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시카고대학의 찰스 라이트 밀즈(C. W. Mills. 1916∼1962)가 쓴 『파워엘리트(Power Elite)』는 출간과 동시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그는 관료집단과 군수업자 그리고 군부 등 세 집단이 삼위일체가 되어 미국의 주요한 정책결정을 내리니 이들을 ‘파워엘리트’라고 하였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세 집단은 이해관계를 같이하며 공동목적을 향해 공동전선을 형성하고 나머지 미국인들을 이에 추종케 한다고 주장했다. 밀즈는 이같은 미국 사회는 결코 다양한 여러 집단 간의 유화(宥和)가 이루어지는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맹비난을 하였다. 밀즈에 의하면 미국 사회는 결코 기회의 나라도 아니고, 다양성의 나라도 아닌 것이다. 권력은 항상 그들 파워엘리트들에 주어져 있고 그들은 전가의 보도처럼 그것을 행사해 미국을 점차 군산복합체(military-industrial complex) 국가로 만들고 있다고 외쳤다. 사람들은 그를 분노의 사회학자라고 했다. 그런데 그가 이런 별명을 얻기에는 파워엘리트의 전횡만을 고발해서가 아니었다. 어쩌면 밀즈를 가장 분노케 한 것은 권력이 대물림되고 있는 미국 사회였을 것이다. 그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파워엘리트의 권력과 부 그리고 지위는 시간이 흐를수록 자식들에게로 승계되는 비율이 증가해 1950년의 파워엘리트의 자리는 이미 68%가 이전 세대의 파워엘리트의 자녀들에게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오늘 21세기의 미국 사회는 어떨까? 이미 권력과 부의 대물림은 확고부동한 사실이 되었고 이제는 2대가 아니라 몇 대를 이어서 쓰고도 남을 만큼의 힘이 계승되고 있지 않을까. 밀즈의 분석을 우리 사회에 대입해 보면 어떨까. 전통적으로 문벌과 학벌을 따지는 우리는 미국보다 몇 배는 더 심할 것이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은 이제 먼 옛날의 이야기다. 커다란 변동 없는 재벌 그룹과 2세 정치인들의 등장 그리고 전문직 영역에서의 대물림 등등 그 증거는 차고도 넘친다. 특히 패자부활전이 없는 우리 사회는 학벌이 평생을 보장하는 구조이다 보니 부모는 자녀들의 대학입학에 목숨(?)을 건다. 최근에는 글로벌 엘리트를 지향한다. 한때 자녀에게 탄생 선물로 미국 국적을 주기 위한 원정 출산이 유행이더니 이제는 까다로워진 규제를 피해 미국의 주요 대학의 입학으로 목표를 바꾼 듯하다. 어차피 미국 국적이든 미국 학위든 다 국내용이기 때문이다. 우리와 달리 평소 생활에서의 스펙을 중요하게 여기는 미국 대학입학을 위해 중고등학교부터 스펙 조작에 몰두한다. 논문표절은 기본이고 대필작가의 등장에 대리 앱 제작, 미리 확정해 놓은 봉사활동까지 수법도 다양하다. 이미 30대 대기업의 사내이사 38%가 외국대 출신이고 윤석열 정부의 장관 59%도 국외 석박사 출신이다. 그들만의 스카이캐슬은 오래된 이야기였는데 멍청한 나만 모르고 있었다. 아니 알았더라도 해줄 능력 없는 부모이니 자식들에게 면이 안 서게 되었다. 참, 넘겨줄 권력이나 부도 없으면서 괜한 걱정인가.
