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여수'검색결과
상세검색방송작가란 직업을 택한 것은 ‘수 틀릴 때 확 때려치울 수 있고 돈 떨어지면 바로 일자리를 얻는데 용이해서’ 였다. 물론 인정받는 위치에 있어야 가능한 일이지만 그건 어느 직업이나 마찬가지일테고. 일을 쉬면 바로 저가 비행기표 검색에 들어갔다. 단 사흘이라도 가족, 직장의 일원이 아닌 자연인으로 떠돌다 돌아오면 터질 듯 에너지가 충전되었다.그 힘으로 글쟁이의 지옥을 견디었다. 그런데 코로나. 앞이 안 보이는, 사방이 벽인 작금의 세상, 행사도 만남도 취소, 취소, 취소다. 집구석에 있는 날이 많아지면서 조울증 환자처럼 감정기복이 심해졌다. 안다. 응급치료법은 햇빛과 산책. 혼자 나와 갈 데가 특별히 있을까. 대부분 좀 걷다 카페를 찾아 들어간다. 문제는 나의 까탈스러움이다. 음악 강의를 하는 사람이라 젊은층을 타깃으로 트는 대중가요, 팝송같은 유행가가 꽝꽝 울리는 곳에는 5분도 못 앉아 있는다. 또 볼펜 하나를 사도 컬러, 디자인을 보는 패셔니스트 성향이 있어(재수 없어 할까봐 감추고 산다) 상업적이고 감각 없는 공간도 불편하다. 한구석에 자기계발서나 여성잡지류가 꽂힌 책장을 발견하면 또 엉덩이가 들썩인다. 결정적인 것은 커피맛. 김밥집은 김밥이, 설렁탕집은 설렁탕이 맛나야 하듯 커피집은 커피맛이 최우선. 단가 때문에 질 낮은 콩을 쓰거나 장사가 안돼 콩이 묵은 경우, 또 기계관리가 부실한 등의 경우, 커피맛으로 들통 난다. 특히 나같은 커피매니아에게는! 아, 또 있다. 음악, 인테리어, 커피맛, 이 삼종세트가 맘에 들어도 손님이 많아 시끌시끌하면 그것도 오래 못 견딘다. 대개 책이나 노트북을 들고 가 작업을 하기 때문이다.(그래서 개인 카페에서는 오래 작업이 힘들다) 코로나 시국을 타서 내 사는 파주의 이름난 카페는 대부분 다 가본 듯 하다. 그러나 가져간 책 열장도 못 넘기고 커피만 들고 나온 경우가 많다. 커피값은 또 싸기나 한가. 누굴 탓하겠는가. 내 까탈 때문인 것을. 그러던 중 파주출판단지 근처 다세대 주택 사는 지인집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가로수에 간판이 가려진 작은 카페를 발견했다. 내 집 가까이 이런 카페가 있었나, 생각하며 들어서는 순간 커피콩 볶는 내음과 함께 덥친 저음의 더블베이스의 소리. 바이올린으로만 들어왔던 사라사테의 지고이네르 바이젠이란 곡이었다. 울적한 기분 때문이었을까. 더블베이스의 활이 심장을 그어대는 듯했고 콧날이 시큰하더니 눈물이 차올랐다. 실연한 여자처럼 주문 않고 곡이 끝날 때까지 앉아있는 별난 손님을 수작업으로 커피콩을 볶던 주인은 기다려준다. 연주자가 누굽니까? 는 질문에 CD플레이어 앞의 케이스를 건네준다. 에드가 메이어(Edgar Meyer). 미국출신으로 요요마, 힐러리 한과의 협연을 통해 세계에 알려진 더블베이스 연주자이자 작곡자. 60년생이니 환갑이 넘었겠다. 에드가 메이어를 알게 된 것만으로 반나절의 우울이 날라갔는데 받아든 커피맛까지 깊다. 화가부부가 운영하는 카페의 무채색 벽면에는 그들의 그림 몇 점과 만만찮은 독서이력을 드러내는 예술이론서, 소설, 철학서들이 빽빽하다. 행복해졌다. 다음 회는 에드가 메이어 집중탐구 보고서가 될 듯하다. (인터넷창에서 www.월드뮤직.com을 치면 소개된 음악을 유튜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한 남자의 눈물을 두고 난리다. 지난 10일, 북한 노동당 창건 75주년 기념 열병식에서 연설 도중 눈물을 보인 김정은 국무위원장 얘기다. 언론에서는 눈물쇼, 악어의 눈물 등 의심과 비난 표현이 홍수를 이뤘다. 눈물과 그의 손목명품시계를 엮고, 눈물과 전략무기 앞에서 지었던 웃음을 엮어 가짜눈물로 몰았다. 그러나 내게는 눈물 때문에 벗은 그의 안경이, 연설문 옆의 하얀 손수건이, 스무 차례 가까이 나온 인민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 우리를 향한 ‘사랑하는 남녘 동포들’이라는 표현이 더 크게 보이고 들린다. 김 위원장의 눈물에 북녘 한 남자의 수줍은 웃음이 겹쳐 보인 까닭이다. 평생 못 잊을 노래를 알게 하고 들려준 사나이. 북한을 두 번 다녀왔다. 두 번 다 방송 취재 때문이었는데 그를 만난 것은 첫 방문이었던 2007년이었다. 여러 방송사의 취재진 열 몇 사람이 한 팀으로 묶여 평양과 평안남도 농촌을 3박4일 취재하는 일정이었는데 갈색제복의 참사 두 사람이 우리를 안내했다. 