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를 하면서 학생들에게 받은 편지가 족히 수백 통은 넘어간다. 내가 인기 많은 교사여서 편지를 받는 건 아니다. 스승의 날이 되면 작년에 담임했던 아이들이 자기 교실에서 스승의 날 행사로 편지를 써서 교실로 가져온다. 학년이 끝날 때쯤에 편지를 주고 떠나는 아이들도 가끔 있다. 교사를 하다 보면 연례행사처럼 편지를 받게 된다. 편지에는 보통 공부를 가르쳐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이나, 올 한 해 재밌었다는 말이 적혀 있다. 때로는 선생님의 건강을 기원하기도 하고, 말을 잘 안 들어서 죄송하다, 그동안 말썽꾸러기들 때문에 고생 많이 하셨다는 이야기가 구구절절 쓰여 있을 때도 있다. 아주 가끔이지만 지금 괴로운 일을 겪고 있다는 내용의 편지가 올 때도 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생활하는 게 대동소이하니까 편지의 내용도 비슷비슷해진다. 나를 잊지 않고 편..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가 오는 26일 기준금리 인상 여부를 논의한다. 또 미국에서는 이날(현지시간)부터 세계 주요 은행가, 정책 입안자 등이 참석하는 잭슨홀 미팅이 열려 테이퍼링(자산매입 축소) 시그널에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지난해부터 세계 각국들은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한 경기 위축을 방어하기 위해 저금리를 포함한 유동성 확대 정책을 펴왔다. 그러나 이제는 미국을 중심으로 고용이 회복되고 인플레이션 요인이 증대되면서 유동성을 회수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다. 우리나라는 상반기 물가가 급등하며 올해 물가가 2%를 넘을 것으로 전망되는 데다 1800조 원대에 이르는 가계부채와 집값을 잡기 위해서라도 금리인상에 대한 필요성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한국은행은 이주열 총재가 지난 6월 "한 두 차례 금리 올려도 긴축이 아니다“며 지속적으로 금리 인상 신호를 알렸다. 물론 코로나 델타 변이의 확산에다 반도체 업황의 둔화 등이 맞물려 한은이 이번 금통위에서 바로 금리를 올릴지는 예단할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미 세계적인 유동성 축소 움직임에다 이로 인한 원·달러 환율이 최근 가파르게 오르고 국내 증시도 외국인의 매도세가 이어지면서 금리 인상을 강하게 압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난주 코스피는 7개월 만에, 코스닥은 11개월 만에 가장 큰 주간 낙폭을 기록하는 등 G20 국가 중에서도 성적이 가장 좋지 않았다. 이 같은 복합적인 상황 속에서 금융당국이 먼저 가계 대출에 고삐를 죄고 나섰다. 가계대출 목표치를 초과한 농협은행이 이미 지난 19일부터 신규 대출을 중단한 것을 비롯해 다른 은행과 저축은행 등 제2 금융권도 잇따라 대출 중단 또는 한도 감축에 동참하고 있다. 나아가 일부 은행들은 대출 수위를 조절하기 위해 자체 금리를 조정하고 있다. 주요 시중은행의 대출 금리는 이미 지난 1년 사이에 1% 포인트 가까이 뛴 것으로 나타났다. 여기에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인상하고, 은행에 대한 금융당국의 ‘가계대출 조이기’가 더욱 강화되면 은행의 대출금리 상승 속도는 더 빨라질 것이다. 코로나 변수에도 불구하고 물가 상승과 부동산 폭등, 가계부채 폭증, 환율 상승, 임박한 미국의 테이퍼링 등을 감안할 때 금리인상 대출 조이기 등 유동성 축소는 불가피한 흐름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번처럼 갑작스럽고 전면적인 금융당국의 대출 옥죄기는 소상공인이나 ‘영끌’ 주택 구입자 등 금융 취약 계층에게 직격탄이 되면서 경제에 또 다른 충격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걱정이다. 특히 대출 규제로 집값이 안정되면 다행이지만 반대로 금융 약자만 벼랑 끝에 내몰리는 경우다. 자체적으로 현금 보유 능력과 생태계를 구축하고 있는 자산 강자들에게는 ‘통화 긴축발작’이 올 경우 오히려 먹잇감을 찾는 기회가 된다는 게 돈의 본능이다. 미국이 테이퍼링을 한다고 하면 신흥국의 주식시장·환율이 더 크게 요동치는 것과 비슷한 흐름이다. 그래서 집값을 잡으려는 목적이라면 반드시 주택 공급이 병행돼야 한다. 정부나 통화 당국은 유동성 축소가 또 다른 자산 양극화 추락을 불러오지 않도록 서둘러 보완책을 마련해주길 바란다.
