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음성에 내 마음 열리고, 마치 꽃들이 동 트는 새벽의 입맞춤에 피어나듯! 하지만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이여, 더 잘 내 눈물을 말리기 위해, 그대 음성을 더 들려주세요! 영원히 데릴라의 곁으로 돌아온다고 말해 주세요! 너무도 애절한 아리아다. 용맹한 이스라엘 장군 삼손. 그를 유혹하는 매혹적인 필리시테인 여인 델릴라. 백성을 배반하고 한 여인을 택하는 나약한 남자의 비극. 카미유 생상스(Camille Saint-Saëns)는 이 이야기를 '삼손과 델릴라(Samson et Dalila)'에 담았다. 아름답기 그지없는 이 오페라곡은 탄생 당시 공연 금지명령을 받았다. 성경과 달리 묘사된 삼손이 프랑스 교회의 심기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결국 국경을 건너 독일로 갔다. 리스트는 생상스를 도와 바이마르 대공 오페라하우스에서 삼손과 델릴라를 연주하게 해 줬다. 고진..
가난을 거울처럼 보여주는 죽 이야기, 부족함이 없을 때 먹으면 건강식이지만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먹는다면 슬픈 이야기가 된다. 뜨거우면 불어서 먹고 식으면 그냥 음료 마시듯 ‘쉬운 죽 먹기’다. 남쪽에서 죽은 아주 고급지게 만든다. 배부른 곳에 와서 다시는 죽을 먹지 않으리라 했으나 별식으로 자꾸 권하기에 먹는데 그때마다 죽의 맛에 감탄한다. 죽에 대한 몇 가지가 기억을 떠올려 보면 가난한 때에 싫도록 먹었던 것이 먼저 떠오른다. 그 시기 먹었던 죽은 식욕에 대한 원초적 해결을 위한 것이기에 처절하다. 아주 작은 양으로도 살릴 수 있었는데, 영양실조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잃은 어미의 곡성, 떠도는 아이와 노인들, 죽느냐, 사느냐가 생사를 가르니 부족한 식욕이 식탐을 만들어 먹고 먹어도 배부르지 않은 죽 한 그릇이 소원일 때가 있었다. 곡기 없는..
1. 축구는 전쟁이다 한의사 관점에서 볼 때 가장 위험한 운동은 축구다. 운동 중에 발목을 삐거나, 무릎을 다치거나, 허벅지 근육이 찢어지는 환자 대부분이 축구광이다. 부상도 부상이지만 충분한 치료나 재활 없이 축구하다 다시 다쳐서, 아주 운동을 접는 경우도 여럿 보았다. 이건 내 개인적인 경험담일 뿐만 아니라 통계적으로도 입증된 사실인데, 학원 스포츠가 활성화된 영국에서 40대 이후 부상자가 가장 많은 운동은 축구 클럽 출신이 압도적 1등이었다. 축구하다 전쟁을 하기도 한다. 1969년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는 월드컵 예선전을 하다 전쟁을 일으켰다. 대략 5000명가량이 죽었다고 하는데, 물론 그 이전에 영토 문제와 이민자 문제 등으로 사이가 매우 나쁘긴 했다. 그래도 그렇지, 축구하다 졌다고 엘살바도르 여고생이 권총 자살을 하고, 대통령과 축구선..
성남시에서 하나밖에 없는 야탑동 성남종합버스터미널이 1년간 휴업을 결정했다고 한다. 그동안 오죽 힘들었으면 휴업 결정을 했을까. 본보(15일자 8면)는 운영업체 관계자의 말을 전하고 있다. “현재 코로나19 이전보다 모든 노선이 50% 이상 줄어든 상태이고 이곳 상권도 망가진 지 오래되는 등 고충 사항을 성남시에 여러 경로로 도움을 요청했지만 대답은 싸늘”했단다. 그는 직원 수를 줄이고 운영의 허리띠도 졸라매 왔지만 연간 6억 이상 적자의 연속이라 궁여지책으로 휴업을 결정하게 돼 터미널 이용 시민들께 정말 죄송하다고 말했다. 아무튼 성남종합버스터미널이 휴업을 하게 되면 여러 문제가 생긴다. 당장 호남·영남·충청·강원권 등 전국으로 향하기 위해 시외버스와 고속버스를 이용하는 시민들이 큰 불편을 겪는다. 성남종합버스터미널은 성남시..
최근 내가 접한 통계 중 가장 무서운 통계는 2021년 의대 신입생 2977명 가운데 무려 80.6%가 월 가구소득 920만 원이 넘는 부유층출신이라는 것이었다. 나머지 19.4%도 빈곤한 가정출신은 아닐 테니 세계적으로 유례없을 지독한 부잣집편중이다. 이대로라면 우리나라에서 ‘없는집’ 자식들이 의사되기는 틀렸다. 이미 의사는 부모찬스로 만들어지는 대표적인 특권직업이다. 의대생만이 아니다. 로스쿨학생은 물론 SKY 등 명문대 학생과 예술계 학생도 부유층과 전문직 가정출신이 압도적으로 많다. 드물게 발표되는 관련통계들은 우리사회에서 교육이 계층이동수단에서 신분대물림수단으로 타락했다는 사실을 더할 나위 없이 명징하게 보여준다. 만약 매년 명문대별, 인기단과대별로 신입생 학부모집단의 10 분위 소득분포가 지난 10년 동안 집계, 공표되었다..
