했다. 최고의 작품은 ‘숲속으로’이다. 극영화로는 ‘게이샤의 추억’이 성공했다.)이, 안데르센은 안데르센이고 자신은 자신으로서 자신만의 인어공주를 만들겠다고 생각했다면 원작과 다른 결말이야말로 그걸 성공하게 한 요인이 된다. 하지만 이런 결말은 이미 1989년의 애니메이션에서 일정 부분 차용해 온 것이어서 그다지 신선한 것은 아니다. 디즈니는 세계 청소년 관객들을 위해 잔혹한 비극의 결말을 ‘결단코’ 피해 가려는 경향을 보인다. 그 점에서 이번 실사 판 ‘인어공주’는 디즈니의 제작 철학과 그 궤를 같이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번 실사영화에서 롭 마샬이 강조점을 두려 했던 것은 인종 문제, 미국 내 인종차별의식에 대한 비판의식을 고양시키려 하는 것 ‘따위’는 아니었을 것이다. ‘흑인 인어공주’는 디즈니의 얄팍한 상술이자 세계 시장을 겨냥한, 일종의 맥거핀(진짜 이야기의 실체를 드러내는 데 있어 그 효과를 최대화하기 위해 앞서 전개시키는 가짜 이야기. 트릭.)이다. 디즈니는 의도적으로 논란을 만들어 냄으로써 최대치의 마케팅 효과를 노린 셈이다. 할리우드는 청년 세대들을 겨냥해 혁명마저 상품으로 내다 파는 진짜 장사꾼들이다. 2011년 뉴욕 증권가 월스트리트에서 벌어진 청년들의 격렬했던 시위 ‘오큐파이 월스트리트(Occupy Wall Street)를 점령하라’ 이후에 나온 영화가 제니퍼 로렌스 주연의 ‘헝거 게임’시리즈였다. 할리우드는 좌파나 우파나 가리지 않는다. 돈만 벌 수 있다면 스스로 게릴라가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흑인 인어공주는 그런 관점에서 보면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이번 실사판 ‘인어공주’의 주제는 왕자의 대사에서 나온다. 왕자 에릭(조너 하우어 킹)은 뱃머리에서 저 멀리를 바라보며 신하 그림스비 경(아트 말릭)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저 외부로 나아가야 합니다. 외부 사람들을 만나야 합니다. 그것만이 우리 (섬) 왕국이 살아갈 수 있는 길입니다.” 에릭의 왕국은 여왕(노마 두메즈웨니)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는데 여왕은 현재 바다의 신 트리톤(하비에르 바르뎀)과 대립해 싸우고 있다. 트리톤은 여왕의 나라에 의해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아내를 잃었다. 그는 현재 7대양의 바다에 인어공주 딸 7명을 키우고 있으며 그중 막내가 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인어공주’의 원제는 the little mermaid, 곧 ‘막내 인어’이다.) 영화 ‘인어공주’의 설정, 곧 섬 왕국을 둘러싼 국제정세(?)는 미중 G2의 갈등을 의미하며 에릭은 (트럼프처럼) 장벽을 쌓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일국 자본주의나 자국 우선주의에서 벗어나 공생과 연대의 세계화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믿는다. 개방만이, 오픈 마인드만이 살 길이라고 그는 확신한다. 그런 에릭에게 적국의 막내 공주를 사랑하게 되는 일은 매우 정치적인 승부수에 해당하는 일이다. 영화는 결국 둘이 결실을 맺게 한다. 그건 세계 평화를 이루어 내거나 이루어 낼 수 있다는 희망을 품자는 얘기와 동음이의어이다. 우크라이나 젤렌스키의 아들이 러시아 푸틴의 딸을 사랑한다면 두 나라는 전쟁을 멈출 수도 있겠다. 실로 동화 같은 상상이지만 그럼에도 흐뭇해지는 건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인어공주’의 진짜 주인공은 인어가 아니라 왕자이며 적어도 각각이 아니라 이 남녀 커플 두 명 모두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탈(脫) 인종주의가 아니라 탈 패권주의에 의한 세계 평화와 공존이라는 것이 ‘인어공주’의 핵심 메시지이다. 롭 마샬은 뮤지컬의 대가이고 노래와 춤의 연출에 있어서 전문가 중 최상위 급으로 분류되는 인물이다. 당연히 ‘인어공주’의 백미는 주인공 에리얼의 노래이다. 할리 베일리의 노래는 이 영화를 두고 벌어진 이런저런 논란과 논쟁을 잠재울 만큼 최고 수준이다. 영화는 별로지만 베일리 노래 하나는 끝내줘, 라는 식이다. 또는 영화도 괜찮은데 정말 노래가 대단해, 라는 평가도 이어진다. 그만큼 할리 베일리의 음성과 노래 실력은 신의 영역이다. 베일리가 워낙 압도적이라 다른 배우들의 안무와 노래는 빛이 나지 않는다. 그럴 바에야 아예 비중을 줄이는 것이 낫다고 롭 마샬은 판단했고 그 대신 만화 캐릭터인 갈매기 스커틀(아콰피나)과 게 세바스찬(데이비드 디그스), 물고기 플라운더(제이콥 트렘블레이)가 바다속 생물들과 합창을 하는 노래 ‘언더 더 씨’에 각을 줬다. 이 영화의 하일라이트에 해당한다. 굉장히 행복하고 유쾌해 보이는 척, 노래 가사는 참혹한 현실을 우회적으로 비판한다. ‘언더 더 씨’는 영화 ‘인어공주’의 모든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다. 『에리얼 내 말 좀 들어 봐 / 인간 세상은 엉망이야. / 바다 밑의 삶이 그 어떤 것보다 낫다구.. /.. 너는 육지로 올라가는 걸 꿈꾸지만 그건 큰 실수야…/…. 저 바다 밑 저 바다 밑…/…저 물가에서는 하루 종일 일하지 / 태양 아래의 노예처럼….』
캄보디아계 프랑스 감독 데이비 추가 만든 ‘리턴 투 서울’은 의도한 건지 오해한 건지, 서울과 한국이라는 공간 그리고 거기에 얽힌 시간을 굴절시킨다. 마치 깨진 거울로 일그러진 자신의 얼굴을 보는 느낌을 준다. 데이비 추는 코끼리 엉덩이를 만지듯 한국의 일상을 담아낸다. 시작부터 김추자의 ‘꽃잎’ 같은 노래를 흘린다. 영화 내내 김추자나 신중현 같은 한국의 올드 팝이 사용된다. 영화 전체적으로는 다소 뜬금없거나 지나치게 감독 개인 취향으로 보인다. 데이비 추는 자신 스스로가 인상 깊었던, 자신이 알고 있는 내에서만 한국의 공간을 그려내는데, 그건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보다 정확하게는 맞지 않지만 맞지 않지만은 않다. 아마 사람들 눈에 비친 이방인의 삶은 일정 부분 그렇게 왜곡될 것이다. 이국적이고 이색적일 수 있다. 칸 영화제가 이 작품 ‘리턴 투 서울’을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올려놓은 것은 그 때문일 수 있다. ‘리턴 투 서울’은 갓난 아기 때 프랑스로 입양된 프레디라는 여성(박지민)이 한국에서 자신을 버린 아버지와 엄마를 만나게 되는 이야기(인 척 꼭 그것만은 아니다)다. 어쨌든 프레디는 25살에 2주 일정으로 서울에 왔다가(원래는 도쿄로 가려 했으나 비행기 사정으로) 뜻하지 않게 한국의 입양시설인 ‘하몬드’에서 생부가 사는 곳이 군산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친아버지는 그녀를 보고 싶어 한다. 그녀는 친구인 테나(구카 한)와 군산에 가서 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고모를 만나고 서울로 돌아온다. 첫 ‘리턴 투 서울’이다. 복잡한 심경인 프레디는 막무가내로 문자를 보내는 생부 때문이기도 하지만 뭔가를 정리할 요량으로 다시 군산에 가서 사흘을 머무른다. 아버지와 할머니는 끝없이 그녀를 불편하게 만든다. 아버지는 한국으로 돌아와서 자신과 살자고 한다. 그녀는 그런 아버지와 식구들에게 자신은 프랑스인임을 강조한다. 사흘 후 그녀는 서울로 돌아 온다. 두 번째 리턴 투 서울이다. 이후 5년이 흐르고 파리로 돌아갔던 그녀는 서울로 출장을 온다. 이것이 세 번째 리턴 투 서울. 이 남자 저 남자와 스스럼 없이 섹스를 즐기는 프레디는 즉석 만남으로 ‘늙다리’ 유럽 남자 안드레(루이스 도 데 렌쿠에사잉)를 선택한다. 안드레는 무기상이다. 이 인연으로 프레디는 국제무기회사의 로비스트로 일하게 된다. 2년 후 프레디는 애인인 막심(요안 짐머)과 다시 서울에 온다. 네 번째 리턴 투 서울이다. 그녀는 조금 성숙해진 태도로 서울에 온 아버지를 만난다. 이제 아버지도 술을 줄이고 마구잡이로 그녀에게 매달리지 않는다. 오히려 이번엔 그녀를 빨리 보내 버리려 한다. 아버지의 마음이 또 변한 것처럼 느껴진다.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그녀는 막심에게 이렇게 말한다. “언제든지 난 널 지워 버릴 수 있어.” 근데 그건 무기상인 안드레가 언젠가 그녀에게 한 말과 묘하게 겹치는 느낌을 준다. 무기상이란 직업에 대해 안드레는 이렇게 말한다. “중요한 건 무기가 아냐. 얽히고설킨 관계이지.” 프레디는 입양 주선기관인 하몬드의 도움으로 전주에 있는 생모를 만난다. 엄마와 만날 때 프레디는 처음으로 울먹인다. 둘 사이에 대화는 보여지지 않는다. 프레디는 서울로 돌아갔다가(다섯 번째 리턴) 프랑스로 아예 돌아간다. 동유럽의 한 시골 마을을 여행하던 그녀는 엄마에게 서툰 한국말로 이메일을 보내지만 이메일은 반송된다. 그녀는 호텔 로비에 있는 피아노를 살짝 두드리는데 언제가 아버지가 자신이 만들었다며 소개해 준 곡인 것처럼 들린다. 문제는 프레디가 아니라 그리고 프레디로 보여 주려는 영화의 내용이 아니라, 얽히고설킨 관계일 수 있다. 영화는 수차례나 프레디를 서울로 돌려보내면서 그녀가 변하거나 성장하거나(실제로 프레디는 25살에서 32살의 여성이 된다) 세상이 바뀌고 그 관계들이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이 영화는 입양아의 생부 혹은 생모 찾기 프로젝트를 다룬 영화가 아니라 한 여성의 자아 찾기, 성장기, 내면의 성찰을 담은 이야기이다. 그래서 언뜻 여행을 많이 하지만 그게 궁극적으로는 자신 안으로의 여행이기 때문에 가이드가 있는 것처럼 친절한 느낌을 주지 않는다. 영화가 종종 기이한 느낌을 주저하지 않는 이유이다. ‘지금 한국에는 저런 공간이 메인이 아냐’라는 말은 의미가 없다. 장님이 코끼리 만지듯 한 것도 한국이나 서울의 공간을 있는 그대로 그려 내는 것이 이 감독에게는 하등의 중요성이 없기 때문이다. 생부의 다소 무지해 보이는 삶, 그런 태도 등을 가리켜 지나치게 한국인의 특정 부분(정이니 한이니 하는 것)만을 부각한 것이라는 비판도 의미가 없다. 진짜로 어색한 것은 대대로 어부 집안이었다는 아버지가 피아노곡을 직접 만들었다는 것인데, 그것도 그리 중요한 부분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무기가 아니라 얽히고설키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리턴 투 서울’은 현실의 비현실성, 비현실의 현실성을 가득 담아내고 있는 영화이다. 영화는 종종 진짜 현실을 판타지하면서도 비현실적인 느낌으로 담아낸다. 곧 ‘현실의 비현실성’이다. 또 영화는 종종 영화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 이야기가 단지 영화일 뿐이라는 그 비현실이 사실 현실 속에서 실제로 무수하게 벌어지고 심지어 반복된다는 점을 불현듯 깨닫게 만든다. 곧 ‘비현실의 현실성’이다. 영화 ‘리턴 투 서울’은 이처럼 현실과 비현실의 느낌을 교차, 교직시키고 더 나아가 변증(辯證)시키며 삶의 본질에 대한 자각과 성찰을 증폭시킨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자신 스스로 영화 주인공인 프레디처럼 한 뼘 더 성장했음을 느끼게 해 준다. 이 영화의 매력은 바로 그 지점에서 찾아진다. 영화에서는 두 개의 골목 신이 나오는데, 그게 프레디의 꿈인지 실제인지 불분명하게 처리된다. 프레디는 LP바에서 한바탕 춤을 춘 뒤 그곳 주인으로 보이는 사내와 팔짱을 낀 채 골목길에 들어 선다. 그녀는 서울에 오자마자 만나 동침했던 동완이라는 남자아이(손승범)의 구애를 막 뿌리친 참이다. 새로운 섹스, 일탈, 그리하여 얻게 될 현실 도피의 달콤한 유혹에 들떠 걸어가던 프레디 앞에 아빠라는 작자가 나타난다. 그는 프레디에게 이런 인간이나 만나고 다니지 말라고 한다. 뒤에서는 친구인 테나가 아버지의 말을 통역해 준다. 골목은 어둡고 세 인물 혹은 네 인물(LP바 남자까지 포함해서)은 가로등 불빛 조명을 받아 어둠 속에서도 인물만 강조돼 그려진다. 마치 연극 무대에서 전체는 암전이 된 상태에서 인물들에게만 핀 조명이 떨어지는 효과 같은 느낌을 준다. 이건 분명히 데이비 추 감독이 의도한 디자인이다. 이때 프레디는 아빠를 거칠게 떠밀며 자신을 잡지 말라고 소리친다. 실제로 프레디가 아버지에게 그렇게 굴었을까 아니면 그건 꿈이거나 자신 내부의 목소리였을까. 또 하나의 골목 신은 막심에게 못된 말을 한 후(“난 널 언제든 지워 낼 수 있어”) 눈을 떠 보니 골목에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프레디는 진짜 술에 취해 클럽의 후미진 골목길에서 잠이 든 것일까. 아니면 그렇게 버려져 있는 자신을 꿈속에서 내려다보는 것일까. 그 모든 것이 불분명하고 불친절하지만 중요한 것은 꿈이든 아니든 상관이 없으며, 꿈이든 아니든 결론은 같다는 것이다. 어릴 때 버려졌던 그녀는 이제 그녀가 버리려고 애쓰지만 그게 그렇게 쉽게 되지 않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된다. 중요한 것은 ‘무기가 아니라 얽히고설키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영화가 불필요하게 징징대지 않아서 좋다. 오히려 프레디처럼 다소, 늘, 화가 나 있다. 프레디가 처음 진짜 가족을 만날 때도 근접 촬영이 아닌 롱숏으로 멀리서 보여 주는 기교도 좋았다. 구태의연하지 않으려는 그 태도가 좋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턴 투 서울’은 꽤 불균질한 텍스트의 영화이다. 어떤 사람은 그 이색의 성향에 열광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 예술적 치기를 폄하할 것이다. 어느 쪽이든 새로움을 시도한 영화이다. 그것만으로도 평가받을 만한 충분한 이유와 자격이 있다. 늘 그런 법이다.
