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촛불정부의 시대적 과제는 두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민주화와 민생안정을 구축하고 남북한 화해와 협력을 통해 민족경제를 완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득권 세력은 강력한 카르텔을 통해 민주화 과정에 완강하게 저항하고 있다. 거기에 남북 화해를 외면하는 외세도 이 과정에 한몫을 한다. 우리 민주주의가 안팎의 도전과 방해를 받아온 것은 물론 어제 오늘일이 아니다. 따라서 특권의 온존을 위해 총궐기하는 극우 분단세력의 반발을 어떻게 통제하는가가 선결과제이다. 그들의 저항은 집요하고 결사적이다. 예컨대 ‘조선일보’를 비롯한 극우 매체들이 이명박-박근혜 정부 당시 자신들이 내뱉었던 북한 원전건설 주장을 뒤집으면서까지 문재인 정부의 ‘있지도 않은’ 정책을 공격하는 것이 그 대표적 가짜뉴스 사례이다. 지난 2006년 북한의 최초 핵실험..
최근 자수성가해 거부를 이룬 재계 인사들이 잇따라 ‘통큰’ 기부를 밝혔다. 국내 최대 배달 앱인 배달의민족을 창업한 김봉진 우아한형제들 의장이 한국인 최초로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등이 설립한 기부 클럽 ‘더 기빙 플레지’(The Giving Pledge·기부 서약)에 5천억 이상의 기부를 약속했다. 이에앞서 김범수 카카오 이사회 의장도 재산의 절반(5조원 추정)을 기부하기로 했다. 갈수록 심화되는 극점의 양극화, 코로나 사태 장기화에 따른 국민들의 경제적·정신적 피로감이 최고조에 이르고 있는 시점에서, 이번 기업발 훈풍이 우리 사회 전반에 나눔 문화의 확산으로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사회 환원의 대상은 꼭 재산만 있는 게 아니다. 재능이나 일반적인 봉사도 소중한 기부다. 그러나 이 보다도 더욱 나눔 문화가 절실하고 파급력 있..
통일부 재직 시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7-8년간 소위 ‘종북좌파’라고 불리던 분들이 북한의 대남사업파트에서 일하는 분들과 나누는 대화를 엿들을 기회가 수차례 있었다. 필자도 반공을 국시로 삼던 시대에 교육을 받고 자란 세대여서 북한에 대한 궁금증과 적대감정이 혼재된 상황에서 직업상 남북간 화해와 협력이란 과제를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었던 상황이라 조금은 조심스럽게 남북만남의 현장에서 일한 기억을 갖고 있다. 역시 세상이 많이 변했음을 느꼈다. 그들 ‘종북좌파’로 낙인된 분들이 이구동성으로 내리는 결론은 북한은 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주장이나 행태는 북한체제, 정권에 대한 추종이나 동경이 아니라 분단극복을 위해서는 북한을 감싸 안아야 한다는 지극히 평범한 논리에 지나지 않았다. 일부 극히 편향된 몽상..
알고리즘을 간단히 말하면, 내가 검색했던 주제를 로봇알고리즘이 분석 한 뒤 비슷한 콘텐츠를 지속적으로 노출시키는 방식을 말한다고 보면 된다. 인터넷을 통해 궁금하거나 관심 있는 주제를 검색하는 일은 컴퓨터를 사용하는 유저에게는 숨을 쉬는 일과 같다. 검색 주제는 시사, 영화, 드라마, 노래를 비롯하여 무궁무진하게 다양한데 이러한 알고리즘 방식은 나에게도 매우 유용하다. 왜냐하면 내가 좋아하는 영화 장르나 음악 취향을 자동으로 분석해서 보여주기 때문에 나의 취향에 맞는 콘텐츠를 찾기 위한 시간을 절약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편리함 속에는 나와 로봇알고리즘과의 끈질긴 감정싸움이 존재하기도 한다. 로봇과 감정적 싸움을 해봐야 승자는 불을 보듯 뻔한 결과로 귀결됨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경제적 상황과, 반드시..
