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9 대선에서 여야 후보들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가장 큰 고통을 받고 있는 소상공인·자영업자들의 눈물을 닦아주겠다며 손실보상 추경을 철석같이 약속했다. 그러나 대선이 끝난 지금 정치권은 속 시원한 답을 찾아내지 못하고 지지부진한 채 ‘핑퐁게임’하듯 ‘공(功) 다툼’ 정쟁에 골몰하고 있다. 이렇게 가서는 안 된다. 선거가 끝나자마자 으뜸 민생공약을 이런 식으로 허술히 다루는 것은 유권자들을 모독하는 행위다. 여야가 협치해야 할 1순위가 바로 이 공약이다. 하루빨리 합심하여 해법을 내놓는 게 옳다. 문재인 대통령과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지난 28일 만찬 회동에서 코로나19 피해 소상공인·자영업자 손실보상을 위한 ‘50조 원 규모 추가경정예산(추경)안 편성’ 필요성에 공감했다. 그러나 추경 규모, 편성 시기 등 구체적인 부분에 관해서는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고 한다. ‘할 수 있는 한 서로 실무적인 협의를 계속해 나가자’는 원론적 대화만 나눈 것으로 전해졌다. 신임 박홍근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민생 입법부터 신속하게 추진하겠다는 방침을 밝히면서 국민의힘에 추경 재원 마련을 위한 정부 설득에 함께 나설 것을 촉구한 부분이 눈에 띈다. 정권 이양 이전까지는 정부를 설득할 책임이 국회 다수의석인 민주당에 있음을 상기하면 적극성을 의심할만한 발언이기 때문이다. 윤석열 당선인과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의 대응은 더 한심하다. 인수위 출범 직후부터 터진 ‘대통령집무실 이전’ 논란의 와류에 휩쓸려 이 과제를 효과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인상을 주지 못하고 있다. 윤 당선인은 후보 시절 ‘자영업자·소상공인 50조 원 지원’을 대표 공약으로 내세웠다. 가뜩이나 풀어내기 어려운 여소야대 정국 속에서 새 정권이 이런 뜨뜻미지근한 자세로 첩첩 난제들을 과연 풀어낼 수 있을 것인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문제의 핵심은 재원이다. 인수위는 국채 발행은 원칙적으로 배제하면서 기존 예산을 구조 조정하여 재원을 마련하겠다는 방향이다. 반면 박홍근 민주당 원내대표는 “국채 발행과 지출 구조조정을 같이 해서 재원을 확대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이 대선 과정에서 내놓은 국채발행론 취지에 맞닿아있다. 우려스러운 대목은 추경안 통과 시기를 놓고 양측이 신경전을 벌이는 듯한 인상을 풍기는 부분이다. 민주당은 현 정부 임기 내 추경안을 통과시키겠다는 방침이다. 반면 인수위 측은 윤석열 정부 출범 직후 추경안을 통과시키면 새 정부의 공이 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하는 듯하다. 6월 지방선거를 노린 속 보이는 정략적 셈법이 눈치작전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코로나19 방역 지침을 지키느라 지난 2년 동안 변변한 영업활동이 막힌 채 막다른 골목에 몰려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소상공인·자영업자의 경제 상황을 도외시한 무책임한 행태다. 여야 정치권과 정부는 단 하루라도 일찍 충분히 보상하는 방안을 목표로 놓고 추경 논의를 진척시키는 게 맞다. 이미 활활 타고 있는 초가삼간 앞에서 머뭇대며 양동이를 쓸 거냐, 함지박을 쓸 거냐 부질없는 논쟁만 벌이는 한심한 꼴과 뭐가 다른가. 절박한 민생을 더는 우롱하지 말길 바란다.