아프가니스탄이 20년 만에 탈레반의 수중에 떨어졌다. 자국의 이익 없는 전쟁은 하지 않겠다는 바이든 대통령의 발표가 있은 후, 미군이 철군 결정이 내려지자마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아슈라프 가니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은 서둘러 조국과 시민을 버리고 탈출했으며 정부의 고위 관리들도 다른 나라로 줄행랑을 쳤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규군이 탈레반을 피해 부리나케 도망가는 모습은 오히려 자연스러워 보였으며 시민들은 군인들에게 돌을 던졌다. 탈레반은 1996부터 2001년까지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했던 극단적 이슬람 근본주의 집단이다. 이슬람 교리에 충실한 이들은 여성의 사회 참여를 가혹하게 제한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여성의 교육과 취업을 금지하고 부르카로 온몸을 가리고 동행하는 남성이 있어야 외출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인격체로서의 권리..
인생은 운동이다. 따라서 인생의 행복은 어떤 일정한 형태가 아니라 좋은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그 방향은 자신에 대한 봉사가 아니라 자신을 보낸 자(신)에 대한 봉사이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행복과 쾌락을 권력 속에서 찾고, 또 어떤 사람은 학문에서, 또 어떤 사람은 육욕에서 찾는다. 그러나 참으로 행복에 가까이 다가간 사람들은, 행복이란 특정한 일부 사람들만 소유할 수 있는 것 속에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인간의 참된 행복이란 모든 사람이 차별이 없고 부러워할 필요도 없이 다 함께 소유할 수 있는 것이며, 누구나 스스로 잃어버리려 하지 않는 한 잃어버릴 수 없는 성질의 것임을 알고 있다. (파스칼) 행복이란 인간이 자기 개인을 위해 바라는 것이고, 선복(善福)은 모든 사람과 함께 자신에게 바라는 것이다. 행복은 투쟁을 통해 얻을 수 있고..
홍범도 장군이 서거 78년 만에 귀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최고의 예우로 그를 맞이하였다. 그동안 멀리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에 묻혀 계시던 전설적 인물인 홍 장군이 해방된 지 76년이 지나서야 고국 땅을 밟게 되신 것이다. 아직 시신이 발굴되지 못한 안중근 의사와 달리 그의 후반부 삶과 죽음을 알고 있기에 이제라도 모셔온 것에 만시지탄이지만 부끄러움을 면한 심정이다. 홍범도 장군은 평양 출신으로 군 나팔수 생활, 승려 생활과 포수시절의 이야기들이 전설처럼 회자되어 왔었다. 그가 본격적으로 의병활동을 한 것은 1895년의 단발령을 계기로 함경도 안변의 학포라는 곳에서 14인의 동료와 함께 하면서였다. 주로 강원도와 함경도 산악지대를 배경으로 살던 포수들을 규합해 의병을 조직한 홍범도 부대는 400명에서 많게는 1400명까지 있었다고 하니..
침구학에 아시혈이라는 경혈개념이 있다. 눌러보았을 때 환자가 아파하거나 민감하게 반응하는 자리를 가리키는데 아(阿)는 ‘아~ ’라는 고통스러운 신음의 음차이고, 시(是)는 ‘여기다’라는 뜻이다. 낯선 단어이지만 뜻은 친숙하다. 아시혈의 용어를 처음 사용한 당대(唐代)의 명의 손사막은 그의 저서 (천금방)에서 “눌렀을 때 깊은 곳에서 통증이 느껴진다고 하면, 함요처가 아니라도 그 자리가 혈자리가 된다. 그 자리를 자극하면 시원하다고 하거나 혹은 아파하기 때문에 아시(阿是;아, 거기예요.) 하는 곳”으로 침과 뜸치료를 하면 효과가 있다고 말하며 아시혈이라고 부른다고 설명한다. 조선시대 침구명의인 허임 – 400년 전의 조선과 현재를 오가는 인기리에 방영된 사극 (명불허전)의 모델이 된 실존인물이다. 김남길이 허임역을 맡았다- 의 저서 (침구..