참사 직책은 우리로 치면 차관급인 고위직이며 둘 다 김일성 대학 출신 엘리트라고 북한을 여러 번 드나든 동행 기자가 일러주었다. 그런데 내 눈에는 안내자라기보다 감시자로 보였다. 일행 앞뒤로 자리해 끊임없이 한 사람, 한 사람의 행동거지를 ‘스캔’했다. 이동 중의 허락 없는 인터뷰, 허락 없는 촬영, 허락 없는 개인 행동은 모두 엄금이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이동 중 버스 옆자리에 참사와 나란히 앉게 되었다. 화난 이처럼 앞만 보고 있는 그에게 어색함을 덜기 위해, 또 눌러둔 호기심도 발동돼 이것저것 물어댔다. 대부분 답변이 네, 아니오다. 그런데 ‘북한에도 노래방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갑자기 발끈한다. 남한에 있는 거라면 북한에도 다 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내친 김에 ‘ 노래방 가면 뭘 주로 부르시는가?’를 물었다. 참사는 잠시 생각하더니 ‘심장에 남는 사람’이라고 답했다. 들어본 적 없는 제목이 심장을 툭 건드린다. 감정을 내비치지 않던 그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리는 것에 한 번 더 심장이 툭. ‘그 노래를 듣고 싶다’ 는 나의 청에 참사는 그날 저녁 일정에 ‘노래방 체험’을 넣어주었고 심지어 첫 마이크를 잡고 그 노래를 들려주었다. 노랫말이 너무 좋아 아이돌 보는 듯한 내 시선을 의식해 소년처럼 수줍게 웃기까지 했다. 인생의 길에/ 상봉과 리별/ 그 얼마나 많으랴/ 헤어진대도/ 심장 속에 남는 이 있네/ 아 그런 사람 나는 못 잊어/ 오랜 세월을 같이 있어도 기억 속에 없는 이 있고/ 잠깐만 봐도/ 심장 속에 남는 이 있네/ 아 그런 사람 나는 귀중해 노래는 심장에 화인처럼 박혔다. 다녀온 여행지는 여러 모습으로 기억된다. 못 잊을 풍경, 사람, 혹은 사건..... 북한은 내게 ‘ 24시간 공무집행 중 사담 금지’라는 간판을 얼굴에 달고 다니던 한 사내의 입에서 사랑노래제목이 나온 순간으로 기억된다. 김정은 위원장의 눈물을 맑게 보고 싶었던 것은 눈물 너머 ‘심장에 남은 그 사람’이 겹쳐 보인 때문이다. ※인터넷창에서 www.월드뮤직.com을 치면 소개된 음악을 유튜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어떤 질문은 독한 술처럼 잠시 휘청이게 한다. 예를 들면 ‘다시’라는 부사를 넣은 질문이 그렇다. 다시 어머니가 살아오신다면, 다시 아이를 키운다면, 다시 사랑을 하게 된다면…. 그런 기습 질문 앞에 보여주는 모습들은 어쩜 그리 비슷할까. 대개 잠시 말을 잃는다. 눈빛이 아득해진다. 그리고 한숨, 혹은 헛한 웃음,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이 생에 불가능한 판타지를 펼친다. 그 끝이 눈물인 경우도 많다. 종종 월드뮤직 강의 마지막 곡으로 들려주고 관객과 대화를 나누는 노래가 있다. 포르투칼 파두 가수 베빈다(Bevinda)의 ‘Ter Outra Vez 20Anos(다시 스무 살이 된다면)’ 월드뮤직을 좀 안다하는 이들에게도 생소한 베빈다를 소개하는 이유는 파두의 선입견을 깨기 위해서다. 파두하면 파두의 여왕 아말리아 호드리게스(Amalia Rodrigues 1920~1999)를 떠올리고 그녀의 히트곡 ‘검은 돛배’나 ‘어두운 숙명’처럼 검은 숄을 걸치고 어둡고 흐느끼는 목소리로 노래하는 파디스타를 떠올린다. 그런 이들을 위해 베빈다를 호출한다. 1961년 포르투칼에서 태어났으나 세 살이 되던 해 프랑스로 건너간 베빈다는 샹송으로 가수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나 그녀의 몸에 흐르는 파두의 피는 라틴음악과 재즈로 이끌더니 결국 포르투칼로 끌고 가 파두가수로 재탄생시킨다. 베빈다의 파두는 월드뮤직의 용광로 프랑스에서 만난 세상의 여러 음악, 악기의 영향으로 전통 파두와 다른 면모를 보인다. 33세에 발매, 세계적으로 히트한 첫 앨범 ‘파툼(Fatum)’ 의 수록곡들은 파두 전통 기타인 기타하 포르투게사에 첼로, 콘트라베이스, 신시사이저 등을 가미한 쿨한 목소리의 파두를 들려준다. 젊은 세대도 팝송처럼 즐길 수 있는 목소리다. 