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19로부터 오는 일상의 번거로움 속에서도 전국적으로 도시재생 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경기도는 38개 사업지역에서 도시재생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눈에 띄는 성공사례를 찾아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도시재생이란 인구의 감소, 산업구조의 변화, 도시의 무분별한 확장, 주거환경의 노후화 등으로 쇠퇴하는 도시를 지역 역량의 강화, 새로운 기능의 도입·창출 및 지역자원의 활용을 통하여 경제적·사회적·물리적·환경적으로 활성화시키는 것을 말한다(도시재생법 제2조). 인간의 공동생활을 위한 구성체를 사회라 부른다. 그리고 사회에는 항상 사회적 규범과 사회법이 따른다. 과연 이 규범과 법의 근본정신이 무엇일까. 사회 속 인간은 사회적 구성원으로서의 꼴을 갖추어야 하며 그 가운데 생활 지역이 구분되고 삶의 터전이 마련됨으로써 인간은 사회의 일원으로 함께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가르침이 있고 지혜가 흘러나오는 사회, 인간들의 사회의식을 깨우쳐주는 사회, 잘못된 제도나 관습을 바로잡아 가는 사회가 우리가 바라는 사회일 것이다. 정치 논리에 휘둘리는 사회 안에서 시민들이 추구해야 할 바는 무엇일까? 도시 속에서 시민에게 주어지는 역할과 책임은 무엇일까? 우리 마을의 오피니언 리더들은 합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가? 자본주의 경제 도시인들은 사람들의 생김새나 매무새를 보고 선입견으로 박대하거나, 선행은 뒷전으로 밀어놓은 채 경제력과 편함만이 최고라는 환상을 갖기 쉬워진다. 사람들이 여럿으로 갈라져, 한쪽은 내 편을 들고 다른 쪽은 다른 편을 들고 있는 도시, 다양한 권리와 이해관계의 충돌 속에 도시를 어떻게 재생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도시 안에 사는 주민의 삶도 재생되어야 하지 않을까? 현재까지 선정된 도시재생 전체 사업 수는 330곳에 이르며, 수도권에서는 서울 21, 경기 38, 인천 17곳 등 총 76개 사업지역이 선정되어 진행 중이다. 도시재생 지역은 지역상으로는 도시와 농어촌에 걸쳐 있으며, 아주 다양한 일자리에 종사 중인 사람들이 그 안에 모여서 사회와 마을과 도시를 이루며 생활을 함께하고 있다. 도시는 사회⸱경제⸱정치의 중심지역으로 많은 인구와 가옥이 밀집해 있고 교통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여러 집이 함께 모여 사는 물리적 공간’으로써 마을공동체이기도 하며, 주민이 상호 대등한 관계 속에서 마을에 관한 일을 스스로 결정하고 추진하는 자치공동체를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공동체로서의 기능이 사라지면 마을의 다원적 기능과 공익적 기능이 함께 사라지고, 지속가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족히 10년이면 땀 흘려 일군 도시재생 마을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마을을 하나의 경제단위로 보고, 마을살이에 필요한 재화와 용역을 조달하기 위한 경제구조를 마을경제라 할 수 있다. 한 국가의 국민경제가 다른 국가와의 수많은 교역을 통해 연결되어있는 것처럼 마을경제 역시 독립적으로 작동되지 않으며 더 큰 시장영역 안에 포함되어 있다. 마을경제 활성화를 위해서는 좋은 것들이 마을 밖에서 마을 안으로 끊임없이 들어오게 해야 한다. 그리고 머물게 해야 한다. 사람들이 피해 가는 마을이 되어서는 안된다. 떠밀고 떠나게 하는 마을이 되어서야 어찌 지속가능한 마을이 될 것인가. 지역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하는 등 사회적가치 창출을 위한 사회적(social) 도시재생(urban regeneration)이 필요하다. 우리 마을과 도시의 당면과제와 해결해야 할 문제가 무엇인지 꼼꼼히 돌아봐야 한다. 이기심과 탐욕으로 가득 차 서로 격분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온 마을 주민이 두 팔 벌려 이방인을 환영하는 마을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누군가 마을을 떠날 때 그가 행복한 여행길에 오르듯 배웅을 받으며 뒤돌아 손 인사하게 해야 한다. 소수의 리더 몇 사람이 아니라 많은 주민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주도하는 지속가능한 사회적 도시재생을 이루어 가면 마을 주민 모두가 마을의 명사가 되고, 누구나 들르고 싶은 마을, 나눔을 청하는 마을로 재생될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프고 절실한 문제라면 이별이다. 우리는 가족, 친구, 연인, 직장동료 등 많은 사람들과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며 산다. 충견으로 알려진 진돗개를 유년시절부터 동경했지만 얼마 전 나는 이별 아닌 이별을 했다. 우리가 개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들이 사람의 마음을 잘 헤아릴 줄 알고, 주인의 기쁨과 슬픔을 잘 읽고 공감해 주기 때문이다. 공직생활 첫발을 내딛으면서 원룸공간에서 진도견과 지내다가 얼마가지 못하고 떠나보낸 기억이 오래도록 남아 있다. 이후 30년이 훌쩍 지났다. 사람을 가까이서 겪어봐야 알지 겉으로 보는 것과 마음으로 보는 차이가 얼마나 우매한 일인지 지인 한옥명장님 통해 체득했었다. 도심지에 한옥가(家)마당에 진돗개를 기르셨다. 얼마 후 어미에게서 강아지가 들어섰고, 주인을 닮은 진돗개가 건강하게 여섯 마리를 순산했..
