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진'검색결과
상세검색2016년 한국에서 단 2000명의 관객이 들었던 스페인 영화 ‘레트리뷰션 : 응징의 날’이 한국영화 ‘발신제한’으로 리메이크 돼 흥행에서 비상(飛翔)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서스펜스가 상당하고 주연인 조우진을 비롯해 그를 떠받치는 조연들, 곧 지창욱, 진경, 류승수, 김지호의 무게감이 남달라 총합이 좋은 작품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건 이 영화를 연출한 김창주 감독이 편집감독 출신이라는 점, 스태프, 배우들과 대체로 동류 의식이 강했을 것이라는 점 등등이 왜 이 영화에 중견, 중량급 인물들이 비교적 작은 역할에도 대거 참여했는 가를 짐작케 한다. 영화도 정치가 잘 돼야, 프로덕션이 잘 굴러가야 결과물이 좋은 법이다. ‘발신제한’은 그런 느낌을 준다. ‘발신제한’은 아닌 밤중에 홍두깨로, 테러 위협에 직면한 한 남자(조우진)의 하루를 다룬다. 남자는 중견 은행의 PB 센터장이고 다루는 액수만 수백억 원대인 인물이다. 자신이 보유한 현금도 좀 있고, 당연히 자기 집이 있는 데다 와이프와는 그럭저럭, 딸 아들과도 그런대로 살고 있으며, 막 새로 출시된 수천만 원짜리 SUV로 출퇴근을 하는, 꽤 성공한 은행 간부다. 그런데 오늘, 학교에 가는 아이 둘을 데리고 출근을 하는 그에게 전화가 걸려 온다. 그리고 자신의 운전석 시트 밑에 수제 폭탄이 설치돼 있다는 소리를 듣는다. 처음엔 보이스 피싱이나 장난 전화 쯤으로 생각했지만 자신의 부하 직원(전석호) 부부가 눈앞에서 폭사하는 걸 보고는 온 몸에 땀이 흐르기 시작한다. 급기야 협박범의 요구에 따라 현금 9억 원을 찾아 나오던 그의 아내(김지호)도 주변에서 폭탄이 터져 거의 죽다 살아난다. 협박범은 낄낄대며 ‘그거 참 아깝다’고 남자를 놀린다. 이제 남자는 자신이 사는 것은 둘째치고 같이 차를 타고 가는 아이 둘을 살려내야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다. 이 사건을 맡게 된 경찰서장(류승수)은 아이들의 아빠가 뭔지 모를 이유로 자작극을 벌이고 있다고 생각한다. 폭탄 제거반의 여자 반장(진경)은 이 남자가 진범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채지만 그렇다고 뾰족한 방법을 찾아내지는 못한다. 범인에 의해 조종되는 남자와 그를 추적하는 경찰간의 쫓고 쫓기는 삼각 관계의 추격전이 부산의 시내를 질주한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남자, 자신에게 왜 이런 폭탄 테러가 가해지는 지 도저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는 말이냐’의 심정인 셈이다. 그게 이 영화의 전반부를 장식하는 의문이자 미스테리다. 영화 곳곳에 힌트가 숨겨져 있기는 하다. 예컨대 남자의 부인이 폭파 현장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것을 보고 범인이 그것 참 아깝다고 한 것도 다 이유가 있다. 사실 모든 실마리는 이 작품의 스페인 원전 영화 제목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런데 그 핵심의 느낌을 눈치채는 순간 영화는 재미가 없어질 수 있다. 그러니 그걸 모르는 척, 감독이 제공하는 롤러코스터의 추적 씬을 그냥 따라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영화란 어떤 때는 그냥 즐기는 것이다. 감독이 다 알아서 답을 풀어줄 테니 말이다. 주인공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을 해피엔딩으로 인도할 것이기도 하다. 아, 이 영화의 원제를 다시 한 번 얘기하자면 레트리뷰션, 곧 보복 혹은 응징이라는 뜻이다. 영화의 전체 얼개가 그려지시는가? 영화 ‘발신제한’은 현대인들이 무의식적으로 자행하는, 적어도 그렇게까지는 아니라 해도, 조직의 논리상 어쩔 수 없었다고 자위(自爲)하면서 벌이는 행동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도 힘없는 무산자(無産者)들에게 어떤 비극을 가져 오게 하는 지를 얘기하는 작품이다. 현대인들 상당수는 조직원으로 산다. 부품 같은 존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욕망을 갖는다. 조각 부스러기로서의 부품 역할을 충실히 하는 과정에서 자신은 계급적으로 올라선다. 같은 노동자였다가 좀 더 나은 노동자, 혹은 귀족 노동자가 된다. 대개 화이트 컬러 노동자로서 아직 블루 컬러 노동자인 사람들을 생각하며, 그것 참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경쟁에서 뒤처진 것 뿐이라고, 자신이 이 혹독한 자본주의에서 살아 내려면, 그래서 아내와 아이들을 먹여 살리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그러다 결국 자신에게, 자신 뿐 아니라 사랑하는 가족에게 모든 업보의 화살이 돌아가게 만든다. 자본주의는 가해자와 피해자를 헷갈리게 한다. 두 사람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돼 있다. 일정 구간에서 보면 이 사람이 가해자이고 저 사람이 피해자인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구간에서 보면 이 사람은 원래 피해자였고 저 사람이 원래 가해자였다. 그 경계의 모호함에서 인간과 인간은 서로 처절한 살육전을 벌이며 살아간다. 원래는 이렇게까지 되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영화 ‘발신제한’은 가해와 피해의 관계가 전도(轉倒)돼 있는 자본주의 사회의 일그러진 민낯을 그려낸다. 그래서인지 영화는 해피엔딩이긴 해도 깨달음의 슬픈 미소 같은 느낌을 준다. 추격 씬을 잘 찍었다. 이제 한국영화의 촬영 노하우가 이 정도 수준까지는 왔다. 할리우드가 1992년에 만든 피어스 브로스넌 주연의 ‘라이브 와이어’, 키아누 리브스 주연의 1994년작 ‘스피드’에 대한 레퍼런스도 느껴진다. 많이 따라 붙었다. 특히 헬기의 등장이 눈부시다. 부산에서 올 로케이션을 했는데 부산이라는 공간이 영화 촬영에 최적화 된 도시라는 점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한국의 상업영화가 기술적으로 깔끔한 수준, 웰 메이드(well-made)라는 것을 척척 보여주는 작품이다.
중국 정부가 가장 싫어하는 감독으로 알려진 지아장커의 신작 ‘강호아녀’는 강호의 아들과 딸이란 뜻이다. 결국 강호남녀라는 얘긴데, 한 마디로 ‘강호의 사람들’이라는 의미겠다. 흔히들 요즘 강호에 도가 떨어졌다는 소리들을 하곤 한다. 이 영화 속 강호남녀에게는 의리가 중요할까 사랑이 중요할까. 지아장커는 영화 내내 그 답을 찾으려고 애쓴다. 지아장커가 보기에 의리든 사랑이든 그게 다 돈과 관련이 있고, 사회의 구조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원래 자신들이 추구하는 사회주의 사회와 지금의 중국사회가 완전히 다른 지점에 서 있음을 지목하고 거기에 따라 인간형과 인간성도 변질됐음을 고발한다. 그게 다 중국 공산당의 독재와 부패에 따른 것이며, 당이 주도하는 자본주의화가 결국 천민적(賤民的) 성향을 띤 결과라는 것이라고 그는 지목한다. 이야기는 2001년 다퉁시에서 시작해 2018년 다시 다퉁시에서 끝난다. 다퉁시에서 살아가는 차오(자오타오)는 빈(랴오판)의 여자이다. 빈은 다퉁시 조직의 보스다. 그는 다퉁시의 재개발 바람에 편승해 이곳저곳의 이권에 개입해 조직을 확장하고 권력을 공고히 하려 한다. 하지만 그 과정이 극히 허접하고 누추하기가 이를 데 없다. 2001년 다퉁시의 깡패는 마피아 급이라기 보다는 동네 양아치 수준이다. 그들은 허접한 창고 같은 데 모여 함께 ‘첩혈쌍웅’과 ‘영웅호한’ 등을 보면서 자신들의 포부와 의리가 남다르다는 것을 내심 강조하며 살아 간다. 그러나 주변 풍경은 거기에 걸맞지가 않다. 척박하고 촌스럽다. 젊은이들이 모여 춤을 추는 ‘무도회장’도 그렇다. 그들이 춤을 추는 음악은 1978년에 히트했던 빌리지 피플의 ‘YMCA’이다. 그건 마치 중국의 공산당이 서구 유럽의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조기에 도입하려 했지만 그게 그리 쉽게 되지 않고 있는 초라한 현실과 대구(對句)되는 것이다. 실제로 조직 보스인 빈 주변의 인간들이 지니고 있는 의식 역시 자본주의적이기는 커녕 봉건 혹은 半봉건의 상태에서 벗어나 있지 못한 상태다. 채권과 채무 관계로 다투고 있는 부하 둘에게 빈은 관우 상을 가져오게 한 후 두 사람 모두 관우 앞에서 거짓없이 솔직하게 털어 놓으라고 강요한다. 중국인들이 여전히 관우의 영(靈)을 모시고 살며 유교적 생활양식의 뿌리가 사라지지 않고 있음을 보여 준다. 중국 공산당은 다퉁이라는 작은 도시 역시, 중국사회 전역을 대상으로 그러려고 했던 것처럼, 사회주의 경제계획에 입각해 자본주의를 조기에 도입해 그 과정을 거치게 하려고 한다. 마르크스 이론은 자본주의 사회를 거쳐 사회주의가 이루어지며 중국의 사회주의 혁명은 봉건주의에서 바로 넘어 온 상태이기 때문에 이를 통과시키게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다 이론과 수사학(修辭學)에 불과한 것이다. 중국 공산당은 자신들의 세계적 패권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의 물적 토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이에 따라 중국사회의 자본주의화를 급격하게 서둘러 왔다. 그 결과, 현재 그 모든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지아장커는 그 기간이 바로 2001년에서 2018년까지라고 보고 있다. 그 17년간은 이 영화 ‘강호아녀’의 남녀가 겪게 되는 굴곡의 인생이 펼쳐지는 기간이기도 하다. 여인 차오는 남자 빈을 살리기 위해 거리에서 총을 쏘고, 불법무기소지죄로 5년을 복역한다. 남자를 위해 총을 준 사람이 누구인지를 불지 않았던 차오는 정작 빈으로부터는 배신을 당한다. 연인에게 버림받은 강단이 생기고 독해진다. 중국의 천민 자본주의는 여자를 강하게 만든다. 그녀는 고향인 다퉁으로 돌아가 다시 마작업소를 운영하며 터를 잡는다. 가까스로 자기 삶을 되찾는 그녀 앞에 이번엔 하반신 불구가 된 빈이 찾아 온다. 차오는 과연 강호의 의리를 지킬 것인가. 지아장커는 사회주의 사회의 물적 토대를 자본주의적으로 축적해 인민의 부와 행복을 이뤄 가겠다는 중국 공산당의 계획이 얼마나 잘못돼 있는지를 고발한다. 자본주의를 들여 놓는 순간 사람들 모두 자본의 끝없는 욕망에 시달리게 되기 때문이다. 지아장커는 그점을 줄기차게 지적해 왔다. 극 후반부에서 차오는 휠체어에 앉은 빈에게 말한다. “난 당신한테 아무런 감정이 없어. 그래서 이제 밉지도 않아. 당신을 받아 준 이유는 강호에선 의리가 중요해서야.” 이건 지아장커가 중국 공산당을 향해 하는 말이기도 하다. 지아장커가 중국 정부와 트러블이 많아 보임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그 사회 안에서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이유는 그 때문이 아닐까. 의리는 지키겠다는 것. 근데 이건 정치적 타협인가 아니면 지아장커 식의 여전한, 그리고 우회적인 정치적 저항인가. 중국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누구나 추억 속 자리한 인생 영화가 한 편쯤 있을 것이다. 처음 간 극장에서 봤거나 비디오테이프로 본 영화가 오늘날 무대에서 공연으로 열린다면 상상만 해도 얼마나 즐겁겠는가. 다양한 볼거리를 담아 라이브 더빙쇼로 재탄생한, 1957년 제작된 최초의 컬러영화 ‘이국정원’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국정원’은 한국 전창근 감독과 홍콩 도광계 감독, 일본 와카스기 미츠오 감독이 공동 연출을 맡은 최초의 한국-홍콩 합작 영화로, 김진규와 윤일봉, 최무룡 등 당대 최고의 한국 남자 배우들과 홍콩의 여배우들이 출연한 파격적인 멜로 드라마이다. 제작 당시에는 큰 화제를 모으며 한국영화사의 1950년대를 장식했으나 현대에 이르러서는 필름이 소실된 것으로 알려져 국내 영화학자들의 문헌으로만 확인할 수 있었다. 합작의 역사를 가늠케하는 작품 중 하나였지만 실체를 확인할 길이 없어 더욱 아쉬운 부분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수십 년이 지나 홍콩 쇼브라더스 창고에서 ‘이국정원’의 필름이 발견됐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지난 만큼 필름 대부분이 탈색됐고, 사운드가 유실되는 등 거의 복구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기적적으로 발견된 작품의 상태를 손 놓고 볼 수만은 없어 2013년 한국영상자료원이 정교한 리마스터링 작업을 통해 영상을 복원했다. 사운드는 끝내 복원시키지 못했지만 극 중 대사가 기록된 대본이 발견돼 결합시키는 작업을 거쳐 라이브 더빙쇼가 탄생할 수 있었다. 라이브 더빙쇼로 재탄생한 ‘이국정원’은 한국의 유명 작곡가가 홍콩의 미녀가수와 사랑에 빠지는 멜로드라마로, 두 사람의 사랑은 친모가 같다는 의혹과 함께 비극에 빠질 운명에 처한다. 어린 시절 헤어진 중국인 어머니를 찾기 위해 홍콩에 온 한국인 작곡가 ‘김수평’은 아름다운 홍콩 가수 ‘방음’과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힌다. 사실 방음의 어머니 ‘빙심’은 젊은 시절 한국 사람과 결혼해 남매를 낳았지만 어떤 사정 때문에 딸만 데리고 홍콩으로 건너왔다는 내용이다. 지난 4월 29일부터 5월 2일까지 서울시 서초구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무대에 오른 ‘이국정원’은 7월 9~10일 양일간 부평구문화재단 부평아트센터 해누리극장에서 관객들과 만날 예정이다. 