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날 들었던 생각이다. 모른다. 나는 알지 못한다. 굳이 안다면, 그 어떤 것도 모른다는 사실뿐이다. ‘나는’과 ‘모른다’ 사이의 괄호에 어떤 단어를 적어 넣어도 무방하다. 나는 (구름을) 모른다. 나는 (바람을) 모른다. 나는 (햇살을) 모른다. 구름도 바람도 햇살도 모르는 내가 사람과 도시와 세상을 알 턱이 없다. 사람은 고사하고, 사람이 만들어내는 온갖 것들에 대해. 이를테면 미움이라든지 사랑이라든지 바름이라든지 그름 같은 것을 모른다. 모른다. 나는 알지 못한다. 안다고 끄덕였던 적도 있었는데 부끄러운 고갯짓이었다. 교과서 몇 권 읽었다고 안다고 믿는 건 착각이다. 앎이란, 그렇게 하자는 인간의 약속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니까. 모른다. 나는 알지 못한다. 하물며 새가 왜 우는지조차 나는 모른다. 우는지, 웃는지, 부르는지, 화내는지, 노래하는지,..
경기도가 도정 최초로 실시한 ‘2023 기회 경기 워크숍’이 화제다. 김동연 지사를 비롯해 부지사, 실국장급, 산하기관장 등 80여 명 참여한 정책 대토론회는 집단토의방식으로 정책을 도출하는 실험적 행사였다. 이번 워크숍은 참석자들은 물론 전국 공직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던진 것으로 평가된다. 모든 정책의 입안과 수행과정에서 ‘집단 지성’을 탐색하는 과정을 거치는 방식으로 공직 수행 프로세스가 혁신되길 기대한다. ‘울트라 마라톤’급 토론 시간 외에도 이번 워크숍에서 눈길을 끈 것은 사전 자료·스마트폰·시간제한이 없는 ‘3무(無)’ 조건부터 특이했다. “실현 가능성을 따지지 말고, 계급장 떼고 아이디어를 내보자”는 김 지사의 제안에 간부들이 응하면서 토론이 성사됐다는 후문이다. 김 지사가 워크숍에 앞서 강조한 기득권·세계관·관성..
‘희망찬 새해’란 새해인사는 우리 모두가 좋아하지만 특별히 국가차원에서 희망이 넘치는 새해였으면 좋겠다. 그런데 현실은 우리의 바람과는 너무나 다르게 암울하다. 지난 3년간 지속되어온 코로나19와 러-우크 전쟁, 미-중 갈등상황 등 여러 가지 원인으로 경제상황은 최악으로 치닫는 듯하다. 거기다 북한의 지속적인 미사일 도발로 불안감은 배가되고 나아가 정치권의 극한대립은 ‘희망찬 새해’란 말을 무색해한다. 하늘의 도움을 기대하며 희망을 펼치고 꿈과 비전을 갖는 일은 중요하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희망이 바람이 아닌 현실이 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찾아서 해야 한다고 본다. 집값상승을 막기 위해 온 나라가 시끄러웠던 것이 불과 9개월 전인데 이젠 집값하락을 걱정하고 있는 것을 보면 경제정책의 한계를 본다. 금년의 경제상황이 호전되길 기대하나 정부의 대책도 그리 희망적이진 않은 것 같다. 그렇지만 우리가 하기에 따라서는 희망찬 한 해를 보낼 수 있는 분야가 있다. 바로 분열상황을 통합의 길로 바꾸어 그 응집된 힘으로 희망을 현실화할 수 있는 분야, 바로 남북관계다. 남북관계의 재개는 불안을 벗어나 평화와 안정을 가져오고 관계회복에 따른 대외 이미지 제고, 개성공단의 재개와 대북투자의 활성화, 그리고 코로나19의 완화에 따른 중국관광객의 서울-금강산 연계 관광으로 폭발적 관광수요가 기대되는 여러 방면의 경제적 후과로 우리의 경제성장 동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악화일로의 남북관계를 어떻게 해야 새롭게 바꿀 수 있을까. 무엇보다 북한을 바라보는 기본 인식틀을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도발만을 일삼는 악마가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갖고 그들 나름 행복한 삶을 꿈꾸는 정치공동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역지사지(易地思之)를 하면 현 남북관계 상황의 정확한 진단이 가능하고 문제해결의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 6·25 전쟁 시 맥아더의 핵공격계획. 