- 보고서 <조선의 혁명운동> “빨치산이 서부 간도 지방에서 소대로 나뉘어 무장을 기도하고 있는 사이에, 북부 간도 지구 민중은 장래의 대규모 전쟁을 위한 준비에 집중적으로 종사하고 있었다. 전부 2개 사단의 완전히 무장된 강력한 일본군에 직면하여 적어도 10회에서 9회까지 적을 철저하게 패주 시킬 수 있었던 것은 놀랄만한 일이다.” 무슨 전투를 말하고 있는 것일까? “청산리, 봉오동 등등에서의 엄청난 한인들의 승리는 가장 현저한 두세 가지의 사례일 뿐이다. 그곳에서 일본군의 전위는 압도적인 피해를 입었다.” 이는 <조선의 혁명운동>이라는 제목의 보고서 일부이다. 때는 1922년 1월 24일, 보고 현장은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 피압박 민족대회”였다. 우사(尤史) 김규식 박사가 한국대표단 수석대표 자격으로 조선의 독립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그 자리에는 양대 대첩(大捷)의 주인공 홍범도 장군도 참석하고 있었고 한국대표단은 52명으로 전체 대의원의 3분의 1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많았다. - “극동피압박 민족대회”의 김규식 김규식은 러시아 입국 조사표에 자신이 구사할 수 있는 외국어를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 중국어, 일본어 6개국어로 적어 놓았고 소속은 이르쿠츠파 고려 공산당으로 기록했다. 그가 대표단 수석대표로 선임된 것은 모스크바로 가는 열차 안에서였고 극동민족대회 의장단에 여운형과 함께 포함되었다. 김규식은 이미 1919년 1차 세계대전을 마무리하는 파리강화회의에 참석, 외교 역량을 발휘한 경험이 탄탄했다. 그런데 그는 파리강화회의에서 제국주의 국가들의 민낯을 보면서 반제국주의 전선에 관심을 갖기 시작, 모스크바의 이 대회에서는 “세계제국주의 체제를 재로 만들어버릴 불씨를 얻고자 기대한다”라는 맹렬한 연설까지 한다. 한국대표단들은 레닌, 트로츠키와 만났고 독립운동 지원을 약속받으며 홍범도는 레닌으로부터 특별히 권총을 선물받아 허리에 차고 다니게 된다. 1920년대는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1차 세계대전의 본질인 식민지 점령 전쟁이라는 틀이 뒤흔들렸고 식민지 민중들은 새로운 혁명적 변화에 대한 기대가 드높았던 시기였다. 당시 조선의 정세는 1919년 3·1 만세 운동이 독립투쟁의 차원 다른 돌파구를 여는 힘을 발휘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사실 3·1 만세 운동도 김규식의 파리 강화회의 참석 전에 조선민중의 독립의지를 온 세상에 천명하자는 계획과 결합하여 준비되었던 것이었다. 그러니 봉오동, 청산리 전투의 승리는 그로부터 3년 뒤인 1922년 모스크바 극동 피압박 민족대회에서 한국대표단의 외교적 위상을 높이는 데는 그야말로 최고였다. - 최초의 일본 정규군 격파와 일찍 마련된 준비 봉오동 전투는 1920년 6월 7일 대대병력에 달하는 일본군 월강추격대를 대패시켰고 청산리 전투는 4개월 뒤인 1920년 10월 21일부터 일주일간 벌어졌던 일본의 독립군 토벌부대 격파였다. 이 두 전투는 기본적으로 일본 정규군과 싸워 대승을 거둔 최초의 전쟁이라는 점에서 1919년 3.1 이후 뭔가 새로운 돌파구를 열망하며 기다리고 있던 조선사람들의 기세를 엄청 드높여 주었다. 거기에다가 만주라고 불린 동북지역에서 각기 독립투쟁을 하고 있는 부대들의 “연합작전”이었다는 점 역시도 주목해야 한다. 청산리 대첩은 그 결과였다. 그런데 이런 승리가 쉽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고된 과정이 있게 마련이다. “여러분 기체 만강하옵신지 우러러 문안드리옵니다. (중략) 러시아제 오연발 한정에 삼십원 정가를 한다고 하니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홍범도 장군이 군자금을 모으는 과정에서 보낸 편지의 한 대목이다. 