영화를 고스란히 무대 위로 옮겨놓은 이 작품은 소리를 잃은 고전영화에 상상력을 더해 당시의 후시작업을 재현한 공연이다. 영화 ‘삼거리극장’, ‘러브픽션’을 선보인 전계수 감독이 연출을 맡았으며, 박형규와 이수안, 김기창 등 실력파 뮤지컬 배우들이 무대에 오른다. ◇ “생명력 불어넣는 일”… 순수 창작곡부터 폴리 아티스트 작업까지 전계수 감독은 “영화 상영과 결합된 공연 ‘이국정원’ 작업은 연출가에게 새로운 도전과도 같은 일”이라며 “반세기를 지나 이 시대로 다시 소환된 과묵한 영화에 사운드라는 생명력을 불어넣는 일은 실로 창작욕을 불러일으키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고 연출 소감을 밝혔다. 영화 속 음악, OST 등 당초 사운드가 완전히 소실된 작품이어서 전계수 감독이 직접 작사를 했고, 김동기 음악감독이 작곡을 맡아 ‘내 마음의 태양’을 비롯한 전체 음악을 순수 창작곡으로 만들어냈다. 연주자들의 음악뿐 아니라 폴리 아티스트(Foley Artist) 박영수의 퍼포먼스는 밥솥, 장난감, 빈 유리병 등 생활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물들을 활용해 다양한 사운드를 만들어내며 한층 생동감 있는 볼거리를 제공할 전망이다. 영화가 제작된 1950년대 후반작업 전체를 무대에서 보여주면서 고전 영화 복원의 의미를 현대화시키며 관객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할 것으로 기대된다. ◇무대 위 영화 상영부터 배우들 실연까지 ‘다채’ 총괄제작자로 나선 오동진 영화평론가는 ‘난타’를 잇는 세계적인 공연이 가능한 작품이라며 추후 새로운 K-콘텐츠로서의 가능성을 점쳤다. 오동진 평론가는 “이 작품의 원조가 됐던 건 최초 한-홍-일 합작영화이자, 컬러영화 시대인 1957년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최초격 컬러영화이다. 그래서 영화 속 의상, 헤어스타일 등이 매우 현대적이고 뛰어나다”고 소개했다. 이어 “1957년의 한국은 전쟁 직후여서 매우 어려웠던 시절이지만 합작영화가 추진됐다는 사실은 영화계만큼은 활발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국정원’에 대해 사라진 사운드를 복원하는 과정에서 완전히 재제작된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영화 상영 ▲음악 연주 ▲배우들의 실연 ▲현장 음향효과 등을 한꺼번에 보여주고 들려주는 공연으로서 영화-연극-라디오극-뮤지컬의 요소를 갖고 있는 ‘이국정원’을 특정 장르로 국한시킬 수 없어 ‘라이브 더빙쇼’라 이름 붙였다고 이야기했다. [ 경기신문 = 신연경 기자 ]
가장 폭력적인 것이 가장 순수한 것이다. 불온한 상상력이야말로 역설적으로 세상을 바꾸는 동력의 기제(機制)가 된다. 김미례 감독의 숨겨진 노작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은 자명(自明)한 척 도리어 모든 진실이 묻혀져 가는 시대를 향해 돌을 던지는 작품이다. 특히 일본 전범 기업에 대한 한국인 징용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소송이 각하 되고 있는 작금의 한국 현실에서 사람들의 손에, 또 그들의 머리에 무엇이 실리고, 무엇이 담겨져야 하는 가를 지목한다. 이 다큐멘터리는 영화라기보다는 고요한 포효(咆哮)이다. 거친 진술의 기록이다. 깊이 파묻혀 있던 한 시대의 분노를 발굴하는 고고학이다. 그리고 그 유물이 갖는 현재적 의미를 직시하라고 요구하는 성명서이다. 영화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은 1974년과 75년 일본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던 과격 테러리스트들의 얘기이다. 여기서 말하는 ‘전선’은 이른바 정치조직이나 군사조직이 아니다. 이념이다. 이념적으로 무엇보다 정신적으로 오염됐던 반정부 조직, 적군파와 달리 순수 ‘도시 게릴라’를 자처한 테러’범’들의 ‘생각=선언=주의=연대’를 지칭한다. 이들은 늑대 부대, 대지의 엄니 부대, 전갈 부대라는 소조(小組)의 이름으로 미쯔비시 중공업 본사에 폭탄을 설치했다. 일본 군국주의에 편승해 성장한 전범 기업이라는 이유였다. 순국칠사지비(殉國七士之碑) 같은 것도 폭파시켰다. A급 전범 사형수 7인의 추모비였다. 이 과정에서 사람이 죽었다. 다수가 다쳤다. 일본 사회가 요동쳤다. 1972년 적군파가 일으킨 아사마 산장 인질사건으로 일본 대중은 과격하고 폭력적인 정치투쟁에 진저리를 치고 있을 때였다. 일본 정부는 전쟁의 책임에서 확실하게 벗어날 명분을 찾고 있던 터이기도 했다. 우민화의 확실한 도구가 필요했다. 일본 우익과 군경, 언론들은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을 새로운 과격 이데올로기의 산실로 지목하고 대대적인 색출 작업에 나선다. 1975년 부대원들은 거의 모두가 체포된다. 영화는 이들 중 핵심 멤버인 에키타 유키코와 아라이 마리코, 다이도지 마사시 등의 이후 행적을 좇는다. 대지의 엄니 부대원이었던 에키타 유키코는 1977년부터 40년을 복역 후 2017년 출소한다. 아라이 마키코는 늑대 부대원 동조자라는 이유로 12년을 살았다. 현재는 반원전, 반핵(反核)활동가로 살아간다. 역시 늑대 부대원이었던 다이도지 마사시는 옥중에서 사망했다. 마사시는 투옥 생활 중 하이쿠를 썼다. 이들 중 에리타 유키코의 삶이 가장 극적인데 1975년 1차로 체포됐지만 아랍에서 비행기를 납치, 인질극을 벌이며 ‘포로교환’을 조건으로 내세운 적군파의 요구에 따라 석방돼 이들에게 합류한다. 하지만 곧 국제경찰에 의해 다시 체포돼 일본으로 압송된다. 다큐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은 내용이 갖는 휘발성에 비해 매우 서정적이다. 잠잠(潛潛)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오히려 더욱더 매력적이고 위험하며, 불온하게 느껴진다. 늑대와 대지의 엄니, 그리고 전갈의 부대원들은 과연 옳았는가. 그들의 폭력 노선은 정당했는가에 대한 질문을 하게 만든다. 무수한 동아시아 사람들을 학살하고 탄압한 일본 군국주의 정권에 대해서는 누군가 올바르게 책임을 물어야 했다. 그것을 간과하는 것은 현실과 미래를 계속 과거의 어둠으로 끌고 가는 짓이다. 게다가 그들은 패전을 패전이라 인정하지 않고 종전(終戰)이라는 교묘한 선전선동 이데올로기로 자신의 권력 기반을 지금까지 연장해 오고 있는 상태이다. 김미례의 다큐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이 주장하는 것도 바로 그 지점에 서있다. 국가라는 이름으로 자행됐던 폭력의 실체를 올바르게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범죄가 올바르게 처벌받았는지를 지속적으로 감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목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은 일본 군국주의가 유포한 대동아공영권의 허상과 그 폭압성에 대해 정면으로 비판했던 문구이기도 했다. 일반 관객들에게는 일본 내에 이런 역사가 숨겨져 있었다는 사실이 매우 놀라울 것이다. 역사의 생소한 얼굴은 종종 새로운 깨달음을 준다. 70년대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은 어쩌면 지금 시대, 지금의 우리들에게 반면교사의 역할을 한다. 일본 제국주의 강점기, 이 땅에서 벌어졌던 친일부역의 문제, 수많은 역사 청산의 난제를 어떠한 시각에서 정리해야 하는 가를 새삼 고민하게 만든다. 폭력은 절대 불가하지만 역사적 처벌과 응징은 매우 엄정해야 한다는 것, 가혹할 만큼 철저해야 한다는 인식으로 무장하게 만든다. 이 74분짜리의 ‘위험한’ 다큐가 던져 주는 교훈이다. 독일의 바더 마인호프, 미국의 웨더언더그라운드, 이탈리아의 붉은 여단까지 1970년대 혼란의 시대에 대한 기억과 인식을 소환시키는 작품이기도 하다. 왜 혁명은 변질되는가. 그렇다면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신봉하고 의지해야 할 이데아는 과연 무엇인가. 다큐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같은 희대의 작품이 대중들의 시선에서 철저하게 비껴서 있는 것도 모두 지금과 같은 혼절스러울 정도의 시절 탓이다. 강제징용자 피해보상 재판의 1심 판결부 같은 우매하고 뻔뻔한 인성이 지배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숨은 보석과 같은 이 영화를 찾아 보시기들 바란다. 보다 명징한 시대적 지향점을 지닌 영화를, 발품을 찾아가면서 보는 일이야말로 작은 혁명의 실천이다.
오멸(吳滅. 본명 오경현) 감독이 영국産 오프로드 차 광고에 나오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선댄스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받은 감독이 이 차를 타고 다닌다는 걸 앞세운다. 오멸이 짚차를 타고 제주 해변을 다니며 우리에게 전하려는 얘기는 무엇일까.가 광고의 컨셉이다. 그건 그다지 새롭지 않았다. 실제로 놀랐던 것은 광고의 앞 부분이 영화 ‘지슬’의 장면으로 채워져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지슬’은 제주 4.3 항쟁을 다룬 극영화이다. 광고는 한 아이가 동네 어른들이 피신해 있는 서귀포의 큰넓궤로 달려가 동굴 입구를 들여다 보는 장면을 보여 준다. 4·3이 광고에 나오다니. 그렇다면 4·3조차 상업화된 걸까. 아마도 그건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4·3의 문제가 이제 그만큼 대중적 인식으로 자리 잡았다는 얘기가 아닐까. 이승만 정권과 그 이후의 반공 정권이 수십년간 좌익의 준동이니 좌파들의 난동이니 하며 온갖 흑색선전을 뿌려댔어도, 심지어 공적 교과서에도 그렇게 기술하려 했어도, 역사의 도도한 흐름은 이제 광고에까지 스며들고 있음을 보여 준다. 오멸감독 역시 그런 시대적 흐름을 간파했을 것이다. 광고 출연료도 짭짤했을 것이다. 그 돈은 그가 또 다른 독립영화를 만들 수 있는 기반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세상은 그만큼 변해 간다. 변해가는 세상에 대해 요즘엔 무릇 언론들이 전부 '이준석 돌풍'이 시그널이라며 침을 흘리듯 기사들을 써댄다. 하지만 이준석은 그레타 툰베리(Greta Thunberg·환경운동가) 같은 친구가 아니다. 사람들이 툰베리에게 열광하고, 그녀를 지지하고, 심지어 이 아이를 존중하고 존경하는 것은 그녀가 16살에 불과해서가 아니다. 청소년임에도 불구하고 세계적 문제, 환경의 문제, 지역분쟁의 문제, 원전과 탈핵의 문제 등이 한결같이 씨줄날줄로 연결돼 있음을 간파하고 있기 때문이다. 16살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16이라는 숫자를 뛰어 넘는 정치적 사회적 혜안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세대의 간극을 무너뜨리는 공감의 정치학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자타칭 정치평론가로 불리는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이준석 청년 돌풍을 민주당을 비롯한 다른 당들, 한국의 정치판이 배워야 한다. 이 흐름을 간과해서는 안된다고들 입을 모은다. 본말이 전도된 한심한 논평들이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물리적인 나이의 청년 정치가 아니다. 그걸 뛰어 넘는 ‘청년적’ 정치이다. 청년들, 특히 20대 남성들이 숱하게 보수화 돼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어떤 면에서는 나치의 유겐트를 연상시킬 정도로 우려스럽다. 이런 계층들이 사회를 주도한다면 나라 꼴이 어떻게 되겠는가. 나이를 먹은 사람이라고 다 낡은 정치를 하는 것은 아니다. 나이가 고령이어도 청년적 이상을 여전히 잘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시대를 청년화 하는 것이지 청년들을 시대화 하는 것, 시대에 끼어 맞추는 것이 아니다. 이준석이 청년정치를 올바로 가져 가려면 무엇보다 자신이 왜 5·18 학살의 주범이고 연원을 더 거슬어 올라가 한국 쿠테다 역사의 원범인 정당에 들어가 있는지, 세월호 문제와 윤석열 항명 사태에 대한 자신의 정치적 태도는 무엇인지 정확하게 밝혀야 한다. 아마도 이준석의 정체에 대해 아는 사람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청년 정치가라는 라벨을 붙여 주고 있는 것이다. 하여, 정치평론가들이여 제발 그 입들을 다물라. 이준석이 청년 정치가 아니듯 윤석열은 공정의 대통령 후보가 될 수 없다. 그건 박근혜가 사실은, 여성’적’ 대통령이 아니었다는 얘기와 일맥상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여성주의자들이 그녀를 여성으로서 지지한다고 했던 건 무슨 무식의 발로인가. 소위 ‘이준석 돌풍’에서도 그 같은 무지함이 감지된다. 심히 걱정되는 바이다. CF를 찍는 감독은 시대의 변화를 안다. 이제 오멸이 앞에 나서도, 지금 ‘지슬’을 앞장 세워도 이 광고가 세상에 먹힐 것이란 걸 안다. 그레타 툰베리도 자신이 어린 나이임에도 세상이 자기의 목소리에 귀기울 것이란 걸 안다. 세상이 변하고 있음을 진작에 감지했거나 자신에게 그 변화를 주도할 수 있다는 명분이 있음을 간파했을 것이다. 한국의 언론은 바로 그 지점을 회복해야 한다. 이준석의 정치활동에 돌풍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주는 일은 제발 집어 치우고 그 안에 숨겨진 구악(舊惡)의 단말마를 세상에 알려야 한다. 앙샹레짐(ancien régime)의 반동이 다소 세련되게 온 셈이다. 거기에 속아서는 안되는 언론들이 제일 먼저 속고 있다. 아니면 속고 있는 척 하거나. 통탄할 노릇이다.
