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럽고 유연하지만 힘이 느껴지는 피아노곡은 단연 짐노페디(Gymnopédies)다. 이곡은 프랑스 작곡가 에릭 사티(Erik Satie)의 대표작이다. 짐노페디란 무엇일까. 프랑스어 사전에서 찾아볼 수 없는 단어다. 문학을 즐겼던 사티는 플로베르의 소설 살람보(Salammbô)와 고대 그리스춤에서 영감을 얻어 ‘짐노페디’를 만들었다. “벌거벗은 아이들이 추는 춤.” 사티는 몽마르트르를 오가며 말라르메, 베를렌느, 꼭도, 피카소 등을 만나 우정을 쌓고, 카바레 ‘검은 고양이’에서 피아노를 치곤 했다. 이는 그의 음악에 큰 영향을 줬다. 주옥같은 그노시엔느(Gnossiennes)도 마찬가지다. 그리스어 ‘크노소스’에서 영감을 얻었다. 인생은 아이러닌가. 피아노에 소질이 없다는 평가를 받던 사티가 피아노의 대가가 됐으니 말이다. 사티는 노르망디 옹플뢰르(Honfleur)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 때 파리로 오지만 갑자기 어머니를 잃고 형과 함께 다시 옹플뢰르 할머니에게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할머니마저 의문의 죽음을 당하자 다시 파리로 아버지를 찾아오게 된다. 열 살 연상의 피아노 선생과 재혼한 아버지. 그 여인이 사티에게 피아노를 가르쳐 준 것이다. 사티는 주로 몽마르트르에서 살았다. 하지만 오늘날 몽마르트르에는 사티의 흔적을 거의 찾을 수 없다. 바람이 흩날리던 벌판도 사라지고 '검은 고양이'도 사라졌다. 그래서일까. 사티를 사모하는 팬들은 옹플뢰르로 몰려든다. 사티의 메종이 있는 옹플뢰르 오뜨(Haute) 거리에 세워진 사티박물관. 이 박물관은 사티만큼이나 괴상하다. 첫 방에 들어가면 먹음직스런 노란 배 모양의 큼직한 전구가 다리를 쩍 벌리고 있다. 다른 방으로 들어가면 장롱이 있고 그 안에는 사티의 물건이 가득하다. 깃이 빳빳한 와이셔츠와 우산들. 그가 생전에 수집했던 것이다. 사티는 이 물건들을 비밀의 방에 차곡차곡 모았었다. 옹플뢰르는 미술가들의 흔적도 많다. 르 아브르(Le Havre) 항구를 마주한 센 강 하구에 위치한 이 마을은 시시각각으로 반사되는 강물 위의 햇빛이 장관이다. 꾸르베, 모네, 부댕과 같은 인상파 화가들은 이곳을 화폭에 담기 위해 자주 방문하곤 했다. 하지만 옹플뢰르의 대장주는 역시 비외 바쌩(Vieux bassin: 옛날 항구)과 리외트낭스(Lieutenance)다. 돌판 지붕의 촘촘한 집들이 물 위에 투영된 장면은 신비 그 자체다.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포석이 깔린 골목길들, 골조가 보이는 무수한 노르망디식 건물, 희한한 레스토랑, 아름다운 가게들, 매혹적인 호텔들과 예술적인 기념물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탄성을 지르게 한다. 우산을 쓴 채 이 골목을 걸으며 짐노페디를 듣는다면 그보다 더 행복한 순간이 있을까. 만약 헤어진 연인이 그립다면 주 트 붜(Je te veux: 나는 너를 원해)도 좋다. 어느 쪽이든 당신의 맘이다.
코로나 사태가 델타 변이 등의 등장으로 장기화 되면서 자영업자들의 삶은 더욱더 피폐해 지고 있다. 목숨을 끊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한, 두 번이 아니다. 한편, 오히려 이 시기에 부유한 이들은 더욱 부유해졌다는 뉴스도 있다. 인간이 평등하다는 것을 부정하는 이는 없고, 각 개인의 다양한 삶이 인정되는 시대지만, 이런 식으로 특정 계층 사람이 죽음을 쉽게 겪는 사회적 다양함이란 공정한 것 같지 않다. 아니 인간이 평등한 시대라고 하지만, 우리 인간 사회가 결코 평등한 것 같지 않다. 그런데 공정한 과정으로 돈을 벌었다면, 그/그녀가 고액을 지불해 비행기 일등석에 타서 좋은 대우를 받는다고 불공정하다고 말하지 않는 것처럼 다양한 형태의 삶이 있는 인간 사회에서 평등함이 자리 잡으려면 공정해야 한다. 일등석과 일반석을 인정하듯이 이때의 공정이란 다양..
