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레길을 걸을 땐 스마트폰을 내려놓는다. 길에서는 조랑말 모양 표지인 간세가, 나뭇가지에 묶인 파란색과 빨간색 리본이, 전봇대와 돌담에 붙은 화살표가 방향을 알려준다. 때때로 부슬비가 내리거나 자욱한 안개가 시야를 흐리지만 한적한 숲길이나 바다 옆길을 걸을 때면 절로 콧노래가 나온다. 어느 골목 어귀에선 집 앞에 앉아 지나다니는 이들을 무심히 바라보는 어르신에게 조심스레 인사를 건네고, 한가롭게 풀을 뜯는 소와 말을 지날 땐 반가움에 살짝 손을 든다. 잠시 생각에 잠기거나 으레 가던 방향으로 가다 보면 표지를 놓칠 때도 있다. 그럴 때면 당황하지 말고 마지막으로 표지를 봤던 곳까지 되돌아가 다시 길에 오른다. 자동차를 타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사람들은 가장 빠른 길과 시간을 검색한다. 걸을 때도 마찬가지다. 특히 초행길을 걸을 때면 모르는..
싸움과 말다툼은 쉽지만, 끝내는 것은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끄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다. 논쟁을 할 때 노여움을 느끼기 시작하면 우리는 이미 진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논쟁하게 된다. (칼라일) 어떤 사람을 설득할 때는, 그 사람이 지닌 사상에 의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불가능하다. 즉 그 사람 안에 건전한 사려와 분별심이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꿈도 꾸지 말라. 이와 마찬가지로 그 사람의 마음은 그 자신의 감정에 의해서만 움직일 수 있다. 그 사람 속에 선량한 마음이 틀림없이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내가 아무리 악의 무서움을 얘기하고 선을 칭찬해도, 악에 대한 혐오를 느끼지 못할 뿐 아니라 선을 추구해야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칸트) 이성의 승리에 가장..
z는 매일 죽고 싶었다. 엄마는 십년 넘게 정신병원에 입원 중이다. 아버지는 몸이 심하게 상하여 일을 못한다. 학교에서는 늘 난폭한 놈들의 학대를 받았다. 교사들은 결코 좋은 사람들이 아니었다. 선생님은 보통의 어른들과 다른 존재 아닌가. z는 그들을 믿지 않았다. 고교를 간신히 졸업한 z는 어두컴컴한 방안에 틀어박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하루 종일 죽음만 생각했다. 조금이라도 나은 미래를 위하여 작은 의지도 힘도 없었다. 죽음이 곧 해방이었다. 그래서 소멸의 날을 기다리며, 최선을 다해 절망적인 인생을 마무리 하려했다. 마침내 D-day가 다가왔다. 지옥에서 마지막으로 어떤 어른들을 만났다. 나이 스물 넘도록 단 한번도 만난 적 없는 '외계인' 커플이었다. 부모나 친척, 교사나 또래들이 일상적으로 쓰는 말과 표정, 눈빛이 달랐다. 충격이었다. 따뜻했다. 다정했다. 희망적이었다. 부드러웠다. 도움을 기대해도 될 것 같았다. 긴 시간 대화를 나누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또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z는 이제 스물 여섯살이다. 마주 앉은 이가 그 누구든, 제대로 눈을 마주치지 못하던, 필요를 위한 최소한의 의사표시조차 못하던, 그래서 잠자는 시간 말고는 온통 죽음만 생각하던 위태로운 젊은이가 그 어른들과 만나서 죽음을 버리고 삶을 얻었다. z는 이 부부가 운영하는 소년희망공장의 매니저로 일하며 사이버대학의 심리학과에 들어가 공부를 병행하고 있다. 이 부부는 z와 비슷한 젊은이들ㅡ미혼모, 비행청소년, 가정폭력 피해자, 소년원 퇴소자 등 위기청소년ㅡ을 자식이나 제자, 친구나 동료처럼 관계한다. 그 그늘지고 눅눅한, 춥고 허기진 곳의 빛과 온기 자체다. 함께 일한다. 그들은 생활인으로 변화하고 있다. 2016년부터 지금까지 다 합치면 수백 명의 상처 깊은 청년들이 이 부부와의 인연으로 위기를 면했다. 솔직히 나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나의 역할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런 헌신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타고 나는 것 같다. 예순 훌쩍 넘은 부부는 잠을 줄여서 비용을 줄인다. 놈들의 이상행동으로 그만두고 싶은 좌절감을 수시로 겪는다. 그러면서 새벽명상과 기도로 또 하루를 시작한다. 이런 크리스천도 있다. 내가 이 부부의 친구인 것은 큰 명예다. 조호진 시인과 최승주 선생. 이들은 재혼부부다. 노동해방문학그룹 출신으로 오마이뉴스 기자였던 남편은 그 불멸의 사랑의 징표로 생면부지의 청년에게 신장 한쪽을 떼어줬다. 이렇게 비범한 사랑의 당사자들은 지극히 평범하고 한없이 착하다. 그 거룩함의 1할만이라도 실천하기로 작정했다. 나의 존경심은 높고 고마움은 깊다. '위기청소년들의 친구 어게인'(여가부 등록)의 홈페이지는 어게인 (sagain.org)다. 후원계좌는 KEB하나은행 630ㅡ010122ㅡ427(예금주 어게인)이다.
