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에 우리민족은 해방을 맞았고 조선에 와있던 일본 병사와 가족들은 패망했지만 마지막 돌아가는 길에서도 일본 어머니, 누나들이 최후까지 남아서 가족의 귀향을 뒷바라지했다는 야사를 들은 바가 있다. 일본의 여성권익이 우리나라만 못하다는 일부 제한적인 자료에 근거한 주장도 공감을 하지만 최근의 언론 보도에서는 “인공호흡기를 양보하자”는 의사의 제안을 일본 노인들이 따르고 있다고 한다. 도대체 일본국민의 의식을 움직이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고등학교 체육 선생님 장순호 전 교육장님의 조정팀 인솔 일본여행기가 비오는 날 실내 체육시간 2시간을 채웠다. 당시로서는 비행기를 타신 분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경외심이 들었고 그분의 말씀은 더더욱 신기했다. 선생님 말씀입니다. “우선 일본 사회는 양보하는 사람이 한가득하다. 버스안에서도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엘리베이터에서는 항상 상대방을 배려하는 자세를 보았다.” 고등학생시절이니 45년전이다. 요즘 학생만큼 사회를 비판하거나 사안을 평가하는 역량이 부족했을 것이기도 하겠지만 당시에는 일본사람들은 예의적이구나 생각했다. 2008년 일본교과서 왜곡으로 도의원님 독도 규탄대회를 수행하였다. 당시 여행사와 미스매칭으로
1975년 초여름날에 시골마을에 쇳소리가 울려퍼진다. “신 이장님께 알립니다. 내일 오전 11시에 면사무소에서 이장 회의가 있다고 면사무소 담당서기의 연락이 왔습니다.” 잠시후에 다시 울려퍼지는 스피커 소리. “네네, 이장님 잘 알겠습니다.” 이 소리는 화성시 어느 시골마을 구 이장장님과 신 이장님이 면사무소 긴급 연락사항을 주고받는 동네 마이크 대화다. 고향마을에 우체국 교환전화기 한대가 배정되었다. 당연히 동네 이장님 댁에 설치되었고 동네 사람들의 바깥세상 연락처가 되었다. 도시로 나간 큰 아들이 시골집 막내에게 연락을 하고 시골에 사시는 어머니가 도시로 나간 아들딸에게 할 말이 있으면 이장님댁에 간다. 이장님이 우체국으로 연결해서 시외전화를 신청해준다. 그런데 이처럼 소중한 역할을 하시던 이장님이 사직했다. 당연히 동네 마이크는 신 이장님댁으로 이전하였지만, 안타깝게도 전화기는 먼저 구 이장님의 개인소유였다. 그래서 구 이장님 댁에 동네 마이크를 하나 더 놓기로 했다. 소나무에 매달린 스피커는 4개 그대로인채 마이크시스템을 하나를 더 들인 것이다. 그래서 동네로 걸려오는 전화는 먼저 이장님이 받아서 동네에 알려주는 역할을 하면서 그중에 신임 이장님께 오
오산시청 2층에서 주차장을 바라보고 있는데 경계석과 함께 아름다운 곡선을 자랑하는 나뭇가지에 흰 나비가 잡혀있는 형상이 보였다. 민원인인듯 젊은 여성이 주차를 하고 지름길로 걸어오다가 나뭇가지에 흰색 원피스가 걸린 것이다. 왼쪽을 빼내면 오른쪽 옷의 올이 나뭇가지에 걸리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안타까운 상황이었다. 주변의 다른 여성들이 달려가서 동시에 나뭇가지에 걸린 옷을 풀어내어 어렵게 탈출하여 부리나케 사무실 계단으로 달려가는 모습을 보면서 주차장에도 지름길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계과장님과 의논하여 주차장에서 청사 양쪽 문으로 들어오는 지름길을 냈다. 주차면 2개씩 4개에 흰색 횡단보도선을 칠하고 경계석과 함께 문제의 그 조경수를 부분 이식했다. 정 급하면 잠시잠깐은 그 통행로에 주차를 해도 된다. 3차로 길에서 중앙차로는 아침저녁으로 교통량에 맞춰서 가변차로로 정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아마도 청사 주차장을 설계한 분들은 종이위에서 멋지고 아름다운 조경과 폼나는 주차선 배치를 하였을 것이지만 실제 크기의 시물레이션은 하지 못했나보다. 드넓은 모래밭에가서 실물크기의 주차장을 만들고 가장 먼 자리에서 걸어 청사로 들어가 보는 테스트를 하였다면