사람들의 일상은 대체로 모르거나 아니면 모른 척 하는 삶이다. 산간 벽지에 의사들이 가지 않으려 그리 애쓰면서도 만약 그곳에 살고 있는 간호사가 일정한 법령에 의거하여 의료 활동을 하는 것(노인들 영양 주사를 놔준다든지, 감기몸살 약을 처방해 준다든지)에 대해서는 사활을 걸고 반대를 하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이제 그 시시비비에 둔감해 한다. 어차피 세상이 공정과 상식과는 거리가 멀어졌고 진영의 싸움만이 노골화 됐는데, 그리하여 이제는 모두 북중러에 맞서는 한미일 전선에 투입돼야 할 판인데도 오로지 어떤 팝송을 불렀네, 만나서 뭘 먹었네, 어떤 여인이 뭘 입었네 하는 것만 가지고 입방아를 찧는다. 그마저도 그리 관심이 오래 가지 않는다. 잘못된 위정자는 국민의 무관심을 증폭시키고 그것으로 권력의 본래적 야욕을 감추려 한다. 역설적으로 개중 누군 가는 그러니까, 매우 정치적, 아니 권모술수적인 인간이라는 얘기이고 그런 인간이 있다는 얘기이다. 문화 쪽에서는 부산국제영화제가 그렇다. 여기가 대체로, 지금의 정부 마냥, 아수라장인데도 사람들은 넋 놓고 손 놓고 앉아 있다. 어쩌려고 그러는지 한숨이 나온다는 소리들이 많다. 그 이유는 생각해 보면 자명하다. 많은 사람들이 내 그럴 줄 알았어,라고 말한다. 진작에 예상됐던 사태라는 것이다. 그래서 초반에 얘기도 많이 하고 걱정도 많이 하고 그랬다는 것이다. 그런데 결국 벽을 보고 얘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정작 사태가 터지니까 뭔가 고치고 변화할 의욕마저 잃은 셈이 돼버린 것이다. 부산국제영화제는 현재 이사장과 집행위원장 모두가 공석이다. 형식적으로는 그렇다. 두 직책의 사람 모두 자진 사퇴를 했기 때문이다. 역시 형식적으로만 볼 때 시작은 허문영 집행위원장이 했다. 그가 사표를 던졌다. 그러자 부산영화제로 영화계의 비난이 쏟아졌고 이번엔 이용관 이사장이 그 책임을 진다며 사표를 던졌다. 둘의 사표가 이사회에서 수리될지 여부는 아직 불투명하다. 아마도 이 글이 나갈 쯤에는 이사회의 결정사항이 발표될 것이다. 그 결과가 어떻든 부산영화제는 그 초심의 생명력을 다했다. 둘이 사표가 반려되든, 두 사람 스스로 사퇴를 철회하든 부산국제영화제에 대한 영화계의 민심을 되돌리거나 회복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된 데에는 초기 멤버들이 너무 ‘오래 했기 때문’이다. 박정희 정권도 18년을 했다. 부산영화제 멤버들은 다들 20년 넘게 자리를 이리저리 바꾸며 지켜 왔다. 당연히 새로워지지 않았으며 배가 산으로 갔다. ‘사이즈의 미학’ ‘레드 카펫의 사치스러움’ ‘스타 시스템의 행사’로만 치중됐다. 영화제는 20억원에서 시작해 140억원까지(코로나 이전) 예산을 키웠지만 정작 사무국 직원들의 복지는 그리 나아지지 않았다. 모두 한국 최고의 영화제를 위해 일을 해야 한다는 사명감의 강제성이 횡행했다. 실로 전근대적이었다. 아는 사람들은 알지만 부산시에서 교부되는 지원예산은 경상비로 전환되지 못하는 시스템으로 돼있다. 직원들 월급과 경상비는 모두 기업의 후원협찬비로 충당해야 하는데 이게 ‘쥐약’인 것이 코로나로 모든 행사가 중단됐을 때 이 협찬금은들어 올 수가 없는 것이 돼버렸으며 따라서 직원 월급은 고스란히 은행 빚으로 남게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쌓인 게 십수억원이다. 반면 지방자치단체 교부금을 경상비로 전환시키도록 시행령을 바꾼 곳은 전주와 부천, 제천영화제 등이다. 부산영화제는 그들처럼 되기 위하여 그간 부산시를 향해 정치적 법적 요구를 줄기차게 해왔어야 했다. 투쟁이라도 했어야 옳았다. 그런데 그 방향으로 가는 건 일찌감치 포기하고(시장과 싸우려 하지 않으려 했는지, 잘 보이려 했는지) 기업 마케팅을 강화하는 쪽으로 갔다. 그러니 당연히 영화제 운영에 있어 기업경영 논리가 우세해질 수밖에 없었으며 이는 결과적으로 조직 내부의 갈등으로 비화할 소지를 키운 셈이 됐다 십여년전, 부산영화제가 승승장구할 때 미국 독립영화계의 태두 선댄스영화제의 존 쿠퍼 집행위원장이 온 적이 있다. 쿠퍼 위원장이 부산영화제를 둘러본 후 한 말은 지금 와서 보니 꽤나 선견지명이 있는 얘기였다. 그는 ‘영화제가 너무 크다’고 했다. ‘내실에 더 힘을 기울이는 게 좋다’고도 했다. 맞는 얘기다. 영화제는 영화를 보여주는 것이다. 상영관을 더 늘리고 영화를 2회, 3회 틀게 함으로써 관객들에게 관람 기회를 더 주고, 영화에 대해 사고하고, 또 그럼으로써 세상에 대해 보다 진실되게 걱정하게 하는 것, 그래서 정치적 문화적으로 연대하게 하는 것, 그것을 제1의 목표로 해야 한다. 부산영화제가 돌아가야 할 곳은 바로 영화 그 자체, 그 본질이다. 이용관 이사장은 과거 날카로운 평론가 출신의 대학교수였다. 그는 200자 원고지에 연필로 꾹꾹 눌러 써가며 평론을 썼다. 그는 멋있는 상남자였다. 영화제가 변질된 것은 어쩌면 그런 그가 평론을 쓰지 않고 글을 멀리 하면서부터일 수 있다.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영화적 공과(功過)는 분명하다. 공만 있고 과는 없거나 과만 있고 공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모두 공과가 있는 법이다. 그건 박정희도 그랬고 문재인도 그랬다. 다만 질서 있는 퇴진을 계획하느냐 못하느냐에 달렸다. 이건 부산영화제 초기 멤버 모두에 해당하는 말이다. 세상사는 늘 그런 법이다. 너무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
올해 실제 나이 77세(1946년생)인 실베스터 스탤론이 극 중 75세 마피아 역을 맡은 국내 OTT 채널 TVING의 파라마운트 시즌 드라마 9부작 ‘털사 킹’은 미국 털사(Tulsa)를 배경으로 한다. 털사는 미국 중남부 오클라호마주의 두 번째 도시로 인구는 40만이 좀 넘는, 인구밀도가 낮은, 미국 기준으로 보면 이른바 ‘깡촌’ 개념의 지역이다. 인디언 크리크족이 카지노를 운영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며, 이 인디언 후예들도 신종 마피아로 불린다. 털사가 있는 오클라호마주는 위로는 캔사스가 있고 아래로는 텍사스가 있는 지역이다. 소위 바이블 벨트에 속한 지역 중 하나인 곳이다. 바이블 벨트는 미국 중남부에서 동남부에 걸친 기독교 지역으로 대체로 보수적이고(공화당, 심지어 트럼프를 찍고) 동성애에 대한 반대론이 강한 지역이다. 미국 최대 도시인 동부 뉴욕이나 서부 LA 등지에 있다가 이곳 털사로 온다는 것은 한 마디로 좌천이나 유배를 뜻한다. 주인공 드와이트 데이빗 맨프레드(실베스터 스탤론)가 바로 그런 인물이다. 그는 뉴욕 마피아 보스 피트 인버니치(A.C.피터슨)의 아들 치키(도미닉 롬바르도치)가 1997년에 저지른 살인사건의 죄를 대신 뒤집어쓰고 25년을 복역한 후 만기 출소한다. 조직 보스 피트와 드와이트는 두목-부하관계라기보다 절친 사이다. 드와이트는 굳게 입을 다문 채 25년을 버틴다. 조직의 비밀에 대해서도 철저하게 함구한다. 그러나 인비니치 패밀리는 감방에서 돌아온 그를 애물단지로 여긴다. 그냥 두자니 이제 실질적인 보스가 된 치키에게 걸리적거릴 것이고, 버리거나 처치하자니 조직의 룰이나 의리상 그럴 수가 없다. 새 보스 치키는 그에게 털사로 가라고 명한다. 거기서 새롭게 조직을 일구고, 개척하며 살라는 것이다. 이제 드와이트는 인비니치 패밀리의 털사 지부장이 된다. 드와이트는 거칠고 폭력적이지만 나름 지혜롭고 현명한, 게다가 25년의 복역 기간 중 책을 엄청나게 읽어서 꽤 유식하고 지적이기까지 하다. 그는 ‘샐러리맨의 죽음’을 쓰고 마릴린 몬로와 살았던 미국 최고의 희곡작가 아서 밀러를 설명하면서 헨리 밀러와는 다르다는 점을 이야기하는데(헨리 밀러가 쓴 건 ‘북회귀선’이야 라고 말하면서), 털사에서 조직하게 되는 신종 단원 중 그의 말을 알아듣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그의 운전기사가 된 25세 흑인 청년 타이슨(제이 윌)은 물론 대마초 판매상 보디(마틴 스타)조차 우드스탁이란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세상은 무식해졌다기보다 바뀌었다. 25년이라는 큰 강이 생긴 것이다. 마피아 깡패 드와이트가 겪는 털사의 삶, 신천지의 인생이 격랑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드와이트는 옛날 방식으로, 25년 전에 맺었던 인간관계의 방식으로(그는 주로 현금을 쓴다) 자기만의 마피아 왕국을 건설하기 시작한다. ‘털사 킹’은 9부 에피소드 내내 다양한 사건과 상황들을 전개시키며 보는 사람들을 TV 앞에 바짝 붙여 앉힌다. 로맨스도 비교적 상당한 분량으로 나오는데, 이 늙은 마피아는 스테이시라는 미모의 중년 여성(안드레아 새비지)을 사귀지만 끝은 그렇게 좋지가 못하다. 그녀는 에피소드 내내 드와이트 옆에서 묘한 관계를 맺는다. 연방 기관 AFT(Bureau of Alcohol, Tobacco, Firearms and Explosives :미국 주류 담배 화기 단속국) 요원인 여자가 남자에게 끌리는 이유는 그가 자신과 같은 처지이기 때문이다. 뉴욕에서 잘 나가던 요원이었던 여자는 9·11의 트라우마를 겪었고 이른바 설리 사건(미국에서 항공기가 허드슨강에 불시착한 사건) 때 큰 실수를 해 털사로 밀려온 인물이다. 스테이시는 드와이트와 동침한 다음 날 그에게 나이를 묻는다. 드와이트는 그녀에게 그렇게 직접적으로 묻지 말고 JFK가 암살됐을 때 몇 살이었냐는 식으로 물어보라고 한다. 그때 몇 살이었냐고 여자는 다시 묻고, 남자가 고등학생이었다고 하자 여자는 혼비백산 바로 옷을 챙겨 입고 호텔 방을 나선다. 나가면서 여자는 이렇게 소리친다. “난 당신이 꽉 찬 쉰다섯인 줄 알았다고!” 드와이트가 정작 마음을 기울이게 되는 여성은 스테이시보다는 나이가 좀 더 든 마가렛 드베로(다나 델라니)라는 인물이다. 목장의 여주인이고 아마도 이번 시즌1보다는 시즌2에서 드와이트를 위해 큰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목장 얘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드라마 내내 늙은 백마 한 마리가 나온다. 파일럿이란 이름의 이 말은 종종 목장에서 탈출해 말발굽 소리를 또각거리며 시내 곳곳을 다닌다. 파일럿은 늙어서 소용없는 말이지만 여전히 품위 있는 자태를 지녔다. 새벽, 차가 비어 있는 거리에서 말갈기를 휘날리며 걸어가는 파일럿의 모습은 주인공 드와이트의 모습과 대구(對句)된다. 드와이트 역시 파일럿처럼 늘 말갈기를 다듬으며(정장으로 빼입으며) 다닌다. 그 역시 외롭고 늙은데다 쓸모가 없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마피아 패밀리 중간보스로서)품위가 있고 매력적이다. 여자들이 드와이트에게 빠지는 이유이다. ‘털사 킹’은 그래서, 마피아 이야기인 척 마피아 이야기가 아닌 드라마이다. 드와이트는 털사의 터줏대감인 조직 폭력배로 바이크 갱단 카올란왈트립 일당(리치 코스터)과 일전을 벌여야 한다. 그 와중에 AFI와 FBI 양쪽의 추적을 받는다. 왈트립의 수하로 들어간 지역 경찰까지 그를 귀찮게 한다. 그러나 정작 주인공 드와이트가 회복하거나 되찾는 것은 이들을 물리치고 새롭게 건설하는 조직 패밀리 ‘따위’가 아니다. 그가 털사에서 새롭게 얻는 것은 가족관계 같은 파트너들, 젊은이들이다. 드와이트는 실제로 자신의 딸을 되찾기도 한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된 딸 티나는 오랫동안 범죄자인 그를 증오해 왔지만 결국 아빠 곁인 털사로 오게 된다(이 부분이 다소 억지스럽다). ‘털사 킹’은 갱스터 드라마가 아니다. ‘털사 킹’은 갱스터 드라마인 척, 갱스터 드라마를 변주한 가족 드라마이다. 9개의 에피소드를 흥미 깊게 혹은 주의 깊게 지켜보게 되는 이유이다. ‘털사 킹’은 고령화 사회를 우회적이면서 긍정적인 시선으로 그린 작품이기도 하다. 이 드라마에는 많은 사회적 정치적 메타포가 담겨져 있는데, 드와이트와 운전기사 타이슨의 관계를 통해 신구세대 갈등과 흑백 갈등 문제를 이야기하곤 한다. 세상의 어느 사회처럼 기이하게 부정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미국사회에 대해 한 늙은 현자의 안타깝지만 따뜻한 시선을 담아 내고 있다. 드와이트는 자신이 머무는 호텔에서 어두워지는 창밖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린다. “피투성이가 됐지만 패배하진 않았어. 다운이 됐어도 여전히 난 링 위에 서있어.” 미국이 갖고 있는, 올드하지만 여전히 의미있는 자본주의적 가치, 인간이 지니고 있어야 할 존엄성과 품격을 말한다. ‘털사 킹’의 매력은 바로 그 지점에 있다. 대본, 시나리오가 돋보인다. 현재 미국 할리우드의 가장 잘나가는 시나리오 작가 테일러 쉐리던(‘시카리오’, ‘로스트 인 더스트’, ‘윈드 리버’)이 전편을 썼다. 텍사스 출신인 그는 털사가 고향인 것처럼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그려 낸다. 사실 이 ‘털사 킹’의 제목은 아벨 페라라 감독이 1990년에 만든 ‘킹 뉴욕’에서 가져 온 것이다. ‘킹 뉴욕’은 잔혹했다. ‘털사 킹’은 인간적이다. 세월이 바뀐 만큼 마피아 두목도 폭력배로서만으로는 살아가기 힘든 법이다. 그건 자본주의가 점점 인간적인 얼굴이 돼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과 같다. 마피아적 삶과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것에는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전설의 영화 ‘대부1·2·3’ 시리즈가 오랜 시간 늘 해왔던 이야기이기도 하다.
넷플릭스 신작으로 제니퍼 로페즈 주연의 영화 ‘내 이름은 마더’에 대해 쓰는 이유는 100퍼센트 순전히, ‘영화는 이렇게 만들면 안 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그 반면교사의 지점을 공유하기 위해서이다. OTT 넷플릭스에 탑재된 수백 수천 편의 영화 가운데 얼마나 ‘사소한’ 작품들이 많은지(영화는 좋은 영화인지 혹은 나쁜 영화인지로 구분되지 않는다. 다만 사소한 영화인지 아닌지로 나뉠 뿐이다)를 유감없이 선보이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야기는 온통 클리셰(clich) 덩어리이다. 설정 자체가 말이 안 되거나 무리한 것이다. 그리고 앞뒤가 안 맞는다. 액션은 이런저런 영화에서 온통 다 끌어다 쓴 것이거나 익숙한 장면들을 이어 붙인 것들이다. 가장 최악인 것은 정치적 올바름과 젠더 이슈에 대한 강박을 고스란히 드러낸다는 점이다. 그럴 경우 자칫 이런 주제의 이야기에 대해 이후 오히려 대중들의 반감을 자아낼 수 있다는 점에서 영화는 위험한 경계를 오가기까지 한다. 영화는 이래저래 참으로 못나 보인다. 주연인 제니퍼 로페즈 자체가 문제이다. 이건 완전히 한 여배우의 개인적 욕심에서 만들어진 것처럼 느껴진다. 제니퍼 로페즈는 1969년생으로 올해 쉰 중반에 다가서는 나이다. 그런데 마치 30대 여인처럼 몸과 얼굴을 만들고(다행히 성형보다는 운동과 다이어트의 결과로) 자신이 여전히 육감적이고 매력적인 여배우라는 것을 입증하고 과시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는 마치 제니퍼 로페즈가 영향력을 행사하는 프로덕션에서 제작된 것이라는 ‘합리적’ 의심을 갖게 만든다. 이럴 때 연출을 맡는 감독은 일종의 꼭두각시 역할밖에 하지 않거나 예정된 신만 기계적으로 찍을 뿐이다. 이번 감독은 니키 카로이다. 전작이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뮬란’이다. ‘뮬란’은 엔딩 크레딧에 신장 위그루 자치구 탄압의 당사자인 중국 공안국에 대한 감사 표시를 남긴 것, 민주적인 홍콩 시위를 폭력적으로 탄압한 것에 대해 여배우 류이페이(유역비)가 옹호 발언을 한 것 등이 논란이 됐다. 무엇보다 원작인 애니메이션을 무리하게 수정하면서까지 영화를 할리우드 형 여성 전사 액션물로 만든 것에 대한 반감 등으로 전 세계에서 흥행에 실패했다. 니키 카로는 2006년에 만든 샤를리즈 테론 주연의 ‘노스 컨츄리’로 주목받았었다. 광산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를 주인공으로 다룬 작품이었다. 자신의 고향인 뉴질랜드 한 어촌 마을의 이야기, 곧 여성이 족장이 되며 벌어지는 마을 사람들의 갈등과 화해를 그린 작품 ‘웨일 라이더’로는 이 감독이 스스로 여성 문제에 대해 남다른 관심이 있음을 보여 주기도 했다. 2017년에 내놨던 ’주키퍼스 와이프’는 자신과 남편이 일군 동물원을 살리고 학살 직전의 유대인들을 감춰 주기 위해 독일 장교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하는 여인의 얘기였다. 제시카 채스테인이 주연을 맡았으며 니키 카로는 의외로 스타 캐스팅으로만 영화를 만들어 왔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이번 영화 ‘내 이름은 마더’도 톱 캐스팅이다. 제니퍼 로페즈는 물론, 조셉 파인즈와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이 함께 나온다. 이번 영화는 감독에게 ‘뮬란’의 실패에 대한 조급증이 많이 작용한 것으로 느껴진다. 로페즈나 파인즈, 베르날에게서는 자신이 퇴물 배우가 돼 가고 있음에 대한 공포 같은 것이 느껴진다. 영화나 인생이나 코너에 몰린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급해지면 늘 실수가 나오는 법, 악수(惡手)를 두게 된다. 제니퍼 로페즈는 이번 영화를 하면서 자신이 ‘몸이라도 건졌지만’ 조셉 파인즈와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이 투 마마’, ‘아모레스페로스’의 바로 그 배우인)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에게는 남는 것이 하나도 없는 셈이 됐다. 둘 다 이제 점점 조·단역 배우로 내려갈 것이다. 이 영화는 애초부터 별다른 이야기를 갖고 있지 않다. 한 여자(제니퍼 로페즈)가 FBI 요원들에게 인디애나에 있는 외진 도시의 한 어둠침침한 안가에서 비밀리에 심문받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수사관들은 범죄 조직 두목들인 아드리안(조셉 파인즈)과 헥터(가엘 가르시아 베르날)가 무엇을 거래했느냐고 캐묻는다. 여인이 그들이 거래한 무기 내역에 대해 이야기하는 순간, 괴한들이 안가를 급습해 요원 7명을 몰살시킨다. 여자와 수사관 크루즈(오마리하드윅)만이 살아남는다. 놀라운 것은 이때 여자는 만삭의 몸이었으며, 아드리안이나 헥터 중 한 명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자는 총에 맞은 크루즈를 살려냈으며 이후 그는 여자의 조력자가 된다. 악당 손에서 간신히 살아 남은 여자는 딸을 낳는데, FBI는 그녀에게서 친권을 포기하게 만든다. 여자는 알래스카 동토의 숲에서 은신의 삶을 살아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12년이 흐른다. 이 여자가 세상의 끝에서 다시 세상의 중심으로 나온 이유는 보나 마나 이 딸 때문이다. 헥터와 아드리안이 딸을 납치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목적은 오직 하나이다. 자신의 남은 삶을 오로지 딸(의 안전)을 위해 살아가겠다는 것. 딸에 대한 사랑은 모든 세상의 엄마 마냥 이 여자에게도 절대적이다. 이유가 없다. 내 배 속에서 키운 내 자식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여자 알고 보니 단순한 사람이 아니다. 아프가니스탄, 이라크에 수차례 파병됐던 최정예 저격수였고, 1㎞ 반경 안의 사람 41명을 순식간에 처치할 수 있는 살인병기였다. ‘내 이름은 마더’의 가장 큰 문제는 여자가 슈퍼 우먼이라는 것이나 그것도 한 발도 놓치지 않는 명사수라는 것이나 격투기 수준이 웬만한 남자를 다 때려잡는 수준이라는 것 등의 따위가 아니다. 도대체 이 영화의 빌런, 두 남자 악당은 과연 무슨 짓을 했느냐는 것이다. 무슨 짓을 하길래 그토록 여자를 쫓고, 여자를 죽이기 위해 그 딸을 납치하려고 하느냐는 것이다. 그 행동 동기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렇게까지 하려면 여자가 그들에게 현실적 위협이 돼야 하는데 12년이나 흐른 뒤에 그 문제가 드러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또 하나. 이게 가장 중요한데, 12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여인의 외모, 몸매, 표정은 전혀 변하지 않는다. 살도 찌지 않고 주름도 생기지 않는다. 더 젊어진다. 수사슴과 토끼를 사냥하며 살아가고 있는 여인이 새끼들을 막 낳은 늑대 어미를 차마 총으로 쏴 죽이지 못하는 장면은 손발이 오그라들어도 한참 오그라들게 만든다. 늑대와 새끼들의 장면은 이후에도 계속해서 이 영화의 주요 모티프로 사용된다. 할리우드가 종종 얼마나 끔찍하게 진부하고 유치한 수준의 교양 수준을 지니고 있는가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내 이름은 마더’는 모성의 문제를 이용하고 악용한 한 여배우의 과욕(혹은 그런 여배우를 이용하려 한 할리우드 제작 시스템과 감독)이 만들어 낸 참사다. 이 영화에서 좋은 장면은 딱 두 개다. 아드리안이 임산부 여자의 배를 칼로 찌르는 장면 하나와 헥터가 그 여자 애가 내 애냐고 묻는 질문에 여자가 누구의 애도 아니고 그냥 내 아이라고 말하는 장면 하나이다. 남자들의 잔인함과 무지함을 보여 준다. 여자는 헥터를 죽일 때 칼로 배를 갈라 죽이는데 마치 잔인하게 제왕절개를 하는 느낌을 준다. 극 중에서 여자의 이름은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그저 엄마로만 나온다. 감독의 의도가 읽힌다. 그 점도 나쁘지는 않았다.
