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기신문 = 황기홍 기자 ]
새 학기 시작을 앞두고 학교 안전 문제와 입시·교육과정 변화로 인한 불확실성 증가로 학생, 학부모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대전 초등학교 학생 피살사건을 계기로 불거진 학교 안전 이슈에다가 입시제도 등 교육 환경이 어느 것 하나 안정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정부와 지역 교육청 등 교육 당국의 신속한 대책 마련으로 새 학기 교육 시스템을 완비해야 할 것이다. 교육 환경의 불확실성이 학생과 교육자들의 안정감을 크게 해치고 있다. 경기신문 취재에 따르면 내달 4일 2025학년도 1학기가 시작되지만, 개학 전부터 이어진 각종 사건 사고와 교육과정 변화로 학교 현장에는 우려가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 10일 대전 서구의 한 초등학교에서 정신이 온전치 못한 40대 교사가 학교에 재학 중이던 1학년 학생을 살해하는 충격적 사건이 발생했다. 교육 당국은 해당 사건이 방과 후 돌봄 시간에 발생했다는 점에 주목해 대책 마련에 속도를 내고 있으나 대책이 미흡하다는 지적은 끊이지 않고 있다. 특히 임용시험에서부터 ‘고위험 교사’를 거른다는 방향의 정책은 사회적 낙인효과로 인한 부작용, 실효성에 대한 의문 등으로 발표 단계에서부터 교원단체, 일부 학부모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경기도
1795년 윤2월 9일, 조선왕조 통틀어 가장 장엄한 7박 8일의 정치 퍼포먼스가 시작됐다. 양력으로 환산하면 3월 29일로 매화꽃이 한창인 봄이었고, 길가 여기저기에는 농사일을 시작한 백성들이 바삐 움직였다. '원행을묘정리의궤(園行乙卯整理儀軌)'(1796)에 수록된 행렬 그림인 반차도(班次圖)에는 1,779명의 인원과 779필의 말이 등장하고, 정조의 친위대인 장용영(壯勇營)을 비롯하여 군사 4,500여 명을 합하면 6천 명을 훌쩍 넘는 거대한 규모였다고 한다. 권위주의 시대는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정조의 효심만을 부각시키며 정치적 의미를 축소하고자 했다. 하지만 민주주의 시대인 요즘도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은 정치적으로 계획되고 정치적으로 해석된다. 대통령의 결정이 국가와 국민의 삶에 미치는 힘이 그 누구보다도 지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물며 권력이 혈연을 통해 승계되던 조선에서는 어떠했겠는가?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할아버지 영조(재위: 1724~1776)에 이어 1776년 3월 10일에 임금의 자리에 올라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를 외친 지 20년이 다 되어가는 시점이었다.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환갑잔치를, 자신이 펼치고자 했던
‘우(迂)’는 우여곡절(迂餘曲折)의 첫 글자이다. 우여곡절은 일상에서 상투어처럼 쓰이는 사자성어이다. 쓰기에 따라서는 고급스런 느낌도 준다. 국어사전에서는 ‘여러가지로 뒤얽힌 복잡한 사정이나 변화’로 풀이해 놓았다. 상투어로 보인다는 건, 말의 뜻이 자못 심오한데도 그런 것 별로 의식하지 못하고 그냥 기능적으로만 쓴다는 뜻이다. 현대인의 약점이기도 하다. 한자 ‘우(迂)’는 잘 쓰지 않는 한자다. '한자 자전'에서 이 글자를 찾으면 ‘멀다’라는 뜻으로도 나오고, ‘에돌다’라는 뜻으로도 나온다. 그런데 ‘멀다’라는 뜻이나 ‘에돌다’라는 뜻은 그야말로 서로 멀지 않다. 사촌쯤 되는 친밀한 뜻이다. ‘에돌다’라는 말을 국어사전에서 다시 찾아보면, ‘곧바로 나아가지 않고 멀리 피하여 돌다’로 풀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迂)’가 지닌 ‘멀다’라는 뜻에는 단순히 거리가 멀다는 뜻보다는 그 어떤 대상을 정면으로 다가가지 않고, 오히려 그걸 멀리 두고 돌아서(피해서) 가려 한다는 뜻이 숨어 있다. ‘우회(迂回)’라는 말이 떠오른다. 곧바로 가지 않고 멀리 돌아서 가는 것이 ‘우회(迂回)’이다. 이 한자어에 대응하는 고유어가 ‘에돌다’임을 확인할 수 있다. 살아
[ 경기신문 = 황기홍 기자 ]
