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체류 외국인 수가 120만 명을 넘어서면서 한국 사회는 바야흐로 다문화 다민족 사회로 들어섰다. 매년 점점 더 다양한 인종적 배경을 지닌 아동들이 교육현장에 유입되면서 학급 내 아동 구성이 점차 다채롭게 변화하고 있다. 2010년 교육과학기술부 통계에 따르면, 현재 초·중·고교에 재학 중인 다문화가정 아동의 수는 3만1788명에 이른다. 9천300여명에 불과했던 2006년과 비교해 3배 가까이 늘어난 수치이다. 이 중 초등학생은 전체 다문화 가정 자녀의 77.8%를 차지하며, 증가 비율은 매년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 다문화 아동들이 교육현장에 본격적으로 늘어나고 그들에 대한 국가적 관심이 고조되면서 정부는 다문화가정 아동 및 부모를 대상으로 다양한 지원 사업을 펼치고 있다. 교육과학기술부는 2007년 초·중등 교육과정 개편을 통해 다문화 이해 교육을 강화하고 있으며, 보건복지부는 다문화 가정 영유아의 어린이집 접근성을 높이고자 2011년부터 어린이집을 이용하는 다문화 아동에게 보육료를 전액 지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지원과는 별개로 우리 사회의 일원이 된 이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만큼 우리의 의식이 성숙했는지
아들이 논산훈련소로 입소하는 날이 됐다. 하루하루 다가오는 입대일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는 아들에게 “이병장!, 밥 많이 먹게!” 하면 못마땅한 듯 고개를 가로졌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수 시간을 달려 도착한 논산 훈련소는 봄바람에 꽃잎이 눈처럼 휘날리는 아주 오래된 교육시설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설이 현대식이었다. 특히 내무반과 식당이 깔끔했다. 세상에 태어나 21년 만에 집을 떠나가는 안타까운 1천800여 가족의 사연을 함께 하고 집으로 돌아와 허전한 마음으로 10여일을 보낸 어느날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아들의 군복사진이 인터넷에 올라온 것이다. 군복을 입고 맨 앞줄에 앉아 ‘파이팅!“을 외치는 아들의 모습이 자랑스러웠다. 같은 중대원으로 만난 이 땅의 아들들이 모두가 한 집 아들인지 참 잘 생겨 보였다. 군복이 아들에게도 어울린다는 사실이 자랑스럽고 가슴 찡했다. 열흘 전을 회고했다. 그날 오후 1시30분에 연병장에 모였다. 1천800명이 넘는 장성한 아들들이 모였다. 가족을 포함하면 1만 명이 넘었다. 21년 전 득남하고 좋아했던 분들이 이렇게나 많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입소식, 여성 대
우리나라의 ‘스승의 날’은 매년 5월 15일로 세종대왕 탄신일의 양력 환산일이다. 1958년 당시 강경여고(강경고의 전신) 청소년적십자(JRC. 현 RCY) 단원들이 병석에 누워계신 선생님을 방문해 위로하고 퇴직한 은사들을 찾은 데서 비롯됐다. JRC단원들은 해마다 이 행사를 이어오다 1963년 단장인 윤석란(13회 졸업)의 주도로 ‘은사의 날’을 제정할 것을 결의했고, 그 해 5월 26일 첫 행사를 가졌다. 은사의 날 행사는 이듬해 전국 543개 학교로 확대됐는데 그해 은사의 날이 ‘스승의 날’로 바뀌고 날짜도 5월 26일로 정해져 제1회 스승의 날 기념식이 거행됐다. 1965년에는 세종대왕 탄신일인 5월 15일이 스승의 날로 정해졌다. 유신정권 시절이던 1973년 학생들의 집회 불허 등 방침에 따라 스승의 날이 폐지됐으나 한국교총 등이 거세게 반발해 9년 뒤인 1982년 국가지정 기념일로 정식 선포됐다. 이에 따라 올해 스승의 날은 1982년을 원년으로 계산해 30주년을 맞았다. 그러나 스승의 날을 맞은 교사들은 전혀 반갑지 않은 표정이다. 은혜에 감사하고 존경하라는 뜻에서 만들어진 스승의 날이 언제부턴가 교사들이 눈치(?)를 보는 날로 돼버렸다. 촌지와