극장에선 조기에 종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영화 ‘무명’이 알 만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모았던 이유는 1930·40년대의 이야기를 다뤘기 때문이다. 솔직히 이때가 지금보다 훨씬 멋있었다. 시대도 그랬고, 예술도 그랬다. 패션은 더더욱. 무엇보다 사람들이 멋있었다. 저항할 줄 알았고, 그 와중에 즐길 줄 알았으며, 반드시 사랑들을 했다. 그것도 모두 치열하게. 지금 시대에는 사라진 단어, ‘혁명’과 ‘사랑’이 이 시대에는 존재했다. 영화 ‘무명’이 다루는 이야기는 바로 거기에 있다. ‘무명’은 1941년 상하이에서 암약한 제5열(상대 진영 내부나 후방에서 암약하는 스파이 조직)에 대한 이야기이다. 복잡한 것은 제5열이 하나가 아니라 둘이나 셋이라는 것이며 혹은 제5열 안에 또 다른 제5열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중간첩 혹은 이쪽도, 저쪽도 아닌 사람들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는 말인데, 이렇게 되면 내가 누구이고 너는 또 누구이며 우리 모두는 무엇이고 그리하여 다들 무엇을 위해 싸우고 죽이고 헤어지고 하는지 언젠가부터는 그 의미를 상실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무명’은 그렇게까지는 아니지만 적어도 그런 분위기를 짙게 풍긴다. 그 아우라가 이 영화 ‘무명’의 매력이다. ‘허주임’(양조위)은 상하이 주둔 일본군 대장(모리 히로유키) 밑에서 대일본 저항 조직을 색출하는 책임자다. 주로 공산당을 쫓는다. 그의 밑에는 젊은 수사관 둘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예 선생’(왕이보)이라는 친구이다. 허주임은 치밀하며 예는 젊고 공격적인 인물이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허주임이 누군가(황뢰)를 방문하는데, 그 누군가는 은둔 중이며 아마도 일본 쪽에 투항을 하기로 한 모양이고 그간 공산당 주요 연락책 일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허주임과 일본 점령군은 현재 ‘천 여사’(저우쉰)를 쫓고 있으며, 이 남자는 허주임에게 그녀의 은신처를 알려주는 조건으로 투항 후 생존을 약속받은 것 같다. 허주임은 그에게 정확한 동기를 묻는다. 흔한 거 말고, 다 아는 이야기 말고, 네가 이쪽으로 넘어오는 진짜 이유를 대라고 정중하게 묻는다. 머뭇거리던 남자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나는 지쳤소. 고향에 부모가 농사짓는 땅이 있고 거기로 가려 합니다.” 1941년은 일본이 진주만을 공습했던 때이다. 미국은 즉각 선전포고하고 서둘러 참전한다. 일본이 진짜 노렸던 것은 동남아 곧 인도차이나이다. 미국을 이 전선에서 밀어내기 위해 태평양에 거대한 전선을 만든, 이중(二重) 군사 전략의 일환이 바로 태평양 전쟁, 진주만 기습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주도한 것은 일본 정규군이 아니라 만주군, 곧 관동군이었다. 관동군은 만주에 나라를 세우고 별도의 군사 왕국을 만들려 했으며, 그 왕국의 물적·정치적 토대는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국가를 점령해서 얻으려는 것이었다. 만주를 지배하기 위해서는 중국의 저항 조직, 가장 격렬하게 투쟁하는 공산 조직을 효과적으로 뿌리 뽑아야 한다. 또 그러기 위해서는 당연히 중국 내 반공주의 세력을 끌어들인다. 그건 곧장 장개석의 국민당 조직의 한 파(派)일 수 있으며, 영화에서는 ‘탕 선생’이라 불리는 인물(동성붕)이다. 1941년의 상하이는 일본 점령군과 이에 대항하는 조직이 얽히고설켜 수면 하에서 엄청난 수 싸움이 벌어지던 때였다. 서로는 적이면서 동시에 서로를 이용한다. 일본은 1937년 일으킨 중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후인데다 대국인 미국과도 전쟁을 벌이던 때라 기세가 등등하던 시기였다. 동시에 이 전쟁이 그리 멀지 않았음을 알려주기 시작한 때이기도 하다. 미국이 참전했고 저항은 그 어느 때보다 최고조에 오르던 때였기 때문이다. 중국 공산 저항 조직은 천 여사를 보호해야 한다. 최고로 중요한 거점 연락망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관동군의 군사적 행보를 예측하고 알아내야 한다. 그들의 군사 야욕을 분쇄해야 한다. 결국 방법은 하나, 내 것을 내주고 상대편의 모든 것을 알아내거나 가져오는 것. 그래서 영화의 이야기는 천 여사로 모인다. 후에 예 선생은 일본군 대장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한다. “여자는 현장에서 사살됐습니다.” 자, 그렇다면 일본은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게 되는가. 중국 독립 저항 조직은 무엇을 내주고, 무엇을 획득했는가. 궁극의 승리자는 누구인가. 제5열은 애국자인가 매국노인가. 그들은 나중에 합당한 대우를 받게 되는가. 영화 ‘무명’은 이야기의 흐름과 시간 순서를 의도적으로 왜곡시켜 놓았는데, 사실 과거의 많은 일들, 특히 역사적인 일들은 거의 같은 시간대에 벌어지기 십상이다. 아니면 동시다발적으로 누군가 일부러 터뜨리거나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A로 B를 가리고 B로 C를 가릴 수 있기 때문이다. 사건 A와 B, C는 나중에, 훗날의 역사가가 시간 순으로 다시 배치한 것뿐이다. 혼란기에 벌어지는 사건과 이야기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사실은 그럴 필요도 없다. 허주임이 ‘장’이라는 여인(지앙 수 잉)을 취조하는 과정, 그 여자와 국민당 쪽 인물인 탕 선생을 엮으려는 것, 그런데 그런 그녀를 총살 과정에서 살려 보내는 것, 예 선생의 동료인 ‘왕’(왕전군)이 ‘미스 방’이라는 여자를 강간하고 살해하는 것 등 모든 사건의 시간을 비틀어 놓고 중복시켜 놓는다. 미스 방은 예 선생의 약혼녀였으며 남자가 일본군 앞잡이가 된 것을 두고두고 수치스러워한다. 미스 방은 미모를 이용해 일본군 간부를 유인, 골목에서 살해하는 ‘꽃뱀’ 역할을 한다. 왕은 그 사실을 알고 그녀를 강간하고 살해한다. 어쩌면 예 선생과 그녀의 관계를 알아낸 것일 수 있다. 이런 여러 시선을 두서없이 나열하는 척, 청얼 감독은 자신의 역사적 감각이 남다르다는 것을 과시한다. 이럴 경우 시나리오뿐 아니라 편집 역시 매우 정교해야 한다. 이번 신의 에피소드가 다음 신의 사건과 의미상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직접 보여 주거나 암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상하이 근교 일본군 소대 하나가 전멸되는 사건이 벌어지는데, 그건 아마도 누군가가 공산 조직 혹은 국민당 내 반일 조직(친일 조직만 있지는 않았으니까)에 이 소대의 위치를 알려 줬기 때문으로 보인다. 문제는 이 소대 내에 일본 황실 가문의 공작(公爵) 아들이 있었다는 것이며, 당연히 일본군은 이 테러 조직을 색출하겠다고 나설 것인 바, 이건 다분히 중국 공산당 조직이 일본군과 국민당 조직 둘 모두를 겨냥한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의 일환일 수 있다. 감독 청얼의 시나리오는 이렇게 복잡한 이야기를 2시간여에 풀어내려고 무던히도 애쓴다. 중국의 현대사, 2차 대전의 역사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비교적 쉽게 다가서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 특히 젊은 세대들에게는 요령부득의 이야기일 수 있다. 이 영화가 중국 밖에서 그다지 성공하지 못한 이유이다. 지나치게 중국적이라는 말이다. 치명적인 약점 중 하나는 허주임과 수사관 예 선생의 관계인데 극 후반부에 벌어지는 둘의 혈투는 다소 지나친 부분이 있다. 사실 나중에 밝혀지는 둘의 관계를 생각하면 그렇게까지는 싸울 필요가 없으며, 더 나아가 싸워서도 안 된다. 둘이 서로를 몰랐다면 피 터지는 싸움을 하는 게 맞다. 만약 천 여사를 사이에 둔 삼각관계였다면 그것도 맞다. 둘의 싸움의 이유에 뭔가의 장치와 설명이 더 필요했는데, 영화는 여기서 길을 잃은 느낌을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명’은 매우 매력적인 작품이다. 불안하고 불온한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실존적 선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훨씬 삶이 입체적이었던데다 지향점이 있었음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조기에 극장에서 사라지는 이유가 두렵다. 이런 영화의 실패가 무섭고, 지금의 시대가 공포스럽다. 그렇지 아니한가.
사랑과 고고학은 멀리 있는 듯 사실은 가깝게 있는 개념이다. 고고학하면 카르멘 로르바흐가 쓴 ‘나스카 유적의 비밀’이나 아놀드 C.브랙만의 ‘니네베 발굴기’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페루 나스카 평원에는 비행기에서 내려다봐야만 전체가 보이는 물경 45m 안팎의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고고학 하면 이런 걸 발견하는 일이라 생각한다. 혹은 앗시리아의 옛 수도인 니네베에 묻혀 있는 4000년 전, B.C.2000년 전의 유적들을 발굴하는 것이거나. 고고학자가 되는 것은 나름 매우 매력적인 일이다. 그래서 인디아나 존스처럼 세계 오지를 떠돌며 인류사의 흔적을 뒤좇고 온갖 모험을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건 오산이다. 시몬 스톤의 2021년 넷플릭스 영화 ‘더 디그’의 주인공 바질 브라운(랄프 파인즈)처럼 고고학자는 끊임없이 파고 또 파고, 쓸고 닦고, 비질과 세척을 반복하는 사람이다. 고고학은 생각지도 못한 예상 외의 ‘막’노동을 요구하며 그러면서도 지질학 같은 별도 학문을 병행시킨다. 고고학자가 된다는 것은 이만저만 고생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도무지 스윗하지가 않다. 그러기는커녕 이만저만 고생을 시킨다는 면에서 고고학과 진배없다. 사랑의 실체를 알아내기 위해 그 진실의 땅을 파고 또 파고 또 파게 만든다. 그래서 간신히 뭔가 하나를 발굴했다고 생각하면 이번엔 그것의 겉면을 솔로 빗겨내고 다듬는 과정에서 손상을 입히기 십상이다. 아니 애초부터 수백 수천 년을 땅의 어둠 속에 묻혀 있다가 갑자기 빛을 받은 유적, 곧 사랑의 본질이 세상 밖으로 나오는 순간 그 가치가 떨어진다. 고고학의 유적이 그렇고 남녀 간의 사랑이 그렇다. 어찌 보면 그냥 파묻혀 있는 게 나은 셈이다. 주인공 영실(옥자연)은 고고학도이다. 순전히 밥벌이를 위해 고등학교 체험 실습 특강 같은 걸 하는데, 거기서 그녀는 어린 학생들에게 자신의 직업에 대해 사명감만 있고 미래 비전은 없으며 절대로 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가능하면 고고학을 전공하지 말라는 이야기다. 영실은 지금 막 한 남자와의 기이한 동거를 끝내려고 한다. 학교 선배인 듯 보이는 남자는 고고학이라는 학문적 관계와 남녀 간 육체적, 정신적 관계가 혼재된 사이의 상대이다. 당연히 서로가 서로에게 지쳐 있는 상태이고, 남자에게 영실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은 ‘이제 그만 내 집에서 나가 줘’이다. 아니면 언제쯤 나갈 거냐고 묻거나. 지금 살고 있는 집의 전셋돈도 자신이 마련했으니, 상대가 나가야 하는데 이 남자 도통 급할 게 없는 태도이다. ‘아 나간다니까’가 그의 말버릇이다. 그런 남자와 좁은 공간에서 같이 살면서 밥도 같이 먹고 샤워도 번갈아 하며, 빨래도 같이해 개어 주기까지 하면서 마치 오래된 부부처럼 혹은 연인처럼 살아가지만, 영실의 일상은 늘 살얼음판이다. 뭔가에 집중하고 자신을 정비해 나갈 수가 없다. 사람을 잘못 만나서 이렇게됐다기 보다는 사람을 만나 지내다 보면 이렇게 된다는 걸, 사랑은 영원할 수 있다고 착각해서 이 지경이 됐다. 그런 영실은 또 한 번의 연애를 준비한다. 음악을 하는(아마도 방송음악이나 영화음악을 하는 것 같은) 인식(기윤)이라는 남자이다. 인식은 영실에게 어떠한 얘기를 듣더라도 그녀와 끝까지 함께 할 것이며 그녀를 끝까지 지켜줄 거라고 말한다. 영실은 반신반의 하지만, 연애와 사랑이 지니고 있는 선의를 믿고 과거의 남자, 과거의 관계에 대해 알려 준다. 사람이 사는 건 이렇게 저렇게 ‘스몰 월드’인지라 둘이 연결된 이런저런 사람을 통해 인식도 영실이 학교 시절 누구와 어떻게 만나고 어떤 관계를 만들며 살았는지 듣게 된다. 영실의 남자관계가 자유분방했는지 방종했는지 아니면 문란했는지는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는 법. 상대를 하나의 인격체로 얼마나 존중하는가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사람들은 의외로 많은 사람과 연애를 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런 감정을 교류하거나 그래서 때론 가벼운 육체관계를 맺거나 잠깐이라도 사귀게 된다. 사람들은 스스로들 얘기를 안 하고, 감춰두고, ‘발굴되지 않게끔’ 땅속 깊이 묻어 둬서 그렇지 놀랍게도 많은 사람들과 만났다 헤어짐을 반복한다. 인식은 영실을 8년 동안 쫓아다니며 들들 볶는다. 다른 남자를 입에 올리며 그 남자와 잘 때는 어땠느냐 혹은 그 남자한테도 이랬느냐는 둥 천박하고 상투적인 질문 고문을 퍼부어 댄다. 그러고 나서 미안해하기를 반복하고 또 조금 지나서는 온갖 꼬투리를 잡아 대며 영실을 못살게 군다. 영실은 그런 상황을 견디다 견디다 못해 인식을 떠나지만, 종종 전화로 자신이 있는 곳으로 와서 섹스해달라는 남자의 요구까지는 거절하지 못한다. 다시는 안 가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영실은 인식을 완벽하게 떨궈 내는데 늘 실패한다. 그것이 8년이 걸린다. 사랑은 고고학의 비질처럼 오랜 시간 살살 다뤄야 한다. 그래서 얻어 내는 유물은 둘 관계의 사랑이 지닌 본체일 거라고 생각하지만, 웬걸 결국 그렇게 어렵게 찾아낸 것은 자기 자신, 곧 자아이다. ‘진정한 사랑은 자기애’라는 위대한 진실의 유물이다. 다른 관계들을 일시적이나마 반복적으로 계속 밀어내면서라도, 자신을 온전히 지켜야만 영원한 사랑을 해 낼 수가 있다. 사랑은 남자나 여자 같은 상대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 하는 것이다. 영실이 그걸 깨닫기까지 실로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이다. 물경 163분 동안 줄곧 목도하게 되는 인식의 광적인 집착, 그 야비한 행태 때문에 보는 사람들의 마음도 쪼그라든다. 사랑이 지닌 그 비루함 때문에 모든 것이 다 지긋지긋해지는 마음이 된다. 인식 같은 남자를 만나면 후미진 골목길에서 흠씬 패주고 싶지만, 그런 인식의 모습이 우리의 평균치 남성들의 모습과 다름없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영화는 그래서 역설적이다. 절망적인데 반대로 어떻게든 자신을 되찾아 가는 영실의 모습, 시간이 걸리더라도 자아를 회복해 가는 여자의 모습을 통해 밝고 희망적인 모습을 보여 주기도 한다. 실제로 영실이 자립을 시도해 가는 모습은 대체로 밝은 야외이다. 친구나 선배와 카페 테라스 같은 데서 커피를 마시거나 호감을 갖게 된 어떤 남자(이 남자는 발굴 현장의 인부인데 조경 일을 하기도 한다)의 나무 재배장 같은 곳에서 얘기를 나눈다. 인식을 벗어나면 영실의 삶을 비추는 조명은 환해진다. 내가 없는 사랑은 없다. 나를 지키지 못하면 상대와의 사랑을 이어 나가기가 힘이 든다. 변하지 않는 사랑도 없다. 내가 변하고 그렇게 변하는 나를 지키면서 변화해 가는 상대를 인정하면, 비교적 지속적인 사랑을 만들어 나갈 수 있다. 무엇보다 사랑이 영원할 수 있다느니 반드시 영원해야 한다느니 하는 강박에서 제일 먼저 벗어 날 수 있어야 한다. 감독 이완민이 남자 인식의 모습을 통해 가장 말하고 싶은 부분일 것이다. 사랑은 고고학이다. 끈질기고 인내심이 강한 자, 자기와의 싸움에 능한 자만이 유적, 사랑의 본질을 발굴한다. 감춰진 진실이다.
다소 으쓱대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 넷플릭스 8부작 드라마 ‘외교관’은 이런 부류의 영화, 곧 전문가를 다루는 내용의 작품에 있어 미국, 할리우드가 앞서도 한참을 앞서 있음을 느끼게 해 준다. 여기 나오는 배우들을 실제 외교 현장에 데려다 놓아도 그리 어색하지 않을 것처럼 느껴진다. 그만큼 캐릭터 하나 하나가 정교하며 이야기가 갖는 리얼리티가 높다. 이런 부류의 드라마나 영화에서 최고 급으로 분류되는 영국 드라마 ‘이어즈 앤 이어즈(Years and years)’ 이후 또 한편의 탁월한 국제정치 시즌 드라마가 나온 셈이다. 일단 이런 저런 설정이 현재의 국제 정세에서 일어날 법한 사건들로 채워져 있다. 무엇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야기가 빈번하게 나오며, 미-러시아의 군사적 갈등과 관련한 이야기들이 핵심 소재로 등장한다. 여기에 급박한 중동 정세(이란과의 오랜 적대 정책)가 오버랩 되고, 아프간에서 친미국적 활동을 한 사람들을 구해 오지 못한(사실은 구하지 않은) 바이든 정부의 의도적인 외교 참사 같은 것이 여주인공의 행동 동기의 배경으로 자리한다. 잉글랜드로부터 분리 독립하려는 스코틀랜드 및 북아일랜드의 정치상황도 매우 중요한 모멘텀으로 작동한다. 핵 전쟁에 대한 위기감, 러시아가 전술핵 정도는 별거 아니라며 언제든 쏠 수 있을 것이는 발언과 진술 등등은 기본 메뉴이다. 이야기의 시작은 영국의 전함(戰艦)이 정체 모를 미사일 공격을 받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 불시의 공격으로 영국의 장병 41명이 사망한다. 영국은 이 미사일이 이란 것이라고 생각하며, 이란은 온갖 경제 제재를 가하고 있는 미국을 우회적으로 공격하기 위해 비열하게도 영국에게 테러를 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근데 그건 미국 백악관도 조심스럽게 동의하고 있는 바이기도 하다. 중동 전문가이자 뛰어난 현장 요원인 케이트(케리 러셀)가 이런 상황에서 레이번 대통령으로부터 뜻하지 않게 신임 주런던 미국 대사로 발령받는 이유다. 상대가 이란이니 만큼 급한 불을 끄라는 얘기인 셈이다.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해서 해결하라는 것이다. 그녀는 남편이자 전문 외교관인 핼(루퍼스 스웰)과 런던에 오지만, 자신에게 맞지 않는 옷을 입은 양 불편해 한다. 외교가(街)가 아닌 아프가니스탄에 있어야 한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그녀는 런던에 오기 전 카불로 떠나기 위해 막 짐을 싸던 중이었다. 실제로 그녀는 극중 내내 파티용 드레스를 입는 것을 극도로 혐오하고 늘 구두를 벗어서 들고 다닐 정도다. 무엇보다 케이트는 남편 핼과 이혼을 준비 중이다. 그런데 정작 레이번 대통령은 케이트를 차기 부통령 후보로 고려 중이다. 현 여성 부통령은 남편의 부패 스캔들이 터지기 직전으로, 사임이 확실시되기 때문이다. 핼은 부통령이 될지도 모를 아내 때문에 혹은 아내를 위해서 이혼을 피하려 한다. 하지만 그게 케이트의 정치생명을 위한 것인지, 자신의 정치적 재기를 위한 것인지 다소 모호하다. 케이트에게는 이란에게 대대적인 보복 공습을 생각하는 영국 여론을 달래는 것이 1차 과제이다. 이란이 공격했다는 것이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사일 공격의 주체, 국가 혹은 테러 집단의 정체를 정확하게 알아내는 것도 중요한 임무이다. 잘못하면 자칫 엉뚱한 나라를 상대로 대규모 전쟁을 일으키게 되는 꼴이기 때문이다. 그게 만약 이란이라면 미국으로서는 매우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가뜩이나 어려운 중동 정세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와중에서 또 하나의 국제적 악재를 만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에 영국 총리 니콜이 기름을 붓는다. 그는 정치 지도자로서는 용의주도하지(외교적이지) 못하게, 장병 유가족들 앞에서 이란이라는 국가 이름을 언급하며 피의 보복을 약속한다. 이란과의 전쟁은 일촉즉발 상황에 빠진다. 케이트는 영국의 외무 장관 데니슨(데이비드 기아시)과 교묘하게 협력하며 미영 양국의 강경 노선을 완화시키려 한다. 이 와중에 둘은 주런던 이란 대사로부터 테러의 배후에 러시아가 있고, 용병 군사조직인 ‘렌코프’가 동원됐다는 기밀을 입수한다. 이때부터 상황은 일파만파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기 시작한다. 이제는 상대가 핵 전쟁을 마다 않는 푸틴의 러시아이기 때문이다. 케이트와 데니슨 장관, 교활한 외교적 술수로 유명한 남편 핼, 케이트의 공관 차석인 스튜어트(아토 에산도흐) 그리고 그의 비밀 애인이자 공관 내 CIA 지부장인 에이드라 박(알리 안)은 러시아와의 전면전을 막기 위해 총력을 기울인다. 그 와중에도 영국 총리 니콜은 이름도 모르는 러시아 한 지역에 대규모 공습을 가할 계획을 세운다. 총리는 스코틀랜드 보궐 선거의 결과로 분리 독립 운동이 거세질 것을 두려워하고 있으며, 대 러시아 전쟁은 다분히 국내 정치용인 면이 있는 셈이다. 그런데 문제는 앞서의 미사일 테러가 정말 렌코프 조직이 일으킨 것이냐는 점이다. 영국과 미국의 동맹 외교는 중차대한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총 8부작의 결말은 실로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국제 외교와 세계 전쟁에 있어 진짜 적은 누구인가. 어리숙한 정치인들은 외교적 언사를 마다하고 주적(主敵)을 함부로 입에 올린다. 이들이 국익,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하는 데 있어 그 행동 폭을 스스로 좁히는 우를 범하는 이유다. 미국의 국무장관인 게넌(미구엘 산도발)은 영국 총리가 주선한 디너 파티에서(이날 게넌 장관은 니콜 총리가 제안한 리비아 내 렌코프 조직을 제거하는 군사 작전을 거부한다) 아랍 속담을 들먹이며 이렇게 말한다. “제일 좋은 것은 진실을 알고 그걸 말하는 것이지만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진실을 알아도 그냥 야자수에 대한 얘기를 나누는 것이다.” 케이트는 강경 영국 총리 옆에 서려는 레이번 대통령에게 이런 식으로 말한다. “정치는 늘 49대 51 사이에서 선택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죠.” 주인공 케이트는 한때 전설의 외교관이었지만 지금은 그저 대사의 ‘부인’이 된 남편 핼과의 사이에서도 외교적(개인적) 해결책을 마련해야 한다. 케이트는 핼이 자신을 부통령으로 만든 후 막후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 한다고 의심한다. 그녀의 그런 생각은 일종의 합리적 의심이다. 그러나 중동을 누비며 같이 활동했던 일이 케이트로 하여금 핼과의 사이를 애증의 골짜기로 밀어 넣는다. 핼은 그녀의 정치적 경쟁자이자 동반자이다. 마치 그건 국가적 동맹 관계와 비슷한데, 영국 총리 니콜은 미국과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미국과 손을 잡는 것은 위험한 일이지. 반면에 미국과 등을 지는 것은 치명적인 일이고.” 레이번 대통령은 영국과의 전통적인 동맹을 운운하는 것에 대해 ‘초등학교 10살 때 했던 약속 같은 것’이라고 경멸한다. 외교를 모르는 인간들이나 동맹을 찾는다는 것이다. 기이하게도 미국 드라마이지만 ‘외교관’은 지금 우리가 처한 국제 정세와 외교 활동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우리뿐 아니라 어느 국가의 정치외교 상황에도 빗댈 수 있는 보편적인 스토리로 받아들여진다는 점이야말로 이 드라마의 미덕이다. 누구에게나 반면교사가 되는 드라마라는 말이다. 미숙한 외교 행정으로 빈축을 사고 있는 국가들에겐 꽤 괜찮은 국제정치 교과서가 될 수도 있겠다. 드라마가 현실을 너무나 잘 그리면 종종 그 현실이 갖고 있는 문제의 해법까지도 찾아 내는 경향을 보인다. 드라마와 영화에서 배우라는 이야기는 그래서 나오는 것이다.
