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시청률이 줄어들고 있는 추세지만 특히 2022년은 더 줄었다. (시청률은 닐슨 자료이며 기간은 1/1 – 12/10까지의 년간 집계치임) TV 가구시청률의 합이 2017년 40% 에서 5년 후인 2022년 32% 로 줄었다. 동기간 지상파는 16.9% 에서 10.7%로 대폭 줄었지만 종편, CJ계열 채널 등 비지상파는 23.2%에서 21.3%로 약간 감소되었다. 지상파방송의 세대별 시청률을 보면 이런 현상의 원인이 뭐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2022년 현재 개인시청률 기준 베이비부머 세대는 7.3%, X세대 4.6%, M세대 1.9%, Z세대는 0.86% 다. 베이비부모 세대가 M세대의 3.5 배 이상 Z세대의 8.5 배의 시청량을 보이고 있다. TV는 특히 지상파는 중장년 세대의 놀이터다. 신문은 말할 것 없고 TV도 잘 안 보는 M, Z세대가 성장한 10년 후 미디어 업계의 모습..
1980년대 한국.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도 낭만과 인정은 살아 있었다. 민주화를 위한 갈망으로 시위가 끊이지 않고 이들을 저지하는 경찰 기동대는 살벌했다. 사이렌이 울리고 돌과 화염병이 날아가고... 모진 풍파 속에서도 대한민국 청년들은 꿋꿋하게 그들의 젊음을 만끽했다. 대학가요제가 열리고 청바지에 통기타를 맨 선수들이 출전해 멋들어진 노래를 하고, 수상작들은 순식간에 전국으로 퍼져 나가고. 이런 여유 덕에 우리는 그 어려운 시대를 살아낸 것이 아닐까. 그 추억 속에 ‘모모’가 있다. 가수 김만준 씨가 불러 대히트한 곡. “모모는 철부지 모모는 무지개 모모는 생을 쫓아가는 시계바늘이다 모모는 방랑자 모모는 외로운 그림자(...) 날아가는 니스의 새들이 꿈꾸는 모모는 환상가(...) 인간은 사랑 없이 살수 없다는(...)” ‘모모’는 모하메드의 애칭 발랄하고 경쾌한 이 노래가 흘러나오면 우리는 그저 흥얼거렸다. 하지만 이 노래의 가사는 결코 간단치 않다. ‘모모(Momo)’. 모하메드의 애칭이다. 열 네 살의 알제리계 소년. 그는 파리 20구 벨빌(Belleville)에 있는 로자 아줌마네 집 7층에 산다. 이 아줌마는 아우슈비츠에서 생환해 매춘부 생활을 했다. 그녀는 젊은 동료가 버린 모모를 애정으로 돌봐준다. 죽을병이 들었지만 병원 가길 거부한다. 영리하고 예의바른 모모는 그녀를 열심히 간호한다. 소설 ‘자기앞의 생(La vie devant soi)’의 줄거리다. 작가 에밀 아자르(Emile Ajar)는 노후와 죽음의 공포를 사랑의 공동체가 유쾌하게 격퇴하는 훈훈한 이야기로 승화시켰다. 1975년 프랑스 최고의 문학상, 공쿠르상을 받은 ‘자기앞의 생.’ 프랑스 아카데미는 그해 이 상의 주인공 에밀 아자르를 호명했다. 하지만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프랑스 사회는 술렁였다. 무슨 일이지? 에밀 아자르는 도대체 누구지? 나흘째 되던 날, 수상자는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상을 받지 않겠다는 통보만 했다. 아카데미 위원회는 “공쿠르는 수락할 수도 거절할 수도 없는 상이다. 만약 이 상을 원치 않는다면 아자르씨가 상금을 다른 작품에 줄 자유가 있다”라고 반박했다. 작가들의 로망, 공쿠르상을 거절한 에밀 아자르 왜 이런 해프닝이 벌어진 것일까? 에밀 아자르는 다름 아닌 로맹 가리(Romain Gary)였기 때문이다. 1956년 ‘하늘의 뿌리(Les Racines du Ciel)’로 이미 공쿠르상을 받은 가리. 이 상은 한 번 타면 더 이상 탈 수 없는 규칙을 깨고 가명으로 또 다시 응모한 것이다. 이런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프랑스 아카데미는 공쿠르상을 그에게 수여했다.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자 가리는 그만 당황했다. 자신이 에밀 아자르라는 것을 밝히면 얼마나 큰 비난이 쏟아질 것인가? 여변호사 지젤 알리미는 가리가 언론의 신랄한 비판을 피하고 조용히 작품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이 상을 거절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러나 가리는 이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사촌동생 폴 파블로비치를 에밀 아자르로 분장시켜 언론과 인터뷰를 시켰다. 