그 앨범에서 뽑아 들려준 곡 중 하나가 ‘Ter Outra Vez 20Anos(다시 스무 살이 된다면)’이었다. ‘내가 만약 스무 살이라면/ 그때 그대를 사랑했듯/ 다시 사랑하리/ 그대와 나눈 언약/ 그 입맞춤 저버리지 않으리/ 장미를 깨물며 그대 기다렸듯…아 얼마나 슬픈가/ 그대는 나의 꿈, 내 안의 것만으로 행복하다 했는데/ 외면하고 돌아섰던 내가 너무 부끄러워/ 세월이 흘러 당신 머리에 눈이 내리고/ 우리 삶은 허물어져 버리고’ 가사를 들려주면 서서히 청중들의 시선이 공간을 떠버린다. 베빈다도, 파두도, 포르투칼도 밀려난다. ‘다시’갈 수 없는 스무 살, 돌아간다 생각만으로 설레는 스무 살, 회한만 사무치는 스무 살. 눈빛들은 내게 그렇게 읽혔으나 오역인지 알고 싶었다. 이백 자 원고지에 몽당연필 침 묻혀가며 쓰는 흑백필름 속 착한 학생처럼 중년의 남녀들이 달뜬 모습으로 스무 살로 돌아간다. 다시 스무 살이 된다면, 불같은 사랑을 해보겠다. 돌아오지 않는 여행을 가보겠다. 죽어라 공부를 해보겠다. 나는 묻는다. 지금 그 길을 가면 안 되는지. 되는 것부터 해본다면. 안되는 이유들이 백 가지 천 가지 쏟아진다. 다시 묻는다. 스무 살 때 놓친 이유도 그와 같지 않으셨는지. 우리가 그리워하는 스무 살의 다른 이름은 ‘무모함’ 아닐는지. 100세 시대, 무모함의 유효기간도 연장되지 않았을까. 인터넷창에서 www.월드뮤직.com을 치면 소개된 음악을 유튜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속내를 드러내기 전에 일단 일명 트바로티로 불리며 성악가수에서 트롯가수로 거듭난 김호중 씨에게 죄송하다는 말부터 해둔다. 올해 초, 한 방송사에서 히트 친 트롯경연대회 시리즈를 전회 몰입 감상한 친구가 심야에 전화해 4위한 김호중씨에 대한 격한 팬심을 토로했다. 동영상 검색으로 그를 찾아본 나의 일성은 ‘뭐야? 비디오 가게 아저씨같이 생겨 갖구!’ 였다. 한마디로 외모가 내 스타일이 아니라는 말이며, 그 탓에 노래도 들어오지 않는다는 막말 소감이었다. 그런데 신통한 주술처럼 그때 잠깐 들은 목소리가 귀에 걸려버렸고 이후 그의 모든 노래를 찾아듣는 팬이 되어버렸다. 지금은 영업하지도 않는 ‘비디오 가게 아저씨’ 운운하며 외모로 속단했던 가벼움을 반성한다. 어쨌든 김호중 씨는 트롯으로 얻은 인기를 지렛대로 여러 방송에 출연, 성악가수 시절 부른 오페라, 대중이 원하는 팝송, 월드뮤직까지 두루 들려주는 전천후 가수로 활약 중인데 어느 날 가요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를 불렀다. 함께 듣고 있던 친구가 ‘저 노래, 스페인곡 번안한 거잖아?’라고 아는 체를 한다. 포르투칼의 파두 가수 베빈다(Bevinda)의 노래 ‘이제 됐어요(Ja Esta)’가 원곡이고 이를 양희은 씨가 번안해 불렀다는 것이다. 사실은 거꾸로다. 2002년, 내한공연한 포르투칼 가수 베빈다는 우연히 양희은 작사, 이병우 작곡의 이 노래를 듣고 ‘파두(Fadu)의 느낌’이 있다며 번안해 불러 지구촌 히트곡을 만들었다. 가사도 거꾸로다. 양희은 씨의 작사는 청춘을 보내버린 이의 사랑의 회억에 대한 내용이라면 베빈다의 번안가사는 청춘을 강타한 사랑의 열병에서 그만 벗어나고 싶다는 내용이다. ‘어느 햇빛 쏟아지던 날, 당신은 내 곁을 떠났어요/ 텅 빈 침대를 남겨두고 매정하게 떠났죠/ 나는 몹시 울었어요/ 하지만 이제 됐어요/ 더 이상은 아프고 싶지 않아요/ 당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 사랑은 당신과 함께 떠났어요’ 베빈다를 매혹시킨 ‘파두의 느낌’이 궁금해진다. 파두(Fadu)는 숙명,또는 운명이라는 뜻의 라틴어 파툼(Fatum)에서 온 단어로 프랑스의 샹송, 이탈리아의 칸소네처럼 포르투칼의 대중가요다. 파두의 노랫말에는 유럽의 땅끝 나라 포르투칼의 지역적 숙명, 그 숙명에 기대 살았던 뱃사람들의 애별리고(愛別離苦)가 담겨있다. 가족을 먹여살리기 위해 배를 탄 남자들의 무사귀환을 바라던 여인들의 애타는 기다림, 만선의 기대를 저버리고 어부들의 죽음을 알리는 검은 돛을 달고 돌아오는 빈 배를 보며 무너지는 가족들. 여성 파두 가수들은 검은돛을 떠올리게 하는 검은 드레스를 입고 열두 줄 포르투칼 기타인 기타하 포르투게사(Guitarra portuguesa) 선율에 맞춰 노래를 부른다. 베빈다도 내한 공연 때 검은 의상을 입고 관객에게 검은 포도주잔을 돌리는 퍼포먼스를 했다. 신세대 파두가수 베빈다는 파두의 여왕 아말리아 호드리게스(Amalia da piedade rebordao Rodrigues 1920- 1999)처럼 흐느끼듯 절규하듯 부르지는 않는다. 