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주아 체제의 헤게모니를 가진 소수 지배세력은 물리적 폭력을 발동하는 것만이 아니라 다른 계급(노동자 계급)을 속인다. 이들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이 제대로 형체를 갖출 수 없도록 확실한 방책을 마련하는 것이다. 이건 부르주아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불가피한 작업이 된다.” 헝거리 출신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게오르그 루카치가 쓴 《역사와 계급의식(History and Class Consciousness)》의 한 대목이다. 이대로라면 자본주의의 지배세력은 “속임수를 제도화”해야만 한다. 왜 그래야 할까? “날이 갈수록 부르주아 체제의 모순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서 이에 도전하는 세력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 《역사와 계급의식》, 루카치의 고뇌 하지만 그 도전은 그냥 되지 않는다. 노동자계급의 의식은 지배계급에 의해 끊임없이 세뇌되고 자본주의 전체의 구조와 모순에 대한 인식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교육, 그리고 지배 사상의 작동이 매일 일어나기 때문이다. 지배계급이 손에 쥐고 있는 언론은 그 대표적인 도구다. 감수성까지도 그렇게 만들어져간다. 무엇을 좋아해야 하는지, 무엇을 혐오해야하는지 조차 입력된다. 심지어 자신을 지원하는 운동과 조직까지도 혐오하게 만든다. 노동자 계급이 노동자들을 위한 정책을 내세우는 진보정당에 등을 돌리게 하는 냉전체제의 “빨갱이 선동”이 그런 경우다. 자신의 친구와 적을 몰라보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결집할 수 없게 한다. 70년대에 대학을 다녔던 이들의 손에 《역사와 계급의식》은 비밀 경전처럼 들려져 있었다. 영어판 영인본으로 돌아다니던 책이다. 마르크스 관련 서적을 지니는 것 자체가 감옥행이었던 시절, ‘루카치’라는 이름은 진보적 사유의 한 암호처럼 여겨진 때였다. 접근이 봉쇄된 마르스크에 대한 관심 때문이기도 했지만 《역사와 계급의식》의 의미는 또 따로 있었다. 자신의 사회경제적 처지에 따라 의식이 형성되는 것이 마땅할 진데 왜 노동자들이 보수 또는 파시스트 정당을 지지하는가에 대한 중요한 논거를 제시해준 책으로 받아들여졌다. “래디컬(radical)”이라는 말의 뜻도 이 책을 통해 깨우칠 수 있었다. 마르크스가 쓴 《헤겔의 법철학에 대한 비판》의 한 문장이 인용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래디칼’하다는 것은 문제의 근본 뿌리로 들어가는 작업이다. 인간에게 그 뿌리는 인간 자신이다.” 뿌리의 라틴어 어원 ‘radix’에서 나온 래디칼은 속도의 급진성을 포함하고 있기도 하지만 정작은 “본질적 접근”을 뜻했던 것이다. 문제는 자본주의 체제의 교육이 바로 이 근본을 파고드는 접근을 가로막고 실체와 인식 사이에 베일을 치고 진실을 가리고 있다는 점이다. 모든 것은 이른바 “물신화(物神化/reification)”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사실 이 “물신화”라는 말을 이해하는 것은 당시 쉽지 않았다. 루카치의 주장은 계속 이어진다. “노동자들은 인간이 아니라 끊임없이 사물처럼 되어버리고 결국 상품 가치로만 평가되는 존재가 되고 만다. 이렇게 인간은 비인간화되고 그의 영혼까지 절름거리게 만들며 기진맥진하게 해버린다. 계급의식을 장착하고 이에 대해 저항하지 않는 한.” 자본주의의 지배력이 온 사회를 구석구석 쥐고 흔드는 상황을 경험하게 된 이후 “물신화”가 무엇인지 절감되기 시작했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비극의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모든 것은 돈으로 환산되는 이해관계로 판단하고 인간적 감정과 사유 그리고 태도는 사라진다. 그런 것들은 이해관계를 관철하는데 도리어 방해가 될 뿐이다. 이러면서 사람이 기계에 찢겨나가고 깔려 죽는 일이 일상이 된다. 