금발의 어여쁜 두 소녀가 피아노 앞에 있다. 한 소녀는 악보를 응시하고 다른 소녀는 건반을 두드리고 있다. '피아노 치는 소녀들(Jeune filles au piano)'. 화가 오귀스트 르누아르(Auguste Renoir)의 대표작이다. 파리에서 모델 살 돈이 없어 시골로 거처를 옮겨야 했던 르누아르. 마흔아홉에 행운을 잡았다. 프랑스정부가 룩셈부르크 뮤지엄에 전시하기 위해 '피아노 치는 소녀들'을 산 것이다. 큰돈을 번 르누아르. 난생처음 파리에 집을 사고 에소이(Essoyes)에 아틀리에도 열었다. 늦게 인생이 활짝 피었다. 하지만 젊었을 때는 무지하게 고생한 흙수저였다. 재봉사인 아버지와 삯바느질을 하는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난 그. 부모님은 가난을 탈출하고자 세 살배기 르누아르를 업고 파리로 이사했다. 하지만 도회지의 삶은 만만치 않았다. 열세 살의 어린 르누아르는 결국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도자기공장에 취직해 문양을 넣고 부채를 그리고 장롱에 문장을 넣었다. 이때 8년간 야간학교에 다니며 장식예술과 데생을 공부했다. 그 덕일까. 르누아르는 스물한 살 때 프랑스 최고의 미술학교, 파리 에꼴 데 보자르에 합격했다. 여기서 모네를 만나 친구가 됐다. 그러나 모네는 풍경을, 르누아르는 인물을 선택했다. 사실 르누아르는 1877년 그의 나이 서른여섯에 이미 몽마르트르의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Bal du Moulin de la Galette)'라는 걸작을 내 놓았다. 하지만 여전히 생활고에 시달렸고 끝없는 악평에 시달렸다. 출구가 필요했던 르누아르. 연인 알린 샤리고의 설득으로 에소이로 갔다. 샤리고의 고향인 이곳은 남 샹파뉴와 부르고뉴의 경계에 있다. 포도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매혹적이고 숨겨진 보물들이 많다. 그림 같은 정취의 거리들, 그 위를 덮고 있는 아름다운 돌들, 빨래하는 여인들, 우르스 강가의 아름다운 나무집들, 은빛으로 투영된 센 강의 물살과 그 속을 누비는 물고기들. 그림을 그리는 데 필요한 모든 영감을 받을 수 있는 곳이었다. 르누아르는 여기에 둥지를 틀고 한 친구에게 편지를 썼다. “나는 샹파뉴에서 농부처럼 살겠네. 내가 보기에 여기와 같은 곳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네.” 르누아르는 전원생활을 하며 다시 태어났고 그의 그림은 더욱 유연해졌다. '피아노 치는 소녀들'도 여기서 탄생했다. 그림이 팔리고 비평가들의 칭찬이 시작됐다. 프랑스정부는 레지옹도뇌르 기사작위를 환갑인 그에게 수여했다. 에소이는 르누아르와 뗄 수 없는 곳이 됐다. 이 밖에도 에소이에는 191킬로미터의 둘레길이 장관이다. 독특한 풍경들로 둘러싸인 이 길을 거닐다 보면 특유의 건축물들을 만날 수 있다. 거기에 샹파뉴지방의 가스트로노미와 샴페인까지. 어느 것 하나 모자란 게 없다. 에소이로 떠나 자연과 문화와 예술을 즐기며 인생의 제2막을 구상할 수 있다면 이 보다 더 좋은 여행이 그 어디 있겠는가.