그리고 이 편지를 받는 이들은 동북지역 한인촌 유력자들이었다. 이 토대가 없이는 만주 항일투쟁은 불가능했고 이 지역이 독립전쟁 기지가 될 수 있는 가능성 또한 없었다. 이는 미래를 일찍 내다보고 준비했던 이들의 원려(遠慮)가 있었던 덕이다. 조선이 일본에게 강제병합되기 전인 1907년, 안창호가 중심이 되어 공화주의 이념을 실현하고자 하는 비밀조직 “신민회”가 결성된다. 일본에 의한 대한제국 군대 해산이 이루어진 직후였다. 이때 이들은 ‘독립전쟁’을 위해 해외 독립군 기지 개척과 독립군 창건 문제를 최초로 검토한다. 이를 본격화한 것은 <중국 동북지역 독립운동사>를 쓴 장세윤에 따르면 의병전쟁이 쇠퇴기에 들어선 1909년 즈음이라고 한다. 이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독립전쟁”이라는 무장 항일투쟁의 노선이 독립운동의 중심에 서게 되는 출발이었기 때문이다. 이 구상에 따라 조선의 명망가들이 연변으로 집단이주가 시작되었고 용정은 민족교육의 중심으로 떠오른다. 윤동주가 이 용정 명동촌 출신이라는 것도 우연이 아니며 이곳 출신들은 항일 독립전쟁에 적극 기여한다. 한국의 세계적 신학인 “민중신학”의 주도자들인 문익환, 문동환 형제, 안병무 등도 모두 이곳 태생이라는 사실 역시 우연이 아니다. 교육과 독립전쟁 그리고 이후 이 모든 성과를 외교적 자산으로 만드는 작업까지 포함해서 조선인들의 독립과 자주의 역량이 되어갔던 것이다. - “독립전쟁사”를 보라 미주(美洲)를 포함해서 지역적으로 크게 나누어 보면 국내 독립운동, 중국에서 벌어진 독립운동, 동북지역(만주)에서 전개된 투쟁 등이라고 할 수 있는데 각기 발전하던 이 흐름이 독립전쟁 전체의 기운을 만들어내고 있던 것이다. “독립전쟁”이라는 개념을 계속 주목하는 까닭은 우선 이 단어를 별로 쓰지 않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자는 뜻과 함께 여기에 담긴 민족적 의지와 힘은 독립운동이라는 말로는 담지 못하는 위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독립전쟁사”를 거론할 때 우리사회에서 잘 언급하려 들지 않는 것은 “동북항일연군”의 존재다. 이는 중국 공산당과 연대해 활동했다는 것과 북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그런 측면이 있다. 그런데 제2군의 경우 절반가량이 조선인들이었고 김일성이 이끄는 제3사 병력은 거의 모두가 조선사람이었다는 점에서 이 동북항일연군의 역사도 독립전쟁사에 정당하게 담겨 독립전쟁 전체의 그림을 제대로 그릴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놀랍게도 1946년에 출간된 최남선의 <조선독립운동사>에서 이미 특기하고 있다. “만주지역 조선의병만 해도 김일성, 박득법, 김선 등 명장들이 나왔고 그러다가 차차 구심점이 생겨 김일성이 통일체의 대표가 되어서 김일성의 이름은 드디어 만주 항쟁사(抗爭史)상에 나타나는 허다한 인물 가운데 가장 큰 영웅적 표상이 되었다. (중략) 김일성 군(軍)은 1936년 12월부터 갑산을 중심으로 광범위한 항일 인민전선의 결사를 조직, 보천읍 습격으로 장렬한 전투를 전개,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유격전으로 일본 정규군과 맞서 독립전쟁을 이끈 지도자들에 대한 당시 조선민중들의 존경은 이루말 할 수 없었고, 김일성의 경우는 그래서 냉전체제의 논리상 가짜 논란이 오래 벌어졌던 경우였다. 북의 독립투쟁사는 오로지 이 역사만 거론하고 나머지는 최소화하거나 배제하고 있다는 문제가 있는가 하면, 우리는 조선혁명당의 김원봉과 함께 동북항일연군의 역사를 제거해버리고 있다는 문제가 있다. 