지금의 영화계 모습은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과 같다. 나치에 저항했던 학생운동의 얘기, 잉게 숄의 작품 제목을 여기다 갖다 붙여 쓰게 될 줄은 몰랐다. 영화계를 누가 미워하겠는가. 다들 나름 영화를 사랑하고 좋아하고 아끼고, 나도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다란 소리를 종종 하며 살아간다. 한때 국민 1인당 연평균 관람 횟수가 4.5회로 전 세계 최고였을 만큼 어마어마한 영화 사랑의 국가가 바로 한국이었다. 지난 몇 년간만 해도 봉준호가 아카데미 4개 부문을 석권하고 박찬욱이 칸에서 감독상을 타고 등등 기세가 만만치 않았다. 봉준호의 ‘기생충’이 세상을 뒤집어 놓은 것은 2020년이었으며 박찬욱이 칸에서 감독상을 탄 것은 2022년, 그러니까 불과 작년, 팬더믹이 여전히 단말마의 절정이었을 때이다. 모두들 K-컬처, K-컬처 얘기를 해대곤 했다. 실로 엊그제의 추억이다. 그런데 단 1년 만에, 그것도 팬더믹이 종료된 지금, 한국 영화계는 아무도 미워하지 않음에도 죽어가고 있고, 거의 사망 신고 직전인 상태가 됐다. 이런 얘기를 하면 사람들은 말한다. ‘에이 설마.’ 아니면 적어도 이런 반응들이다. ‘일시적일 거야. 곧 나아지겠지.’ 그러나 최근 주변 극장을 가본 사람들이라면 왠지 심각성을 느낄 것이다. 극장에 사람들이 사라진 것이다. 관객 수는 지난 3월 12일 현재 전국 2,123만이었다. 코로나 이전에 비하면 50% 수준이다. 1년 관객 수도 2022년 1억 1,281만 명이었는데 이 역시 코로나 이전 절반의 수치다. 더 나쁜 것은 이 수치가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체되거나 심지어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비교해 보면 유럽의 경우 대체로 코로나 이전 80%의 관객을 회복했고 미 대륙의 경우 거의 원상 회복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들은 계속 관객 수가 증가중이다. 한국의 극장이 이렇게 된 데에는 쉽게 말해 이렇다 할 흥행 영화가 나오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배급이라는 영화계의 복잡한 방정식의 딜레마가 작동하고 있는 바 코로나로 극장에 관객이 올 수가 없자→100억 원 이상을 투자했던 한국형 블록버스터급 영화들이 일제히 개봉을 미뤘고→그렇게 창고에 쌓아 둔 영화가 90편에 이르렀으며→극장들이 일제히 티켓 가격을 올려 기대치는 높아졌고 →그러다 보니 상영 전선에 투입된 중저예산 영화들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당연히 극장의 수익이 더 떨어지고→그러니 향후에는 재고 영화만으로 시장을 풀겠다는 심산이 작동하게 됐고→그 자연스러운 결과로 신작 투자를 일제히 멈춘 것인 데, 겉으로의 이유야 극장에서의 마이너스 수익으로 투자할 제작비가 더 이상 없다는 것 때문이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두고 흔히들 동맥경화라는 말을 쓴다. 어딘가가 단단히 뭉쳐있고 막혀 있는데 정밀한 내시경으로 이를 뚫지 않으면 심장이고 뇌혈관이고 모두 터지기 일보 직전이다. 모든 영화는 기획 단계에서 극장 상영까지 짧아야 1년 반, 평균 2년이 걸린다. 지금 만들기 시작한 영화는 2025년에 극장에 걸리게 된다는 얘기다. 지금 영화를 만들지 않으면 2025년 상반기부터는 극장에 걸 한국영화가 없게 된다. 그럼에도 국내 메이저 투자배급사로 불리는 CJ엔터테인먼트, 롯데엔터테인먼트, 쇼박스, NEW 등이 모두 투심(투자심사)을 종료한 것으로 알려졌다. 자금 방출의 빗장을 걸었다. 이들 모두 현재 극단적으로 보수적인 운영 기조로 돌아섰다. 이런 상황이니 다들 돈 줄을 찾아 방황할 수밖에 없고 그 같은 움직임이 글로벌 OTT업체 넷플릭스 앞에 줄을 서게 하는 것이다. 디즈니 플러스나 애플 TV는 아직 그다지 한국 콘텐츠 투자에 열을 올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디즈니 플러스는 이제 막 시즌 드라마 ‘카지노’를 터뜨린 상태이고 애플은 ‘파친코’의 명성을 근근이 유지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니 오로지 넷플릭스인데, 최근의 ‘더 글로리’나 ‘길복순’의 메가 히트를 봐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쪽 동네’도 국내만으로 보면 심상치 않다. 애당초 글로벌 시장을 겨냥하지 못했던 웨이브, 티빙 등은 초기 투자에 따른 누적 적자만 각각 1200억 원을 상회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쿠팡 TV도 선제적인 국내 투자에 대해 호흡조절에 들어간 상태다. 국내 OTT로 선두급이었던 왓챠가 매물로 나온 것도 시장 경기에 악재로 작동하고 있다. 인구 5000만의 내수 시장으로는 과도한 OTT 투자가 어떤 피로감을 가져오는지를 보여 주는 사례다. 막힌 곳이 어디인지는 조영제를 넣어 봐야 한다. 현재 영화계의 조영제는 양적 완화다. 개봉지원 자금이 됐든 새로운 제작비가 됐든 자금을 풀어야 한다. 과거 김대중 정부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3000억 원을 풀었던 것이 지금의 K-콘텐츠의 모태가 됐다는 점을 유의 깊게 되돌아봐야 한다. 전임 정부에서 배우라. 양적 완화라는 조영제를 통하면 막힌 곳이 어디인 가가 정확해질 것이다. 영화를 더 만드는 것이 급선무인지, 개봉을 하면 그 비용을 지원해 주는 게 좋은지, 극장 티켓의 가격 인하 분만큼을 보전해 주는 것이 더 나은 지 등등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상황으로는 그 모든 것을 해야 한다. 티켓 값이 1만 5000원이다. 관객들에게는 9000원을 받고 나머지는 정부가 부담하면 좋을 것이다. 이런 것부터 하나하나 해 나가야 한다. 가장 큰 문제는 문화체육관광부 같은 정부 부처, 영화진흥위원회 같은 정책 기구의 액션 퍼포먼스가 너무 늦고 있다는 것이다. 근데 그건 늘 그래 왔다.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정말 마지막이다. 잘 나가던 ‘영화판’을 한 번에 ‘말아먹은’ 정권 소리를 듣지 않을 기회는 얼마 남지 않았다. 제발 좀 업계 사람들, 전문가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정부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모든 것은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려서였다. 영화 ‘존 윅’ 시리즈의 처음 설정은 그렇게 단순하고 진부한 것이었다. 미스터 존 윅(키아누 리브스)은 전설의 킬러였다. 그는 정말로 무지막지하게 사람을 많이 죽였는데 어느 날 이런 남자라면 늘 그렇듯이 착한 여자를 만나고 개과천선한다. 그러나 그 천사 같은 아내가 강아지 한 마리를 남기고 병으로 죽는다. 그래도 조용히 살려고 했다. 그런데 동네 건달들이 애지중지하는 강아지를 죽인 것이 화근이 됐다. 미스터 존 윅은 다시 ‘업계’로 돌아온다. 이후 그는 온갖 음모와 살해 위협에 시달린다. ‘존 윅 1·2·3’ 편은 대체로 그런 얘기였고, 그래서 당연히 서사는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죽고 죽이는 액션만이 중요해 보이는 영화였다. 그런데 미스터 존 윅이 생존해야 하는 이유가 단순히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였다는 것만은 아니었다는 게 이제야 밝혀진다. ‘존 윅 4’는 킬러들의 세계에조차 지금과 같은 ‘극히 계급적인 사회 구조=시스템=강고한 조직의 규율과 원칙’이 존재하며, 그것을 지키거나 혹은 위반하는 데 있어서는 확고한 명분이 있어야 하고, 또 그 명분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생의 철학까지 갈고 닦아야 만이 ‘진정한 킬러=이 세상의 진정한 생존자’가 된다는 것을 보여 주려 한다. 미스터 존 윅을 둘러싼 업계에는 ‘최고회의’라는 것이 존재하며 모든 킬러는 그 밑에 있고, 그 킬러들의 조직 단위는 패밀리이다. 존 윅은 어떤 패밀리에도 속하지 못한(예전엔 루스카라는 러시아 패밀리 소속이었지만 현재는 파문당한 상태) 프리랜서 킬러일 뿐이다. 최고회의가 제거하려는 것은 존 윅이라는 인물보다는 존 윅이라는 전설 그 자체이다. 존 윅은 이번 4편에서 자신을 제거하려는 최고회의와 그로부터 막강한 지지를 받는 그라몽 후작(빌 스카스가드)의 잔혹한 위협에서 벗어나 자유를 되찾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라몽 후작에게 1:1 결투를 신청해야 하며, 또 그러기 위해서는 루스카 조직을 이끌고 있는 카티야(나탈리아 테나)로부터 패밀리 멤버 자격을 다시 따야 하는데, 또 한 번 또 그러기 위해서는 클럽을 운영하는 악당 하르칸(스콧 앳킨스)을 죽여야 한다. 하르칸을 처리하지 못하면 그라몽 전에 카티야로부터 죽임을 당할 것이다. 여기에 그라몽이 고용한 또 다른 전설의 맹인 킬러 케인(도니 옌·견자단)이 존을 추격한다. 또 여기에 현상금 사냥꾼인 ‘노바디’(세미어 앤더슨)의 추적까지 이어진다. 쫓는 자만 있으면 그나마 얘기가 단순한데, 존 윅을 돕는 자까지 여럿이 등장한다. 일본 오사카의 콘티넨탈 호텔 매니저 시마즈(사나다 히로유키)가 그를 위해 목숨을 걸고, 뉴욕의 콘티넨탈 호텔을 없앤 것에 분노한 매니저 윈스턴(이아 맥쉐인)은 자청해서 존 윅의 후원자가 된다. 뉴욕 홈리스의 왕(로렌스 피쉬번)은 존 윅에게 무기와 최고급 방탄 슈트를 제공한다. ‘존 윅 4’에는 이런 부류의 영화로는 잘 차용하지 않는 과거 할리우드 고전이나 명작들의 장면들이 오버랩된다. 오프닝 장면에서 존 윅이 사막을 가로지르며 말을 타고 총격을 벌이는 모습은 영락없이 데이빗 린 감독이 1962년에 만든 피터 오툴 주연의 ‘아라비아 로렌스’의 시퀀스를 그대로 따온 것이다. 맹인 킬러 케인의 모습은 일본의 60년대 영화 ‘자토이치’의 캐릭터에서 가지고 왔으며, 존 윅이 클럽 악당 하르칸과 마주 앉아 카드를 칠 때 케인과 노바디가 옆에 앉아 서로를 겨누고 있는 장면은 쿠엔틴 타란티노가 만든 1992년 영화 ‘저수지의 개들’에 대한 오마주이다. 하르칸과 킬러 셋은 영화 ‘저수지의 개들’의 남자 넷처럼 서로에게 총구를 겨눈다. ‘존 윅 4’의 이야기 구조는 결국 1:1 결투를 벌이는 모습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서부극의 그것을 따라간다. 거기에 일종의 아시아적 생산 양식에 해당하는 무협의 서사 구조를 얹히려 한다. 최고회의를 구성하는 패밀리의 존재는 무림의 9대 문파를 닮았고, 이른바 강호의 규칙과 정파(政派)와 사파(邪派)의 논리 등을 끌어다 붙인다. 영화 속에 유난히 동양사상 경구가 많이 등장하는 이유다. 악당인 그라몽조차 이렇게 말한다. “한 가지를 대하는 태도가 만 가지를 대하는 태도이다.” 일본 사무라이 친구 시즈마는 존 윅의 무모한 삶을 걱정하며 말한다. “좋은 죽음은 좋은 인생 뒤에만 오는 법이네.” ‘존 윅 4’의 액션신들은 거의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최고봉이다. 존 윅은 6시 3분, 일출 시각에 결투 장소인 사크레쾨르 대성당에 도착해야 하는데, 시간을 못 맞추면 패배한 것으로 인정되고 그건 곧 자신과 윈스턴 등등 모두의 죽음을 의미한다. 그라몽 일당은 존 윅을 시간 내에 오지 못하도록 파리 시내와 몽마르트르 계단에 엄청난 킬러 군단을 깔아 놓는다. 존 윅이 사크레쾨르 성당에 가기 직전 폐가에서 일군의 킬러들과 근접전을 벌이는 장면은 천정이 없는 세트장에서 부감 샷으로 찍은 것인바, 대체로 원 신 원 컷의 롱 테이크로 찍었다. 그 액션을 디자인한 상상력과 기술, 스턴트의 개인기가 혀를 내두르게 한다. 몽마르트 언덕을 오르는 계단에서 벌어지는, 총격과 근접 무술이 배합된 액션신은 향후 수십 년간 나올까 말까 한 고난도의 기술력을 선보인다. 액션의 정교함도 정교함이지만 그걸 그럴듯하게 찍어 내는 촬영술도 현대 영화의 테크놀로지가 어디까지 왔는지를 가늠하게 만든다. 감독인 채드 스타헬스키는 스턴트 배우 출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 윅 4’의 톤앤매너는 끝나지 않는 싸움에 처한 한 킬러의 누적된 피곤함과 그 쓸쓸함에 대한 것이다. 존 윅은 이번에 유난히 힘들고 지쳐 보인다. 그는 자신의 묘비명에 ‘다정한 남편’이라 적히길 원한다. 사람의 야망은 그 사람의 가치를 넘어서서는 안 되는 일이다. 미스터 존 윅은 그걸 깨달은 지 오래다. 이번 ‘존 윅 4’에 나오는 대사이며 주제이다.
영화 ‘길복순’에서 의외로 놀라고 좋았던 것은 (근데 이건 감독을 둘러싼 기이한 논쟁들, 이른바 그의 ‘일베 성향’을 둘러싼 의혹들에 비하면 이상하다고 할 정도) 가상의 킬러들 세계조차 철저한 자본주의 양극화의 구조로 짜여져 있다는 설정이다. 이건 꽤 괜찮은 사회과학적 사고이다. 영화는 이런 패턴의 세계관을 내세우면서 동시에 다소 비뚤어진 지역 감정과 왜곡된 역사의식의 시한 폭탄을 숨겨놓음으로써 논란을 자초했다. 근데 그건 좀 심하게 이상한 일이다. ‘길복순’은 흥미로운 작품이지만 위험성도 지니고 있는 바, 이건 순전히 감독 리스크, 곧 변성현 리스크에 따른 것이다. 변성현은 어쩌면, 세상을 보는 시선을 정립하는 과정에서 올바른 선생이 없었던 것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정돈된 역사의식의 가르침이 중요한 이유다. 변성현 리스크는 영화를 텍스트(text)로 평가할 것이냐, 아니면 콘텍스트(context)로 평가할 것이냐의 해묵은 고민과 갈등을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길복순’은 영화 자체만으로는 웰메이드 작품일 수 있으나 영화 바깥의 맥락으로는 평가할 가치를 스스로 상실하고 있다. ‘길복순’의 길복순은 킬러이고 그것도 최고 에이스의 청부살인 업자이다. 그녀는 영화 속 킬러가 흔히 ‘독고다이(독코우타이. 특공대를 뜻하는 일본어로, 조직과 상관없이 홀로 일을 처리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속어)’로 일하는 것과 달리, 철저하게 조직에 속해 있으며 반드시 배정된 일만, 완벽하게 해내는 인물이다. 길복순이 소속된 회사는 MK엔터. 대표이사는 차 사장(설경구)이다. 이 회사는 세 가지의 잔혹한 규칙을 내세운다. 근데 이건 마치 아이작 아시모프의 그 유명한 ‘로봇 3원칙’을 연상케 한다. 어쨌든 세 가지 규칙은 일종의 회사 정관이기도 하다. 첫째는 미성년자는 죽이지 말 것. 둘째, 회사가 허가한 ‘작품’만 할 것. 그리고 셋째, 회사가 하는 작품은 반드시 ‘트라이’할 것이다. 특히 이 세 번째가 미묘한데, ‘반드시 트라이를 한다’는 말에는 시도는 했지만 실패한 사례와 시도조차 하지 않고 실패한 것에는 큰 차이가 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길복순은 바로 이 ‘시도조차 하지 않는 실패’를 자행하게 되면서 회사와 맞서게 되고 회사 내의 수많은 경쟁자들, 곧 다른 킬러들의 표적이 된다. 그녀는 살아 남기 위해 조직을 상대로 혈투를 벌이는데, 이 과정에서도 그녀는 15살 중학교 3학년인, 질풍노도의 딸 재영(김시아)을 정상적으로 키우려고 애쓴다. 근데 그게 또 다른 의미의 혈전(血戰)이다. 영화는 킬러의 세계와 한국 사회의 모습, 또 그 안에서 아이를 양육하는 문제가 완벽하게 등치 관계임을 우회적으로 역설하려 한다. 그 중의(重義)의 테마 구조, 3단 혹은 4단의 중충적 서사 구조가 흥미롭다. 감독이 꽤 영리한 영화 어법을 구사할 줄 아는 인물임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그렇게 되기까지 변성현은 영화적 레퍼런스를 이것저것에서 끌어다 댈 수 있을 만큼, 솔찮게 많은 소프트를 쌓아 놓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번 ‘길복순’의 기본 구조는 쿠엔틴 타란티노의 2003, 2004년작 ‘킬 빌1’, ‘킬 빌2’이다. 특히 차 대표와 길복순의 관계는 ‘킬 빌’ 시리즈의 빌(데이빗 캐러딘)과 베트릭스 키도, 일명 블랙 맘바로 불리는 여성 최고 킬러(우마 써먼)의 사이를 연상시킨다. 이 둘은 한때 연인이었으며, 스승과 제자 관계였다. 여자는 남자에게서 킬러의 모든 기술을 배운다. 차 대표와 길복순의 관계도 그렇다. 그들 둘도 한때 사귀었거나 아니면 여자가 남자보다는, 남자가 여자를 더 좋아했던 관계로 보인다. 그건 영화 후반부에 둘이 처음 만나게 되는 장면을 플래쉬 백으로 보여 주면서 설명된다. 차 대표의 현재 애인인지 아니면 진짜 오빠 여동생 관계인지 다소 헷갈리게 하는(둘의 이름은 각각 차민규와 차민희이다), 이 회사의 여성 이사(이솜)는 둘의 관계를 매번 질투의 시선으로 바라 본다. 그녀는 결국 길복순과 일종의 ‘경영권 분쟁’을 일으키고 그건 자본주의 기업 어디나 마찬가지지만 죽고 죽이는 싸움의 모습을 띠게 된다. 어쨌든 ‘킬 빌’ 시리즈의 빌과 키도가 둘 사이에 어린 딸을 두고 있는 것처럼, 길복순의 딸 재영이도 어쩌면 차 대표와의 사이에서 낳은 것일 수도 있다는 암시를 풍긴다. 그러나 그 진실은 끝까지 보여주지 않는다. ‘길복순’의 현란한 액션은 최신의 할리우드 액션영화에서 가져왔는데, ‘존 윅’ 시리즈를 차용한 것이 그렇다. 특히 무술 스타일이 유사하다. 한국의 합기도, 일본의 주짓수, 필리핀의 칼리아르니스 같은 근접 전투 무술들이다. 무술감독 정두홍식보다는 또 다른 액션감독인 브루스 칸식으로 보인다. 어느 쪽이든 촬영 난이도가 상당히 높다는 얘기다. 조직 내 모든 킬러가 길복순을 노리게 된다는 점은 거의 완벽하게 ‘존 윅’을 따라 간다. 이런 설정은 이후 2편, 3편의 시리즈물을 생각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길복순과 섹스까지 나눈 후배 킬러 한희성(구교환) 등 일군의 무리와 길복순이 일 대 몇으로 싸우는(실제로는 신참 킬러 영지가 돕지만) 영화 속 액션 클라이막스 장면은 회사와 맞서거나, 궁극적으로 자본주의 체제에 저항하는 일은 실로 외롭고 처참한 길임을 보여 주기도 한다. ‘길복순’의 오프닝 신, 특히 온 몸에 야쿠자 문신을 하고 한강 다리에서 잠을 깨는 자이니치(在日, 일본에 사는 한국인으로 재일동포 2·3세를 의미하기도 한다) 오다 신이치로, 곧 김광일(황정민)의 모습은 리들리 스콧의 1990년 영화 ‘블랙 레인’의 야쿠자 사토(마츠다 유사쿠)의 모습을 닮았다. ‘길복순’이 흥미로운 것은 괜찮은 뮤턴트(mutant), 곧 돌연변이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것저것 짬뽕이 돼있긴 한데, 그 안에 나름 창의성이 녹여져 있다. 그래서 아주 새롭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낡은 작품은 아닌, 그 무엇의 수준을 성취한 상태이다. ‘길복순’이 돌파해 낸 부분이다. 특히 한국사회가 지니고 있고, 심하게 앓고 있는 정치사회적 갈등 구조, 극단적 독점 자본주의의 폐해에 대한 문제 인식을 나열하고 있다는 점에서 얼핏 매우 흥미로운 지점을 보여 준다. 하지만 변성현의 자기 성찰은(이 부분이 중요하다), 극단적 독점 자본주의의 폐해를 그리는 자신의 이야기가 사실은 극단적 독점 자본주의의 특혜로 만들어질 수 있었다는 점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바로 이 영화 ‘길복순’이 이룬 성취의 한계이다. ‘변성현 리스크’, 곧 이 영화를 둘러싼 일베 논란 역시, 감독 스스로나 프로듀서 혹은 기획자인 넷플릭스 등 그 두 가지 상충과 간극의 지점을 깨닫지 못한 세상 인식의 모자람 때문에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극단적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자가 철저한 자본주의 옹호론자일 수는 있다. 그 둘은 같지만 다르고, 다르지만 같은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자본주의 비판과 옹호가 어떤 지점에서 다른 길로 가야 하는 지를 헷갈려 하면 안될 일이다. ‘길복순’이 아쉬운 것은 바로 그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돌연변이는 늘 매력적이지만 한편으로는 늘 이상한 존재인 법이다.