며칠 전 얼굴에 난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병원을 찾았는데 어떤 환자가 큰 소리로 의사를 타박하고 있었다. 정확한 내막은 알 수 없었으나 치료결과에 대해 따지는 게 분명했다. 의사는 난감해하며 무언가 설명하려고 했고, 환자는 말을 자르며 책임을 추궁했다. 의사의 명령에 환자가 순한 양이 되어 복종하는 일반적인 풍경과는 정반대여서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었다. 알고 지내는 의사들에게 그날 있었던 일을 설명하면서 특수한 사례인지 물어보았다. 그들은 대수롭지 않게 일반적인 일이라고 대답을 했다. 의사가 갑이었던 시절은 끝났고, 갑을관계가 바뀌고 있다는 것이었다. 왜 그런 현상이 빚어졌는지 묻지 않았다. 변화 자체에 큰 의미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의사와 환자의 뒤바뀐 관계는 분당 글쓰기 교실에서 강의했을 때 있었던 일을 떠오르게 한다. 대령 출신의 중년 남성이 수강을 했는데 그는 병사들에 대해서 전혀 뜻밖의 이야기를 했다. 이즈음 병사들은 지휘관들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단다. 그러나 지휘관들이 모범을 보이거나 합리적으로 설명을 하면 병사들이 예전 못지않게 일사불란한 모습을 보인다고 한다. 병사들을 나약하다고 본 우리들의 편견을 깨기에 충분한 증언일 것이다. 학교에서 교사들의 명령을 무조건적으로 받들어야만 했고, 어길 경우 심한 체벌을 받았던 시절에는 입대해서도 닮은꼴인 군대에 대해서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어디 그 뿐인가? 교도소는 물론이고 병원과 관공서 등 숱한 곳에서 개인은 억압의 피동체일 뿐이었다. 철저하게 길들여져 닫힌 사회에 걸맞는 핏기 없는 사람으로 전락해갔던 것이다.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은 교도소 등 공적 기관이 인간을 어떻게 체제내적 인간으로 훈육하는지 역사적 사례를 통해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이 보고를 통해 해방 이후 한국 사회의 모습을 유추해 보아도 손색이 없다. 그만큼 한국 사회는 전근대와 근대, 현대가 뒤죽박죽 뒤섞여 있는 것이다. 집권당인 국민의힘 권성동 원내 대표가 최근에 군인들의 군 기강이 빠져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자신을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는 적지 않은 사람들도 권 대표의 말에 동의할지 모른다. 현대 사회에 맞는 군대에 대한 고민이 없는 이 생각은 우리 사회가 여전히 현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아픈 반증일 것이다. 1912년에 발표된 토마스만의 중편소설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은 동성애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그 배경인 자유로운 시민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물론 그 사회는 자본주의가 독점 단계로 이행해 인간 소외라는 부작용을 낳았다. 그렇다 해도 현대라는 관점에서 보면 1백 년 전인 그 사회가 지금 우리 사회보다 뒤떨어졌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런 가운데 위에서 예로 든 것처럼 전근대와 근대적 풍경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 변화의 주인공들은 그 누구도 아닌 피동체였던 개인들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역사적 진전이 관념이 아니라면 이 변화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언론에 대한 시민의 신뢰가 바닥 수준이라는 한탄은 새롭지 않게 들린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영국 로이터저널리즘연구소가 매년 발행하는 ‘디지털 뉴스리포트’ 뉴스 신뢰도 평가에서 최하위 혹은 꼴찌 수준이라는 평가를 종종 듣기 때문이다. 한국은 46개 국가 중에 2021년 38위, 2022년 올해는 40위라는 결과를 받았다. 뉴스 전반에 대한 신뢰 하락은 전 세계적인 경향이다. 2021년 평균 44%였던 신뢰도 수준은 일 년 사이 42%로 낮아졌다. 뉴스리포트는 코로나 영향을 지목했다. 다른 정보원에 비해 공신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하는 언론사 뉴스에 대한 신뢰가 상승했었다가, 코로나 상황이 안정되니까 팬데믹 이전으로 회귀하는 경향이 나타났다고 진단했다. 한국은 뉴스 전반에 대한 신뢰가 30%로, 글로벌 평균에 못 미치는 수준이다. 그렇지만..
