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지인의 아들이 코로나에 감염되어 고향집으로 내려온다고 기별이 오니 지인 가족들은 비상이 걸렸다. 기숙사가 퇴소 원칙이라니 집에 올 도리밖엔 없는데 아버지는 이불 보따리를 싸매고 운영하는 학원으로 긴급 대피했다. 아들이 집에 있을 때는 매일 신속항원검사를 해야 할 판인데 그것도 무증상자는 유료(3~5만 원)라니 차라리 도망치는 게 최고란다. 지난 26일 국회 대정부질의에서 국민의힘 조명희 의원은 "문재인 정권 5년은 비과학적 정치 방역과 탈원전, 정치가 과학을 압살해 버린 반지성의 시간이었다"며 대정부 질문의 포문을 열었다. 어떡하나? 당신들이 주창한 ‘과학 방역’이 218곳의 선별 진료소를 4개만 남기고 폐쇄한 결과 지금의 재확산에 눈부신 기여를 한 꼴이니 말이다. 졸지에 학원에서 먹고 자고 하는 지인이 울화통..
어느 시대나 신분 상승은 어려웠다. 자신이 처한 불우한 환경을 딛고 남들보다 뛰어난 성취를 이룬 사람들은 그만큼 특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렇기에 그들이 얻은 성취는 더욱 소중하고 빛난다. 하지만 더 어려운 일이 있다. 자신이 얻은 성취를 타인을 위해 내놓는 일이다. 얻는 일보다 내놓는 일이 훨씬 어렵다. 자신의 노력으로 신분과 처지를 바꾼 사람들은 드물다. 자신이 얻은 성취를 어제의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는 사람은 더욱 드물다. 그 드물고 드문 사람의 하나가 박서양이다. 박서양은 1885년 9월 30일, 백정의 아들로 태어났다. 백정과 백정의 자식은 호적조차 부여받을 수 없는 최하층 계급이었다.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사람 취급을 받는 존재였다. 이름도 성도 없이 ‘봉주리’로 불리던 그에게 뒤늦게 ‘박서양’이란 이름과 호적이 허용된 것은 저절로 세상 좋아져서가 아니었다. 대대로 백정이었던 박서양의 아버지는 돈으로 자기 아들 하나의 신분을 사는 대신 갑오개혁으로 시행되던 신분차별 철폐법을 모든 백정에게 확대할 것을 요구하는 탄원운동에 앞장섰다. 백정 아버지의 노력으로 정당하게 존재를 인정받고 이름과 호적을 얻었던 소년은 조선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제중원의 미국인 의사 에비슨의 조수가 되었다. 처음부터 에비슨의 조수는 아니었다. 병원 청소와 잡일을 도맡아 하는 일꾼이었다. 급여도 없는 그 일을 새벽부터 밤중까지 너무도 성실히 해냈기에 그는 모두의 인정을 받았고, 에비슨은 그에게 글을 가르치고 제중원의학교 1기생으로 입학시켰다. 1908년 6월, 박서양은 동기생 여섯 명과 함께 조선인 최초의 양의사가 되었다. 그들의 졸업식은 조선의 권력자들은 물론 한양 주재 외교관들로 성황을 이루었다. 백정의 아들이 거둔 대단한 성취였고 영광이었다. 그러나 진정으로 대단했던 것은 박서양이 자신의 노력으로 얻은 그 성취와 영광을 지금의 자신이 아닌 어제의 자신을 위해 사용했다는 사실이다. 자신은 신분을 바꾸고 영광을 얻었지만 다른 사람들도 모두 그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외과 의사가 된 박서양은 어제의 자신인 불우하고 가난한 동포들을 위해 자신의 의술을 사용했다. 마침내는 조선에서 누리던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만주의 용정으로 가 구세의원을 개업하고 조국을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만리타국으로 떠나온 사람들을 도맡아 치료했다. 독립군과 그들의 가족들 대부분은 돈 한 푼 내지 않고 조선 최초, 최고 의사로부터 진료를 받았다. 홍범도, 김좌진이 이끈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전투에 종군하며 부상자를 치료했던 군의관도 그였다. 고종의 진료를 맡아보며 세브란스의전의 교수 자리에 올랐던 그의 선택은 아름다웠다. 아버지와 자신의 피나는 노력으로 얻은 결과를 성공한 지금의 자신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어제의 나로 살아가고 있는 불우한 동포와 나라를 위해 사용했던 그의 삶은 감동적이었다. 