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의 아쉬움을 달래고 2023년 희망찬 시작을 알리는 새해맞이 제야의 타종행사가 2022년 12월 31일 23시 45분부터 2023년 1월 1일 0시 20분까지 수원시 행궁동 화성행궁 광장 앞 여민각에서 열렸다. 약 5천명의 시민들은 지난해를 돌아보며 새해에 대한 기대를 숨기지 않았다. 제야 타종에 앞서 음악공연이 열렸고 자정부터는 사랑을 만드는 사람들 봉사회에서 새해를 축하하는 뜨끈한 떡국도 나눠줘 시민들의 마음까지 푸근하게 만들었다. 2023년 새해가 밝았다. 모두 만사여의(萬事如意)하고 형통(亨通)하시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종교계에서도 신년사를 통해 새해 덕담과 함께 염원을 발표했다.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 진우 스님은 “오늘날 지구촌 중생들 서로 간의 균열과 파열음이 곳곳에서 들려온다”면서 “창과 칼을 녹여서 호미와 보습을 만드는..
20대 초반 나이의 후배와 마포에 있는 경의선 숲길을 걸었다. 루프탑 카페가 보여 들어갔는데 이름이 ‘헤이, 쥬드’다. 주인에게 ‘헤이, 쥬드’ 노래를 청해 흐르게 하고 혼잣말처럼 말했다. ‘나에게 헤이, 쥬드는 프라하의 봄이야’ MZ세대인 후배, 못 알아 듣는다. 꼰대 소리 듣지 않을 선까지 내 암호같은 말을 해명한다. 영화 ‘프라하의 봄(1989 개봉작)’에 비틀즈의 노래 ‘헤이 쥬드(Hey Jude)’가 나온다. 비틀즈의 목소리가 아닌, 체코 가수 마르타 쿠비쇼바(Marta Kubisova/1942년생)가 자국어로 바꿔 불렀다. 비틀즈가 불렀을 때는 우울한 한 아이를 위한 ‘응원가’였는데 마르타 쿠비쇼바는 국민개혁가요로 바꿔 불렀다. 존 레논의 5세 장남 줄리안 레논이 자주 벌어진 부모의 싸움 때문에 어두워진 것을 본 폴 매카트니가 삼촌 마음으로 노래를 만들었다. (줄리안의 애칭이 주드) 1968년, 발표되어 ‘예스터데이’와 함께 비틀즈 최고 명곡이 된 이 노래는 그해 체코 ‘프라하의 봄’ 속에서는 민중 개혁가로 퍼진다. ‘프라하의 봄’은 체코 국민들의 민주화 운동이었다. 나치 독일 점령 하의 체코슬로바키아에게 구원이 되어준 소련은 2차 대전이 끝난 1945년, 지배자로 둔갑한다. 1948년, 공산당이 전권을 장악하면서 일당독재 전체주의 사회로 나아갔고 1960년, 사회주의 헌법 채택,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국명 변경하며 국민들은 끝이 보이지 않는 겨울을 살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68년 1월 출범,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기치로 내걸고 민주 자유화 노선을 채택한 알렉산더 두브체크의 개혁은 민주 시민들의 환호를 불렀다. 그러나 동토를 녹일 것으로 기대했던 프라하의 봄은, 민주화 물결이 이웃 동구권으로 확산될 것을 두려워한 소련의 군홧발 아래 짓이겨진다. 68년 8월, 바츨라프 광장의 시민 평화 시위는 소련군이 밀고 들어온 탱크와 총성에 의해 피로 물들며 좌초된다. 체코 국민 작가 밀란 쿤데라의 명작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좌절된 체코 민주화 운동 ‘프라하의 봄’을 배경으로 한 체코 젊은이들의 사랑이야기다. 미국 감독 필립 카우프먼은 이 소설을 ‘프라하의 봄’이라는 영화로 만들었다. 국민 가수 마르타 쿠비쇼바는 68년, 프라하의 봄에 이어 89년, 벨벳 혁명 때도 헤이, 쥬드를 민주주의를 꿈꾸는 개혁의 노래로 불렀다. 쿠비쇼바의 목소리, 체코어로 불린 ‘헤이, 쥬드’는 영화 ‘프라하의 봄’에도 나와 영화의 세계적 히트와 함께 체코인의 민주화 염원을 세상에 알렸다. ‘삶은 내게 너무 무거운데 당신에게는 너무 가볍군요’라는 영화 주인공 테레사의 명대사를 떠올리며 노래를 듣는다. 헤이, 쥬드는 겨울을 사는 지금의 우리에게 옛날 노래만은 아니다.