그러나 누가 이끌었든 간에 이 독립전쟁의 최전선에는 조선민중들이 있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으니 이들의 역사적 기여는 정당하게 평가받아 마땅할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독립전쟁의 기지로 역사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연변 출신 조선족에 대한 우리사회의 시선과 태도도 엄중하게 교정되어야 할 것이다. 이 시기 독립전쟁의 최종 목표는 국내 진군이었다. 말하자면 해방전쟁을 수행하는 것이 강력한 소망이었다. - 대일 선전포고의 내용 1941년 일본이 진주만 기습으로 아시아-태평양 전쟁을 감행하자 임정은 곧바로 대일 선전포고를 하면서 연합국에게 다음을 밝힌다. “한국민족이 극동의 항일전선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할 것을 자인하며 반드시 공동의 적에게 승리하자”면서 “한국정부의 승인, 항일전쟁 물자 지원, 종전 후 평화회의 개시할 때 한국 정부 대표의 참가, 국제적으로 영구적 기구 설립시 한국 참가”를 요구한다. 이와 함께 대일선전포고문에는 “1910년 병합조약 및 일체의 불평등 조약 무효를 거듭 선포한다”고 못박았다. 이는 독립전쟁의 선두에 나서서 이를 지휘했던 우리 선조들이 이후 벌어질 국제정세에 얼마나 치밀하게 준비하고 대응했는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이런 노력들이 있었기에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미국, 영국, 중국은 조선인민의 노예상태를 깊이 주목하여 마땅하고도 적절한 과정을 거쳐 조선을 자유롭고 독립적이 될 수 있도록 결의하는 바이다. (The aforesaid three great powers, mindful of the enslavement of the people of Korea, are determined that in due course Korea shall become free and independent.)”라는 문구가 가능했던 것이다. 물론 이후의 역사는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고, 임정의 대표성이나 국제회의 참여의 권리도 갖지 못하게 되고 말았지만 독립전쟁 완수 이후 어떤 조처를 준비해야 하는지, 그래서 어떤 근거를 가지고 국제적 위치를 확보할 수 있는지 명확하게 내다보았던 것이다. - “역사 독립전쟁”을 위해 1915년 일제의 조선침략사를 자세히 밝힌 박은식의 <한국통사(韓國痛史)>가 상해에서 나오고 1919년 3·1 만세혁명과 이후 무장항일 독립전쟁이 펼쳐지자 일본 총독부는 이에 대한 대응 조처를 취한다. 무엇보다도 조선인들의 의식세계를 지배하고자 1922년 “조선사 편찬위원회”를 만들고 이후 1926년에는 이를 “조선사 편수회”로 개칭, 독립기구로 세운다. 아시아-태평양 전쟁 기간 중에도 조선사 편수회 예산은 단 한 푼도 깎이지 않을 정도로 끈질기게 이 나라 역사의 왜곡 작업이 이루어져 갔고 그 폐해는 이후 식민지 사관으로 우리 교육에 깊은 흔적과 잔재를 남겼다. 이 와중에 1930년대에는 “조선학” 운동이 벌어지면서 이에 대한 역사 독립전쟁도 벌여나갔다는 점도 아울러 기억해야 한다. 역사는 독립전쟁의 중요한 한 영역이었던 것이다. 독립전쟁의 역사는 그렇다면 이제 마감되었을까? 아니다. 우리의 선조들이 기대했던 나라는 분단된 조국이 아니었으니 독립전쟁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일 수밖에 없다. 우리의 운명을 간섭해들어오는 여러 갈래의 외세와, 이들과 손잡고 특권을 유지하는 세력은 아직도 건재하고 있다. 사라진 줄 알았던 친일세력이 정치-경제-언론-교육의 중심을 아직도 틀어쥐고 있는 현실은 새로운 독립전쟁의 기세를 뿜어내야 함을 절감케 하고 있다. 그 첫째 과제로 우리의 “독립전쟁사”를 진실되게 정리해야 한다. 우리 민족정신의 기세가 사뭇 달라질 것이다. 홍범도 장군 단 한 분의 유해 귀환이 이 나라 정기의 힘을 다르게 만들고 있는 것으로도 이는 충분히 입증된다.
