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구 법무부 차관의 지난해 11월 취중 택시기사 폭행 사건의 축소·은폐 논란이 점입가경이다. 경찰 수사관이 핵심 물증인 차량 블랙박스 영상을 확인하고도 덮었다는 의혹까지 제기되면서 민심이 갈수록 험악해지는 양상이다. 취중에 일어난 일순간의 실수이고, 쌍방 합의 사건이라는 특성을 고려하면 경찰의 처리는 관행상 무리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경찰이 처음부터 거짓말을 했다는 의혹이 본질적 문제를 파생시키는 양상이다. 경찰은 처음부터 “객관적 증거자료가 없는 상태에서 택시기사의 증언에 의존해 내사 종결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택시기사가 “목적지에 도착해 발생한 사건”이라고 진술했고,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의사를 밝혀 단순 폭행 사건으로 마무리했다는 것이다. 특히 폭행 사건 당시 블랙박스 영상을 확보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이 차관 측 역시 기사에게 정중하게 사과했고 적절한 합의금을 전달하면서 원만하게 매듭지어진 사안이라고 해명해왔다. 그러나 검찰이 고발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사건의 블랙박스 영상을 확보하면서 반전이 일어났다. 피해 택시기사가 폭행 사건 다음날 블랙박스 업체에서 영상을 복원했고, 복원한 영상을 수사관에게도 보여줬다는 새로운 진술도 나왔다. 영상을 확인한 경찰이 오히려 “영상 못 본 것으로 할게요”라며 묵살했다는 피해자의 진술이 만약 사실이라면 이는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결국 최승렬 국가수사본부장 직무대리는 25일 “지난해 연말 해당 사건에 관해 언론에 설명한 내용의 일부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돼 국민들께 상당히 송구하다”고 사과했다. 경찰은 해당 수사관을 대기발령하고 수사부장을 단장으로 13명 규모의 진상조사단을 꾸려 전면 재조사에 착수한 상태다. 이 논란은 검경수사권 조정으로 올해부터 수사 권한이 대폭 커진 경찰에 대한 국민 신뢰 문제와 곧바로 직결되고 있다. 당장 최근 경찰의 부실수사 의혹들부터 소환된다. 온 국민을 분노케 한 ‘정인이 사건’의 경우, 세 차례 학대신고에도 무혐의 처리한 사실이 드러나 경찰 수장이 머리를 조아렸다.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추행 의혹도 167일간 전담팀을 투입하고도 뭐 하나 제대로 건진 게 없었다는 비판여론이 높다. 이 사건의 핵심은 특정범죄가중처벌법(특가법)의 대상이 되는 ‘이동 중 운전자 폭행’ 여부이지만, 그보다 더 중대한 문제는 경찰에 대한 국민적 신뢰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고 있다는 사실이다. 유권무죄(有權無罪)의 폐해에 오래도록 치를 떨어온 국민 정서도 무섭게 흔들고 있다. 이대로 유야무야 뭉개려고 하다가는 ‘검경수사권 조정’이라는 대의마저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수 있다. 검찰의 수사와 별개로, 경찰 스스로 논란을 완전히 잠재울 수 있는 수준의 진솔한 진상조사 결과를 내놓고 엄정조치해야 한다. 뿐만이 아니라, 다시는 유사한 사례가 발생하지 않도록 철저한 ‘내부감시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이제 ‘수사종결권’까지 확보한 우리 경찰은 지난날의 평범한 치안조직이 아니다. 굳건한 신뢰를 바탕으로 국민으로부터 진정 사랑받는 조직으로 거듭나야만 한다. 다시는 무능한 공룡 경찰이 ‘봐주기 수사’를 일삼고 있다는 불평이 국민 사이에서 터져 나오게 해서는 안 된다.
