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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세이] 장다리와 꺼꾸리

 

땅콩껍질을 벗겼다. 딱딱한 껍질을 깨면 두어 개의 땅콩이 뽀얀 속살을 드러낸다. 땅콩 줄기는 무성했는데 작황이 좋지는 않다. 시기에 맞춰 비닐을 걷어내고 북을 돋워주니 개화기에 꽃도 제대로 피고 뿌리도 곧잘 내린 것 같은데 막상 수확을 해보니 땅콩은 많이 열렸는데 제대로 여문 것이 적다.

그중 잘 여문 땅콩을 골랐다. 내년에 파종할 녀석들이다. 껍질을 벗겨보면 어떤 것은 하나의 알맹이만 품었지만 제대로 영글어서 통통하고 먹음직스러운가 하면 땅콩은 두세 개들었지만 찌글거리거나 기형으로 생긴 것도 있고 아예 땅콩도 없이 빈 통만 요란한 것도 있다.

땅콩을 까다보면 그 안에 세상사가 들어 있는 것 같다. 한날한시에 파종하고 한 뿌리에서 열렸지만 어떤 것은 속이 꽉 찼는가 하면 어떤 땅콩은 쭉정이만 요란하다. 세상도 자식도 마찬가지 아니던가. 한 뱃속에서 나왔어도 누구는 크고 누구는 작다. 팔 남매 중 나는 가장 작고 피부도 까맣다. 초등학교 때는 까만 피부와 작은 키 때문에 친구들 사이에서 놀림도 많이 받았고 스트레스도 많았다.

부모님의 유전자 중에 나는 왜 열성 유전자만을 받고 태어났을까에 대해 고민했고 키가 크고 흰 피부를 가졌으면서도 예쁜 언니가 얄밉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다. 외형적으로 부족한 나는 무엇 하나 잘 하는 것은 없었지만 노력파였다.

공부를 잘 하지는 않았지만 남들보다 더 열심히 해서 상위권에 올랐고 키가 작으면 절대적으로 불리한 고무줄놀이를 할 때도 높이 멀리 그리고 힘껏 뛰어서 다른 친구들을 이겼다. 중학교 체력장할 때였다. 키순으로 번호를 정했기 때문에 나는 1번이었고 가장 큰 친구는 72번이었다. 100m 달리기를 하는데 1번과 72번의 대결이다. 그 무렵 상영관을 후끈 달궜던 영화 중 장다리와 꺼꾸리가 있었는데 72번은 장다리였고 나의 별명은 꺼꾸리였다.

출발 선상에 나란히 서자 친구들이 박수치고 웃고 난리다. 장다리를 응원하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꺼꾸리를 응원하기도 했지만 창피하기도 하고 자존심도 상했다. 자기들끼리 내기를 걸기도 하면서 각자의 선수를 응원했다. 이기고 말겠다는 다짐으로 사력을 다해 뛰었다.

장다리가 앞질러 갔다. 그녀가 성큼성큼 달아나는 동안 종종걸음으로 아무리 달려도 그녀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친구들의 함성이 더 크게 들렸다. 어떻게든 이겨야 한다는 것 말고는 아무 생각도 없었다.

정말이지 젖 먹던 힘까지 동원해서 달렸다. 결승선을 얼마 앞두고 그녀와의 거리가 두어 걸음으로 좁혀졌고 마침내 나는 그녀를 이겼지만 양호실에 업혀갔다.

그 일을 계기로 나의 학교생활은 즐겁고 신이 났다. 무엇이든 자신감이 생겼고 도전하는 자세로 임하게 되었다. 눈앞의 불편은 어떻게 극복하고 이겨내느냐 하는 방법의 문제이지 해서 안 되는 일은 없다는 것을 깨우치게 된 좋은 계기가 되었다.

다시, 땅콩을 깐다. 펜치를 잡은 자리에 물집이 생기고 어깨가 욱신거린다. 이틀째 작업 중이다. 이놈들 중에도 장다리와 꺼꾸리가 있다. 사람살이나 농경이나 그저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이 실감난다. 盡人事待天命이라 했던가, 한 해의 끝자락에서 조용히 읊조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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