양희은 씨의 원곡 노랫말처럼 쓸쓸하고 애잔한 느낌이다. 인생을 반 살아버린 세대나 젊은 세대나 모두 사로잡는 목소리다. 김호중 씨의 노래도 그랬다. 가수의 목소리에는 타고난 소리와 함께 과거 삶이 묻어있다. 할머니 손에 자랐던 외로운 성장기와 오랜 무명을 지난 그의 목소리는 코로나로 고립되고 앞날의 불안에 떠는 서민들에게 위로를 준다. 최근 과거사로 곤혹을 치르고 있는데 부디 그의 노래가 파두에 담긴 숙명처럼 못 듣게 되는 일이 없기 바란다. 김호중이 부른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와 양희은의 원곡, 그리고 베빈다에 의해 월드뮤직으로 재탄생한 ‘이제 됐어요(Ja Esta)’를 비교감상해 보길 권한다. (인터넷창에서 www.월드뮤직.com을 치면 소개된 음악을 유튜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막이 내렸다. 일행만 아니었으면 객석에 혼자 남아 조명 꺼진 무대를 보며 꿈같이 지난 한 시간 반을 음미하고 싶다고 생각하는데 뒷자리에서 들려오는 소리. ‘그런데 왜 연극 제목이 돈데 보이래?’ 지난 16일을 마지막으로 서울 왕십리의 소월 아트홀에서 닷새간 올린 연극 ‘돈데 보이(Donde Voy)’이야기다. 젊은층에게는 낯설겠지만 ‘돈데 보이’는 20년 전,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 ‘배반의 장미’ 삽입곡으로 소개돼 당시 불황에도 10만장 넘는 음반이 팔려 화제가 된 노래다. 스페인어를 모르니 잔잔한 기타 선율에 맞춘 애절한 목소리가 딱 ‘님아 나를 버리고 떠나지 마오’의 느낌이라 지레 사랑타령으로 생각했고 노래의 히트로 양산된 경박한 유머들에 웃기도 했다. 남자친구에게 밥값 뒤집어씌울 때 쓴다는 ‘돈 대! 보이’. 뭐 이런 식이다. 뒷날 노래의 유래와 뜻을 알게 된 뒤 그 전과(?)에 화끈거렸다. 돈데 보이를 부른 미국가수 티시 이노호사(Tish Hinojosa)는 이름과 외모에서 짐작되듯 멕시코 이주민의 딸이다. 돈데 보이는 우리 말로 ‘어디로 가야 할까요’ 정도의 뜻이고 가사는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미국 국경 넘는 멕시코인들의 공포와 밀입국자로서 살아가는 외로움’에 대한 내용이다. 잠깐 들여다보자 희미한 새벽, 달려가는 그림자/ 붉은 노을 저 하늘 나래/ 태양이여, 부디 나를 비추지 말아줘/ 국경의 냉혹한 밤/ 가슴 속에 느껴지는 이 고통은/ 쓰라린 사랑의 상처/ 당신의 품이 그리워/ 당신의 키스와 열정이/ 어디로 어디로 난 어디로 가야하나/ 사막을 헤치며 도망자처럼/ 어디로 가야 하나 연극 ‘돈데 보이’는 돈 벌기 위해 미국 국경 넘은 멕시코인들처럼, 백년 전인 1905년 멕시코로 떠났던 조선인 1033명의 실화를 다룬 작품이다. 1905년이 어떤 때인가. 제국주의 열강의 혓바닥이 조선을 향해 널름거리고 일본의 식민지 야욕이 을사늑약으로 본색을 드러내던 때였다. 당시 일본은 농지를 뺏기 위해 소위 ‘토지조사사업’을 실시, 소작농들을 날품팔이로, 걸인들로 전락시켰다. 굶주림에 시달리던 조선인 1033명은 ‘세상 반대편 땅 멕시코라는 땅에 가면 삽으로 돈을 푼다’는 일본인 거간꾼 말에 속아 4년 계약으로 이민선에 오른다. 그러나 한 달간의 고된 항해 끝에 도착한 멕시코 에네켄 농장에서 그들을 기다린 것은 조국에서도 겪지 못한 노예의 삶이었다. 뙤약볕 아래에서의 종일 노동, 할당량을 재촉하며 내리치던 가죽채찍, 아내는 물론 자식까지 끌어들인 가족노동 등을 겪으며 4년 계약도 마치기 전 도망가다가 병 들어서, 맞아서, 죽어나갔다. 살아남은 이들에게도 약속한 품삯은 주어지지 않았고 만신창이 돼 귀국길을 찾은 그들에게 전해진 건 고국이 식민지가 돼 나라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비보였다. 결국 멕시코와 쿠바 등 남미 이곳저곳 떠돌이 신세가 된 그들은 그 와중에도 나라를 되찾겠다고 독립자금을 모아 보내고, 한글학교를 세워 자식이 자신의 나라를 잊지 않게 했다. 연극의 마지막 대목에서 눈물을 쏟은 게 나뿐일까. “금의환향은 아니더라도 부모, 형제 사는 고국 땅을 다시 밟는 게 소원이었을 그들. 그러나 1033명 중 돌아온 이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멕시코 이민자의 애환 담은 노래 돈데 보이가 내 나라 1033명의 멕시코 아리랑으로 화한 순간이기도 했다. 