5년 전인가, SNS를 통해 퍼진 기괴한 사진이 있었다. 사우디아라비아 한 여대 의과대학 졸업식 사진으로 스무 명 남짓의 여성들이 눈만 내놓은 검은 부르카 위에 검은 졸업가운을 단체로 뒤집어쓰고 서있었다. 스무 명의 복제인간 같다고나 할까. 사진을 함께 보던 친구가 ‘설마 이렇게까지 하겠는가, 조작 사진일 것이다’라고 했고 나 역시 동감했다. 이슬람은 지구 상 18억 명이 믿는 보편 종교이고 불교, 기독교처럼 사랑과 자비를 내세운다. 신 앞에 누구나 평등하기에 여성 억압, 폭력은 교리에 반하는 것이며 몰상식한 행태들은 이슬람 문화가 아닌 지역별 오랜 관행이거나 어느 종교에나 있는 시대착오적 근본주의, 광신이 문제다......라는 게 내가 알고 있는 ‘오해를 걷어낸 이슬람 문화’였다. 미군 철수로 탈레반이 장악한 후 생지옥 된 아프가니스탄 실상에 전..
폭력이란 무지하고 야만적인 자가 민중들에게 그들의 본성에 어긋나는 것을 강요하기 위한 무기이다. 그러나 그 무기가 작동을 중지하면 그 효과도 중지된다. 반대로 설득은 마치 강물이 우리의 관심이나 노력 없이도 스스로 자연스럽게 흘러갈 수 있도록 기울어져 있는 강바닥과 같은 것이다. 인간의 활동을 지도하는 방법에 단 두 가지밖에 없다. 그 하나는 인간에게 그 사람의 성향과 판단과는 반대로 행동하도록 강요하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그 성향을 다스리며 이치로 설득하는 방법이다. 하나는 무지하고 야만적인 방법이므로 그 결과는 환멸뿐이지만, 다른 하나는 경험이 증명해 주는 바 반드시 성공을 거둘 수 있는 방법이다. (콩브) 강자의 권리는 권리가 아니며, 항의와 저항을 만나지 않는 동안만 권리로 통할뿐이다. 그것은 마치 난방과 조명과 지렛대가 없는..
언론개혁의 타깃은 정치권력이 아닌 언론자본권력 ‘언론중재 및 피해구제 등에 관한 법률’을 개정해 허위조작보도를 남발하는 언론사에 대해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도입하려는 데 대해 반대하는 언론노조 윤창현 위원장의 말이다. “권력 압제에 맞서 언론을 되찾아오는 게 개혁 본질이었다. 촛불정부를 자임하는 정권이 언론에 위험을 가져다줄 수 있는 법안을 이렇게 가볍게 취급해서는 안 된다.” 이 말에 대해 전북대 명예교수 강준만은 “더불어민주당이 추진하는 언론중재법 개정안을 둘러싼 논란의 핵심을 꿰뚫는 명언”이라고 추켜세웠다.(UPI 뉴스) 또 이 말에 대해 세명대 저널리즘스쿨의 심석태 교수는 페이스북에서 “항상 일관성을 보여주시는 강준만 선생님 글. 언론중재법 개정을 둘러싼 논란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있다.” 라고 칭송했다. 1987년 6월 항쟁까지 언론의 문제는 독재정권에 부역하는 언론에 대한 정치투쟁이었다. 그러나 6월 항쟁으로 독재권력이 붕괴된 이후는 스스로 권력이 되어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민주주의를 왜곡하기 시작한 언론권력에 대한 투쟁, 즉 언론개혁 시민운동으로 바뀌었다. 김중배 선언은 그러한 현실의 변화를 정확하게 짚어낸 진짜 ‘명언’이었다. 동아일보 편집국장에서 해임된 김중배 선생은 1991년 9월 6일의 환송회 자리에서 언론인은 앞으로 거대한 자본권력, 즉 권력이 된 언론자본에 대해 저항해야 할 것이라고 선언했던 것이다. 윤창현 위원장이나 강준만 선생님이나 언론법 전문가 심석태 교수가 의도하는 것은 언론중재법 개정을 정권에 의한 언론탄압이라는 프레임으로 둔갑시켜 여론을 호도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윤창현은 그래서 이명박 정권의 MBC PD수첩 탄압과 1970년대 동아·조선투위를 거론했을 것이다. 그리고 문재인 정부를 비난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는 강준만이 반색을 한 것이다. 