‘윤석열 정부’의 국정 청사진을 만들고 있는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대통령 취임 보름을 남겨놓고 새 정부의 국정운영 원칙으로 ‘공정, 상식, 실용’을 잠정 확정했다. 안철수 인수위원장은 다음 달 3일 110개의 국정과제를 공개할 계획이다. 10년 만에 부활한 인수위가 높은 국민의 기대에 제대로 부응했는지에 대한 평가는 일단 그리 후하지 않다. 특히 ‘대통령 관저’를 어디로 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갈팡질팡’ 이미지는 자못 실망스럽다. 신용현 인수위 대변인은 윤석열 정부의 국정과제가 최상위 ‘국가 비전’ 아래 6대 국정 목표, ‘국민께 드리는 약속’ 20개, 이를 구체화한 국정과제 110개의 4단 구조로 구성된다고 밝혔다. 6대 국정 목표는 ‘상식이 회복된 반듯한 나라’, ‘민간이 끌고 정부가 미는 역동적 경제’, ‘따뜻한 동행, 모..
20대 대통령 선거가 민주진영의 패배로 끝났다. 근소한 차이로 졌다고 하지만 그 영향이 너무도 엄청난 것이기에 패배 원인이라도 제대로 살펴봐야 한다. 필자는 그 원인을 민주정부의 치밀하지 못했던 국정 운영과 민생 정책의 총체적 실패에서 찾고자 한다. 우선 국정의 이니시어티브를 잡지 못한 탓이 크다. 해방 후 한반도는 애초 미국의 냉전 전략에 따라 민주주의와 평화를 실현하기 어렵도록 설계돼 있었다. 미국이 주도한 냉전 속에서 일본과 한반도에는 소련의 남진을 막을 전초기지로서의 역할이 주어졌다. 민족의 이익이나 민주주의에 앞선 이 핵심적 국익 때문에 미국은 줄곧 독재세력의 집권을 도와왔다. 친일 부패 엘리트들이 지배 세력으로 재등장하게 된 배경이다. 그러나 승리를 쟁취한 민중을 대신해 집권한 민주 정부들은 하나같이 빈약한 정치적 비전으로 국정 난맥상을 보이다가 자멸하고 말았다. 4월 혁명 이후 민주당 정부의 좌절, 1980년대 서울의 봄과 6월항쟁의 상황에서조차 독재를 끝장내지 못한 것 등은 그 생생한 사례이다. 민주 정당들의 분열과 일부 지도자들의 과욕이 빚은 결과였다.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 역시 거악 세력들의 발목잡기로 휘청거리다가 정권을 내주고 말았다. 단호한 국정 개혁은 촛불혁명의 시대적 요구였으나, 제대로 이행되지 못했다. 권력은 올바르게 행사하도록 위임된 것임에도 그 권한 행사에 주저하고 절차적 민주주의에 매몰되어 ‘실질’을 놓치는 어리석음을 범했던 것이다. 거기에 인사 실패는 치명적이었다. 국무총리와 국회의장, 대법원장 등에 이어 감사원장과 검찰총장 등 권력의 핵심 요직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 구태 인물을 기용하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심각했던 인사 참사는 국정 난맥으로 이어졌고 국민의 신뢰를 잃게 되었다. 아울러 무엇보다 섣부른 조세정책과 민생 외면이 결정적 패인이다. 민주주의는 원래 ‘조세에 대한 감시’에서 출발한 제도이다. 그만큼 시민에게 조세정책은 예민한 문제이다. 재산을 불로소득으로 불린 자도 있지만 대부분의 시민들은 정상적인 과정을 통해 재산을 형성했음에도, 신중하고 세심한 배려 없이 무차별적으로 중과세를 강행한 것은 취지가 아무리 옳다 하더라도 조세 저항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부동산 정책 실패에 설상가상으로 예상을 뛰어넘은 빠른 속도로 종합부동산세를 올리고, 재산세나 양도소득세마저 중과세하는 정당을 지지할 중산층은 없다. 가장 뼈아픈 실패는 팬데믹 상황에서 정부 조처를 묵묵히 따랐던 소상공인들의 처절했던 고통을 외면한 데서 비롯됐다. ‘중산층과 서민들의 정당’이라는 원내 172석의 민주당이 결과적으로 지지층을 스스로 내치는 어처구니없는 짓을 한 것은 이해불가이다. 재정 건전성이 OECD 국가 중 최고 수준이라는 정부로부터 쥐꼬리 만한 지원을 받고 이에 만족할 소상공인이 과연 몇이나 될까? 이 땅의 민주주의는 의식 있는 시민들의 강렬한 민주 열망과, 중산층-서민들의 피땀어린 지지로 일궈온 것이다. 민주진영은 패배 원인을 깊이 새기고 각오를 새로이 해야 한다.