저학년 친구들은 수업 시간에 모르는 게 있어도 힘차게 손을 들고 발표한다. 발표할 때 친구들이 나를 주목하는 그 순간이 기분 좋으니까 신나서 손을 든다. 정답과 전혀 상관없이 엉뚱하게 틀린 답을 말할지라도, 그게 맞는지 틀린 지 나도 모르고 옆에 애들도 모르니까 부끄러울 게 전혀 없다. 저학년 친구들은 모두가 발표시켜달라고 애절한 눈빛을 발사한다. 어린이들은 선생님이 발표를 안 시켜줬을 때 기분이 상하지, 틀린 답을 말했다고 주눅 들지 않는다. 아이들이 학교에 다닌 지 4~5년이 지나고 고학년이 되면 상황이 급변한다. 이제 아이들은 친구들이 발표하는 나를 주목하는 게 부담스럽고, 모두 앞에서 틀린 답을 말할까 봐 걱정스럽다. 나보다 공부 잘하고 많이 아는 친구도 가만히 있는데 내가 답을 말해도 되는 걸까 싶기도 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학생이 발표하는 빈도가 줄어들고 교사만 떠드는 조용한 교실이 되어간다. 교실에서 학생들이 발표 시간에 눈치를 보다가 결국 포기하게 만드는 대표적인 두 과목이 있다. 범인은 영어, 수학이다. 둘 다 선행학습이 만연하기로 유명한 과목들이다. 미취학 시기에 영어 유치원이라고 이름 붙어있는 영어 학원에 다니는 건 흔한 일이고, 소수의 아이는 그때부터 수학 학원에 다닌다. 수능을 대비한 선행학습의 시작이다. 지금 학년보다 높은 학년의 수업을 들으면서 얼마나 선행이 빠른가를 따지는 건 옛날 옛적 유행이다. 이제 유명한 학원에 입학하는 것 자체로 자랑이 된다. 특정 학원에 입학하기 위해 레벨 테스트를 쳐야하고, 레벨 테스트를 위한 과외 수업이 따로 있는 건 흔히 알고 있는 풍문이다. 새로운 풍경은 그 레벨 테스트 치기 위해 응시권을 온라인 선착순으로 받아야 하고, 선착순인 응시권을 잡아주는 전문 업체가 성행하는 모습이다. 요지경이 따로 없다. 이러다 보니 수학, 영어는 교과서를 처음 펼쳤을 때 내용을 모르는 아이가 반에서 적은 수가 되어버렸다. 국어나 사회 같은 과목이 교과서를 미리 읽고 오거나 배경지식이 있는 아이가 아예 없거나 한, 두 명 남짓인 것과 비교하면 더 극적이다. 이제 대부분이 영, 수 선행학습을 하자 사교육이 극심한 지역에서는 더 나아가 과학 중 일부 과목도 초등 저학년 때부터 선행학습을 시킨다고 한다. 수업 시간에 교과서 내용을 처음 배우는 건 당연한 일이고, 당연함을 넘어서 학생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여야 별다른 부작용이 없다. 대다수가 핵심 목표를 미리 알고 몇 명만 모르는 상태에서 수업을 진행하면 문제가 생긴다. 다른 과목은 내용을 모르는 게 당연하니까 무지한 내가 부끄럽지 않은데 영어랑 수학만큼은 모르는 게 부끄러워진다. 선행을 많이 한 다른 친구들은 이미 교과서 문제를 다 풀어놓고 딴짓을 하고 있는데, 오늘 처음 내용을 배운 아이들은 쩔쩔매면서 문제와 씨름한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 발표는커녕 특정 과목 수업 시간 내내 땀을 흘리면서 시선이 불안한 채로 굳어버리는 아이도 생긴다. 아이들끼리는 쉬는 시간에 중학 수학 문제집이나 토익 문제집을 풀고 있는 모습으로 누가 어디까지 선행학습을 했는지 서로서로 알고 있다. 학원에서 진도를 어디까지 나갔는지 확인하고 선망하는 분위기가 느껴질 때 몹시 당황스럽다. 선행학습이 학습 성취에 도움을 주지 않는다는 연구 결과는 이미 많이 나와 있다. 선행학습을 한 학생의 성적이 좋아 보이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 과목에 쏟은 절대적인 시간이 많기 때문이다. 현재 학교에서 나가고 있는 진도의 예습, 복습을 선행에 들이는 시간만큼 사용하면 선행한 학생보다 더 큰 성취를 얻을 수 있다. 그러니 예습, 복습을 철저히 하는 것으로 사교육비를 절약하고 학습 성취 기준에 도달하는 데 충분하다. 진리는 대부분 단순하고 명쾌하다.