제20대 대선 후 일각에서 ‘진보종편’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지난 2012년 19대 대선이 끝났을 때도 MB정권에 장악되었던 공영방송과 종편의 공정성 문제가 제기되었고, 그 결과 2013년 3월 미디어협동조합 국민TV가 출범하기도 했다. 볼일이 있어 동네를 돌아다니다 보면 낮이나 밤이나 채널A, TV조선과 같은 종합편성채널을 틀어놓은 가게들을 흔히 불 수 있다. 조중동의 수구적 논조와 정파상업주의를 그대로 방송에 옮겨놓은 것이 종합편성채널(종편)이다. 종편은 지난 2010년 MB정권이 당시 발행부수 1~4위를 차지하고 있는 기득권 신문사에게 ‘선물’로 준 방송국이다. 국회 본회의장 폐쇄라는 초강수를 두면서, 헌재의 결정을 무력화하면서까지 신문방송 겸영을 밀어붙였다. 미디어산업 경쟁력 강화, 일자리 창출, 여론다양성 확대를 이유로..
어리고 예쁘고 춤 잘 추는 걸그룹에 점령된 지 오래인 방송에 노인의 노래가 장안의 화제다. 시니어들이 노래로 인생을 들려준다는 취지의 방송인데 (JTBC ’뜨거운 싱어즈’) 유독 85세 배우 김영옥 씨의 ‘천 개의 바람이 되어’와 82세 배우 나문희 씨의 ‘나의 옛날이야기’가 심장을 두드린다. 나이 든 목소리는 불안했고 발음, 음정이 엇나가기도 했다. 그런데도 집중하게 하고 콧날을 건드리더니 종내 눈물을 떨구게 한다. 라디오 프로그램이라도 그랬을까. 노년의 배우는 마이크 쥔 주름진 손으로, 뜨거운 것이 빠져나간 눈빛으로, 굽은 등으로...... 노래가 아닌, 80년 인생을 전했다. 그게 심금을 울렸다. 월드뮤직 가운데 가수의 삶을 알고 나서 좋아지는 노래들이 있다. 에디트 피아프(1915-1963)의 라비앙 로즈(La Vie en Rose)는 대단한 월드뮤직 명곡이지만 목소리가 내 취향이 아니고 노래, 음률, 가사도 마음에 와닿지 않아 즐겨 듣지 않았다. 에디트 피아프의 실제 삶을 담은 2008년 개봉영화(올리비에 다한 감독) ‘라비앙 로즈(장밋빛 인생)’를 보기 전까지는. 에디트 피아프의 삶은 장밋빛이 아니었다. 1차 대전 중, 프랑스 변두리 지역 베르빌에서, 서커스단 곡예사와 장터 가수의 하룻밤 사랑으로 태어난 피아프는 외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분유조차 제대로 먹을 수 없었던 가난은 열 살 키에서 성장을 멈추게 했고 엄마처럼 어린 나이에 장터 가수로 살게 만들었고 열다섯 나이의 미혼모가 되게 했다. 그렇게 태어난 피아프 인생 유일한 자식은 뇌수막염으로 두 해를 못 넘기고 죽고 만다. 그 삶에서 만들어진 목소리가, 노래가 어떠했겠는가. ‘한 세상 다 돌고 온 듯한’ 장터 소녀의 목소리를 우연히 듣게 된 여행자 루이 레플리는 파리 레스토랑 무대가수로 데뷔시킨다. 거짓말 같은 행운은 계속 이어져 그녀의 목소리에 반한 음악가 레몽 아소, 시인이며 극작가인 장 콕토 등의 도움으로 피아프는 물랭루즈 무대의 스타가 된다. 사랑도 얻는다. 노래를 가르쳐달라고 찾아온 수려한 이탈리아 청년이었다. 피아프는 애인을 영화계에 데뷔시켜주었고 무명의 청년은 인기를 얻는다. 그가 바로 샹송 ‘고엽(Les Feuilles Mortes)’을 부른 배우이자 가수 이브 몽탕. 