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6월 4일 치른 지방선거 후 7월1일 출범한 민선6기가 1주년을 맞고 있다. 이에 따라 자치단체장들의 공약에 대한 평가가 곳곳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예외 없이 표심만 노린 이른 바 표퓰리즘적 공약(空約)들이 남발해 여론의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최근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가 민선6기 전국 기초자치단체 공약실천계획평가 결과를 발표했다. 전국 226개 기초자치단체를 대상으로 한 이번 공약실천계획평가는 공약계획 종합구성, 개별구성, 주민소통, 웹 소통, 공약일치도 등 5개 항목 30개 지표 평가에서 총점 100점 만점으로 환산하는 절대평가로 진행됐다. 이 결과 90점 이상의 최고등급인 SA를 받은 기초지자체는 모두 50곳으로 나타났는데 도내에서는 31개 시·군 가운데 고양, 평택, 광명, 의왕, 이천시 등 5곳뿐이었다. 합산 총점이 80점을 넘어 A등급을 받은 도내 기초지자체는 수원시를 비롯해 성남, 화성 안산, 오산, 안성, 여주시 등 7곳으로 나타났다. 이에 반해 광주시의 경우 공약 정보를 관리카드만 제시했거나 정보내용이 상대적으로 부실해 D등급을 받았다. 이번 평가는 공약실천계획에 대한 것으로 취임 당시 해당 자치단체의 재정 여건 등을
‘알권리’를 공식 용어로 처음 사용한 사람은 AP통신 기자 켄트 쿠퍼(Kent Cooper)다. 그는 1945년 뉴욕타임스에 실은 기고에서 ‘국민의 알권리가 없는 민주주의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알권리라는 용어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미국의 경우 18세기 말 독립 후 반연방주의자들이 집권자인 연방주의자들에게 국민들이 정부의 세금 집행과 공교육제도 실시에 대해 알권리가 있다는 점을 요구하면서 처음 등장했다고 알려지고 있을 뿐이다. 우리나라에서 알권리가 언론에 처음 쓰인 것은 1964년이다. 당시 신문기자가 군·경에게 폭행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언론들은 이 사건을 국민의 알권리 침해라는 내용으로 기사화했다. 이후 언론계는 언론윤리강령에 알권리 조항을 신설하는 등 알권리 보장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학계에서도 알권리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됐고, 그 결과 지금의 알권리로 인식되는 기틀이 마련됐다. 국민의 알권리는 민주주의의 성숙도를 측정하는 척도로 여긴다. 정부가 갖는 정보를 시민에게 공개한다는 것은 투명한 정치, 열린 행정을 실현하기 위한 전제가 되기 때문이다. 이 같은 배경에는 모든 공문서가 납세자인 시민의 공유재산이라는
마지막 사진 /노혜봉 시신기증 카드에 복사해 넣은 어머니, 얼굴이 화사하다 천국행 차표도 선뜻 남한테 건네주었을 어머니의 품새 살아생전 85세, 올올한 결심. 봄나들이 찬란한, 콧잔등에 코티 분 향내음이 묻어날 것 같은 온기, 잘 마른 장미 꽃잎의 날개가 가비얍다 오래 묵힌 찰나가 찬연하다. 노혜봉 시집 〈좋을 好〉/계간 ‘리토피아’ 봄호에서 옛날에 비해 살기도 좋아진데다가 의학의 발전으로 인해 인간의 수명이 많이 늘어났다. 생산직 연령이 높아지기만 한다면야 오래 사는 것이 좋긴 할 것이다. 언젠가는 그런 사회가 오기도 할 것이다. 미래의 건강하게 오래오래 잘 사는 사회를 위해 시신을 기증하는 마음이 아름답다. 어머니라는 존재는 내 어머니만이 아니다. 모든 어머니는 모두의 어머니이며 곧 인류의 어머니인 것이다. /장종권 시인