1958년의 전술핵 남한배치, 90년 초 소련을 위시한 사회주의권 붕괴로 인한 극도의 안보불안, 미국의 북미수교 거절과 대북적대시정책의 지속, 1,2차 핵위기에서 보여준 미국의 기만(2003년 북한 경수로 건설지원사업의 공정률은 40%에 못 미쳤다), 2018년의 남북, 북미정상회담에서의 희망과 2019년 하노이 회담에서의 배신 등에서 불신의 늪은 계속해서 깊어졌고 안보불안에서 벗어날 길은 핵 보유 정책의 지속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을 것이다. 그들 표현대로 안보가 담보된다면 핵을 고집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 선 핵 포기는 죽음이라고 인식하는 자존감, 하노이 회담에서 주장했던 대북제재의 완화 해제를 통한 경제성장 발전의 길 모색 등 북한의 속내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북한의 변화된 자세를 요구하기 전에 먼저 우리가 정책전환의 의지를 보이고 진정성 있는 대화 제의를 한다면 희망찬 새해의 첫걸음을 내디딜 것이라 확신한다.
집단상담에서 사람들이 각자의 이야기를 쏟아낸다. 한 20대 여성이 자신이 마약중독임을 밝힌다. 그녀는 8년 전 남자친구의 권유로 마약을 시작했다. 여러 번 끊을 시도 했고 그 횟수만큼 고통스럽게도 실패했다. 그 과정에서 정신병원에 수차례 입원했다. 병원에서 퇴원하는 순간 정말 다시는 안 하겠다 굳게 결심하지만 지속되지 않았다. 정말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으로 마약을 끊고 이 상담에 참여했다. 그녀는 마약을 우연히 접하였다가 삶의 수렁에 빠진 사람의 회복을 돕는 마약중독재활치료사가 되길 바란다. 그녀의 모습이 낯설지만 반갑다. 삶의 속성으로 따라오는 고통에 대해 우리는 기분을 전환해 주어 일시적으로 고통에서 이탈하게 해 주는 어떤 것들을 때때로 선택한다. 맛있는 저녁식사가 될 수도 있고 혹은 일을 끝마친 후 치킨과 맥주일 수도 있다. 속상하다고 훌쩍 밖으로 나가 피우는 담배 한 가치는 건강하지는 않지만 일상의 한 부분일 수 있다. 문제는 물질중독, 사용장애이다. 여기서 물질은 뇌에 영향을 미쳐 의식이나 마음상태를 변화시키는 것을 말한다. 물질 사용에 장애가 되는 경우는 △물질 사용을 통제할 수 없거나 △사회적 책임을 이행할 수 있는 능력이 물질 사용으로 인해 훼손되거나 △신체적으로 위험한 상황에서 물질을 사용하거나. △사용 및/ 또는 의존성의 신체적 징후를 보이는 경우의 크게 네 가지 범주에서 평가하여 진단한다. 마약은 처음에 접할 때 얼마나 건강과 삶을 망가뜨리는지 그녀와 같이 모르기 마련이어서 문제가 된다. 오랫동안 마약과의 전쟁을 벌여온 미국이지만 마약거리라 불리는 필라델피아 켄싱턴 에비뉴의 보도영상은 충격적이다. 거리에는 합성마약인 펜타닐에 중독된 사람들이 배회한다. 고개를 숙이고 구부정하게 혹은 비틀린 좀비 같은 자세로 느리게 움직이거나 정지해 있다. 2020년-2021년 미국 18~49세 청장년층의 사망자가 코로나 19로 인한 사망자보다 많다. 미국의 마약성진통제 중독자는 1000만 명으로 추정된다. 펜타닐은 금단증상으로 신체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극심한 통증을 느끼게 되기 때문에, 한 번 의존하고 나면 그 약을 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약을 끊지 못하고, 결국에는 양을 늘리다 보면 호흡 마비까지 오게 되며 사망에 이를 수 있다. 인류가 개발한 마약성 진통제 중에서 가장 강력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서, 호기심에서라도 절대 손을 안 대면 안된다. 