그러나 대스타가 된 이브 몽탕은 변심한다. ‘라비앙 로즈’는 이브 몽탕에게 버려진 피아프가 실연의 고통 속에서 직접 노랫말을 지어 나온 노래다. ‘내 시선을 내려놓는 눈동자/ 입술에 머물다 사라지는 미소/이게 바로 내 사랑의 초상화/ 그가 나를 품에 안고 속삭일 때면/인생은 온통 장밋빛/그가 내게 사랑의 말을 할 때/ 늘 하는 가벼운 말이라도 나를 행복하게 하네......’ 실연의 치유책은 새로운 사랑이었다. 미국 카네기홀 공연 시기 만난 복싱 챔피언 마르셀 세르당과 또 불같은 사랑에 빠졌으나 이번엔 비행기 사고가 사랑을 추락시킨다. 그 충격으로 실어증까지 걸린 피아프, 그 고통은 또 새로운 노래를 만들어낸다. ‘사랑의 찬가’ 사랑의 찬가의 노랫말도 장밋빛 눈부시고 장미향 가득하다. 마르셀 세르당 이후 찾아온 사랑, 두 차례의 결혼 모두 비극으로 막 내리는데 이후 술과 담배에 절어 살던 피아프는 48세 이른 나이에 암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부모도 첫사랑도 첫아이도..... 생애 모든 사랑이 그녀를 버렸으나 죽는 날까지 장밋빛 사랑을 꿈꾸었던 피아프의 노래는 참으로 애달픈 인생 찬가다. 삶과 사랑의 벼랑 끝에 서본 적 있는 자, 어찌 그녀의 노래를 외면할 수 있으리. (인터넷 창에서 www.월드뮤직. com을 치면 기사 속 음악을 유튜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한반도가 신냉전의 구도속에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가 장기화되고 있는 사이 올해 무력도발을 지속해온 북한이 지난 24일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을 발사했다. 하지만 추가 제재를 논의하기 위해 26일 열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규탄 성명조차 내지 못한 채 끝났다.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중국과 러시아의 장벽에 부딪혔다. 이런가운데 북한의 ICBM 발사에 대응하는 차원에서 한국군이 미군에 연합훈련을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는 언론보도까지 나왔다. 지금의 국제정세는 2차 세계대전이후 냉전구도를 재연하고 있는 모습이다. 북한이 최근에 쏘아올린 미사일이 기존 화성-15형이든 그들의 주장대로 신형이든 미국 본토가 사정권에 들어간다. 고도 6,200㎞ 이상에 사거리 약 1080㎞로 미국이 정한 금지선(1000㎞)을 넘어섰다..
나는 1980년생, 밀레니엄 세대다. 라떼는 말이다. 엄마는 주부였다. 우리 엄마도, 친구 엄마도, 동네 형 엄마도 가정주부였다. 여자는 중·고등학교 졸업하고 공장에 들어가 일하다 결혼하면 가정주부가 되는 것이 국룰이었다. 간혹 대학을 나와도 결혼하면 얼마 버티지 못하고 가정주부가 되어야 했다. 여자가 한 가정을 먹여 살려야 하는 남자와 경쟁하는 것 자체가 불경스러운 일이었다. 힘도 못 쓰는 여자의 월급이 남자보다 적은 것이 불만인 사람은 없었다. 사무직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여자는 누구보다 일찍 출근해 손에 걸레를 들고 남자 부장님, 남자 과장님, 남자 대리님, 남자 선배님 책상을 닦아야 했다. 남자들 책상까지 닦아가며 일해도 월급은 더 적었다. 회사는 성별 분리호봉제를 대놓고 적용했다. 어느 대졸 여성 직원이 부장님 앞에서 “대학까지 나와서 책..