새해가 금세 한 달이나 지났다. 이승의 시간은 이렇게 고속으로 줄어든다. 내가 열여섯 살에 청운의 꿈을 꾸며 상경하던 장면이 엊그제 일인 듯 생생한데, 어언 45년 전이다. 공자는 열다섯 살에 학문에 뜻을 두었다(志學). 서른 살에는 학문의 기초를 확고하게 세웠다(而立). 마흔 살에는 세상의 어떤 풍파와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았다(不惑). 다시 십 년 후, 오십에는 하늘의 뜻을 알게 되었다(知天命). 환갑의 나이에 이르자 세상의 그 어떤 소리도 다 들렸으며, 불필요한 잡음들은 걸러져 들어왔다(耳順). 칠순이 되니 마침내 어떤 일을 마음 가는대로 하더라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從心). 그리고 73세에 세상을 떠났다. 연초에 매스미디어나 소셜미디어에서 나이와 관련된 한자 표현들을 자주 접한다. "이제 불혹이다", "지천명에 이르고 보니...", "내 나이 벌써 이순이라니..." 등의 문장들이다. 이런 글들을 대할 때마다 좀 불편하다. 논어(論語) 위정(爲政) 편에서 공자 자신의 인격성장 단계를 나이와 연관지어 고백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지학'이나 '이립'은 범부들도 가능한 경우겠지만, '불혹', '지천명', '이순', '종심' 등은 필부들이 그 나이에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공자에게나 가능한 높이였을 것이다. 이 언어관습은 중국은 물론이고, 일본도 마찬가지라 한다. 그들도 우리처럼 공자가 십년 단위로 바꾸어 부른 철학개념들과 나이의 숫자를 동일시하여 사용한다. 우리가 가장 심하다고 한다. 어휘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본뜻에서 조금씩 벗어나는 속성이 있다. 바로잡기 힘든 걸 모르지 않는다. 생각해 보라. 마흔이 아니라 일흔에도 '불혹'의 경지로 사는 건 쉽지 않다. '지천명'의 天命이 중용1장에 나오는 그 '천명'이라면 이제 오십이 된 중년의 사내가 결코 써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건 일종의 참칭(僭稱)이다. '이순'이나 '종심'도 마찬가지다. 그 역시 공자만이 도달한 수준인 것이다. 나는 예순이 넘었으나, 여전히 세상잡사에 미혹되어 횡보한다. 천명은 커녕 든든하지 못한 쌀독의 공허가 언제 끝날지조차 알지 못한다. 이 시대 민초들 모두의 수준이며 공동운명이다. 귀는 조금도 순하지 못하다. 오히려 야단법석의 집결지다. 갑남을녀들은 칠순을 넘어 팔십이 되더라도 불혹, 지천명, 이순, 종심의 경지에 이를 수 없다. 그 각각이 실로 초인적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그 가치들을 품격 있는 삶의 목표로 정해놓고, 일상에서 소박하고 성실하게 실천하는 것이 온당하고 마땅한 자세가 아닌가 싶다.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때, 어느 날 높이 존엄하고, 깊이 질적인 인생길을 걸어가고 있는 자신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그때 비로소 그 소수에게만 진정으로 나이가 숫자를 넘어 격조를 갖게 되지 않을까. 공자는 바로 이걸 가르친 것이다.
항간에 한 금고털이가 살았다. 그 아비도 금고털이였다. 그 아버지에 그 자식이라, 그는 오직 아비를 따라다니며 금고 터는 방법만 배웠다. 그러다가 그의 아버지가 덜미를 잡혔다. 아버지는 감옥에서 옥살이를 하다가 그만 죽어 버렸다. 고아가 된 그는 늘 한탕 하는 것이 꿈이었다. 배운 기술이라고는 금고를 터는 일뿐이라 그는 시내를 헤매며 털 금고만 살피고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눈에 밤톨만 한 다이아몬드를 소장하고 있는 한 귀금속상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금고 속의 그 다이아몬드를 훔치기로 결심했다. 먼저 주도면밀한 계획을 세웠다. 먼저 그 귀금속상 가까운 곳에 있는 허름한 집 한 채를 샀다. 그는 대문을 걸어 잠그고 집안의 마당에서 땅굴을 파고 들어갔다. 귀금속상과는 얼마 되지 않은 거리에 있었다. 파낸 흙은 남몰래 강가에 내다 버렸다. 그러기..
내 정서적 토양은 농가의 생활풍경에 뿌리가 닿아 있다. 평화롭고 온화했던 마을에서 아버지 쟁기질하고 어머니는 작곡가가 오선지 위에 음계를 내리듯 씨앗을 심으셨다. 형은 퇴비를 넣고 나는 고무래로 덮으며 스스로의 밥벌이를 하면서 성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 그곳이 나의 유토피아이며 그곳을 나는 지상천국으로 생각한다. 그곳에 가야 내 부모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금년에는 ‘흰 소’의 해라고 한다. 어느 수필인은 흰 소의 사진을 스마트폰으로 보내왔고 운경 화백은 토종소가 힘차게 달리고 있는 그림을 그려 보내주었다. 우리 집에는 소띠 해에 태어난 가족이 두 명 있다. 그래서 이 소띠 해에 소 꿈을 타고 온 아들이 자신의 삶을 찾아가는 길에서 성취감과 즐거움이 가..