1958년 충남 논산의 강경여고(강경고의 전신)에 다니던 노창실씨(71·여·8회졸업)는 청소년적십자(JRC. 현 RCY) 단원들에게 병석에 누워계신 선생님을 방문해 위로하고 퇴직한 은사들을 찾아뵙자고 제안한다. 전쟁 직후 모두가 어려웠던 시절 등록금을 대신 내주는가 하면 몸이 아픈 기숙사생을 위해 약을 달여주고 죽을 쒀다 주시던 선생님이 편찮으시다는 말을 듣고 그동안 받은 사랑에 조금이라도 보답하자는 취지였다. 이러한 스승 찾아뵙기 행사가 해마다 계속되다 1963년 윤석란(13회 졸업)씨의 주도로 ‘은사의 날’을 제정할 것을 JRC 단원들이 결의, 5월 26일 첫 행사를 가졌는데 이것이 전국적으로 확산돼 1982년 스승의 날이 국가지정 기념일로 정식 선포되는 계기가 되었다. 스승의 날을 만들게 한 주인공이기에 교권침해 소식을 접할 때마다 노 씨는 가슴이 무너지는 아픔을 느낀다. 노씨가 제30회 스승의 날을 앞두고 13일 충남 논산 강경고를 찾았다. 노씨는 최근 학교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교권침해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그는 특강에서 “우리가 학교 다닐 때는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는 말을 많이 들었고 선생님 그림자도 밟으면 안된다고 알고 그렇게 실천했다
최근 한나라당 신임 황우여 원내대표의 추가감세 철회 발표에 대해 논란이 뜨겁다. 4.27 재보선 패배 이후 민심의 무서움을 느낀 한나라당은 당내 비주류 출신을 원내대표로 선출하고, 신임 원내대표는 현 MB정부가 대표적인 정책으로 추진해온 감세정책에 선을 긋는 공약을 발표함으로써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하지만 한나라당 주류층은 물론이고, 정부의 감세정책으로 인해 그 동안 톡톡히 재미를 보았던 대기업을 비롯한 재계는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대한상공회의소는 성명서를 통해 감세정책을 철회하는 것은 기업의 활력을 떨어뜨려 경영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주장하고 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대기업들이 그 동안 중소기업과 서민의 희생을 담보로 입은 혜택을 얼마나 사회에 환원했는지 대해 스스로 반성하지 못하는 처사가 아닐 수 없다. 감세정책은 현 정부 들어 2008년 9월 ‘일자리 창출을 위한 경제 재도약 세제’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본격화 됐다. 이에 따라 소득세와 법인세 등 각종 세금을 인하하고, 참여정부 때 야심차게 추진했던 종합부동산세도 무력화시켰다. 국회예산처의 추계에 따르면, 감세정책으로 인한 효과는 2012년까지 약 78조원에 달하고, 특히 내국세를…
산림의 보고(寶庫)인 광릉숲이 자동차 매연으로 신음하고 있어 대책마련이 시급하다. 광릉숲은 의정부시와 포천시, 남양주시에 걸쳐 있는 숲으로 전체 면적이 약 2만4천465㏊에 달한다. 지난해 설악산과 제주도, 신안 다도해에 이어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돼 핵심·완충·전이지역 등으로 세분화돼 보호, 관리되고 있는 곳이다. 그러나 광릉숲 관통도로는 숲 한가운데를 지나는 왕복 2차로(총연장 11.4㎞)로 의정부와 포천 사이의 43번 국도와 남양주시를 지나는 47번 국도를 최단거리로 연결하는 교통의 편의성으로 하루 평균 1만 대 가량의 차량이 오가는 등 교통량이 줄지 않고 있다. 최근 산림청 국립수목원에 따르면 대형화물차 통행 금지 조치 이후 3년 만인 지난해 광릉숲을 관통하는 도로에서 이산화질소(NO₂)를 측정한 결과 연평균 13.4ppb로 나타났다고 한다. 숲 사이로 도로가 지나는 오대산 관통도로(월정사~상원사.446호 지방도로·총연장 7.2㎞)에 비해 무려 6배에 달하는 높은 수치다. 오대산 관통도로의 지난해 연평균치는 2.88ppb였다. 특히 공업도시인 울산광역시의 지난해 이산화질소 연평균 수치가 24.0ppb였던 점을 감안하면 천연림 한 가운데 있는…
‘여기 있는 것들은 모두 다 예술이구나. 바람 한 점, 꽃잎 하나도 예술이구나. 손에 손잡고 기어오르는 담쟁이 넝쿨까지도 예술이로구나.’ 파주 헤이리에 다녀온 한 블로거는 이렇게 감탄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헤이리는 경기도민들이 자랑해도 좋을 만한 예술공간이자 휴식공간이다. 1998년, 미술인, 음악가, 작가, 건축가, 영화인 등 380여명의 예술인들이 모여 집과 작업실, 미술관, 박물관, 갤러리, 공연장 등을 지으면서 태동됐다. 당연히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어왔지만 지난 2009년 12월 문화지구로 지정됨으로써 한숨을 돌리기도 했다. 그동안 헤이리마을 회원들은 경제 여건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문화예술마을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의지를 갖고 꾸준한 노력을 해왔다. 전시와 공연, 축제, 홍보 등은 마을 자체적으로 운영해왔었다. 아직도 척박하기 이를 데 없는 우리나라의 문화예술풍토에서 이들이 얼마나 큰 어려움을 겪으면서 지금까지 헤이리마을 꾸려왔는지 알만하다. 그러나 이제는 주말이면 수천명에서 수만명의 관광객들로 북적거리는 나들이 명소가 됐다. 헤이리는 건물 자체가 예술 작품이다. 엄선된 국내외 대표건축가들이 참여하여 시공했는데 건물들 간의 조화나 자연과의 조화를 최우