국내에서도 펜타닐을 포함한 마약중독자가 늘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마약 투약의 연령이 낮아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2020년 이후 마약 투약의 주요 연령대는 20대가 되었다. 최근 19세 이하 청소년 마약 사범의 증가세도 가팔라지고 있다 정부는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하며 마약 단속에 나섰다. 하지만 처벌보다는 치료와 재활에 집중해야 한다. 마약중독은 단약과 치료, 사회 복귀에 이르는 전 과정에 포괄적 개입이 필요한 질환이기 때문이다. 치료가 되지 않는 병은 반드시 재발하기 마련이다.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아이들의 예비 소집이 시작됐다. 아이들의 얼굴에는 긴장과 기대감이 교차한다. 그런데 일부지방 학교에서는 신입생이 0명이어서 입학식조차 열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저출산으로 인한 학령인구 감소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는 가운데 현재까지 전국 지방 소재 초등학교 수십 곳에서 입학생이 단 한명도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충북의 경우 초등학교 예비 소집이 마무리됐지만 청주 내수읍 수성초 구성분교와 미원초 금관분교 등 6곳은 취학 아동이 없어 신입생을 받지 못할 것 같다. 전북에서도 신입생이 1명도 없는 초등학교가 군산 어청도초, 신시도초야미도분교, 임실 신덕초, 부안 위도초식도분교 등 4개교나 된다. 학생이 1명도 없어 현재 휴교 상태인 곳도 있다. 학교 소멸이 현실화하고 있음은 지난해에만 전국에서..
한 독일인이 있었다. 21세 약관의 나이에 베를린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저명한 신학자 칼바르트는 그가 쓴 박사학위논문을 “신학적 기적”이라 평할만치 세상은 천재의 출현을 반겼다. 24살에 베를린대학 신학부 교수가 되고 25살에 목사안수를 받았다. 촉망받는 신학자이자 목사로서의 삶은 27살 나치가 집권하면서 뒤틀리기 시작했다. 당시 독일의 많은 교회들이 히틀러를 그리스도에 비유하며 우상숭배에 휩쓸리자 그는 히틀러에 반대하고 기독교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고백교회운동의 지도자로 나서게 된다. 그가 나치에 저항하는 활동에 투신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게슈타포의 감시를 받던 그는 망명권유조차 거부한 채 활동을 이어가다 1943년 4월 결국 체포되어 히틀러암살모의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독일패망 한 달 전 교수..
요사이 북한 무인기의 대한민국 침투 문제로 시끄럽다. 이 사안은 크게 세 종류의 문제점을 포함하고 있다. 하나는 무인기를 격추시키지 못했다는 점이다. 두 번째 문제점은, 무인기의 정확한 비행 궤적을 제대로 확인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됐다는 점이다. 세 번째 문제점으로, 비행 궤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음에도, 용산 비행 금지 구역 진입 가능성을 언급한 야당 의원의 주장에, 그렇지 않다며 “강한 유감”을 표명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이 세 가지 문제점은 어느 하나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중차대한 사안들이다. 더구나 국정원도 북한 무인기가 용산 대통령실을 촬영했을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매우 심각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심각한 상황은 앞으로 절대 반복돼서는 안 되기 때문에. 왜 이런 문제점들이 불거지게 됐는가..