경기도 인권모니터단이 대폭 확대됐다. 지금까지는 29명이었는데 올해부터 478명으로 늘어난 것이다. 단원들은 도민 대상 공개모집과 도와 시․군, 공공기관 추천을 통해 위촉됐다. 도민 321명과 도·시․군 인권업무 담당 공무원 88명, 도 시․군 산하 공공기관 직원 69명으로 구성됐다. 경기도 인권지킴이인 도 인권모니터단은 2020년 11월 출범했다. 단원들은 인권침해나 차별행위에 대한 제보를 하거나 인권정책·제도 등에 관한 개선사항을 주도적으로 제안한다. 뿐만 아니라 경기도의 인권정책에 참여하고 홍보 활동도 펼친다. 도는 원활하고 효과적인 활동을 위해 오리엔테이션과 활동 역량 강화교육도 실시하고 있다. 도 인권정책에 활발히 참여한 단원에게는 소정의 활동비도 지급하고 있다. 우수 단원에게는 도민 인권배심회의, 인권영향평가, 경기도인권..
매년 3월과 9월에는 학부모와 담임교사가 만나는 상담 주간이 있다. 보통은 담임교사와 소통할 수 있는 채널이 열려있어서 원하면 언제든지 교사와 이야기 나눌 수 있다. 대화 창구가 열려있지만 특별한 용건 없이 아이가 평소에 어떻게 지내는지를 교사에게 묻는 일은 학부모 입장에서는 부담스럽다. 상담 주간이 아니면 아이의 생활을 자세하게 확인할 기회가 드물기에 질문을 미리 준비해 가는 것이 좋다. 교사에게 어떤 내용을 질문해야 내 자녀의 학교 모습을 파악할 수 있을까. 일단은 제일 궁금한 걸 먼저 물어보는 게 맞다. 학부모님들은 보통 아이가 친구들과 잘 어울리고 소외되지는 않는지, 수업은 잘 따라가고 발표는 잘하는지, 학습 수준은 어느 정도인지를 많이 궁금해한다. 이런 질문만으로도 충분히 아이의 생활을 파악할 수 있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모습..
이 모든 것이 ‘그 놈의’ 스탈린이 트로츠키를 도끼로 암살한 것 때문이다. 원래대로라면 트로츠키의 주장처럼 사회주의는 영구 혁명의 기치를 내걸고 끊임없이 민주적 과정을 거쳐 일신하고 또 일신해야 했다. 그런데 스탈린이 트로츠키를 추방하고 죽이면서까지 일국 사회주의 노선을 굳혔다. 일국 사회주의 노선은 사회주의의 이상 자체를 말살시키는 것이었다. 모든 해방운동이 이것 때문에 변질됐다. 인간의 얼굴을 해야 할 사회주의가 늑대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가 됐다. 스탈린은 일국 사회주의의 성과를 내기 위해 급격한 공업화 우선 정책을 폈고 그것을 위해서는 농산품 수출이 필요했는데 당시 소련으로서는 자본의 원시적 축적을 그 방법으로 밖에는 이룰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농산품 수출을 위한 식량 조달은 곡창 지대인 우크라이나를 갈취하는..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집무실의 국방부 청사 이전을 밀어붙이는 자세를 둘러싸고 비판이 거세다. 대통령의 광화문 시대를 열겠다는 공약을 내세우고 당선 직후 느닷없이 용산으로의 이전을 밀어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후보 시절 이전부터 일방적으로 그를 띄웠던 극우언론마저 ‘소통을 위한 이전’이 아니라 ‘이전을 위한 소통’부터 하라며 싫은 소리를 쏟아 붓는다. 집무실 이전에 대한 반대 여론이 58% 이상 나온다니 앞으로 그가 펼칠 국정운영이 더 걱정이다. 도대체 누구 말을 듣고 이처럼 서두르는가? 울진 삼척 일대 큰 불로 삶의 터전이 잿더미로 변해버린 이재민들, 코로나 환국으로 장사가 안되어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 소상공인들에게는 이런 그의 모습이 과연 어떻게 비춰질까? 사마천이 쓴 사기(史記)는 중국 역사에서 춘추시대(기원전 770년)의 개막..
