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와 명예를 누리던 테베에 역병이 돌기 시작했다. 그러자 늙은 사제가 왕 앞에 엎드려 모두를 구해달라고 간청을 올린다. “왕이시여, 직접 자신의 눈으로 이 도시를 돌아보시옵소서. 죽음의 붉은 물결이 몰려오는 것이 보이십니까? 테베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병충해가 휩쓸고 간 농토는 황폐해지고 소들은 병들어 숨을 헐떡이고 있나이다. 여인들은 아이를 낳다가 세상을 떠나고 병마는 집집마다 격렬한 기세로 위세를 떨치고 있습니다. 비극에 싸인 테베가 땅을 치고 통곡하고 있나이다.” 테베의 비극, 역병의 책임 결국 이 모든 사태는 테베에 살인자가 있기 때문이며, 그는 다름 아닌 그 나라 왕이었던 라이우스를 죽인 자라는 신탁이 알려진다. 고대 그리스 희곡작가 소포클레스가 남긴 ‘오이디푸스 왕’ 이야기다.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하고 자신의 어머니인 왕비 이오카스테와 결혼해서 자식을 낳은 비밀이 드러나면서 오이디푸스는 이제 왕이 아니라 들판에서 헤매는 방랑자가 된다. 운명의 화살은 그의 눈마저 앗아간다. 스핑크스가 낸 수수께끼를 풀어낸 지혜자로 떠받들여지고 용기 있는 위대한 왕으로 존경받던 오이디푸스가 마주한 출생에 얽힌 사연은 권력투쟁의 문제였다. 자라나면 왕인 아버지에게 도전해서 칼을 들이댈 아이라는 예언에 라이우스는 어린아이 오이디푸스를 몰래 내다 버리고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운명의 고리는 다시 이어져 이 왕가(王家)의 파멸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된다. 어머니 이오카스테는 사건의 진상을 알자 목을 매는 자살로 자신의 인생을 마무리하고, 시신 앞에서 어머니가 차고 있던 금브로치 핀으로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눈을 찌르고 만다. 그리고는 이오카스테의 동생이기에 외삼촌이자 처남이 된 크레온에게 자기를 추방하라고 애원한다. 이후의 이야기가 담긴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그 첫 대목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 늙고 눈먼 자의 딸 안티고네여,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오늘은 누가 이 방랑자 신세가 된 오이디푸스를 받아줄 것인가? 내가 그리도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오랜 고통의 세월에서 배운 게 있다면 내어쫓지 않고 맞이해준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말로 그 관심의 초점을 아버지와의 경쟁으로 친부를 죽이려는 “살부(殺父)에 대한 무의식”을 조명했지만 따져보면 그것은 권력자인 아버지 라이우스 왕의 결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권력에 대한 욕망은 아버지와 아들 간에도 해결되지 못한 채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고 죽고 죽이는 혈연(血緣)의 종말을 가져온 것이다. 눈먼 자, 눈먼 도시 어머니도 몰라본 채 오이디푸스는 그렇게 자기의 기원에 무지한 존재가 되었으니 눈뜬 자이나 눈먼 자나 다름이 없게 된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오이디푸스가 친모 이오카스테의 죽음 앞에서 자기 눈을 멀게 하는 장면은 그의 정신세계가 처한 “붕괴의 어두움”을 그대로 보여준다. 테베가 겪고 있는 역병의 비극을 왕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라는 노사제의 말을 떠올린다면, 정작 자기의 비극은 못 알아보았으니 그가 더이상 그곳에 머물러 왕 노릇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소포클레스가 전한 이 고대 비극의 기억은 우리가 얼마나 어리석은 결정을 내리고도 모르고 지내며, 그 무지의 열매로 인해 가족과 집단 전체의 고통이 어떻게 깊어지는지를 일깨운다. 그런 현실은 눈뜨고 있으나 사실은 눈먼 채로 들판을 유랑하고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고발이다. 사마라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는 바로 그 맹목의 아수라장을 보여준다. 한 사람의 시력 상실로 시작된 도시의 정체모를 역병은 모두를 눈먼 지경으로 몰아간다. 그렇게 해서 벌어지는 현실의 이름은 “잔혹과 무자비”다. 호메로스가 전한 ‘일리어드’의 한 대목은 전쟁의 참혹한 현실에서 일어난 숭고한 사건 하나를 기록하고 있다. 