‘제2회 들꽃영화제’가 4일 막을 올린 가운데 오동진 운영위원장(영화평론가)은 독립영화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애정을 당부했다. 지난 4일 오후 6시 서울시 중구 충무아트센터에서는 ‘제2회 들꽃영화제’ 개막식이 개최됐다. 이 영화제는 5월 21일 진행된 국내 유일의 독립영화상 시상식 ‘들꽃영화상’의 수상작과 수상 후보작들을 상영하는 자리로, 대중들에게 독립영화를 소개하기 위한 의미를 갖는다. 오동진 들꽃영화제 운영위원장은 “비교적 고집스럽게 행사를 이어가고 있다. ‘들꽃영화상’이 8년 전에 만들어졌고 맨땅에 헤딩하듯이 지금까지 왔다”며 “어려울 때도 있었고 중단될 수도 있었지만 우리는 재미있게 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그는 특히 “독립영화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애정을 모아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들꽃영화상의 집행위원장 달시파켓이 마이크를 들고 “응원과 홍보 많이 해주시길 바란다”고 인사하자 객석에서는 격려의 박수가 이어졌다. 달시파켓은 영화 ‘택시운전사’, ‘우리집’, ‘조제’ 등의 영문번역을 맡은 바 있다. 이날 개막작은 지난해 5월 29일 개봉한 전지희 감독의 영화 ‘국도극장’으로, 사는 게 외롭고 힘든 청년 기태(이동휘)가 고향인 전남 벌교로 내려가 뜻밖의 따뜻한 위로를 받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극 중 기태는 생계를 위해 낡은 재개봉 영화관 ‘국도극장’에서 일을 시작하고, ‘급하시다 해서 잠깐 도와주러’ 왔다는 기태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간판장이 겸 극장 관리인 오 씨와의 이야기가 그려진다. 오동진 위원장은 “극장이 사라지고 쇠해져 가는 시대의 정서를 담고 있어서 공감하시는 분들이 적지 않다고 생각한다”며 개막작으로 선정한 이유를 설명했다. 영화 상영에 앞서 ‘국도극장’ 오 씨 역할로 열연한 배우 이한위가 개막식에 참석에 자리를 빛냈다. 그는 ‘제8회 들꽃영화상’에서 조연상을 수상했다. 이한위가 “조연상은 한 분만 주시던데 내가 받아도 되는지 아직까지 얼떨떨하다”며 “제법 영화를 했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인데 이 영화는 고향이 전라도인 내게 유리했던 작품”이라고 하자 관객들은 크게 웃으며 응원의 박수를 보냈다. 이어 그는 “배우 생활을 38년 정도 했는데 상도 너무 감사하지만 일이 꾸준한 것도 중요하다”면서, “예산의 규모는 작아도 큰 영화제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기회가 주어진다면 열심히 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한편, 영화는 6월 27일까지 매주 금~일요일 3일씩 무료로 상영하며, 코로나19로 인해 좌석을 한 칸씩 띄어 앉기로 운영해 선착순 100명까지 관람 가능하다. [ 경기신문 = 신연경 기자 ]
크루엘라는 원래 빌런(villain), 곧 악당이다. 적어도 1996년에 나온 글렌 클로스 주연의 영화 ‘101 달마시안’에서는 그랬다. 도디 스미스가 쓴 동명 원작소설에서는 더했다. 그러나 새로 나온 영화 ‘크루엘라’는 크루엘라가 크루엘라가 되기 전, 에스텔라 시절부터의 얘기다. 그러니까 착했을 때 얘기라는 것이다. ‘크루엘라’는 또 한편의 스핀오프(spin-off), 원작의 등장인물 한 명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꾸민 영화이다. 사람들은 선한 자 혹은 그들의 미담(美談)에는 그리 관심이 많지 않다. 물론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얘기다. 여기서 상대적이란, 악당을 두고 하는 얘기다. 놀랍게도 사람들은 악당 이야기에 매료되는 경향을 보인다. 예컨대 배트맨 시리즈를 두고도 사람들은 조커 캐릭터가 더 흥미롭다고 생각한다.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악은 어디에서 오는지, 악의 평범성이란 과연 무엇인지 등등 보다 철학적인 접경을 오고 간다. 그래서 아예 ‘조커’라는 영화까지 나왔다. 영화 ‘크루엘라’도 같은 맥락이다. 도대체 이 여자, 에스텔라가 왜 미친 악녀가 됐냐는 것이다. 그 악에는 꼭 악만이 있는 것이냐, 혹은 선한 구석이라곤 전혀 남아 있지 않는 것이냐, 아니면 선한 것을 사실은 위장하고 있는 것이냐, 그것도 아니면 선과 악은 원래 공존이 가능한 것이냐 등등을 물어보고 답하고 있는 셈이다. 영화 ‘크루엘라’는 그 사연과 개인사가 재미있게 펼쳐진다. 스토리가 아주 탄탄하다. 이런 점에서는 아직 할리우드를 따라가기가 힘들다. 무엇보다 의상과 분장, 미술 등등 그 물량 공세의 삼각 파고가 어마어마해서 따라갈 엄두를 내지 못하게 만든다. 에스텔라는 가난하지만 착한 엄마 밑에서 컸다. 엄마 캐서린(에밀리 비샴)은 아무리 힘이 들어도 딸을 사립학교에 보낸다. 마치 거기가 아이의 신분에 맞는 것처럼. 그러나 에스텔라는 너무 말썽을 부린다. 아이는 퇴학을 당한다. 실망한 엄마는 에스텔라를 데리고 런던에 가 살 생각을 한다. 엄마는 아이와 함께 런던으로 가던 도중 한 호화 저택(과거 귀족의 성)에서 열리고 있는 파티에 잠깐 들르려고 한다. 엄마 몰래 그녀를 따라 간 에스텔라는 성의 주인인 남작 부인이 키운다는 달마시안 개 세 마리에 쫓긴다. 사납게 달려들던 개들은 몸을 살짝 피한 자신 대신 엄마에게 달려들게 되고 결국 그녀를 성 절벽 밑으로 밀어낸다. 에스텔라는 자신이 엄마를 죽인 셈이라며 심한 자책감에 시달린다. 영화는 여기까지의 전반부와 에스텔라가 런던에서 나중에 죽마고우가 되는 재스퍼와 호레이스를 만나 핑거스미스, 곧 소매치기 생활을 하다가 백화점 청소부 생활을 거쳐 버로니스라는 패션계 최고의 디나이너(엠마 톤슨) 밑에서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게 되는 이야기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버로니스가 과거 엄마가 찾아갔던 남작 부인이라는 것, 그리고 그녀가 엄마의 죽음에 연관이 돼 있다는 것, 무엇보다 자신에게 분노와 복수의 악마성이 철철 넘친다는 것을 깨닫고 복수극을 펼쳐 가는, 그래서 에스텔라에서 크루엘라(엠마 스톤)로 변신하는 후반부의 얘기로 액셀을 밟는다. 영화는 시종일관 입이 떡 벌어질 만큼 화려한 패션의 감각으로 수를 놓는다. 저 의상을 만든 디자이너들은 누구인지, 저걸 만들려면 얼마나 많은 돈을 들였을지 혀를 내두르게 한다. 그만큼 화려함의 끝판왕을 달린다. 특히 크루엘라가 버로니스의 패션 쇼 파티에 와서 패션 디자인 배틀을 하는 일련의 장면에서 쓰레기차가 쏟아부어 놓은 것들이 사실은 크루엘라가 입은 드레스의 장식들이라는 설정, 그 가비지 룩(garbage look)의 장면은 패션이 영화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상상력의 예술이라는 점을 뽐내고 있다. 그런 장면들이 눈에 쏙쏙 들어온다. 무엇보다 크루엘라의 헤어 스타일이 눈에 확 들어온다. 그녀는 머리의 양쪽이 각기 다른 색깔로 돼있는데(염색을 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태어난 것이 설정이다.) 한쪽은 흰색이고 또 다른 한쪽은 검은 색이다. 달마시안의 흑백 무늬를 연상케 한다. 원작과 그렇게 이음새를 놓는다. 크루엘라의 복수극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관객들을 유도한다. 영화를 보면서는 에스텔라의 엄마 캐서린이 사실은 귀족 출신이었으며 그녀 역시 뛰어난 패션 감각을 지닌 천재였지만 버로니스에게 뭔가를 탈취당했거나 아니면 이 탐욕스런 남작 부인이 엄마의 작품을 몰래 훔쳐 성공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하게 한다. 크루엘라의 복수는 그래서, 정석대로 엄마의 분과 한을 풀어주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럴 경우 에스텔라-크루엘라가 지니는 선악의 이중성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그래서 영화는 그야말로 기상천외한 선택을 한다. 그게 아주 재미있다. 나름 기발한 선택을 한 셈이다. 그 점을 주목해서 봐야 한다. 할리우드는 이렇게 오락성이 강한 작품에서조차 선대(先代) 혹은 기성세대의 흐름을 완전히 일소(一掃)시키려는 의지를 보인다. 혈연관계이든 아니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기성의 것은 싸그리 없애라는 것이다. 모두 부정함으로써 모두 긍정할 수 있는 것을 만들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새로운 세대에 맞는, 새로운 시대를 열라는 것이다. 엠마 스톤과 엠마 톰슨의 연기는 그야말로 불꽃 대결이다. 전편에 흐르는 OST 곡들도 엄청난 수준이다. 60년대 니나 시몬과 70년대 도어즈에서 80년대 티나 터너, 90년대 슈퍼 트램프와 비지스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주옥들로 음악의 수를 놓는다. 눈을 즐기시라. 그리고 귀를 즐기시라. 즐기는 자만이 세상을 변화시킬 권력을 얻는다. 에스텔라가 됐든, 크루엘라가 됐든 만고의 진리이다.
국내 유일의 독립영화상 시상식 ‘들꽃영화상’의 수상작을 관람할 수 있는 ‘들꽃영화제’가 4일부터 개최된다. 서울시 중구 충무아트센터 소극장블루에서 막을 올리는 ‘제2회 들꽃영화제’는 오는 27일까지 진행된다. 이 자리에서 지난달 21일 열린 ‘제8회 들꽃영화상’의 수상작과 수상 후보작들을 모아 상영회를 갖는다. 영화제는 수상 후보작들을 관람할 기회를 갖지 못한 대중들을 위해 마련됐으며, 지난 1년간 이뤄진 국내 독립영화들의 성취와 노력을 평가하기 위한 의미도 담고 있다. 영화는 매주 금~일 3일씩 4주간 상영된다. 상영되는 모든 영화의 관람료는 무료이고, 충무아트센터와 필립 모리스, 리본병원이 후원한다. 4일 오후 6시 개막식이 진행되며, 개막작은 배우 이한위가 조연상을 받은 영화 ‘국도극장’이다. ‘국도극장’은 처량하고 볼품없는 만년 고시생 기태(이동휘)의 귀향기를 담은 내용으로, 영화 상영이 끝난 뒤 전지희 감독과 이한위 배우의 GV(관객과의 대화)가 이어진다. 이 밖에도 ‘들꽃영화상’ 대상작 ‘찬실이는 복도 많지’(감독 김초희), 극영화 감독상 ‘남매의 여름밤’(감독 윤단비), 다큐멘터리 감독상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감독 김미례), 민들레상 ‘내언니전지현과 나’(감독 박윤진) 등이 상영되며, 대부분 감독과 제작진, 배우들이 참여해 GV 시간을 갖는다. 또 SBA 서울 애니메이션센터의 특별 기획전도 다채로운 콘텐츠들로 관객들을 맞이한다. 오동진 ‘들꽃영화제’ 운영위원장(영화평론가)은 “한국 독립영화의 발전을 위해 독립영화계와 함께 노력하고 있다. 계속해서 이어나갈 수 있도록 의지를 가지고 애쓰고 있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어 “상업영화와 함께 공생해서 발전하길 바란다. 상업영화가 발전해서 독립영화를 지원하고, 독립영화는 상업영화의 밑바탕이 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것이 목표”라며 대중들의 관심을 당부했다. ‘들꽃영화제’ 관계자는 “관람료는 무료이고 코로나19로 인해 좌석을 한 칸씩 띄어 앉기로 운영해 선착순 100명까지 영화를 관람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한편 ‘들꽃영화상’은 한국 독립∙저예산 영화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2014년부터 매년 봄에 진행된다. [ 경기신문 = 신연경 기자 ]
극장가에서 거의 사라진 (극장에서 안 보면 결코 VOD 등을 통해서는 자발적으로 보지 않을) 영화 ‘쿠오바디스, 아이다’는 실로 참혹해서 영화를 보고 있기가 심란하고 불편해진다. 영화는 1995년 보스니아 스레브레니차에서 세르비아 민병대에 의해 저질러진 집단 학살극을 다룬다. 스레브레니차는 당시 세르비아가 강제로 세운 자신들의 자치 지역이었다. 이곳의 대다수 주민을 차지했던 보스니아 무슬림들은 외곽의 UN 안전지대로 피신하지만 곧 세르비아인들에 의해 분산 수용되는 척, 남자들은 모조리 집단 총살당한다. 잠재적 군인이라는 이유에서다. 주인공 아이다(야스나 두리치치)는 영화 내내 뛰어다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세르비아 군이 UN 안전지대까지 들어왔고 곧 아들 둘과 남편을 잡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과거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이었지만 지금은 UN 통역관으로 일한다. 그녀는 UN군에게 통사정을 해 자신의 가족이 끌려가지 않게 하려 한다. 그러나 무능하기 이를 데 없는 네덜란드 UN군은 아이다의 가족뿐 아니라 사람들을 구해내지도 못한다. 아니 처음부터 관심이 없었던 셈이다. 스레브레니차에서는 단 며칠 동안 8000명이 살해됐다. 1992년에 시작돼 1995년에 일단락된 보스니아 사태에서 그리스 정교계의 세르비아 민병대는 인종청소라는 명목하에 10만 명에 이르는 양민을 학살하고 5만 명에 이르는 여성들을 강간해 임신을 하게 했다. 야만과 짐승의 시간이었으며 2차 대전 이후 가장 파괴적인 분쟁으로 기록된다. 당시 세르비아의 대통령 밀로셰비치는 보스니아 내 세르비안들의 지도자 격이었던 라도반 카라지치를 지원해 이 인종 말살 계획을 실행했으며 그 선봉대는 믈라디치였다. 이들 셋은 이후 전범 재판에 넘겨졌음에도 비록 감옥이지만 천수를 누리다 사망했거나 여전히 살아 있다. 영화는 짧지만 가장 악랄했던 스레브레니치 사건을 직접적으로 다룬다. 끔찍한 학살과 강간이 자행됐음에도 영화는 그 엽기의 스펙터클을 피하려는 듯 모든 장면을 일정한 톤으로 꾹꾹 누르고 있다. 감독 야스밀라 즈바닉의 분노와 그 힘든 인내가 느껴질 정도다. 그보다는 믈라디치 민병대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주인공 가족의 시시각각 좁혀 오는 긴장감을 표현하는 데 더 주력하고 있다. 그런 이들의 모습을 통해 인간이 짐승으로 변할 때 얼마나 가공할 만한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그 공포의 최대치를 보여 주려 애쓴다. 인간은 결코 선한 존재가 아니며 악에 빠져 있을 대로 빠져 있고 음흉하며 음탕하기가 이를 데 없음을 느끼게 해 준다. 이런 인간의 본성이 민족/종교/영토의 분쟁과 결합할 때 어떠한 비극을 초래하는 가를 그려 낸다. 이 영화는 재미를 느끼거나 의미를 찾을 새가 없다. 당시 UN 안전지대에서 벌어진 일을 순차적으로 알아가는 과정과 그 진실의 실체를, 더 나아가 보스니아 내전의 실상을 깨닫는 과정만으로도 숨이 찰 지경이다. 남편과 아이가 안전지대 안으로 들어서지 못한 것을 알게 된 아이다가 장벽 위에 서서 캠프 안으로 들어서려는 군중들을 보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감독의 카메라는 철조망 바깥에 구름떼처럼 몰려든 인파를 풀 쇼트로 여과 없이 보여 준다. 사람들의 마음 속 불안과 공포가 얼마나 심대한 것이었는가를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사람들은 살려고, 생존하려고, 버둥대고 애쓴다. 아무런 잘못도 없는 사람들이 수용소 같은 강당에 갇혀 한꺼번에 몰려서 자고, 용변을 보고, 그 와중에 사랑도 나눈다. 그런 등등이 모두 눈물겹다. 이 영화의 최대 미덕은 그러한 일들이 결코 1995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만 벌어진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인지하게 해준다는 점이다. 과거의 광주에서도, 지금의 미얀마에서도, 같은 악행이 저질러졌고 저질러지고 있는 것이다. 학살자 믈라디치는 여자들만을 태운 버스에 올라타서는 “너희들이 이렇게 돼서 안됐다만 이건 다 너희 탓이다.”라고 일장 연설을 한다. 보스니아 인들이 세르비아인들에게 반항과 저항만 해 온 탓이라는 것이다. 당시 보스니아에는 무슬림 계 보스니아인과 그리스 정교회 계 세르비안들이 4:3 비율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내전의 원인은 매우 복잡했다. 민족적 콤플렉스 혹은 이유 없는 우월감은 종종 종교적 탄압의 정당성으로 둔갑한다. 세르비안들은 보스니아 내의 무슬림들을 척결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용서와 화해도 다 하는 얘기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세르비아 민병대들이 절대 용서가 되지 않는다. 이후 아이다는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민병대의 중간 지휘자급 인간이 딸과 손녀를 키우며 희희낙락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녀의 표정을 도저히 읽을 길이 없다. 저 인간을 죽여서 복수하려는 건지, 아니면 이후 어떠한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절대로 용서하지는 않고 있다는 것이다. 용서와 화해는 쉽게 되지 않는다는 것, 그보다는 무엇보다 역사에 대한 인식과 정당성을 올바로 세우는 일이 먼저라는 것을 얘기하는 대목이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는 지금 어떠한 단계에 와 있는가. 용서할 준비가 돼 있는가. 아직은 꼭,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베드로가 예수에게 물었듯 진정, 쿠오바디스 도미네(주님, 어디로 가시나이까)이다.