신에 대해 어떤 말을 들어도, 또 신에 대해 어떤 말을 해도, 우리의 마음은 채워지지 않는다. 우리가 신에 대해 이해할 수는 있지만 표현할 수는 없다는 사실. 이것이 바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생각이며, 또 이런 생각이 모든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다. (실레지우스) 진정한 길은 흔히 길이라고 불리고 있는 그런 길이 아니다. 진정한 이름은 흔히 그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그런 이름이 아니다. (노자) 자신의 내부에 만물을 포용하는 것, 그것 없이는 하늘도 땅도 있을 수 없는 존재가 있다. 이 존재는 평안하고 형태를 갖추고 있지 않다. 그 작용을 가리켜 이성이라 부르고 사랑이라 부르지만, 그 존재 자체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가장 높고 먼 존재인 동시에 가장 가까운 존재이다. (노자) 신, 그것은 우리에게 정의를 요구하는 무한한 존재를 뜻한다. (매슈 아놀..
부와 명예를 누리던 테베에 역병이 돌기 시작했다. 그러자 늙은 사제가 왕 앞에 엎드려 모두를 구해달라고 간청을 올린다. “왕이시여, 직접 자신의 눈으로 이 도시를 돌아보시옵소서. 죽음의 붉은 물결이 몰려오는 것이 보이십니까? 테베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병충해가 휩쓸고 간 농토는 황폐해지고 소들은 병들어 숨을 헐떡이고 있나이다. 여인들은 아이를 낳다가 세상을 떠나고 병마는 집집마다 격렬한 기세로 위세를 떨치고 있습니다. 비극에 싸인 테베가 땅을 치고 통곡하고 있나이다.” 테베의 비극, 역병의 책임 결국 이 모든 사태는 테베에 살인자가 있기 때문이며, 그는 다름 아닌 그 나라 왕이었던 라이우스를 죽인 자라는 신탁이 알려진다. 고대 그리스 희곡작가 소포클레스가 남긴 ‘오이디푸스 왕’ 이야기다.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하고 자신의 어머니인 왕비 이오카스테와 결혼해서 자식을 낳은 비밀이 드러나면서 오이디푸스는 이제 왕이 아니라 들판에서 헤매는 방랑자가 된다. 운명의 화살은 그의 눈마저 앗아간다. 스핑크스가 낸 수수께끼를 풀어낸 지혜자로 떠받들여지고 용기 있는 위대한 왕으로 존경받던 오이디푸스가 마주한 출생에 얽힌 사연은 권력투쟁의 문제였다. 자라나면 왕인 아버지에게 도전해서 칼을 들이댈 아이라는 예언에 라이우스는 어린아이 오이디푸스를 몰래 내다 버리고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운명의 고리는 다시 이어져 이 왕가(王家)의 파멸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된다. 어머니 이오카스테는 사건의 진상을 알자 목을 매는 자살로 자신의 인생을 마무리하고, 시신 앞에서 어머니가 차고 있던 금브로치 핀으로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눈을 찌르고 만다. 그리고는 이오카스테의 동생이기에 외삼촌이자 처남이 된 크레온에게 자기를 추방하라고 애원한다. 이후의 이야기가 담긴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그 첫 대목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 늙고 눈먼 자의 딸 안티고네여,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오늘은 누가 이 방랑자 신세가 된 오이디푸스를 받아줄 것인가? 내가 그리도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오랜 고통의 세월에서 배운 게 있다면 내어쫓지 않고 맞이해준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말로 그 관심의 초점을 아버지와의 경쟁으로 친부를 죽이려는 “살부(殺父)에 대한 무의식”을 조명했지만 따져보면 그것은 권력자인 아버지 라이우스 왕의 결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권력에 대한 욕망은 아버지와 아들 간에도 해결되지 못한 채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고 죽고 죽이는 혈연(血緣)의 종말을 가져온 것이다. 