대우조선해양의 하청노동조합원 유최안씨가 가로세로, 높이 1m, 0.3평 철창 속에 자신을 가두고 지내는 동안 마음이 아무렇지도 않았던 사람들은 대체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그를 향해 ‘기다릴 만큼 기다렸다’, ‘경찰특공대 투입을 검토했다’는 말을 하는 분도 있었다. 가장 밑바닥에서 절규하는 유최안과 그의 동료들을 더 아프게 한 사람들이 있었다. 178cm인 유최안이 눕지도 서지도 못하고 꼬박 31일을 지내는 동안 어제의 유최안이었던 대우조선해양노조의 정규직 노조원들이 보여준 모습은 무엇이었나. 하퀴라니, 숨이 턱 막혔다. 오늘의 하청 노동자들이 바로 정규직 노동자의 어제였다. 오늘의 정규직 노동자들이 누리는 그만큼의 권리가 누구의 피와 눈물과 희생으로 획득한 것인지 그들은 한 번이라도 생각해보았을까. 하퀴, 오늘 그들이 내뱉은 그 모욕과 혐오의 언어가 내일은 누구에게 돌아가게 될까. 남으로부터 모욕당하는 자는 반드시 남이 모욕하기 전에 스스로 모욕한다. 참으로 무더운 여름, 오늘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어제의 자신이었던 이들과 더불어 내일을 살아가려고 했던 박서양의 삶을 다시 생각한다.
행정안전부 내 ‘경찰국’ 신설, 지난 26일 국무회의서 의결됐다. 8월 2일에 공포·시행된다. 경찰의 반발도 반발이지만 여론은 부정적이다. 경찰서장 회의를 주도한 류삼영 총경은 대기발령을 받았다. ‘검찰은 되고 경찰은 안 된다’는 이중 잣대의 적용은 박지원 전 국정원장 말대로 ‘검로경불’이 아닐 수 없다. “인사(人事) 앞에 장사(壯士) 없다”는 것이 공무원 조직이다. 경찰공무원의 1인 시위와 릴레이 삭발은 어떻게 보면 목숨을 내건 것과 진배없는 행동이다. 류 총경의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는 발언은 더욱 그렇다. 하지만 이 ‘명언’은 윤석열 대통령이 검사 시절에 한 말이다. 유명세를 떨친 이 말은 윤 대통령에게 되돌아갔다. 대통령은 경찰의 집단행동을 “국기문란”이라고 경고했지만, 도대체 영(令)이 서지 않는다. 한편, 류 총경은 “행안부 경찰국은 경찰의 정치적 중립 훼손”이라고 했다. 이는 내무부 치안본부가 왜 경찰청으로 독립했는가와 맞닿아 있다. 청년 박종철(1987)과 이한열(1987)이 왜 꽃다운 나이에 죽었을까를 생각해봐도 마찬가지다. 그만큼 경찰의 정치적 중립은 시민의 인권과 생명 보호 측면서 중요하다는 얘기다. 다만, 한 가지. 경찰청 독립(1991년) 이후 2015년, 백남기 농민(1년 가까이 의식불명에 있다가 2016년 사망)은 왜 물대포에 맞아 쓰러졌는가?에 대해 경찰 전체의 진지한 숙의가 있어야 한다. 경찰은 공권력 남용, 혹은 ‘과잉 충성’ 행위를 근본적으로 방지할 수 있는 대안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경찰의 정치적 중립이 허언이 되어선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선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에 관한 사회적 공론화가 필요하다. 예컨대,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에 관해 국민과 공무원의 시각엔 차이가 있다. 국민은 ‘공무원이 정파성 없이 일처리 하는 것’을, 다수의 공무원은 ‘국민이 선출한 정권에 충성하는 것’을 정치적 중립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과연, 어디까지가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일까? 이런 문제들에 대한 숙고 없이 윤석열 정부는 행안부 내 경찰국 신설을 졸속으로 강행했다. 경찰청 독립의 취지와 배경은 뒷전에 뒀다. 사회 갈등만 불거졌다. 인사권으로 경찰을 통제하겠다는 낮은 수일뿐이다. 굳이 경찰국을 신설하지 않더라도 경찰 고위 인사에 대한 인사 제청권은 행안부 장관에게 있는데 말이다. 더 이상 공직자인 경찰관이 거리로 나서선 안 될 것이다. 그렇다고 경찰이 간단하게 물러나서도 안 된다. 민주시민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경찰의 독립성을 경찰 스스로 지켜내지 못하면, 경찰은 국민이 위임한 권력을 가질 자격이 없다고 본다. 이 시점에선 국회도 적극 나서야 한다. 입법부가 ‘거친’ 행정부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 입법 취지를 무시하는 시행령이 용납되어선 안 된다. ‘밀어붙이기’ 행정이 능사는 아니다.