또 터졌다. 시대적 비극인 대형 전세사기 사건을 막겠다고 내놓는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요란한 대책들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수원시 일대에서 또 70억 원 규모의 피해가 발생했다는 소식이 불거졌다. 변명의 여지 없이, 당국이 추진하고 있는 정책들이 허술하기 짝이 없다는 얘기다. 실효성이 확실히 담보된 예방책을 하루빨리 실행해야 한다. 나라의 미래인 젊은이들을 한순간에 생지옥으로 몰아넣는 전세사기 범죄에 언제까지 이렇게 질질 끌려다닐 작정인가. 수원시 일대에서 또 70억 원 규모의 전세사기 피해가 발생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피해자 대부분은 20~30대 사회초년생으로 1억 원이 넘는 전세보증금을 잃고 개인회생을 준비하는 등 피해가 극심한 것으로 나타났다. 경기신문 취재에 따르면 지난 6일 한 인테리어 업자가 사기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그는 수원시 팔달구 우만동과 인계동 일대에서 전세사기를 일으킨 혐의를 받고 있다. 피의자가 소유한 우만동 원룸 건물에는 총 27세대, 인계동 투룸 건물 2채에는 총 38세대가 거주하고 있다. 입주민 모두 1억 원 이상의 전세보증금을 지불한 만큼 총피해 금액은 약 78억 원에 달한다. 전세사기 피해자 대부분은 20~30대 사회초년생들이
정치는 진실을 추구하지 않는다. 정치는 허위와 비밀을 ‘정당하게’ 활용하며, 이로써 권력이 목적으로 했던 ‘더욱 고귀한 바’를 달성하면 그만이다. 진실은 취사 선택된다. 역사에는 거짓 선동을 반복함으로써 권력을 쟁취, 유지, 확대한 정치적 사례가 숱하게 많다. 선동은 얼마나 매력적인가. 허위 정보, 고정관념, 폭력적 환상, 공포가 반복되며 정교화될 때 우리는 처음에는 거짓이라고 인식했던 메시지조차 진실로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우리는 진실에 관심이 없다. 진실은 어렵고 드물다. 그러니 많은 경우 심지어 민주적 국가에서도, 권력자가 진실을 추구할 유인은 없다. 권력자에게는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보다 더 쉬운 수단이 얼마든지 있다. 권력이 진실 추구를 표방한다면 어떨까. 이는 성공하기 힘든 목표인데, 진실성을 판단하는 주체의 자율성을 통제하려는 열망을 통제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진실과 허위를 판단하는 권력 앞에 진실이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가. “무엇이 진실인가?”라는 물음에 권력은 필요에 따라 다른 답을 내놓기 십상이다. 언론은 진실 추구를 목적으로 한다. 이 또한 녹록하지 않다. 2016년 트럼프 선거본부를 이끌었고, 트럼프 정권의 백악관 수석 전략가를 지냈으
지난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 선포 이후 거의 3개월이 흐르는 현재 대한민국은 민주제도의 후퇴를 목격하고 가슴을 졸이며 대통령 탄핵 과정을 지켜보며 완벽하지 않지만, 그동안 이룩해 놓은 민주제도의 회복을 바라고 있다. 물론 탄핵을 반대하며 자신들의 사적 이익을 추구하며 헌법을 무시하는 어리석은 세력들도 있긴 하다. 이들의 대부분의 행동양식은 강약약강을 기초로 하기에 정권이 바뀌면 그들의 주류세력은 사라질 것이다. 물론 정신적으로 아픈 사람들은 어느 정도 남아있긴 하겠지만. 중요한 것은 이런 일련의 사태로 인해 한국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일상이 더욱 팍팍해졌다는 것이다. 국내 한 일간지가 인용한 미국의 유명 경제지의 기사 내용을 보자: 미 보수경제지 ‘포브스’는 지난 6일 ‘윤석열의 필사적인 곡예가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살인자(Killer)인 이유’란 제목의 분석 기사에서, 한국 경제에 엄청난 손실을 초래한 비상계엄을 한 마디로 ‘지디피 살인자’로 표현했다. 기사는 말미에 섬뜩한 문장으로 끝난다. “윤 대통령의 이기적인 계엄령 사태가 초래한 값비싼 대가는 한국인 5,100만 명이 시간을 두고서 분할해 지불하게 될 것이다.” 이렇듯 현재 우리
[ 경기신문 = 황기홍 기자 ]
새벽이 열리면 산에 오릅니다. 오른 산에는 벌써 사람으로 가득합니다. 들뜬 눈동자들이 한 곳을 바라봅니다. 저물었던 해가 산 너머에서 다시 떠오릅니다. 지고 뜸과 상관없이 해는 같은 해입니다. 달라진 게 있다면 새로운 하루의 시작이라는 믿음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시간조차 헌것과 새것이 있다고 믿습니다. 믿음은 진리보다 쉽게 전염되어서 돌이키기 힘듭니다. 새로운 날이 시작되었다는 믿음, 그 믿음에 전염된 사람들이 동쪽 하늘을 바라보고 섰습니다. 나 또한 전염된 눈빛을 다독이며 같은 방향으로 향합니다. 산인지, 오름인지, 새로움인지, 태양인지..... 분명치 않은 대상을 향해 사람들은 해묵은 마음의 짐을 벗어 던집니다. 벗어 던진 짐들이 바윗덩이가 되어 산비탈을 굴러 내려갑니다. 오르다 오르다, 끝내 굴러떨어지고 마는 시지프의 바윗돌 같습니다. 어쩌면, 시지프의 바위는 신화 속에만 존재하는 헛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쇠똥구리를 보면서 느낀 부끄러움도 그래서일 것입니다. 굴리는 방향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뒷발로 쇠똥을 굴리는 녀석과 나는 닮았습니다. 녀석과 내가 이르고자 하는 삶의 정상은 몇 덩이의 쇠똥을 굴려야 도달할 수 있을까요. 굴리고 또 굴린다고 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