‘족제비가 대장간에 들어가 쇠붙이 조각을 핥았습니다. 입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지만, 족제비는 계속 핥았습니다. 족제비는 피가 쇠붙이 조각에서 나온다고 생각했고, 결국 혀를 못 쓰게 됐습니다.’ 톨스토이의 어린이를 위한 우화 ‘족제비’ 편이에요. 때로는 짧은 우화 속에 깜짝 놀랄 만한 비유나 교훈이 들어있는 경우가 있죠. 우연히 이 우화를 읽다가 문득 권력에 취한 우리 정치권의 우스꽝스러운 정쟁 놀이 모습이 떠올랐어요. 정치는 ‘말’로 하는 것이니 ‘혀’는 곧 정략을 상징하지요. 낫이나 도끼 따위 벼린 권력에 베인 자기 혀에서 나오는 피 맛을 정치의 달콤한 맛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곧 정치꾼들이에요. 야릇한 그 맛에 취한 그들은 날로 혀를 더 요란하게 움직여 요설(妖說)들을 지어내게 되지요. 한번 대장간에 들어가면 혀를 쓰지 못할 때까지 날카로운 쇠붙이를 핥게 되는 이 불가해한 중독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전당대회준비위원회(전준위) 구성을 마치고 본격적인 전대 준비 체제로 들어간 더불어민주당 각 정파가 본격적인 ‘룰 전쟁’을 시작했군요. 지난 6·1지방선거 중에는 ‘586 퇴진론’이 여론을 흔들더니, 이번에는 ‘세대교체론’이 등장했네요. 노역들을 억지로 물러 앉히고, 새로운 세대들을 전면에 내세워야 연패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민주당이 비로소 살아날 것이라는 게 명분이군요. 어차피 ‘명분’을 빌려다 ‘선동’에 써먹는 모략이 정치의 실상이긴 한데, 이건 좀 가당찮아요. 흔히들 ‘세대교체’ 하면 떠올리는 인물들이 있어요. 국내에선 지난 1970년 당시 ‘40대 기수론’을 내세우며 돌풍을 일으킨 김영삼(42세)·김대중(46세) 전 대통령들이지요. 세계적으로도 30~40대에 당권을 넘어 국가 최고지도자(대통령·총리)에 오른 마크롱(프랑스 39세)·캐머런(영국 43세)·클린턴(미국 46세)·오바마(미국 48세) 등이 회자하곤 해요. 그런데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그들의 등장은 역사가 불러낸 시대적 현상이지, 결코 ‘기획’의 산물이 아니에요. 김민석 의원이 민주당 안의 ‘세대교체론’에 대해 “실력 부족의 불순한 포장”이라고 적확하게 짚어냈군요. 전당대회를 앞두고 조악한 정략 계산기를 두드려가면서 특정 인물에 대해 ‘출마 불가론’을 펼치는 것도, ‘세대교체’라는 사탕발림을 내세우는 것도, 대의원과 권리당원의 투표 반영 비율을 놓고 입씨름을 벌이는 것도 다 ‘실력 부족의 불순한 포장’으로 읽혀요.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되고…그런 구상유취한 주장일랑 다 버리고, 누구든 다 나와서 당당하게 실력으로 겨루는 게 옳지 않을까요? 민주당에 정말 세대교체가 필요하다면, 그게 오늘날의 시대정신이라면 어떻게든 일어나게 돼 있어요. 날카로운 권력 쇠붙이를 무리하게 핥다가 혀를 베여 흘리는 자기의 피 맛에 취한 딱한 족제비들이 대장간에 즐비하군요.
친기업 정책 기조를 펼치고 있는 윤석열 정부와 여당이 중대재해처벌법(중대재해법) 개정을 위해 발을 맞추고 있다. 경영계와 노동계로부터 ‘졸속입법’이라는 불만이 끊이지 않는 만큼, 법의 완성도를 좀 더 높일 필요성이 있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산업현장에서 덧없이 스러져 가는 노동자들의 희생을 막는다는 당초의 입법 취지까지 흔들려서는 안 된다. 시행 5개월밖에 되지 않은 법을 보완 입법이라는 이름으로 솜방망이로 만드는 개악만은 삼가야 한다. 중대재해법의 효과가 미미하다는 것은 사고통계로도 나타난다. 고용노동부 통계에 따르면 올해 1분기 산재사고 사망자는 모두 157명으로 집계됐다. 이는 작년 동기 대비 고작 8명이 감소한 수치다. 