쓰고 버리는 “일회용 인간”이 넘쳐나고 있다. - 물신화의 폭력 결국 사람들은 이런 체제가 “운명적”이라 근본적으로 바꿀 방법은 없고 정책을 변화시키면 뭔가 달라질 것이라고 기대한다. 정치는 그런 기대를 가진 표심에 따라 떠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폭력이 내장되어 있는 체제라면 그런 정치는 피상적인 처방일 뿐이다. 마르크스는 《자본론》 1권에서 자본주의 형성 초기 자본이 모아지는 과정을 “자본의 원시적 축적(primitive accumulation of capital)”이라고 불렀다. 그는 이 과정이 “폭력”이라고 단언한다. 자본주의가 제국주의 체제로 진입하는 과정은 더욱 그리했다. “스페인, 포르투갈, 네델란드, 프랑스 그리고 영국은 그 순서대로 노골적인 폭력을 동원했다. 그 폭력의 이름은 ‘식민지 체제’다. 그리고 이 체제는 국가의 권력을 통해 이루어졌다. 봉건체제에서 근대체제로 전환해나가는 과정은 그런 폭력이 산파 역할을 했다.” 물건을 거래하면서 국가가 시장을 자연스럽게 놓아두고 상업자본이 얌전하게 쌓여가면서 그걸로 부를 축적해 부르주아 체제가 성립해나간 것이 아니라는 역사분석이다. 엄청난 국가폭력이 게재된 체제가 바로 부르주아 계급이 주도하는 시장주의 체제라는 것이다. 이걸 좀 더 분명하게 밝혀낸 것이 바로 《거대한 전환 (Great Transformation)》을 쓴 칼 폴라니(Karl Polyani)다. 중세 봉건체제에서 농민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공유지를 종획운동으로 번역되는 영국의 “인클로우져 무브먼트(Enclosure Movement)”로 해체시킨 사건의 정체를 정밀하게 밝혀낸 것이다. 그건 정치와 법으로 농민들의 것을 영주의 것으로 말뚝을 박아 접근을 금지시키고 사유화(私有化/privatization)한 명백한 강탈행위였다. ‘인클로우저 법안(Enclosure Act)’은 그 강탈행위를 합법화한 것이었다. 공유지에서 생존수단을 강구하고 있던 농민들은 쫓겨나 거지, 부랑자, 강도, 처지가 더 나빠진 농노, 저임 노동자로 전락하면서 그 삶은 비참해지고 만다. 마르크스가 짚은 바로 그 폭력이 낳은 필연적 결과였다. 근대 자본주의 시장사회의 탄생에는 바로 이 폭력구조가 역사적으로 내장되어 있다. 가난은 그 폭력의 열매다. - 《거대한 전환》, “계획된 시장사회” 칼 폴라니는 이를 “근대 국가의 지배세력 부르주아 계급의 정치행위”라고 불렀다. 이들이 장악한 의회가 만든 법은 시장사회의 주도권이 누구에게 속해있는지를 명백히 했다. 그리고 그 의회는 시장사회의 구축과정에 동원한 폭력의 강제성을 법의 이름으로 관철해나갔다. 1994년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는 《거대한 전환》 출간 50주년을 맞이해 국제 세미나가 열린다. 이 자리에서 칼 폴라니의 딸 폴라니 레빗은 다음과 같이 시장주의의 핵심을 짚는다. “《거대한 전환》은 ‘자유방임주의(laissez-faire)’를 내세우는 시장주의 체제가 시장 자체의 자연발생적 방식이 아니라 ‘계획된 것’임을 입증해준다. ‘자발적’인 것은 도리어 이러한 시장주의 체제에 대한 사회적 통제운동이다.” 오늘날 “민영화”로 번역되는 영어의 원 단어는 “사유화”를 의미하는 “privatization”이다. 민영화는 민간 경영이라는 번역으로 공적 자산을 사유화하는 대자본의 지배구조를 은폐하는 말이다. 이는 법과 정치로 합법이 되고 거대한 자본축적의 동력으로 가동하고 있다. 칼 폴라니의 말대로 대자본의 지배구조를 위해 “계획된 사유화”다. 1920년 오스트리아 비엔나는 “붉은 도시”였다. 사회주의의 진로에 대한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고 훗날 신자유주의의 태두가 되는 하이예크의 스승 루드비히 폰 미제스와 그 반대진영의 논전이 펼쳐졌고 여기에 칼 폴라니가 끼어 있었다. 1930년대 대공황을 겪고 2차대전이 종료될 시점인 1944년 두 권의 중요한 책이 나온다. 하나는 하이예크의 《노예로 가는 길》, 다른 하나는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이었다. 당시 위세를 떨쳤던 경제학자는 케인즈였는데 하이예크는 애초 케인즈(캠브리지대학)의 논리를 격파하는 작업을 위해 영국 런던정치경제대학의 초빙을 받아 이 책을 집필했다. 