눈먼 자, 눈먼 도시 어머니도 몰라본 채 오이디푸스는 그렇게 자기의 기원에 무지한 존재가 되었으니 눈뜬 자이나 눈먼 자나 다름이 없게 된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오이디푸스가 친모 이오카스테의 죽음 앞에서 자기 눈을 멀게 하는 장면은 그의 정신세계가 처한 “붕괴의 어두움”을 그대로 보여준다. 테베가 겪고 있는 역병의 비극을 왕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라는 노사제의 말을 떠올린다면, 정작 자기의 비극은 못 알아보았으니 그가 더이상 그곳에 머물러 왕 노릇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소포클레스가 전한 이 고대 비극의 기억은 우리가 얼마나 어리석은 결정을 내리고도 모르고 지내며, 그 무지의 열매로 인해 가족과 집단 전체의 고통이 어떻게 깊어지는지를 일깨운다. 그런 현실은 눈뜨고 있으나 사실은 눈먼 채로 들판을 유랑하고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고발이다. 사마라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는 바로 그 맹목의 아수라장을 보여준다. 한 사람의 시력 상실로 시작된 도시의 정체모를 역병은 모두를 눈먼 지경으로 몰아간다. 그렇게 해서 벌어지는 현실의 이름은 “잔혹과 무자비”다. 호메로스가 전한 ‘일리어드’의 한 대목은 전쟁의 참혹한 현실에서 일어난 숭고한 사건 하나를 기록하고 있다. 그 자신이 맹인인 호메로스를 떠올리면, 보이지 않는다고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호메로스는 폭력과 재난이 이어지고 있는 현실에서 피어나야 할 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아킬레우스와 프리아모스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절친 파트로클로스를 죽인 헥토르에 대한 원한이 깊어지면서 무자비한 인간으로 변모한다.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우스처럼 위장하기 위해 그의 갑옷을 입고 헥토르와 싸움을 벌이다가 죽고 만다. 아킬레우스의 책임이 없지 않은 전투였다. 불화산처럼 끓어오르는 복수심으로 헥토르를 무참하게 절단한 아킬레우스는 죽기 전 장례를 위해 자신의 시신을 가족들에게 돌려달라는 헥토르의 요청을 짓밟는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자기 생살을 먹겠다는 무시무시한 말을 내뱉는 아킬레우스는 이미 악마가 되어 있었다. 고결한 모습이었던 아킬레우스의 변신이었다. 트로이의 늙은 왕이자 헥토르의 아버지 프리아모스가 소리없이 아킬레우스의 천막에 나타나 무릎을 꿇고 그의 손에 입을 맞추는 장면은 아킬레우스의 영혼에 충격을 준다. 늙은 왕의 이런 모습 앞에서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아버지를 위해 통곡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난다. 그는 프리아모스의 손을 잡는다. “아킬레우스는 실컷 울어 더는 울 욕망이 마음에서 떠나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노인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우더니 노인의 흰머리와 흰수염을 불쌍히 여겼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함께 식사를 하면서 서로를 깊이 바라본다. “다르다노스의 후예인 프리아모스는 아킬레우스를 보고 감탄했다. 그가 어찌나 크고 아름다운지 보기에 신과 같았다. 아킬레우스도 다르다노스의 후예인 프리아모스의 고상한 용모와 언변을 보고 듣고 감탄해마지 않았다.” 비극은 숭고한 정신과 진실한 슬픔이 만나는 자리에서 그 힘을 멈추었다. 온몸을 토막내어 마차 뒤에 끌고 다녀, 온 세상에 모욕과 수치를 겪을 뻔했던 헥토르의 시신은 가족들에게 정중한 예를 갖추어 돌아갔고 아킬레우스의 영혼은 파멸에서 구원되었다. 귀의 귀 함석헌 선생이 오래 전 옮기고 주석을 단 ‘바가바드 기타’는 간디가 평생 손에서 놓지 않은 인도의 경전이다. ‘바가바드 기타’는 친족간의 전쟁이 벌어지는 현실에서 크리슈나와 아주르나의 대화가 기록되어 있다. 