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리? (웃음) 그런데 이 세계는 그런 게 없더라. 내가 착각 속에 살았던 거 같다. 구치소에서 1년 명상하면서 깨달은 게 참 많다. 내가 너무 헛된 것을 쫓아다녔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대장동 사기사건의 종범인 유동규 씨가 최근 기자들을 만나 쏟아낸 말을 중앙일보가 보도한 것이다. 그는 거침이 없었다. 대장동 주범 의혹이 일고 있는 자들을 향해 자신과 연루된 범죄 내용을 사실대로 밝히겠다고 예고하기도 했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 등 실명을 거론해 그 파장은 가히 메가톤급이다. 그의 말에는 꼬리 자르기 식으로 자신을 손절한, 함께 했던 사람들에 대한 원한이 깊이 배어있었다. 그러나 그의 말에는 자기성찰도 크게 자리 잡고 있어 반전을 보여준다. 이 반전은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이야기 구조의 중요 요소여서 유동규 씨가 오랜 동안 화제가 될 지도 모른다. 소설이나 영화의 소재로 차용될 가능성도 점칠 수 있다. 대장동의 음습함을 거의 사실에 가깝게 그려 화제가 되었던 김성수 감독의 영화 '아수라'에는 없는 캐릭터이자 반전이어서 꽤 매력적일 것이다. 아무튼 반전은 유동규 씨의 과거와 현재를 극명하게 대비시킨다. 그는 대장동 부동산 개발 사기사건의 행동대장 격으로
그동안 윤석열 대통령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지 몰랐다. 선거를 통해 대통령이 된 건 확실하니, 그저 윤 대통령이라 불렀고, 속으론 무능하기 이를 데 없는 자라고만 여겼다. 이제 분명히 알겠다. 그는 무도불측한 자다. 잘 쓰지 않는 말이지만, 무도불측하다는 엄연히 사전에 등재된 단어다. 말이나 행동이 도리에 어긋나 막되기가 이를 데 없다는 의미. 허구한 날 마누라며 애들을 두들겨 패거나, 노름판에 주색잡기에 골몰하여 집안을 돌보지 않는 자가 있으면 그렇게 불렀다. 사람 같지 않은 놈. 무도불측한 자는 사람의 도리를 모르는, 금수만도 못한 자를 지칭하는 단어다. 내가 어릴 적엔 이 말만큼 심한 욕이 없었다. 그는 금도를 모르는 자다. 금도는 襟度라 적고, 남을 포용하는 아량을 뜻한다. 금(襟)은 옷깃 금이다. 우리가 옷깃을 여민다고 할 때, 찬 바람이 불어와 옷깃을 여미기도 하고, 순국선열을 기리며 마음을 가다듬고 자세를 바르게 하기도 한다. 금도란 옷깃을 여미는 마음을 가리킨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을 금도라 부르는 게 아니고,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키고 따라야 하는 도리를 지칭한다. 특히 정치인으로 행세하는 자들이 지켜야 할 덕목이 바로 금도다. 그가 무도불측하며
교사는 동네 연예인이란 우스갯소리가 있다. 학교 근방에서는 사생활이 없어서 나온 말이다. 주말에 학교 주변에서 지인과 밥을 먹거나 돌아다니면 꼭 다음 주에 아이들이 선생님과 같이 밥 먹은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 자택이 학교 근처였던 어떤 선생님은 집 밖 화단에서 “OOO 선생님~~”하고 아이들이 부르는 소리를 여러번 들었지만, 끝끝내 창밖으로 내다보지 않았다고 했다. 학교에 가자 아이들이 “선생님 저희가 부르는 소리 못 들으셨어요? 선생님 집 근처에서 부르면 나오실 줄 알고 열심히 불렀어요.”라고 했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있다. 이만하면 동네 연예인이란 말이 과언이 아니다. 앞선 경우 말고도 동네 연예인스럽다고 느낄 때는 ‘맘카페’라고 불리는 지역 커뮤니티에 학교 이름이 오르내릴 때 그렇고, 교원평가라고 불리는 ‘교원능력개발평가’ 기간이 끝나서 결과를 확인할 때 유사 연예인이 된 기분을 느낀다. 기사 댓글을 보는 연예인, 스포츠 스타들의 심정이 이렇지 않을까 싶다. 댓글 쓴 사람의 얼굴을 모르는데 누군가는 나를 평가하는 기분은 겪어 본 사람만 안다. 교원평가는 1년에 한번 이루어진다. 학부모, 학생, 동료교사에게 평가 점수를 주고, 서술형으로 응답할 수도