시장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주장한 케인즈와는 달리 하이예크는 자유방임주의를 옹호하는 논리를 편 것이다. 하이예크의 책은 출간 당시 별 관심을 끌지 못했다가 1970년대에 밀턴 프리드만을 중심으로 한 미국 시카고 학파를 통해 강세를 얻는다. 신자유주의의 원조가 된 것이며 그 실험은 칠레에서 사회주의 정권 아옌데를 쿠데타로 축출한 피노체트 체제에서 폭력적인 실험을 추진하게 된다. 대자본과 군의 동맹체제를 통한 신자유주의의 출범이었다. 공동체는 여지없이 파괴되고 노동운동은 궤멸되어갔으며 민주주의는 뿌리채 뽑혀나갔다. 신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도저히 양립할 수 없었던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숨겨진 외피는 파시즘이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비정한 현실에서 우리는 누구의 손을 들어주게 될까? 하이예크일까, 폴라니일까? - 어느 길로 갈 것인가? 우리의 근대자본주의 체제는 악랄한 식민지 체제의 폭력성까지 내재하고 있다. 그 연장선에서 박정희 체제가 작동했고 90년대 이후로는 미국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 체제의 보이지 않는 수탈체제가 가동하고 있다. 게다가 우리는 분단에 기반한 미국의 군사력에 지배받고 있으니 그 폭력의 성격은 다층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교육은 역사를 변방에 내몰았고 비판적 지성은 도구적 기능으로 대체되고 있으며 파편적 현상에 몰두할 뿐, 총체적 구조에 대한 인식은 없다. 그건 분명한 “속임수의 제도화”다. 언론은 이 속임수를 매일 자행하고 있는 중이다. 누가 어떤 법을 만들어서 공공의 자산을 자신의 것으로 사유화하게 하는지 알아야 한다. 어떤 속임수가 교육으로 포장되고 있는지 따져봐야 한다. 다양한 폭력을 내장하고 있는 시장사회의 진상을 끊임없이 폭로해나가고 이를 공유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언론이 매일 먹여주는 허위를 진실인 줄로 알고 받아먹고 있는 젊은 세대들을 구해내야 한다. 역사를 배제한 몰역사적 사유의 무지를 벗겨내야 한다. 다시 루카치의 말을 들어본다. “애초 자본주의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그 기원을 드러내는 순간 비판철학은 시동을 걸게 된다.” ‘래디칼’해야 한다. 그래야 답이 보인다. 폭력으로부터 인간, 우리 자신을 지켜내기 위해서.
사월이면, 깜깜하고 시린 사월 어느 밤이면, 소주 한 잔 목구멍으로 밀어 넣고 밤바다로 향하는 아비가 있어. 아비의 손에는 까만 비닐 봉투가 들려있지. 철 지난 겨울 양말과 장갑과 내복이 들어있는 봉투 말이야. 바다는 그때의 바다나 지금의 바다나 다를 것 없어. 칠년이라는 세월에도 어김없이 침묵할 뿐이야. 어둠은 수평선 너머로 가라앉고, 그리움만 하얀 띠가 되어 파도처럼 달려들지. 술을 비워도 아비는 취하지 않아. 취할 수 없어. 봉투를 풀어 시커먼 바닷물에 내복을 입히지. 양말을 신기고, 장갑을 끼어줘. - 추웠어? 아비는 바위에 붙은 따개비처럼 밤을 지새워. 술도 목으로 넘어가질 않아. 술에서 바닷물에 흔들리는 해초 냄새가 나. 흔들리는 해초 이파리가 딸의 손가락 같아. 아빠, 안녕. 웃을 때 드러나는 덧니 같아. 교복에 붙은 이름표 같아. 이름표에 새겨진..
지난 4월 7일이 신문의 날이었는데, 신문이 큰 위기를 맞고 있다. 신뢰의 추락이 그것이다. 편파보도와 허위 선동으로 독자들을 속이고 있다는 오랜 불신에 이어서 부수조작으로 더 큰 신뢰를 잃었기 때문이다. 최근 드러난 대규모 부수조작은, 지금까지 구독의 대가로 자전거와 비데를 제공하고 나아가 현금 살포로 부수를 늘리는 수준을 넘어선다. 최근 방송 보도를 보니 조중동을 비롯한 자칭 우리나라 유수 신문사에서 발행되는 어마어마한 양의 신문뭉치들이 포장도 뜯기지 않은 채 팔려 나간다는 것이다. 이제는 심지어 동남아시아로까지 폐지를 넘겨야 할 만큼 발행부수를 더 늘린 셈인가? kg당 5백원에 팔려나가고 있었다. 신문의 유료부수를 조사하는 기관인 한국ABC공사가 집계한 각사의 유료부수는 정책광고를 수주하면서 정부로부터 받는 요금을 결정하는..
