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 니콜로 파가니니(Niccolò Paganini).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프랑스 사르데뉴왕국(현재의 니스)에서 눈을 감았다. 니스 남서쪽 190킬로 지점에 있는 그의 고향 제노바. 지중해의 넘실거리는 푸른 물결과 끝없는 평원이 펼쳐져 있다. 이곳 부두의 하역인부였던 안토니오 파가니니(Antonio Paganini)는 가난한 여인 테레사 보시아르도(Teresa Bocciardo)를 만나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를 낳았다. 칠삭둥이였던 파가니니. 병치레가 많고 허약했지만 아버지의 만돌린 소리를 들으며 유년기를 보냈다. 니콜로가 다섯 살이 되면서 음악에 큰 재능을 보이자 안토니오는 그에게 만돌린과 바이올린을 가르쳤다. 아들의 음악교육에 큰 열정을 보였던 아버지는 바이올리니스트 지오반니 세르베토(Giovanni Cervetto)에게 아들을 보내 레슨을 받게 했다. 여덟 살이 되면서 파가니니는 소나타를 작곡했고, 열한 살이 되면서 성당에서 정기적으로 연주했다. 파가니니가 대중의 주목을 받은 건 그의 나이 열세 살 때. 1795년 여름 연 콘서트가 성공했다. 여기서 번 돈으로 파가니니의 아버지는 아들을 파르마로 보내 알렉상드로 롤라(Alessandro Rolla)에게 지도를 받게 했다. 당대 가장 유명했던 롤라 선생은 파가니니의 연주를 듣고 더 이상 지도할 필요가 없다고 거절했다.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비범했던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 새로운 프레이징을 발명해 모든 코드에 혁명을 일으켰고, 나폴레옹의 여동생 엘리자 보나파르트와의 사랑을 ‘24개의 카프리치오’로 작곡해 최고의 걸작이란 찬사를 받았다. 천재 음악가 쇼팽과 리스트도 이 악마로부터 영감을 얻었다. 그런데 왜 그는 악마일까. 1836년 니스의 영주였던 세솔(Cessole) 백작은 파가니니를 초대했다. 세솔은 아마추어 바이올린 연주자로 파가니니의 광팬이었다. 파가니니는 세솔의 집에 머물면서 콘서트를 열었다. 그러나 곧 구베른느망(Gouvernement) 가(街) 23번지로 이사해 눌러 살게 됐다. 파가니니는 밤새껏 활주법으로 피치카토 등 음계를 연습했다. 이웃들은 불안해했고 심지어 두려워했다. 장작처럼 마른 몸에 못생긴 얼굴, 목구멍의 질환으로 말을 할 때면 코를 튕기는 버릇. 주민들은 오싹해 했고, 그를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라고 불렀다. 파가니니가 살다간 니스. 그곳은 오늘날 비외 니스(Vieux-Nice) 지역이다. 구 도시인만큼 왕국의 위상을 뿜어내는 많은 문화유산과 전통이 살아 숨 쉰다. 동쪽에 니스의 찬란한 밤바다와 야경을 볼 수 있는 콜린성, 남쪽에 미국외무성에서 영국인 산책로로 이어지는 푸른 해변의 포물선이 환상적이다. 서쪽으로 잠시 눈을 돌리면 하얀 석회암의 알프스 해안을 따라 비취의 파이옹 강이 도도히 흐른다. 그 위에 마세나 광장과 국립극장, 오페라극장이 웅장히 서 있다. 감성적인 파가니니가 홀딱 반할만 하다. 수려한 해안에 역사와 문화가 어우러진 그곳. 니스에 관광객이 끊임없이 모여드는 이유다.