자신의 사명을 인식하는 사람은 그 자체를 통해 자신의 인간적인 가치도 인식한다. 그런데 자신의 사명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종교적인 사람들뿐이다. 황제가 성자에게 물었다. “너는 나에 대해 생각할 때가 있느냐?” 성자가 대답했다. “예, 있습니다. 신을 잊고 있을 때.” 이웃의 생명을 자신의 생명과 똑같이 느낄 때, 우리는 신을 섬기고 있는 것이다. (주세페 마치니) 정신지체자를 어떻게 대하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본질을 보여주는 것은 없다. (아미엘) 어떤 사람을 악인이라거나 바보라거나 부정한 사람이라는 이유로 한번 경멸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타인에 대한 경멸의 감정에 제동을 걸 수 없게 된다. 인간이여, 자신의 가치를 알라. 지금은 그럴 때이다. 우리는 전혀 잘못 태어난 존재가 아닌데, 달아나 겁을 먹고 주위를 두리번거릴 필요가 어디 있단 말인가? 아니다. 의연하게 고개를 들어라. 나의 생명은 장식물이 아니면, 그것을 살리라고 주어진 것이다. 나는 어디서든 진실을, 완전한 진실을 말하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나는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가 아니라, 나의 진정한 사명이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에머슨) 개인의 자유
문(門)은 약속이다. 허락과도 다름없다. 열고 닫음은 허락과 거절의 몸짓인 셈이다. 내가 묵고 있는 바다남쪽(海南) 기와집의 솟을대문도 그렇다. 대문은 안으로 열리는 안여닫이 방식인데, 높이와 넓이가 넉넉해서 팔을 벌리거나 들어도 끝에 닿지 않는다. 양쪽 기둥에 매단 두 짝의 문은 각각 여덟 칸의 널빤지를 세로로 켜고 다듬어서 만들었다. 세로로 세운 여덟 칸의 널빤지는 네 개의 각목을 가로로 덧대 고정시켰는데, 간격이 고르고 반듯해서 세로로 세운 널빤지의 평생 동무로 적격이다. 잘 짜진 문은 하루에 한 번 열린다. 열림이 한 번이니 닫힘 역시 그렇다. 열렸다 닫히는 하루를 흉내 내듯 문은 안으로부터 딱 한 번 열렸다 닫힌다. 생각해 보면 사람의 열림과 닫힘도 한 번이다. 엄마를 열고 나왔다가 세상을 닫고 사라진다. 시간을 열고 생겼다가 기억을 닫고 흩어지는 것은 어김없이 한 번이다. 한 번을 뛰어넘는 열고 닫음은 사람의 영역에서는 불가능하다. 껍질을 벗어버리거나 고치를 뚫고 나와 다시 사는 사람은 없다. 플라톤도 피카소도 제임스 딘도 그렇게 닫혔다. 진시황도 이르지 못했던 다시 열림의 길을 보란 듯이 걷는 사람을 나는 보지 못했다. 열렸으면 당연히 닫힌다.…
지인들과 파스○○ 커피숍에서 만나자고 했다가 장소를 급하게 변경했다. SPC그룹 계열사 브랜드 목록을 공유하면서 당분간은 다른 커피숍을 이용하면 좋겠다고 말한 이가 있어서였다. SNS에 ‘#SPC불매’, ‘#멈춰라SPC’ 해시태그가 늘었다. 불매운동 지지가 쉽사리 끝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SPC계열사 평택 SPL 제빵공장에서 끼임 사망 사고가 발생한 것이 지난 15일이다. 동료들이 사고를 목격하고 직접 수습했다. 사고가 난 기계는 가림막을 해 두고 동료 노동자들이 일했다. 노동부가 사고를 목격한 노동자의 트라우마 등을 이유로 작업 중지를 권하자 그제야 일단 중단했다. 사망한 노동자 빈소에 회사가 놓고 간 파리바게뜨 빵 상자 사진이 알려지고 비판 여론이 조금씩 확산했다. 노동과 인권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비난이 일자 관행이고 회사방침에 따랐다는 대답이 사태를 키웠다. 허영인 SPC그룹 회장이 사고 발생 엿새 만인 21일 기자회견을 열고 공식 사과에 나섰다. 하지만 대체로 ‘늦었다’는 반응이 많았다. 그룹 회장이 내는 사과문 낭독은 소리가 작았다 하고, 기자 질문은 받지 않겠다고 공지한 기자회견이었으니 ‘보여주기식 사과’라는 뒷말이 나오는 것도 당연했다.…
미사일이 마구 날아다니고, 총알이 우박처럼 쏟아지네요. 청백 군사들이 호시탐탐 상대방의 심장을 노려 일격필살의 승기를 잡겠다고 눈에 불을 켜고 날뛰는 모습이 험악하군요. 이러다가 정말 큰 변고를 당하지나 않을까 하는 공포가 수시로 엄습해요. 러시아 침공으로 참혹한 전장이 돼버린 우크라이나 풍경이냐고요? 아니에요. 최근 여야 정쟁이 깊어지고 있는 우리 정치권 이야기에요. ‘적폐 청산’은 사전적으로 ‘과거의 쌓아온 폐단을 없앤다’는 용어예요. 그런데 우리 국민은 지난 몇 년 사이에 살짝 다른 의미로 느껴왔지요. 문재인 정권이 내세운 ‘적폐 청산’ 구호는 헌정사상 최초의 대통령 탄핵 국면과 맞아떨어지면서 반론의 여지가 좁았어요. 그 시절 속절없이 당해야 했던 보수 야당은 사뭇 ‘정치보복’이라며 부글부글 끓었지만요. 지난 3월 대선으로 정권교체가 된 이후 공수(攻守)가 뒤바뀐 정치권은 처음부터 시커먼 전운(戰雲)을 피워올렸지요. 대선 전부터 각종 논란에서 온전히 자유롭지 못했던 야당 대표를 겨냥한 사법기관의 수사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네요. 후보 경선 때 불거진 의혹을 중심으로 공세가 이뤄지고 있으니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겠군요. 이번에는 민주당에서 ‘정치보복’,