20년 전에는 우산 없이 등교해서 비가 오면 별다른 수가 없었다. 비 사이로 뛰어가는 축지법을 쓰면 좋겠지만 그럴 능력은 없어서 그냥 맞고 갔다. 어둑어둑한 학교 정문에 학부모들이 우산을 들고 서 있다가 자신의 아이를 향해 걸어오는 모습을 보면 어찌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우르르 쏟아져 나가는 아이들 틈에서 많던 사람들이 다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있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서 나처럼 우산도 데리러 올 부모님도 없는 아이들만 남아 있게 되면 급하게 뛰어서 집으로 갔다. 요즘은 이런 풍경을 찾아보기 어렵다. 학교에서 공식적으로 우산을 대여해주는 사업을 벌이는 곳도 있고, 교실에 남아 있는 우산들이 4~5개씩은 있어서 담임 교사들이 아이들에게 우산을 빌려준다. 없으면 옆 반에 도움을 요청해서라도 아이 손에 우산을 들려서 보낸다. 그러니 아이가 비 맞는..
네덜란드의 저널리스트 브레흐만의 『휴먼카인드』가 화제다. ‘친절한 인간이 살아남는다’(한겨레), ‘인간은 이타적 존재, 성악설은 틀렸다’(중앙 SUNDAY), ‘이기심이 인간 본성? 그것은 잘못된 통념’(조선일보) 등 거의 모든 매체들이 넓은 지면을 할애해 소개했다.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고 하는 성선설을 주장하는 내용이다. 다윈의 진화론, 도킨스(R. Dawkins)의 이기적 유전자 등 그동안 생물학 분야에서 밝혀진 과학적 이론들은 성악설이기 때문에 틀렸다고 한다. 역사적 사실들을 그 ‘과학적 증거’라며 제시하고 있다. 이제 진화생물학자들은 이론을 전면 수정해야 하게 되었다. 언론의 상찬이 자자하므로 나는 이 책을 읽을 때 경계해야 할 점을 지적해보기로 하겠다. 처음 사례로 든 골딩의 소설 『파리대왕』을 보자. 사고로 무인도에 고립돼 살게..
박원순 시장의 3선 당시 서울시 전체가 파랗던 것과 달리 이번에 완전히 붉게 물들었다. 여당의 완전 실패다. 지난 해 4월 21대 총선에서 개정선거법에 의한 비례위성정당의 의도를 막고 사회개혁을 위해 거대 여당을 만드는 데에 일조했던 더불어시민당의 당대표였던 입장에서 매우 깊은 책임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촛불혁명에 의한 현 정부의 개혁 시도는 집권 초기 다수 야당의원에 의해 저지되었다. 이에 촛불시민은 기득권 구조개편의 사회개혁을 당청이 함께 추동할 수 있도록 180석에 가까운 여당 탄생에 기여했다. 하지만 1년 후 맞이한 이번 선거 결과는 시끄럽고 지리한 개혁과 희망없는 민생에 지친 시민의 분노를 보여준다. 지난 1년 사이에 사회는 어느 지점에선가 사회개혁 동력을 잃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개혁은 개선이나 개량과 다르다. 개선은 기존 질서..