“우리는 비록 전쟁에 패했지만 조선이 승리한 것은 아니다. 장담하건대 조선인이 제정신을 차리고 옛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년이 더 걸릴 것이다. 우리 일본은 조선인에게 총과 대포보다 더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 놨다. 조선인들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적 삶을 살 것이다. 그리고 나 아베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온다.” 일제 강점기 마지막 조선 총독인 아베 노부유키가 한반도를 떠나며 마지막으로 한 연설 구절이다. 어이가 없기도 하지만 무시무시한 얘기이기도 하다. 더 무서운 것은 ‘역사는 반복 된다’는 것이 대체적인 진리라는 것이다. 게다가 이 말을 한 아베 노부유키가 현 일본 아베수상의 할아버지라는 것이다. 북한 김정은의 도발에도 대처해야 하지만 우리식으로 통일이 된 이후에도 한반도의 지리적 상황은 중국, 러시아, 일본 등 열강들 틈바구니에서 지속적인 위협이 도사리고 있는 과거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금년은 광복 70년, 분단 70년이 되는 해다. 일제강점하에서 광복을 되찾은 70년 전의 그날을 경축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더욱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이 있다. 바로 1910년 일본의 강압으로 을사늑약
1985년 국내 최초 생활협동조합 설립 농축수산물 등 1500여 가지 생활재 취급 연간 거래액 100억원 중견기업 수준 성장 지역공동체로 뿌리내린 원동력은 ‘신뢰’ 조합원은 조합 운영에 동등하게 참여 ‘계획 생산·책임 소비’ 상생구조 형성 오프라인 매장 설립 후 정기모임 등 활기 4개 시에 9개 개설 동네사랑방 역할 톡톡 이웃 간 농사일을 공동으로 하던 ‘두레’, 고된 일을 서로 거들며 품을 지고 갚는 ‘품앗이’. 급속한 도시화가 삼켜버린 우리의 오랜 미풍양속이다. 두레, 품앗이는 단순한 공동체 활동이 아니었다. 두레와 품앗이 속에 사람과 사람 간에 정이 오갔고, 이해와 용서를 통해 이웃과 공존하는 사회적 공동체 활동이었다. 지금은 잊혀진 이같은 공동체 활동이 최근 농촌 중심의 전통적 방식에서 도시형으로 변형하며 전국 곳곳에서 부활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 가운데 전국 최초로 설립돼 1만6천여명의 ‘바잉 파워’(Buying Power)를 쌓아 올린 ‘바른두레생협’(이사장 정건순)을 찾아 새롭게 조명받고 있는 지역 공동
홍어만큼 미식(美食) 마니아층이 두터운 생선도 드물다. 삭혀 먹는다는 특이한 섭취방법도 방법이지만 맛 또한 특별해서다. 홍어는 보통 항아리 속에서 삭힌다. 3~4일, 길면 6~7일 짚과 함께 넣어두었다 뚜껑을 열었을 때 눈이 맵고 코가 싸해 재채기가 날 정도가 되면 잘 삭혀진 것으로 가늠한다. 잘 씹어 넘길라치면 목이 후끈거려야 최고로 여긴다. 이럴 때 시원한 막걸리 한 잔을 마시면 톡 쏘는 맛이일품인데 이런 기막힌 어우러짐을 ‘홍탁’(洪濁)이라 부르기도 한다. 회로 먹던 홍어를 전라도 남쪽 해안지방에서 삭혀 먹기 시작한 것은 고려 말이다. 흑산 앞바다에서 홍어를 잡아 열흘 넘게 배에 실어 목포나 영산포로 운송하는 동안 신선도를 잃고 부패한 홍어를 우연히 먹고 나름대로 독특한 맛을 발견해 향토음식이 됐다는 게 정설이다. 그래서 영산포구에 있는 나주 사람들은 지금도 삭힌 홍어는 나주가 원조라고 말한다. 전라도 지역이라도 먹는 방식은 조금씩 다르다. 흑산도에선 막걸리 식초에 소금·참기름·쪽파를 더한 초장에 찍어 먹는다. 나주에선 된장에 고춧가루·식초를 섞은 초장에 먹고, 함평·영암 등 내륙에서는 소금만 달랑 찍어 먹는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홍어는 묵은지,…