1. 달콤하고 상쾌한 맛. 목을 타고 넘어가는 순간 톡 터지는 느낌. 이렇게 말하면 뭐가 떠오르시나요? 맞습니다. 콜라입니다. 갈증이 날 때나 기분전환용으로, 특히 햄버거 같은 패스트푸드와 함께 하면 금상첨화지요. 전 세계 콜라 브랜드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역시 코카콜라입니다. 코크(Coke)로 약칭되는 이 음료가 처음에 두통약으로 개발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1886년 미국 조지아 주 애틀랜타의 약사 존 팸버튼(John Pemberton)이 코카(coca)잎과 콜라(kola) 열매를 주재료로 만들었지요. 그리고 두통을 없애주는 특효약으로 판매를 합니다. 상표 명을 뭘로 지을까 고민하다가 동업자이자 경리책임자였던 프랭크 로빈슨(Frank M. Robinson)이 심플한 아이디어를 냅니다. 두 가지 주재료의 이름을 묶은 다음, 콜라의 K를 C로만 바꿔서 작명을 한 거지요. 문제는 이 음료가 매우 맛이 없었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외면을 한 건 당연한 일. 어떻게 하면 판매를 늘릴 수 있을까 고민을 거듭하던 팸버튼은 자신이 개발한 원액에 탄산수를 섞어봅니다. 그랬더니 달콤 시원한 맛에 톡 쏘는 느낌이 가미된 전혀 새로운 무엇이 태어납니다. 청량음료의 제왕이라 불리는 현재의 코카콜라가 탄생한 겁니다. 1887년이 되면 역시 약제사이자 명민한 사업가였던 아사 캔들러(Asa Candler)가 2,300달러에 코카콜라의 제조법과 판매권을 사들입니다. 이때부터 판매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림 1>에 당시의 코카콜라 광고가 나와 있습니다. 카피를 읽어보면 두통을 치료하고 정신적, 육체적 피로를 회복시켜주는 “이상적인 두뇌강장제(ideal brain tonic)”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코크의 성분은 거의 비슷하니 명백한 과장광고임을 알 수 있겠지요? 탄생한지 백 수십 년이 지났지만 코카콜라의 제조법(recipie)은 비밀에 싸여 있습니다. 애틀랜타의 코카콜라 박물관 ‘월드 오브 코카콜라’ 금고에 꽁꽁 숨겨져있다고 합니다. 이런 비밀주의 때문에 코카콜라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루머가 떠돌아 다닙니다. 코카나무 잎에서 추출한, 마약 성분인 코카인(cocaine)이 미량 함유되어 있다는 황당한 헛소문이 대표적이지요. 또 하나 그럴싸하게 퍼진 것은 콜라 원액은 오직 미국 본사에서만 만든다는 가짜뉴스입니다. 그 원액을 각국의 병입공장(甁入工場 : bottling plant)에 독점적으로 제공하는데, 이들 공장에서 하는 일이라곤 거기에 물과 액상과당, 카라멜 색소, 탄산가스 등의 성분을 추가, 희석한 후 병에 담는 작업 뿐이라는 거지요. 모두가 루머입니다. 각국의 지사에서 콜라원액을 만들뿐 아니라 그걸 완제품으로 출고하는 공정까지 전담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콜라 원액의 재료 배합비율과 조리방법에 관한 정보만이 지식재산으로 분류되어 엄격한 보안을 유지하고 있는 정도입니다. 세계적 컨설팅그룹 ‘인터브랜드(Interbrand)는 해마다 세계 100대 브랜드(Global Brand)를 발표합니다. 브랜드 자산(Brand Equity), 즉 특정 브랜드가 얼마나 인기가 높고 마케팅 파워가 강한가 하는 순위를 정하는 겁니다. 코카콜라는 2013년 애플(Apple)에 1위 자리를 내주기 전까지 10년 연속 해당 순위에서 최고봉에 올랐습니다.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하고 가장 많이 팔리는 청량음료이기 때문입니다. 