극장가에 조용히 걸려 있는 ‘스파이럴’은 B급 공포 액션이다. 한때 젊은 층을 열광시켰던 ‘쏘우’ 시리즈의 스핀오프(spin-off), 일종의 파생상품이다. ‘스파이럴’의 주인공은 연쇄살인범인 직 쏘가 아니라 직 쏘의 모방범을 쫒는 형사 지크(크리스 록)이다. 경찰들이 한 명 한 명 잔혹하게 살해당한다. ‘쏘우’ 시리즈의 사람을 죽이는 방식, 그 살인의 표현 수위는 ‘일가(一家)’를 이룬다. 잔인하기가 이를 데 없는데 오히려 상상력이 아주 뛰어나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상상이 지나치면 현실감각을 떨어뜨린다. 일종의 소격효과(疏隔效果)를 불러일으켜 ‘이건 영화니까 가능한 거야’, ‘난 지금 영화를 보고 있을 뿐인 거야’라는 현실감을 반대로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영화 ‘쏘우’ 시리즈는 유희로 받아들여지곤 한다. 이 영화가 심의에서 살아남은 이유는 그 때문이다. 불쾌감이나 거부감보다는 영화적 쾌감이 극대화된 것이라는 판단이 앞선다. ‘재밌잖아!’ 뭐 그런 식이었다. 아무튼 경찰들이 한 명 한 명 죽는다. 몸통이 날아가고, 사지가 찢기고, 불에 ‘홀라당’ 타고, 온몸에 유리가 박혀 죽어 나가는 동안 경찰서에서는 한 명의 형사에게만 편지가 날아든다. 살인을 예고하는 내용이다. 그 편지를 받은 경찰이 바로 지크다. 근데 왜 지크인가. 과거 지크가 수사했던 사건과 관련이 있는가. 지크는 과연 비리 경찰이었는가. 그런데 지크는 오히려 깨끗한 인물이다. 그의 주변이 문제다. 그는 흑인 서장을 아버지로 둔 경찰 2세이고 수사를 원칙대로 하려다 조직 내에서 왕따를 당해 왔다. 그는 한국의 누구처럼 조직에 충성하는 사람이 아니다. 되려 사람에게 충성하다 그런 일이 생겼다. 지크는 주변을 탐문한다. 아버지인 전직 경찰에게도 도움을 받으려 한다. 일은 점점 오리무중을 향해 간다. 자기 파트너까지 껍질이 벗겨진 시체로 발견된다.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태엽감는 새’를 보면 산채로 껍질을 벗기는 고문은 일본군이 동남아 침략 과정에서 저지른 만행 중의 하나였다.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고 한다. ‘스파이럴’은 그런 장면까지 등장시킨다. 우웩! 자 어서 빨리 범인을 잡아라. 살인자여 얼굴을 드러내라. 영화는 점점 흥미로운 결말로 달려가지만 어느 지점에서는 누가 범인이구나 하는 짐작을 가능하게 한다. 똑똑한 영화광은 진작에 범인을 잡아낼 것이다. 이런 류의 영화는 일정한 법칙을 지닌다. 반전에, 반전에, 반전을 하려고 애쓰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범인은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게 된다. 이 영화를 보면서 당신이 범인을 맞추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두고 자신의 인생에서 스스로가 영화를 얼마나 봐 오며 살아왔는지를 가늠하시길. 살면서 그런 쓸데없는 일도 스트레스를 벗는데 도움을 주게 하는 법이다. 왜 ‘스파이럴’ 같은 영화를 경기신문 같은 중요한 매체의 값비싼 지면에 할애하느냐. 영화보다는 그 점, 그런 컨텍스트가 중요하다. 첫째는 이 영화가 만들어진 과정이 흥미롭다. ‘스파이럴’은 ‘쏘우 1’의 감독인 제임스완이 기획자로 참가한 작품이다. 제임스 완은 말레이시아 사람이다. 주인공인 흑인배우 크리스 록도 기획과 각본에 참여했다. 이 영화의 주요 캐릭터는 흑인이다. 흑인이 서장이고 흑인이 수사를 지휘하고 흑인이 범인과 싸우고 응징하려 한다. 한 마디로 ‘쏘우’ 시리즈의 흑인판이다. 할리우드의 패권이 WASP, 곧 백인들에게서 급격하게 흑인 여성 성소수자 들인 ‘계층/인종/성별의 다양성’으로 넘어가고 있음을 트렌드로 보여준다. 넷플릭스의 최근작 중에는 ‘우먼 인 윈도우’란 작품이 있고 여기 주인공은 에이미 아담스인데, 이 영화는 유명한 고전인 알프레드 히치콕의 ‘이창’을 여성판으로 바꾼 것이다. 세상에. 훔쳐보기의 끝판왕 영화인 ‘이창’의 주인공이 여성이라니. 세상이 그만큼 변하고 바뀌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야 말로 두 번째 이유이다. 세상은 정신없이 바뀌고 있는데 우리의 5월과 정치사회, 특히 정치권은 구태에 구태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사회가 너무 선언적이어서는 발전이 없다. 5월이라고 죄다 광주 망월동에 몰려가서 눈물을 흘리는 척을 해서는 사회의 위선이 극복될 길이 없다. 5월이라고 5월 광주 영화만을 봐야 한다고 하면 그것 역시 이 사회의 경직을 풀 길이 없다. 모든 진보의 최대 적은 기계주의이다. 유연함이 세상을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스파이럴’은 그런 면에서 이런 시기에 역설적으로 우리들 스스로를 의도적으로 무장해제시키고 인생과 사회의 다양한 면을 생각하게 만드는 계기를 준다. 웃고 즐기고 해야 웃고 즐기는 것의 실체를 알 수가 있다. 웃고 즐기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 현재의 한국 사회는 너무 심각하다. 영화는 그런 사회에 유머와 오락은 준다. 그런데 ‘스파이럴’ 따위의 영화가 그런 ‘큰일’을 해낸다고? 그거 너무 견강부회(牽强附會) 아니냐고? 세상사 다 생각하기 나름이다. 여유들을 찾기 바란다. 혁명도 다 웃으며 하는 것이다.
지난 목요일 새 영화가 개봉되기 전까지 국내 극장가에서 ‘그나마’ 가장 눈길이 갔던 작품은 선댄스영화제 발(發) 화제작이었던 흑인 공포영화 ‘배드 헤어’이다. 이 영화, 이상함과 황당함으로 가득 차 있지만 설정 하나 만큼은 ‘죽인다’. 머리카락이 흡혈 귀신에 씌여서 사람들을 홀리거나 해치는 얘기다. 그런데 이 머리카락이라고 하는 것, 꽤나 상징하는 바가 재미있다. 제목 ‘배드 헤어’의 배드 헤어는 그야말로 질이 안 좋고 볼품이 없는 머리카락을 말한다. 흑인들이 천부적으로 타고날 수밖에 없는 일명 ‘뽀글이’ 헤어다. 흑인들은 늘 이런 헤어 스타일이 콤플렉스인데, 자신들의 외모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고 그것이 백인 주류사회에서 차별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다양한 ‘가짜 머리카락’들, 헤어 스타일들이 개발돼 왔는데 크림으로 그때그때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머리를 펴거나 형형색색의 가발은 물론이고 이런 거 저런 거 다 싫으면 차라리 아예 머리를 박박 미는 흑인남녀들도 많다. 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으뜸은 붙임 머리다. 머리를 가느다란 새끼로 바짝 당겨 묶고 그 매듭 사이사이로 흘러내리는 인조 머리를 꿰매 붙이는 방식이다. 영화 ‘배드 헤어’에서 그 공정 과정이 노출되는데 여성들에게 어마어마한 고통이 수반되는 것은 물론이다. 바짝 당겨진 두피에는 늘 통증이 오는데다 오랫동안 머리를 감는 대신 별도로 개발된 헤어 에센스를 바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니 그것도 못할 짓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의 주인공 애나(엘르 로레인)는 ‘그 짓’을 감행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외모는 계급 그 자체가 된 지 오래다. 거꾸로 그 외모는 계급적 특혜를 누릴 수 있게 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외모와 계급은 그렇게 주고받는다. 애나가 자신의 흑인 정체성을 헌신짝 버리듯 버려 가면서까지 헤어 스타일을 바꾼 것은 순전히 자신의 계급적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한 것이다. 변방의 케이블TV 어시스턴트인 그녀는 VJ 진행자가 되려고 애쓴다. 그런데 그게 전혀 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애나가 450달러라는 거금을 들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찰랑찰랑한 머리로 바꾼 후 방송국 내에서 승승장구할 기회를 얻으려 고군분투하는 이유다. 문제는 이때부터 기이한 살인이 이어지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영화의 완성도는 꽤나 ‘조악하고 저급한’ 수준이지만 그건 극히 저예산으로 기획된 작품이라고 치면 이해가 간다. 영화는 거의 전편이 방송국과 애나의 집, 애나의 삼촌 집, 기껏해야 미용실로 이어지는 세트 공간으로만 찍혀졌다. 그럼에도 영화는 일단 흥미를 끈다. 무엇보다 흑인 공포영화가 정면으로 만들어지고 본격적으로 소비되고 있다는 점이 그렇다. 흑인들만의 이야기로 공포영화가 만들어지는 것은 상업적으로 그다지 영리하지 못한 것으로 그동안 받아들여져 왔다. 공포영화에서 ‘흑인=他인종’은 귀신에 홀린 무엇이거나 괴(怪)존재 자체(‘캔디맨’, ‘앤젤 하트’ 등), 아니면 그것의 직접적인 희생양(‘겟 아웃’)으로만 그려져 왔다. 피압박 계층으로서 흑인들이 갖는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직접적인 소재나 주제로 치환시킨 작품은 흔치 않았다. 이 영화를 미국과 전세계 독립영화의 산실 쯤으로 받아들여지는 선댄스영화제가 픽업한 것은 다 이유가 있어 보인다. 시대 배경을 1989년으로 설정한 것도 나름 의미가 있어 보인다. 1989년은 레이건노믹스가 만들어 낸 거품 경제가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이고, 그렇게 자본이 만들어 낸 착시효과는 흑인 커뮤니티에도 상당한 소비풍조를 일으켰다. 백인 중심의 미국 자본주의 사회는 흑인들로 하여금 스스로가 소비하게 하기 위해 생산자의 자리를 아주 약간 양보해 주는데, 그게 MTV와 흑인 음악으로 명명되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이다. 당근을 쥐어준 셈이다. 하지만 자본의 약육강식 법칙은 당연히 사회 전반에 양극화의 전선을 넓히게 되고 이는 또 다시 인종/계급/젠더 상의 심각한 차별로 결과하게 된다. 89년의 사회상은 91년 로드니 킹 사건으로 이어지고 결국 92년 LA폭동사태가 벌어지게 된다. 흑인들 스스로 욕망과 충족의 변화체계를 인지하고 인식하기 시작하기 직전의 공황상태야말로 이 영화 ‘배드 헤어’가 보여주려는 시대상이다. 그런데 그게 꼭 1989년의 얘기만이 아니라 지금 당장의 현실을 빗대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배드 헤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만든 영화가 아니다. 엉기고 성긴 느낌을 잔뜩 준다. 특히 후반부에 여성끼리 머리카락으로 육탄전을 벌이는 모습은 코믹하기까지 하다. 영화는 결코 아이디어나 설정, 시대의식만 가지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풍부하게 이야기를 끌고 가야 하고, 장면장면마다 세련된 기술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배드 헤어’는 모자란 영화다. 미국 사회 내 흑인들의 사회적 자의식이 급격하게 고양되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만큼만 유용하다. 당신이 이 영화를 볼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는 순전히 당신의 취향에 달려 있다.