“지난해 6월 기준 공무원 1인당 맡아야 하는 주민 수는 경기도가 3083명, 서울시가 844명으로 경기도가 무려 4배가 더 많아 도민에게 마땅히 돌아가야 할 행정서비스의 질적 저하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이는 경기도의회 김봉균 도의원이 지난 15일 열린 제354회 임시회 제4차 본회의에서 한 5분 자유발언이다. 전국 최대·최고 규모 지방정부의 위상에 걸맞은 조직 규모 격상이 필요하다는 것인데 그의 주장에 공감이 간다. 실제로 지난 8월 기준 경기도의 인구는 1387만 명인데 서울시 인구는 978만 명이었다. 무려 400만 명이 넘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400만 명은 강원도, 전라북도, 제주도 인구수를 합친 것이다. 지역 내 총생산도 서울시보다 경기도가 많다. 그런데 앞에서 짚은 것처럼 공무원 1명이 맡아야 하는 주민 수는 서울시의 4배다. 게다가 오세훈 서울..
1. 올해 처음으로 국민의힘 지지율이 더불어민주당 지지율을 앞질렀다는 여론조사가 나왔다. 언론은 국민지원금 선별지급 문제, 국민의힘 대선후보 경선 컷오프 돌입 등을 원인으로 든다. 후보 경선 밴드웨건 효과로 따지자면 민주당이 주목도나 흥행효과 등에서 압도적 우세를 보이고 있다. 그러니 위의 원인분석 중 후자는 타당성이 낮다. 하지만 일파만파로 퍼져나가는 국민지원금 하위 88% 지급 논란은 다르다. 현재 민주당 지지율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지금과 같은 신자유주의적 코로나 위기대처 정책이 계속되는 한 앞으로도 악영향을 미칠 것으로 판단된다. 하위 88퍼센트로 끊은 지원금 선별지원의 (건강보험료 기준 산정의 비 적절성 등) 절차적, 실무적 난맥상 때문에 상위 12퍼센트에 포함될 수 없는 지원 제외자가 양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내년 3·9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추석을 맞았다. 민주당은 후보 경선이 중반전에 돌입했고, 야당인 국민의힘은 초반 레이스가 진행 중이다. 여당의 경우는 어느 정도 윤곽이 좁혀지고 있지만 국민의힘은 고발사주 의혹 등 변수들로 경선 구도가 매우 혼란스럽다. 2년 차의 코로나 여파로 예전 같은 한가위의 민족 대이동은 아니지만 닷새간의 연휴라서 적지 않은 친지들간 왕래가 예상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내년 대선이 화제에 오르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번 추석 민심은 6개월도 남지 않은 대선 향배에 중대한 분수령이 될 가능성이 높다. 국민들은 차기 대통령감으로 어떤 자질을 기대하고 있을까. 국민들의 마음은 무겁다. 코로나 2년 차가 주는 버거움에다 추석 한가위가 주는 잠깐의 넉넉함과 기쁨도 여의도 정치권이 블랙홀처럼 앗아가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한가위는 달빛이 가장 좋은 날이다. 아주 큰 보름달이 가을의 중간에 있다고 한가위이다. 햇볕의 도움으로 가을이 완성될 텐데 조상들은 어둠 속 달빛이 가장 빛나는 날 ‘中秋之月’를 한가위라고 했다. 가을의 중간이라고 하지만 초가을이다. 옥수수는 아직 여물지 않았고 벼는 지금부터 누릿해진다. 그럼에도 햇곡식을 조상들에게 먼저 드린다. 