101년전, 1919년 1월 21일 고종황제가 덕수궁 함녕전에서 승하했다. 승하 직후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퍼저나갔고 3·1운동으로 확산되는 기폭제가 되었다. 3월 3일 국장에 독립운동 거사를 결행하는 것은 불경이고 기독교측에서 일요일을 피하자하여 결국 3월 1일로 정해졌다. 국가장법의 목적은 국가 또는 사회에 현저한 공훈을 남겨 국민의 추앙을 받는 사람이 서거(逝去)한 경우에 그 장례를 경건하고 엄숙하게 집행함으로써 국민 통합에 이바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정했다. 경기도청장에 관한 조례는 공무상 사망공직자를 명예롭고 경건하게 예우하기 위해 제정되었다. 경기도의회 의회장에 관한 규칙은 도의회의원이 임기 중에 사망한 경우에 의회가 경건하고 엄숙하게 의회장을 집행하도록 정했다. 공직생활 중 도청장에 여러 번 참석했다. 1989년 12월 30일 공보실에 근무하던 박갑순 서기관이 순직했다. 도청장을 준비하고 장례를 치르고 장지까지 함께했다. 2005년 폭설이 내린 크리스마스에 전북 고창군 공음면 용수리 농촌마을 축사에 올라가 제설작업을 벌이다가 추락사한 고 이주영 사무관 도청장이 2006년 2월 9일에 엄수됐다. 2000년 12월 2일에는 권호장 전행정부지사 운
한몸에 머리가 둘인 동물이 있었다. 이리저리 맛있는 열매를 먹기 위해 돌아다니던 중 왼쪽 머리가 졸립다며 잠시 잠을 청했는데 맛있는 과일을 발견한 오른쪽 머리는 혼자서 따먹었다. 잠에서 깬 왼쪽머리는 오른쪽 머리의 입가에 과일을 먹은 흔적을 발견했고 왜 깨우지 않고 혼자서 맛있는 것을 먹었느냐고 짜증을 냈다. 이후 어느날 왼쪽머리가 독초를 발견했다. 오른쪽 머리를 골려주겠다는 생각으로 마구마구 독풀을 먹었고 결국 “두 머리 한 몸 동물”은 죽고 말았다. 선거에서 상대후보가 없으면 선거운동을 못하는 후보가 있다. 후보등록을 하고 선거운동이 시작되면 가장 먼저 입에 올리는 말은 상대후보 험담이다. 올바른 후보자라면 자신의 선거공약이나 살아온 과정을 설명하면서 꼭 당선되어야 할 이유를 유권자에게 제시해야 한다. 프로권투 경기 15라운드를 마치고 링위를 뛰어다니는 선수를 본 해설위원이 말한다. 지금 링 위를 뛰어다니면 심판들이 좋은 점수를 줄 것 같지만 경기에서 최선을 다하고 지금은 의자에 앉아서 쉬어야 한다고. 실제로 심판들은 채점표를 정리하느라 뛰어다니는 선수를 볼 여유가 없을 것이다. 공무원들이 인사철에 인사운동을 하는 시절이 있었다. 21대 국회의원이신 박수
대략 100년간 목재를 모아야 새로운 궁궐공사를 착공할 수 있었다. 지방에 근무하는 관리들은 궁궐을 짓는데 쓰일 목재를 마련해 한양으로 보냈다. 숭례문을 복원할 때에도 나무를 베기 전에 고사를 지내는 모습을 언론에서 본 기억이 있다. 충분한 목재가 모이면 궁궐공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런데 공사를 시작한 대목장이 급하게 집으로 돌아와서 머리를 싸매고 누워버렸다. 큰 일을 하던 집안의 기둥이 병석에 누웠으므로 온가족이 크게 놀라고 걱정을 했다. 가족들이 무슨 말을 해도 아픈 이유를 말하지 않았지만 나이어린 막내 며느리가 지속적으로 재롱을 부리면서 시아버지가 아픈 연유를 물었고 이에 시아버지는 네가 알아 무엇이 달라지겠느냐만 더이상 귀찮게 하지 말라는 뜻으로 그 이유를 말했다. 그 사연은 100년동안 역대 왕과 관리들이 모아온 목재중 갯수가 가장 많은 석가래의 길이에 착오가 생겨서 설계보다 짧게 잘랐다는 것. 그래서 3족이 죽게는 멸문의 지경에 이르렀다는 말이다. 시아버지의 청천벽력같은 이야기를 들은 가족들은 크게 놀랐다. 하지만 막내 며느리는 태연하게 말했다. 짧게 잘랐다면 다시 연결하면 될 일라 말했다. 대목장은 공감가는 말로 받아들이고 급하게 현장으로 달려
2016년 8월에 손예진, 라미란, 박해일 등 유명배우가 출연한 영화 ‘덕혜옹주’가 개봉했다. 남양주시 공무원들이 덕혜옹주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덕혜옹주의 묘가 남양주에 있기 때문이었다. 영친왕의 부인인 이방자 여사와 덕혜옹주는 1989년 같은 해에 별세했다. 덕혜옹주는 4월 21일, 이방자 여사는 4월 30일에 별세해 남양주 금곡에 영면했다. 남양주시 공무원들은 영화 ‘덕혜옹주’를 관람한 뒤 소감문을 모아 자료집을 내고 이를 영화사와 문화단체 등에 배포했다. “슬프지만 반드시 알아야 할 우리 역사인 만큼 덕혜옹주를 기억하고 덕혜옹주의 묘가 남양주에 있는 것을 알리고자” 자료집을 만들어 배포하고 영화사와 출연 배우들에게도 보냈던 것이다. 영화상영 이후 남양주시는 덕혜옹주 묘역 진입로에 홍보물을 세웠다. 문화재청 왕릉관리사무소는 덕혜옹주묘역~영친왕 묘역으로 이어지는 산책로에 조선 27대 왕릉 사진과 연혁이 적힌 판넬을 전시했다. 시 공보실에서는 이후에도 지속적인 홍보활동을 이어갔다. 언론의 보도를 보고 수도권에서 청소년, 어른할 것 없이 관광객들이 찾아왔다. 왕릉관리사무소에서 별도의 문화해설사를 배치해 주었다. 1년이 지난 2017년 5월에 문화재관리