지난 2년간 매달 두 건씩 저널리즘 비평을 썼다. 아직 비평할 주제가 없어 고민한 적은 없다. 유사한 주제가 반복될 때, ‘또 다뤄야 하나?’를 고민하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 그만큼 한국언론의 그릇된 관행이 고쳐지기 어렵다. 한 일간신문의 논설실장을 지낸 선배가 “한국만큼 미디어비평 거리가 많은 나라도 없을 것이다”라는 말을 실감한다. 저널리즘 비평의 성격상 비판적 관점에서 모든 칼럼을 썼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이번 칼럼은 칭찬할 것들을 찾기로 했다. 성찰하는 기자를 보면 고맙다. 지난주 한겨레신문 전광준 기자의 《‘법조기자단’에 있다는 것》이란 칼럼처럼 자신이 속한 집단의 잘못을 과감하게 드러내는 모습을 보면서 독자는 언론에 대한 믿음을 갖는다. 검찰조직 못지않은 법조기자단의 폐쇄성과 선민의식이 검찰과 언론의 신뢰를 떨어뜨렸다. 입사 5년이 안 된 젊은 기자의 문제의식이라 더 반가웠다. 대한민국을 1년 넘게 뒤흔든 대장동 사건의 주범 김만배는 법조기자로 쌓은 인맥을 연결고리로 활용했다. 법조 권력의 감시자였어야 할 기자가 외려 법조 비호자였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언론 보도의 잘못을 지적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언론학자 글을 접하는 것도 또 다른 즐거움이다. 60년이 넘는 전통을 지닌 언론전문지 ‘신문과방송’ 12월호에 실린 홍원식 동덕여대 교수의 미디어비평이 그렇다. 정치권의 물타기 억지 주장을 받아쓰고 객관주의라고 변명하는 언론 보도를 설득력 있게 꼬집었다. 취재원의 주장이 억지인 줄 알면서도 따옴표 형식을 빌어 기사에 그대로 반영한다. 균형을 맞췄다고 강변한다. 언론이 어떻게 ‘객관’과 ‘균형’을 왜곡하고 취재원에 이용당하는지를 알기 쉽게 설명한다. 극소수 언론이 선도하고 있는 한글표기 캠페인도 반갑다. 혹평하면 언론의 우리말 사랑은 한글날 하루에 그친다. 신문은 이즈음에 한글 관련 행사나 세미나를 기사화하고, 방송은 텔레비전 수상기 오른쪽 상단에 표시되는 KBS, MBC를 ‘한국방송’. ‘문화방송’ 정도로 바꿔 표기한다. 광주문화방송이 이런 관행을 과감하게 떨쳐냈다. 올해 말까지 한글표기를 해오고 있다. 이게 그렇게 주목받을 일인가라고 반문할 독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로쓰기가 우리 언론계에 정착되는 과정을 돌아보면, 광주문화방송이 큰일을 했다. 1976년 한창기 선생은 잡지 ‘뿌리깊은나무’를 창간하면서 가로쓰기를 했다. 당시로는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1988년 한겨레신문이 창간되면서 일간신문의 가로쓰기가 처음 시작됐고, 1995에 중앙일보가 뒤를 따르면서 일반화됐다. 칭찬할 일이 세 사례만이겠는가. 클릭수에 매몰된 언론환경에서도 언론 본연의 사명을 다하는 심층취재들, 외래어를 우리말로 고쳐쓰기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경기신문도 있다. 이런 언론과 언론인들이 쏘아 올린 작은 공들이 모여 신뢰가 쌓일 때, 독자와 시청자는 돌아온다. 언론인 여러분, 금년 한 해 수고 많았습니다.