그 자신이 맹인인 호메로스를 떠올리면, 보이지 않는다고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호메로스는 폭력과 재난이 이어지고 있는 현실에서 피어나야 할 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아킬레우스와 프리아모스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절친 파트로클로스를 죽인 헥토르에 대한 원한이 깊어지면서 무자비한 인간으로 변모한다.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우스처럼 위장하기 위해 그의 갑옷을 입고 헥토르와 싸움을 벌이다가 죽고 만다. 아킬레우스의 책임이 없지 않은 전투였다. 불화산처럼 끓어오르는 복수심으로 헥토르를 무참하게 절단한 아킬레우스는 죽기 전 장례를 위해 자신의 시신을 가족들에게 돌려달라는 헥토르의 요청을 짓밟는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자기 생살을 먹겠다는 무시무시한 말을 내뱉는 아킬레우스는 이미 악마가 되어 있었다. 고결한 모습이었던 아킬레우스의 변신이었다. 트로이의 늙은 왕이자 헥토르의 아버지 프리아모스가 소리없이 아킬레우스의 천막에 나타나 무릎을 꿇고 그의 손에 입을 맞추는 장면은 아킬레우스의 영혼에 충격을 준다. 늙은 왕의 이런 모습 앞에서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아버지를 위해 통곡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난다. 그는 프리아모스의 손을 잡는다. “아킬레우스는 실컷 울어 더는 울 욕망이 마음에서 떠나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노인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우더니 노인의 흰머리와 흰수염을 불쌍히 여겼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함께 식사를 하면서 서로를 깊이 바라본다. “다르다노스의 후예인 프리아모스는 아킬레우스를 보고 감탄했다. 그가 어찌나 크고 아름다운지 보기에 신과 같았다. 아킬레우스도 다르다노스의 후예인 프리아모스의 고상한 용모와 언변을 보고 듣고 감탄해마지 않았다.” 비극은 숭고한 정신과 진실한 슬픔이 만나는 자리에서 그 힘을 멈추었다. 온몸을 토막내어 마차 뒤에 끌고 다녀, 온 세상에 모욕과 수치를 겪을 뻔했던 헥토르의 시신은 가족들에게 정중한 예를 갖추어 돌아갔고 아킬레우스의 영혼은 파멸에서 구원되었다. 귀의 귀 함석헌 선생이 오래 전 옮기고 주석을 단 ‘바가바드 기타’는 간디가 평생 손에서 놓지 않은 인도의 경전이다. ‘바가바드 기타’는 친족간의 전쟁이 벌어지는 현실에서 크리슈나와 아주르나의 대화가 기록되어 있다. 그 시작을 여는 드리타라슈트라 왕은 시력이 없다. 전설에 따르면 성자 브야사가 전쟁을 볼 수 있도록 눈뜨게 해주겠다고 하자 혈연의 죽음을 차마 볼 수 없다며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그래서 브야사는 드리타라슈트라의 신하이자 마부인 산자야에게 꿰뚫어보고 꿰뚫어 들을 수 있는 능력을 주었다고 한다. 바로 그 들음의 깊이에 대하여 ‘바가바드 기타’는 “귀의 귀”라는 단어를 우리에게 전해준다. 그건 성서의 예수가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와 다르지 않는 화법이다. 형제들이 전쟁이라는 참담한 집단 살해극을 벌이는 잔혹한 상황에서 생명의 윤리를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는 절절한 기원이 된다. 너무도 어리석은 짓인데 멈출 줄을 모른다. 그것은 자기파멸의 길을 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드리타라슈트라는 보지 못하나 도리어 보고, 골육상쟁에 빠진 이들은 눈을 떠도 보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매일 마주하고 있는 현실은 날로 난폭하고 잔혹해지고 있다. 언론이 표적을 정하면 그 대상만 바뀔 뿐이지 혐오와 분노가 집결하고 처단이 진행된다. 그런 식의 “과녁 맞추기”에 길들여진 채 “과잉처벌의 사회”가 되고 있다. 한나 아렌트가 쓴 ‘전체주의의 기원’ 그 첫 장이 “반(反) 유대주의”인 것은 까닭이 있다. 파시즘은 누군가를 지목해서 모든 고통의 원인을 그에게 돌리고 사회적 불만을 정치권력으로 만들어 “이성의 붕괴”를 도모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 오이디푸스의 참회나 아킬레우스의 눈물, 프리아모스의 숭고함은 기대하기 어렵다. “귀의 귀”가 사라진 세상에서 득세하는 것은 손에 든 무기뿐이다. 아르주나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죽이는 것에 무슨 쾌락이 있겠습니까? 저들이 비록 흉악하더라도 그들을 죽인다면 우리는 오직 죄를 지을 뿐입니다.” 테베에 역병이 돌고 있단다. 그 역병의 이름은 무엇일까? 여기서 멈춰야 한다.