지난 22일 수원시 팔달구 덕영대로895번길 9-14에 문화 공간이 개관됐다. 이 건물의 이름은 시민들과 이어지는 공간, 어두웠던 과거와 밝은 미래를 잇는다는 뜻을 가진 ‘기억공간 잇-다’다. 기억공간 잇-다는 연면적 84.23㎡, 단층 건물로 전시 공간과 커뮤니티 공간으로 활용한다. 이 지역은 수원역 동쪽 성매매집결지였다. 빛과 단절된 어둠의 장소였던 구 수원역성매매집결지가 60년 넘게 이곳에 있었다. 잇-다는 지난 해 5월 31일 밤 모든 성매매업소가 자진 폐쇄한 후 도로 개설구간 내 잔여지에 있던 성매매업소 건물을 리모델링해 만들었다. 개관과 함께 첫 기획전을 개최하고 있다. 기획전 ‘집결지의 기억, 도시의 미래를 잇다’는 22일부터 10월 21일까지 열리는데 1900년부터 2022년까지 집결지 형성·변천 과정을 볼 수 있는 근대도시 수원과 수원역 성..
소년은 통창 앞 의자에 혼자 앉아있다. 책을 떨군 것도 모른 채 한 시간 넘도록 한 곳을 응시하고 있다. 창 너머 하늘을 찌르고 선 메타세콰이어 나무들을 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나무 사이에 걸린 구름일까, 나무들 뒤 주차장을 오가는 차와 사람들일까. 소년의 시선을 이끈 것은 마음, 영혼, 무의식같은 그의 내면일 것이다. 어린 날, 그가 점령했던 왕국의 일용할 양식이던 것들. 웃음소리와 고집과 도발로 융성했던 그 아름다운 나라를 찬탈한 이는 누구였을까. 소년은 최근 자퇴한 고교 2년생이었던 내 아들이다. ‘멍 때리고 있던 아들’ 그 아들의 뒷모습에 감동해 ‘멍 때리고 있던 나’, 모자(母子)의 생경한 모습은 어제 헤이리 내 작업실에서의 실황이고. 입시지옥에 영육이 말라가는 것을 보다 못한 남편의 권유가 시작이었고 아들의 빠른 수용으로 일사천리 결정된 자퇴 후, 한 달이 지났다. 아들은 다시 깔깔 웃기 시작했고, 말이 많아졌고, 없었던 애교(?)까지 부린다. 숙제와 시험에서 해방돼 행복한 비명을 지르는 아들 뒤에서 난데없이(물론 동의했지만) 그의 삼시세끼 해결이라는 숙제와 시험을 받은 나는......소리도 못내는 비명을 지른다. 아이들 키우며 한숨과 함께 튀어나오곤 했던 말이 더 잦아졌다. ‘아, 덴마크 같은 나라에서 태어났더라면!’ ‘덴마크 같은 나라’ 할 때 제일 먼저 ‘국민 행복지수 세계 최고’를 떠올리는 이가 많을 것이다. 덴마크를 상징하는 바이킹, 레고, 동화 작가 안데르센 등이 행복나라에 환상을 더한다. 아이 둘 키우면서 인간성장에 고민이 깊었던 나는, 덴마크하면 그룬투비(N.F.S Grundtvig)를 빼놓을 수 없다. 시험 없고, 학원 없고, 입시지옥 없다는, 그 꿈같은 덴마크 학교의 초석을 놓은 이가 그룬투비다. 그룬투비가 덴마크 교육에 혁신을 일으킨 시기는 안데르센이 동화 ‘성냥팔이 소녀’를 썼던 시기다. 19세기의 덴마크는 실제 소년, 소녀들이 학교는커녕 빵 값을 벌기 위해 거리를 떠돌던, 전국민이 빈곤에 시달리던 시기였다.(성냥팔이 소녀의 모델은 안데르센 어머니다) 목사였던 그룬투비는 암울한 덴마크를 일으켜 세울 힘은 교육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당시 선택된 소수만 다닐 수 있었던 학교 제도 , 그 교육도 ‘교사의 일방적 주입식 교육’이라는 것이 반기를 들고 ‘폴케호이스콜레’라는 신교육기관을 만들었다. 우리 말로 ‘평민대학‘ ’자유학교’ 정도의 의미인 폴케호이스콜레에는 성별, 연령, 계급, 종교에 관계없이 입학할 수 있게 했고 경쟁과 이기심을 부르는 시험을 없애고 공동체 프로그램을 강화했다. ’경쟁보다는 협동’ ‘ 개인의 이익보다 공공의 행복’을 중요시한 폴케호이스콜레의 교육철학은 그대로 이어져 오늘의 덴마크 공교육을 꽃피우게 하는데 크게 이바지 했다. 