둥그런 보름달과 다시 일그러질 달의 인력(引力)을 보면서 떠나간 사람을 그리워하며 술 한잔 마시는 날이다. 고향에서도 한가위를 즐긴다. 한가위라는 말보다는 추석이라고 했다. 농촌에 시집간 언니가 햇 곡식을 가져오면 그것으로 제상을 차리기도 한다. 지나간 시간들이 지금의 생활에 비하면 가난하고 가난해서 어느 때가 나았다고 말할 수 없지만 그래도 추석에는 풍성했다. 추석에는 남쪽처럼 공휴일이 있고 배급이 공급될 때는 식용유에 돼지고기가 배정되었다. 미 공급에는 그런대로 밭에 풋 강냉이가 있었고 주런히(나란히) 붙어있는 하모니카 집들에는 덕대에 올린 포도가 익었고 지붕에는 둥그런 호박이 있었다. 고향에서도 남쪽과 마찬가지로 추석에는 송편을 빚는다. 북쪽 고향의 송편은 반달 모양으로 아주 크게 빚는다. 소나무 가지에 붙은 가시바늘 같은 잎을 뜯어 바닥에 깔고 송편을 주런히 세워놓고 찐다. 함흥과 원산의 중간지점에 있었던 내 고향에서는 송편 속으로 팥이나 줄 당콩을 넣는다. 함경북도와 량강도 지역에서는 양배추나 채소를 넣어 송편을 빚는다. 이것을 입쌀(쌀)만두, 또는 밴새라고도 한다. 중국 도문에 있을 때 처음으로 무를 넣은 송편을 먹었는데 그 맛이 팥을 넣은 것보다 훨씬 좋았다. 탄수화물과 식이섬유가 어우러져 씹는 식감이 절묘해 궁합이 잘 맞는다. 한가위에 고향에서는 남쪽처럼 늘어선 귀향길은 없고 대부분 가까운 곳에 조상의 묘를 두고 있다. 아침에는 정성스럽게 만든 음식에 깨끗한 보를 씌워 산소를 찾는다. 간단하게 식을 올리고 끝나면 그 자리에서 음복을 한다. 산소 근처를 지나는 사람이 음식을 요구하면 그냥 주어야 복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저녁에는 반달 모양의 송편을 먹으며 한가위를 즐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 같아라’는 말처럼 이날만큼은 누군가에게 나눌 것이 있는 유일한 날이기도 하다. 코로나19로 올해에는 고향으로 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예측할 수 없는 바이러스로 추석이 예전 같지는 않다. 바이러스가 사라지면 다시 고향으로 가겠지만 죽어서도 살아서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추석이라 딱히 갈만한 곳도 없고 망향제를 지내려 먼 거리를 다녀오기도 귀찮아진다. 한가위라고 마음까지 풍성한 건 아니다. 마음의 반쪽을 잃은 사람들에게 한가위는 온전히 채워지지 않은 반가위이다. 고향으로 갈 수 없으니 휘영청 밝은 보름달을 보며 조상님과 대화하는 날이다. 한가위에는 반달 모양의 송편을 먹으며 술 한잔에 취하는 날이다.
한국 은둔형 외톨이 부모회란 단체에서 강연 요청을 받았다. 예전에 부모와 자녀 관계에 대한 책을 한 권 썼는데, 그 책 내용을 가지고 비대면 화상 강의를 부탁한다는 말씀이었다. 우리나라 19세~39세 연령대에서만 37만 명이 있을 것으로 추산되는 은둔형 외톨이는 본인과 가족에게만 맡겨둘 수 없는 사회적 문제가 됐다. 빨리 전문가 상담을 지원해서 그분들이 사회적 관계를 회복하도록 돕는 게 필요하다. 하지만 이런 분들의 아픔과 자활 방법을 따로 공부한 것도 아니고, 본인과 가족의 고통에 대해 무엇을 아는가 싶어서 여러 번 고사했다. 그러다 강연을 수락한 것은 ‘선택하지 않는 선택’도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어서였다. 트롤리 딜레마란 사고 실험이 있다. 지금 전차가 달려오고 있는데, 다섯 명이 선로에 묶여 있다. 그냥 두면 다섯 명 모두 희생될..