“다량의 빛과 그늘을 찾아라. 나머지는 저절로 온다. 그것은 종종 별로 중요치 않다.” 별로 중요치 않은 것, 이것이 현대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프랑스 예술혁명의 화신이자 현대미술의 아버지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의 이야기다. 화폭의 새 지평을 연 그를 세기의 지성 에밀 졸라는 경탄했고, 미셸 푸코는 100쪽이 넘는 글로 분석했다. 1832년 1월 23일 파리 7구 부르주아 집안의 아들로 태어난 마네. 부친 오귀스트 마네는 법무부장관의 비서실장이었고, 모친 외제니 데지레는 스톡홀름에 주재하는 외교관의 딸이었다. 근엄한 가문에서 자랐지만 상당히 엉뚱하고 왕정주의자였던 외삼촌 덕에 일찍 예술계에 눈을 떴다. 해군 함장이었던 외삼촌은 에두아르와 그의 동생 외젠을 데리고 자주 루브르 박물관을 찾았다. 그는 조카들에게 대가들의 그림을 비평했고, 특히 스페인관을 찾을 때는 더욱 열정적이었다. 해군장교에서 화가로 꿈을 돌린 마네 열두 살에 마네는 뤽상부르공원 근처 롤랭중학교에 입학했다. 공부에 흥미가 없어 성적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러나 이 학교에서 그의 귀중한 자산이 될 앙토냉 프루스트를 만났다. 마네는 푸루스트과 함께 외삼촌을 따라 루브르 전시실을 어슬렁거렸다. 열여섯이 된 마네는 해군에 입대하고자 선발시험에 응시했다. 결과는 낙방이었다. 그 후 견습 선원이 돼 리우데자네이루행 배를 탔다. 7개월간의 여행 속에서 팀원들과 장교들을 열심히 스케치하며 미술을 한시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여행 도중 매독에 걸려 프랑스로 돌아와야 하는 불상사가 벌어졌다. 결국 부모님의 뜻에 따라 다시 해군사관학교 시험에 도전했다. 역시 불합격이었다. 두 번의 고배를 마신 마네는 아버지를 설득해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미술대학 입학 대신 당대 최고의 미술교수였던 토마 꾸튀르(Thomas Couture)의 아틀리에에 들어갔다. 여기서 6년간 그림의 기초를 연마했다. 초년병시절 마네는 유명화가들의 그림을 모작했다. 친구인 외젠 들라크루아의 허락을 받아 그의 작품 ‘지옥의 단테와 베르길리우스’ 즉, ‘단테의 작은배’를 카피해 그린 것은 유명하다. 한편, 마네는 파리 이탈리아가(街) 22번지에 있는 카페 토르토니(Café Tortoni)를 자주 찾았다. 19세기 대단한 인기를 누린 이 카페는 사교계의 중심지였다. 여기서 점심을 먹고 마네는 보들레르와 함께 튈르리 공원을 돌아다니며 스케치하곤 했다. 오후 5시가 되면 토르토니로 다시 돌아와 자신의 추종자들과 함께 그날의 스케치를 이야기하며 찬사를 받곤 했다. 이탈리아, 스페인, 네덜란드의 큰 미술관을 돌며 다양한 견문을 넓히는 것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러한 경험은 마네 미술의 원천이 됐다. ‘튈르리의 벨라스케스’였던 마네 풍속화를 즐겨 그린 마네는 스페인왕 펠리프 4세의 궁정화가 벨라스케스와 리베라로부터 큰 영감을 얻었다. 벨라스케스의 도도하고 고귀한 금욕적 낭만에 취한 그는 스스로를 ‘튈르리의 벨라스케스’라고 장난스럽게 칭하곤 했다. 그가 살롱전에 출품한 첫 작품은 ‘압생트를 마시는 남자.’ 루브르 거리를 배회하는 넝마주이 알코올 중독자 코델라의 어두운 초상화였다. 1859년 살롱전에 낼 요량이었지만 들라크루아 외엔 찬성자가 없어 채택되지 않았다. 1862년에 열린 낙선전에 ‘풀밭위의 점심’을 출품했다. 주목을 크게 끌었지만 결과는 또 거부당했다. 나체의 연인과 함께 신사복을 입은 두 남자가 전원 풍경 속에서 앉아 있는 모습은 고루한 신화와는 너무 거리가 멀었다. 아방-가르드인 이 주제는 대중과 비평가의 호평을 받기에는 시기상조였다. 도발적인 이 작품을 어떤 이들은 중상 모략했다. 이탈리아 화가 라파엘이 그린 ‘최후의 심판’의 모작이라는 둥, 티티엥의 ‘야외콘서트’를 흉내 냈다는 둥 왈가왈부 했다. 1863년 그는 또 ‘올랭피아’를 전시했다. 티티엥의 ‘위르비노(Urbino)의 비너스’에서 영감을 얻어 그린 나체 여인이었다. 