지난주 록 음악을 소재로 한 영화에 대해 글을 쓰고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미처 이야기하지 못했던 영화 그리고 음악의 이야기들이 너무나 많이 떠올랐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영화 No.1을 말하라면 주저 않고 로버트 저메키스(Robert Zemeckis) 감독의 1985년작인 ‘백 투 더 퓨처(Back to the Future)’를 꼽는데, 이 영화뿐 아니라 또 다른 그의 영화 ‘포레스트 검프(Forrest Gump, 1994)’에서도 기본적으로 록 음악이라는 소재가 아주 중요한 매개로 사용된다. 시대상의 반영이라는 면에서 보면 당시 록 음악이라는 것이 비중 있게 다뤄질만한 소재이기에, 이 시절을 묘사한 영화나 드라마에는 빈번히 등장해서 깊은 인상을 남긴다. 이러한 시대를 반영한 록 음악 관련 영화들을 보다 보면 대부분의 영화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여 크고 작은 역할을 하는 집단이 있다. 그들은 바로 열성적으로 록 밴드의 공연장을 쫓아다니는 극성팬들을 말하는 ‘그루피(Groupie)’이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여전히 낯선 단어이지만, 아이돌 팀들을 열심히 쫓아다니는 ‘오빠부대’ 혹은 ‘사생팬’ 정도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물론 단체복과 풍선 그리고 커다란 망원렌즈와 고급 카메라로 무장한 우리나라의 그것과는 관계성의 레벨과 수위가 사뭇 다르겠지만 말이다. 그루피는 기본적으로 스타와 가까워지고 사생활에까지 다가가고 싶어 하는 팬들이기에, 대부분의 영화에서는 보통 록 스타와의 갈등과 염문을 일으키는 역할로 등장한다. 하지만 이런 그루피의 모습을 조금 예외적인 모습으로 그린 작품들이 있는데, 우선 카메론 크로우(Cameron Crowe) 감독의 ’올모스트 페이머스(Almost Famous, 2000)’를 이야기할 수 있다. ‘올모스트 페이머스’란 말 그대로 ‘거의 유명한’ 혹은 ‘완전히 뜨기 직전’을 뜻하는데, 영화 속에서는 성공을 목전에 두고 있는 스틸워터(Stillwater)라는 가상의 밴드를 이야기를 한다. 영화에서는 음악 비평가인 주인공을 통하여 록 음악계의 이상과 실제 사이의 괴리와 혼란을 이야기하는데, 여기서 페니 레인이라는 그루피가 등장하여 극을 끌어가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녀는 밴드의 팬임과 동시에 그 멤버 중 한 명과 불륜의 관계로 등장하는데, 여타 영화에서처럼 공연장의 백스테이지에서 밴드 멤버들과 같이 술과 마약, 섹스를 즐기는 유흥의 역할로서만이 아닌, 성장해가는 극중 사람들의 또 다른 전형으로 그려진다. 또 다른 예로 스티븐 스필버그(Steven Spielberg)가 기획하고 로버트 저메키스가 감독한 영화 ‘비틀스 대소동(I Wanna Hold Your Hand, 1978)’이 있다. 이 작품에서는 당시 최고의 TV 쇼였던 에드 설리번 쇼(Ed Sullivan Show)에 나오는 비틀스(The Beatles)를 만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세 명의 소녀팬의 하루를 보여주는데, 여기서의 팬이라는 존재는 다소 극성맞지만 순수하게 묘사된다. 현재 스마트한 시대의 스마트한 팬들의 모습이 아닌, 조금은 투박하지만 한없이 뜨거웠던 그 시절의 청춘들이 비틀스의 오리지널 사운드트랙과 함께 생생하게 묘사된다. 이렇듯 영화를 통해 바라본 록 음악을 둘러싼 세계에 관해서 다양한 시선과 관계 해석이 존재한다. 물론 직접 경험해 보지 못한 시대의 감정을 정확히 이해하긴 힘들지만, 영화를 보며 당시 록 음악과 젊은이들의 눈을 통한 시대상을 체험하기에는 충분하다.