베네딕트 컴버배치 주연의 영화 ‘더 스파이’는 괜찮은 영화이지만 그렇지 않은 구석도 있는 영화다. 잘 만든 것 같지 않지만 또 그런대로 나쁘지는 않다. 인간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만 그게 다가 아닌 느낌을 주기도 한다. ‘더 스파이’는 1962년 미-쿠바 미사일 위기, 케네디와 흐루시초프 간 미소 냉전의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그때 세계는 일촉즉발의 상황까지 갔었다. 모든 역사를 미국 중심으로, 서구 중심으로 배워 온 우리로서는 미소 냉전과 이에 따른 쿠바 미사일 위기를 오로지 당시의 소련 탓, 혹은 막 혁명에 성공해 사회주의 노선으로 선회한 쿠바 카스트로 정권 탓으로 돌렸다. 미-쿠바 미사일 사태는 소련이 쿠바 연안에 핵 미사일 기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핵전쟁의 위기를 말한다. 케네디와 흐루시초프 간 극적인 타협으로 핵 위기를 벗어나고 오히려 데탕트의 분위기를 맞았지만 이 과정에 불만을 품은 양측 강경파에 의해 케네디는 암살되고 흐루시초프는 사망 후 생전의 흔적이 지워진다. 당시 소련이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만들려고 했던 이유는 미국이 터키에 미사일 기지를 만들려 했기 때문이었다. 선행된 이유가 존재했지만 그 부분은 늘 역사에서 가려져 있다. 할리우드 혹은 서구 영화 역시 이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영화에서 소련 비밀정보기관인 KGB 심문요원이 주인공 그레빌 윈(베네딕트 컴버배치)에게 간첩행위를 자백하라고 강요하는 와중에 “미국은 터키에 소련을 향한 미사일 기지를 만들어 놓고 우리가 쿠바에 같은 것을 만드는 것을 비난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여기에 대해 영화 ‘더 스파이’는 명쾌한 답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질문이 들어 있었다는 자체는 좋다. 진일보한 자세다. 영국의 MI6와 미국의 CIA는 소련 내 최고위급에 해당하는 올렉 펜콥스키 대령(메랍 니니트쩨)에게서 정보를 얻기 위해 합동으로 스파이 작전을 편다. 대령으로부터 정보를 외부로 밀반출해야 하는데, 이미 신분이 노출된 스파이급 외교관은 이용할 수가 없다. 그래서 극히 평범한 아마추어 한 명을 선발한다. 실제로 그냥 비즈니스를 하는 장사꾼 그레빌 윈이다. CIA는 윈을 소련 상무부 소속의 펜콥스키에게 접근시킨다. 그리고 소련이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구축하려 한다는 계획과 그 정확한 위치, 일정 등을 알아내게 된다. 그레빌 윈이 첩보원으로 선발되고 소련을 오가는 얘기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스파이 브릿지’를 닮았다. 거기서도 스파이 맞교환이라는 희대의 첩보전에 동원되는 인물이 보험전문변호사다. 윤종빈이 만든 우리영화 ‘공작’도 주인공(황정민)은 북한쪽 인사를 만나며 무역업과 첩보 임무를 동시에 수행한다. ‘더 스파이’의 이야기도 처음엔 비슷한 줄기를 따라 간다. 그래서 별로 미덥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펜콥스키가 적발되고 그레빌 윈이 그를 구출하겠다고 나선 후 둘 다 체포되는 과정부터 영화는 액셀을 밟는다. 인간이 이념을 넘어 이루어야 할 일들이 무엇인가를 곰곰히 생각하게 만든다. 첩보조직은 펜콥스키를 버리려 한다. 그러나 그레빌 윈은 굳이 그를 구하려 나선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레빌 윈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데는 펜콥스키가 윈을 배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상을 구하려는 자, 먼저 한명의 인간에게 자신의 정성을 다할 일이다. 한 사람을 구하는 자가 세계를 구하는 법이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을 얘기했지만 이 영화는 ‘의지의 평범성’을 얘기한다. 의지는 비범한 표정보다는 평범한 얼굴을 갖는다. 평범하고 보통인 사람들의 의지가 보다 큰 일과 업적을 남긴다. ‘더 스파이’는 아마추어 첩보원 그레빌 윈을 통해 그 점을 얘기하려 한다. 그런 태도는 옳다. 그러나 지나치게 미국과 서구 쪽의 시각을 우선시해서 담으려 한 점은 올바르지는 않다. 흐루시초프를 광기의 돼지 같은 이미지로 그려낸 것은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소련이 비밀경찰국가의 시스템을 강화하고 반인권적 탄압과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 것, 반체제 인사에 대한 고문이 자행됐던 것은 당연히 비난을 받아야 한다. 영화가 그런 점들을 기록하려 한 것은 올바른 선택이다. 권력과 체제가 그런 짓을 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등등을 다 뛰어 넘어 체제와 해당 국가를 비판하려면 송두율 전 뮌스터대 교수의 얘기대로 보다 ‘내재적(內在的)’이 되어야 한다. ‘더 스파이’는 양가적(兩價的)이다. 이중 가치적이다. 영화는 아주 잘 봐야 한다. 양 체제(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갖는 가장 적극적인 프로파간다 매체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때론 색안경을 벗고, 때론 색안경을 쓰고 봐야 한다. ‘더 스파이’가 그런 영화이다.
지난 26일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만큼 각축을 벌인 부문도 없었다. ‘맹크’의 게리 올드만에게 주자니 ‘더 파더’의 안소니 홉킨스가 걸리고 홉킨스에게 주자니 그러면 또 지난해 대장암으로 아깝게 사망한 채드윅 보즈만은 어째야 하느냐는 말이 나오고 있었던 참이다. 보즈만이 주연을 맡은 ‘마 레이니, 그녀가 블루스’라는 작품 또한 호평이 이어지고 있어서 동정표가 몰리면 남우주연상은 그에게 돌아갈 확률이 크다고 봤다. 그러나 오래되고 고루한 평론가들 사이에서는 안소니 홉킨스가 그래도 될 거라고 봤다. 홉킨스는 고령이다. 그는 올해 87세다. 이번 수상은 아마도 그의 생애의 마지막 수상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런 점들도 고려됐을 것이다. 다 떠나서 작품의 완성도가 전혀 부족하지 않다. 결국 남우주연상은 ‘더 파더’의 홉킨스에게 돌아갔다. 홉킨스가 ‘더 파더’에서 보인 치매 노인 연기는 명불허전(名不虛傳)이다. 그의 이름이 사사로이 났던 것이 아님을 역력하게 증명하는 영화라는 얘기다. 지금껏 이런 치매 연기는 없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건 사실 지금껏 이런 치매 영화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영화의 설정이 특이하다. 지금까지의 치매 노인에 대한 영화는 그를 대상화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 영화 ‘더 파더’는 치매 노인이, 더 나아가 그의 시점(視點)이 주인공이다. 노인의 파편화된 기억이 영화의 주된 줄거리이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있으면 도무지 어느 것이 사실이고 또 진실인지, 여기가 도무지 어디인지가 완벽하게 헷갈리게 된다. 이쯤 되면 이건 미스터리 영화다. 매번 그에게 등장하는 딸도 큰 딸이었다가 작은 딸이었다가 한다. 집도 자신의 집에서 큰딸의 집으로 옮겨 간다. 때로는 그것도 하루아침에 옮겨 가는 것처럼 나온다. 사위라는 남자, 혹은 (큰 딸인지 작은 딸인지, 그의 돌봄 서비스 여성인지 모를) 딸이 요즘 사귄다는 남자도 자꾸 바뀐다. 누가 누구고, 아니면 이 모든 이들이 (그가 종종 생각하는 것처럼) 자신의 집을 빼앗기 위해 작당을 한 것은 아닌지 솔직히 나중에는 살짝 의심까지 하게 된다. 치매 노인에 대한 얘기를 하는 척 치매 노인의 재산을 노리는 음모의 얘기나 치정극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게 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노인의 머리 속 파노라마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알아채는 순간 영화 ‘더 파더’는 아주 다른 각도에서 들어오게 된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주인공 노인 안소니(안소니 홉킨스)의 치매를 진행형으로 보여 준다는 점에서 그 디테일의 미학이 소름 끼칠 만큼 놀랍고 정교하다. 많은 비평가들이 이 영화에 손을 들어 준 것은 바로 그 점 때문일 것이다. 영화의 시작은 안소니의 큰딸 앤(올리비아 콜맨)이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아버지의 집을 향해 걷고 있는 장면부터다. 배경에는 마리아 칼라스의 ‘카스타 디바’가 흐른다. 장면이 컷팅되면 안소니가 자신의 방, 창가에 놓인 소파에 헤드폰을 끼고 앉아 있다. 그가 듣고 있는 음악이 바로 칼라스의 것이다. 다음으로 컷팅하면 앤이 아버지의 방으로 들어오고 안소니와 딸의 논쟁 아닌 논쟁이 벌어진다. 앤은 곧 영국으로 남자와 떠난다며 아버지를 걱정한다. 안소니는 그런 딸에게 섭섭해한다. 그렇게 다음 장면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면서 영화는 점점 예측할 수 없는 상황으로 빠진다. 갑자기 둘째 딸이 집에 들어오는 가 하면 주방에서 사위가 튀어나오기도 한다. 이 사위는 나중에 다른 사람으로 바뀌는데 아마도 딸 앤의 새로운 남자인 모양이다. 처음엔 안소니 자신의 집이었다가 나중엔 딸의 집으로 바뀌기도 한다. 나중에는 둘째 딸이 사실은 죽었다고 했고 아버지는 그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 있는 큰딸에게 상처를 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뭔가가 바뀌는 상황에 따라 안소니가 앉아 있는 거실의 풍경도 살짝살짝 바뀐다. 그림이 걸려 있다가 빈 벽이 나온다. 소파는 비슷해 보이는데 사실 다르다. 창가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빛의 양이나 방향도 약간은 달라 보인다. 그 모든 것이 안소니의 기억 속을 그때그때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구 위치나 실내 장식이 뭔가 다르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 이 영화가 궁극으로 보여주고 싶어 하는 풍경의 실체가 무엇인지 훅 들어 오게 된다. 그리고 그 주제와 이야기 전개 방식에 대해 깜짝 놀라게 된다. ‘더 파더’는 치매 아버지 때문에 마음이 아파지는 영화가 아니다. 치매라는 병에 대해, 그 어쩔 수 없이 추해지는 늙음에 대해 공포를 느끼게 되는 영화이다. 인간의 말년은 저런 상황으로 치닫기 쉽다. 노화의 실체는 아름답지 못하다.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 가.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 가. 아름다운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 가. 무엇보다 아름다운 죽음이 가능은 한 것인가. 영화는 때론 인생의 진실을 너무 솔직하게 드러내게 한다. 그래서 영화는 종종 착잡한 매체이다. ‘더 파더’는 안타깝고 슬프고 착잡한 영화이다.
세상을 살면서 후회할 일은 많다. 지난 보궐선거에서 저질렀던 잘못된 선택? 미얀마 군부 학살을 규탄하는 성명서에 서명을 안한 일? 그런 것들과 동급까지는 아니어도 진짜 후회할 일이 하나 있다. 바로 영화 ‘노바디’를 놓치는 일이다. 이 영화는 지금까지 나온 모든 액션영화를 총 망라한 듯한 작품이다. 갖가지 요소를 다 비벼 넣었다는 그런 단순한 얘기가 아니다. 영화가 주는 쾌감이 극대화돼있다는 얘기다. 액션영화를 두고 누구는 너무 폭력적이라고 툴툴댄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주인공 허치(밥 오덴커크. 맞다. 당신은 이 배우를 모를 것이다. 하도 많은 영화에서 신 스틸러로 나왔기 때문이다. 당신은 이 배우의 진가를 드디어 알게 될 것이다. 사람이나 장미나 늦게 피는 존재가 향이 오래가는 법이다)의 폭력은 후련하다 못해 통쾌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영화적 쾌감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지난 4월 7일 개봉된 영화 ‘노바디’의 현재 관객 수는 약 12만 명. 예전 같으면 수백만 명의 관객들이 환호했을 작품이다. 지금이라도 극장에서 이 영화로 덕지덕지 묻어 있는 일상의 스트레스를 풀어 보시기들 바란다. 영화 내용도 딱 그렇다. 주인공 남자가 일상의 스트레스를 풀려다가 최악의 러시아 갱단을 만나 한판 신나게 세상을 평정한다는 얘기다. 알고 보니 이 남자, 단어 세 개로 끝나는 미국 정보 및 첩보 기관 세 군데의 감찰관 출신이다. CIA, FBI, DEA(Drug Enforcement Administration : 마약 단속국) 등이겠다. 그리고 여기서 감찰은 회계비리 등을 검색하는 사무 일이 아니라 내부 비리를 찾아내서 이를 끝까지 추적해 작살…아니 처단하는 업무다. 어마어마한 살인 병기 출신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이 허치란 인간은 어느 날 갑자기 착하게 살기로 결심했고 이탈리아 휴양지에서 만난 여인 레베카(코니 닐슨)와 사랑에 빠져 완전히 새롭고 평범한 남자, 가장으로 거듭난다. 애까지 둘을 낳는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지루하다는 것이다. 일상은 끊임없이 반복에 반복을 거듭한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정해진 시간에 기상하고, 화요일쯤에는 꼭 쓰레기차를 놓치고, 매번 같은 도시락을 싸서 늦지 않게 출근하고, 사무실에 꼬박 앉아서 회계 업무를 보고(진짜 회계 일) 한 번도 늦지 않게 귀가한다. 딸아이는 그런 가정적인 아빠를 좋아하지만 아들은 아빠를 다소 무능하고 지루하게 본다. 아내 레베카도 이제 좀 싫증을 내는 것처럼 느껴진다. 부부는 침대 가운데에 베개의 성을 쌓고 잔다. 섹스도 키스도 하지 않은지 오래다. 그래서 허치는 어느 날 폭발한다. 집에 남녀 강도 두 명이 드는데 아들이 한대 얻어맞는데도 그걸 어쩌지 못하고 지켜본 탓에 아들에게도, 출동한 경찰에게도, 이웃에게도, 장인과 처남에게도, 결국 아내에게도 무능한 남자 취급을 받는다. 무엇보다 이 일은 과거 허치가 지녔던 폭력 본능을 일깨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까 말까, 다시 분연히 일어설까 말까 망설인다. 그러다 이 모든 것은 고양이 팔찌 때문에 터지기 시작한다. 어린 딸아이가 고양이 팔찌를 찾기 시작하고 그건 강도 두 명이 돈을 훔쳐갈 때 같이 쓸려간 것이라고 허치는 생각한다. 강도 두 명은 이제 허치 손에 작살이…아니 혼나게 될 터이다. 그런데 일은 이상한 방향으로 틀어지게 된다. 남녀 강도 두 명이 사실은 영세하게 사는 인간들이고 어린아이를 먹여 살리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알게 된 허치는 자제력을 되찾고 돌아서지만 마침 버스 안에서 깽판을 치는 일군의 깡패들을 완전히 작살…아니 제압하게 되는데 그 중 한 명이 미국과 러시아에서 알아주는 최악의 마피아 중간 보스의 막냇동생이다. 고양이 팔찌를 찾으러 갔던 허치는 이제 거악(巨惡)과의 한판 아니 대판 싸움을 벌여야하는 상황이 된다. 근데 이 인간 허치, 왠지 좋아하는 것처럼 보인다. ‘허치=밥 오덴커크’의 액션은 최근 몇 년 사이에 나온 할리우드의 모든 액션을 다 뛰어넘는다. 리암 니슨의 ‘테이큰’은 이제 완전 올드 맨의 것이 됐다. 키아누 리브스의 ‘존 윅’의 명성에도 흠이 갔다. 댄젤 워싱턴의 ‘이퀄라이저’도 심심해 보일 정도다. 샤를리즈 테론의 새로운 액션 ‘올드 가드’는 여기에 비하면 애들 수준이다. 밥 오덴커크의 이번 영화는 할리우드 액션영화가 지금 어느 수준과 수위까지 갔는 가를 보여준다. 영화와 영화의 테크놀로지가 하루하루 새로워지고 있음을 다시 한 번 입증하는 작품이다. 무엇보다 이 지루하고 심심한 현대 자본주의의 사회생활에서, 그 일상의 ‘압제’에 짓눌린 현대인들 모두가 일탈의 욕구와 욕망을 지니고 있음을 후련하게 고백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의미성을 찾을 수 있는 작품이다. 가정 내에서 가장들을 너무 왕따시키지 마시기를. 다들 큰일을 할 인물들이다. 자경단을 해서라도 가정을 지키려 애쓰는 사람들이다. 현대사회 가장의 위기를 우회적으로 그리고 코믹하게 그려낸다. 그 점이 인상적이다. 아 참. 영화 내내 나오는 OST 음악이 최고다. 팻 베네타의 ‘하트 브레이커’를 오랜만에 들을 수 있기도 하다. 모두들 즐감하시길!