지난 9일 서울시가 현재 연장이 진행 중인 7호선 연장선(인천·경기북부), 8호선 별내선, 5호선 하남선, 4호선 진접선 이외의 추가 직결 연장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경기도·인천시로의 철도 시외 연장을 직결로 추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서울시는 ‘도시철도 연장 및 광역철도 추진 원칙’을 통해 비용 부담 등에 따라 직결이 아닌 평면 환승 형태로 추진한다고 발표했다. 이에 따라 경기도의 철도 계획 차질이 예상된다. 뿐만 아니라 경기도민의 지하철 이용도 불편해질 것 같다. 특히 하남시와 남양주시 등은 지하철 5호선과 4·8호선 연결 사업을 추진 중인데 서울시의 일방적 발표로 비상이 걸렸다. 도는 현재 추진 및 구상중인 서울시 도시철도 연장 관련 총 13개 사업 가운데 8개 사업에 영향이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교산지구 3호선 연장(오금~..
사람이 사람을 먹는 시대가 있었다. 이윽고 사람을 먹는 습관은 사라졌지만, 동물은 지금도 계속 먹고 있다. 그러나 이제 사람들이 이 무서운 육식의 습관도 멀리할 날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어린이 보호와 동물 애호를 주장하는 여러 단체들이, 육식이야 말로 대부분 그들이 형벌로서 방지하고 하는 잔악행위임에도 불구하고, 채식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는 것은 얼마나 해괴한 일인가. 사랑의 실천은 형법상의 책임에 대한 공포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잔학 행위를 방지할 수 있다. 분노에 사로잡혀 사람을 괴롭히고 죽이는 잔학성과 그 살코기를 먹으려는 목적으로 동물을 괴롭히고 죽이는 잔학성 사이에 도대체 어떤 차이가 있단 말인가? (류시 말로리) 흡연과 음주와 육식은 가장 저주받아야 할 세 가지 습관이다. 이 무서운 세 가지 습관에서 최대의 불행과 최대의 빈곤..
국제 곡물가가 심상치 않다. 옥수수·밀·대두 등의 가격이 2013년 이후 최고치를 보이며 세계적으로 식량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2019년 기준 우리나라의 식량 자급률은 45.5%이고 가축 사료를 포함한 곡물 자급률은 21%에 불과하다. 쌀(92.1%)을 제외하면, 밀 (0.7%), 대두(26.7%), 옥수수(3.5%) 등은 매우 취약하다. 그 추세도 매년 악화되고 있다. 농림수산식품부는 지난해부터 관계기관, 업계 전문가 등과 함께 곡물 시장 동향과 정보를 공유하면서 대비 태세를 가동 중이다. 최근 국제 곡물가가 상승하는 데는 우선 코로나 장기화 여파가 영향을 미쳤다. 곡물 생산이나 유통 과정에서 제때에 필요한 인력을 투입하기 어려워 생산·공급의 축소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같은 문제는 코로나가 해소되면 어느 정도 극복될 수 있다. 더 큰 관건은 온난화에..