민주노총이 코로나19 위기 극복을 위한 노사정 대표자회의 합의안을 대의원대회 투표로 부결시켰다. 합의를 주도해온 김명환 위원장은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애초 민주노총의 제안으로 시작돼 어렵사리 도출된 합의안을 스스로 무산시켰다는 점에서 허탈하기 짝이 없다. 문제는 민주노총이 환난에 빠진 국가 경제를 배려하지 않고 강경파에 휘둘리고 있다는 점이다. 민노총이 갖는 국가 사회적 비중에 걸맞은 ‘책임감’을 되찾아야 할 것이다. 지난 4월 코로나19에 따른 노사 위기를 사회적 대화로 해결하자며 ‘원 포인트’ 노사정 대화를 먼저 제안한 게 민노총이다. 지난 2017년 노사정 대화 복원을 공약으로 내걸며 당선된 김명환 위원장이기에 기대감도 컸다. 실제로 40여 일의 논의를 거쳐 최종 합의안이 마련되기도 했다. 그러나 합의안은 결국 민노총 내부 강..
골목은 집과 집이 돌아앉은 등뼈 같다. 깜깜한 밤, 돌아앉은 집의 온기는 담 안으로 고이고, 온기로부터 소외된 골목에 가로등 불빛만 서성인다. 서성이는 것들은 서성임으로 고독을 견디는 법이어서 멈추지 못하고 담을 따라 걷는다. 돈벌이에 지친 살림살이가 좁은 담과 담 사이를 따라 길이 되어 흐른다. 돌아앉은 등뼈와 등뼈 사이에서 기도할 의미조차 상실한 길이 고개를 수그린다. 골목길이 꾸부정 걷는다. 반듯하게 걸을 수 없어서 골목길이 내뱉는 숨소리는 고달프다. 비틀리고 꾸부정한 골목길을 걸을 때, 걷는 것들의 어깨는 담과 담의 틈에 짓눌려 주눅이 든다. 내 아버지는 오래전에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났다. 떠날 때, 아버지는 지금의 내 나이보다 한참 젊었다. 나보다 젊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건 암癌때문이었다. 위장에서 시작한 암은 췌장과 소장을 따라 번지다가 길을 잃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흩어진 암세포들은 죽지 않고 끈질기게 살아남아서, 멀쩡해야 할 정상세포를 차례로 죽였다. 세 번째로 수술대에 올랐을 때, 의사는 손을 쓰지 못하고 열었던 수술 부위를 그냥 덮었다. 마약성분이 첨가된 진통제를 처방 받았음에도 퇴원한 아버지는 한 달을 버티지 못했다. 숨을 거둬들일 때, 아버지가 세상에 남긴 마지막 말을 나는 알아듣지 못했다. 차마 닫을 수 없는 미련의 정체가 무엇이었을까. 아버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한 쪽 눈을 감지 못했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나는 아버지의 눈을 쓸어내렸다. 그것으로 아버지와 나의, 아니 아버지와 세상의 작별이 종료될 거라 믿었다. 잘 가세요, 아버지. 암세포도 없고, 수술도 없고, 진통도 없는 나라로 편히 가세요. 하지만 경직된 아버지의 눈꺼풀은 쉽게 닫히지 않았다. 감지도 뜨지도 못한 아버지의 한 쪽 눈을 보고 있자니 덜컥 설움이 북받쳤다. 먼저 울음을 터뜨린 건 여덟 살짜리 막내 동생이었다. 막내는 맨발을 동동거리며 마당에서 울었다. 아버지, 죽지 마. 아버지, 죽지 마. 막내는 마당에서 울고 나는 방에서 울었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었지만 아버지에겐 ‘해당 없음’이었다. 택시회사 경리과장으로 일하던 아버지는 통행금지를 단속하던 방범대원들이 술동무였다. 택시기사들은 밤 열두 시(통행금지)가 임박해서야 사납금을 맞추고 차고지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사납금 액수를 장부에 기입하고, 미수금을 제한 입금 총액을 금고에 보관한 뒤에야 일을 마감했다. 통행이 금지된 거리에는 아버지와 방범대원들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그들을 잡아끌고 불 꺼진 술집 유리문을 두드렸다. 술이 술을 부르고 불려온 술을 따라 암세포가 숨어들었다. 아버지가 그랬듯 숨어든 암세포 또한 통행금지와 무관했다. 길은 시작과 끝의 방향이 개별적이다. 입구와 출구가 지향하는 방향이 서로 달라서 모이지 못하고 흩어진다. 그래서 길이다. 그렇게 생겨난 길이라서 길은 만남 보다 헤어짐에 어울린다. 아마도 그래서일지 모른다. 