어머니 /김권태 저물녘, 공터 위에 쓸쓸하게 빛나는 쇳조각 하나 그 날카로운 빛으로 까맣게 빨려 들어가는 하늘 누가 한번 살다 버린 집처럼 쓸쓸하게 웃고 있는 저 고요한 여자! - 김권태 시집 『빛의 속눈썹』/시인동네 인간들에게 어머니란 존재는 단순히 자신을 잉태하고 낳아준 육체, 혹은 인류의 유전인자를 고스란히 받고 빠져나온 유전자의 집쯤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머니를 두고 생물학적 사건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머니는 연민의 대상, 혹은 말없이 자신을 보며 힘든 인생 응원해주는 여자, 혹은 태어나 처음 사랑을 알게 된 첫사랑의 기억을 가진 존재… 여기서 시인은 ‘공터의 쇳조각’, ‘빛으로 빨려드는 까만 하늘’, ‘살다버린 집’으로 표현하고 있다. 아마도 쓸쓸하게 조금씩 허물어져가는 집을 보며 어머니를 떠올렸을 것이다. 단지 세상에 몇 년 먼저 태어나 나를 낳아 희생하고 고요히 사라지는 존재가 어머니인 것을 시속에 담고 있다. 어머니는 그렇게 쓸쓸하고 고독한 존재인 것이다. /성향숙 시인
벌써 봄이 무르익어 여름의 문턱이다. 낮이 길어지고 활동이 많아지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피로가 쌓이고 있다. 오래전에 잊은 줄 알았던 소리가 나를 부른다. 새벽잠에도 분명 새소리였다. 봄내 우는 뻐꾸기소리가 아니라 요즘은 듣지 못하는 소리였다. 쪽박 바꿔주!! 쪽박 바꿔주!! 새는 맑은 소리로 울었다. 심술덩어리 시어머니는 어떻게 해서든 며느리를 내쫓으려 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차에 한 가지 묘안이 떠올랐다. 딸에게는 커다란 바가지를 주고 밥을 짓게 해서 넉넉했고 며느리에게는 조그만 쪽박을 주고 밥을 지으라고 했으니 밥은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와 딸이 똑같이 한 바가지씩 밥을 해도 딸은 온 가족이 먹고도 남을 만큼 되는데 며느리는 밥이 조금밖에 되지 않는다고 흉을 보고 다녔다. 그러다 며느리가 밥을 훔쳐 먹고 일부러 식구들을 배 곯린다고 갖은 구박을 하며 며느리를 괴롭혔다. 마침내는 쌀을 빼돌리는 못된 며느리로 몰아내 쫓고 말았다. 가엾은 며느리는 길에서 울다 기진해서 죽고 말았다. 그 혼이 새가 되어 쪽박 바꿔달라며 울었다. 얼마나 한이 되었으면 죽어서도 쪽박을 바꿔달라고 했을지 측은하기 이를 데 없다. 예전에는 여자기 시집을 가면…
프랑스 낭트대학에서 열린 한불 수교 100주년 기념 ‘한국과 프랑스의 사회적 역동성’을 논하는 흔치 않은 컨퍼런스엘 다녀왔다. 낭트시와 수원시가 자매도시이고 낭트대학과 필자가 몸담고 있는 대학이 자매지교이다 보니 필자에게 낭트시는 마치 타국 속의 또하나의 고향 같은 그런 친근함과 정겨움을 자아내는 곳 이었다. 15시간 여를 날아가 도착한 백야의 낭트에는 자정이 가까운 꽤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낭트대 한국학연구소장이신 은발의 프랑스 교수님이 친히 공항까지 마중을 와주셨다. 첫 만남에 놀랍게도 친숙한 한국말로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환영합니다’라는 인사로 악수를 청하셨다. 피곤함이 싸악 가시는 푸근함이 밀려 왔다. 다음날 아침 여름치곤 꽤나 쌀쌀한 날시 덕에 제법 톡톡한 코트를 걸치고 나선 낭트대학 캠퍼스에서 멋진 총장님을 뵈었다. 그곳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계신다는 지한파 여성 프랑스 명예 한국대사도 뵈었다. 얼마 전 한국을 다녀가셨다는 명예 한국 대사는 연신 당신의 한국에서의 잊지 못할 추억과 감동을 전하고 또 전하느라 꽤나 열심이셨다. 작년 첫 개설했다는 한국학 강의에 몰린 109명의 낭트대생들과도 첫 대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