돈데 보이는 티시 이노호사의 젊은 목소리도 권하지만, 대만가수 치유(Chyi Yu)가 영화 ‘말레나’ 배경음악으로 부른 영어가사의 눈물(Tears)도 괜찮다. (인터넷창에서 www.월드뮤직.com을 치면 소개된 음악을 유튜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한 온라인 상담코너의 ‘공주병 시어머니’에 대한 며느리의 고민토로가 독자들을 ‘뿜게’했다. 시댁방문 때마다 60대 나이의 시모가 ‘본인의 미모 칭찬’을 너무해서 진실과 아부 사이에서 극한 갈등을 겪고 있다는 사연이다. 착 달라붙는 의상, 온몸의 찰랑대는 액세서리 등으로 튀는 차림은 ‘애써 외면’으로 넘기겠는데 ‘아가~ 사람들이 뒷모습만 보고 처녀래’ ‘나보고 모두 이영애 닮았대’ ‘모두 나를 공주라고 부르는 게 너무 힘들구나’ 식의 자찬에 시댁방문이 스트레스라는 얘기다. 공주병하니 그 시어머니를 무색하게 하는 음악인이 떠오른다. 캐슬린 배틀(Kathleen Battle). 미국의 1940년대 시골, 가난한 가정, 흑인부모라는 배경은 딱 밑바닥 인생으로 가버리기 십상의 조건인데, 탁월한 재능은 그녀를 세상 중심으로 데려갔다. 음악교사의 도움으로 신시내티 음대를 졸업한 배틀은 세계적인 지휘자 제임스 레바인,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의 눈에 들어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원이 된다. 미국인 최초로 영국판 토니상인 로렌스 올리비에상, 다섯 차례의 그래미상 등을 수상하며 제시 노먼, 바바라 핸드릭스와 함께 3대 흑인 소프라노로 불리웠다. 재능과 미모, 성공까지…. 어찌하여 신은 한 인간에게 모든 것을 몰아주었을까. 하는 찬탄과 질시를 날려버리는 사건이 일어났으니 94년, 도니제티의 오페라 리허설 중 해고 당한 일이다. 그 일로 명성에 덮여있던 그녀의 공주병 행태가 줄줄이 폭로되었다. 내용이 가관이다. 공연 리허설 때 자신을 ‘쳐다보는 게 싫다’고 지휘자만 빼고 모두 나가도록 요구한 일, 동료 소프라노의 분장실이 더 마음에 든다고 그녀의 소지품을 복도에 내동댕이쳐버린 일, 그리고 연주 여행 중 걸핏하면 호텔을 바꿔달라고 생떼를 부렸는데 그 이유가 호텔 벨보이가 자신을 쳐다봤다거나 식사에 완두콩이 나왔다는 것, 또 호텔벽지가 마음에 안든다는 등이었다나. 공연 리허설 때의 지각은 하도 잦아 지각대장 루치아노 파발로티가 왕좌를 물려주었다고 한다. 지각에 관한한 이름 빼면 서운할 마리아 칼라스도 공연만은 준수했는데 공연 세 시간 전에 출연취소 통보를 한 일은 그녀의 악명을 드높였다. 클린턴 취임식 때 초대받았는데 보내준 리무진 길이가 짧다고 승차를 거부했었다는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10년 전인가. 내한해 LG 아트센터에서 공연했던 배틀은 이 모든 이야기가 낭설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매니저, 협연자와 싸워 혼자 입국하더니 호텔에서는 전등, 가구 등이 마음이 안 든다고 방을 바꿔 달라하고, 뷔페 마감 후 유유히 나타나 직원들이 새로 조리하게 만들었다. 공연 리허설 때는 조명불만 등의 이유로 공연취소협박을 일삼더니 정작 공연에서 갈라진 목소리로 관객들을 실망시켰다. 그것도 반주자 탓으로 돌렸다는 후일담이 전한다. 신은 그녀에게 불세출의 재능과 미모, 성공은 주었지만, 그것을 끝까지 누릴 수 있는 인격을 빼버렸다. 내가 캐슬린 배틀을 알게 된 것도 그녀의 노래가 아닌 성악계에 회자되는 그 공주병 스토리들이었다. 호기심에 음반을 구해 들었는데…. 아! 노래 한 곡에 그녀의 모든 공주병이 용서되고 말았다. 괴팍한 성질머리에도 일흔 나이까지 세계 무대에서 그녀를 찾는 이유도 알 듯했다. 공주병 이미지를 잠시 지우고 ‘이 세상 사람의 것이 아닌 듯한 ’ 그녀의 목소리를 접해보시라. 배틀이 부른 월드뮤직도 많다. 스페인 민요 요람의 노래(Cancion de cuna), 브라질 작곡가 빌라 로보스의 ‘브라질풍의 바흐 5번’과 멜로디아 센티멘탈 (Melodia sentimental)을 추천한다. (인터넷창에서 www.월드뮤직.com을 치면 소개된 음악을 유튜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독일어에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라는 단어가 있다. 우리말 쌤통과 통하는 말로 ‘불행이 불행을 위로한다’는 심리가 담겨있다. 