일본 제국주의와 군사독재정권, 부패정권을 미화해온 언론 참칭 매체들은 정치혐오를 부추기는데 여념이 없다. 기사 제목만 봐도 언론인지, 증권가 등에서 유통하는 속칭 찌라시인지 헷갈리기 일쑤다. 팩트 비틀기 천재들이어서 감귤을 탱자로 만드는 건 식은 죽 먹기다. 거기에 붙이는 제목은 신박한 경지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천박하기 이를 데 없지만 매우 선동적이다. 수구 정당 소속 정치인들의 말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들의 '워딩'은 조폭들의 막말과 구별이 잘 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분명 정치인인데 말 품새는 시정잡배인 것이다. 차마 귀 열고 듣기조차 거북한 극우적 목사 등의 말과 오십 보 백 보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진보적 지식인이었다가 돌변한 교수 등도 닮은꼴이다. 진리를 논했던 그 고상한 입에서는 연일 막말이 흘러나온다. 비판하기도 민망할..
조금 오래된 집의 경우 '두꺼비집'으로 불리는 전기개폐기가 설치되어 있다. 100년 전에 개발된 이 개폐기는 납 합금으로 만든 퓨즈(fuse)가 있는데 이 ‘퓨즈’를 보호하기 위해 사기 재질의 보호 상자가 감싸있었다. 이 상자의 모양이 두꺼비를 닮아서 개폐기를 '두꺼비집'이라고 불렀었다. 이 두꺼비집에는 전력 소비량 상태를 알 수 있는 전기 계량기도 설치되어 있다. 두꺼비집은 전력선이 집으로 들어오는 어디쯤에 위치해 있는데 대개 구석지고 잘 안보이는 곳에 있었다. 1970년대 이후부터 에너지 연구자들은 이 두꺼비집안의 계량기 데이타를 활용하여 사용자의 에너지 소비패턴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이를 에너지 피드백 효과라 한다. 지난 50년간 세계 곳곳에서 시행된 에너지 피드백 실증 연구들에 의하면 사용자들은 동기부여형 에너지 정..
세상이 변해도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쉽게 안변한다. 젊은 세대는 고정관념이 적어 변화에 능동적이지만 기성세대 특히 오피니언 리더층으로 오래 이 사회를 지탱해온 사람들의 의식변화는 만만치 않다. 알아도 선뜻 못받아 들인다. 이 점에서 정책의 오조준이 일어난다. 이해관계가 얽히면 더할 것이고. 변화가 극심한 미디어 분야가 대표적이다. 현재 미디어는 IT 산업과의 융합에 의하여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 과거에는 채널 그자체가 플랫폼이었지만 이젠 채널,미디어,플랫폼이 따로 존재하며 생태계를 만드는 중에 콘텐츠의 중요성이 커지며 플랫폼의 지배력이 급증하고 있다. 2020년 1/1 760억달러 하던 테슬라의 주가가 12/31 6690억 달러를 기록하며 미국6위로 올라섰다. 전세계 자동차업계 상위 2-9위사의 합이 테슬라에 못미친다. 미래가치의 반영이..
경기도가 지난 22일 수원시, 용인시, 김포시, 이천시, 포천시, 양평군, 연천군과 ‘경기도 공공배달 플랫폼 사업 확대를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협약식에는 염태영 시장 등 해당 시·군의 수장들이 참석했다. 이들 지방정부는 올해 1분기(용인시는 2분기)에 경기도 공공배달앱 ‘배달특급’ 서비스를 시작한다. 나머지 시·군들도 내년 상반기까지 동참한다. 경기도가 지난해 12월 1일 출시한 공공배달앱 ‘배달특급’이 성과를 거두고 있다는 평가다. 가입된 3개시의 가맹업소가 3천개소를 넘었다고 한다. 출시 일부터 같은 달 27일까지 총 누적 거래액은 약 25억 원을 기록했다. 이날 기준 총 가입 회원은 10만 명을 웃돌았다는 소식이다. 배달특급은 디지털 플랫폼 독과점 문제를 해소하고 소상공인의 수수료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 경기도가 만든 공공배달앱이..
