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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선희의 향기로운 술 이야기] 술 속에 피어나는 생강의 온기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장터의 냄새가 바뀐다. 파와 마늘의 매운 향 사이로 어딘가 따뜻하고 알싸한 기운이 번지기 시작하는데, 그것이 김장철의 도래를 알리는 뿌리, 생강이다. 오늘날에는 차나 조미료로 손쉽게 쓰이지만, 생강은 향을 보태는 재료 이상의 오랜 생활의 감각을 품어왔다.

 

생강의 원산지는 동남아시아다. 인도와 중국 남부에서 먼저 재배되었고, 그 독특한 향과 약성이 인정되어 일찍부터 교역품으로 널리 이동했다.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 전후에 전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시대에는 ‘생강소(生薑所)’라 불리는 재배 관리 체계가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는 생강이 단순한 부엌 조미료가 아니라, 국가가 공적으로 다루던 귀중한 농산물이었다는 의미다.

 

조선 시대에 들어서면 생강은 더욱 생활 속에 깊숙이 스며든다.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전주 생강이 으뜸이며, 담양과 창평이 그 다음”이라 적혀 있다. 특히 전북 완주 봉동의 생강은 지금도 명물이다. 배수가 잘되고 흙이 따뜻해 향과 매운맛이 살아 있어, 조선 시대에는 임금에게 올리는 진상품이었다. 땅 속의 뜨거운 기운이 수라상까지 닿았던 셈이다.

 

생강의 쓰임새는 유난히 넓다. 약방에서는 몸을 덥이고 속을 편하게 하는 약재였고, 부엌에서는 고기 누린내를 잡는 향신 재료였다. 술에서도 생강은 오래도록 중요한 역할을 했다. 조선의 명주 이강주(梨薑酒)는 증류식 소주에 배와 생강을 넣어 숙성한 술로, 청량함과 알싸함이 입 안에서 은근히 어우러진다.

 

술을 빚는 사람들은 생강의 쓰임에서 ‘언제 넣는가’가 ‘얼마를 넣는가’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안다. 생강은 발효의 온도감을 조절하고, 술의 숨결을 정리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누룩이 숨쉬는 온기와 생강의 열기가 섬세한 균형을 만든다. 따라서 생강을 너무 일찍 넣으면 향이 날아가고, 너무 늦게 넣으면 맛이 단절된다.

 

저는 술을 빚을 때 생강을 편으로 썰어 넣거나 끓인 물을 사용하는 방식보다는 강판에 곱게 갈아서 즙만을 넣는다. 발효가 진행되는 동안 생강의 향은 쌀과 누룩이 만든 향과 섞여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술을 삼킨 뒤 뒤늦게 목 뒤에서 피어오르는 알싸한 온기는 오래도록 여운을 남긴다. 술이 단순한 기호품이 아니라 마음을 덥히는 존재라 한다면, 생강은 그 ‘따뜻함의 마지막 층’을 완성하는 재료다.

 

흥미롭게도, 생강은 ‘새앙’이라 불리기도 했다. 일부 지역에서 오랜 세월 쓰인 토박이 말로, 현대 자료에도 “일반에서도 새앙이라 부르기도 한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한자어 ‘생강’이 문서의 언어라면, ‘새앙’은 흙과 손, 사람의 말에서 이어진 이름이다.

 

생강은 겨울 문턱에서 계절을 알리는 식물이다. 몸을 보호하고 음식의 결을 다듬고, 술의 온도를 만든다. 제철 생강은 향이 깊고 매운맛이 부드러워 절임, 차, 술로 담기 좋다. 최근에는 생강청, 생강술, 생강 디저트까지 새로운 쓰임새가 이어지고 있다.

 

우리가 생강을 썰 때 코끝에 스치는 알싸한 향은 사실 오래 쌓여온 시간의 냄새다. 고려의 조세 문서 속에, 조선의 약방과 부엌에, 그리고 오늘 우리의 식탁과 술잔에, 생강은 같은 온기로 계절을 데워왔다.

 

겨울의 초입, 따뜻하게 데운 잔에 생강술을 조금 따라 들고 있으면 술은 단순히 목을 넘어가는 액체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곡식이 익어가는 숨과 누룩의 향, 그리고 마지막에 스며든 생강의 온기가 천천히 몸을 데운다. 향 하나로 사람의 계절을 바꾸고 마음을 다독이는 재료가 또 있을까. 생강은 오래전부터 생활을 지키고 겨울을 견디게 한 ‘온기의 언어’였고, 그 역할은 지금 우리의 식탁과 술잔 위에서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술 속에 피어나는 생강의 온기는 결국, 계절을 건너온 사람들의 지혜가 전하는 따뜻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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