지방자치제가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된 것은 1949년이었고 초대 지방의회는 1952년 지방총선거가 실시되면서 탄생했다. 하지만 1961년 5·16이 일어나면서 지방의회는 풀뿌리 민주주의의 꽃을 피워보지도 못한 채 해산됐고 1991년에야 지방의회(기초·광역의원 선출) 선거가 다시 치러지기 시작했다. 이처럼 지방의회가 부활한 지 30년이 넘었다. 올해부터는 지방자치법 전부 개정안이 시행되면서 대변혁을 맞이했다. 지방의회 인사권 독립, 정책 지원 전문인력 도입 등 자치입법권을 확대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것이다. 그러나 지방의회 의원들의 구태는 여전하다. 말만 지방이지 중앙정치의 못된 행태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지방의회는 지방정부의 감시와 견제가 주요 역할이다. 하지만 중앙정치 논리와 의석수에 따라 사사건건 딴지를 걸거나 무조건 협조하느라 감시와 견제 기능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가 흔하다. 게다가 의회 활동 중 물의를 일으키는 의원들도 심심치 않게 나타난다. 행정안전부가 지난해 2월 발간한 지방의회 백서에 따르면 민선 6기(2014년 7월~2018년 6월) 지방의회 의원 중 사법처리된 사람은 149명이었다. ‘지방의회 무용론’이 나오는 이유다. 지난해 한국지방행정연구원이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지방의회 의원의 의정활동에 대한 국민 만족도가 겨우 13%밖에 되지 않았다. 요즘 경기도민들이 경기도의회를 바라보는 시선도 매우 차갑다. 지방선거가 끝나고 제11대 경기도의회는 78대 78 여야 동수로 출범했다. 원활한 의회운영이 쉽지 않을 것이란 우려는 현실이 됐다. 지난 12일 첫 본회의가 열린 뒤 5분 만에 정회하고 19일과 25일도 무산되면서 경기도의회의 개점휴업 상태는 한 달 가까이 이어지고 있다. 의장 선출 방식과 의석수 증가(10대 142석→11대 156석)에 따른 상임위원회 증설문제, 예산결산특별위원회의 경기도·경기도교육청 분리 등 여러 쟁점을 놓고 원 구성 협상에 난항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시급한 안건도 묶여 있다. 대표적인 것이 당초 예산 33조6036억 원보다 1조4387억 원(4.3%) 증가한 35조423억 원 규모의 제1회 추경예산안이다. 김동연 경기도지사가 취임 직후에 결재한 ‘비상경제 대응 민생안정 종합계획’을 추진을 위한 추경이다. 이 예산은 소상공인, 중소기업 등 취약계층을 위한 직접 지원 예산과 코로나19 생활지원비 등이다. 코로나19와 경제 불황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도민들에게 꼭 필요한 예산인 것이다. 그러나 양당의 힘겨루기로 첫 임시회가 파행됨으로써 추경은 이달 내 처리가 힘들게 됐다. 이에 소상공인들이 분노를 행동으로 표출하고 있다. 지난 22일엔 경기도상인연합회와 경기도소상공인연합회 소속 회원 50여 명이 경기도청 앞에서 집회를 열었다. 이들은 ‘민생경제 대응 종합 계획’에 150만 소상공인들이 희망과 기대를 하고 있다며 개원조차 못하는 도의회를 거세게 비난 했다. 26일 경기도청공무원노동조합도 “코로나19 생활지원비 지급, 지역화폐 발행 지원, 고금리 대출대환 특례보증 등 비상경제 대응과 민생안정을 위해” 도의회 정상화를 요구했다. 옳다. 지방의회는 지역민의 민생을 우선 생각해야 한다. 조속한 개원을 촉구한다.