난 사실 블랙핑크가 어떤 친구들인지, 그들의 노래가 어떤 경향성을 지니는지 잘 모른다. 근데 아마도 그건, 내 나이 대의 사람들 대다수가 그럴 것이다. 그냥 BTS급의 세계적 인기를 지니고 있는 팝 그룹쯤으로만 알고 있으며 국내만큼, 아니 국내 이상으로 인기가 높다는 것을 바람풍으로 들은 정도일 것이다. 레이디 가가도 마찬가지다. 솔직히 레이디 가가가 브래들리 쿠퍼와 나온 2018년 영화 ‘스타 이즈 본’보다는 바브라스트라이잰드와 크리스 크리스토퍼슨이 나왔던 1976년 영화 ‘스타 탄생’이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스타 이즈 본’은 ‘스타 탄생’을 리메이크 한 작품이다. 블랙 핑크와 레이기 가가는 뮤지션들이다. 이쪽 방면의 아티스트들은, 영화인들보다 더, 대통령이 됐든 대통령 할아버지가 됐든, 아무리 그들이 부탁한다 한들 자기가 싫으면 안 하는 성향의 인물들이다.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블랙 핑크는 그 좋다는, 아니 단박에 세계적 명성을 얻는다는 UN공연도 마다했다고 한다. 그들의 스타성은 실로 하늘을 찌른다. 오랜 기간 이쪽 업계를 관찰해 온 사람으로서 한미 정상회담에 블랙 핑크 – 레이디 가가 공연이 ‘주요 의제’처럼 됐다는 사실이 놀랍지는 않다. 지금의 정부가 그저 ‘깜짝 쇼’를 하려고 혈안이 돼있다는 정도는 알고 있으니까. 그보다 놀라운 점은 블랙 핑크 급 스타들의 공연을 즉흥적으로 유치하려 했다는, 그 무모함에 있다. 이들의 스케줄은 2~3년 전부터 예약을 걸어도 될까 말까이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적 필요성이 요구되거나 해야 한다. 그것도 본인들이 싫으면 한 번에 ‘까이기’ 십상이다. 그래서 이들을 섭외하기까지는 매우 정교하고 디테일한 계획과 접근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는 대통령실이니까, 전화 한 통이면 모든 게 될 거라고 생각했을까. 그보다는 대체 이 공연의 계획과 입안 과정의 실체, 그 진실은 무엇일까. 정말 질 바이든 미국 대통령 부인이 그토록 원했던 일일까. 진실로 그것이 알고 싶다이다. 다 떠나서 블랙 핑크와 레이디 가가는 대체 무슨 죄인가. 한국의 정치가 이상적인 수준에 도다르지 못하는 이유는 문화에 대한 이해도가 낮기 때문이다. 문화적인 대통령, 문화적인 국회의원을 만나기가 쉽지가 않다. 그저 이용하려고만 한다. 연예계 셀럽들과 사진을 찍고 유명세에 편승해 표 한 장 더 얻으려는 천박한 심성 외에는 다른 게 없어 보인다. 정치가 문화적이 돼야지 문화를 하위 개념으로 깔보는 시선으로는 정치가 문화만큼 대중들의 사랑을 얻기가 힘이 든다. 정치가 문화적인 것이 되는 데는 천부적이거나 타고난 감성이 있어야 되는 것은 아니다. 문화 역시 끊임없는 훈련 과정이 필요하다. 지속적인 교육의 과정이 뒷받침되면 모두 어느 정도는 미술을 알아보는 식견과 음악을 취향 대로 골라 듣는 귀가 열린다. 혹은 영화가 갖고 있는 그 안의 메시지를 읽어 낼 수가 있다. 또다시 화제가 되고 있는 넷플릭스 영화 ‘길복순’에서 하급 킬러 한희성(구교환)은 주인공 길복순(전도연)에게 이렇게 말한다. “세상은 모순 덩어리예요. 우리는 그 모순 너머의 진실을 찾아야 해요.” 정치는 모순과 이율배반의 원천 같은 것이다. 사람들이 정치인에게서 기대하는 것은 세상을 구동하는 실체적 진실을 밝히기 위해 앞장서는 것이다. 적어도 문화 행위라고 하는 것이 늘 그런 메시지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정치인들이 잘 알고 있는지 심히 의심스럽다. 정친인들은 볼거리 이벤트에 앞서서 자신이 할 일들부터 잘 챙겨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수차례에 걸쳐 얘기하는 것이지만, 영화에 관한 법률 이름이 아직도 ‘영화와 비디오에 관한 법’이다. 지금 세상에 비디오가 남아 있는가. 아직도 VHS로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가. 국회의원은 입법을 하는 사람들인 바, 그렇다면 자신들의 책무를 다 하지 않고 있다는 얘기이다. 일종의 직무유기이다.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공연을 다니기에는 시간이 턱도 없이 부족할 것이다. 안되면 성의라도 보여야 할 것이다. 봉준호가 세계적인 감독이고 그가 K-컬처를 이끄는 사람이라는 판에 박힌 얘기만 할 것이 아니라 그가 만든 ‘기생충’이 왜 미국의 아카데미나 프랑스의 칸에서 주목을 받았는지, 그 영화가 한국을 넘어 세계 사회에 어떤 얘기를 던져 주고 있는지 성찰하는 얘기를 해야 할 것이다. 만약 앞으로 봉준호를 만날 계획이 있다면 그가 만든 새 영화가 에드워드 애슈턴이 쓴 SF소설 ‘미키 7’을 토대로 한 것이라는 것쯤은 알고 만나야 할 것이다. 만약 박찬욱 감독을 언급하려면 왜 그가 지금 베트남 작가 비엣 타인 응우엔이 쓰고 퓰리처를 탄 소설 ‘동조자’를 7부작 드라마로 만들고 있는지 정도는 인지해야 할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적어도 의전팀이 그 책의 내용을 요약해서 사전 보고 정도는 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지금의 윤석열 정부는, 안타깝게도, 그 같은 문화 수준을 기대하기 힘들다. 실로 암담한 일이다. 사람들이 점점 심하게 자조적이 되어 간다. 블랙 핑크 논란은 좌절감까지 느끼게 한다. 나라가 이렇게까지 가야 하겠는가.
미안한 얘기지만 새 영화 ‘나의 연인에게’는 달콤쌉싸름한 연애 얘기가 아니다. 시대가 어두운 만큼 사랑스러운 영화를 기대하는 심리가 높겠지만, 이 영화 ‘나의 연인에게’를 지난 2022년 베를린영화제가 괜히 파노라마 부문에 초청한 것이 아니다. 단순한 멜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처절하고 비극적이면서도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다. 영화는 살짝 멜로영화의 고전 격인 ‘러브 스토리’(1971) 처럼 시작하는 척, 사실은 드니 빌뇌브의 역작 ‘그을린 사랑’으로 전개되다가 폴 그린 그래스가 만든 ‘플라이트93’의 결말을 향해 가되 그 시선은 친미나 반미가 아닌 중립적인 노선을 취하려 애쓴다. 영화 ‘나의 연인에게’는 매우 복잡한 시선과 감정을 갖게 되는 영화이다. 무엇이 옳은가. 사랑은 옳아야 하는가. 옳지 않아도 사랑을 하면 괜찮은 것인가. 사랑은 모든 걸 다 용서할 수 있게 하는 것인가. 옳다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보다 사랑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 영화의 원제는 코파일럿(Copilot), 부조종사이다. 영화 속 아실리(카난 키리)는 사이드(로저 아자르)의 연인이자 자신의 마음속 부조종사이다. 사이드가 미국 어느 상공에서 조종간을 잡았을 때 그의 머릿속에는 아마 그 어떤 것보다(알라 보다, 이슬람의 영광보다) 이 튀르키예 여인 아실리가 떠올랐을 것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기는 법이니까. 사랑하는 여인 한 명이 거대한 민족을 이기고, 그녀 한 명에 대한 육욕이 ‘위대한’ 애국심을 이기는 법이니까. 이 영화가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는 영화의 앞자락에 많은 부분이 노출된다. 독일에서 각각 의대와 치대를 다니고 있는 튀르키예계 여대생 아실리(부모가 독일에 이주한 상태)와 레바논 출신의 유학생 사이드가 처음 만나는 장소는 놀이동산이다. 당연히 빙글빙글 돌고 공중에 떳다 가라앉았다 하는 놀이 기구를 타기 마련인데, 이때까지만 해도 사이드는 그런 놀이기구의 스릴마저 부담스러워하던 인물이었다. 친구들 몇 명이 모여 게임을 하며 놀면서 사이드는 진심을 고백하는 시간을 갖게 되는데, 그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부모의 뜻에 따라 독일에까지 와서 치대에 다니는 것, 그 ‘안락하고 비겁한 삶의 길’이라고 말한다. 사이드는 점점 자신이 생각하기에 의미가 있는 일, 진리에 이르는 길에 경도되기 시작한다. 아실리는 그런 그를 사랑하면서도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고, 그가 종종 자신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함부르크와 예맨을 오가는 것 역시 매우 이상하게 생각하게 된다. 사이드는 결국 플로리다까지 가서 비행기 조종술을 배우고 조종자 자격까지 따게 된다. 사이드는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일까. 아실리가 놓친 것은 무엇일까. 아실리가 놓친 척 알고 있는 사실은 무엇일까. 시간은 점점 2001년 9월 10일을 향해 다가서기 시작한다. 이 영화가 만약 첩보 스릴러류의 상업영화였다면 온 세계 수사기관이 사이드의 비밀을 알아내려 하고, 그를 뒤쫓고, 결국 어떤 사건이 터짐으로써 모든 것이 무위로 돌아가는 이야기 구조로 짰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연인에게’는 그런 영화가 아니다. 2001년 사이드가 일으킨 ‘사건’은 결과적으로 미국의 대대적인 복수극을 만들어 내고 그럼으로써 거의 모든 세상 인식과 세계관을 미국 중심으로, 곧 미국을 피해자로 간주하는 시점으로 짜 맞추게 해놨지만 돌이켜 보면 모든 일은 근인과 원인, 이유가 다 있는 법이다. 모든 일은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하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에 균형이 생긴다. 가해와 피해의 경계에 대해 보다 깊이 있게 생각하려 하게 된다. ‘나의 연인에게’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아실리의 튀르키예 엄마가 왜 그렇게 사이드를 싫어하는지부터 생각해 보면 그 지름길이 찾아진다. 튀르키예는 오스만 튀르크 제국의 후예들이고 이들은 자신들이 아랍이나 페르시아인들과 다른 수준의 민족이라고 생각한다. 아실리의 엄마는 아실리에게 끊임없이 ‘우리는 귀한 가문의 사람들’이라고 얘기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엄마가 생각할 때 레바논이라는 나라가 실로 엉망진창이고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곳이라고 여기기 때문으로 보인다. 실제로 레바논은 1975년 이후 현재까지도 끊임없는 내전에 휩싸여 있으며 중동의 파리라 불리던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는 폐허가 된 지 오래다. 사이드의 부모가 아들을 독일로 유학 보내려 했던 것 그리고 비교적 무색무취한 직업인 치과의사를 시키려 하는 것 등등 역시 모두 한결같이 같은 이유 때문으로 보인다. 전쟁 같은 상황의 나라에서 아들을 빼내려 했던 것인바, 이 같은 분위기는 영화 속에서 사이드를 동반하지 않은 채 아실리가 사이드의 베이루트 집을 방문했을 때 드러난다. 사이드의 대가족은 아들이자 집안의 주요한 후손이 뭔가 다른 일을 계획 중이라는 사실에 크게 불안해한다. 그리고 아실리에게 아들의 행방을 다그친다. 이제 곧 무슨 일이 터질 것 같은 일촉즉발의 위기의식, 그 아우라가 느껴지기 시작한다. 레바논은 세 정치종교집단이 지배 그룹을 형성하던 국가였다. 기독교계 마론파와 이슬람의 시아파 그리고 수니파가 그들이다. 197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기독교계 인구가 절대 우위였고, 따라서 지배 구조는 기독교계 대통령을 중심으로 이슬람 수니파나 시아파 총리 식으로 유지됐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건국 과정에서, 본래 그 땅에서 살아 가던 팔레스타인인들을 탄압하고 몰아내면서 난민이 발생했고 이들이 대거 레바논 남부 쪽으로 유입되며 상황이 바뀌기 시작한다. 이는 레바논의 민족 성비가 바뀌게 되는 계기다. 기독교인들보다 이슬람 교도들 수가 더 많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아라파트가 이끄는 무장 투쟁기구 PLO(팔레스타인 민족평의회) 본부가 레바논에 입성하고, 반이스라엘 전선이 급격하게 확장되면서 문제가 심각해지기 시작한다. PLO와 이스라엘의 싸움은 시리아와 이스라엘의 대리전으로, 나중에는 세 나라 및 민족이 마구 뒤섞이면서 레바논은 바야흐로 기독교와 이슬람, 범아랍주의와 소레바논주의, 우익과 좌익, 친미와 반미 등 대립으로 격화된다. 나라는 실로 뒤죽박죽이 돼 간다. 이런 모든 얘기들은 스티븐 스필버그가 만든 ‘뮌헨’(2006) 등에 잘 나타나 있다. ‘뮌헨’은 요르단에서 PLO가 공격받았던 사건, 이른바 ‘검은 9월’ 사건으로 ‘검은 9월단’이 만들어지고 이 무장 극단주의 단체가 뮌헨 올림픽에 참가한 이스라엘 선수들을 대상으로 테러를 일으킨 사건이다. 아수라장의 레바논 내전 과정에서 기독교계 민병대(레바논 기독교계 마론파에서 만들어진 팔랑헤당의 외곽 무장단체)가 무차별적으로 회교도들을 학살했는데, 이때 이른바 버스 학살 참사가 벌어졌고(드니 빌뇌브의 ‘그을린 사랑’) 여기에 반격하기 위해 이슬람 극단 무장단체 헤즈볼라가 생겼으며, 이 모든 과정에서 대미 군사작전을 기획하게 되는 알카에다 조직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미국 9.11 테러의 뿌리는 이 레바논 내전, PLO-이스라엘-시리아 간 싸움을 넘어 중동 분쟁에서 시작된 셈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영화 ‘나의 연인에게’는 그 혼란의 씨앗이 한 인간에게, 한 연인에게 어떠한 상처를 남기는지를 역력하게 보여준다. 그것참 매우 슬픈 일이지만 어찌 보면 상당히 자명한 일일 수도 있는 일인 지라 냉정하게 바라보면 역설적으로 사랑의 진수, 그 본질을 꿰뚫어 볼 수도 있겠다. 사랑과 이념, 종교, 정치적 투쟁은 두 가지 지점에서 공통적이다. 하나는 맹목적이라는 것이고, 하나는 20대 젊은이들의 사고체계를 자극하고 지배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사이드에게 있어 이슬람을 압제에서 구하는 것과 아실리를 사랑하는 것은 동전의 앞뒷면이다. 종교를 위해서도 여자를 지켜야 하고 여자를 위해서도 종교적 의무를 다해야 한다. 사이드에게 종교는 전체이고 여자는 부분인데, 전체는 부분 없이 존재할 수 없고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아실리와 사이드의 현재적 삶과 사랑이 성취될 수 없는 것은 그 둘의 책임 때문이 아니라 레바논 내전 때문이고, 종교 지도자들의 권력욕 때문이고, 이들을 조종하는 주변 국가, 강대국들 때문이다. 곧 구조의 문제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성세대들은 아실리와 사이드의 비극적 사랑에 대해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영화 ‘나의 연인에게’는 바로 그런 질문을 하는 작품이다. 사랑은 정치이자 혁명이다. 영화도 정치이자 혁명이다. 정치는 사랑과 영화이다. ‘나의 연인에게’는 사랑과 정치에 대한, 그 절묘한 균형에 대해 얘기를 하고 있는 영화이다. 세상이여, 연인들을 사랑하며 살게 하소서.