오늘 아침도 도서관에 간다는 아들을 위해 두 개의 도시락을 싸면서 부모에게 이 고생을 시키지 않는 덴마크 교육을 부러워한다. 아니, 질투한다. 기막히다. 이 와중에 월드뮤직 채널에서 덴마크 작곡가 자콥 게이드(Jacob Gade) 작곡의 탱고곡 ‘Jealousy(질투)’가 흐른다. 이런 걸 동시성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나의 과한 감정이입인가. (인터넷 창에서 www.월드뮤직. com을 치면 소개된 음악을 유튜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조선의 잔다르크’라 불렀다. 45년 12월, 항일무장투쟁을 벌이던 김무정 장군과 함께 조선의용군을 이끌고 종로거리로 행군해 들어오던 날 ‘백마탄 여장군’이 왔다며 환영인파가 거리를 가득 메웠다. 이후 친일파나 민족반역자를 뺀 모든 사람들이 통일된 나라를 만드는데 힘을 모아야 한다고 설파하던 장군은 48년 10월, 해방된 조국의 부평경찰서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조선의용군 지휘관 김명시의 이야기다. 1907년 마산에서 태어난 김명시 장군은 일찍이 오빠 김형선의 영향으로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모스크바유학을 마치고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시작해 1930년 하얼빈 일본 영사관을 습격하면서 본격적인 무장투쟁의 길에 들어선 장군은 1932년 국내잠입 활동 중 일경에 체포되어 신의주형무소에서 7년의 옥고를 치렀다...
지난 21일 ‘수원 세 모녀 사건’이 발생했다. 정치권, 행정부 곳곳에서 ‘특단 조치’를 말한다. 공동체주의와 연대가 대안이란다. 좋은 말이지만 현실과 괴리가 있다. 두 가지 경우를 보자. 먼저,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2020년 장애인현황 통계’의 등록장애인은 263만3000명이다. 전체 인구 대비 5%대다. 실제 장애인 수는 더 많다는 것이 전문가들 얘기다. ‘장애인이라는’ 낙인, 수치심 등은 등록과 신고를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두 번째, ‘된장녀’, ‘된장남’(의존적 과소비자, 혹은 여성과 남성을 비하하는 신조어)이라는 단어엔 ‘불편한 진실’이 함의돼 있다. 어쩌면 된장녀, 된장남은 정신지체나 발달장애가 있는 사람들의 행태일 수 있다. 한국 사회에는 정신질환과 장애를 숨기는 문화가 있다. 장애인 등록과 정신과 치료를 터부시하기도 한다. 등록과 신고를 저해하는 요인 중 하나다. 2014년 ‘송파 세 모녀 사건’과 2022년의 ‘수원 세 모녀 사건’은 무등록, 무신고가 공통점이다. ‘송파 사건’ 이후 국민기초생활보장법, 긴급복지법 등이 개정됐다. 사회보장 정보시스템을 운영 중이다. 지자체별로 ‘찾동(찾아가는 동주민센터)’도 생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사무소 직원들은 ‘소외된 골목길’의 ‘고단한 삶’을 찾아내지 못했다. 카메라 앵글을 돌려 보자. 수원 세 모녀는 ‘빚에 쫓겼다’는 것이 ‘송파’와 다른 점이다. 복지체계 등록과 신고 부재의 문제를 ‘정신 건강’과 ‘서민금융’에서 찾아볼 필요가 있다. 현대 사회에선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스트레스를 안고 살아간다. 그렇지만 빚쟁이에게 쫓기는 사람은 ‘극한’의 경험을 한다. ‘신분 노출’의 두려움에, ‘동굴’에 갇힐 수밖에 없는 것이다. 