기발하고 파격적인 로맹 가리. 일주일에 600페이지 분량의 원고를 쓴 천재 작가였다. 그가 공쿠르상을 받은 두 작품 모두 1주일 만에 쓴 것이다. 신이 인도해 글을 썼다는 말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는 작가 외에 비행사, 레지스탕스, 외교관, 엽색가였고 드라마 작가에 영화감독까지 다재다능했다. 영화촬영 중 당시 최고의 미국배우 진 세버그(Jean Seberg)와 결혼해 세상을 놀라게 했고, 늙는 게 싫어 1980년 12월 권총자살을 함으로써 또 한 번 세상을 발칵 뒤집었다. 그의 삶은 불가사의한 일들의 연속이었다. 로맹 가리는 프랑스 이방인 프랑스를 쥐락펴락했건 가리. 그는 리투아니아 태생이다. 아버지 얼굴도 모르는 이 소년은 러시아 소극단 배우였던 어머니 손을 잡고 1927년 프랑스 니스(Nice)에 도착했다. 이들은 러시아 볼셰비키혁명을 피해 폴란드로 이주했지만, 그곳의 유대인 박해가 극에 달하자 이곳으로 피난 왔다. 이 모자(母子)는 니스의 셰익스피어 거리에 있는 메르몽 여관에 한 동안 머물다 소나무 숲 해안가 마을 로크부륀(Roquebrune)에 정착했다. 어머니 미나는 로맹을 매우 좋아했고 그를 위해 뭐든 했다. 그녀는 네그레스코(Negresco) 호텔 매점에서 향수, 라이타 등 잡동사니를 팔았다. 미나는 아들에게 프랑스 문화를 열심히 가르쳤다. 로맹은 매년 열리는 니스의 카니발을 좋아했다. 이러한 소년기를 로맹은 그의 자전적 소설 ‘동틀녘 약속(La promesse de l'Aube)’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의 욕망과 가난이 어우러지고 어머니와 아들의 진한 사랑이 그려져 있다. 니스, 로맹 가리의 오아시스 ‘하얀 개’에서 그는 “나의 사랑하는 도시 니스는 내 고향이나 다름없다”라는 말을 했다. 로맹은 이곳에서 초·중학교를 다녔고 프랑스 국적을 받았다. 그 후 엑상프로방스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파리로 떠나 아카데미 회원이 됐고 프랑스 대사가 됐다. 그는 “나는 프랑스 피가 한 방울도 들어있지 않다. 하지만 내 예술적 영감에는 항상 프랑스가 있다”라는 말을 했다. 프랑스 중에서도 로맹이 예술적 영감을 가장 많이 받은 니스. 그는 이곳을 잊지 못하고 자주 찾았다. ‘자기앞의 생’에서 그는 니스를 숲으로 둘러싸인 바닷가의 오아시스로 표현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우정에 눈뜨고 사춘기를 겪으며 소설을 쓰기 시작한 곳, 이곳이 바로 지중해 곁 니스였다. 그래서일까. 그의 최고의 친구는 지중해였고, 죽으면 화장해 지중해에 뿌려 달라는 말을 자주 했다. 이런 로맹 가리를 니스 시도 사랑했다. 가리 산책로를 만들어 로맹 가리에게 헌정했고, 니스의 전통 도서관 이름을 로맹 가리로 바꿨다. 그리고 자유로운 프랑스의 영웅, 외교관, 사랑스런 인간, 작가 등 최고의 이름들을 붙여줬다. 모모와 로자 아줌마의 ‘자기앞의 생’의 훈훈한 관계를 다시 한 번 재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니스는 파가니니, 마티스, 니체 등 수 많은 인물이 머물다 간 곳이기도 하다. 예술가, 철학자들이 사랑한 이곳, 프랑스에서 다섯 번째로 큰 도시다. 코트 다쥐르(Cote d'Azur: 지중해 연안)에 펼쳐져 일 년 내내 햇빛이 반짝인다. 따뜻한 기온과 포물선의 도시 니스는 해수욕장이 너무 아름다워 수많은 관광객이 몰려든다. 하지만 이 광경이 니스의 전부는 아니다. 언덕을 굽이굽이 넘어 계속되는 영국인 산책로. 니스 한 가운데의 파이옹 산책로(Promenade du Paillon)에서 몽 알방(Mont Alban)까지 이어지는 42킬로 해안길. 거기서 만나는 지중해의 희귀한 군락지들. 대장관이다. 콜린 뒤 샤토(Colline du Château)에서 바라본 파노라마와 도시 중앙의 녹색정원은 어떠한가. 푸른 지중해를 제압하여 독특한 장면들을 연출하지 않던가. 서쪽 해안가에 있는 투르 벨랑다(Tour Bellanda). 연인들이 누워 석양을 바라보기에 최상이다. 거기에 기암괴석들이 만드는 풍경, 19세기의 고전적 별장들, 코코비치(Coco Beach)의 경이로운 해안선. 1년 내내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 이유다.