체코의 바츨라프 하벨(1936~2011) 대통령이 유명했던 것은 그가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청바지를 입고 뒷 주머니에 시집을 꽂은 채 주말이면 공연을 보러 갔다는 이유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건 상당 부분 하벨이 대통령이 된 후에 윤색된 얘기이거나 그의 전기 영화에 쓸 요량으로 첨삭된 각본일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그렇다 하더라도 그게 뭐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하벨처럼 시인이나 극작가는 정치를 해서 비교적 직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는 있어도 그 역(逆)은 그리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건 정치라는 영역에 인문학적 상상력을 끌어 들일 수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많은 것이 달려 있음을 보여 준다는 얘기다. 수많은 사회주의 혁명이 실패한 것은 인문학과 예술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중국의 문화대혁명이 그랬다. 예술이 사라진 사회주의는, 그것이 아무리 인민에 봉사한다는 ‘전략적 목표’를 갖고 있다 한들 선전(宣傳), 선동(煽動)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하벨이 체코의 벨벳혁명 과정에서 궁극적으로 추구했던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늘 미완의 혁명이며 때문에 영구적으로 혁명을 수행해 나가야 하되 수평적 민주주의의 실현을 계속해서 추구해야 한다는 독일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1871~1919)와 그녀의 동지이자 연인이었던 칼 리프크네히트(1871~1919)의 얘기는, 그래서 맞는 말이다. 반면에 수많은 자본주의 국가가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고 있는 것 역시 인문학과 예술의 정치에로의 수렴을 거의 생각조차 못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건 우리나라가 거의 최고조의 수준이다. 그래서 정치가 늘 천박하다. 천박한 정치는 사람들에게 냉소를 주고, 그 냉소는 정치적 무관심으로 이어지며, 정치적 무관심은 젊은 세대로 하여금 역사적 무지와 정치적 사고의 왜곡을 가져 온다. 예컨대 소위 아이비 리그 중 하나라는 미국 예일대학을 나온 사람이라면 아무리 부동산 부자나 개발론자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시장이 됐다 손 치더라도 이 코로나19 정국에서 음식점이나 유흥업소의 영업제한 시간을 22시에서 24시까지 연장하는 것보다는 관객 수가 격감한 극장이나 공연장에 수행원없이 가는 일(시찰보다는 관람)을 정책의 우선순위로 뒀어야 했다. 극장과 공연장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안팎의 자영업자까지 거의 문을 닫았을 정도다. 문화를 살리면 경제를 살릴 수 있되 방역의 정치 영역에서 가장 점진적이고도 조심스럽게 자영업자들을 살릴 수 있는 일이다. 법률 공부는 했지만 예술은 별로였던 모양이다. 상상력이 별로이다. 사람은 빵이 없으면 살지 못하지만 빵만 가지고는 절대로 살 수 없고 결국 장미가 있어야 한다는 영국 켄 로치 감독의 영화 '빵과 장미' 를 본 적이 없는 모양이다. 강남 쟁골 마을이라는 전원 고급 주택단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희대의 사건(MBC TV '실화탐사대')을 보고 있으면 정치가가 예술적이거나 교양스러워지는 것을 기대하는 것보다는 하벨처럼 예술가에게 정치를 맡기는 것이 옳을 것이라는 생각을 더욱 굳히게 된다. 쟁골 마을에서는 진대제 전 장관, 이인제 전 의원, 안상수 전 창원시장, 그리고 다수의 재벌기업 회장 등이 수십억원대의 집을 짓고 살면서 한 젊은 부부가 이웃 해서 작은 집을 짓는 것을 온갖 추접스러운 수단을 써서 방해하고 있다고 보도됐다. 그 ‘작은 집’이 자신들의 조망권을 해치고 결국 동네 집 값(진대제의 집은 40억원으로 알려졌다.)을 떨어뜨린다는 이유에서다. 이쯤 되면 거의 악마 수준이다. 이런 자들과 신임 서울시장이 다시 손을 잡고 서울을 부동산 개발 공화국으로 만들려고 한다. 최근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가 자신의 칼럼에서 하벨을 소환시킨 모양이다. 하벨처럼 윤석열도 정치에는 문외한이지만 대권을 잡을 수 있다는 식의 논리를 펴기 위해서이다. 이건 전광훈이라는, 자칭 목사라는 자가 본 회퍼의 생을 들이대는 것과 같은 일이다. 한 마디로 ‘얻다 대고’이다. 윤석열은 하벨처럼 체코의 ‘프라하의 봄’ 때 저항을 했던 인물이 아니다. 윤석열은 그 반대로 소련의 탱크에 앉아 있었던 군인 같은 인물이다. 전광훈이나 진중권을 두고 견강부회(牽强附會)란 말이 나오는 것은 그 때문이다. 내 논에만 물을 끌어다 대는 일, 곧 아전인수(我田引水)인 셈이다. 이들 모두 지식인이 아니라 지식기사들일 뿐이다. 실로 조심할 일이다.
세상에 못된 영화는 없다. 모두들 착한 영화이다. 못되 보이는 척, 사실은 그런 영화도 착하게 끝난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선(善)을 지향하며 악당이 주인공이고 악이 승리하는 결말이어도 결국엔 그 지독한 현실을 벗어나자는 취지를 갖고 있어서 궁극적으로는 그것 역시 착한 영화가 된다. 극장가 한 편에서 조용히 개봉돼 상영 중인 (이 영화의 누적 관객 수는 현재 3000명이 되지 못했다) 론 쉐르픽 감독의 신작 ‘타인의 친절’은 처음부터 끝까지 ‘착해 빠진’ 영화다. 세상에 이런 사람들이 있을까 하다가도, 세상에 이런 사람들이 여전히 있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을 갖게 만드는 영화다. 언제부터인지 우리 사이에 배려와 친절이 사라진 지 오래다. 사회적 에티켓, 애티듀드(attitude)라고 규범화 돼있는 것도 역설적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문을 닫게 하는 장벽 역할을 하게 한다. ‘여기까지만’ 들어와, 더 이상 깊이는 안돼 라는 식이다. 때문에 진심으로 상대에게 친절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더 나아가 상대의 친절을 알아채고 그것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더 중요할 수 있다. ‘타인의 친절’은 바로 친절의 생리, 그 변증의 성찰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작품이다. 그런데 그런 것 다 필요 없다. 영화는 보는 내내 마음을 쿵쾅거리게 한다. 예수가 살아 있었다면 다시 재림하기를 욕망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저 아이들을 어쩌누, 저 인간들을 어쩌누 하며 혀를 끌끌 차면서, 차마 그의 발길을 돌리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 그런 예수의 마음이 읽혀지는 영화다. 세상은 너무 살기가 어렵고 살아내기가 힘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만 마음과 힘을 기울여 서로가 연대하면 이겨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제도나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종교도 아니다. 종교적인 것(마음)이 꼭 종교는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행동이며 인간적인 무엇이다. 결국 모든 것은 인간주의로 돌아간다. 세상은 인간이 바꾼다. 인간이 인간이 될 때 세상은 비로소 바뀌어진다. 영화의 시작은 클라라라는 여인(조 카잔)이 아들 둘을 데리고 가출을 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클라라는 아이와 함께 뉴욕으로 온다. 이들 셋은 폭력을 휘두르는 가장으로부터 피신한 상태다. 클라라 모자들의 곤궁한 뉴욕 삶은 여러 일상과 부딪히고 섞인다. 간호사 앨리스(안드레아 라이즈보로)가 다니는 러시아 식당은 러시아계 미국인 티모피(빌 나이히)가 운영하는데 여기에 막 출소한 마크(타하르 라힘)가 매니저로 취직을 한다. 러시아 식당은 마크의 솜씨로 점차 활기를 띤다. 먹을 것이 없어 여기저기를 기웃대는 클라라가 아이들 먹을 것을 챙기기 위해 출몰하는 곳이 이 러시아 식당이다. 마크의 변호사 존 피터(제리 바루젤)는 내심 간호사 앨리스를 사모한다. 숫기가 전혀 없는, 오로지 법률 공부만 하고 시민 변호사 일에 매진해 온 그는 앨리스를 만날 목적으로 그녀가 만든 교회의 ‘용서 모임’에 들어간다. 근데 혼자 갈 용기는 없다. 마크가 앨리스를 만나게 되는 것은 그 때문이고 클라라와 마크, 앨리스가 연결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매번 직장을 잃고 거리에 나앉게 된 제프(칼렙 랜드리 존스)가 거의 얼어 죽을 뻔하다가 실려간 곳도 앨리스의 병원이다. 앨리스와 제프는 무료급식소에서 만난 관계다. 제프는 앨리스를 도와 클라라와 아들들을 돕게 되고 결국 마크의 러시아 식당에서 일자리를 찾게 된다. 세상은 알고 보면 스몰 월드이고 사람의 인연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법이다. 그래서 그 연결선이 하나만 끊기면, 혹은 스스로가 의도적으로 그걸 끊어내면 세상과의 연결은 한 번에 와르르 무너진다. 론 쉐르픽 감독이 교직해 내는 씨줄날줄의 미세한 인물 관계망은 바로 그 네트워크의 핵심과 본질을 보여주려 함이다. 시나리오의 정교함과 한 씬 한 씬마다에 배치된 인물 관계도의 세공력이 꽤나 그럴듯하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마크는 출소 후 자신의 변호사인 존 피터와 러시아 식당에서 밥을 먹는다. 이때 마크의 어깨 대각선에 앨리스가 식사를 막 끝내고 일어난다. 클라라가 추위를 피해(뉴욕의 추위는 살인적인 것으로 유명하다) 교회 안으로 들어가 라지에터에 아이들 몸을 녹일 때 교회 문을 나서는 존 피터와 마크가 어긋난다. 사람들의 인연은 몇 번의 우연한 만남이 있어야 개연성을 얻는다. 영화는 그걸 설득해 내려고 애쓰고 또 성공해 낸다. 세상이 어렵고 혼미할 때는 겉과 속이 다 착한 영화를 보는 게 좋다. 세상에 대한 믿음을 회복시켜 주기 때문이다. 믿음이 없으면 세상을 바꿀 수 없다. 타인의 친절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돼 있으면 타인에게 친절할 수가 없다. 평소 잘 생각지 못했던 진리이다. ‘타인의 친절’은 그렇게 새로운 깨달음을 주는 영화다.
부동산은 인간의 정신을 좀먹는다. 우연찮게도, 부동산 문제가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을 비뚤어지게 만들고 잘못된 선택을 하게 만들고 있는 ‘지금 이 시기’에, 영화 ‘노매드랜드’가 개봉을 앞두고 있어 눈길을 끈다. ‘노매드랜드’는 부동산 사태가 시발(始發)이 돼 삶의 모든 것이 뒤바뀐 사람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좁게는 주인공 여성 펀(프랜시스 맥도먼드)의 이야기다. 펀의 일상은, 이름과 달리, 매우 유쾌스럽지 못하다. 그녀는 2010년을 전후해 집과 마을을 잃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덮치면서 그녀가 살던 도시 엠파이어 타운 역시, 이름과 달리, 제국의 빛을 상실했다. 완전히 유령도시가 됐다. 우편번호 자체가 없어졌다. 그 와중에 남편도 죽었다. 그녀는 갈 곳이 없다(고 생각한다). 모든 것을 정리하고 RV 한 대를 마련해 길을 떠난다. 길에서 먹고 자는 노매드의 삶을 선택한다. 펀은 슈퍼에서 물건을 사다가 만난 아이에게 말한다. 아이는 너무 힘들면(집이 없으면) 자신의 엄마 집에 와 있으라고 한다. “집이 없는 것과 거주지가 없는 것은 다르단다 얘야.”(I’m just houseless, not homeless.) 직역하면 하우스는 없지만 홈은 있다는 것이어서 자막 번역이 쉽지가 않았을 대목이다. 특히 ‘집=주택’에 대한 소유의 의미를 드러내는 부분이어서 흥미롭고 의미심장하다. 펀에게 있어 홈은 하우스에 비해 보다 자유로운 개념이다. 이동하는 삶 속에서 잠시 거처하는 곳이면 모두 ‘집’일 수 있다. 하우스는 물화(物化)된 것이다. 그건 팔고 사는 용도의 개념이다. 어쨌든 펀의 이 말은 집을 가지려 애쓰는 것과 그 욕망을 갖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다르다는 의미로 들린다. 펀은 이제 자본주의가 조장한 극단적인 욕망에서 벗어나려 한다. 그녀가 선택한 것은 무소유의 삶이며 ‘의지와 신념을 가지고’ 떠도는 삶이다. 자유로우려면 소유를 없애야 한다. 꼭 에히리 프롬의 얘기가 아니더라도 ‘소유냐 삶이냐’의 기준을 가리는 것은 결국 인간의 의지인 것이다. 21세기가 되고 산업과 네트워크가 첨단화 하면서 미래학자들은 21세기형 노매드들의 출현을 예고했었다. 그러나 신종 노매드는 그렇게 한가한 개념의 사람들이 아니다. 펀처럼 ‘하우스’없이 들판과 길을 ‘홈’으로 삼아 여기저기를 떠돌아 다니는 사람들이다. 21세기 노매드족(族)은 자본주의 사회가 극단적으로 밀어낸 사람들이다. 그들은 아마존 물류회사 같은 데서 계절노동을 하기도 하고 공룡 테마파크의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기도 한다. 식당 일은 기본이다. 그들은 노동을 찾아, 최소한의 삶을 찾아 이곳저곳을 떠돈다. 이러한 삶이야말로 21세기 노매드이다. 온라인 네트워크를 자유롭게 오가며 금융권 비즈니스를 하는 잘 빼입은 현대인들을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건 그냥 지배자들의 삶일 뿐이다. 펀이 길 위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대체로 그러한 생각들을 지닌다. 린다 메이와 샬린 스완키, 데이빗(데이빗 스트라탄) 등등은 되도록이면 적게 갖거나 아예 갖지 않으려는 삶을 택한다. 이들은 스스로들을 캠퍼 포스(Camper Force), 곧 야영객 부대라고 부른다. 포스의 리더 격인 남자는 펀에게 말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정들었던 마을을 떠나온다는 것은 슬픈 일이죠. 그러나 미안합니다. 당신에게 (인생과 세상에 대한) 답을 줄 수가 없군요. 내가 어떻게 그러겠어요. 다만 여기서 우리들과 이렇게 지내면서 답을 찾아 가시길 바랍니다. 저는 아들을 잃었죠. 저 역시 답을 찾고 있습니다.” 쉽게 답을 주려는 사람은 대체로 사기꾼들이다. 허경영이다. 좋은 사람은 상대로 하여금 상대 스스로가 인생의 답을 찾게 배려해주는 사람들이다. 기독교의 예수이며 이슬람의 알라이다. 불교의 부처이다. 기도하는 (것과 같은 유목의) 삶 속에서 사람들은 내면의 여행을 하게 되고,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된다. 소유에서 해방되(려고 노력하면, 부동산 문제에 매달리지 않으)면 인생의 답이 보인다. 영화 ‘노매드랜드’는 그런 얘기를 하고 있는 작품이다. 중국계 미국인 감독 클로이 자오는 이 영화를 보기 드물게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에 입각해서 찍었다. 영화의 이야기란, 구체적인 사회적 사건과 사실에 입각해서 구축되고 표현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배우의 연기도 극중 인물과 완전히 부합돼야 한다. 결국 메소드 연기의 결정판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하는데 이렇게 되려면 방법이 없다. 극 중 역할을 맡은 배우는 극 중의 환경과 똑같이 지내야 한다. 근데 배우 전부가 그러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이 영화는 전문 연기자를 딱 두 사람만 뽑았다. 펀 역의 프랜시스 맥도먼드, 그리고 그녀와 식당 일 등등 온갖 잡일을 하며 최저 생계비(RV 기름값 등등)를 버는 남사친 데이빗 역의 데이빗 스트라탄 뿐이다. 나머지 다른 사람들 곧, 린다 메이와 샬럿 스완키 등 모두는 실제 인물이다. 프랜시스 맥도먼드와 데이빗 스트라탄은 이 영화를 찍기 훨씬 전부터 이들 캠퍼 포스들과 생활을 같이 했다. 그들이 되려고 노력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들이 됐다. 이러기 위해서는 감독의 카메라는 대체로 ‘기다려야 한다.’ 모든 배우 아닌 배우들이 생활의 연기를 할 수 있도록 카메라가 별도의 지시로 움직이기 보다는 기다리고, 응시하고, 정지해 있어야 한다. 그 카메라 워킹의 예술이 이 영화를, 지독한 삶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아름답게 만들었다. 그 같은 ‘불균형의 균형’이 영화 ‘노매드랜드’의 최대 미덕 가운데 하나이다. 영화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야 하지만 종종 영화다워야 한다. 지금의 미국사회, 한국사회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메시지가 강한 작품이다. 그래서 흥행이 잘 안될 것이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영화는 보수화된 20대 젊은 층들에게 ‘꼰대’ 소리를 듣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세상이 이상하게 간다. 한편으로 사회의 그 이상한 흐름을 알게 해 주는 작품이다.