주소지는 화성, 거주지는 수원이었다. 제정신이 아닌 상태였다. 이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현실은 애석하다. 구석에 몰린 사람이 지자체에서 상담을 받을라치면 자신의 개인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신분을 감춰야만 하는 실정을 아랑곳 않는 ‘불편한 현실’이다. 하지만, 미국선 불법 체류자일지라도 자녀교육만큼은 ‘묻지도 않고’ 시켜준단다. 조지 W. 부시, 오바마 행정부가 그랬다. 미국선 정신 상담, 복지 상담 등의 경우, 성명과 주소를 밝히지 않아도 된다. 지금의 우리가 갖고 있는, 빈곤층의 성명과 주소를 정밀 추적해야 한다는 관점과 반대적 현상이다. 빈곤층의 자살 방지는 정신건강 (관리)체계를 어떻게 할 것인지에 앵글을 맞춰야 한다. 사람은 정신을 차려야 TV, 인터넷도 볼 수 있다. 그래야 사회보장체제에 신고와 등록을 할 수도 있다. 또한, 사회복지에도 예외 없이 적용되는 ‘자본주의 틀’을 부분적으로 깨뜨릴 필요가 있다. 돈 한 푼 없는 사람이 서민금융을 찾아갔는데, 일정한 신용등급과 소득이 있어야 하는 ‘메커니즘’으로는 문제를 전혀 해결할 수 없다. 역시, 기초생활수급자는 ‘중위소득의 30~50% 구간에 해당해야’ 한다는 조건도 난센스다. ‘세 모녀’ 해결엔 턱도 없다. 무이자, 혹은 저금리로 급한 불을 끄게 해줘야, ‘다음’을 기약할 수 있다. 그렇기에 정신건강 회복과 서민금융 제도가 중요하다. 추상적이고 경직된 이념만으로는 ‘가난이 단골인 빈곤층’을 구제할 수 없다.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는’ 상담 시스템 구축이 문제 해결의 열쇠가 돼야 한다.
“이 감정은 뿌듯함입니다.” 6/29일부터 16회를 달려 8/18일 막 내린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마지막 대사다. 로펌 한바다의 정규직이 된 우영우는 뿌듯하다. 우영우를 연기한 박은빈도 뿌듯하다. 완벽히 톱스타 반열에 올랐기에. 제작사인 에이스토리는 우영우 IP로 웹툰을 출시하였고 뮤지컬도 계약했다. 우영우 방송 전 6/23일 종가 기준 16,250 원하던 주가가 7/19일 32,800원이 되었다. 한 달 만에 시가총액이 두배 되었다. 안 뿌듯하면 그게 이상하지. 투자를 결정한 스튜디오 지니의 김철연 대표와 채널 ENA의 윤용필 대표도 뿌듯하다. 올 4월 ENA리브랜딩 미디어데이 때 향후 투자계획을 발표하면서 첫 번째로 언급한 드라마가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다. 이름도 생소한 채널명을 TVN에 버금가게 만든 공은 윤용필 대표와 우영 우에게 있다. 이들의..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에서 포천시 관인면 초과리까지 연결되는 일반 지방도로인 387호선 확장공사를 요구하는 지역주민들의 민심이 폭발했다. 이 구간은 편도 1차선이지만 하루에 2만4178대(2020년 기준)의 차량이 통과하고 있다. 이 도로를 이용, 수동면과 화도읍 일대에 공장과 물류창고의 물류가 운반되고 있다. 많은 차량이 이용하는데다가 도로 폭마저 좁아 출·퇴근 시간대의 정체는 심각하다. 게다가 여름·가을철에는 행락객과 등산객까지 몰려 주차장을 연상케 한다. 5분이면 통과할 수 있는 거리지만 출퇴근 시간대에는 통행에 1시간 가까이 걸리는 악성 정체구간이다. 이석균 경기도의원에 따르면 이 도로 위에서 교통정체로 구급차가 움직이지 못해 4명이나 사망했다고 한다. 이에 지난 2004년 도로확장 계획인 ‘지방도 387호선 화도~운수..