건설업 사고사망자 수는 7명 줄었지만, 제조업은 오히려 7명이 늘었다. 여전히 현장에서 불의의 사고로 생명을 잃는 노동자들이 매월 50여 명에 달한다는 얘기다. 현행 중대재해법에 대한 경영계의 불만과 지적도 만만치 않다. 대한상공회의소가 5인 이상 기업 930개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만 보더라도 이 법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않다는 증거는 뚜렷하다. 전국 순회설명회에 참석한 기업 10곳 중 7곳가량은 중대재해법 대응에 여전히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답했다. 법에 맞춰 ‘조치했다’고 응답한 기업은 고작 20.6%에 그쳤다. 지난달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는 고용노동부 등 관계부처에 중대재해법 6개 항목의 시행령 개정 건의서를 제출했다. ‘직업성 질병자 중증도 기준 구체적 명시’, ‘중대 산업재해 사망자 범위에 급성 중독 질병자 한정’, ‘경영책임자의 대상과 범위 구체화’ 등이 그 내용이다. 정부는 이르면 오는 7월 경영책임자의 의무 명확화를 위해 시행령 개정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국민의힘도 안전 및 보건 확보를 위한 충분한 조치에도 재해가 발생할 경우 경영책임자의 처벌 형량을 감경하는 내용의 법 개정안을 제출했다. 경영책임자의 처벌을 감경해주겠다는 여당의 개정안 흐름이 문제다. ‘경영책임자에게 강력한 예방 의무를 부과해 산재를 줄이겠다’는 법 제정 취지를 흔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개정안과 관련, “아무리 살인죄 형량을 높여도 살인 범죄가 줄지 않는 것과 같다”고 한 발언은 야당일 때 합의한 법 제정 취지에 근본적으로 반하는 논리다. 중대재해법은 지난해 연초 입법과정에서부터 졸속입법이라는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경영계는 처벌 대상의 모호성과 과도한 징벌 문제를 들어 반발하고, 노동계는 현장 개선을 위해서는 턱없이 부족한 입법이라는 주장을 거듭해왔다. 현재까지 기업들은 산업현장에 적용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예방보다 처벌을 회피하는 데만 급급해 온 게 사실이다. 일부 정합성이 맞지 않는 세밀한 부분에 대해서는 관련법이나 시행령 개정에 주저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중대재해법은 ‘재해를 막아 귀한 생명의 덧없는 희생을 차단한다’는 본질적 취지 안에서 머리를 맞대고 보완 입법을 추진해야 한다. 기업의 산재 예방 노력 실질화 여부, 산재 감소 여부, 부당한 경영책임자 처벌 여부 등 법 시행의 결과를 세밀하게 따져보는 일부터 어느 것 하나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겉절이는 비교적 간단한 반찬이다. 신선한 배추와 갖은양념을 잘 버무리면 된다.. 알쓸신잡은 유희열, 유시민, 황교익, 김영하, 정재승이라는 고급스런 재료를 나영석 특유의 판깔기와 편집으로 잘 버무린 겉절이다. 혹자는 이들 출연자를 보고 방송에 등장해 인문학 르네상스를 펼치는 어벤저스 군단이라 한다 알쓸신잡, 알아도 쓸데없는 신기한 잡학사전의 줄임말이다. 파격적 브랜드 네이밍이다. 이런 황당한 줄임말이 귀에 쏙 들어오고 눈이 떨어지질 않았다. 시즌1-2가 시청률 6-7%, 시즌3가 4-5% 정도면 비지상파 채널에서 그것도 비예능인 중년 남자 출연자들만으로 이룬 대성공이다. 나에게 알쓸신잡은 알아두면 (잘난 체하는데) 쓸모 있는 신나는 잡학사전이다. 내 잘난 체에 짜증 내거나 관심 없는 것은 듣는 사람 사정이고 난 잘난 체하면서 신나면 그만이다...