지난 11월 2일 세계 제2위 암호화폐거래소 FTX가 파산하고 최근 세계 1위인 바이낸스까지 여러 의혹에 휩싸이면서 테라·루나 사태로 인하여 암호화폐 시장에 낀 먹구름이 더욱 짙어졌다. 하지만 그 먹구름의 가장자리에 한 줄기 햇살이 비치고 있다. 11월 4일 뉴욕연방은행의 고위책임자는 ‘싱가포르 핀테크페스티벌’에서 주목할만한 발언을 하였다. “지난 몇 달 동안 은행 간 지급결제의 속도를 높이기 위하여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하는 중앙은행디지털화폐(CBDC)를 개발하고 있다.” 12월 8일 국내 가상화폐거래소들은 거짓 공시를 이유로 위믹스를 ‘자율적으로’ 상장 폐지하였다. 디지털화폐를 연구하고 있는 중앙은행의 숫자는 2020년 35개에서 2022년 114개로 3배 이상 증가하였다. 그 배경에는 코로나19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있다. 코로나..
매년 연말쯤이면 맞이하게 될 새해에 이루고 싶은 소망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한다. ‘송구영신’이다. 남성들은 금연, 금주 등이 주를 이루고 여성들은 다이어트가 우선순위를 차지하는 듯 하다. 새롭게 무엇인가를 시작하고 하고 싶을 때, 어떤 계기 또는 시점을 특정해야 하는데 보통 해가 바뀌는 시기를 새로운 출발점으로 설정한다.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길, 분수령이다. 어제 뜨는 해가 오늘과 다르지 않고 12월 31일 뜨는 해는 1월 1일에 그대로 오는데 이와 같은 새로운 결심은 왜 새해를 맞이하면서 하게 되는걸까. 아마도 특별한 자신만의 목표를 이루기 위한 ‘심리적 자기의지의 확인조건’ 같은 것일게다. 필자도 40년이 다 되어가는 흡연과의 결별을 위해 새해가 다가오는 시점을 기다리며 의지를 다지곤 했다. 실제로 몇 번은 거의 성공할 뻔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 못난 흡연자는 늘 다시 담배를 피울 구실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굳이 화가 나지 않아도 담배를 다시 피울 명분을 찾기 위해 화낼 일을 찾고 있었고 술자리에서는 누군가 담배 한 대 권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찌질한 나를 보고야 말았던 것이다. 그러고는 늘 스스로에게 핑계를 댔다. ‘최소한 작심삼일은 넘겼다’. 이처럼 반복적인 결심과 실패를 경험하게 되면서 나는 담배를 끊겠다는 결심을 잘 하지 않게 되었다. 다행히 금년에 받았던 건강검진에서 폐 기능에 문제가 없다는 결과를 받아 큰 위로가 되었고, 소설가 이외수 선생이 했던 ‘언젠가 담배가 묻습니다. 죽을래? 끊을래?’라는 말도 위안을 삼기 충분하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 죽을 만큼의 건강 상태는 아니다. 그러므로 내년에는 못된 육체적 습관보다 못된 정신적 심성을 고쳐보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사회학적 갈등론자이다. 그런 연유로 기능론자에 비해 세상을 삐딱하게 보는 경향이 강하다. 되돌아보면 글을 쓰는 이 시간까지도 그래왔었다. 부디 2023년에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지금보다는 조신해 지기를 바래본다. 내 말과 글에서 불쑥 드러나는 칼날이 누군가의 마음을 다치게 하는 일이 없도록 무디게 만드는 일. 그것 하나면 족하다. 단언컨대, 이러한 결심이 성공한다면 내 관상은 많이 달라질 것이다. 과거에 나를 알던 사람이 나를 알아보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우리집 서재 한 켠에 소중하게 쟁여 놓은 담배 다섯 보루가 나를 이처럼 너그럽게 만들고 있다.