가평군이 추진하고 있는 가평 공동형 종합장사시설이 들어설 후보지 공모에 주민들의 관심이 높다고 한다. 가평군은 가평 공동형 종합장사시설 설치후보지 공모 재공고를 내고 오는 5월 7일까지 유치 희망 마을을 모집하고 있다. 재공고를 낸 이유는 1차 모집에 유치를 신청한 3개 마을이 추진 과정에서 유치를 철회하거나, 최종 심의결과 부적격 판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재공모에서는 1차 공모 과정에서 현실적 문제가 제기된 주민동의율을 하향 조정했다. 가평지역은 군부대와 요양원, 펜션 등이 많다. 따라서 단기 거주자가 많은데 1차 공모 시의 ‘주민동의율 70%’를 맞추려면 100%에 가까운 원주민 동의가 있어야 했다. 따라서 재공모에서는 ‘주민동의율 55%’로 완화했다. 가평 공동형 종합장사시설을 공동 추진하는 지방정부는 가평군을 비롯, 남양주시, 구리시, 포천시 등 4개 지역으로 2025년 말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들 지역은 그동안 화장으로 장례를 치르는 경우 성남, 용인이나 강원도 춘천은 물론 인제, 속초 등 먼 지역의 화장장을 이용함으로써 주민들의 불편이 컸다.(본보 13일자 ‘기자수첩’) 그러나 장사시설 건립은 가평군 인구만으로는 이용률이 낮아 비용대비 효율성이 떨어지기에 같은 처지에 있는 인근 지자체에 공동 건립·이용을 제안해 가평공동형 종합장사시설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재공고에서 주민동의율을 완화하자 1차 때보다 높은 관심이 쏠리고 있다. 유치를 희망하는 마을에서 문의가 계속 들어오고 있다고 한다. 이미 마을 총회를 통해 종합장사시설 유치 추진을 의결한 마을도 있단다. 군은 이번 재공모에서 1차 공모 때보다 더 많은 마을이 유치를 신청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세상을 떠난다. 따라서 화장장, 장례식장, 유골봉안당 등 장사시설은 어느 지역에서나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내가 사는 마을에 유치를 희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주민들을 위한 인센티브가 제시된다고는 하지만 집단적 동의 형성과정에서 주민 간, 이웃 지역 간 갈등과 대립이 발생한다. 지난 2013년 화성시가 제안한 공동형 종합화장시설인 화성시 함백산추모공원 사업에는 안양, 부천, 안산, 광명, 시흥 등 6개 지방정부가 참여했다. 8년여 만인 오는 7월 개장하게 될 이 사업도 갈등을 겪으며 추진됐다. 특히 시설예정지에서 2∼3㎞ 떨어진 호매실 등 서수원 지역 주민들은 화장장 때문에 주거환경에 심각한 위협을 받게 될 것이라며 치열하게 반대운동을 벌였다. 서수원 주민들은 인접한 수원주민에 대한 사전 동의 절차 미이행, 국도39번 및 42번 도로의 상습 정체문제, 그린벨트지역 및 생태보존가치가 높은 서식지의 훼손문제, 경기도의 화장장 수요 시급성 여부, 갈등조정위원회의 불공정한 운영 등의 사유로 지속적인 반대민원을 제기해왔다. 최근에는 지원 문제로 인해 추모공원 지역 주민간의 갈등도 표면화됐다. 가평 공동형 종합장사시설을 추진하면서 이런 사례들을 참고하길 바란다. 가평군이 밝힌 바로는 유치지역에는 120억 원 이내의 기금지원사업과 장례식장, 식당, 매점, 카페, 봉안용품 운영 등 수입시설운영권이 주어진다고 한다. 주변지역에도 수백억원의 기금지원사업이 실시된다니 이를 놓고 갈등이 일지 않도록 미리 대비하길 바란다.
하남시의회가 올해 서른 살이 됐다. 공자는 사람의 나이 30세를 삼십이립(三十而立·서른 살이 되면 뜻이 확고하게 서고 성숙해진다)이라 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의 서른은 아직 뜻이 바로 서는 단단한 삶이 아니다. 방황하고 실패하며 책임이 커지는 만큼 미래에 대한 걱정도 많아 서른이라는 숫자가 갖는 의미는 매우 다양하고, 복잡하다. 하남시의회의 서른은 지방의회 부활 30년과 결을 같이 한다. 우리나라의 지방자치는 제헌헌법에 근거가 마련됐으며 1949년 지방자치법 제정을 통해 구체화됐다. 그러나 제대로 꽃피우지 못한 채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지방의회가 강제 해산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다 중단됐다. 이후 1991년 지방자치법 개정으로 지방의회가 부활된 후 2021년 드디어 30년을 맞이하게 됐다. 우선 제8대 하남시의회 의장으로서 지난 1991..