최근 달라이 라마의 영어 통역자로 활동했고 스탠퍼드 대학 자비명상 프로그램의 개발자인 툽텐 진파 박사의 “공감과 자비의 과학”으로 워크숍이 있었다. 그는 달라이 라마의 말을 통역하듯이 불교수행에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점을 재구성해서 세상에 알리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 근본적 의문이 들었다, 공감과 자비의 훈련이 왜 필요할까? 공감은 타인의 감정을 느끼고 이해하는 것이다. 장자의 『인간세(人間世)』에서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들어라,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로 들어라, 귀는 듣는 것에 머물고 마음은 상징에 머문다, 기라는 것은 텅 비어 있으면서 외물을 맞이 하는 것이다,’ 라고 한 것과 유사하다. 사람은 타인이 행동하는 것을 보고 있거나 말하는 것만 듣고 있어도 거울 뉴런이 실제 자신이 그 행동을 하는 것처럼 활성화 된다, 공감을 통해 우리는 타인과 연결 될 수 있다, 자비심은 넓은 의미에서 타인의 고통을 마주했을 때 일어나는 것으로 타인의 고통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자비심의 근간에는 인간의 취약성과 보편성에 대한 이해가 있다. 영원한 것은 없다, 우리 모두는 지구상에 살고 있는 유한한 인간으로 예기치 않은 사건으로 고통받을 수 있고 모두 언젠가 병들고 죽기 마련이다, 내가 그렇듯이 다른 사람들도 고통을 피하고 싶고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바란다. 툽텐진파는 책 (두려움 없는 마음)에서 ‘자비심이 일어나면 먼저 알아차리고 무의식적으로 그 상황이 나아지기를 바라고,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을 돕고 싶다는 마음을 행동으로 옮긴다“고 한다. 공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최근 국제명상엑스포에서 독일의 신경과학자이자 심리학자인 타니아 싱어는 흥미로운 연구를 발표했다. 연구 중 티벳승려들을 대상으로 아이들의 굶주리고 고통을 받고 있는 장면을 비디오로 보여주며 뇌자기공명영상을 촬영하였는데 공감은 자비와 뇌가 활성화되는 부위가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다. 공감할 때는 고통과 관련 부위가 활성화되고 자비심은 뇌의 긍정적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부위가 활성화되었다. 고통에 대한 지속적 공감은 소진을 불러오지만 자비심은 그렇지 않다. 공감을 넘어선다. 그녀는 9개월의 자비심 훈련 과정 후에 주의력이 향상되고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티솔 호르몬의 분비가 유의하게 감소했다고 보고한다. 자비심 훈련은 주관적 스트레스 느낌과 별개로 스트레스 호르몬이 감소해 몸의 건강에 직접 도움이 된다. 자비는 자신에게도 향하는 것이 조화롭다.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기’ 위해서도 그렇다.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익숙해진 수치심과 자기비난때문일까? 많은 이들이-한 연구는 무려 78%이다- 타인에 대한 자비를 보내는 것이 자기에 보내는 것 보다 쉽다고 한다. 자기자비는 자신에게 친절을 보내고 마음챙김으로 자신을 돌본다. 지금 여기에서 내가 겪는 고통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닌 인간이 보편적으로 겪는 큰 맥락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통찰한다.
셀럽(Celeb). 젊은 세대에겐 일상화된 말이지만 기성세대에겐 익숙지 않은 말이다. 셀러브리티(Celebrity)의 줄임말이다. 우리말로 유명인이다. 언론이 본질적으로 좋아한다. 독자·청취자·시청자를 모으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언론은 광고로 보상받고, 셀럽은 유명세를 더욱 공고히 한다. 반면 뉴스의 질은 곤두박질한다. 최고의 셀럽 중 한 명이 진중권이다. 그의 한 마디는 놓쳐서는 안 될 취재원으로 둔갑됐다. 언론의 짝사랑 정도를 알아봤다. 지난 한 달간(5월 20일-6월 19일) 네이버 뉴스에서 ‘진중권’이란 키워드를 넣고 검색했다. 세계일보 37건, 중앙일보 34건, 국민일보 32건, 조선일보 22건(주간조선 6건 별도), 문화일보 18건, 서울신문이 10건을 기사화했다. 이어 한국일보가 5건, 경향신문, 동아일보, 내일신문이 각각 1건이었다. 한겨레만 한 건도 없었다. 이중에는 16일 자 중앙일보 안혜리 논설위원의 칼럼처럼 진중권의 발언을 질타하는 경우도 있다. 진중권은 김건희 여사가 지인을 대동해 봉하마을을 방문한 데 대해 비선논란이 제기되자, 14일 CBS 라디오 ‘한판승부’에 출연, “공식적인 자리에 비공식적으로 사인의 도움을 받는 것이 뭐가 나쁘냐며, 이런 식이면 예수도 잡아넣을 수 있다”고 했다. 안 위원에게 비판은 받았지만 노이즈 마케팅은 크게 성공했다. 