한해가 저물고 있다. 국내적으로 ‘고물가‧고금리‧고환율’ 3고에 이은 수출부진과 무역적자, 밖으로는 글로벌 긴축, 우크라이나 전쟁과 신냉전 가속화, 기후재난 등 제동이 걸리지 않는 두려움과 불안, 총체적 위기의 연속이었다. 무엇보다 경제지표가 우려스럽다. 무역수지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14년 만에 500억달러에 이르는 첫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특히 대외경제의 두 축인 수출품목(반도체)과 최대교역국(중국)이 동시에 휘청거리면서 무역적자가 고착화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고조되고 있다. 5월10일 윤석열 새정부가 출범했지만 우리 정치권은 연말까지 최악의 메시지로 기대를 외면했다 국가의 정치‧경제 펀더멘탈이 추락의 굉음을 내는 사이 더욱 양극화된 음지에서 위로와 보호를 받아야 할 서민들의 고통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여전히 검찰..
문득 돌아보니 한 해가 저물고 있다. 2022년은 호랑이 해였다. 대외적으로는 2월에 발발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날 줄 모르고 있고, 미국에서는 자국내 물가 안정 정책에 따라 고금리로 가고 있다. 기후 위기에 따른 국제 환경 이슈도 우리와 무관하지 않다. 대내적으로는 북한의 미사일 발사가 연일 뉴스에 오르고, 고금리와 고환율의 경제도 한국 경제에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여야 간에 소통은 부재하고 나아가 정치인들과 유권자 사이도 불통인 듯하여 답답한 심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해가 가고 있다. 조직이든 가정이든 개인이든 한 해를 돌아보며 정리하는 시간이다. 개인의 차원에서 사자성어로 2022년 올해를 정리해 보고자 한다. 우선 송무백열이다. 松茂栢悅. “소나무가 잘 자라서 무성하면 주변에 있는 잣나무도 좋아한다”는..
금강경에 나오는 ‘무주상보시(無主相布施)’는 내가 무엇을 누구에게 베풀었다라는 생각조차 없이 돕는다는 말이다. 성경에도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알지 못하도록 하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물질 우선주의가 판치는 이 세상에서 ‘무주상보시’와 ‘왼손이 모르는 선행’을 베푸는 사람을 만나기란 어렵다. 사회는 갈수록 각박해 진다. 그럼에도 이름을 밝히지 않은 인간천사들의 기부 소식이 잇따라 들려와 혹한의 연말을 훈훈하게 하고 있다. 지난 15일엔 익명의 주민이 수원시 팔달구 지동 행정복지센터에 쌀(10kg) 101포를 기증했다. 3년 동안 조금씩 모은 돈으로 쌀을 구입했다는 그는 함께 보낸 편지에서 “나도 시각장애 3급으로 한국실명예방재단의 도움으로 계속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재단의 도움을 받으면서 나 역시 어려운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여행이란 ‘자신이 사는 곳을 떠나 유람을 목적으로 객지를 두루 돌아다니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시대의 여행은 최대한 많은 여행지를 돌아보는 것이 최고의 여행이던 예전과 달리 호캉스나 촌캉스처럼 한곳에 오래 머무르며 휴식을 취하는 등의 다양한 형태로 진화했다. 결국 현대의 여행이란 ‘객지를 두루 돌아다닌다’는 의미보다 ‘자신이 사는 곳’, 즉 생활에서 ‘떠난다’에 중점을 둬야 한다. 익숙한 곳에서는 일정한 틀이 생긴다. 반복되는 삶 속에서 사람들은 안정감과 효율성을 얻지만 쳇바퀴를 돌리듯 재미없는 생활에 쉽게 피로해진다. 인류가 삶의 터전을 바꾸며 떠돌아다니던 유목역사가 600만 년, 농경사회에 접어들며 정착한 역사가 6,000년임을 감안할 때 유목민 시절을 기억하는 인류의 유전자는 주기적으로 간절히 떠나고 싶어 하는 걸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