一路平安(일로평안)을 희구하면서 시작된 2021년도 결코 평안하지 못한 한 해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다. 금세 잡힐 듯했던 코로나는 변이가 변이를 낳으면서 위기에 위기를 겹치는 상황으로 이어지고, 무역에서 시작된 강대국 간의 사활을 건 패권경쟁은 전방위로 전선을 넓혀가고 있다. 첨단 기술과 자원이 국제사회 헤게모니를 좌우하는 주요 요인으로 부상하면서, ‘기술냉전’ ‘기술패권’ ‘기술주권’ ‘디지털 냉전’ 등이 낯설지 않은 용어가 되어가고 있다.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 미·중 기술패권경쟁은 점입가경이다. 미국은 어떤 비용을 부담하더라도 ‘디지털 만리장성’을 쌓아 첨단기술에 대한 중국의 접근을 봉쇄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중국도 ‘반도체전문대학’도 설립하는 등 반도체의 설계, 제조, 조립, 시험 중 길목이 되는 기술..
첫아이 소풍 도시락을 호들갑 떨며 싸던 때가 있었다. 새 모이 마냥 밥 몇 숟갈 먹는 아이인데 잔칫상 차리듯 준비했다. 쪽잠을 자고 새벽같이 일어나 재료를 손질했다. 오색 꼬마 김밥, 별 모양 소고기 주먹밥, 메추리알로 만든 병아리, 햄과 채소를 꽃잎처럼 오려낸 샐러드를 담았다. 내 아이만을 위한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도시락이었다. 엄마가 처음이라 그게 최선의 모성애인 줄 알았다. 그 아이가 다섯 살 무렵 나는 병설유치원 특수학급에서 일했다. 공교롭게도 첫애와 같은 해에 태어난 아이들을 맡았다. 그래서인지 내 눈에는 덩치만 컸지 아직 아기들로 보였다. 엄마 품을 떠나 규범이 지배하는 공간에서 생활하는 게 짠하고 뭉클하고 안타깝고 대견했다. 나는 아이들에게 교사라기보다 엄마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해 봄날 아이들과 소풍을 갔다. 점심이 되어 각자 집..
코로나19 팬데믹이 잦아들기는커녕 새로운 변종 오미크론 출현으로 폭발적인 위세를 떨치고 있다. K-방역을 자랑하던 정부도 번지는 바이러스 태풍에 전전긍긍하는 모습이다. 그런 가운데 대선 레이스에 돌입한 여야 정치권이 자영업자 손실보상금을 놓고 ‘하느냐’, ‘마느냐’ 다투던 끝에 이번에는 ‘함께 하자, 말자’ 전쟁을 벌이고 있다. 경각에 다다라 생존 자체를 위협받고 있는 자영업자들 사정을 진정으로 헤아린다면 치졸한 ‘선거 셈법’을 멈추고 당장 머리를 맞대는 게 옳다. 608조 원에 이르는 내년 예산이 국회를 통과한 지 며칠 지나지도 않아 정치권이 ‘100조 원’ 추경을 거론하는 일종의 ‘추경 중독증’ 문제는 워낙 사정이 급박한 만큼 일단 논외로 치자. 이재명 민주당 대선후보와 여당은 애초 25조 원을 투입해 연내에 전 국민 재난지원금 지..
1980년 5월 21일 서울 변두리 여관방, 며칠 전 광주 도청 앞 시위로 검거대상 1호로 지목된 전남대 교수 몇 사람이 피신 중이었다. TV에는 ‘폭도들이 광주를 폭도에 장악했고 계엄군이 진압작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뉴스가 뒤덮었다. 광주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벌써 피비린내가 진동할 때, 뉴스를 보던 송기숙 선생이 벌떡 일어섰다. “갑시다. 광주사람들이 다 죽는다는데 우리만 여기서 이럴 수는 없소. 살아있더라도 평생 부끄러운 삶일 것이오. 차라리 가서 같이 싸우고 같이 죽읍시다. 내려갑시다.” 그 길로 3명의 전남대 교수는 전라선 막차를 타고 제 발로 사지로 들어갔다. 시민수습위를 조직하고 활동하다 계엄군에 체포되어 보안사의 모진 고문을 겪어야만 했다. ‘내란죄 중요임무종사’라는 죄명이었다. 소설 ‘녹두장군’의 작가 송기숙 선생이 며칠 전..
전직이든 현직이든 교사가 모이면 두 집단이 입을 모아서 하는 말이 ‘학교는 참 변하지 않는다’이다. 몇십 년 전과 지금의 교실의 풍경을 사진 찍어서 놓고 비교해보면 전자제품들이 들어와 있는 것 빼고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교사는 칠판 앞에 서 있고 학생들은 책상에 앉아서 교과서를 펴 놓고 앉아있다. 수업을 자세히 살펴보면 조별 활동이나 학생 중심 활동 같은 게 생겨서 예전처럼 책상에 앉아만 있는 건 아니지만 큰 틀에선 달라진 게 없다. 학교의 모습 중 정말 한치의 변화도 없는 것 중의 한 가지가 교과서와 관련된 풍경들이다. 교과서 배부 및 수령 방식은 1970년대나 2000년대나 2021년이나 똑같다. 학생들은 학기 말이나 학기 초에 열 권이 넘는 교과서를 한꺼번에 지급받고, 그걸 가방에 미어져라 쑤셔 넣은 채 집에 간다. 교과서 지급받는 날 부모님이 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