기분이 울적할 때 ‘인생 망가진 주인공’의 영화를 골라보는 내 심보를 이해하게 해주는 말이다. 어제 본 미국영화 ‘와일드(Wild/2014년 개봉)’도 그래서 골랐을 것이다. 어머니의 죽음, 이혼등으로 마약에 빠져 허우적대던 여주인공이 악마의 코스 4285㎞의 미국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CT)를 완주, 다시 살 힘을 얻는다는 이야기인데 그녀가 힘든 고비마다 흥얼대던 노래가 귀에 남아있다. 팝 명곡인 ‘엘 콘도르 파사(El Condor Pasa)’. 그녀는 그 노래를 탄생 배경을 알고 부른 것이 아닐까. 지옥 같은 삶을 위로받고자 더 극악한 지옥을 살다 간 노래 주인공을 호출한 것 아니었을까. 1533년, 인구 수백만 명이 살던 잉카제국(지금의 남미 페루)은 총부리를 앞세워 쳐들어온 고작 수백 명의 에스파냐인들에 의해 무너지고, 이후 200년간의 폭정에 시달린다. 농민 혁명가 호세 가브리엘 콘도르칸키(Jose Gabriel Condorcanque)는 침입자가 죽인 황제 투팍아마루의 복수를 하겠다고 이름까지 투팍아마루 2세로 바꾸고 반란군과 함께 에스파냐에 대적한다. 그러나 맨몸 군대는 스페인의 선진무기에 처참하게 패하고 투팍아마루 2세는 체포돼 처형 당하고마는데 능지처참(팔다리를 4마리의 말에 묶어 몸이 찢기어 죽게 만드는 사형법)으로 죽은 시신은 부활의 미신조차 꿈꿀 수 없게 여러 곳에 분산돼 파묻혀진다. 잉카에는 날개를 한 번 펴면 그 그림자로 웬만한 봉우리를 모두 덮는다는 독수리과의 콘도르라는 새가 있는데 ‘위대한 영웅이 죽으면 콘도르가 된다’는 설이 전해진다. 투팍아마루 2세도 콘도르가 되어 자신들을 지켜줄 것이라고 믿었던 잉카의 후예들은 그 바람을 민요에 실어 전해왔다. 미국의 사이먼 & 가펑클은 60년대, 우연히 프랑스 파리에서 듣게 된 남미 그룹 ‘로스 잉카스(Los Incas)’의 낯선 선율에 꽂혀 영어로 노랫말을 만들어 ‘엘 콘도르 파사’를 발표, 크게 히트시킨다. 이 페루 민요에 혹한 음악인이 그들만이었겠는가. 수많은 음악인들의 귀에 꽂힌 이 음악은 세계적으로 4000여 버전의 멜로디와 300여 개의 번안 가사가 붙여져 월드뮤직이 되었고, 2004년 페루는 이 노래를 국가문화유산으로 선포했다. 잉카 영웅 투팍아마루 2세는 어찌보면 우리나라 동학혁명을 이끈 녹두장군 전봉준과 닮아 보인다. 그리고 식민시대의 아픔까지도. 문득 사이먼 & 가펑클의 팝송 가사 말고 잉카 민요의 원래 가사가 궁금해진다. 하늘의 주인이신 전능한 콘도르여/우리를 안데스 산맥의 고향으로 데려가 주오/ 잉카 동포들과 함께 살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소/그것이 나의 가장 간절한 바람/전능하신 콘도르여/ 잉카 쿠스코 광장에서 나를 기다려 주고/ 우리가 마추픽추와 와이나픽추를 거닐 수 있게 해주소서 엘 콘도르 파사의 가사까지 되짚어보니 ‘남의 불행으로 나의 불행을 위로 받으려’ 한 내 생각이 얄팍하게 느껴진다. 사욕을 넘어선 위대함은 개인의 불행을 눈처럼 녹인다. 영화 와일드의 여주인공도 엘 콘도르 파사를 쌤통 심리로 읊조린 게 아니라 잉카의 위대한 영웅의 영혼과 접선한 것이 아닐까. 어쨌든 영화를 보고 기분은 나아졌다. 엘 콘도르 파사는 사이먼 & 가펑클의 노래도 좋지만, 그 듀엣에게 영감을 준 원곡인 페루작곡가 다니엘 로블레스의 피아노곡(1933년 연주), 그리고 독일 오디션 프로그램 ‘다스 수퍼탈란트’에 나와 스튜디오를 발칵 뒤집어놓은 에콰도르 출신 거리악사 레오 로자스의 팬풀룻 연주(2011년)를 추천한다. (인터넷창에서 www.월드뮤직.com을 치면 소개된 음악을 유튜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월드뮤직은 사연 없는 곡이 드물다. 노래 하나가 태어나 세상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월드뮤직’의 반열에 오르기까지 기가 막힌 이야기를 품고 있는 곡들이 많다. 대부분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다. 모든 예술은 고통의 처방전이라는데 월드뮤직도 예외가 아니다. 제일 먼저 소개할 곡은 ‘백만송이 장미’. 심수봉씨가 만든 노래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번안곡이다. 그런데 이 한 곡의 노래에 러시아, 조지아, 라트비아 등 세 나라가 얽혀있고 위대한 화가와 시인, 소설가의 격정이 담겨있다. 