최근 연세대 청소/경비노동자들이 세상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들은 시급 440원 인상, 샤워실 설치 등을 요구하며 학교측을 상대로 4개월째 시위 중이다. 학교당국은 침묵한다. 몇몇 학생들이 수업권 침해를 주장하며 노조를 상대로 민·형사상 소송을 제기했다. 이 뉴스를 접하고 스무 살 청년들이 옳다고 편드는 어른들은 아직 만나지 못했다. 물론 그 애들 편드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우선 그 부모들 대부분이 그쪽일 거다. 밭이 산물의 등급을 정하잖나. 그 '학구파'들이 교수나 국회의원이 된다면 실로 끔찍한 일이다. 민주당 의원들 몇이 중재를 하는 모양이다. 무명의 뜻있는 다수도 연대하여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화해와 합의로 결론나기를 기대한다. 그렇게 되면, 유사상황으로 갈등하고 있는 다른 대학들, 공공기관들, 기업들의 청소/경비노동자들에게 하나의 표준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그 얼마나 좋은 일인가. 1898년 9월 10일은 고종황제의 생일날이었다. 그날 독립협회는 평양 대동강 모란봉 광장에서 만민공동회를 열었다. 지식인, 학생, 부인, 상인, 백정 등 1만명이 신분을 초월하여 모여들었다. 이 애국토론회에 스무 살 청년 하나가 연사로 등단, 귀빈으로 참여한 지역유지들을 포함, 조정을 간담이 서늘하게 꾸짖었다. "백성들은 사또가 좋은 정치를 베풀어서 잘살게 해주기를 바라지만, 관리들은 서로 싸움질이나 하고 세금 거두어 배터지게 먹기나 하니 나라꼴이 제대로 되겠는가. 백성들의 안위를 책임진 진위대장은 죄없는 사람들 족쳐서 재물을 빼앗아 가니 장차 나라가 어찌 되겠는가." 요즘으로 추산하면 백만 명 정도될 그 군중은 열광의 도가니에 빠졌다. 그가 바로 도산 안창호 선생(1878~1938)이다. 그는 1902년 유학 목적으로 미국에 갔으나 이민 1세대 교포들의 처참한 생활수준을 목격하고는 학업을 단념한다. 그들은 지저분하고 더럽고 쓰레기 아무데나 버리는 야만족 취급을 받았다. 도산은 곧바로 교포사회를 지도하는 일에 헌신한다. 각 가정을 방문하여 청소해주고 눈 오면 가장 먼저 거리를 쓸고, 쓰레기를 처리하는 일을 솔선했다. 그 진정성 덕에 마침내 동포사회가 변하기 시작했다. 도산의 가르침과 덕행은 두터운 경전의 어록들 같은 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 중 '모란봉 연설' 때 도산이 겨우 스무 살의 애송이였다는 사실과, 미국 망명 시기에 '대한 사람'ㅡ도산의 표현ㅡ의 자부심을 완전히 무너뜨린 교민들을 이끌어 미국사회에서 민족의 명예를 되찾는 일에 헌신했던 대목을 특별히 상기한다. 20대 초반의 그 학도들이 전두환 일당도 아니고, 하필이면 이 세상 최약자들의 멱살을 쥐고 흔드는 작태를 도저히 외면하고 넘길 수 없기 때문이다. 2300년 전 알렉산더 대왕과 당대 수퍼-리치 빌 게이츠도 약관(弱冠) 스물에 자이언트가 되었다. 간장종지에 무슨 수로 바다를 담겠는가.
국회가 연금개혁특별위원회 구성에 합의함으로써 연금개혁 논의를 공식적으로 추진할 수 있게 됐다. 연금 전문가로 통하는 5선 주호영 국민의힘 의원이 위원장으로 내정됐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갖가지 한계 노출로 지속가능성이 고갈된 연금제도를 개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계속됐지만, 이를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로 여기는 정치권에서는 그동안 무한정 시간만 끌어왔다. 이젠 정말 시간이 없다. 이번만큼은 절대로 ‘어물쩍’ 넘기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나라의 연금제도는 지구를 향해 돌진하는 혜성에 비유될 만큼 끔찍한 재앙으로 묘사된다. 군인연금, 공무원연금에 이어 올해는 사학연금도 적자로 돌아설 전망이다. 연초에 한국경제연구원은 ‘현 제도에선 1990년생부터 국민연금을 한 푼도 받을 수 없다’는 보도자료를 낸 바 있다. 국회예산정책..