스즈메(목소리 역: 하라 나노카)는 규슈 구마모토 현에 살고 있는 소녀다. 16살이며 엄마는 4살 때 실종,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은 공무원인 이모 타마키(목소리 역: 후카츠 에리)와 단 둘이 살고 있다. 이모는 죽은 언니 대신 스즈메를 키우느라 청춘을 보냈다. 남자를 집에 초대하지도 못했고, 마음 편하게 어디 놀러 다니지도 못했다. 스즈메는 스즈메대로 그런 이모가 한편으로 부담스러운 구석도 있다. 스즈메는 아직도 엄마가 어딘가 살아 있을 수 있다는 꿈을 자주 꾼다. 엄마는 손재주가 좋았는데 책상 의자 같은 걸 직접 만들어 주기도 했다. 사고가 있던 ‘그날’, 의자 다리 하나가 빠졌었다. 스즈메는 그 ‘불량’ 의자를 버리지 않고 간직한 채 살아 간다. 엄마가 남기고 간 것이니까. 스즈메는 오늘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이모가 차려 준 도시락을 들고 학교로 냅다 달리는 중이다. 그런데 고개 아래 길 맞은 편으로 한 잘생긴 청년(나중에 알고 보니 교원을 준비 중인 대학생), 소타(목소리 역: 마츠무라 호쿠토)를 만난다. 소타는 스즈메에게 “이 근처에 폐허가 있는 곳이 어디냐?”고 묻는다. 이때부터 스즈메는 소타와 함께, 아니 소타를 ‘갖고’ 다니며 폐허 속 문을 찾아 문단속에 나서게 된다. 소타가 고양이 묘석 다이진의 저주에 걸려 스즈메의 다리 세 개짜리 의자로 변하게 되기 때문이다. 소타에 따르면, 폐허 속 문을 닫지 않으면 대지진이 일어난다. 그의 설명으로는 일본 전역 동서 양쪽에 두 개의 묘석이 박혀 있고 이 묘석이 ‘미미즈’를 가둬 놓고 있는데 미미즈는 대규모 재난을 일으키는 엄청난 에너지 같은 것이라고 한다. 알고 보면 소타는 대대로 토지시(閉じ師, 닫는 자) 집안의 사람이다. 소타는 병석에 누워 있는 할아버지 ‘히츠지로’ 대신 세상의 문단속을 하고 다니는 중이다. 애니메이션 판타지에 걸맞는 동화 같은 얘기지만 이 2D애니메이션의 시나리오와 작화, 연출을 모두 맡은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메시지는 비교적 간단 명료하다. 일본에서 더 이상의 재난은 없애야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무엇으로? 사람들의 간절한 소망 같은 것으로. 스즈메 같은 착한 소녀의 염원들을 모아서이다. 애니메이션 ‘스즈메의 문단속’은 그같은 소박하고 순수하며 어여쁜 소망이 담긴 작품이다. 이 애니메이션의 ‘착하고 선한’ 의지를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고 이해하는 데는 영화 속 스즈메의 동선을 따라가 보면 된다. 스즈메는 규슈 구마모토에서 출발해 시코쿠 지역의 에히메로 갔다가 혼슈의 고베 그리고 도쿄를 들러서 큰 문단속을 하고 결국엔 고향인 후쿠시마까지 긴 여정을 완성한다. 시코쿠의 에히메는 지난 2021년 기록적인 폭우로 산사태가 발생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던 곳이다. 영화에서도 스즈메가 문을 닫는 과정에서 비바람이 치고 폭우가 내린다. 스즈메는 폐허 속 버려진 한 학교의 교실 현관 문을 닫는데 성공한다. 에히메 산사태 때 학교 학생들의 희생이 컸을 것이다. 고베는 아예 ‘고베 대지진’이라는 말을 모두가 알고 있을 정도다. 1995년 규모 7.3의 대지진이 일어났고, 7000명 가까운 사람이 죽었으며 5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부상을 당한, 대재해였다. 영화에서 스즈메는 의자로 변한 소타와 함께 간신히 이 지진을 막아내는데 성공한다. 한 유원지에 버려져 있는 대관람차 문 하나가 막 열릴 참이었다. 당시 고베에서는 평소처럼 유원지에 놀러갔던 가족 단위의 참사가 컸다. 자, 그리고 스즈메의 마지막 행선지는 도쿄와 후쿠시마이다. 도쿄는 1923년 간토(관동) 대지진이 일어났던 곳이다. 그때 무려 40만 명이 죽었다. 이 간토 대지진은, 직후에 벌어진 세계 대공황과 겹쳐 일본 사회를 극우 파시스트의 사회로 몰고 가게 한 직·간접적인 요인으로 작동한다. 한편으로는 도쿄에서 하급 노동자로 일하던 식민지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탔다느니, 방화를 일삼는다느니 해서 집단 학살이 일어났던 때이기도 했다.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스즈메와 소타는 요석을 지키는 데 성공한다. 미미즈는 나오지 못한다. 스즈메가 마지막으로 가는 곳은 4살 때 집을 떠났던 후쿠시마다. 12년 전, 그러니까 2011년에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났던 곳이다. 규모 9.1이었다. 이 대참사로 18만 명이 매몰됐다. 이어 후쿠시마 원전 사태까지 터졌다. 일본은 아직도 이 동일본 지진의 재난에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무엇보다 정신적으로 벗어나 있지 못한 상황이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그래서 어쩌면, 신카이 마코토식 일본 대지진의 역사 기록서로 읽히기도 한다. 신카이 마코토의 상상대로 요석이 잘 박혀 있었어야 했다. 하나는 규슈에 또 하나는 도쿄에. 그때나 지금이나 스즈메와 같은 착한 소녀 그리고 소타 같은 불굴의 토지시가 있다면 사람들은 죽지 않았고 죽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스즈메의 엄마는 살아 있을 것이다. 그날 아침 다녀오겠다며 방글대면서 엄마와 바이바이를 했던 아이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런 아이들을 무심코 보냈던 엄마들, 가족을 위해 일터로 나갔던 남자들, 그 많은 사람들의 사연. 그 모두와 모든 것이 다 살아 있게 됐을 것이다. ‘스즈메의 문단속’이 목놓아 이야기하는 것은 그 수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절박감, 그럼에도 그 폐허 위에서 어떻게든 살아내야 한다는 절체절명의 무엇과도 같은 심정인 셈이다. 스즈메는 현재 아무 것도 남지 않은 후쿠시마로 향해, 집이 있었다고 짐작되는 곳에서 폐허의 문을 열고 4살 때로 돌아 간다. 그리고 곧, 꿈 속에서 늘 엄마라고 생각했던 인물이 엄마처럼 성장한 자기 자신임을 알게 된다. 스즈메는 비로소 엄마의 죽음을 직시하고 그 죽음의 통과의례를 거쳐 한 단계 다른 차원의 자신으로 성장한다. 스즈메가 커 나가듯 일본 사람들도 죽음의 현실을 받아 들임으로써 그 죽음을 넘어서야 한다고 신카이 마코토는 이야기한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재난을 그리고 묘사하는 것을 넘어 일종의 재난 철학, 재난에 대한 사상을 따뜻한 감성으로 전하는 작품이다. 재난은 재난을 당하는 과정에서는 분루(憤淚)의 감정에 휩싸이지만,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에는 늘 감동의 휴먼 드라마와 눈물 없이 듣고 볼 수 없는 이야기가 펼쳐지기 마련이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바로 그런 이야기를 하는 작품이다. 영화 엔딩에 나오는 밴드 래드윔프스의 노래 카나타하루카(カナタハルカ, KANATA HARUKA)는 많은 것들을 함의하고 있다. 이런 내용이다. 사랑은 혁명도 초조함도 천재지변도 아닌, ‘너’였어/ 몇천 년 후 인류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다/ 아직 아무도 모르는 얼굴로 웃는 너를 보고싶어/ 너와 보는 절망은 네가 없는 희망따위 흐릿하게 빛나게 할테니까 우리는 흔히 일본 사람들, 특히 일본 젊은이들의 정치적 무관심에 대해 비판적이 되곤 한다. 우파인 자민당 70년 체제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사느냐고 지적들을 한다. 그러나 일본인들에게는 하루하루 살아낸다는 것, 대자연재해의 트라우마를 견디며 살아간다는 것이 더욱 중요한 일일 수 있겠다. 그들은 늘 죽음을 곁에 두고 살아가고 있는 셈이니까. 신카이 마코토 이야기는, 그렇기 때문에 가능하면 스즈메처럼 남들을 살리려고 애쓰는 마음 자세를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 그게 바로 사랑이며 사람들 간 연대이고, 세상의 진정한 평화를 이루는 올바른 길일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랑은 결코 혁명도 초조함도 천재지변도 아닌 바로 너, 내 곁에 오늘도 숨쉬고 살아가는 구체적인 사람, ‘너’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구하기 전에 자신 곁의 단 한 사람부터 구할 일이다. 세상은 차곡차곡, 한 발 한 발, 매우 구체적으로 바뀌어 나가는 법이다. 세상의 모든 ‘토지시’를 위하여!
Dear Mr. 브루스 윌리스. 안녕하세요. 저는 한국 서울에 사는 사람입니다. 영화 평론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보다 정확하게는 데일리 신문과 방송, 유튜브로 영화를 소개하는 영화 리뷰어입니다. 당신의 최신작, 아니 거의 마지막 작품 격이 될 것 같은 영화 ‘디텍티브 나이트: 가면의 밤’을 소개하려다 이렇게 편지를 보냅니다. 한국은 잘 아시지요? 제 기억에는 1995년엔가 서울 강남 논현동이란 곳에 플래닛 할리우드라는 레스토랑을 오픈하면서 그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실베스타 스탤론인지 아놀드 슈왈제네거였는지 기억이 확실하지는 않지만 함께 한국을 방문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당신은 거기에 갔다가 당시 용산 미8군도 들렀었지요. 한 방송사 기자였던 나는 그 과정을 취재했었습니다. 아주 오랜 얘기지요. 플래닛 할리우드는 당신 포함, 세 액션 배우가 만든 일종의 테마 레스토랑이었죠. 세계에 체인점을 열며 야심차게 시작했지만 여론이 좋지 않았고 (지나치게 미국 소비문화가 들어온다는 이유로) 영업실적도 저조해 1년만에 폐점됐습니다. 다소 과한 음식점이기는 했었어요. 영화 얘기로 돌아 가면, 본인께서도 충분히 이해하고 잘 아시겠지만, 평론 입장에서는 언제부턴가 당신 영화를 소개하는 걸 꺼렸던 것이 사실입니다. 훌륭한 액션 배우이자 연기파 배우였지만 나이가 들고부터 주로 B급 액션영화에 출연해 왔던 것이 사실이었으니까요. 작품성을 논할 수 있는 영화들이 아니었습니다. 이번 영화 ‘디텍티브 나이트: 가면의 밤’은 더욱더 하향 평준화된 작품이더군요. 원래 제목은 ‘디텍티브나이트: 로그(rogue)’예요. 순 한국말로 하면 ‘형사 기사(騎士): 악당’이란 뜻인데 왜 번역 제목을 저렇게 애매하게 붙였는지 이해가 안가더군요. 원래대로 했으면 작품 내용과 좀 들어 맞는 부분이 있었을텐데 말이죠. 내가 이 영화를 본 건 순전히, 미스터 브루스 윌리스, 당신이 아프다는 소식, 와병 소식을 들었고 그것을 늘 팔로우하고 있어서입니다. 당신이 실어증과 치매 판정을 받기 직전, 그러니까 지난 2022년 3월 이전에 만든 작품이 이 영화이니까요. 그래서 당신의 연기가 어땠는지 보고 싶었고, 그것을 기록하고 싶었습니다. 당신을 위해서라면, 내 어릴 적부터 함께 해 주었던 당신, 브루스 윌리스를 위해서라면 작품이 좋든 나쁘든 그깟 것이 뭐 그리 중요하냐는 생각도 했습니다. 예상대로 영화는 거의 ‘망작’에 가깝더군요. 하고 싶은 얘기는 많고, 감독의 욕심은 많았는데 일단 영화의 서사(敍事)라는 게 무엇인지, 그 기본이 안 돼 있는 작품이더군요. 왜 당신 같은 스타가 이 영화를 선택했을까 싶을 정도였습니다. 당신의 연기는, 생각했던 대로 그리고 가슴아프게도, 실어증이 심해지기 직전의 건강상황을 반영하는 것이었습니다. 거의 모든 대사가 한 문장으로 돼 있거나 아예 없는 경우도 많아서 감독인 에드워드 드레이크가 당신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필모그래피를 보니, 2020년경부터 2022년경 겨우 2년 사이에 당신과 액션영화 5편까지 찍었더라고요. ‘와우, 이건 뭐지’ 했을 정도에요. 이 작품은 아마 드레이크 감독이 3부작 시리즈로 기획을 한 것 같고요, 그래서 속편 격에 해당하는 ‘디텍티브나이트: 인디펜던스’가 미개봉작으로 남아있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그제서야 무릎을 쳤죠. 이번 작품에서 당신 브루스 윌리스, 극중 배역은 제임스 나이트가 후반부 악당을 죽이기 위해 스스로 악당(rogue)이 돼 샷건을 난사하죠. 그리고는 경찰임에도 경찰들에게 체포되고 말죠. 그리고 어떻게 됐는지, 감옥에 갔는지, 어쨌는지가 나오지를 않습니다. 아 근데 2편이 있고 3편이 있다는 얘기잖아요. 2편 제목을 보니까 아마도 경찰 제복을 벗고 독립한 사설 탐정 혹은 자경단 역할을 하는 모양 같습니다. 안타깝게도 3편은 보기가 힘들겠지만요. 미스터 블루스 윌리스. 이번 영화에서 당신은 거의 무표정 연기를 했습니다. 연기라기 보다는 그냥 뭐랄까 단순 액션을 이어가는 모습이었습니다. 자신이 연기를 하고 있다는 자각조차 종종하지 못하는 듯 보여 마음이 아프더군요. 그래서 역설적으로 영화를 본 게 잘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도 당신은 이별할 수 있는 시간과 기회를 주는구나’하고 생각했죠. 영화 후반부 당신의 동료 형사(총 세발을 맞고 병원에 있고 사건 현장에서 만난 LA의 또 다른 형사) 상고(지미 장 루이스)가 차에서 생각에 잠긴 당신을 차창을 두드려 깨우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때 당신은 멍한 표정으로 ‘이 인간은 누구인가, 여기는 어디인가, 지금 뭐라고 얘기를 하는 건가’하는 눈빛으로 상고를 쳐다 봅니다. 근데 그건 연기가 아닌 것 같았어요. 실제 당신의 상태가 그때 그랬던 듯 보입니다. 당신의 대사도 이거였죠. “근데 왜 나를 깨운 거야?” 그러나 당신은 차 안에서 자고 있지 않았거든요. 아마도 에드워드 드레이크 감독 이 친구가 의도적으로 이 장면을 빼지 않고 그대로 넣었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더군요. 아 그리고 극중에서 총맞은 동료형사 핏체럴드 역은 로크린 먼로더군요. 수십편의 B급 액션영화에 주연급 조연으로 나왔던 잘 생긴 배우였는데 이 친구도 이제 정말 많이 늙었더군요. 세월과 시간은 정말 어쩔 수 없다는 걸 느끼게 해줬습니다. 그렇죠. 그렇게 한 시절이 가는 거겠죠. 친애하는 브루스 윌리스. ‘디텍티브나이트: 가면의 밤’은 오프닝 액션 신만큼은 괜찮았어요. 범인들이 현금 수송차량을 터는 장면이었죠. 그리고 당신이 등장해 총격 신을 벌이는 장면이었고요. 그건 마치 이런 류의 영화들 중에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마이클 만 감독의 ‘히트’를 본 딴 것 같았죠. 좋았어요. 아 그리고 이야기 설정도 나쁘지 않았어요. 범인들이 퇴출된 미식축구 선수 출신이라는 것, 알고 보면 형사 당신이든, 갱스터들이든, 범인들을 사주하는 진짜 악당이든 다 자기들 삶의 방식과 논리가 있는 듯이 보이는 것도 마치 보스톤 작가 데니스루헤인이 쓴 숱한 하드 보일드 소설들(‘켄지와 제나로’ 시리즈 혹은 ‘밤에 살다’, ‘무너진 세상에서’ 등)을 닮으려 하고 있다는 점으로 보여 나쁘지 않았습니다. 이런 하드 보일드는 선악의 경계가 없죠. 다 자신들의 생존방식일 뿐입니다. 1920·30년대 보스톤에서는 한 집안에 경찰과 갱스터가 같이 살았을 정도였고, 1940·50년대 시카고와 뉴욕에서는 마피아 패밀리들이 일반인들과 섞여 살았으니까요. 지금은 금용자본 깡패들이 버젓이 활보하는 시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런 영화들은 그런 지점의 심리를 궤뚫고 있는 셈이지요. 그러나 ‘디텍티브나이트: 가면의 밤’은 그냥 흉내내기에 그쳤습니다. 아직 감독의 연출력, 사고, 사회 철학이 성숙하지 못한 듯 보입니다. 액션 신을 잘 찍는 걸 보니 액션 신만 찍는 유니트(unit) 감독 출신으로 보입니다. 촬영감독이었거나. 친애하는 미스터 브루스 윌리스. 지금껏 나의 인생에 수없이 많은 좋은 영화, 재미있는 영화를 선사해줘서 감사에 감사를 드립니다. ‘식스 센스’는 걸작이었고요. ‘씬 시티’도 잊지 못할 영화죠. ‘12 몽키스’에서 당신의 연기는 명불허전이었어요. ‘다이 하드’는 할리우드 역사에 남게 되겠죠. ‘라스트 맨 스탠딩’, ‘제5원소’, ‘스트라이킹 디스턴스’도 꼽을 영화입니다. ‘마지막 보이스카웃’에서 바람핀 아내를 용서하는 장면은 뭉클하게 했어요. 당신의 침실에서 딴 남자를 찾아 내는, 그 탐정의 감각도 대단했죠. ‘허영의 불꽃’, ‘노스바스의 추억’같은 명화는 당신의 문학적 영화로 기억될 겁니다. 애정하는 미스터 브루스 윌리스. 남은 생애, 기억을 조금씩 잃어 가더라도, 우리가 당신을 정말로 좋아하고 사랑했었다는 사실 하나 만큼은 끝까지 기억해 주시기를. 안녕 브루스 윌리스. 부디 건강하게 지내시기를. 가족과 평화를 누리시기를.