“누가 이런 권리를 당신에게 주었는가? 우리는 준 적이 없는데.” 지배세력과 맞선 미라보의 연설은 프랑스 혁명의 심장을 뛰게 했다. “인민들이여, 어제의 투쟁은 그대들의 오늘을 결정하오.” 시이예스의 연설은 투쟁의 의미를 일깨웠다. “왕이 무죄면 혁명이 유죄가 된다.” 혁명을 기득권과의 타협으로 바꾸려 한 세력에게 던진 로베스피에르의 일격이었다. 왕은 연설하지 않는다. 명령할 뿐이다. 거만하게 웅얼거려도 어떻게든 알아들어야 하는 게 절대군주의 칙령이었다. 루이 16세는 혁명이 일어난 이후에도 이렇게 바보처럼 읇조렸단다. “내가 다스리는 왕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소란을 묵과하지 않겠다. 나의 백성들이여, 내가 그대들을 보호하는 것을 믿고 내 사랑 안에 거하라.” 하지만 왕도 이내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는 지경에 몰렸다. 1789년 7월, 프랑스는 왕에게 복종하던 백성이 혁명의 주체가 되는 걸 목격한다. 새로운 인민의 탄생이었다. 무너져야 할 낡은 체제 “앙시앙 레짐”이라는 말이 파리의 카페에서 유행하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고 거리에는 다음과 같은 구호가 적힌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우리가 먹을 빵을 강탈해간 자들이여, 너희들은 부자의 종이며 가난한 자를 억압하는 폭군이다. 과부와 고아의 피를 마시는 자들이여, 종말이 오고 있다.” 프랑스 혁명은 대중연설의 시대를 열었다. 민중 대다수의 정치적 기세를 모으는 일이 역사를 움직이는 관건이 되었기 때문이다. 또렷한 어조로 핵심을 찔러야 한다. 그것은 어떤 착오도 허용하지 않고 가야 할 길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되는 일이다. 대중연설의 시대는 즉시 언론의 시대로 이어졌다. 장 뽈 마라가 펴낸 ‘인민의 벗 L’Ami du peuple‘은 가장 강력했다. 얼마나 인기였는지 글을 읽지 못하는 최하층 노동자 계급까지도 열렬한 구독자들이었다. 글 읽을 수 있는 이가 소리내어 읽으면 모두가 함께 열정적 토론을 펼쳤고 토론은 다시 신문에 기사로 옮겨졌다. ‘인민의 벗’은 인민의 일용할 양식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매일 비열하고 잔혹한 언어로 우리의 감정과 생각을 끊임없이 손상시키는 언론의 현실과 마주하고 있다. 이들은 누구의 동의도 없이 칼을 들고 우리의 전두엽을 잘라내고 있다. 뇌 수술이다. 우리를 자기들이 조종하는 기계로 만드는 작업이다. 그 기계에 하루도 빼놓지 않고 독을 섞은 인민의 아편을 먹인다. 촛불시민혁명의 의식세계를 절단하고 폐기처분하려는 것이다. 언론의 난도질로 헌법재판관 후보에서 추방당했던 이유정 변호사가 4년의 재판 끝에 무죄판결을 받았다. 없는 죄를 뒤집어 씌운 자들은 아무 책임을 지지 않고 있다. 이런 암담한 시절에 ‘경기신문’이 있어 천만다행이다. 오늘의 왕 노릇하는 자들에게 침묵하지 않을 것이다. 매일 함께 만들어가자, 인민의 뜨거운 벗이 되어!
2018년 판문점 정상회담 이후 내일이라도 당장 항구적 평화가 오고, 김정은이 핵고도화를 포기할 것이란 낙관적 분위기가 팽배할 때, 필자는 한 세미나에서 외로이 외쳤다. 북한은 본질적으로 변화하기 어려운 체제로서 환타지로 귀결될 것이며, 새로운 형태의 냉전의 한 귀퉁이를 차지할 것이란 비관적 전망을 내놓았었다. 엄동설한인 1월 5일부터 시작하여 심야열병식을 끝으로 한 북한의 8차 당대회는 필자의 전망이 그다지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해준다. 일각에서 지난 5개년 경제발전 계획의 실패를 자인하고 자력갱생을 강조하는 점을 두고 ‘경제발전’에 더 비중을 두는 것으로 해석하지만, 국가방위력 강조 부문을 더 주목해야 한다. 특히 핵능력 지속을 강조하면서 비핵화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으면서 전략무기를 선보인 행태는 매우 실망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