한 해에 무려 470억병이 팔립니다. 세계 인구가 79억 정도 되니까, 한 사람 당 1년에 여섯 병 가까이 마시는 셈입니다. 이 브랜드가 단순한 청량음료를 넘어 미국식 자본주의와 문화의 강력한 상징으로 명성을 떨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2. 코카콜라가 지금의 위치에 오른 것은 경제대공황이 본격화된 1930년대 초였습니다. 이 시기에 이 브랜드가 결정적 도약을 한 것은 역설적으로 가혹한 불황 때문이었습니다. 쓰리고 고통스런 하루하루를 달래주는 존재가 대중들에게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5센트만 주면 살 수 있는 짜릿한 청량음료 한 잔을 통해 잠시라도 현실을 잊고 싶었던 거지요. 특히 1931년부터 광고대행사 다시(D'Arcy)가 산타클로스(Santa Claus)를 모델로 하는 대대적 광고캠페인을 펼치는데, 이것이 오늘날 코카콜라 전설의 출발점이 됩니다. 크리스마스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존재는 아마도 산타클로스일 겁니다. 산타클로스의 기원은 기원 후 3세기 경 소아시아 파타라(Patara)에서 출생한 성 니콜라스에서 비롯됩니다. 터키의 성직자였던 이 사람은 평생 아이를 사랑했고, 아이들 모르게 창문으로 선물을 넣어주기를 좋아 했다고 합니다. 이 전설이 북유럽에 전해졌다가 네덜란드 이민자들이 미국에 들어오면서 미국에도 퍼져나간 거지요. 산타클로스(Santa Claus)라는 이름은 네덜란드 사람들이 성 니콜라스 (St. Nicholas)라는 이름을 네덜란드어로 잘못 표기하면서 생겨났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산타클로스 하면 어떤 모습이 떠오르시나요. 하얀 수염을 기르고 언제나 웃는 표정의 뚱뚱한 할아버지일 겁니다. 오늘날 세계 공통의 이미지로 굳어진 이 독특한 캐릭터를 창조한 것이 다름 아닌 코카콜라 광고였습니다. 1931년, 당대의 천재 일러스트레이터 헤이든 선드블롬(Haddon Sundblom)의 손에서 오늘날 우리가 아는 모습의 산타클로스가 처음으로 탄생한 거지요. <그림 2>를 한번 보시지요. 당시 미시시피 주 멤피스에 있던 코카콜라 공장의 사진입니다. 가두광고용 자동차 위에 “모두에게 메리 크리스마스를(A Merry Christmas to All)”이란 캐치프레이즈를 적어놓았습니다. 전면에 코카콜라 직원과 경찰관들이 서있습니다. 그리고 뒤편 입간판에 커다란 흰 수염 할아버지 모습이 보일 겁니다. 털 달린 모자와 외투, 널찍한 가죽벨트를 맨 산타클로스입니다. 코카콜라는 이 캐릭터를 내세워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The Saturday Evening Post)>, <레이디스 홈저널(Ladies Home Journal)>, <내셔널 지오그래픽(National Geographic)> 등 당대의 유명 잡지에 대대적 광고캠페인을 펼칩니다. <그림 3>이 1931년 크리스마스 시즌을 앞두고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에 실린 첫 번째 코카콜라 산타클로스 인쇄 광고입니다. 헤이든이 멤피스에서 그린 간판 그림을 레이아웃만 살짝 바꿔 광고화시킨 걸 금방 알 수 있습니다. “My Hat's off to the pause that refreshes”란 헤드라인은 세련된 중의법(重義法) 문채를 채용했습니다. 여기서 'My hat's off'는 (왼손으로 허리춤의 모자를 누르고 있는) 비주얼에서 보듯이 아이들에게 열심히 선물을 전해주던 산타클로스가 모자를 벗고 잠시 쉰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이 관용구는 ‘존경을 표하기 위해 모자를 벗다’는 뜻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를 의역해보면 ① “상쾌한 휴식에 경의를!” 