알 길이 없다. 거기가 흡연이 가능한 곳인지 아닌지. 소사역 1번 출구를 나와 왼쪽으로 틀면 곧장 파출소다. 파출소 앞에는 6차선 도로를 가로지르는 횡단보도가 있다. 그녀의 위치는 횡단보도와 파출소를 y축 밑변으로 하는 직삼각형의 x축 높이에 해당하는 지점이다. 그리도 오묘한 꼭짓점 좌표에서 담배를 물어서일까. 야트막한 화단 담벼락에 엉덩이를 붙이고 이등변삼각형처럼 한쪽 다리를 꼰 체 담배를 피우는 그녀가 문득 궁금하다. 화단은 구청 직원들이 심어놓은 봄꽃으로 요란하지만, 내 눈에 클로즈업 되는 건 그녀 하나뿐이다. - 아시죠. 술 보다 담배가 더 해로운 거. 임플란트 시술을 마친 의사는 금연을 요구했다. 치과 의사의 명령이 없었다면 나 또한 그녀와 한편이 되어서 담배를 태워 물었을까. 저기, 죄송한데요. 뒤통수 긁적이며 다가가 그녀에게 담배 한..
평소 영화를 잘 안 보는 사람들이라도 한 번은 들어 봤고 또 한 번 정도는 봤었을법한 영화가 홍콩 왕가위의 작품들이다. 그의 초기작 ‘열혈남아’와 ‘아비정전’, ‘중경삼림’과 ‘동사서독’ ‘타락천사, 또 ‘화양연화’와 ‘해피투게더’, ‘2046’을 거쳐 비교적 최근에 속하는 2013년작 ‘일대종사’ 까지, 왕가위의 영화들은 희대의 걸작들이다. ‘일대종사’ 이후 그는 연출을 하지 않고 있는데 풍문에 따르면 그 역시 TV 드라마를 시작하려 한다고 한다. 뭐라? 왕가위가? 사람들이 그의 영화를 좋아하는 것은 상실과 공허의 정서 때문이다. 왕가위의 영화들에는 늘 이별이 있고 사람들의 관계는 항상 이어지지 못한다. 사람들의 일상은 파편적이며 목적을 찾기가 힘든 모습들이다. 그저 실존의 아픔을 견디며 고독하게 살아가는 일상을 반복해 간다. 그런 왕가위의 작품들을 보는 사람들은 영화가 주는 ‘작위적인 행복’ 보다 ‘리얼한 불행’이 더 맞다고 생각한다. 왕가위의 영화는 머리는 어둡되 가슴은 촉촉한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왕가위의 지성은 늘 비관적이지만 의지는 그래도 약간이나마 낙관적이고 희망적이다. 왕가위가 그렇게 된 데에는 홍콩의 역사와 정치가 깊이 연관돼 있다. 왕가위 영화 연출 인생의 매우 중요한 이정표가 된 작품은 ‘중경삼림’과 화양연화’ 그리고 ‘2046’이다. ‘중경삼림’은 1994년에 찍었는데 1997년에 홍콩이 영국에 반환되기 3년 전이다. 그래서인지 영화에 나오는 모든 남녀는 늘 헤어진다. 그리고 모두들 어디론가 떠날 것을 늘 준비하며 살아간다. 심지어 이직(移職)도 쉽다. 주인공인 경찰 663(양조위)은 나중에 매점 주인이 된다. 원래 매점에서 일하던 페이(왕페이)는 스튜어디스가 돼 미국을 오가며 살아가게 된다. 매점에서는 끊임없이 마마스 앤 파파스의 1965년 노래 ‘캘리포니아 드리밍’이 큰 소리로 빵빵 터져 나온다. 영화 중간중간에는 아일랜드 록그룹 크랜베리스의 1992년 노래 ‘드림스의 왕페이 버전', 곧 광동어 버전이 흐른다. 영화는 의도적으로 1960년대와 1990년대를 오가며 그 시대적 흐름을 이어가려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1958년생으로 왕가위는 유년시절에 1967년의 홍콩 봉기 사태(홍콩 노동자들의 전국 쟁의로 영국에 의해 철저하게 탄압된다. 이때 노동자들을 도왔던 것은 중국 공산당이었지만 이후 2019년 홍콩 시위사태 때는 중국 공산당이 홍콩 시민과 대학생들을 탄압하고 영국과 서방이 이들을 돕는다.)