가짜뉴스가 사회적 문제로 떠오른 지도 꽤 오래 되었다. 가짜뉴스는 여론을 왜곡시킴으로써 민주주의를 해치는 독이 된다. 올해는 1991년 5월의 민주화투쟁이 어언 30주년이 되는 해다. 그 해 유서대필이라는 희대미문의 가짜뉴스가 12명 젊은이들의 숭고한 희생을 매도했었다. 그로 인해 독재정권의 연장에 대한 학생들의 저항도 접어야 했다. 가짜뉴스가 의제로 거론되면 학자들은 가짜뉴스의 개념 정의부터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비전문가인 시민들도 그 의미를 이해하는 걸 정의하는 게 그렇게 어렵나? 가짜뉴스란 표현은 메타포(metaphor)다. 그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메타포는 직관적으로 정곡을 찌르는 묘미가 있다. 사회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개념을 정의하는 것은 학자들의 몫이다. 다른 한편으로 언론이 위축된다는 엄살과 표현의 자유 침해라는 우려가 있다. 징벌적 손해배상제도에 대한 언론단체들의 반응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대한민국 언론의 신뢰도는 우주에서 꼴찌다. 저널리즘의 본분을 망각한 상태에서 방종에 가까운 자유를 만끽하면서 정파적 목적으로 허위날조보도를 남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행위에 대해 아무런 법적 책임도 지지 않거나, 또는 배상액이 터무니없이 가벼워서 전혀 부담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 문제다.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는 언론을 위축시키지도 않고,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지도 않는다. 저널리즘의 정도를 지킨다면 어떤 징벌이라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여기서 생각해야 할 지점은 누구를 위한 언론 · 표현의 자유이며 권리인가 하는 의문이다. 만인을 위한 권리인가, 만 명을 위한 권리인가? 봉건지배체제에서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언론 · 표현의 자유는 자산가계급의 권리로서 제기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자산가계급에 해당하는 거상과 부농 및 성공한 수공업자들은 노동자 농민들을 규합해 봉건지배세력을 대상으로 봉기했다. 부르주아 시민혁명이라고 한다. 그 결과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체제를 성립시켰지만 권력은 자산가계급이 독점했다. 당연히 언론 · 표현의 자유도 독점했다. 동등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은 투쟁했고, 희생을 치른 만큼 아주 조금씩 언론 · 표현의 자유를 쟁취해냈다. 그러나 여전히 표현의 수단인 언론은 자산가계급의 수중에 있고, 서민대중의 권리는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이 지점에서 진보적인 언론단체들이 언론 · 표현의 자유를 빌미로 징벌적 손해배상법제에 대해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은 지혜롭지 않다. 언론 · 표현의 자유는 절대적인 권리가 아니다. 근대의 여명기에 자산가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던 소위 자유주의 사상가들이 고안해낸 천부인권사상에 학자와 기자들이 주술처럼 빠져드는 경향이 있다. 가짜뉴스는 사회적 흉기일 뿐이다. 유해식품은 소수 사람들의 몸을 망가뜨리지만, 가짜뉴스는 대다수 사람들의 건강한 자아형성을 방해함으로써 사회를 병들게 한다. 이미 병이 깊다. 가짜뉴스에 대해서는 회사의 명운과 개인의 인생이 흔들릴 정도의 타격을 주어야 한다. 무책임한 허위날조보도로 인해 멀쩡하던 회사가 망하고 죄 없는 사람이 삶을 포기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론사 영업의 자유와 샐러리맨 기자들의 방종에 가까운 자유가 더 중요한가?