사다리는 사람의 키를 넘는 높은 자리로 올라가는 도구로서 긴 세로막대 2개에 짧은 가로막대를 여러개 연결하여 지붕이나 높은 다락장에 걸치고 손과 발로 올라가는 도구입니다. 우리는 공사장에서 사다리를 이용하고 고급주택의 2층 다락방에 올라가고 멋지고 기능성 있는 사다리를 지인들에게 자랑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직장생활에서는 종이 위에 사다리를 그리고 간식을 먹는데 요긴하게 활용하기도 합니다. 종이 사다리 위에 이름을 적고 그 아래에는 금액을 적은 후에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서 부서원들이 각자 내야 할 금액을 결정하게 됩니다. 대부분 부서에서 가장 젊은 직원이 빨강펜으로 사다리를 타고내려가서 도착한 금액을 발표하면서 즐거워하고 돈을 다 거출한 후 즉시 구내매점으로 달려갑니다. 부서장이 이 같은 사다리 간식을 즐기고 동참하는 부서는 웃음이 끊이지 않고 아마도 업무능률이 오르고 소통도 원활할 것으로 기대합니다. 반면 오로지 일하는데만 집중하라는 부서장은 사다리를 타서 돈을 모으고 간식을 사 먹는 시간에 일을 더하라면서 다그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어느 부서가 더 효율적인 곳일까요. 그런데 사다리는 저녁 회식장에서는 더 요긴한 소통의 도구가 됩니다. 정말로 높은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차를 좋아해서 호를 다산(茶山)이라 하였고 한강을 의미하는 열수(洌水)라고도 했다. 혁신군주 정조(1752~1800)는 10살 후배 정약용을 중용했다. 다산은 정조를 보좌하면서 한강에 배 다리를 건설하고 1793년 31세 나이에 화성을 설계했다. 현재의 경기도청이 자리한 팔달산에 화성을 축성하는 공사를 총괄했다. 거중기라는 과학적 장비를 활용했다는 역사적 사실은 모두가 잘 아는 이야기다. 다산은 평생동안 저술에도 힘을 기울여 492권을 집필했다. 이중 ‘일표이서’라 불리는 경세유표, 흠흠신서, 목민심서를 통해 군주권의 절대성과 우월성을 내용으로 하는 왕권강화론을 제시했다고 한다. 경세유표(1817년)는 행정기구의 개편을 비롯한 관제, 토지제도 등 모든 제도의 개혁원리를 제시한 정책서이다. 흠흠신서(1819년)는 저술한 형법서다. 죄수에 대해 신중히 심의하는 欽恤(흠휼) 사상에 입각해 재판하라는 뜻으로 관리들이 참고 할 수 있도록 지은 책이다. 목민심서는 강진에서 귀양살이를 하다가 해배(解配)되던 해인 1818년에 완성했다. 우리나라와 중국의 역사서를 비롯해 치민(治民)과 관련된 자료를 뽑아 수록함으로써 지방관리들의 폐해를 제
등산로에서 700m 남았다는 안내판을 분명히 확인했는데 평지보다 산에서는 더 멀게 느껴진다. 그래서 등산객들은 등산로 거리안내가 정확한가에 대한 의구심을 갖는다. 전문가 말씀이 산에서의 거리는 지상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거리란다. 그러니 가파른 산등성이를 오르고 내려가는 것은 온전히 등산객이 감당할 몫인 것이다. 흔히 말하는 ‘걸어서 5분’은 지나친 주관적 표현이다. 남녀노소에게 차이가 있을 것인데 우리는 통상 자신의 기준으로 설명하게 된다. 등산길도 마찬가지로 본인에게는 멀고 남들에게는 가깝다. 정상이 얼마나 남았나 물으면 다녀온 등산객들은 ‘거의 다 왔다’고 답한다. 하지만 올라가는 등산객에게 정상은 쉽게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우리나라 등산로 거리표기 방식은 다양하다. 시군청에 따라 목표지점까지 남은 거리100m, 2㎞, 0.7㎞, 0.1㎞, 800m, 0.01㎞ 등 각양각색이다. 10㎞를 10,000m라고 쓰면 가늠이 어렵다. 초등학생 시절100m 달리기를 했다. 0.1㎞ 달리기가 아니었다. 우리는 통상적으로 짧은 거리는 m표기에 익숙하다. 그래서 거리표기 방식은 자동차 길을 안내하는 네비게이션의 법칙에 따랐으면 한다. 자동차가 출발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