국민대가 이미 심각한 표절 사실이 드러난 김건희 박사논문에 대한 시민사회의 검증 요구를 최종 거부했다. 숱한 허위 경력과 표절로 얼룩진 그녀는 논문 제목에 ‘멤버 yuji’라는 우스꽝스런 표현이 나올 정도로 어설픈 내용에 남의 논문과 블로그를 그대로 베낀 흔적들이 너무 많아 이미 국민들과 전 세계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이쯤 되면 대학이 논문을 취소하고 대학 본부가 공식 사과함이 마땅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이달 초 국민대는 “논문 작성의 진실성을 의심할 만한 심각한 표절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변명했다. 더 기가 막히는 것은 그 대학 교수회가 표절 여부의 심사를 투표를 통해 결정하겠다고 한 것이다. 이 무슨 해괴한 절차인가? 연구 진실성 여부는 즉시 검증하면 되는 간단한 일이다. 그런데 이마저 부결되어 교수회는 망신을 자초했다. 대학은 언론, 건전한 야당과 함께 민주주의 사회를 지키는 3대 축의 하나이다. 국민이 주권자인 시대에는 시민사회가 건강하게 작동해야 봉건과 전제가 발을 못 붙인다. 그런데 그 한 축인 대학이 이 정도로 타락한 것이다. 민주주의는 진실의 토대 위에서 존재하는데, 진실을 지키려는 대학인의 기본 윤리가 눈에 안띈다. 상대가 최고 권력자의 부인이어서인가? 물론 대학의 퇴행이 어제 오늘 일은 아니다. 권력에 눈치나 보고 출세에 목을 맨 이른바 폴리페서들이 오래 동안 대학 사회를 지배해왔기 때문이다. 인간은 인식 수준에 따라 행동을 하는 법이다. 유아기에는 생물학적 본능에 따라 낮은 수준의 지각만으로 생명 유지가 가능하다. 성장하면서 차츰 다각적 인식을 하게 되고 행동도 고양되는 것이다. 높은 수준의 인식이 거저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인식과 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은 재이론과 재실천의 변증법적 지양(止揚) 과정을 거치면서 극복된다. 가장 높은 수준의 이론과 실천을 가르쳐야 할 대학이 오늘날 제 길을 잃고 헤매는 모습을 보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필자는 대학이 안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가 질문과 토론이 없는 수업 방식에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인식이 상대방과 얼마나 또 어떤 부분에서 차이가 있고 성찰할 대목은 어떤 것인지 깨닫는 검증과정이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 것이다. 그저 학점이나 잘 따서 졸업장을 받으면 그만이라면 대학은 직업훈련소와 하나도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그런 풍토에서 학생들의 올바른 시민의식 형성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대학이 비판정신을 잃어버리면 안된다. 비판의 대상과 초점을 제대로 잡도록 하고 엄격한 성찰 과정을 거치도록 가르치는 것은 온전히 교수들의 몫이다. 일찍이 시인 김수영(金洙暎)은 “신문이 지면에서 끊임없이 폭동을 일으키는 사회가 건전한 사회이다. 이를 게을리하는 것은 현실의 폭동을 조장하는 무서운 죄를 저지르는 것”이라고 말했다(경향신문 창간 21주년 기고문, 1967). 언론에 주는 경고였지만 토론이 사라지고 진실을 두려워하는 대학들도 귀담아 들어야 할 말이다.