포털 네이버가 ‘급상승 검색어’ 서비스를 오는 25일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실시간으로 검색량이 급증한 검색어를 보여준다고 해서 ‘실검’으로 부르는 것이 익숙한 이 서비스는 대중의 관심을 표시하는 척도 역할을 톡톡히 했다. 급상승 검색어를 만들어내서 상품을 홍보하는 방식은 ‘실검 마케팅’으로 불렸다. 정치에선 ‘총공’을 펼친다고 해서 특정 키워드 올리기 운동이 일기도 했다. 실검 1위는 화제성과 영향력을 동시에 거머쥐었다는 확신의 징표로 종종 활용됐다. 실검을 폐지한다고 해서 어뷰징 기사가 사라지거나 언론의 포털 종속성이 덜해지는 것도 아닌데 포털 서비스 하나에 왜 관심이 쏠릴까? 포털은 뉴스를 직접 생산하는 언론사가 아니다. 하지만 수많은 언론사가 알아서 포털에 뉴스를 전송한다. 덕분에 포털은 오로지 뉴스의 배치와 전달만으로..
떨어졌다. 목숨 하나가 또 떨어졌다. 전옥주가 죽었다. 일흔한 살의 나이였다. 이것으로 전옥주는 완전히 죽었다. 완전한 죽음으로 세상에서 지워질 때까지, 전옥주는 수도 없이 여러 번 반복해서 죽었다. 처음 전옥주가 죽은 것은 1980년 5월 광주였다. 전두환이 이끄는 공수부대가 광주 시민의 머리와 목과 가슴에 총구멍을 겨눌 때, 전옥주는 가두방송을 하며 계엄군의 학살에 맞섰다. 그것이 전옥주가 죽어야 할 이유였다. “광주 시민 여러분, 지금 우리 형제자매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도청으로 나오셔서 우리 형제자매들을 살려주십시오.” 그것이 죄의 전부였다. 죽어가는 형제자매를 살려달라고 가두방송을 한 죄로 전옥주는 죽어야 했다. 전두환이 이끄는 계엄군은 전옥주를 간첩으로 조작했다. 계엄사가 발표한 ‘모란꽃 간첩단사건’이 그것이었..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17일 경기신용보증재단, 경기도경제과학진흥원, 경기주택도시공사(GH)와 경기농수산진흥원, 경기복지재단, 경기연구원, 경기도여성가족재단 등 7개 기관을 북·동부로 이전하겠다고 밝혔다. 지난해 경기도일자리재단, 경기도시장상권진흥원, 경기도사회서비스원을 이전하고, 경기교통공사, 경기도환경에너지원을 북부에 신설한다는 발표에 이은 것이다. 여기에 더해 경기문화재단, 경기관광공사, 경기도평생교육진흥원도 북부 이전을 앞두고 있다. 도내 굵직한 공공기관은 전부 북부로 옮겨지는 것이다. 당연히 이들 공공기관이 있는 수원지역의 반발이 크다. 그럼에도 이 지사는 균형 발전을 내세우며 3차에 걸쳐 공공기관 이전을 추진하고 있다. 이 지사는 “사람이든 지역이든 공동체를 위한 특별한 희생을 하고 있다면 이에 합당한 보상..
모든 사람들은 똑같이 자연의 혜택을 누릴 권리와 존중받을 권리를 가지고 있다. 오늘날 기독교는 너무 왜곡되어 있고 주요 가르침이 전혀 실천되지 않고 있다. 그건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이자 형제자매이고 각각의 생명은 신성불가침하다는 가르침이다. 진정한 평등은 신분 제도와 칭호와 특권의 폐지를 요구할 뿐만 아니라, 불평등을 낳는 최대의 무기인 폭력의 근절을 요구한다. 평등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듯이 사회적인 수단에 의해서만 실현될 수 없으며, 신과 인간에 대한 사랑에 의해서만 실현된다. 이 신과 인간에 대한 사랑은 정치적인 수단에 의해서가 아니라 참된 종교적인 가르침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 남들보다 강하고 똑똑한 사람들이 반드시 있기 마련이므로, 평등 같은 건 어차피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이 보다 강..