이명박 정부의 PD수첩 탄압은 군사정권의 ‘압제’와는 다르다. 언론권력과 손을 잡고 기득권집단 공동의 목표를 위해 공조했던 것이다.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는 언론의 자유를 위축시키나? 1987년 6월 항쟁으로 민주화의 초석을 놓고 언론의 자유를 쟁취하기까지는 수많은 민주열사들의 희생이 있었다. 그 미완성의 민주화마저 짓밟는 노태우 정권에 대해 학생들이 다시 저항했던 1991년 5월의 민주화 투쟁도 있었다. 그 투쟁은 불행하게도 언론의 허위조작보도로 인해 주저앉고 말았다. 그리고 시민운동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막이 오른다. 젊은 언론학자들은 언론개혁을 위한 학술운동을 전개했고, 민언련은 시민운동단체로서의 체제를 갖추고 언론개혁운동에 돌입했다. 민언련이 이른바 안티조선(조선일보반대)운동을 주도한 것도 언론권력에 대한 저항이었다. 언론노조는 신문노조가 사실상 와해된 상태에서 방송노조를 중심으로 해서 언론민주화운동에 매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론권력의 횡포는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래서 근래 제기된 게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다. 한국언론학회 회장단은 8월 16일 “평생을 대학에서 표현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를 가르친 언론학자로서의 요구”라며 언론중재법 개정안을 철회하고 민주적 의견 수렴에 나서라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언론·표현의 자유가 위축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참으로 딱하다. 정은령 서울대 팩트체크 센터장은 8월 18일 한국언론학회가 주최한 ‘언론중재법 개정안에 대한 현안 토론회’에서 “어떤 나라에서도 언론사를 허위·조작정보 생산자로 규정하지 않는다.” 라고 주장했다. 되묻는다. 어떤 민주국가에서 언론사가 허위·조작정보를 하루도 거르지 않고 대량으로 생산해내는가? 팩트체크와 미디어 리터러시 강화가 답이라고? 그걸로 해서 가짜뉴스에 대한 ‘집단 면역’이 형성되려면 100년은 족히 걸릴 것이다. 경향신문은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에서 언론중재법 개정안이 통과된 다음날인 8월 20일 1면 톱과 3면 통으로 비판하는 기사를 실었다. ‘여당이 밀어붙이는 언론중재법, 결코 독단·독주할 법 아니다’라는 사설도 실었다. “법안에는 언론자유를 훼손·위축시키고 보도 사각지대를 키울 대목이 여전히 많다”는 것이다. 조중동 못지않은 3류 추리소설이다. 사실은 오히려 제구실을 할 수 있을지 의문스러운 내용으로 후퇴했다. 언론·표현의 자유는 인간의 본능적 욕구라고 할 수 있다. 하여 천부적 권리라고도 하고 헌법에서도 기본권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최고의 본능적 욕구인 성욕도 무제한의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다. 성폭행 범죄에 대해 엄벌에 처한다고 해서 성행위의 자유가 위축된다고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허위조작보도는 엄벌에 처해야 할 범죄행위다. 언론중재법 개정안은 허위조작보도를 근절시키기에 너무나 부족한 법이지만 일단 만들어놓아야 한다. 노회찬의 촌철살인 ‘명언’을 생각해본다. “동네에 파출소가 생긴다니까 우범자들이 싫어하는 거나 똑같은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