올랭피아는 마네의 최애 모델 빅토린 뫼랑이었다. 럭셔리한 실크숄 위에 다리를 뻗고 어느 신사가 보낸 꽃다발을 흑인하녀로부터 전달 받는 나체의 올랭피아는 또 한 번 스캔들을 일으켰다. 실패와 구설수의 연속이었다. 뉴보이 마네를 올드한 시류가 전혀 따라가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열심히 밭을 가는 농부에게 때는 꼭 오는 법. 에밀 졸라가 지원병으로 나섰다. 대 문호의 조력과 화가 자신이 개발한 독창적 스타일은 시너지 효과를 내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시작했다. 곧이어 발표한 ‘앙리 로슈포르의 초상화’가 아카데미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프랑스 정부는 마침내 마네에게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했다.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이었지만 결국 최정상 자리에 올랐다. 그의 나이 마흔아홉이었다. 마네는 언젠가 이런 말을 했다. “일등석은 주어지지 않는다. 잡는 것이다.” 이 말을 실현시키기 위해 그는 일생을 달려온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안주하지 않았다. 1년 후 다시 말하면 그가 죽기 직전 ‘폴리-베르제르의 바(Un bar aux Folies-Bergere)’를 내놓아 그의 커리어에 최고점을 찍었다. 뤼에유-말메종(Rueil-Malmaison)에서 그린 이 최후의 걸작은 거울에 비치는 이미지가 많은 논란을 야기하고 지금도 그 논란은 진행 중이다. 어떤 이는 작품 속의 노신사를 마네 자신의 모습으로 해석한다. 자신이 사랑했던 파리의 삶이 폴리-베르제르 술집의 풍경에서처럼 화려하고 유쾌한 것이기도 했지만, 한편 고독하고 우울한 것이기도 했다. 이 작품은 바에서 서빙하는 현대판 여성의 노예화를 풍자하고 낙원과 인류 타락을 우의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대작을 완성한 마네는 그 이듬해 쉰한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뤼에유-말메종 황제가 살다간 역사의 도시 마네는 요양차 뤼에유-말메종으로 갔다. 이동성 운동실조증으로 죽어가던 마네는 치료를 위해 이곳에 정착했다. 파리 서쪽 8킬로 지점에 위치한 뤼에유-말메종은 몽 발레리앙(Mont-Valérien) 구릉과 북쪽 센 강 연안으로 이어지는 뷔장발(Buzenval) 언덕위에 있다. 센 강까지 10킬로의 자연공원 숲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 강이 흐르고 햇빛이 쏟아지는 마을 입구의 풍광은 참으로 기가 막히다. 이 풍경을 화폭에 담고자 인상파 화가들은 화구를 매고 앞 다퉈 몰려들었다. 마네, 모네, 르누아르도 질세라 이곳의 경치를 그렸고 그 그림들은 지금까지 명화로 남아있다. 강둑 위에 즐비하게 늘어선 멋들어진 선술집에서 마네는 친구들과 풍류를 즐겼다. 그 족적은 지금까지 남아있다. 천상의 낙원인 뤼에유-말메종. 황제가 머물렀기에 역사적 귀품이 그윽하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1472 ha의 평원이 펼쳐진 저택에서 살았다. 집정 스타일의 세간을 꾸리기 위해 파리 외곽에 땅을 찾던 조제핀은 1799년 말메종 성을 보고 한눈에 반했다. 그녀는 곧바로 구입해 아름다운 말메종 궁전에서 나폴레옹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1809년 이혼함으로써 나폴레옹은 떠났고 조제핀만 여기 남아 여생을 보냈다. 그녀는 이곳에 유럽에서 가장 아름답고 신비로운 정원을 만들었다. 200 여종이 넘는 식물을 사들여 정성들여 키우고 애정을 쏟은 결과 지금은 유럽 최고의 정원이 됐다. 말메종 성 2층 조제핀 방에 가면 그녀의 아기자기한 자취를 엿볼 수 있다. 파리 여행에서 빠트리면 절대 안 될 곳 하나는 바로 이곳이다. 자동차로 12분이면 당도한다.