15일 스승의 날, 청련암 뒷산을 거닐며 교직생활 42년 6개월을 되돌아 봤다. 그 42년 6개월의 교직 생활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일간지와 방송에 우수교사로 소개됐을 때, TBC-TV 인간만세, MBC 꿈나무 대상의 훈장도 받았던 때의 기억도 새로웠다. 돌이켜보건데 나를 이끌어주신 건 학창시절 스승님이었다. 나는 10남매 중 5남으로 태어나 지독한 가난 속에서 살았다. 중학교 입학금이 없어 진학을 포기 할 때 초등학교 곽원용 선생님이 천안 북중 장학생 선발 시험을 치루게 해주셨다. 당시 그 귀한 전과도 사주셨다. 난 그런 스승의 모습을 보았기에 나도 가난한 아이들에게 입학금을 마련해 진학도 시켰다. 교사 초임 시절 땐 황석마을에서 절미함을 설치해 각 가정에 중학교 진학 저축 통장을 만들어 주었다. 스승님의 가르침에 대한 철저한 실천이었다. 유난히 기억나는 스승님이 또 있다. 육군 장교로 퇴직 후 흙벽돌 찍어 눈 바람치는 교실(당시 재건학교)에서 어려운 학생들을 모아 가르치면서 하루에도 12번 이상 “하면 된다. 성공 할 수 있다” 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삶의 철학과 신념을 심어주신 전영준 은사님이시다. 그래서 나도 교사시절에 나의 제자들에게 이 구호
흐드러지게 피었던 벗 꽃도 소담스러웠던 목련도 봄비에 스러져 지는 봄꽃의 애수가 미처 사라지기도 전에 연 초록 이파리가 빈 가지마다 무성이 차오르는 5월이다. 봄볕 따뜻해도 집안에서야 춘곤증 잠만 늘어난다는 팔십 넘으신 어머니를 모시고 우리 내외와 손위 시누이와 함께 강원도 설악산아래 오색약수터를 다녀왔다. 연휴라 나들이행차가 많을 성싶어 식전에 출발했다. 가는 길은 생각보다 번잡하지 않았다. 보드라운 녹두 빛이며 연두 빛, 연회색 빛깔로 꽉 찬 그림보다 더 아름다운 산과, 선명한 다홍빛 철쭉꽃이 무더기로 피어있는 길은 일상의 번뇌를 사라지게 하고도 남았다. 어린이처럼 좋아하시는 어머님과 말없는 나 대신에 들뜬 목소리로 분위기를 띄우는 시누이의 대화로 재미있게 몇 시간이 후딱 지났다. 산 길을 돌아 목적지에 도착하니 한 시경이 됐다. 가벼운 점심을 하고 온천 욕을 즐겼다. 어머니께서 탄산온천수와 열탕을 오가시는 활기찬 모습을 보니 절로 기쁜 맘이 되었다. 근처 식당에서 산나물과 더덕구이 황태구이 등 토속음식으로 맛있게 저녁을 먹고 오색약수터로 산책을 했다. 토산품을 파는 점포가 즐비한 길에 이름 모를 들꽃이 담긴 화분에서 지들끼리 뭐라 속삭이며 정겹게 말을…
3·11 일본강진은 원전의 방사능까지 누출시키면서 막대한 재산과 인명 피해를 가져왔다. 지금도 복구를 위해서 안간힘을 쏟고 있지만 파괴된 원전시설의 방사능 누출은 그치지 않아 일본인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공포에 몰아넣고 있다. 많은 국가들이 한국을 이번 원전피해의 영향을 받은 나라로서 ‘방문주의국’으로 계도할 정도이니 말이다. 왜 전 세계인들이 이처럼 원전과 방사능 누출에 많은 걱정을 할까? 지난 1986년 소련(현재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원전폭발 사고의 피해가 얼마나 위력적이며,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모두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고는 원자력발전소 원자로가 폭발하며 방사능이 누출돼 무려 1민여 명이 사망하고 70만 명 이상이 각종 암과 기형아 출산 등 후유증을 앓고 있는 사상 초유의 대재앙이었다. 당시 소련 정부는 이 사고를 끝까지 은폐할 계획이었으나, 기상변화로 누출된 방사능이 유럽과 전 세계로 퍼지면서, 사고가 터진 후 수일이 지나서야 인정하고 말았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어 사고 지역 주변에 많은 피해를 주었고, 지금도 진행형이다. 사고가 발생한 지 25년이 지난 지금, 체르노빌은 아무도 살지 않는 유령 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