송곳니로 물어뜯었다. 아니, 송곳니를 깊숙이 박고 나머지 이빨로 물어뜯었다는 게 적확한 표현이다. 물어뜯는 이빨의 무작스러움은 악다문 턱뼈와 흔들어대는 모가지 근육을 통해 그대로 전달되었다. 으르렁거릴 때마다 까뒤집어진 잇몸 사이로 침이 번들거렸다. 번들거리는 침에서 개 사료 냄새가 났다. 비릿한 동물성 사료 냄새에 비위가 뒤틀렸다. 도사견과 세퍼드의 잡종쯤일까. 대가리를 흔들며 물어뜯을 때마다 덩치 큰 개의 살집이 덩달아 출렁거렸다. 개는 두 개의 눈을 송곳니처럼 내 얼굴에 박고 놓아주지 않았다. 타깃이 된 나의 얼굴이 개의 눈동자에 고스란히 비쳤다. 겁에 질린 얼굴이었다. 땅끝 마을에는 드문 눈이다. 삼년 만에 내리는 함박눈이라고 했다. 첫눈치고는 소복하여서 해남 천지가 함박꽃이다. 눈꽃을 만끽하려 나섰다가 개를 만났다. 딸기농사..
분단 이후 최초로 3·1절 행사를 남북 민간단체에서 공동으로 개최하였다. 2003년 3월 1일 북측대표단 105명이 방한하여 워커힐 제이드가든에서 역사적인 3.1민족대회가 열렸었다. 이때 있었던 재미있고 의미있는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한다. 6·15남북정상회담 이후 남북간 회담, 공동행사 등이 자주 열렸다. 이때 남북간 만남의 장에는 항상 통일부와 국정원, 북에서는 통전부와 국가안전보위부 요원들이 행사의 지원을 위해 참석하였다. 남북교류협력법과 국가보안법이 함께 적용되는 남북관계의 법질서의 단면을 보여주는 현실이다. 국방백서에 ‘주적’을 넣는다. 만다.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첫날의 3·1민족대회 행사도 의미 있었고, 이튿날 일요일에는 북한종교인들이 우리의 종교시설에서 남북이 함께 종교의식을 치렀다. 불교는 봉은사, 천주교는..
올 한해 글로벌 인플레이션의 혹한기 속에서 모두가 생존을 위한 치열한 하루하루를 지내왔다. 하지만 “한국경제가 침체의 경계선에 서 있다”는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의 언급처럼 내년에도 전망은 밝지 않다. 정부와 국민의힘은 오는 2027년 ‘국민소득 4만 달러 시대’를 목표로, 내년에 과감한 규제 혁신 등을 통한 수출‧투자 드라이브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제시했다. 이를 위해 연금‧노동‧교육을 포함 금융, 서비스 등 5대 개혁에 총력을 기울이기로 했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대전환 시대에 특히 연금‧노동‧교육 개혁은 우리 미래의 사활이 걸린 발등의 불이다. 최근 정부는 각 부문별로 대책을 잇따라 내놓고 있지만 구체적인 로드맵이나 시기 등에서 긴장의 끈을 더 바짝 조여야 한다. 대통령실과 정부는 연금개혁안을 내년 10월 확정해 현 정부 임기말인 2..