그 시작을 여는 드리타라슈트라 왕은 시력이 없다. 전설에 따르면 성자 브야사가 전쟁을 볼 수 있도록 눈뜨게 해주겠다고 하자 혈연의 죽음을 차마 볼 수 없다며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그래서 브야사는 드리타라슈트라의 신하이자 마부인 산자야에게 꿰뚫어보고 꿰뚫어 들을 수 있는 능력을 주었다고 한다. 바로 그 들음의 깊이에 대하여 ‘바가바드 기타’는 “귀의 귀”라는 단어를 우리에게 전해준다. 그건 성서의 예수가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와 다르지 않는 화법이다. 형제들이 전쟁이라는 참담한 집단 살해극을 벌이는 잔혹한 상황에서 생명의 윤리를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는 절절한 기원이 된다. 너무도 어리석은 짓인데 멈출 줄을 모른다. 그것은 자기파멸의 길을 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드리타라슈트라는 보지 못하나 도리어 보고, 골육상쟁에 빠진 이들은 눈을 떠도 보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매일 마주하고 있는 현실은 날로 난폭하고 잔혹해지고 있다. 언론이 표적을 정하면 그 대상만 바뀔 뿐이지 혐오와 분노가 집결하고 처단이 진행된다. 그런 식의 “과녁 맞추기”에 길들여진 채 “과잉처벌의 사회”가 되고 있다. 한나 아렌트가 쓴 ‘전체주의의 기원’ 그 첫 장이 “반(反) 유대주의”인 것은 까닭이 있다. 파시즘은 누군가를 지목해서 모든 고통의 원인을 그에게 돌리고 사회적 불만을 정치권력으로 만들어 “이성의 붕괴”를 도모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 오이디푸스의 참회나 아킬레우스의 눈물, 프리아모스의 숭고함은 기대하기 어렵다. “귀의 귀”가 사라진 세상에서 득세하는 것은 손에 든 무기뿐이다. 아르주나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죽이는 것에 무슨 쾌락이 있겠습니까? 저들이 비록 흉악하더라도 그들을 죽인다면 우리는 오직 죄를 지을 뿐입니다.” 테베에 역병이 돌고 있단다. 그 역병의 이름은 무엇일까? 여기서 멈춰야 한다.
지난 9일 서울시가 현재 연장이 진행 중인 7호선 연장선(인천·경기북부), 8호선 별내선, 5호선 하남선, 4호선 진접선 이외의 추가 직결 연장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경기도·인천시로의 철도 시외 연장을 직결로 추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서울시는 ‘도시철도 연장 및 광역철도 추진 원칙’을 통해 비용 부담 등에 따라 직결이 아닌 평면 환승 형태로 추진한다고 발표했다. 이에 따라 경기도의 철도 계획 차질이 예상된다. 뿐만 아니라 경기도민의 지하철 이용도 불편해질 것 같다. 특히 하남시와 남양주시 등은 지하철 5호선과 4·8호선 연결 사업을 추진 중인데 서울시의 일방적 발표로 비상이 걸렸다. 도는 현재 추진 및 구상중인 서울시 도시철도 연장 관련 총 13개 사업 가운데 8개 사업에 영향이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교산지구 3호선 연장(오금~..
사람이 사람을 먹는 시대가 있었다. 이윽고 사람을 먹는 습관은 사라졌지만, 동물은 지금도 계속 먹고 있다. 그러나 이제 사람들이 이 무서운 육식의 습관도 멀리할 날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어린이 보호와 동물 애호를 주장하는 여러 단체들이, 육식이야 말로 대부분 그들이 형벌로서 방지하고 하는 잔악행위임에도 불구하고, 채식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는 것은 얼마나 해괴한 일인가. 사랑의 실천은 형법상의 책임에 대한 공포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잔학 행위를 방지할 수 있다. 분노에 사로잡혀 사람을 괴롭히고 죽이는 잔학성과 그 살코기를 먹으려는 목적으로 동물을 괴롭히고 죽이는 잔학성 사이에 도대체 어떤 차이가 있단 말인가? (류시 말로리) 흡연과 음주와 육식은 가장 저주받아야 할 세 가지 습관이다. 이 무서운 세 가지 습관에서 최대의 불행과 최대의 빈곤..