길이라는 말을 처음 만들 때부터, 헤어지는 순간을 염두에 두고 길이라 부르기로 약속했을지도. 머릿속으로 길이라는 글자를 떠올리며 소리내보면 길이라는 말에 담긴 뜻이 저절로 그려진다. 길... 길이라는 말은, 말이 담고 있는 거리와 공간이 멀고 낯설어서 안으로 다가오지 못하고 바깥으로 흩어진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다. 그런 것이 길이라고 해서 길 아닌 것만 골라 걸을 순 없으니까. 나는 오늘도 어김없이 길 앞에 선다. 서서, 길을 따라 둥둥 떠내려가는 이 세상 사람들의 어깨를 본다. 보면, 불현 듯 저 세상으로 떠나간 아버지가 떠오른다. 뜨지도 감지도 못한 아버지의 한 쪽 눈과 끝내 해독에 실패한 아버지의 유언이 길을 따라 뚜벅뚜벅 걸어온다. 숨이 턱 막히다가도, 작별을 겪어낸 것이 어디 나 하나뿐이랴 싶어 발끝에 힘을 준다. 아, 길 위를 떠가는 저 많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발걸음들. 어느 것 하나 작별을 예고하지 않는 게 있는가. 작별은 되돌릴 수 없는 불가항력이다. 작별하기 전에 후회 없이 사랑하자. 작별은 연습이 없고, 기다려주지도 않는다.
염태영 수원시장이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에 도전했다. 그리고 첫 관문인 예비경선을 통과, 내달 29일 전당대회에서 최고위원 경선에 나서게 됐다. 염 시장은 지난 24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예비경선에서 지방정부 수장으로 유일하게 본선에 진출했다. 선출직 5명을 뽑는 본선에서는 염 시장과 함께 노웅래(4선·마포갑)·이원욱(3선·화성을)·김종민(재선·논산계룡금산)·소병훈(재선·경기광주)·신동근(재선·인천서을)·한병도(재선·익산을)·양향자(광주서을)의원 등이 올랐다. 그러나 재선의 이재정 의원(안양동안을)은 탈락됐다. 이의원은 그동안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출신에다가 당 대변인까지 역임한 터여서 이변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들 가운데 가장 관심을 끄는 인물은 기초정부 시장인 염태영 수원시장이다. 염 시장..
내가 태어나서 가장 먼저 배운 영어는 알파벳이 아니라 ‘room for rent’라는 관용어였다. ‘세 놓음’이라는 이 관용어는 기지촌에서는 흔했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기지촌에서 자랐는데 어느 집 대문에나 이 관용어가 붙어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손바닥만 한 방이라도 있으면 세를 놓았다. 부대 안이 아니라 밖에서 지낼 수 있는 미군들이나 지역의 위락시설 등에서 일하던 여성들이 세를 얻었다. 세를 얻은 여성들 중 상당수는 미군들과 살림을 차렸거나 드물게는 결혼한 사람들이었다. 내가 살았던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방 다섯 개를 세 주었는데, 우리 집은 빈방이 생기면 금방 사람이 들어왔다. 세가 잘 나간 편이었는데, 마당 한 가운데에 작은 정원이 있었고 믿지 못하겠지만 당시에는 구경하기 힘들었던 좌변기와 욕조가 있었던 덕이었다. 하지만 정작 우..
수원시의 전 농촌진흥청부지에 국립농업박물관이 건설 중이다. 건물과 접한 작은 산에는 산림자원과 철새의 산란지를 보호하기 위해 철조망으로 둘러싸여 있다. 자물쇠가 잠겨있어서 관계자 외에는 들어갈 수 없다. 이곳에는 우리나라에 큰 공헌을 한 육종학자 우장춘 박사의 묘가 숲속에 외롭게 있다. 현재 우리나라 곡류 자족률은 40%도 안 되어 수입으로 대처한다. 최근 농촌진흥청과 농림 식품기술기획평가원에 따르면 양파는 80%가 일본산 종자로 이중 만생종 양파는 90%가 일본 종자라 했다. 마늘은 80%가 중국과 스페인산 종자다. 고구마는 연간 국내에서 생산되는 40t 중 95%가 일본산 종자다. 파프리카와 단호박도 네덜란드와 일본에서 종자를 들여온다. 모두 권리에 대한 대가를 지급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장춘 박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우장..