여자의 마른 장작 같은 발목이 리어카를 민다 리어카에는 납작해진 종이상자와 고물이 어린 식구(食口)들처럼 모여 앉았다 지붕 없는 지상의 방 한 칸 칭얼거리는 폐허를 발목이 밀고 간다
아플 때는 마음이 무겁고 절박하기 때문에 의사의 말 한마디에 안심과 걱정이 교차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의사의 말은 가치중립적이고 방어적이다. 아마 환자의 과한 해석을 방지하고 만약의 경우에 대비한 표현이라 짐작한다. 환자가 의사를 신뢰하면 치료효과가 높아짐은 당연하다. 명의의 조건에는 의학적 치료능력뿐만 아니라 환자와의 공감과 소통능력이 큰 몫을 한다. 의사의 환자에 대한 공감 없이는 진정한 소통이 이루어지기 힘들다. 과학인 의료에서도 의사와 환자의 소통이 이렇게 중요하다. 바야흐로 대선을 앞두고 정치의 시대가 만개하였다. 정치는 말로 시작해 말로 끝난 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치언어가 다 킹스스피치일 수는 없다. 소속정당과 이해집단의 이익을 대변하면서 자기에게 유리한 여론결집을 위해서 선동할 수도 있고 편을 가를 수도 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정치는 대화, 타협을 통하여 갈등을 조정하고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과정이지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고 문제를 꼬이게 만드는 행위가 아니다. 국정감사 시 본인은 면책특권 속에 숨어서 아니면 말고 식의 폭로를 통해 주목효과를 높이고 거기서 생기는 피해와 인격적 살인은 나몰라라 하는 의원들 많이 봤다. 저급한 언어폭력이자 부도덕이고 갑질이다. 언어는 있는 상태를 말하는 설명적 언어와 소통형 언어로 나눌 수 있다. 정치에 중요한 건 소통형 언어다.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처칠은 노벨평화상이 아니라 문학상을 받았다. 아마 그의 유려한 언어와 유머가 전쟁으로 고통받는 영국민의 마음을 통합해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끄는데 기여했을 것이다. 미국이 이라크 전쟁으로 국론이 분열되었을 때 오바마는 전쟁을 찬성하는 사람도 애국자이고 전쟁을 반대하는 사람도 애국자라면서 국민적 여론을 통합해 나갔다. 이것이 바로 소통형 언어의 전형이다. 객관적 논리가 있는 로고스와 감성적 동조가 이루어지는 파토스 그리고 그 말을 하는 사람에 대한 신뢰인 에토스가 결합되었을 때 말에 힘이 실린다. 2500년 전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사회는 같은가 보다. 정치인에게 이런 언어를 바라고 싶다. 막말이나 두리뭉실 말 돌릴 여지 넘치는 언어는 듣고 싶지 않다. 국민과 공감하고 소통하는 품격 있는 언어가 듣고 싶다. 대선을 앞두고 아직까지 정치언어는 과거의 잘못을 비난하는 수렁에 빠져 미래에 대한 비전을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검증이라는 미명 하에 편 가르기의 틀에 갇혀있다. 우리의 미래를 준비하는 선거다. 과거의 단죄를 위해 투표하는 것이 아니다. 누구는 어떤게 문제다 말고 난 미래에 이렇게 하겠다는 말이 공수표라도 넘쳐나면 좋겠다. 편 가르고 욕하다 세월 간다. 야당도 여당의 실정과 잘못에 따른 반사이익만 취하지 말고 그 잘못된 점을 어떻게 해결하겠다는 미래의 언어를 보여줘야 여당이 될 수 있다. 본인도 자유롭지 못하면서 계속 현정권의 실정만을 부각하는 어떤 후보자의 입에선 오늘 살고 죽을 사람처럼 내일의 이야기가 한마디도 안 나온다. 여당이라 하여 후보자의 언어는 크게 다르지 않다. 50.1% 확보에 대한 정치공학적 접근보다 70, 80 %가 공감할 수 있는 비전을 제시하면 좋겠다. 진영과 내편만을 위한 정치언어, 이제 정말 지겹다.
막내가 왔다. 현관문이 삑삑거리기 시작한 것은 자정 무렵이었다. 캐리어 가득 빨래를 챙겨 온 막내는 씻기도 전에 ‘배고파’를 연발했다. 삼분이나 걸렸을까. 초스피드로 씻고 털고 말린 막내는 팬티 바람에 식탁에 앉았다. 자다가 불려 나온 막내의 엄마는, 그러니까 내게 주인 되는 분께서는, “미친 놈, 시간이 몇 신데”를 연발하면서 밥상을 차렸다. 막내는 양푼에 밥을 비벼가며 냉장고 잔반을 처리했다. 고추장 냄새는 알싸하고 들기름 냄새는 달달했다. 아내는 맞은편 식탁에 앉아 꾸벅 졸았다. ‘꾸벅’과 ‘꿀꺽’이 식탁을 사이에 두고 상봉하였다. 나는 멀찌감치 떨어져(사회적 거리두기와 상관없이) 모자의 상봉을 관전했다. 다행히 막내의 엄마는, 그러니까 내게 주인 되는 분께서는, 별다른 지시를 내게 하명하지 않았다. 코로나 시대의 청춘은 애달프다.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