알리 아바시 감독의 2022년작 ‘성스러운 거미’는 충격 그 자체의 영화이다. 많은 사람, 특히 무슬림에 대해 일정한 편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생경하고, 역설적으로 신선할 정도의 소재인 작품이기도 하다. 이란 사회, 특히 테헤란도 아니고 순교자의 땅이란 뜻의 종교 도시 마슈하드에서 매춘부들이 공존하고 있는 데다 그 여성들 16명을 살해한 연쇄 살인자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히잡을 쓰고 몸을 파는 여인들을 쉽게 상상할 수 없다. 그만큼 이란 사회가 종교적으로 폐쇄적이어서 윤락이라는 행위가 절대적으로 허용되지 않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종교적 강직성도 자본주의의 폐해를 막지 못한다. 윤락 여성의 문제는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 내는 구조적인 문제이지 윤리적이거나 도덕적인 문제는 아니다. 가난해서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은 여자든 남자든, 뉴욕이든 마슈하드든, 예루살렘이든, 서울이든 모두 거리로 내몰린다. 자신이 팔아야 할 상품이 오로지 ‘몸뚱이’ 하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도덕을 들이대는 것만큼 잔인한 일은 없다. 거기에 종교적 정화(淨化)란 광신의 악행이 더해지면 그 휘발성은 어디로 번질지 가늠하기 힘들다. ‘성스러운 거미’는 바로 그 이야기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영화의 오프닝은 살인자가 한 매춘부를 살해하는 장면으로 구성된다. 여자는 아이에게 먼저 자고 있으라 하고 밤거리로 나간다. 여자는 공중화장실에서 립스틱을 짙게 칠하고 신발을 구두로 갈아 신는다. 스카프로 머리를 가렸을 뿐 전통 의상인 히잡을 쓰고 있지 않아 남자들은 대체로 이 여자가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간파한다. 여자는 한 남자에게 몸을 팔고, 또 다른 남자에게 유사 성행위의 값을 받는다. 그 와중에 할머니 마약상으로부터 마약을 사 약을 하기도 한다. 오늘은 돈을 내라는 노파에게 여자는 “알아요. 근데 오늘 몇 탕을 더 뛰어야 할 것 같다”며“사정 좀 봐 달라”고까지 한다. 그녀는 오늘 이상하게 기분이 찝찝하다고 말한다. 그녀는 곧 오토바이로 자신을 태우고 간 남자에게 목이 졸려 살해당한다. 이 여성을 포함해 이란 사회는 곧 16명의 매춘부를 살해한, 일명 ‘거미 살인마’ 이야기로 들끓는다. 영화는 처음엔 미스터리 범죄 스릴러 분위기인 척하지만 처참한 느낌의 오프닝 장면 이후부터는 그 같은 형식이 ‘거추장스럽다’는 듯 이내 범인의 실체를 공개하고 사건의 후속 이야기들을 펼치기 시작한다. 영화는 사회적 리얼리즘의 영화로 바뀌어 간다. 놀랍게도 살인마는 아이 셋을 둔 가장인 사이드 아지미(메흐디 바제스타니)인데 그를 추적하기 위해 테헤란에서 용감한 여기자 라히미(자르 아미르 에브라히미)가 현장에 도착한다. 매우 흥미롭고 적나라하며 참혹한 느낌을 주는 것은 영화 속 살인마가 종교적 광신도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아지미는 영화 후반부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1981년부터 1988년까지 전쟁(이란-이라크 국경 전쟁)에 참여했다. 여기자 라히미의 짐작으로는 바시즈 민병대(이란 혁명 수비대급의 종교적 준군사조직) 출신으로 보인다. 서구 시각, 특히 할리우드 영화 감각으로 보면 일종의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고 있는 남자의 이야기인 셈이다. 아지미는 종교 성지에서 음란행위를 하는 쓰레기 같은 여자들을 일소하는 것이야말로 종교적 사명 의식을 실현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이 영화를 보면서 괴물 같은 종교가 어떻게 괴물 같은 살인마를 만드는가라는 식의 논리로 단순화하는 것은 오히려 꽤 위험한 논법일 수 있다. 이 영화의 감독인 알리 아바시는 이 모든 광기의 사건이 이슬람 종교의 본질에서 온 것이라고 귀착시키지는 않는다. 그건 자칫 이슬람에 대한 또 다른 광기의 편견을 불러올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인데, 아지드는 자신이 죽인 여자를 카펫에 둘둘 말아 둔 채 자신의 아내와 섹스하면서 점점 흥분되는 모습을 보인다. 인간의 악마성이 종교와는 사실상 무관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이 사건을 맡은 판사는 인터뷰하러 온 여기자에게 이슬람 종교가 갖는 합리성을 역설하려 애쓰기도 한다. 인간이 인간을 살해하는 행위는 어떠한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그는 말한다. ‘성스러운 거미’가 주목하고 지적하며, 천착하고 있는 것은 종교적 경직성이 만들어 낸 괴물과 이단적 살인 행위보다는 그것을 유발하게 된 정치적, 사회적, 젠더적 폐쇄성에 있는 것이라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는 여기자 라히미의 등장 직후부터 거리에서 살해되는 여성의 문제와 이 여기자가 이란 사회에서 차별받고 억압받는 문제를 등치시킨다. 라히미는 마슈하드에 도착해 호텔에 체크인하는 순간부터 차별받는다. 호텔 카운터에서 그녀는 혼자 투숙한다는 이유로 예약이 취소된다. 호텔의 남자 직원은 그녀에게 ‘머리를 가려 달라’는 부탁 아닌 명령을 하기도 한다. 연쇄살인을 수사하는 경찰국장(기이하게도 느긋하고 심드렁해 보이는데)은 결국 라히미에게 너도 테헤란에서 헤프게 하고 다닌 여자 아니냐며 자신과 연애, 곧 잠자리를 하면 수사 기록을 보여 주겠다고 윽박지른다. 이쯤 되면 살인마와 경찰국장이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영화를 만든 알리 아바시가 이야기하려는 지점의 끝은, 폐쇄 사회가 유발하는 중층적 모순이 결국 여러 문제의 본질을 하나로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마슈하드의 살인마를 잡는 것은 여성 라히미에 대한 이란 사회의 온갖 성적, 정치적, 사회적 차별을 없애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셈이다. 라히미는 살인범 아지미를 찾아낼 것인가. 이 영화의 시대 배경은 2001년 9·11 테러 직후이다. 전 세계가 일종의 종교적 성전(聖戰) 논쟁으로 들끓었던 시대이다.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하고 또 그 같은 종교적 차이를 앞세워 다른 국가, 다른 민족, 다른 인종을 억압하고 유린했던 그 모든 세상사가 막대한 인명 피해의 참극을 만들어 냈던 시기이다. 어느 것이 닭이고 어느 것이 달걀인지를 구분하려고(종교가 테러를 만들어 냈는지 테러가 종교를 더욱 극단화시켰는지) 모두 안달 나 했었고 그것이 또 다른 전쟁 또 다른 테러로 이어지게 했다. 알리 아바시 감독이 2001년 이란에서 실제로 벌어진 범죄행각을 영화로 만든 이유는 단 하나인 것으로 보인다. 20여 년이 지났음에도 그때의 그 문제, 중첩되고 중첩된 사회, 정치, 국가적 모순이 하나도 해결되지 않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란 사회는 최근까지 히잡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마흐사 아미니라는 여성이 히잡을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도덕 경찰에 연행된 후 의문사를 당했고, 이에 항의하는 시위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모셴 셰카리라는 젊은이가 처형되기도 했다. 이란의 종교적 폐쇄성은 현재 극에 달해 있는 상태이다. 문제는 이 같은 이란 국내의 사회적 모순이 중동 정세, 국제 정세와 연동되면서 모순 구조가 3단, 4단 구조로 쌓인다는 점이다. 알리 아바시 같은 감독에 따르면 그 모순을 푸는 약한 고리는 매우 구체적인 한 인간의 행위에서 시작돼야 한다는 것으로 보인다. 곧 여기자 라히미의 행동 노선 같은 것. 살인마를 찾아 나서고 성추행하는 경찰국장에 대항하며 같은 기자인 남성과 어찌 됐든 연대를 하는 모습. 무엇보다 이란 사회의 그 모든 질곡(桎梏)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다. 알리 아바시 감독은 영화 속 여기자 라히미에게 자신의 생각을 투영시키고 있는 셈이다. 알리 아바시는 이란 태생이고 스웨덴에서 자랐으며 덴마크에서 영화공부를 했다. 그의 전작은 ‘경계선’이다. ‘경계선’은 2018년 칸영화제에서 ‘주목할 만한 시선상’을 탔으며 이 영화 ‘성스러운 거미’는 2022년 칸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이란에서는 여전히 상영금지 영화이고 촬영은 요르단에서 진행됐다. 이란 영화인들의 투쟁은, 어찌 됐든, 계속되고 있다.
다소 요령부득하던 영화는 후반에 이르러 단 한 신으로 모든 걸 정리한다. 아빠(폴 메스칼)는 사람들 틈에서 우스꽝스럽지만 나름 진지하게 춤을 춘다. 주인공 딸 소피(프랭키 코리오)의 눈에는 그때 아빠 모습이 빛과 어둠 사이에서 명멸하듯 깜박인다. 그것은 그 장면을 떠올리는, 이제 31살이 된 소피의 기억과도 같은 것이다. 기억이란 늘 깜박거리며, 그럼으로써 그 사이사이에 놓인 추억을 소환시키는 법이다. 어쨌든 이 장면이 이 영화 ‘애프터썬’의 하이라이트인 이유는 순전히 그 배경음악으로 깔리는 팝 음악 하나 때문이다. 퀸의 프레디 머큐리가 부른 ‘언더 프레셔(Under Pressure)’이다. 이 노래 가사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듯, 영화의 주제에 밀물처럼 다가선다. 가사는 대체로 이런 식이다. ‘이 세상이 어떤 건지 안다는 것은 정말 재앙이야/ 계속 사랑으로 극복해 보려 하지만 결국 난도질당하고 찢겨 버렸네/ 사랑은 한낱 철 지난 단어에 불과하지만 사랑이야말로 우리의 삶의 방식을 바꿔 줄 거야/ 우리 스스로를 보살펴 줄 수 있게끔 만들어 줄 거야/ 이게 우리의 모습이지/ 억압 속에서 억압 속에서/ 억압!’ 이 장면과 이 노래가 나오기 전까지 영화는 약간의 착시를 준다. 영화는 소피가 11살이 되던 해, 아빠와 했던 튀르키예 여행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래서 행복했던 유년 시절에 대한 추억담처럼 보이게 한다. 그러나 프레디 머큐리가 절규했듯이 이 세상이 어떤 건지 알게 되면 재앙을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결국 재앙에 대한 얘기일 수 있다. 행복과 재앙 사이에 끼어 있던 어렸을 적 언제쯤에 대한 얘기이다. 소피가 세상을 알게 된 시점은 거슬러 올라가면 이때였던 듯 보인다. 이제 31살이 됐고 레즈비언의 삶을 살아가는 그녀의 일상은 유년 시절의 그때만큼 행복한 것은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 과연 행복은 무엇인가, 삶의 저 밑바닥에 놓인 것은 과연 무엇인가. 그런 질문에 끊임없이 휩싸이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20년 간극의 소피의 모습을 통해 영화는 같은 질문을 던진다. 그런데 그 방식이 매우 특이하다. 오래된 일은 단편의 기억을 조각조각 이어 붙이게 하는 법이다. 아마도 소피에게는 그것이 ‘애프터썬’을 걱정해, 그러니까 해변에서 햇볕에 그을릴 것을 대비해 아빠가 자신의 어깨와 팔에 살살 발라줬던 선크림에 대한 기억에서부터 시작했을 것이다. 그 촉감과, 그때의 햇살과 바람과 바닷물의 출렁임이, 연상작용으로 떠올랐을 것이며 어느 순간 그 여행의 전체가 하나의 그림으로 그려졌을 것이다. 아빠가 그때 내게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사랑이야말로 우리를 바꿔 줄 거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아빠는 나를 사랑했을까. 지금 와서 생각하면 아무리 부인하려 해도 아빠는 그때 나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를 지금의 나로 바꿔 냈을 것이다. 소피의 삶은, 우연한 기회(아빠의 캠코더를 발견한 것)에 그 사실을 기억한 지금, 또 다른 영역과 차원으로 넘어갔음을 깨닫게 한다. 영화는 그렇게 인간의 정신적 의식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고양(高揚)되는 과정을 표현해 낸다. 물질이 의식을 규정하지만, 때론 의식이 물질을 규정한다. 한 번의 깨달음이 세상을 바꾼다. 영화는 정신성(性)이라고 하는 것이 본래 지니는, 그 경이의 순간을 그려낸다. 이 영화가 온갖 평론가협회에서 상찬받은 이유(런던, 전미, 시카고, LA, 보스턴, 뉴욕비평가 협회상)는 그 찰나의 각성을 물리적으로 표현해 냈기 때문이다. 이런 얘기는 글이나 문학으로 혹은 음악으로 아니면 그림으로, 더더군다나 한 편의 영화로 표현해 내기가 워낙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일상의 에피소드 뒤에 숨어 있는 무섭고 어두운 삶의 오라(aura), 그 고통의 평범성을 끄집어내는 것, 관객이 그것을 느끼게 만드는 것에는 매우 정교한 연출의 과정이 필요한 법이다. 무엇보다 인생의 진실에 대해 꾸준하면서도 진지한 고찰이 이어져 있어야 한다. 감독인 샬롯 웰스에게서 느껴지는 부분이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엄마와 헤어져 살고 있는 데다, 집이 있는 스코틀랜드에서도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아빠는 소피가 11살이 되던 어느 해 둘만의 여행을 계획한다. 아빠와 단둘이 떠나는 여행은 즐겁기도 하지만 어색하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하다. 여행사 단체 여행과 자유여행을 섞어 튀르키예에 온 첫날부터 아빠는 침대가 하나뿐인 것을 두고 여행사에 항의 전화를 하게 된다. 소피는 이미 잠들었고 아빠는 아이의 신발을 벗기고 이불을 덮어 준 후 베란다에 나가 아이 몰래 담배를 피운다. 그는 이상한 몸짓으로 몸을 흔드는지 춤을 추는지 하는데 이때의 롱테이크 장면은 묵음으로 이뤄진다. 완벽한 밤의 침묵. 아이는 침대에서 자고 있고 그 건너 창을 열고 바깥 베란다에 나가 밤하늘을 바라보며 몸을 흔드는 아빠. 이건 아이의 기억인가. 상상인가. 아마도 그건 이 모든 기억을 소생시킨 캠코더 속 장면일 수 있다. 소피가 이 모든 이야기를 스스로 엮어내게 된 건 아빠가 여행 중 찍었던 캠코더 속 영상을 발견했기 때문이니까. 영화는 다소 불길하게 느껴질 만큼 어두운 암시가 중간중간 박혀 있는데, 그건 아빠의 ‘본질이 갖는 무엇’ 때문이다. 미루어 짐작하건대 아빠가 자신과 엄마를 버리고 떠난 것은 뒤늦게 발견한 성정체성 때문일 수 있다. 그건 소피 자신이 게이가 돼 있는 장면 같은 것, 어린 소피가 난간 위에서서 아래층 구석의 두 남자가 키스하고 몸을 더듬는 장면을 엿보는 것 등으로 짐작하게 한다. 무엇보다 아빠가 여행 중 줄곧 깔깔거리며 웃고 떠들었던 모습은 딸을 위해 만들어 낸 매우 의도적인 가벼움의 일환일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그는 왠지 모를 불안과 우울에 시달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가 자살 충동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영화는 슬쩍 보여 주는데 소피와 싸운 밤, 아빠는 비교적 거친 파도가 이는 바다로 걸어 들어가려 한다. 이 영화의 전반적인 주조(主潮)는 아빠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고 튀르키예 여행이 아빠를 만난 마지막 때였거나 아빠와의 행복했던 시간의 마지막이었다는 것이다. 이제 아빠는 없다. 그 부성의 상실은 소피 자신에게 끊임없이 채워지지 않은 결핍의 원천 같은 것이다. 상실과 결핍. 인생에서 그것을 알게 되는 것만큼 외로운 것은 없다. 재앙은 없다. 퀸의 가사처럼 아빠는 누군가, 무엇인가로부터 억압받았을 것이다. 게이였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다지 풍족하지 않은 경제적 삶, 중하층 계급의 고단한 삶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세상이 주는 억압은 결코 관념적이지 않다. 무언가 구체적인 사건들이 있었을 것인 바 그 하나하나를 열거하지 않으면서도 그 억압의 실체를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 영화는 매우 특이한 귀착점을 보여 준다. 단체여행 중에 벌어진 노래자랑에서 아이는 혼자 무대에 서서 노래를 부른다. R.E.M의 ‘루징 마이 릴리전(Losing My Religion)’이다. ‘난 네가 웃는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지/ 너의 노래를 들었다고 생각했어/ 네가 노력했다는 걸 알고 있어/ 모든 속삭임, 깨어 있는 모든 순간/ 난 나의 고백의 말을 고르고 있어/ 너의 눈을 맞추려 애쓰면서/ 상처받고 사랑에 눈먼 바보 같은 너’ 어쩌면 소피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녀는 이미 11살 때 삶의 진창을 알아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그건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린 검게 그을린 햇볕의 자국 같은 것이다. 그런데도 사랑이 모든 것을 변화하게 할 것임을 그녀는 이제 확실히 깨닫는다. 그건 사라진(혹은 자살했거나 죽은) 아빠가 남겨 준 유산이다. 삶은 재앙이지만 늘 아름다운 것은 사랑 때문이다. 이 말이 단순한 관념의 서사로 끝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늘 구체적인 에피소드를 통해 증명하고 증거해야 하는 법이다. ‘애프터썬’은 그 모호하면서도 상세한 기억의 진술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오케스트라 지휘자는 오케스트라 지휘만 하는 것이 아니다. 해야 할 일이 많다. 마스터 클래스에 나가 토크도 해야 하고, 줄리어드 음대 같은 곳에 가서 특강도 해야 한다. 집에 돌아와 아내 혹은 남편에게 약도 먹여야 하고, 아이도 종종 학교에 데려다줘야 하며, 그 와중에 틈틈이 개인 작업실에서 작곡도 해야 한다. 오케스트라 수석 바이올리니스트도 바꿔야 하고, 부지휘자도 선임해야 하는데 단원들의 투표로 결정하는 관례가 있지만 개인의 결정을 관철시키기도 해야 한다. 자신을 이끌어 준 스승과 종종 점심을 먹어야 하고, 후원 재단 대표를 맡고 있는 다른 지휘자와도 연을 쌓아 가야 한다. 이 모든 것이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일이다. 오케스트라 지휘자는 오케스트라 지휘만으로 존재할 수 없다. 예술은 예술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일 가운데에서 존재한다. 예술은 독자적인 척, 사실은 매우 관계‘적’인 것이며, 그 관계없이 독자‘적’일 수 없다. 예술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비예술적인 것과 함께 해야 하며 그 상관관계를 잃은 예술(인)은 결국 실패하거나 낙오할 수밖에 없다. 토드 필드의 역작 ‘TAR 타르’는 음악영화가 아니어서 안심(?)이 되는 작품이다. 지휘자의 얘기라는 작품 광고에 으레 이 영화는 대중들에게는 낯설고 어려운 클래식으로 범벅된, 클래식 클리셰(cliché)로 가득한 작품으로 예상되기 쉽다. 그러나 영화에 등장하는 오케스트라 곡은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5번과 엘가의 첼로 협주곡 정도이다. 그것도 영화 내내 전곡이 연주되는 적은 한 번도 없다. 이 영화의 음악감독인 힐두르 구드나토르는 화려하고 웅장한, 때로는 섬세한 클래식 선율보다는 차라리 음악의 배제, 때론 배경음악을 완벽하게 삭제하는 쪽을 선택한다. 예컨대 이 영화는 158분이라는 비교적 장대한 러닝 타임에 걸맞게 영화 앞단이 비교적 긴 시퀀스로 이뤄져 있는데, 그 시퀀스도 당연히 롱 테이크로 이어지거나 심지어 원 씬 원 컷으로 이뤄져 있다. 오프닝 장면에서의 마스터 클래스 토크 장면은 10분 가까이 이어진다. 여기서 주인공이자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인 리디아 타르(케이트 블랜쳇)는 자신의 음악 철학을 꽤 자세하게 설명할 기회를 얻으며, 그를 통해 감독 토드 필드는 영화 ‘타르’가 어떤 행마를 이어갈 것인가를 관객들에게 암시해 낸다. 이 토크 장면이 진행되는 순간은, 당연히, 음악이 없다. 전혀 사용되지 않는다. 오로지 말과 말, 그녀의 말을 듣고 있는 청중의 숨죽인 고요만이 이어진다. 그다음 장면이 더욱 압권인데, 여기에서도 음악은 완벽히 배제된다. 타르는 줄리아드로 장소를 옮겨 소수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열변을 토해 낸다. 왜 음악을 하는가, 음악의 본질은 무엇인가, 음악가가 이뤄야 할 것과 위대한 음악가(예를 들어, 바흐의 음악과 그의 인생을 어떻게 구별해서 바라봐야 하는가)에 대해 얘기한다. 이 장면은 아주 긴 원 씬 원 컷으로 이뤄져 있다. 토드 필드의 카메라는 강의장 무대와 객석을 오가며 열정적인, (학생들 시각에서 보면 어쩌면) 매우 독단적인 예술관을 피력하는 타르를 한 번의 컷 없이 뒤좇으며 롱 테이크로 담아낸다. 이 강의는 나중에 타르의 발목을 잡는 ‘사건’이 되는데, 그녀를 둘러싼 성추문 의혹의 주요 쟁점으로 부각된다. 때문에 이 장면 역시 음악이 없는 건 당연해 보인다. 그래서 이 영화가 음악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 음악 영화라는 점을 깨닫게 한다. ‘아, 이 영화는 클래식 애호가용이 아니군’이라는 생각을 비로소 갖게 만든다. 영화는 점점 더 다른 이야기, 음악을 뛰어넘는 이야기로 비화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야말로 이 영화를 매우 흥미롭게 격상시킨다. 리디아 타르는 클래식 음악계의 유리 천장을 뚫은 인물이다. 특히 여성이 차별받는 지휘자의 세계에서 당당히 베를린 필하모니의 수장이 됐다. 그런데 곰곰이 들여다보면 타르의 여성성, 여성주의의 완성이 그녀를 마에스트로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것만은 아니다. 그녀는 음악적 권력을 얻기 위해 남성주의의 스킬을 구사하고 있거나 그것을 병행해 왔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처럼, 클라우디오 아바도처럼 점철된 카리스마와 완벽주의로 단원들을 이끌어가고 있으며, 음악적으로 자신이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그래서 자신이 완전한 스페셜리스트가 되면 될수록 다른 모든 문제는 주변적인 것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여성성은 오로지 그녀가 레즈비언으로 커밍 아웃한 것뿐으로 보이는데, 바이올리니스트 단원이기도 한 파트너 샤론(니나 호스)과의 관계에서도 동반자라기보다는 가부장적 남편의 위치에 서있거나 그러려고 한다. 타르는 둘이 함께 키우는 딸 페트라가 학교 폭력을 당하자, 가해자 학생에게 찾아가 자신이 아이의 ‘아빠’라고 소개하며 윽박지른다. 또 러시아에서 온 새로운 첼리스트에게 눈길을 주고 그녀를 자신의 자서전 출판 기념회가 열리는 미국 출장에도 데리고 다니는데, 이는 당연히 샤론과의 관계에 균열을 발생한다. 가장 큰 문제는 크리스타라는 이름의 젊은 여성 지휘자가 타르에게서 받는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자 그녀와의 그간 관계를 부인하거나 관계의 증거를 없애려고 한다는 데에서 벌어진다. 짐작컨대 타르와 크리스타는 한동안 혼외정사의 관계였던 것으로 보인다. 타르는 자신을 흠모하는 조수인 프란체스카(노에미 멜랑)에게 크리스타와 관련된 모든 이메일을 삭제하라고 한다. 타르는 말한다. “우리가 불필요한 일에 휘말릴 필요는 없잖아.” 물론 그녀로서는 맞는 말이긴 하다. 도이체 그라모폰과의 리코딩 작업이 눈앞에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오로지 자기 음악에게만 열중하기에도 시간이 없을 지경이다. 다른 모든 사람들 역시 자신이 그러는 이유를 받아들여야 하며 어쩌면 그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후원 재단의 대표를 맡고 있는 지휘자 동료 엘리엇 캐플란(마크 스트롱)이 조언을 구하자 ‘남을 베끼려 하지 말고 자신의 것을 완성하려 노력하라’고 말할 만큼 타르는 스스로가 당당하다고 생각한다. 음악에 대한 열정이 모든 것을 커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크리스타의 자살을 둘러싼 의혹이 불거지고 타르는 곧 이런저런 법적, 행정적 소환에 직면한다. 리디아 타르는 그 모든 문제를 이겨 내고 도이체 그라모폰과의 실황 녹음을 완성할 수 있을까. 베를린 필하모니의 수석 지휘자(객원 지휘자가 아닌) 자리를 계속 지켜낼 수 있을까. 타르를 둘러싼 모든 추문이 사실인지 아닌지, 어느 것이 진실인지는 사실 중요한 것이 아니다. 토드 필드 감독이 얘기하려는 것은 사안이 지니는 진실의 절대성이나 상대성 같은 해묵은 주제가 아니다. 그보다는 예술의 독자성과 상대성, 그 관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쉽게 말해, 위대한 예술가는 그가 이뤘거나 이뤄 내고 있는 예술적 성취와, 자신이 갖는 모든 인간적 약점 가운데에서 어느 지점에 서있어야 하느냐는 것이다. 자신의 예술을 완성한 아티스트는 수많은 실수, 위선, 오만함에 대한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의 얘기이기도 하다. 따라서 예술가는 하나만이라도 잘하려 해야 하는가 아니면 모든 걸 잘하려고 노력해야 하는가의 문제이며 이는 곧 스페셜리스트여야 하는지, 제너럴리스트여야 하는지에 대한 철학적 사고로 연결되는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여기서 더 확장하면 파시스트가 창궐하는 시대에서 예술가(음악과 미술 영화 심지어 정치까지)는 자신의 작품이 지니는 완성도에 치중해야 하는지 아니면 세상과 일상의 일에도 화답해야 하는지의 문제로까지 이어진다. 그 균형은 어디인가. 예술과 삶의 밸런스는 유지될 수 있는가. 과연 예술과 인생의 위대함은 어디에서 찾아지는 것인가. 타르는 어느 날 자신의 작업실 아파트 건너편에 사는 치매 노인이 휠체어에서 넘어지고 바닥에 똥을 싸 사방이 오물 천지가 되자, 그를 간호하는 지체아 딸을 도와준다. 그러나 이내 자신의 집으로 돌아와 온몸을 미친 듯이 닦아 낸다. 타르는 그렇게 인생사가 언제 어느 순간에 똥바다처럼 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거나 아예 받아들이지 못한다. 타르 역을 연기한 케이트 블랜챗은 이번 작품에서 영화가 지닌 괴력만큼 엄청난 에너지를 소유한 연기자임을 유감없이 입증해 냈다. 그 구구절절하면서도 막대한 양의 대사는 단순히 외워서 되는 것이 아니다. 완벽하게 타르란 인물로 자신의 인성 자체를 전환시키지 않는 한 이런 연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게다가 카메라는 시종일관 그녀를 졸졸 따라다니며 블랜쳇의 모든 표정을 담아낸다. 압도적인 몰입감 없이는 그 부담감을 이겨낼 수가 없다. 영화 ‘타르’는 실제로 케이트 블랜쳇을 위한, 블랜쳇에 의한, 블랜쳇의 영화이다. ‘타르’는 오는 3월 12일에 열릴 제95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은 물론 감독상과 여우주연상, 각본상, 촬영상, 편집상 등 6개 부문 후보에 올라 있다. 이런 작품을 두고 명불허전이라 부른다. 소름 끼친다.