파주 헤이리의 내 작업실을 찾아온 친구가 ‘기분이 울적하니 아무 생각 없이 들을 수 있는’ 풍악을 대령하라기에 경쾌한 월드뮤직 음반을 골라 들려줬다. 두 세곡 뒤 쿠바 민요 ‘관타나메라’ 가 나온다. 제목만으로 바로 후렴구를 떠올리게 하는 노래다. ‘관타나메라~ 과히라 관타나메라~’ 맞다. 그 노래. ‘호세 마르티 생각하면 이 노래를 목록에서 빼야 하는 거 아니야?’ 역사교사답다. 밝은 노래에서 어두운 역사를 바로 잡아낸다. 말 나온 김에 질문했다. ‘체 게바라는 유명한데 체 게바라의 영웅이었던 호세 마르티는 왜 그렇게 안 알려졌을까?’ 민중시각 역사교육, 세계시민의식 부재 이상의 탁견을 청했던 내 진지한 질문을 무색하게 한 답변. ‘외모 차이 아닐까’ 진심인지 유머인지 아직 확인 못해봤다. 호세 마르티는 몰라도 관타나메라를 모르는 사람..
지난 10년간 한국토지주택공사(LH) 임직원 1천900명이 LH가 직접 분양 또는 임대한 주택을 계약한 사실이 불난 민심에 기름을 붓고 있다. 시중에는 “LH가 직원들 기숙사 짓는 기관이냐”는 비아냥이 넘쳐난다. 취약계층에 우선 공급하기 위해 건설되는 나라의 공공주택을 다수의 시행기관 임직원이 차지한 것은 불법 여부를 떠나서 도덕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짓이다. 그야말로 생선가게 맡은 고양이들의 교묘하고 추악한 일탈이다. 늦었지만, 완벽한 제도적 방지책이 마련돼야 한다. 국민의힘 권영세 의원이 LH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1년부터 작년까지 LH 직원 1천900명이 공공 임대주택(279명) 또는 공공 분양주택(1천621명)을 계약했다. 공공 분양주택 계약자 중 31%(503명)는 2015년 LH 본사가 이전한 경남 진주 소재 경남혁신도시지구의 아파트를 분양받았다. 다른 지역 혁신도시 관련 계약자는 644명(39.7%)이었다. 이 가운데 임대 의무기간 10년인 공공임대주택 계약은 모두 233건으로, 수도권이 72%(168건)를 차지했으며 절반이 넘는 93건이 수원 광교신도시에 몰려있다. 광교신도시에서는 2012년 한 해에만 44명이 계약했다. 광교신도시의 10년 임대 아파트들은 지난해부터 분양 전환을 시작했는데, 주변 시세보다 분양 전환가가 최대 6억 원까지 저렴해 영락없는 ‘로또’다. 광교 주민들 사이에선 “LH 내부적으로 투자 정보가 공유된 것”이라는 뒷말이 나오고 있다. LH 임직원 본인 명의로 된 것만도 1천900채에 달한다면 차명이나 친인척 명의로 된 것까지 합치면 엄청날 것이라는 합리적인 의심을 피해갈 길이 없다. 실제로는 LH 임직원이 받은 특혜는 상상을 초월할 가능성이 높다. 저렴한 임대료로 거주하고 주변 시세보다 싸게 분양받는 10년 공공임대주택은 LH 직원들에게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는’ 알짜배기였던 셈이다. 물론 LH 측은 억울해한다. 그들은 “LH 직원도 일반인과 동일한 청약 자격을 갖춘 경우에 한해 계약이 가능하며, 입주자 선정 업무 역시 공정을 기하기 위해 한국부동산원에서 대행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나랏일을 하는 사람들이 결과적으로 자기들이 만든 집을 자기들이 싸게 청약해 10년 동안 살다가 싸게 분양받는 일을 놓고 아무 문제가 없다고 우기는 처사가 괜찮은가. 과연 그렇게 떳떳하고 온당한 일인가. “LH 공공임대 주택은 사실상 LH 임직원들의 기숙사였던 셈”이라는 항간의 비난은 결코 과해 보이지 않는다. ‘도둑놈은 한 죄, 잃은 놈은 열 죄’라는 속담이 있다. 도둑은 물건을 훔친 죄 하나밖에 없으나 잃은 사람은 간수를 잘못한 열 가지 허물이 있다는 얘기다. 정부와 정치권이 완성도 높은 제도적 방지책을 마련해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의 지적처럼 ‘부동산 투기’ 문제는 긴 세월 켜켜이 쌓여온 적폐다. 인간의 욕망과 깊숙이 연계된 이 문제는 대단히 복잡하고 끈질겨서 끊어내기가 쉬울 수가 없다. 여야 정치권은 국가의 ‘공정 의지’에 대한 국민 신뢰와 직결된 이 문제를 놓고 ‘승리 공식’만 탐닉해서는 안 된다. 지금이야말로 진정 국민을 위한 정치가 절실히 필요한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