지금의 돈암서원에는 사계 김장생 선생 외에도 아들 신독재 김집과 동춘당 송준길, 우암 송시열도 함께 모셔져 있다. 김집은 김장생의 둘째 아들로 선조7년에 태어나 효종7년까지 살았던 인물이다. 아버지와 함께 예학의 기본체계를 완성한 인물로 송시열의 스승이기도 하다. 송시열은 김집과는 33년의 나이차가 있다. 송시열은 처음에는 김장생에게 예학을 배웠으나 김장생이 죽자 그의 아들 김집에게서 학문을 마쳤다. 송준길은 이이와 김장생으로부터 학문을 배웠으며 김집의 천거로 효종에게 발탁된 인물이다. 돈암서원에 배향된 네 분은 예학 이외에도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학자로서는 최고의 명예라 할 수 있는 문묘에 배향되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돈암서원은 네 분 선정(先正) 신(臣)을 모신 선정서원이기도 하다. 문묘에 배향된 대학자들을 논산 돈암서원..
부동산 정책 실패 논란 와중에 느닷없이 떠오른 ‘행정수도 이전’ 이슈가 정국을 강타하고 있다. 김태년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국회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던진 이 이슈는 여권 대선주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찬성하는 등 모종의 작전처럼 펼쳐지고 있다. ‘지역균형발전’ 유인책의 일환으로서 ‘행정수도 이전’은 맞는 방향이다. 그러나 수도권 인구분산이나 부동산 혼란의 해법이라는 핑계는 타당하지 않다. 집권당의 일사불란한 ‘행정수도 이전’ 합창은 일단 워낙 사나워지고 있는 민심의 물꼬를 돌리려는 국면전환용이라는 의심을 받고 있다. 차기 대선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한 원대한 포석으로 해석될 여지도 있다. 과거 ‘신행정수도 건설’ 카드로 선거에서 재미 좀 봤다는 말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했던 솔직한 고백이었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가 민주당 김태년 원내대표 연설 다음 날인 지난 21일 전국 성인 남녀 5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이전 찬성’이 53.9%로 조사됐다. ‘이전 반대’는 34.3%, ‘잘 모름’은 11.8%였다. 조사결과에서 제대로 읽어야 할 대목은 전국에서 고루 찬성 비율이 높은 가운데, 수도권에서도 찬성하는 비율(경기·인천 53.0%, 서울 42.5%)이 상당히 높다는 사실이다. 이런 결과는 청와대와 국회의 세종시 이전을 수도권 부동산 문제를 해소할 비법인 것처럼 말하는 논리가 허구라는 사실을 입증한다. 사람들이 청와대나 국회 옆에 살고 싶어서 서울로 모여들었다면 이전을 극구 반대해야 맞지 않나. 김태년 원내대표가 국회 연설에서 밝혔듯이 세종특별자치시 효과라는 게 고작 수도권 집중을 8년 정도 늦춘 수준이라는 분석자료에서도 역력하다. 사람들은 학교 좋고, 일자리 많고, 교통도 좋은 곳을 찾아서 몰려든다. 지방 도시들을 명품도시로 이끌어 사람들이 굳이 서울로 오지 않아도 되도록 만드는 일에 집중하는 ‘지역균형발전’ 추진이 맞다. 국가가 의지만 갖고 추진한다면 얼마든지 이룩해낼 수 있는 방향이다. ‘태릉’ 개발 언급하니 하룻밤 사이에 집값이 2억씩 오르고, 세종시 들먹거리니 삽시간에 아파트가 1억씩 올랐다는데, 이게 무슨 부동산 묘책인가. 야당도 헌법재판소의 ‘관습 헌법’ 판결 어쩌고 하면서 케케묵은 반대만 앞세울 일이 아니다. 서울도 좋고 지역도 좋은 올바른 ‘지역균형발전’ 의식을 바탕으로 여야 정치권이 새롭게 합심하는 것이 맞다. 여야 모두 정쟁의 뻘밭에서 빠져나와 나라의 형편을 정직한 눈으로 좀 돌아봤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