플로킹이 유행이다. 플로킹(Ploking)이란 길을 걸으며(Walking) 쓰레기를 줍는 행동으로, 이삭줍기를 의미하는 스웨덴어 플로카 웁(Plocka upp)과 달리기를 뜻하는 영어 조깅(Jogging)의 합성어인 플로깅(Plogging)과 함께 북유럽을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된 전 세계적 환경운동이다. 쓰레기를 줍기 위해 앉았다 일어나는 동작이 스쿼트 운동과 비슷하며, 쓰레기를 담은 봉투를 들고 뛰기에 조깅보다 칼로리 소비가 많고, 환경도 보호할 수 있다는 점에서 MZ세대를 중심으로 국내에서도 인기를 얻었다. 또한 최근 방송에서 엄마와 아이가 함께 플로킹을 하는 모습이 노출되며 교육적 놀이로도 주목받고 있다. 기업은 임직원 플로킹 캠페인을 열거나 플로깅 용품을 제공하는 등 친환경적인 이미지를 위해 유행에 편승한지 오래다. 여행 역시 국내 숙..
정신의학자 마사 스타우트에 따르면 소시오패스는 상식이나 남의 불행에 공감을 못 하는 양심 없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때로 무자비한 행동으로 타인의 삶을 망가뜨리거나 사회를 위험에 빠뜨린다. 요즘 우리 사회에 이러한 소시오패스들이 권력과 그 주변에서 활개를 치는 듯하다. 조선업 하청 노동자 파업과 관련한 정부와 공기업 대우조선해양의 대응 방식은 참으로 몰상식할 정도로 소시오패스적이다. 5년 전 닥친 세계적 불황기에 이 회사 하청업체 소속 노동자들은 고통 분담에 동참해 임금을 무려 30%나 스스로 삭감했다. 이제 업황이 흑자로 전환되면서 노동자들은 약속한 대로 임금을 정상화해달라는 요구를 하게 되었고 사측이 받아들이지 않자 파업을 벌였는데, 현 정부는 무력 진압을 공언했다. 약속을 지켜달라는 요구가 과연 그렇게 무리한 것인가? 대통령이 파업과 관련해 “참을 만큼 참았다”고 말했다는데, 도대체 누가 무엇을 얼마나 참았다는 것인가? 임금 협상이 타결됐으나 문제가 풀리지 않을 것은 불 보듯 분명하다. 하청 노동자들의 시간당 임금이 5년 전 1만3천원에서 현재 9500원으로 깎였으니 합의대로 4.5%를 올려준다 한들 주 48시간 노동 기준으로 월 소득은 대략 190만원 남짓이 될 것이다. 이 돈으로 4인 가족이 어찌 살 수 있는가? 공감 제로의 비인도적 처사이다. 파업 때문이라며 크게 부풀려진 회사 손실분에 대한 배상 소송과 파업 지도부 처벌이라는 강경 방침도 여전히 철회되지 않았다. 대통령이 ‘법과 원칙, 상식’을 입에 달고 다니지만 이 정부가 하는 것을 보면 이에 반하는 짓 투성이다. 그 대표적 사례는 주가 조작혐의를 받고 있는 대통령 부인이 제대로 된 수사를 받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건 관련자들이 대부분 구속돼 있는데 이런 봐주기가 국민의 법 감정과 건전한 상식률에 맞는가? 대통령 부부의 지인들이 비서실 등에 마구 채용되고 있는 것이 해괴하다. ‘욕설 유투브’를 운영하는 소시오패스의 누나가 홍보수석실에 채용되어 근무했다거나 대통령실 인사 부인이 대통령 해외순방 행사 사전 답사를 한답시고 한 달 전 현지로 갔다가 전용기에 동승해 귀국한 행동 등도 일반의 공감을 얻기 어려울 터이다. 대통령 최측근인 여당 대표가 지인 아들을 대통령 비서실에 ‘꽂아 넣었다’고 자랑스레 떠든 것은 듣는 이를 아연케 한다. 그는 몇해 전 공기업 간부 채용과 관련해 인사 청탁 혐의로 기소됐다가 혼자만 무죄로 풀려난 전력의 소유자다. 당시 검찰의 봐주기 ‘부실 기소’로 무죄를 받아냈다는 풍문이 파다했다. 문제는 괴이한 행태가 주로 국민을 통합해야 할 대통령과 그 주변에서 자주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부 주요 인사들이 여론의 따가운 비판에 신경 쓰지 않는 것은 이들이 국민을 두려워하지 않거나, 일반이 지닌 공감 능력조차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의심마저 든다. 공감 능력과 양심이 결여된 ‘권력형 소시오패스’가 지배하는 나라가 된 것인가?.