이야기는 1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러시아 밑에 위치한 조지아에 부모 없이 자라 학교 문턱도 못 밟아본 가난뱅이 화가 니코 프로스마니(1862~1918)가 살았다. 니코는 그의 마을에 순회공연 온 프랑스 여배우 마르가리타를 보고 한눈에 반한다. 공연이 끝나면 떠나버릴 마르가리타에게 마음을 전하고 싶어 고심하던 니코는 그녀가 꽃을 좋아한다는 소문을 듣고 바로 집과 화구, 그리고 피까지 팔아 장미꽃을 사 모은다 그리고 그녀가 묵은 호텔 앞을 백만송이 장미로 뒤덮고 구애했으나 여배우는 ‘마음만 받고’ 조지아를 떠나버린다. 니코는 그와 동시대에 살았던 화가 고흐, 고갱처럼 가난과 고독, 병마에 시달리다 쉰 넘긴 나이에 굶어죽고 만다. 이 처절한 사랑 이야기는 국경을 넘어 퍼져나갔고 러시아 소설가 콘스탄틴 파우스토프스키(1892~1968)에 의해 단편으로 만들어졌고 이 소설을 읽고 감명 받은 같은 나라 시인 안드레이 보즈네센스키(1933~2010)에 의해 시로 쓰여진다. 이 시는 발트해 연안국 라트비아의 ‘마리냐가 준 소녀의 인생’이라는 곡에 가사로 입혀지고 이를 가수 알라 푸가체바(1949년 생)가 불러 ‘밀리언 알리 로즈’(Million Allyh Roz) 라는 대히트곡이 탄생된다. 삶 전체가 비극이었던 무명화가 니코는 죽은 뒤에야 그림이 재평가되어 국민 화가로 추앙 받게 된다. 지폐의 초상화 인물이 되었고 그의 이름을 딴 와인이 있으며 그가 살았던 마을 시그나기는 ‘사랑의 마을’로 불리며 세계 관광객을 불러 모은다. 여기까지 알고 러시아 시인이 지은 노래 가사를 들여다보면 한 줄 한 줄이 아프다. 한 화가가 살고 있었네/ 그의 작은 집엔 캔버스가 전부였다네/ 화가는 여배우를 사랑했다네 꽃을 사랑하는 여배우를/ 그는 자신의 집을 팔고 그림들과 피도 팔았다네/ 그리고 그 돈으로 바다도 덮을 만큼 장미꽃을 샀다네/ 백만송이 붉은 장미를 창가에서 그대는 보고 있는지/ 사랑에 빠진 한 사람이 그대를 위해 자신의 인생을 꽃으로 바꾸어 놓았다네 ‘백만 송이 장미’의 탄생지 라트비아에 가면 거리의 악사가 발트 현악기 캉글래스로 이 노래를 연주해 관광객의 발길을 붙든다고 하는데, 니코 프로스마니의 나라 조지아의 국립박물관에는 그가 마르가리타를 그린 그림이 걸려있다는데. 가보고 싶지 않으신지. 아, 사랑은 노래를 부르고 노래는 여행을 부른다. 라트비아 원곡, 러시아 번안곡, 그리고 니코 프로스마니의 비통한 영이 씌인 듯(?) 부르는 JK김동욱 목소리로 들으며 노래여행으로 대신할 수 밖에! ※인터넷창에서 www.월드뮤직.com을 치면 소개된 음악을 유튜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베사메 무초 몰라요? 백만송이 장미는요?” ‘월드 뮤직’을 낯설어하고 어려워하는 이들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몇 년 전, KBS 라디오 방송에서 ‘한국인이 사랑하는 월드뮤직’을 조사한 적이 있었다. 1위부터 5위까지를 보면, 베사메 무초, 포르 우나 카베자, 엘 콘도르 파사, 백만송이 장미, 크레네스(백학). 동영상을 튼다면 모두 흑백일 듯한 오래된 노래들이다. 그렇다고 월드뮤직이 나이든 이들만의 음악은 아니다. 에일리가 베사메 무초를 부르고 국카스텐 하현우가 백만송이 장미를 불러 히트시킨 예처럼 젊은 가수들이 끊임없이 그 먼 나라들의 옛노래를 다시 불러 히트시킨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한다는 ‘베사메 무초’는 멕시코 노래로 2차세계대전 당시, 전쟁터로 가기 위해 헤어지는 연인들 사이에서 퍼지며 인기를 얻었다. 영어로 번역하면 ‘Kiss me much’ 즉 ‘키스를 많이 해주세요’라는 뜻이니 행운이 따르지 않는다면 이생에서 마지막일지 모를 연인들의 애타는 심사에 불을 붙였다. 가사를 살짝 들여다볼까. ‘나에게 키스해줘요. 아주 많이 키스해줘요/ 마치 오늘 밤이 마지막 밤인 것처럼/ 나에게 키스해 줘요 아주 많이 키스해줘요/ 이 잠이 지나고 나서/ 당신을 잃게 될까 두려워요.’ 그런데 이 노래를 만든 이는 멕시코 피아니스트이자 작곡자인 콘수엘로 벨라즈케즈(Consuelo Velazquez 1924~2005)인데, 그녀 나이 16세 때 길가에서 키스하던 연인을 보고 만들었단다. 그런데 노래를 만들 당시는 물론, 25세까지 키스를 해본 적이 없었다나. 