국제 곡물가가 심상치 않다. 옥수수·밀·대두 등의 가격이 2013년 이후 최고치를 보이며 세계적으로 식량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2019년 기준 우리나라의 식량 자급률은 45.5%이고 가축 사료를 포함한 곡물 자급률은 21%에 불과하다. 쌀(92.1%)을 제외하면, 밀 (0.7%), 대두(26.7%), 옥수수(3.5%) 등은 매우 취약하다. 그 추세도 매년 악화되고 있다. 농림수산식품부는 지난해부터 관계기관, 업계 전문가 등과 함께 곡물 시장 동향과 정보를 공유하면서 대비 태세를 가동 중이다. 최근 국제 곡물가가 상승하는 데는 우선 코로나 장기화 여파가 영향을 미쳤다. 곡물 생산이나 유통 과정에서 제때에 필요한 인력을 투입하기 어려워 생산·공급의 축소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같은 문제는 코로나가 해소되면 어느 정도 극복될 수 있다. 더 큰 관건은 온난화에..
가짜뉴스가 사회적 문제로 떠오른 지도 꽤 오래 되었다. 가짜뉴스는 여론을 왜곡시킴으로써 민주주의를 해치는 독이 된다. 올해는 1991년 5월의 민주화투쟁이 어언 30주년이 되는 해다. 그 해 유서대필이라는 희대미문의 가짜뉴스가 12명 젊은이들의 숭고한 희생을 매도했었다. 그로 인해 독재정권의 연장에 대한 학생들의 저항도 접어야 했다. 가짜뉴스가 의제로 거론되면 학자들은 가짜뉴스의 개념 정의부터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비전문가인 시민들도 그 의미를 이해하는 걸 정의하는 게 그렇게 어렵나? 가짜뉴스란 표현은 메타포(metaphor)다. 그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메타포는 직관적으로 정곡을 찌르는 묘미가 있다. 사회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개념을 정의하는 것은 학자들의 몫이다. 다른 한편으로 언론이 위축된다는 엄살과 표현의 자유 침해라는 우려가 있다. 징벌적 손해배상제도에 대한 언론단체들의 반응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대한민국 언론의 신뢰도는 우주에서 꼴찌다. 저널리즘의 본분을 망각한 상태에서 방종에 가까운 자유를 만끽하면서 정파적 목적으로 허위날조보도를 남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행위에 대해 아무런 법적 책임도 지지 않거나, 또는 배상액이 터무니없이 가벼워서 전혀 부담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 문제다.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는 언론을 위축시키지도 않고,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지도 않는다. 저널리즘의 정도를 지킨다면 어떤 징벌이라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여기서 생각해야 할 지점은 누구를 위한 언론 · 표현의 자유이며 권리인가 하는 의문이다. 만인을 위한 권리인가, 만 명을 위한 권리인가? 봉건지배체제에서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언론 · 표현의 자유는 자산가계급의 권리로서 제기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자산가계급에 해당하는 거상과 부농 및 성공한 수공업자들은 노동자 농민들을 규합해 봉건지배세력을 대상으로 봉기했다. 부르주아 시민혁명이라고 한다. 그 결과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체제를 성립시켰지만 권력은 자산가계급이 독점했다. 당연히 언론 · 표현의 자유도 독점했다. 동등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은 투쟁했고, 희생을 치른 만큼 아주 조금씩 언론 · 표현의 자유를 쟁취해냈다. 그러나 여전히 표현의 수단인 언론은 자산가계급의 수중에 있고, 서민대중의 권리는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이 지점에서 진보적인 언론단체들이 언론 · 표현의 자유를 빌미로 징벌적 손해배상법제에 대해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은 지혜롭지 않다. 언론 · 표현의 자유는 절대적인 권리가 아니다. 근대의 여명기에 자산가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던 소위 자유주의 사상가들이 고안해낸 천부인권사상에 학자와 기자들이 주술처럼 빠져드는 경향이 있다. 가짜뉴스는 사회적 흉기일 뿐이다. 유해식품은 소수 사람들의 몸을 망가뜨리지만, 가짜뉴스는 대다수 사람들의 건강한 자아형성을 방해함으로써 사회를 병들게 한다. 이미 병이 깊다. 가짜뉴스에 대해서는 회사의 명운과 개인의 인생이 흔들릴 정도의 타격을 주어야 한다. 무책임한 허위날조보도로 인해 멀쩡하던 회사가 망하고 죄 없는 사람이 삶을 포기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론사 영업의 자유와 샐러리맨 기자들의 방종에 가까운 자유가 더 중요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