색채의 마술사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선명한 색채로 사람과 동물을 섞어 환상적이며 신비한 그림을 수없이 그렸다. 그의 그림엔 아이와 여인, 꽃을 든 남자와 비둘기, 뛰어 오르는 염소와 아이들, 방긋 웃는 해님이 등장한다. 동심을 부활시키는 이 소재들은 우리의 맘을 녹여주고 꿈꾸게 한다. 20세기 프랑스에 귀화해 성공한 최고의 예술가 샤갈. 그의 작품은 초현실주의와 네오 프리미티즘 성격을 띤다. 이러한 그의 화풍은 동유럽의 유대인 마을 슈테틀과 유대전통, 그리고 러시아 민속학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샤갈은 러시아 비테프스크의 가난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식료품 가게를 했고 아버지는 시나고그에서 일했다. 다정한 어머니는 항상 아들에게 성경을 읽어주며 인간에 대한 사랑을 가르쳤다. 그림에 소질이 많은 샤갈은 일찍부터 데생을 공부했고 스무 살 때 생페테르부르크 왕립미술학교에 입학했다. 이때 레옹 박스트(Léon Bakst)가 연 프랑스 인상주의에 눈을 떴고 파리를 사모했다. 러시아의 반유대주의가 극성을 부리자 그는 스물세 살 때 파리로 피난 왔다. 이때 원래 이름인 모이슈 자카로비치 샤갈로프(Moishe Zakharovitch Shagalov)를 프랑스식 마르크 샤갈로 개명했다. 그러나 기구한 유대인의 운명은 파리 정착을 어렵게 했고 끝없이 세계를 떠도는 노마드로 만들었다. 나이 오십이 돼서야 그는 그토록 원했던 프랑스 국적을 얻었다. 파리를 제2의 고향으로 자부하던 샤갈. 하지만 맘속엔 언제나 조국 러시아가 자리 잡고 있었다. 특히 비테프스크는 그의 상상 속에 동심의 천진난만한 낙원이었다. 센 강의 다리들과 에펠탑을 그릴 때도 배경은 언제나 어린 시절의 추억을 소환해 장식했다. 그 유명한 ‘눈 내리는 마을’도 샤갈이 프랑스 방스에 살면서 비테프스크가 그리워 그린 그림이다. 샤갈은 말년에 프랑스 남부로 떠났다. 니스 근처 방스(Vence)의 마티스 예배당 근처에 정착한 그는 마티스, 피카소, 마그넬리, 레제 등 수많은 아티스트들과 교류했고 미술적 테크닉을 넓혀 갔다. 하지만 곧 생폴드방스(Saint-Paul de Vence)로 이사해 마을 어귀에 ‘동산’을 짓고 죽을 때까지 거기서 살았다. 샤갈이 친구들을 자주 만났던 콜롱브도르와 플라스드카페, 그가 산책했던 트리우스 교차로와 생 클레르 길은 그의 그림 속에 등장했다. 샤갈의 생폴드방스의 그림은 모두 사랑에 진동하는 서정시였다. 사랑하는 연인들, 푸른 하늘 속 평온한 둥지, 성벽과 마을 위에 떠도는 새와 꽃다발. 실제의 그곳 역시 그러하다. 골목골목 깔려 있는 매끌매끌한 돌멩이마저 예술인 그곳. 마르셸 파놀이 ‘내 아버지의 영광’을 영화화한 ‘마르셀의 여름’에 너무도 잘 드러나 있다. 주인공 샤를이 꿈속에서 조차 그리워했고 죽어서도 오매불망 잊지 못한 동화 속 나라. 그곳은 바로 샤갈의 마을 생폴드방스였다.
연일 추락하는 새 정부의 국정지지도를 보면서 쉬운 길을 나두고 어려운 길, 그것도 가서는 안 되는 길을 택하여 고생을 하고 있구나 하는 안타까움이 있다. 지지도 추락의 원인은 각자 여러 관점에서 볼 수 있지만 여기서는 남북관계만을 가지고 논하고자 한다. 북한에 끌려 다니다 핵문제 등 남북문제를 망쳤다는 생각으로 탈북자 북송 등을 정쟁화하여 지지를 얻겠다고 기대했다면 이는 큰 착각이라 생각한다. 우리 국민들은 이제 과거 북풍공작 같은 일에 휩쓸릴 정도은 아니며 나름 균형감각을 갖는 안보관을 갖고 있다. 그런 수준 있는 우리 국민이기에 이번 대선에서 정권교체가 가능했다고 확신한다. 관점에 따라 첩보 등 당시 상황을 얼마든지 다르게 볼 수 있는 것이 작금의 상황인데, 지금의 최우선 과제인 경제문제는 제쳐두고, 남의 탓을 통한 자신의 정체성, 가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