한때 필리핀은 아시아에서 가장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모범적 선진국이었다. 그 중심에는 막사이사이(Ramon Magsaysay: 1907-1957) 대통령이 있었다. 가난한 고학생 출신인 그가 하숙집 주인의 운전기사로 일하며 야간대학을 마쳤다는 이야기는 유명한 일화이다. 일본의 필리핀 침략에 자원입대하여 게릴라전에 참여한 그는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해 명성을 쌓고 전후 지역의 군정장관을 거쳐서 국방장관에 올랐다. 국방장관 재임 시에는 부패한 군 지휘관을 숙청하고 정직한 군인을 우대하였다. 공산반군의 거점인 후크발라합 지역의 게릴라들을 진압할 때는 귀순자들에게는 토지와 농기구를 마련해주고 정부군에게는 그들을 무시하지 말고 정중하게 대하도록 명령했다. 농민의 성원 없이는 어느 것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도 이즈음이었다. 1953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된 그는 대통령취임식에 관용차인 크라이슬러 리무진을 거절하고 중고차를 빌려 타고 입장했다. 대통령이 거처인 말라카냥궁을 일반인들에게 개방해 서민들이 직접 대통령을 찾아와 어려움을 호소할 수 있게 했고 가족과 친지들에게는 어떠한 혜택도 거절하였으며 도로, 교량, 건물들에 자신의 이름을 붙이지 못 하게 했다. 가난한 농민 위주의 토지개혁안이 부유층의 대변자였던 의회의 반대로 무산되자 그는 반대파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설득했다. 이렇게 서민을 위한 그의 행보는 끝이 없었다. 손수 차를 몰고 다니다가 눈에 띄는 시골 이발소에서 머리를 자르는 대통령의 모습은 흔히 목격되었다. 아직도 필리핀 곳곳에는 ‘막사이사이 우물’이 있는데 모두 그가 빈민가와 낙후된 지역을 다니면서 설치한 공동우물의 이름이다. 국민의 절대적인 지지와 사랑을 받던 그가 사망한 이후 필리핀의 국격은 급전직하로 떨어졌다. 이후 정치지도자들의 부패와 무능 그리고 국민을 무시하는 행태 때문이었다. 2023년 대한민국의 앞날이 어둡다는 평가가 주를 이룬다. 안보, 외교, 경제 등등 사회 곳곳에 암초가 깔렸다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지도자의 행태이다. 그의 생각과 행동에 따라 국민의 성원과 지지가 뒤따르기 때문이다. 남북은 화해의 대상이지 증오의 상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신념을 가진 지도자. 노동자는 우리 산업의 역군이지 결코 기득권에 안주한 세력이 아니라고 인식하고, 가난하고 소외된 서민들은 따듯한 가슴으로 안아 주어야 할 대상이라고 확신하며, 자신보다 국민의 안전이 최우선이라는 일념으로 10.29 참사의 유가족이 가장 크게 위로받아야 할 아픈 사람임을 아는 지도자. 국민을 사랑하는 지도자야말로 국민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을 막사이사이로부터 배울 수 있다면. 막사이사이가 1957년 사망했을 때도 한밤중에 아들이 군에서 총기사고로 사망했다는 국민의 안타까운 전화를 받고 직접 비행기 시찰을 나섰다가 당한 사고였다고 한다. 우린 이런 지도자를 가질 자격이 없는 민족인가? 우리도 이런 지도자로 바뀌는 꿈을 꾸며 대망의 2023년을 맞이해 보자.
공공형(공익형) 노인 일자리는 60세 이상 노인이 공익활동에 참여하고 약간의 보수를 받는 일자리다. 보통 월 30시간동안 일하고 27만 원을 받는다. 주로 환경 미화나 도시락 배달, 시설물 점검 같은 공익활동에 투입된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세금을 축낸다” “질 낮은 일자리” “취업 통계를 부풀린다”는 등의 비판이 나오기도 했다. 실제로 지난해 5월 통계청은 ‘취업자 수가 1년 전보다 86만 명 늘어나 4월 기준으로 22년만에 최대폭으로 증가했다’는 고용동향을 발표했다. 그러나 기획재정부는 “직접 일자리와 고령자 비중이 너무 높다. 재정을 통한 일자리 창출은 지속가능하지 않다”고 평가했다. 이 같은 평가는 질 낮은 공공형 노인 일자리를 비판한 것이다. 이에 윤석열정부는 2023년부터 6만 1000개의 공공형 노인 일자리를 없애겠다고 밝힌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