1. 쌍둥이 배구선수가 학폭 가해자였다는 폭로로 소란하다. 중학생 때부터 동료 여럿을 때리고 부모를 욕하고 돈을 뜯고 칼로 협박도 했다니 기가 막힌다. 대회 나가 성적만 내면 모든 게 용서되는 작금의 엘리트 학교 체육이 이런 괴물을 빚은 게 아닌가. 어린 학생에게 사회성과 인성 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못한 부모와 지도자들도 호되게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그런 걸 관행이란 이름으로 용인하고 어쩌면 조장하기도 했던, 금메달 지상주의 대한민국 전체가 반성할 일이다. 쌍둥이의 악행이 고발된 뒤로 다시 또 다른 선수 두 명이 학폭 가해자로 지목됐다. 고환을 걷어차인 피해자는 응급수술을 받아야 했는데, 사과는커녕 ‘부랄 터진 놈’이란 모욕을 받았다고 한다. 얼마나 치욕스러웠을까. 학생 때 저지른 잘못과 뉘우치지 않는 모양새는 남녀가 동일했는데, 폭로 이후의 대처는 약간 달랐다. 쌍둥이와 부모, 구단 등 관계자들은 짧은 사과문을 발표하고 침묵 속에 숨었고(무기한 출전정지라지만, 그 무기한이 ‘언제고 때만 되면’이란 뜻임을 누가 모르겠는가), 다른 선수들은 잘못을 인정하고 스스로 남은 기간 출전을 포기하겠다고 말했다. 아직 결정된 바는 없지만 여론도 조금 다른 듯하다. 쌍둥이는 영구제명이 공공연하게 거론되지만, 남자 선수들에겐 유보적이다. 결국 대중은 잘못도 중요하지만, 가해자들의 반성하는 태도를 더 중요한 판단 근거로 삼은 게 아닌가 싶다. 2. 서울시장 후보로 나선 나경원 전 의원에겐 원정출산이란 의혹이 있었다. 그녀가 입원했다는 라치몬트 산후조리원 하루 입원비가 얼마라는 것까지 뉴스를 타면서 원정출산은 기정사실이 됐다. 나 후보가 결국 출생증명서와 출입국 기록을 공개하면서 그것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필자는 발표 당시 출생증명서 위조는 상상하기 힘들다, 그런 간 큰 의사는 없다고 말했는데, 반론도 만만찮았다. 세상엔 별별 의사가 다 있고, 나경원 정도의 권력이라면 위조도 가능하다는 의견이었다. 나는 그때 당신의 우려와 의혹을 충분히 이해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위조와 거짓을 보아왔기 때문에. 하지만 시대가 바뀌었다. 아무리 집권당 원내총무 출신 4선 의원이라 해도 출생증명서라는 공문서를 위조할 수는 없는 세상이 됐다고 믿고 싶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흘린 피와 땀, 그 많은 희생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의심할 수는 있지만, 그런 의심을 이해하지만, 의혹만으로 사람을 단죄할 수는 없다. 내가 김어준을 마땅찮게 생각하는 이유도 그것이다. 의혹을 제기할 수는 있다. 하지만 자기가 제기한 의혹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으면 잘못을 사과해야 한다. 그러지 않기 때문에 나는 김어준을 언론인이라고 부르지 않고, 우리 편으로 여기지도 않는다. 3. 칼럼을 쓰는 사이 백기완 선생 부음을 들었다. 민주운동 1세대 어른들이 모두 돌아가셨구나 싶은 비통함과 동시에 리영희, 신영복, 백기완, 김대중으로 대표되는 민주화 운동을 되새겨 본다. 민주화 운동은 결국 사회변혁운동이고, 그렇다면 운동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이어야 한다. 운동은 기념되어서도 안 되고, 박제될 수도 없다. 학폭 가해자들의 태도에 주목하면서 엘리트 체육의 대대적인 변화를 촉구하는 여론이 만들어지는 것과 비록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라 해도 증거를 제시하면 수용하고 의혹을 거두는 것이 이 시대의 작은 운동은 아닐까. 오믈렛을 만들려면 달걀을 깨야 한다는 말이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온다. 우리가 깨야 할 달걀은 또 무엇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