일제의 식민통치는 공식적으로 1905년 통감부 설치에서 시작해 1945년까지 무려 35년동안 이어졌다. 그러나 1880년 무렵부터 조선을 침략했던 것을 떠올려 보면 반세기 이상 조선의 식민 착취가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시기 일본은 정보통제부터 실행했다. 조선인들이 말하지 못하고, 알지 못하게 해야 저항이 쉽게 일어나지 않고 손쉽게 조선을 통치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은 1907년에는 신문지법, 1909년에는 출판법을 만들어 두고 조선어 민간신문과 잡지를 사건검열 하고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본격적으로 탄압했다. 조선어 민간신문이 일제 검열에 어떻게 투항하려 했는가를 연구한 이민주(2018)의 연구를 보면, 조선어 신문에 내려졌던 행정처분에는 주의, 삭제, 차압(압수), 발행정지, 발행금지가 있었다. 1930년 ‘조선..
폭우로 서울 관악구 신림동 소재 반지하에서 참변을 당한 발달장애 가족 소식에 국민들은 안타까움의 눈물을 흘렸다. 물이 차올라 탈출을 못하고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그들의 공포를 함께 느꼈다. 이 악몽과 같은 참변의 충격이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이번에는 수원시 권선구의 한 다세대주택에서 세 모녀가 극단적 선택을 해서 세상을 등졌다는 가슴 아픈 소식이 전해졌다. 21일 오후 경찰이 “세입자의 방에서 심한 악취가 난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 심하게 부패한 시신 3구를 발견했다. 앞으로 부검을 통해 정확한 사인이 밝혀지겠지만 남긴 유서에는 "지병과 빚으로 생활이 어려웠다"는 내용이 적혀있는 것으로 알려져 극단적 선택을 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사망자는 60대 여성과 두 딸로써 암과 난치병 등 건강 문제에 더해 사업실패로 인한 빚도 있어 심한 생활고를 겪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편과 아들은 지병으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 60대 여성은 암 진단을 받아 치료 중이었고, 두 딸 역시 각각 희귀 난치병 등을 앓고 있어 일상생활이 어려웠다고 한다. 하지만 기초생활수급 등 복지서비스 등은 전혀 받지 못했다. 이들은 2020년 2월 수원의 현 주거지로 이사했음에도 화성시에서 알고 지내던 이웃의 집에 주소 등록이 된 상태였다. 수원시에 전입신고를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수원과 화성에서 기초생활수급 등 복지서비스를 신청하거나 상담한 적도 없었다고 한다. 이들이 만약 자신들의 어려움을 해당 관청에 알렸다면 긴급생계지원비나 긴급 의료비 지원 혜택, 주거 지원 등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었다. 일부에서는 빚 문제 등으로 전입신고를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등의 갖은 추측이 나온다. 지난달 25일에도 도내 의정부시의 한 다세대주택에서 부부와 6살 아들, 키우던 고양이가 숨진 채 발견됐다. 부인이 “남편이 너무 힘들어한다, 남편과 같이 가 주려고 한다”는 메시지를 친한 이웃에게 보냈고, 남편의 메모에도 “빚이 많아 힘들다, 가족들과 함께 진짜 갈 시간”이라고 쓰여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아들을 살해하고 부부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걸로 추정된다. 이 가족 역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달 세종시 한 아파트에서 자매 사이인 30대, 40대 여성과 초등학생 자녀 2명이 숨져 있었다. 지난 5월말 전남 완도 앞바다에서 숨진 채 발견된 조유나 양 일가족 3명도 극단적 선택이었다는 결론이 났다. 8년 전 ‘송파 세 모녀 사건’이 발생하자 정부는 복지 사각지대를 없애기 위한 복지 시스템을 도입했다. 공과금 3개월 이상 체납 시 관할 구청에 연체 사실이 통보되도록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작동하지 않았다. 앞에서 밝힌 것처럼 세 모녀가 주소 등록지인 화성이 아닌 수원에 거주하면서 아무런 복지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건강보험공단에서 보험료를 오랫동안 체납했다는 통보를 받은 화성시 관계자가 최근 주소지를 방문했으나 거주사실이 없고 연락처도 알 수 없어 복지시스템 비대상자로 처리됐다. 사회보장시스템이 개선됐다지만, 복지 사각지대에 있는 세 모녀를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현행 복지제도의 한계다. 앞으로 주소가 불분명한 경우라도 끝까지 소재를 파악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재정비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