를, 그 불안한 시대의 아우라를 직접 겪었다. 홍콩은 영국도 아니고 중국 대륙도 아니며, 홍콩 자신도 아니고 자신이 아닌 것도 아닌, 늘 경계의 존재임을 ‘생래(生來)적으로’ 알게 된 왕가위는 그 실존의 불안을 자신의 작품 속에 투영시킨다. 영화 ‘화양연화’에서 불륜의 두 남녀(그런데 이 불륜에는 기이한 정당성이 있다.)가 만나는 것은 1966년이다. 홍콩봉기 전야의 극도로 불안한 정정(政情)이 영화 전편에 흐른다. 영화 속 남자 주인공 차우(양조위)는 신문사에서 일하지만 기자인지 아닌지 명확하지가 않다. 그는 늘 (모두들 시위 취재를 나간 듯이 보이는) 텅 빈 편집실에 거의 홀로 앉아 신문 무협 연재소설을 쓴다. 그렇게 해서 번, 약간의 돈을 그는 도박에 쓴다. 차우는 결국 불륜과 소설 쓰기에 매진하는데 여주인공 첸 부인(장만옥)은 그의 글의 감수(監收)를 본다. 그러기 위해서 두 남녀가 이용하는 곳이 바로 한 호텔의 2046호이다. 두 사람은 종종 이별 연습을 한다. 여자의 남편에게 둘 사이가 발각돼서, 혹은 그 반대여서, 그것도 아니면 불륜은 반드시 헤어져야 할 운명임으로, 미리미리 이별 연습을 하자는 식이다. 그런데 어느 날 첸 부인은 그 ‘리허설’에서 실제로 펑펑 운다. 차우는 그런 그녀를 안아 주며 ‘연습인데 왜 그러느냐’고 한다. '화양연화'는 2000년에 만들어졌고 이미 홍콩은 1997년에 반환됐지만 2046년에는 홍콩이 중국으로 완전히 귀속되기로 결정된 상황이었다. 이별 연습은 단순히 연습이 아닌 셈인 것이다. 1968년 캄보디아를 취재하러 갔다가 돌아온(이때는 베트남 전쟁이 이미 캄보디아와 라오스로 확산된 때였다.) 차우는 여전히 소설을 쓰고 그렇게 번 알량한 돈으로 도박을 하고 술을 마신다. 당연히 여자 품을 전전한다. 캄보디아에서도 도박을 했고 그런 그에게 도박 빚을 꿔주며 잠깐 사랑에 빠진 여자가 우연찮게도 과거 홍콩에서 만났던 여자와 성이 같은, 수리 첸(공리)이다. 홍콩으로 돌아와서는 예전에 썼던 2046호에서 잠시 몸을 섞던 여인 미미(유가령)가 누군가에게 살해되는 바람에 치우는 어쩔 수 없이 2047호에 들어오게 된다. 호텔 사장의 딸 왕징웬(왕페이)은 일본 남자 타쿠(기무라 타쿠야)를 사랑하다가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혀 정신병원 신세까지 진다. 남자 차우는 바이 링(장쯔이)을 만나 사랑하고 늘 격렬한 정사를 나누지만 섹스 후에 그는 여자에게 꼭 화대를 준다. 그녀는 그런 그에게 화를 내다가 곁을 떠난다. 목적 없이 흔들리며 살아가는 차우에게 호텔 주인의 딸 왕징웬은, 당신은 그럴 사람이 아니라며 무협물보다는 정식의 소설을 쓰라고 한다. 그래서 그는 2047호에 틀어 박혀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SF 판타지물인데 제목이 『2046』이다. 그 내용의 흐름이 바로 영화 ’2046’인 것이다. 자신의 존재가 비교적 ‘깡그리’ 무시되는 시대를 코앞에 두고 살아가는 심정은 극히 괴롭고 고독할 것이다. 왕가위가‘중경삼림’을 만들고 ‘화양연화’와 ‘2046’을 만들었을 때가 그랬을 것이다. 1997년의 반환과 2046의 귀속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역시도 마찬가지다. 