비운의 의병장이었다. 1567년 태어나서 1596년에 옥사했다. 스물아홉. 빛고을 광주 충장로는 충장공 김덕령의 거리다. 이 특별한 젊은이의 죽음은 400년이 훌쩍 넘은 오늘에도 너무나 아깝다. 화난다.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대로 돌아가 그 더러운 정치에 들쥐 잡는 들불을 놓고 싶다. 전주이씨들 보다 자부심이 강한 광산김씨다. 율곡과 함께 서인의 원류 유학자 성혼(成渾)의 제자로서 또래들에게 뒤지지 않는 학식을 갖췄다. 열너댓 살 소년이 이미 전국 제일의 씨름꾼으로 이름을 얻었다. 궁술과 기마 등 무사로서의 역량도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문무를 겸비한 국보였다. 어린 나이에 벌써 맨손으로 호랑이를 잡았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괴력의 소유자였다. 자당께서 호랑이를 품에 안는 태몽으로 얻은 아들이었다. 태생적으로 특별한 운명이었다. 중국에 이른바 '4대 기서'(삼국지 수호지 서유기 금병매)가 있다. 내게는 수호지가 1번이다. 나는 '위대한 왕초' 송강(宋江)의 혈맹 공동체인 충의 두령 108명을 모두 좋아한다. 존경한다. 내가 그 시대 山東의 청년이었다면, 해방구 '양산박'(梁山泊)에 들어가서 무송, 노지심, 임충, 흑선풍 등과 우애하며 살았을 거다. '역발산기개세'(力拔山 氣蓋世:힘은 산을 뽑고, 기운은 세상을 덮는다)! 덕령은 항우의 후예들 가운데, 맨손으로 호랑이를 잡았던 무송(武松)의 조선판이다.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왜군 20만 명이 쳐들어왔다. 모친상으로 3년을 시묘(侍墓)하던 덕령을 임진왜란이 불러냈다. 그는 난세의 한가운데로 돌진한다. 1593년 담양에서 5천 명으로 거병했다. 스물여섯 살이었다. 덕령은 전국적인 명성에 걸맞게 특히 경상도 서부 지역에서 곽재우와 협력하여 혁혁한 전과를 올린다. 이후 조정의 명령으로 이순신과 수륙연합전투를 전개하여 역시 왜적을 대파한다. 덕령의 진가가 본격적으로 발휘될 무렵, 일본과 명나라가 평화협상을 진행하면서 전쟁은 소강상태로 들어간다. 전장을 종횡무진하며 왜적을 섬멸하고, 활인 구세(活人救世)를 이루려고 의병을 일으킨 영웅에게는 참으로 힘든 시간이었다. 이때 '이몽학의 난'(1596년)이 발발했다. 왕족의 서자 출신 몽학은 국난상황을 악용, 본인이 왕이 되려는 야망을 품고 거침없이 진군, 관군과 의병 연합군을 연파했다. 세력은 천명에서 수천 명으로 급증했다. 조정을 거부하는 민심 탓이었다. 왕은 덕령을 진압책임자로 명했다. 반란은 이몽학이 부하에게 참수됨으로써 끝이 났다. 문제는 주동자들이 김덕령, 곽재우 등이 이몽학과 협력한다는 루머를 퍼뜨린 것이었다. 그 '가짜뉴스'는 선조가 덕령을 죽이는 유용한 재료로 쓰였다. 최악의 정치다. 덕령은 보름간 정강이가 동강 나고 피부가 다 벗겨지는 지옥고문 끝에 요절한다. 이어서 이순신도 같은 고문을 당했다. 임금이 한 짓이다. 구국의 영웅들을 미워했다. "역사는 반복된다. 한 번은 희극으로, 또 한 번은 비극으로..."
대장동 사기 사건의 종범인 전 성남도시공사 기획본부장 유동규 씨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정진상 씨가 대한민국을 먹자고 말했다" 고 밝힌 바 있다. 정 씨는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측근이자 정치적 동지다. 그런 그가 대한민국을 먹자고 비속어로 표현한 속내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건 체포되면서 한국의 민주주의 운운한 것과 정면 배치된다는 점이다. 민주주의는 점령이나 통치, 권력을 통한 부패를 뜻하지 않는다. 무심코 뱉은 말 한마디에 사안의 본질이 들어 있기도 하기 때문에 정 씨의 말을 지나칠 수 없다. 그 야심에 대입해보면 대장동 키맨 김만배 씨가 천화동인 1호에 1억 465만 원을 출자해 이름 그대로 만 배의 수익(1208억 원)을 올린 것도 이해 못할 바 아니다. 김 씨의 소유든 "이재명 측 소유라고 들었다"는 공범 남욱 변호사의 전언이 진실이든 터무니없는 야심이 한국 현대사회에 칼을 꽃은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장동이라는 칼날을 뽑지 않고서는 우리 사회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대장동을 깔끔하게 정리하지 못하면 민주당이나 국민의힘당도 존립 자체가 어려워질 수 있다. 대장동 사기 사건은 그만큼 한국 사회에 있어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것이다. 톺아보면 가장 먼저 부동산이라는 한국 사회의 역린을 건드린 것을 들 수 있다. 김낙연의 '한국의 부의 불평등, 2000~2013년 : 상속세 자료에 의한 접근'(『경제사학』 40권 3호)에 따르면 2011년에서 2013년까지 기간 동안 한국 상위 10% 인구가 소유하고 있는 자산은 무려 국가 전체 자산 중 65.1%다. 