만약 우리 모두의 생명의 근본이 같지 않다면, 우리가 늘 경험하는 동정이라는 감정을 설명할 길이 없다. 누군가의 분노를 진정시키려면, 예를 들어 그것이 아무리 정당한 분노라 하더라도, 화를 내고 있는 사람에게, “하지만 저 사람도 불행한 사람 아닌가!” 하고 말하는 것만큼 효과적인 것은 없다. 빗물이 불을 끄듯, 곧 동정은 분노를 사라지게 하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좋으니 그 사람에 대해 불같이 화를 내며 그에게 고통을 주고 싶다면, 자신이 이미 그 고통을 상대방에게 주었고, 실제로 상대방이 정신적, 육체적으로 고민하거나 어려움과 결핍을 고생하는 것을 보면서, 그것이 나 때문이라고 중얼거리는 광경을 상상해 보라. 나머지 일은 어떻게 되든 그것만으로도 분노가 사라질 것이다. (쇼펜하우어) 남을 욕하며 그와 다투고 있을 때, 너는 인간은 모두 형제라는 것을 잊고 있으며, 사람들의 친구가 되는 대신 적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으로 인해 너는 자신에게 해악을 끼치고 있다. 왜냐하면 네가 맨 처음 신이 창조한 선량하고 자비로운 인간이 아니라, 몰래 다가가서 먹이를 덮쳐 물어 죽이는 야수로 변한다면, 너는 너의 가장 소중한 재산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너는 지갑을 잃으
그는 외국인 최초로 무형문화재인 가야금 산조(散調) 전수자다. 미국 알래스카 출신, 본명은 Jocelyn Clark. 이 이름에서 한국이름 '조세린'이 나왔다. 그 이름을 "고향 떠나(趙) 이역만리 타향살이(世)에서 중국 황제시대에 신수(神獸)로 여겨졌던 상서로운 동물(麟)이 될 팔자"라고 풀어줬다. 자칭 '알래스카 조씨'라 한다. '얼음 氷, 북쪽 北, 새鳥'를 합하여 옥편에 없는 글자를 만들기도 했다. 확고한 정체성을 자기존엄성의 전제조건으로 여기는 사람들의 특징이다. 1970년생 개띠. 현재 대전 배재대학교 동양학과 교수다. 그를 만난 건 최근 모 일간지에 실린 그의 칼럼을 감동적으로 읽은 것이 계기였다. 내용도, 문장도 특출하였다. 뿐만 아니다. 그는 음악을 우주 운행질서의 일부로 이해하고 연주하는 큰 예술가다. 그도 가야금 뜯으며 손가락이 멍들고 피흘리며 여기까지 왔다. 그 고행은 멈춤이 없다. '천류불식'(川流不息)의 운명이다. 개천이 쉬지 않고 흘러가야만 강에 이르고, 마침내 대해(大海)에 도달하는 것처럼... 다행스럽게도 그는 천재였다. 서너 살에 이미 바이올린, 클라리넷을, 열살 전에 오보에와 피아노를 연주했다. 일본에 가면 일본어, 중국 가
‘아~베`마리~~아(Ave Maria)!~’ 한국어로 번역하면 ‘안녕하세요 마리아님!’이다. 천사 가브리엘이 동정녀 마리아를 찾아와 예수를 수태한 사실을 알리며 건넨 인사라고 한다. 이를 모태로 슈베르트가 ‘아베마리아’를 작곡했고, 카치니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아름답고 손색이 없지만, 아베마리아는 역시 ‘구노의 아베마리아’가 으뜸이다. 이 곡은 천재 작곡가 샤를르 구노(Charles Gounod)가 1853년 바흐의 서곡에 가사를 넣어 만든 것이다. 듣고 있노라면 마음이 진정되고 영혼이 맑아진다. 프랑스 그랑 오페라의 가장 뛰어난 작곡가 구노. 그는 1818년 파리에서 화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다섯 살 때 돌아가셨고, 어머니가 피아노 선생을 해 생계를 유지했다. 어린 구노는 어머니께 레슨을 받는 학생들 사이에 끼어 피아노를 배웠다. 그 후 파리음악원에 들어 가 앙뚜안 레이체의 지도를 받으며 화성을 공부했고, 스무 살 때 이미 로마 대상을 받았다. 구노는 초년기 종교음악에 몰두했다. 하지만 세속적 영감으로 눈을 돌렸고 오페라를 작곡했다. 그가 첫 오페라 사포(Sapho)를 작곡한 건 1851년. 그로부터 5년 후 걸작 ‘파우스트’를 발표했다.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