세상이 망하는 조짐은 극장가에서 나타난다. 두 가지 중의 하나다. 그다지 좋은 영화가 나오지 않거나 좋은 영화가 나와도 사람들이 잘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는 중국과 일본을 두고 하는 말이다. 영화는 열린 사회에서 흥한다. 닫힌 사회에서는 절대로 영화가 잘될 수가 없다. 4세대 후이 안 감독부터 5세대의 장이모우와 첸카이거, 6세대의 로우예 등등까지, 그리고 지하전영의 지아장커가 있던 나라. 홍콩의 왕자웨이까지. 예술과 정치, 인생을 담아냈던 중국-홍콩 영화는 이제 온데 간데가 없다. 시진핑식의 변질된 사회주의 독재는 영화를 더 이상 영화가 되지 못하게 한다. 홍콩 시위에서 사복경찰(우리 식으로는 백골단)의 곤봉질을 당하고 목격한 사람들은 더 이상 영화를 기다리지 않는다. 가수 정태춘이 종로에서 기자들을 기다리지 않는 것과 같다.(’92년 장마, 종로에서’) 일본도 마찬가지다. 아베와 같은 극우 보수 정권이 50년 가까이 가는 나라(2010년 잠깐 민주당 간 나오토가 1년간 총리를 한 것을 제외하고)에서는 애니메이션 외의 영화는 거의 절멸 수준이다. 극장가가 팬더믹의 영향이 크긴 하지만 언제부턴가 다이나믹한 동력을 잃었다. 한국에서는 요즘 극장 영화를 잘 보지 않는다. 견강부회 소리를 들을 수 있겠지만 그건 우리사회의 보수 회귀 움직임과 무관치 않다. 한국에서는 우파의 상상력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많이 딸린다. 인문학적 상상력이 부족하고 영화와 예술이 갖는 힘과 에너지를 믿지 않는다. 그보다는 그저 돈,돈,돈,돈의 흐름만을 쫓는다. 그저 부동산 얘기들만 해댄다. 사회 내 계급배반이 심해지고 우경화될 때마다 영화산업은 위기를 겪었다. 이명박 때 그랬고 박근혜 때 심했다.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로 유력시 되고 있는 중국계 감독 클로이자이의 '노매드랜드'에서 주인공 펀(프란시스맥도먼드)은 이런 얘기를 한다. “사람들에게 전재산도 모자라 빚까지 져서는 결국 자기가 김당하지도 못하는 집을 사게 하는 게 옳은 일이냐?” 서브프라임모기지때(2008~2010)를 배경으로한 영화인데 미국도 그때나 지금이나 부동산으로 돈을 벌려고 하다가 사달이 났었다. 한국에서는 자나깨나 사람들이 그저 부동산, 부동산하고 살지만 그것이 가지고 있는 본질은 제대로 알려고 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노매드랜드'같은 영화의 메시지는 잘 전달되지 않는다. 영화들을 멀리하기 때문이다. 우파가 더 도덕적 이어야하고 더 청렴해야하며 더 정의로워야 한다. 보다 더 가진 자들이기 때문이다. 며칠 안남은 보궐선거에서 우파 후보들에게 제기되는 온갖 부동산 특혜의혹과 거짓말들을보면서 드는 생각이다. 아직도 자유당-박정희-전두환-이명박-박근혜 세력들이 득세하고 있다. 통탄을 금할 수가 없다.
극심한 고통은 사람으로 하여금 감정적인 자해를 하게 한다. 고통이 심해지면 스스로 고립되고 은둔하려 한다. 당신들이 정말 내 고통을 알아? 내가 왜 이 고통을 당신들 하고 나누어야 하는데? 영화 ‘랜드’의 주인공 이디(로빈 라이트)가 딱 그런 심정이다. 그녀는 도심의 모든 일을 다 버리고 세상과의 인연을 다 끊을 요량으로 (그녀는 일단 휴대폰을 길가 쓰레기통에 버린다.) 와이오밍의 산속 오두막을 매입해 거처를 옮긴다. 와이오밍하면 로키 산맥의 흉포(凶暴)한 자연을 생각하면 된다. 도시 생활에 찌든 사람들은 관광이라면 모를까 혼자서 생존해 낸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곳이다. 샤이언 족 같은 인디언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실제로 이곳엔 인디언의 후손들이 살아간다. 남한 면적의 2.5배 크기지만 인구는 58만 명에 불과한 곳이다. 이디는 사실, 그곳에 죽으러 간다. 스스로 목숨을 끊지는 않겠지만 그렇게 고립돼있으면 서서히 죽어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자신의 고통이 온전히 자신의 것만으로 치부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을 위로하는 남들의 눈과 마음에서 다시 자신의 고통을 확인하는 것만큼 더욱 더 고통스러운 일은 없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당연히 이디는, 처음엔 땔감 용 장작도 잘 패지 못한다. 한번도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도끼질은 아무나 막 하는 것이 아니다. 먹을 거라고는 도시에서 올 때 가지고 온 수백 개의 참치 캔 외에는 없다. 고기를 먹으려면 직접 사슴이나 토끼 사냥을 해야 하지만 드넓은 계곡 안에서 어디로 가야 할 지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런 와중에 이디의 오두막은 먹을 것을 찾아내려 온 회색곰의 습격을 받기까지 한다. 이디는 이제 슬슬 살아 있는 것이 기적인 상황이 된다. 자신이 자신 스스로를 절대적 고립과 고독이라는 우리 안에 가둬 뒀음에도 불구하고 이디의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아마도 얼마 전에 사랑하는 남편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어린 아들을 잃은 듯이 보인다. 사랑하는 사람, 특히 자식을 잃은 사람은 쉽게 그 트라우마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 무엇으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 동생 엠마는 이디에게 말했었다. “제발 자신을 해치지 마. (Don’t hurt yourself)” 그녀는 동생의 그런 얘기가 귓등에도 들리지 않는다. 이디는 스스로 바란 대로 허기와 추위 끝에 이제 서서히 죽어 간다. 그런 그녀를 살리는 것은 와이오밍의 거친 자연의 흐름과 호흡을 잘 아는 남자 미겔(데미안 비쉬어)이다. 이디는 간신히 살아난다. 미겔은 그녀를 극진히 간호하고 보살핀다. 사냥을 하는 법, 사슴 가죽을 어떻게 벗기는지, 그 고기를 어떻게 보관하고 또 먹는지를 가르쳐 준다. 생존의 방식을 하나하나 배워 나가면 실제로 살아지게 된다. 이디는 미겔에게 묻는다. “왜 나를 도와 줬나요?” 미겔이 답한다. “내가 가는 길에 당신이 있었(을 뿐이)어요.” 주연인 로빈 라이트가 직접 감독까지 한 영화 ‘랜드’는 텍스트가 전혀 어려운 영화가 아니다. 고통받는 사람들의 얘기이며 이들이 그걸 극복해 내는 이야기인데, 그러기까지 사람들에게 어떤 위로와 연대가 필요한 것인 가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내용이다. 근데 생각해 보면 우리가 지금 바로 그 지점을 잃고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감정의 공유와 연대. 아무리 물질이 중요해진 사회이고 시대라 해도 결국 정신적인 것이 사람들을 지탱시킨다. 정신과 의지가 스스로를 지켜내게 한다. 나를 올바로 바라 보게 되고 내 스스로 고통을 이겨내면 다른 사람을 구할 수가 있다. 영화 ‘랜드’는 궁극적으로 구원에 대한 이야기이다. 영화 중반에 슬쩍 언급되지만 미겔 역시 아내와 아이를 교통사고로 잃은 것으로 보인다. 8년 전이라고 했다. 이디는 자신의 사연을 얘기하지는 않는다. 여전히 고통을 나눌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을 고치고 치유시키는 건 자연도 아니고 정치도 아니며 종교도 아니다. 그건 그냥 구체적인 또 한 명의 사람이다. 미겔은 이디에게 말한다. ‘당신을 도울 수 있게 해줘서 고맙습니다.’ 이디는 미겔에게 답한다. ‘맞아요. 그게 나죠. 당신이 주는 걸 받기만 하는 사람. 당신은 주고 난 받아요.’ 이런 얘기는 아주 진부하게 들릴 것이다. 마치 무슨 예수와 신자의 대화처럼 들릴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만큼은 그렇지 않다. 낡게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매우 충격적이다. 이 영화의 끝에는 실로 반전 아닌 반전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걸 꼭 보시기들 바란다. 그 결말까지 영화는 천천히 호흡하며 간다. 그 느린 호흡과 무서운 자연의 풍광이 압도하는 작품이다. 오랜만에 인간의 삶이 정치와 경제를 벗어나 다른 면이 있음을 보여준다. 지난달 17일 개봉해서 3000명 남짓의 관객이 봤다. 한국사회의 척박함을 보여주는 지표다.