진중권 발언 받아쓰기가 문제가 되는 것은 발언 내용의 옳고 그름 때문이 아니다. 언론의 천박한 취재원 인용 때문이다. 2018년, 한국의 주요 일간지와 해외 유력 일간지를 비교한 의미 있는 책 한 권이 출간 됐다. ‘기사의 품질’(이화여대출판부)이다. 이 책의 4장을 조선일보 출신의 고려대 박재영 미디어학부 교수와 동아일보 출신의 연세대 이나연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가 공동 연구했다. 취재원 활용 방식을 분석해 기사의 품질을 평가했다. 국내 주요 일간지의 1면 기사에 포함된 취재원 수는 평균 3.33개로 뉴욕타임스(14.14개)의 23%에 그쳤다. 한국언론이 취재를 게을리하거나 기사의 깊이가 없다는 반증이다. 취재원 수 뿐만 아니라 투명성도 문제였다. 익명 취재원 이용 비율이 국내 신문은 34.3%였다. 반면 뉴욕타임스는 1.4%였다. 취재 부실에 익명 인용까지 가세해 기사의 신뢰를 떨어뜨리는 것이다. 특정인의 SNS 내용을 전달하는 기사가 유행처럼 번지면서, 인용된 취재원의 숫자를 따져 기사 품질을 평가하는 것조차 사치처럼 보인다. 마침 ‘프로보커터(Provocateur)’라는 흥미있는 책이 나왔다. ‘나쁜 관종’, 관심을 받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을 다뤘다. 연세대서 포퓰리즘을 전공하는 김내훈이 저자다. 진중권과 서민 교수가 우리 사회를 혼란케 하는 프로보커터로 나온다. 지난 5월, 서민은 진중권을 손절했다. 그 이유가 “의견이 다르면 막말하고, 예의가 없어서”란다. 그런 분을 상왕으로 모시는 언론이 부지기수다.
6·25전쟁의 그날이 오고 있다. 고요한 일요일의 평화를 깨었던 총성이 울린지도 반세기를 넘었다. 그럼에도 이 땅에는 아직도 평화가 오지 않았다. 거기에 우크라이나 전쟁은 예상과 다르게 장기화 되고 있다. 전쟁으로 파괴된 도시, 폭탄, 탱크, 피난민, 이러한 것은 국가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를 지켜보는 나의 마음에는 기억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전쟁은 다시 반복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것은 꼭 무력으로 싸운 전쟁의 경험만이 아니다. 가볍게 시작하자면 북쪽의 고난의 행군시기인 1990년대의 이야기이다. 한두명도 아니고 무리지어 정든 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전쟁과 같은 상황이 아니면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 6·25전쟁에 대해 2011년 개봉된 영화 '고지전'에서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싸우기 싫으면서 싸워야 했고, 살고 싶으면서도 맞서야 했던 것이 '고지전'이라 한다면, 북쪽 고향의 1990년대 '고난의 행군'은 죽고 싶어도 가족을 위해 죽기내기로 살아내야 했다. 유일할 방법은 도강, 탈출하는 것이다. 6·25전쟁으로 분단이 되었고 그러므로 북쪽 사람들이 많이 남쪽으로 내려왔다. 피난민들이 많이 왔으므로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우리 시댁, 우리 남편 쪽, 우리 친정 쪽 하면서, 북쪽과 인연이 되어 관심을 가지고 물어오게 된다. 어떻게 오셨어요?고 물으면 전쟁 같은 상황인 '고난의 행군' 시기를 평화롭게 답해주기가 어렵다. 전쟁 같은 상황을 평화롭게 기억하기가 어렵다. 아니면 어떻게 기억해야할지가 어지럽다. 망각해버리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아니면 새롭게 심는 것이다. 그러나 잊지도 않고 찾아오는 6월이 있어 잊을 수도 없다. 곰곰이 생각해본다. 어디부터 이야기하지. 언젠가 행사가 있어 고향 동료와 밤새워 이야기를 나눈 적 있다. 당시 상황을 물으면 동료는 그냥 헝~ 헝 소리만 내고 아무런 표현도 못했다. 나도 마찬가지로 적절한 묘사를 찾지 못했다. 동병상련을 느끼는 가엽은 친구는 그 뿐이 아니다. 기억도 전쟁이다. 거룩한 이름아래 순결을 잃은 사람들, 두만강, 매콩강에서 불귀가 된 사람들, 학대당한 사람들, 수십년을 숨죽여 사는 사람들 등 이름을 호명 할 수 있다면 6월의 붉은 장미가 떨어진들 무순 대수랴. 다음해 6월이면 다시 필 것을. 주변에는 아픈 사람이 참 많다. 모두 전쟁 같은 '고난의 행군'과 연관된 후유증이다. 그리고 그 치료법을 모른다. 전쟁의 기억법을 알고 있다면 우크라이나 전쟁은 어찌 일어나겠는가. 전쟁은 국가에 의해 일어나지만 개인에게 엄청난 피해를 준다. 개인의 삶을 송두리째 파괴하고 내동이친다.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다시는 반복되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기억하려는 것이다. '고난의 행군'은 가족을 살리는 전쟁이었다. 삶의 터전을 잃고 새롭게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부모는 무엇이든지 희생을 해야 했다. 불속으로 뛰어드는 부나비가 아니라 강을 건너 엉겅퀴숲을 지나며 길을 만드는 과정이었다. 그래서 북한이탈주민은 경계의 가시울타리를 부여잡고 해마다 6월이면 피어나는 붉은 장미이다.