곧 있을 새로운 5년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이 그때의 왕가위와 비슷할 것이다. 존재 증명의 부정되거나 부인되고, 불안한 실존이 늘 흔들리는 일상을 만들어 내게 될 것이다. 예술은 다다이즘에 빠질 것이다. 왕가위의 마지막 연출작‘일대종사’에서 여주인공 궁이(장쯔이)는 엽문(양조위)과 헤어지면서 이런 말을 한다. “인생에서 후회가 없다는 건 다 하는 얘기예요.” 그리고 언젠가 이런 얘기도 했다. “무예인에게는 3단계가 있다고 아버지가 말씀하셨죠. 자신을 보고 세상을 보고 중생을 보라고요. 난 마지막 길을 가지 못하니 나 대신 당신이 가줘요.” 궁이는 지금 죽어 가는 중이다. 맞다. 지금의 우리 상황을 보니 궁이 처럼 후회할 일이 천지다. 무엇보다 자신도 보지 못했고 세상도 보지 못했다. 중생은 더욱더 보지 못했다. 지금 누군가 여기서, 영화를 찍으면 ‘중경삼림’ 이상의 걸작이 나올지도 모를 일이다. 그건 과연 기뻐할 일일 것인가, 슬퍼할 일일 것인가.
윤석열 새정부 조각을 위한 국회 인사청문회가 이번주 한덕수 국무총리를 시작으로 본격화된다. 하지만 한 총리 후보자의 인사청문회는 25일 첫날 자료 제출 문제로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이 청문회장에서 퇴장하는 등 초반부터 팽팽한 대립구도가 형성되고 있다. 여야간에 입장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무엇보다 지금까지 드러난 공직 후보자들에 대한 자격 시비는 역대 청문회의 판막이라는 점이 문제다. 부모찬스를 비롯해 위장전입, 탈세, 농지법 위반 의혹 등 단골메뉴가 망라돼 있다. 정호영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자의 이른바 ‘아빠 찬스’ 의혹은 본인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논란이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김인철 교육부 장관 겸 사회부총리 후보 역시 딸의 ‘아빠찬스 장학금’ 논란이 일었다. 윤 당선인의 파격 인사로 주목받고 있는 한동훈 법무부 장관 후보자는..
2008년 2월 26일 저녁, 그때 나는 북한 남포항의 식당에서 북한 통전부 L선생과 함께 북한 전역에 생중계되는 뉴욕필하모니의 공연을 보며 식사를 하고 있었다. 경공업 자재 인도단장으로 방문 중이었는데 평양에서 내려온 L선생과 함께 있는 것이다. 나의 관심은 공연이지만 L선생은 어제 이명박대통령 취임사에서 들은 ‘비핵·개방·3000’이다.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L선생의 질문, 맴도는 나의 원론적 대답. 마지막 L선생의 독백같은 발언, ‘우리는 뭐 핵이 좋아서 그런 줄 아시오!!’. ‘선비핵화’, ‘선제타격’, 등 신정부의 대북관련 발언을 듣고 있는 평양의 L선생을 떠 올려 본다. 남한정부가 야속함을 넘어 미련하다고 생각할 것 같다. 핵을 포기하고 미국의 말을 잘 들으면 제재도 없고 경제지원과 대북투자로 경제가 발전되고 인민들은 허리띠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