무협 소설의 대부 김용의 방대한 원작 소설을 영화로 만든 ‘천룡팔부: 교봉전’(이하 ‘천룡팔부’)은 짐작하거니와 내용을 따라가기에 다소 심란한 면이 있다. 무협 소설을 적어도 한 번쯤은 읽어 본 경험이 있어야 전체의 얼개, 그 오라(aura)를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강호에 9대 문파가 있다는 것 정도는 알면 좋기 때문이다. 9대 문파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소림사가 그 문파 중 대표 격이며, 무당파도 들어 본 이름일 것이다. 곤륜파, 아미파 등도 있는데 아미파는 여걸들의 문파이다. 영화는 일명 거지들의 소굴이라는 개방파의 얘기다. 무협 영화는 둘 중 하나이다. 매우 흥미롭거나, 도통 앞뒤가 하나도 안 맞는 데다 이야기 흐름이 너무 억지스러워 도저히 목불인견이거나이다. 때문에 무협 영화는, 매우 잘 골라 봐야 하며 이쪽 분야에 제작, 연출, 주연을 맡아 온 이력의 나름 일가견이 있는 사람의 것을 고르는 게 안전하다. 이 영화 ‘천룡팔부’는 무협 액션에 이골이 나 있고, 이쪽 분야의 현존하는 최고의 아티스트인 견자단이 감독과 주연을 맡은 작품이다. 성룡은 이제 너무 늙어서 은퇴‘각’이다. 앞차기가 안 되는 성룡은 언제부턴가 할리우드 첩보액션 영화 쪽으로 옮긴 상태다. 이연걸은 투병 중이며 따라서 대중들에게서 사라진 지 오래다. 때문에 정통 무협 액션에 관한 한 현재 견자단이 거의 유일하다고 봐도 무방한 상태. 견자단은 1963년생이고 현재 60세이다. 그는 아마도 김용의 대하소설을 영화로 만드는 일을 필생의 업으로 여겼을 공산이 크다. ‘천룡팔부’는 앞날이 창창한 개방의 젊은 방주 교봉(견자단)이 어느 날 음모에 휩싸여 살인 누명을 쓰고 무림 모두로부터 쫓기는 신세가 된다는 것이 기둥 줄거리다. 이야기를 뚝 갈라서 두 가지 에피소드로 나눠 보면, 전반부는 도망을 다니던 교봉이 아주(진옥기)라는 이름의 여인을 구하고 지켜내기 위해 애쓰는 이야기다. 그녀는 소림의 누군가가 펼친 무공에 당해 죽음 직전까지 이르지만, 교봉은 내공을 불어넣고 진력을 다해 운기조식하게 함으로써 그녀의 기와 혈을 뚫어 놓는다. 교봉은 무림 최고의 화타라는 설신의란 인물을 찾아 그녀를 데리고 다니는 와중에 무림 고수 전원과 맞닥뜨려 거의 1대 100 수준의 혈투를 벌인다. 결투 바로 직전 교봉은 이들에게 단의주, 곧 의를 끊는 술잔을 제안해 모두와 술 한 잔씩을 하며 그간의 의리와 정을 끊고 살수(殺手)의 합을 펼친다. 무림 중 일부는 그가 누명을 쓴 것을 알고 있지만 무림 전체를 위해 그가 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교봉이 중원 출신(송나라 사람)이 아니고 원래 거란 족의 사생아라는 이유가 가장 크다. 중원인은 오랑캐와 함께 할 수 없다는 것. 중화주의(中華主義)이다. 후반부는 교봉이 여인과 함께 자신의 친부모를 살해했다고 믿는 단원정이란 인물을 찾아 복수를 벌이는 내용이다. 이 단원정은 개방파에게서 큰 형님이라 불리는 인물인데, 중원에서 멀리 떠나 대리국이란 나라를 만들고 그 땅을 지배하며 산다. 이때부터 영화는 뭐가 뭔지, 뭔 소리인지 모르게 돼 버리는데 단원정의 서신을 위조해 교봉을 음해한 개방파 내 두 남녀의 속셈이 드러나는 가 하면, 이 둘은 모문용이라는 옛 연나라 왕의 아들에게서 지시를 받고 있다는 설정이 나오고, 또 이 모문용이란 자는 송과 거란의 갈등에 교봉과 무림의 싸움을 이용함으로써 망한 연나라를 부활시키고 중원을 다시 차지하겠다는 욕심을 갖고 있는 인물이라는 설정으로 등장한다. 이 모든 얘기를 영화가 아니라 김용의 소설로 봤으면 (아마도 대략 20~40권 분량이었을 것이다) 모든 음모와 개인의 복수 이야기가 이해하기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 방대한 스토리를 영화 한 편에 밀어 넣은 무리여도 너무나 무리인 작품이 돼 버리고 말았다. 아마도 OTT용 10부작 드라마로 시즌2 정도가 나오면 적당한 수준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협 영화를 볼 때 몇 가지 규칙만 잘 이해하면 비교적 이야기를 대충은 따라갈 수가 있다. ‘천룡팔부’도 다르지 않다. 일단 무협 영화는 할리우드의 서부극과 그 ‘관습적 표현’이 전혀 다르지 않다. 선과 악이 뚜렷하게 이분돼 있고 그 가운데 영웅(무협에서는 협객, 서부극에서는 총잡이)이 있으며, 이 영웅은 처음엔 오해도 받고 외면도 받고 하지만 결국 정의의 편에서 악당들을 물리친다. 대체로 이 영웅호걸에게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를 믿고 사랑하는 여인이 한 명 나오며, 그 여인은 또 극 후반쯤 그를 위해 희생되기도 한다. 극의 해피엔딩을 위해 끝까지 살아남는 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이 영웅에게는, 무협에서는 여자의 자매, 서부극에서는 주인공 여자의 주변 인물이 남자의 새로운 연인으로 연을 맺기도 한다. 어쨌든 주인공 영웅은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고 홀로 혹은 여인과 함께 싸움 현장을 표표히 떠나 새로운 삶을 영위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끝맺는다. 이런 법칙 아닌 법칙에서 벗어나는 스토리의 무협물이나 서부극 영화는 이 세상에서 없으며, 만약 그런 작품이 있다면 그건 상업 영화가 아니라 독립 예술 영화의 경우에 해당한다. ‘천룡팔부’는 그 같은 법칙에 아주 충실한 대형 상업 작품이다. 특히 그 얼개가 더 비슷한 장르의 작품들이 있는데 그건 바로 일본의 로망 포르노 계열 작품들이다. 이 영화들은 이야기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20분에 한 번씩은 ‘반드시’ 섹스나 베드신이 나와야 하는 것이 규칙이다. 무협 영화 역시, 그 이야기가 어떻게 시작돼 어떻게 끝나느냐에 상관없이 적어도 20분에 한 번씩은 무협 액션신이 나와야 한다. 그래야 관객들의 하품을 막을 수가 있다고 무협영화 제작자들은 믿고 있다. 그 액션이 얼마나 화려하고 새로우냐에 따라 이런 류 영화가 갖는 완성도, 기술적 진화의 정도가 판가름 나기도 한다. 무협을 예술적 측면으로 끌어올린 작품이 이안 감독의 ‘와호장룡’이고 장이모우 감독의 ‘영웅’ 같은 작품이다. ‘천룡팔부’는 거기까지는 못 미치지만 시도하려 애를 썼다는 점에서 (단의주를 마시며 혈투를 벌이는 장면 같은 것) 그 노력만큼은 평가를 해야 하는 것으로 보인다. 흥미로운 것은 왜 중국 공산당이 이 같은 판타지 작품을 허가했느냐는 것이다.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와 거리가 있어도 한참있는 작품이다. 물론 지금의 중국 공산당도 사회주의와 멀어진 지 오래긴 하다. 그래도 아마 그건 견자단이 2017년 ‘홍콩의 중국반환 2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것을 계기로 친중국주의자로 변신했고 2019년 홍콩시위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취한 것이 주효했던 것으로 보인다. 홍콩 영화인들 중 최고 스타 격인 그를 중국 당국이 자신들의 편에 두려 하는 포석의 일환이었을 가능성이 점쳐진다. 그런 점 때문일까. 영화 ‘천룡팔부’에는 교봉의 내레이션으로 다음과 같은 말이 반복된다. “세상에 억울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삶의 모든 문제는 정(情)과 원(怨)때문에 비롯된다.” 그러면서 교봉은 여자에게도 자꾸 이런 얘기를 한다. “모든 일이 정리되면 중원을 떠나 살자. 나는 소를 키우고 당신은 양을 키우고.” 이상하게도 이런 대사들이 자꾸 귀에 꽂힌다. 영화 만들기가 정치의 영역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는 것이 느껴진다. 심지어 이런 무협 영화도. 뭐 어쩌겠는가. 무협의 강호가 정치판인 걸.
이야기의 시작은 노스캐롤라이나의 한 습지에서 쿼터 백 출신의 남자 체이스(해리스 딕킨슨)가 추락사한 시체로 발견되는 데서부터이다. 이 사체는 동네 아이들이 발견하는데 그건 마치 스티븐 킹 원작의 영화 ‘스탠 바이 미’의 첫 장면과도 같다. 보안관 둘이 탐문을 시작하고, 이들은 오로지 남자 몸에서 나온 붉은색 털실 한 오라기를 근거로 습지에서 홀로 살아가는 여성 카야(데이지 에드가 존스)를 유력 용의자로 체포한다. 영화는 카야의 재판 과정을 추적하며, 여자 스스로 자신의 짧은 인생을 되돌아보거나 변호사인 밀턴(데이빗 스타라탄)에게 지난 10년의 삶을 들려주거나 진술하는 플래시 백의 기법을 따라 대부분의 이야기를 진행한다. 처음엔 미스터리 살인극으로 시작된 영화가 곧바로 서정의 서사시를 이어 나가는 이유다. 카야, 아니 주변 마을 사람들에게 ‘습지 소녀’라 불리는 캐서린 대니얼 클라크는 말 그대로 습지에서 혼자 살아가는 사람이다. 극도로 폭력적인 남편 때문에 엄마는 아이들을 버리고 떠났고 위의 언니 둘 그리고 오빠도 떠났으며, 마지막에는 결국 모든 비극의 장본인인 아버지 마저 떠나면서 완벽하게 홀로 남아 살아가게 된다. 엄마가 떠났을 때가 1959년, 체이스의 살인 용의자로 법정에 서게 된 것은 1969년. 이 10년간 카야는 10대에서 20대로 넘어가며 카야가 아닌 미스 캐서린 대니얼 클라크가 된다. 그녀에게 처음 글을 가르쳐 준 사람은 동네 꼬마로 같이 자란 첫사랑 남자 테이트(테일러 존 스미스)이다. 육체적인 사랑을 시작한 것은 체이스가 처음인데, 한편으로 유일하게 그녀를 친자식처럼 대해 준 사람들은 잡화점 흑인 부부 점핑과 마벨(스털링 메이서 주니어, 미셸 하이트)이다. 하지만 삶의 모든 것을 가르쳐 준 주인공은 바로 습지, 그러니까 자연이다. 카야는 글을 알게 되면서부터 자연을 기록하고 그리기 시작한다. 깃털 하나만으로 어떤 새인지 알아차리고 작은 껍데기만으로 주로 어디서 서식하는 조개인지를 알 수 있게 될 정도로 습지 전문가가 된다. 그녀가 쓰고 그리는 글과 그림은 이후 세상에서 엄청난 유명세를 얻게 된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카야를 둘러싼 상황에 대해 두 가지 의문이 든다. 정말 그리고 과연 카야의 두 번째 애인이었던 체이스는 누가 죽였을까. 버젓이 약혼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카야를 탐했으며 아버지처럼 그녀에게 폭력을 가했던 만큼, 누군가가 그러니까 첫 번째 애인이자 그녀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테이트 아니면 그녀를 딸처럼 사랑하는 흑인 아저씨 점핑이 그러지 않았을까. 아니면 혹시, 정말 혹시 그녀를 어릴 때부터 지켜봐 왔던 변호사 밀러 같은, 누군가가 선의에 의한 살인을 저지른 것이 아니었을까. 머릿속에는 의문 부호가 줄을 지어 떠올려진다. 그런데 참으로 기이하게도, 바로 그 점이야말로 이 영화가 지닌 위대한 시적(詩的) 감수성인데, 영화를 보면서 실은 그게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점점 깨닫고 느끼게 된다. 정작 궁금해지는 것은 가재가 노래를 부르는 곳이란 게 진짜 있는지, 있다면 어떤 곳인지가 실로 알고 싶어진다. 더 중요한 건 자연친화적이라는 것, 자연에 동화된 삶이란 어떤 것이고 그게 지금처럼 첨단 자본주의가 이끄는 초고속의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인가를 생각하게 만든다. 그까짓 체이스의 살인범 따위는 이 영화가 내세우는 현상에 불과한 것이지 본질이 아니라는, 그러니까 맥거핀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영화의 원작이자 델리아 오웬스가 쓴 대서사의 동명 소설은 결국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위대한 숲의 철학이자 정치적 사상에 기대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1959년에서 1969년 사이 카야의 습지 밖 세상은 격렬함 그 자체였다. 노스캐롤라이나(버지니아 아래, 조지아 위에 위치한 동부의 시골 지역) 바깥에서는 2차 대전 이후, 민권 사상이 대두하며 기존 기득권 층과의 충돌이 일어나던 때이다. 보수적 가치란 게, 낡고 이기적이며 집단의 탐욕과 가혹한 편견을 지니고 있음이 드러날 때였고, 억울한 죽음과 희생이 이어지던 때였다. 바야흐로 베트남전의 수렁으로 빠져들 때이기도 했다. 존 F. 케네디와 로버트 케네디, 말콤X와 마틴 루터 킹 모두가 암살되던 때도 바로 이 10년간이었다. 그래서 카야의 지지리도 못나고 폭력적이며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의 말은 어느 정도 타당하게 들린다. 2차 대전 참전자인 아버지는 카야에게 늘 이렇게 얘기한다. “바깥세상은 무서운 곳이야. 늘 조심해야 해.” 꼭 아버지의 말 때문은 아니지만 카야는 이곳, 습지가 안전하다고 느낀다. 그녀는 습지를 결코 떠나려 하지 않는데, 이는 자기를 버리고 떠난 엄마와 언니들, 특히 오빠를 기다리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오빠 조디(로건 맥리)는 훗날 군인이 돼(아마도 베트남전 참전 후 제대 전에) 그녀를 다시 찾는다. 돌이켜 보면 모두가 카야를 버린다. 심지어 그렇게 사랑했던 테이트조차 도시로 대학생활을 하러 가서는 잠시이긴 해도 그녀를 버린다. 체이스란 마초는 그녀를 때리고 짓밟아 차지하려 함으로써 사실상 그녀를 버린 셈이 된다. 그리고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엄마와 가족 모두가 그녀를 버릴 때 유일하게 카야를 버리지 않은 것은 습지이다. 자연은 그녀를 배신하지 않는다. 자연과 습지는 그녀를 차별하지 않으며 그녀를 그냥 ‘다른 존재’로 받아들인다. 카야가 자연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한 자연 역시 그녀를 있는 그대로 품에 안는다. 그 단순하고 진실한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 카야가 자연에게서 느끼는 것은, 자연에서 변하지 않는 유일한 것은 늘 변화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카야도 세상과 삶의 진리를 늘 변화하는 것에서 찾으려 한다. 새의 부화처럼, 조개가 썰물과 밀물에 휩쓸려 자리를 바꾸는 것처럼,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상황이 변화하는 것을 묵묵히 받아들이려 애쓴다. 하지만 사람과 세상은 그렇지 못하다. 변화를 두려워 하고 심지어 변화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마을 사람들과 세상이 그녀에게 가혹하게 구는 이유이다. 변호사 밀턴의 얘기대로 지난 25년간 들었던 모든 악소문으로 카야를 판단하기보다 지금의 성장하고 변화된 카야의 모습에서 진실을 찾아야 하는 것이지만, 세상은 결코 그렇지가 않다. 자신들만의 잣대로 카야라는 여자가 야생에서 살면서 몸을 헤프게 굴려 결국 남자를 죽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자신들의 시스템에 들어와 있지 않거나 자신들의 시스템이 저 한 사람 때문에 바뀐다고 생각하면 사람들은 극렬하게, 광적으로 반발한다. 집단의 광기를 작동시킨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그 옛날 하퍼 리가 썼던 ‘앵무새 죽이기’의 2020년대 판 작품이며, 영화 ‘가재가 노래하는 곳’ 역시 그레고리 펙 주연의 1962년작 ‘알라바마 이야기(원제는 ‘앵무새 죽이기’)의 현대판 작품이다. 밀턴 변호사 역의 데이빗 스트라탄에서 묘하게도 핀치 변호사 역인 그레고리 펙의 느낌이 난다. 이건 우연이 아니다. 이 영화를 만든 올리비아 뉴먼은 고전의 작품에서 캐릭터의 이미지를 가져왔을 것이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일부 항간의 다소 잘못된 얘기처럼 자연의 아름다움을 얘기한 환경 영화가 아니다. 자연의 풍광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그 아름다움 안에 있는 속살은 얼마나 찢기기 쉽고 상처받기 쉬우며 그래서 삶 자체가 얼마나 처절한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한다. 자연으로부터 벗어나 문명화되고 현대화됐다 착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우리들에게 아픈 각성의 바늘을 찌르는 영화이다. 지성의 비관주의로 살아가되 의지의 낙관주의를 잃지 말아야 함을 주인공 카야는 일생을 통해 웅변해 주고 있다. 지난해 말 극장 개봉작 가운데 최고 수작이다. 현재는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