요즘 도심이나 골목 편의점에서 도시락과 샌드위치가 진열대에서 잘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 도시락과 샌드위치를 구매하는 소비자가 최근 급격하게 늘었다고 한다. 글로벌 인플레이션 물결이 식당가로 밀려오면서 직장인을 중심으로 상대적으로 저렴한 편의점의 한끼를 선택하기 때문이다. 회사 근처에서 평범한 점심을 하려해도 1~2만원은 기본인데 비해 편의점의 도시락 가격은 보통 5000원 안팎이고 샌드위치는 2500원 내외다. 서민들과 직장인, 특히 영끌‧빚투족이 고물가‧고금리에 직격탄을 맞고 있다. 지난주 미국 중앙은행 연방준비제도(Fed‧연준)는 인플레이션에 맞서 28년 만에 자이언트 스텝(0.75% 포인트 기준금리 인상)을 단행했다. 하지만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연준 자료를 인용해 연준이 올 연말까지 제시한 3%대(현재 1.5~1.75%)에서 4~7%까지 더 강력한 금리 인상이 필요하다고 보도했다. 인플레이션 상황이 그만큼 불투명하고 심각할 수 있다는 얘기다. 한국의 지난 5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5.4%이고, 6월 물가상승률은 1997년 IMF위기 이후 최고치인 6%대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정부는 올 경제성장률 예상치를 종전 3.1%에서 2.6%로 하향 조정했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은 한국의 국가경쟁력이 평가 대상 63개국 중 27위로 지난해보다 4계단 내려갔다고 발표했다. 재정적자가 늘고 연금 적립금은 줄어드는 등 재정 여건 악화 등이 영향을 미쳤다. 비상한 시기다. 윤석열 새정부는 지난 16일 향후 5년간의 장·단기 경제정책 밑그림을 담은 이른바 ‘윤노믹스’를 내놨다. 민간주도와 규제 개혁을 두 축으로 성장동력을 확보하겠다는 계획이다. 이와함께 법인세 인하와 종합부동산세 경감, 연금과 공공, 노동, 교육, 금융 구조개혁 등 포괄적인 내용을 담았다. 문제 인식과 방향에서는 긍정 평가할 만하다. 우선 발등의 불인 고물가부터 대처해야 한다. 원자재 확보 등에서 공급망 다변화를 통해 리스크를 줄여나가야 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우리 경제가 지향해야 근본적인 처방은 기초체력을 확실히 다지는 일이다. 가장 시급한 게 규제개혁과, 노동, 연금 개혁 등이다. 하나같이 지역이나 노사, 세대 등의 이해충돌이 발생하는 험난한 과제다. 이것이 해결되지 않는 한 인구까지 감소하는 대한민국의 미래는 더이상 기대할 수 없다. 그런데 더 큰 난관은 정책방향의 추진동력을 확보하는 일이다. 당장 더불어민주당은 법인세 인하와 종합부동산세 경감 등에 대해 ‘대기업특혜와 부자감세’라며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거대야당의 동의가 있어야 실행력을 갖게 된다. 그런데 21대 국회 후반기 원구성, ‘산업부 블랙리스트’와 ‘성남시 백현동 개발’ 의혹 관련 등 수사, 전 정부 정무직 거취 논란,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까지 신‧구 권력이 전방위로 대립하고 있다. 불가피한 갈등이나 수사라 하더라도 여야 전선이 너무 넓다. ‘전선확대‧강대강’이면 피해는 국민에게 돌아간다. 전쟁중에도 막후 소통은 이뤄진다. 민주당도 지금과 같은 위기에 사회적 약자들이 더 취약하다는 것을 직시하고 기업경쟁력과 국익창출에 협력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