국가 자산의 3분의 2 가까이 소유하고 있는데 중심이 부동산인 것이다. 살인적 양극화 주범이 불로소득에 따른 부동산이라는 것은 한국 사회가 봉건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실증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상황에서 대장동은 봉건제 늪에 더욱 깊이 빠져들게 하였다. 문제는 이처럼 심각하다. 손낙구의 『부동산 계급사회』에서 '부동산 오적'으로 제시한 재벌·관료·언론·관변 지식인·정치인 등 대부분이 대장동에 연루된 것은 물론이다. 뿐만 아니라 법조인, 조폭까지 포함돼 기존의 권력형 부동산 범죄 수준을 간단히 뛰어넘었다. 다음으로 자치 권력도 괴물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중앙 권력의 분권은 시대적 필연이다. 그런데 성남시가 인허가권을 휘두르며 대장동을 초래했으니 자치 권력도 강력한 민주적 통제가 이뤄지지 않으면 타락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것이다. 이밖에 대형 권력형 범죄는 지금과 같은 정보 사회에서도 은폐될 수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 많은 중앙 언론사가 아닌 지역의 소규모 인터넷 매체가 가장 먼저 대장동을 보도한 건 무엇을 뜻하겠는가. 대장동 수사는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부동산을 통한 양극화를 인위적으로 가속화한 것이나 자치 권력의 사유화 등은 한국 사회에 깊은 상처로 남을 것이다. 이 칼날을 뽑아내는 힘은 어디에 있을까? 잘못된 정치, 잘못된 권력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데 있지 않을까?
본보는 지난 19일자 1면 ‘어디로 가야 할지… 영하 20도 한파에 갈 곳 잃은 노숙인들’ 현장 기사를 통해 매서운 한파에 고통을 겪고 있는 노숙인들의 처지를 보도했다. 수원시가 야간 순찰을 통해 노숙인의 건강 상태와 안전을 확인하고, 한파 대피소를 임시적으로 개방했으며, 숙식을 제공하는 수원 다시서기 지원센터 ‘꿈터’도 있지만 노숙인들의 이용률이 저조하다는 내용이다. 노숙인 보호 시설이 일시 거처 수준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의견도 소개했다. 그러나 근본적인 노숙인 대책은 일자리다. 지난 5월부터 10월까지 한국철도공사와 수원시, 수원다시서기노숙인종합지원센터가 힘을 합해 수원역 주변에 상주하는 노숙인들에게 환경미화 일자리를 제공했다. 한국철도공사는 일자리와 급여를, 노숙인종합지원센터는 참여자를 선발하고 수원시는..
형사피고인은 유죄의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된다(헌법 제27조 제4항). 피의자에 대한 수사는 불구속 상태에서 함을 원칙으로 한다(형사소송법 제198조 제1항). 형사재판은 검사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경기장에서 진행된다. 재판은 강제력이 담보된 검찰의 수사력을 바탕으로 철저하게 수집된 증거를 바탕으로 진행된다. 피고인이 증거를 제출하기도 하지만 수사권도 없이 수집한 증거는 한없이 초라해지고는 한다. 검사가 제출한 증거를 탄핵하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하기도 하지만 명확한 불법을 저질러 수집된 증거가 아닌 이상 대부분 증거로 채택된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검사는 고도의 법률 지식을 가진 데다 수사와 공소유지를 업으로 삼은 이들이다. 반면 피고인은 재판을 자주 경험해 봤자 평생 10번을 넘기는 이는 드물다. 대부분 피고인은..
“우리를 기억해 주세요.” 10‧29 이태원 참사 49일 시민추모제가 지난 16일 이태원역 거리에서 열렸다. 무대 위 대형 스크린에는 희생자들의 생전 사진과 유족들이 전하는 메시지가 스쳤다. 진행자는 희생자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호명했다. 그리고 이름 하나마다 “기억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추모는 대상이 되는 사건이나 사람에 대해 기억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는 일이다. 잊지 않는다는 것은 과거의 불행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의지이면서 슬픔을 넘어 현재를 살아갈 힘을 찾아내게 한다. 애도의 한 방법이기도 한 추모는 희생자를 잃은 상실과 슬픔, 그리고 아픔을 유가족과 지인들 그리고 그들을 위로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표현하게 한다. 이런 시간의 누적이 서로를 지지하는 힘을 이룬다. 희생자에 대한 개인의 기억이 미디어를 통하면 사회적 기록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