지난 25일 예정됐던 경기신문 3월 '보도평가위원회' 회의는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한 당국의 거리두기 지침에 따라 보도평가위원회 위원들의 서면 의견서를 제출 받는 것으로 대체됐다. 위원들은 지난 3월 경기신문의 보도 내용을 톺아보면서 일관성 있는 취재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고 언론의 역할에 충실한 지속적인 현장취재를 주문했다. 더불어 지역밀착형 기사 발굴과 심층보도, 그리고 사회 문제에 보다 깊은 고민을 담은 기사를 더 많이 다루기를 요청했다. 특히 경기신문이 미얀마 민주화 투쟁을 꾸준하게 보도한 것에 대하여 저널리즘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다고 높이 평가하면서도, 선거 관련 기사와 고발기사 등에서 공정성을 확보한 더욱 균형잡힌 보도를 당부했다. 아래는 보도평가위원회 위원들의 의견서를 정리한 내용이다. △ 박조원 위원장(한양대학교 교수) 경기신문이 정치, 노동, 사회, 문화, 언론 등 전방위적으로 낡은 관행과 문제점을 찾아내 사회 개혁에 앞장서고 있어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이처럼 거시적인 측면뿐 아니라 미시적인 측면에서도 우리 사회의 잘못된 관행들을 바로 잡기 위해 노력을 기울여 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는다. 예를 들어 민관을 가리지 않고 높은 사람들이 방문하는 행사에서는 정장이나 제복을 차려입은 젊은 여성이 이들에게 꽃다발을 증정한다. 이러한 장면은 매우 낯익다. 너무 낯익어서 별 다른 문제점을 느끼지 못한다. 그런데 왜 꽃다발을 증정하는 사람은 늘 곱게 꾸민 젊은 여성이어야 하는 걸까? 이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뿌리 깊은 성차별이다. 이처럼 부지불식간 일어나는 문제 많은 관습도 사라져야 한다. 경기신문이 이와 같이 우리 생활 속에 스며들어 있어 문제점을 의식하지 못하는 폐단을 찾아 개선되도록 해주기 바란다. 사회의 진보라는 것은 세세한 일상생활에서의 변화가 함께 이루어질 때 참된 의미를 가질 것이다. △ 홍숙영 부위원장(한세대학교 교수) 김승연 “박형준, 나를 고소하라”(3월12일자 1면) 제하의 기사는 김 전 교수가 박 후보 부인 자녀의 미대 입시 청탁을 했다는 주장을 다루고 있다. 이 기사는 부산시장 후보를 모두 검증하는 내용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특정 후보의 비리 연루 사실만을 다루고 있어 선거를 앞두고 공정성 문제가 제기될 우려가 있는 기사이다. 그뿐 아니라 박재동의 손바닥아트에서까지 조국의 딸과 박형준의 딸 입시 비리 관련 내용을 다룸으로써 박 후보를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과다하게 다룬 측면이 있다. 선거와 관련해 특정 후보자의 비리만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것은 공정성에 있어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차라리 후보 모두의 비리를 전면적으로 비교하는 내용으로 공정성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소득·주택·대출·의료·교육 이재명의 ‘5대 기본’ 구체화”(3월19일자 1면) 제하의 기사는 경기도의 정책이지만 이재명 지사의 이름을 내세우고 있으며, “5대 정책 완성 땐 ‘매머드급’ 효과”라며 과장된 표현을 사용하였다. 또한 “‘아프지 않고 건강한 백세시대’로 압축되는 이재명 지사의 의료에 대한 구상은 성남시장 시절부터 진행되고 있다”거나 “지난 2003년 ‘성남시립병원 설립을 위한 범시민추진위원회’ 공동대표를 맡으며 성남시의료원 설립 추진에 나서 임기 중 첫 삽을 떠 현재 100만 성남시민의 건강지킴이로 자리매김했다”는 등 이재명 지사가 성남시장 시절부터 도지사가 된 현재까지 이어 온 정책의 공적을 치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자치단체장의 공적을 치하하는 내용으로 정책을 소개하는 것은 기사라기보다는 정책 홍보에 지나지 않는다. 정책의 장·단점, 전문가의 견해, 시민의 평가 등을 담아 입체감 있고 균형 잡힌 기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 △ 공소자 위원(교육운동가) “유가부수 조작 고발 이후... 폐휴지로 둔갑한 조중동 새 신문들”(3월 22일자 1면) 제하의 기사는 포털사이트에서 보기 힘든 희소성 있는 내용을 담은 기사로 메인에 노출하여 강조한 점을 높이 평가한다. 영상과 사진을 통해 어떤 일이 저 곳에서 벌어졌는지 한 눈에 상황을 짚어볼 수 있었다. 다만 의원실 보좌진의 목소리를 담는데 그쳐, 기자만의 후속 현장취재가 없었다는 점은 아쉽다. 또 별도로 ABC 협회의 역할과 기능을 설명해 주었다면 유가부수 조작이 어떤 의미인지, 얼마나 심각한 불법 행위인지 독자가 이해하기 쉬웠을 것이다. “[오동진칼럼] 한국의 수많은 ‘JFK 암살자들’ 을 밝혀내야”(3월 23일자 13면) 제하의 기사는 조국, 박원순, 한명숙 등 진보 혹은 정부여당 인사들의 ‘억울한’ 측면을 영화 JFK에 빗대어 강조한 칼럼이었다. 공감 가는 부분도 있지만,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경우 법원은 물론, 국가인권위원회의 판단이 내려진 사안이다. 필자의 주관과 주장이 무척 강한 칼럼이어서 이러한 경우에는 “이 글은 본사의 편집방향과 무관할 수 있음” 과 같은 문구를 꼭 표시해 독자의 주의를 환기시켰으면 한다. 개선사항으로는 지난 기사를 기간별로 제목을 모아 볼 수 있는 기능이 있으면 좋겠다. 예를 들어 ‘많이 본 기사’ 같은 경우는 실시간이나 당일에 한정되는 것이 아쉽다. 기사 검색을 위해 상세검색(https://www.kgnews.co.kr/news/search.html)으로 들어가 검색어를 입력하고, 검색조건/기간/섹션분류 등을 본인이 직접 설정해야 그나마 원하는 기사들이 쭉 나타난다. 이런 방식보다는 유저의 편의성을 높이는 방식을 적용했으면 한다. 많이 본 기사, 의견이 많이 달린 기사 등을 주간, 월간 별로 묶어서 볼 수 있는 검색 기능을 추가하면 편리할 것 같다. △ 사정희 위원(화성시 민주시민교육센터 팀장) “현장취재 ‘불법시설물 치운 청정계곡 방문객이 버린 쓰레기 골머리’”(3월11일자 종합편) 기사는 경기도가 실시한 가평계곡 불법시설물 철거 이후 달라진 모습을 취재한 고발기사로 정책 시행이후의 모습을 경기신문이 직접 점검해 언론의 역할에 충실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한다. 이 기사처럼 지속적인 현장취재가 필요하다. “현장취재 ‘경기도 청정계곡 부러운 우이동 계곡’”(3월 23일자 1면) 기사는 적절한지 의문이 든다. 즉 3월 11일자에서는 불법시설물 철거이후 경기도와 지자체의 점검과 관리 부재로 계곡이 오염되고 있다는 내용을 끄집어낸 반면, 3월 23일자에서는 아직 개선도 되지 않은 사안을 그것도 1면 톱기사로 경기도가 성공리에 완수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위의 두 기사를 접한 독자들은 어리둥절했을 것이다. 일관성이 결여되고 편향된 현장취재는 기사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릴 뿐만 아니라 현장취재의 목적과 의미에도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3월 8일은 세계여성의 날이다. 그래서 그 날 만큼은 TV나 신문 매체에서 과거 사회적 약자로 살아온 여성의 역사와 현재 여성의 권리 등을 조망하는 데 지면을 할애한다. 그러나 경기신문의 경우 3월 8일 지면에서 여성의 날 관련 보도를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는 도약하는 경기신문에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다. 차후 노동절, 장애인의 날, 노인의 날 등 사회적으로 관심 가져야할 집단에 대한 보도가 필요할 것으로 본다. 하지만, 평가위원들의 의견을 대부분 수렴해 주는 것에 감사를 전한다. △ 송건영 위원(경기대학교 교수) 로컬 뉴스의 강화로 경기, 인천지역 곳곳의 소식을 전하는 기능을 강화하면 좋겠다. 지역주민의 관심사인 수원비행장 이전사업, GTX(수도권광역급행철도) 사업, 동탄-서수원 신분당 사업 등을 취재해 기사화하는 심층보도를 부탁한다. △ 여면구 위원(대한민국산업현장 교수) 경기 북부 지역을 문화로 정의한 특집시리즈 기사는 새롭고 관심을 유발했다. “평화교과서, 마을박물관”(3월17일자) 기사는 한번쯤 찾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들게 했고, 탄약과 포탄을 나르는 임무를 수행했던 군마 ‘레클리스’ 이야기는 감동을 주는 좋은 내용이었다. 다만 찾아가고 싶은 독자를 배려하는 차원에서 가는 길을 간단한 그림으로 그려 넣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 인터뷰를 3월18일자 1, 3, 6면에 걸쳐 실었는데 너무 나눠 여러 면에 실어서 집중도가 떨어졌다. 3, 4면을 바로 붙여서 편집 보도했더라면 더 좋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셀프조사 못 믿어... 용인 반도체클러스터 플랫폼시티 개발 중단하라”(3월19일 자) 기사는 제목에 플랫폼시티란 단어가 있지만 내용에는 반도체클러스터 문제만 다루고 있어 플랫폼시티에 대한 문제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기사의 신뢰성을 높이기 위해서도 제목과 내용을 일치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겠다. 김치가 자국 음식이라는 주장이 중국에서 나와 논란인 가운데 우리의 목소리를 내는 보도도 자주 나왔으면 한다. 도내 김치 공장이나 김치 명장 등을 찾아 취재하는 등 김치 종주국이 왜 우리나라인지 알려 중국의 주장을 반박하는 보도가 있었으면 좋겠다. △ 임선일 위원(경기도교육연구원 연구위원) 요즘 코로나19(COVID-19) 백신 접종이 진행되면서 이에 대해 많은 말들이 오가고 있다. 하지만 이런 자극적인 이견들을 다루는 기사보다는 “[카드뉴스]백신의 사회경제학 ‘위기는 평등하지 않다’”(03월25일자)와 같이 보다 깊은 고민과 문제를 다루는 기사가 더 많아지면 좋겠다. 백신 접종에서 소외된 계층의 어려움이나 자본주의와 권력으로 인한 불합리한 상황이 발생하지는 않는지를 넓은 시각에서 다루는 기사가 나왔으면 한다. 홈페이지 피플 부분 중 ‘인사, 사고, 부고, 결혼’의 소식을 전하는 코너가 있다. 이 부분이 활성화 되지 못하고 경기신문 내부의 소식으로 채워지고 있는 듯하다. 요즘 세태에 맞지 않는 부분은 없는지 고민이 필요해 보인다. 이 부분을 어떻게 운영할지를 깊이 고민해 봤으면 한다. △ 최윤정 위원(한국정서교육개발원 원장) 경기신문(온라인)은 짜임새가 좋다. 핵심 이슈는 당연히 볼 수 있으며, ‘실시간 뉴스’가 업데이트 된다. 또 경기신문 구독 집단의 반응으로 보여 지는 ‘많이 본 기사’를 통해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기사를 보게 된다. 그러나 기획기사 및 칼럼/사설 부분의 페이지 구성은 균형 있게 배치되어 있지만, 기획기사를 볼 때 관련기사만 정리되어 있어 처음부터 보는 것에 대한 불편함이 있다. 그리고 오피니언 연재 부분을 카드뉴스 형식으로 만든 의도는 좋으나 연재된 글의 소개 이미지에 대해서는 재고가 필요하다. 글의 정체성이 드러나는 이미지가 필요해 보인다. 뉴스가 대중문화가 된 사회에서 살고 있는 요즘, 아기자기한 문제보다는 사회 구성원의 생활과 직결된 재산, 코로나, 불공정, 흉악범죄 사건 등이 국민의 관심을 끌고 있다. 싸늘한 국민 반응이 이슈가 되고, 현상에 대해 개진된 의견은 선거용이 되어 쟁점화 되고 있다. 시간 끌기의 반복은 언론에 대한 불신, 정치에 대한 혐오로 이어져 국가 신뢰에 대한 손실을 초래해 답답하지만, 아주 천천히 조금씩 사회가 진실해지고 있는 과정이라고 믿고 싶다. 상호 이해 또는 공감대 확대라는 언론의 목표를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의 다양한 견해가 모아지는 것이 필수이다. 원삼주민통합대책위원회와 같이 혼란을 바로잡으려는 바른 사람들의 용기 있는 협동이 사회 곳곳에 만들어질 수 있도록 지금과 같이 윤리적 행위에 대하여 격려 부탁드린다. 경기신문을 검색하면 “경기도를 대표하는 경기신문은 정직하고 바른·사람을 존중하는 신문을 추구합니다. 진실이 통하는 대한민국! 경기신문이 앞장서겠습니다.” 라는 소개 글을 볼 수 있다. 언론이 개인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에 대한 책임과 진리 추구 이상으로 경기신문의 구독자와의 연계성에 대한 내면화된 철학적 의지를 느끼며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 최인숙 위원(고려대학교 평화와민주주의연구소 연구교수) 미얀마 민주화 투쟁에 대한 꾸준한 보도는 경기신문이 저널리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기에 충분하다. 2021 KOVO컵 기사(3월2일 8면) 뒷면 배경을 빨간색으로 처리한 것은 매우 거슬린다. 편집상 너무 자극적이어서 섬뜩하며, 배경색이 짙어 글자가 잘 보이지 않아 기사를 읽는 데 불편했다. 3월 8일자 “박재동의 손바닥 아트”는 성수소자의 인권말살을 풍자화해 무척 신선하다. 그러나 만평으로만 그치지 말고 소수자 인권보호를 위한 기사들을 경기신문이 제시해 이슈화하면 오피니언 리더로 우리 사회를 바꿔 나가는 데 큰 역할을 할 수 있다. 에스프레스토 손동현 대표에 대한 기사(3월8일자 5면)의 사진 처리는 얼굴만 나오는 사진으로도 충분한데 상반신 전부를 실어 좀 우스꽝스럽고 어색한 느낌이 든다. 윤화섭 안산시장 기사(3월8일자 8면)도 마찬가지이다. 사진이 기사보다 더 큰 느낌이다. 사진이 기사를 잡아먹어 눈에 띄지 않는다. 주객이 전도된 기사 편집은 개선해야 한다. 좀 더 세심한 편집이 필요하다. 경기신문이 지방지라고는 하지만 국제적인 뉴스도 다뤄 지평을 넓히면 좋겠다. 미국이나 유럽 등의 코로나 소식, 백신접종 소식, 미얀마 민주운동을 지지하는 해외 국가들의 움직임 등을 다루면 좋겠다. △ 최광범 위원(한국언론진흥재단 전문위원) 세명대 이봉수 교수가 지난 1월 경기신문 임직원들에게 행한 강의에서 지역신문이 지향해야 할 방향을 소개했다. 지역밀착형 기사는 기본이고 국가적 과제에도 목소리를 높일 것을 주문했다. 경기신문의 3월 보도는 전반적으로 이 교수의 조언을 잘 반영했다. 발행부수 조작 사건을 집요하게 다뤘다. 국내 언론 가운데 가장 적극적으로 기사화했다. 광명폐기물장에 비닐을 뜯지 않은 새 신문을 실은 트럭이 들어서는 사진(3월 23일자 2면)은 한국 신문의 적폐를 웅변했다. ‘경기신문은 미얀마 민주화투쟁을 지지합니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연속보도하고 있다. 박수를 보낸다. 40년 전 광주의 비극을 보는 듯한 군부의 만행을 고발하는 기사와 이를 규탄하는 단체들을 발굴해 보도하는 기획력이 좋았다. 마지막으로 ‘현장취재’ 코너를 통해 국민생활이 개선되거나 악화되는 현장을 역동성 있게 전달한 노고를 평가한다. 머리기사로 보도한 “대북전단금지···선물처럼 온 ‘평화’”(3월 22일자 1면)라는 제목의 기사는 ‘대복전단금지법’ 시행을 1주일여 앞두고 현지 르포형식을 취해 신문 전체에 역동성을 더했다. 기자의 의욕이 너무 앞서는 기사들이 더러 보였다. “경기도 청정계곡 부러운 우이동 계곡”(3월 23일자)이란 제목으로 보도한 1면 머리기사는 특정 지역의 사례만으로 전칭화하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들었다. 필자가 지난해 가을과 올 겨울 두 번 도봉산 산행을 하면서 느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도봉계곡은 완전하게 시민 친화적 공간으로 변신해 있었다. 기자의 감정이 과도하게 기사에 묻어나는 점도 경계해야 한다. 19일자 1면 머리기사 “‘전원찬성’ 도체육인들 눈물”이란 제목이 전형이다. 독자입장에서는 “왜 경기도와 경기도의회가 체육진흥재단 설립을 강행하는가”에 대한 의문도 들 수 있다. 스트레이트 기사는 이해관계자의 관점을 균형있게 전달해야 한다. 기사에 기자의 의도가 들어가면 기사의 신뢰도는 그만큼 내려간다. 기자의 의견은 오피니언란을 통해 반영하는 게 옳다. 지역밀착형 기사발굴에 더 매진했으면 좋겠다. 용인의 김대건 길(9일자), 안산의 김홍도 테마길(11일자), 포천의 백사 이항복 선생(16일자) 등은 이번 달 경기신문 기사를 통해 알게 된 내용이다. 많은 경기도민은 타지방에서 온 이주민들이다. 태어난 고향이 아니기에 지역에 대한 애착이 덜할 수 있다. 제2의 고향에 대한 애향심을 고취하는 매개체가 지역신문인 경기신문이 해야 될 역할이기도 하다. [ 정리 = 노경신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