혹은 ② ”이 상쾌함을 즐기기 위해 잠시 쉬세요“ 정도의 뜻이 되겠군요. 아시다시피 크리스마스는 기독교 문화권 최고의 명절입니다. 가족들이 모여 선물을 주고받으며 마음을 나누는 날이지요. 그런 분위기에 어울리는 따스한 톤 앤 매너(tone & manner)가 작품 전체에 가득합니다. 이 광고가 불경기 속 크리스마스 맞은 대중들의 마음을 얼마나 위로했을지 짐작이 가실 겁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코크는 언제나 산타클로스 광고를 내보냅니다. <그림 4>는 이듬해인 1932년 크리스마스 때 집행된 광고입니다. 아이들이 잠든 밤에 몰래 방문한 산타 할아버지를 위해 ‘지미(Jimmy)'란 꼬마가 쪽지를 남겨놓았습니다. 코카콜라 병으로 눌러놓은 종이 위에 비뚤비뚤한 글씨로 이렇게 적어놓았네요. “산타 할아버지, 여기서 (코카콜라 마시고) 잠시 쉬다 가세요(Dear Santa. Plesae Pause Here)"”. 선물을 기다리는 아이의 두근거림과 크리스마스 이브의 따스한 정경을 이보다 생생하게 표현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일러스트레이션도 멋지고 카피도 좋습니다. 3. 이후 다시(D'Arcy)는 정교한 전략 아래 수십 년에 걸친 산타클로스 캠페인을 전개합니다. 역시 헤이든 선드블롬(그림 5)이 주역이었습니다. 그는 1964년까지 무려 33년간 해마다 다른 스토리를 설정하여 78 종류의 산타클로스 일러스트를 그렸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스토리가 달라도 레드(red)와 화이트(white)의 주색조(主色調), 활자체, 콜라병의 위치 등 통일적 레이아웃 정책(layout policy)을 유지시킵니다. 이를 통해 코크만의 이미지빌딩(image building)이 확고하게 자리를 잡게 되는 거지요. 코카콜라가 창조한 산타클로스 이미지는 빠르게 주위로 퍼져나갑니다. 영화, 크리스마스카드, 심지어 구세군 냄비를 위한 이벤트에 이르기까지 ‘코카콜라 산타’를 적극적으로 활용합니다. 예를 들어 1947년에 상영된 <34번가의 기적(Miracle On 34th Street)>이란 영화가 있습니다. 어린 시절의 나탈리 우드가 주연으로 나와서 대 히트를 친 영화지요. 여기에 등장하는 산타클로스 이미지를 보십시오. 코카콜라 광고에 나온 산타를 그대로 옮겨왔음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그림 6). 산타클로스 캠페인은 막대한 규모의 광고비로 계속 집행됩니다. 그만큼 효과를 발휘했기 때문이지요. 모자를 쓰고 빨간 색 외투를 입은 인자한 할아버지가 코카콜라를 세계 최고 브랜드로 키운 일등공신이 된 겁니다. 동시에 이 캠페인 덕분에 코카콜라 산타는 온 세상 산타할아버지의 표준이 되어버렸습니다. 21세기를 맞아 광고미디어 생태계가 디지털 중심으로 급속히 재편되고 있습니다. 코카콜라 크리스마스 캠페인의 주인공도 오래 전에 북극곰으로 바뀌었지요. 하지만 코카콜라 산타는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아래는 2010년에 집행된 코카콜라 모바일 광고의 첫 화면입니다(그림 7). 세상에 나타난 지 80년이 지났지만 할아버지는 여전히 옛 모습 그대로 정정하십니다. 광고는 문화를 바꾸고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는 강력한 커뮤니케이션 도구입니다. 그 같은 광고의 위력을 학생들에게 설명할 때, 제가 늘 코카콜라 산타클로스 캠페인을 사례로 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