어쨌든 첫사랑의 설렘이 아닌 사랑과 인생의 희노애락애오욕을 몇 바퀴 돈 이가 나직히 읊조리는 듯한 이 노래를 첫 키스도 못해본 무명의 10대 소녀가 만들었다니…라고 찬탄하기 전에 알아둘 것이 있다. 스페인 작곡자 엔리크 그라나도스(Enrique Granados 1867~1916)의 피아노 작품 고예스카스(Goyescas)를 듣다보면 베사메 무초의 음률이 흘러나온다. 벨라즈케즈는 이 곡에서 영감을 받아 베사메 무초를 만들었다. 고예스카스란 곡도 영감의 원천이 있었다. 스페인 화가 고야(프란시스 고야 Francisco Goya 1746~1828)의 풍경화들. 내게 고야는 스페인 민중 봉기 등 전쟁의 참상을 주로 그린 화가로 기억됐는데 고예스카스 음악을 통해 일상풍경의 걸작도 많았다는 것을 알았다. 조선 정조 때 문장가인 유한준은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라고 했다. 이렇게 월드뮤직과의 만남은 단순히 한 곡의 음악을 더 알게 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베사메 무초처럼 세계 2차대전과 스페인 민중봉기라는 그 시대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게 되고 귀에 설었던 작곡가 그라나도스의 음악, 제대로 몰랐던 화가 고야의 세계를 새로 만나게 한다. 노래가 공부로 이끈다. 내게 월드뮤직기행은 황홀한 독학의 세계다. 참, 베사메 무초는 하늘의 별처럼 많은 세계의 스타들이 불렀지만 내가 추천하고 싶은 이는 남자가수 이탈리아의 안드레아 보첼리(Andrea Bocelli), 여자 가수로는 아프리카 섬나라 카보 베르데의 세자리아 에보라(Cesaria Evora), 캐나다의 다이아나 크롤(Dianan Krall)이다. ※www.월드뮤직.com을 검색하면 소개된 음악을 유튜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돈데 보이(Donde Voy). 요즘 뜬금없이 30년 전 드라마 삽입곡이었던 라틴 포크송을 한숨 섞어 흥얼거린다. ‘나는 어디로 가야할까요’ 라고 번역되는데, 시간만 나면 배낭 매고 훌쩍 나라 안팎을 떠도는 게 유일한 호사였던 내게 코로나로 발 묶인 현실은 우울하다. 답답한 마음에 동네 서점 나들이가 잦아졌는데 그제 구석진 곳에서 뜻밖의 책을 발견했다. 탱고 입문서인데 저자가 20여년 전 방송 인터뷰 일로 만났던 시인이었다. 읽고 쓰고 음악 듣는 게 삶의 전부라 은둔형 외톨이처럼 사는 게 좋다던 그가 세상에! 탱고댄서로 변신해 있었다. 게다가 탱고학원을 운영하고 탱고영화까지 제작했다는데 한마디로 탱고전도사가 됐다는 얘기다. 시작은 ‘한 영화의 배경음악이었던 탱고가 불을 붙이면서’란다. 한 곡의 음악이 삶을 바꿔버린 것이다. 오래된 독서모임의 멤버였던 대학 무용과 H교수도 그랬다. 발레 동작이 몸에 배어 말도 동작도 우아, 반듯했던 H교수는 음악에 카스트라도 있는 듯 발레 배경음악인 서양 클래식을 최고라 했다. 그러던 그녀가 어느 해 세밑 송년회를 마치고 귀가하던 택시 안에서 취중에 들은 플라멩코 한 곡에 꽂혀버렸다. 술기운 때문은 아닌 듯, 이후 플라멩코 연주를 찾아듣기 시작하더니 춤까지 입문, 지난 달에는 발표무대를 가졌다. 내 눈에는 반듯, 우아, 고상한 발레무대에서보다 꽃무늬 드레스에 머리에 꽃 꽂고 추던 플라멩코 무대에서의 그녀가 더 행복해보였다. 내 경우도 방송작가 외길을 걷다 음악 강의를 하게 된 계기가 한 곡의 음악이다. 집시 음악이었다. 20년 전 KBS 드라마 ‘푸른 안개’에 흐르던 집시 밴드 젤렘(Djelem)의 바이올린 활이 심장을 그어버린 것. 한동안 젤렘의 리더, 바이올리니스트 세르게이 트로파노프의 연주에 빠져 살았다. 시인과 교수, 그리고 내 인생을 바꾼 탱고, 플라멩코, 집시음악. 모두 월드뮤직이다. 혹시 음악이라면 서양 클래식이나 미국, 영국 팝음악을 취미로 즐기고 노래방에서는 가요, 트로트를 즐기며 살아오지 않았는지. 그런 우리에게 월드뮤직은 묻는다. 이 지구상에 약 200개의 나라가 있고 인류사에 수 천개 민족이 존재해왔는데, 또 그 나라와 민족만큼의 다양한 역사, 문화, 언어가 만들어낸 수많은 음악들이 있는데 우리는 평생 몇 종류의 음악을 만나고 가는 것일까. 음악 한 곡이 인생을 바꿔버리기도 하는, 그 경이로운 세계를 모르고 살아온 것이 억울하지 않은가. 그러나 월드뮤직이 ‘세상의 모든 음악’ 인만큼 어디서부터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난감하다는 사람이 많다. 천천히 가보자. 시작은 우선 앞에 소개한 ‘세 사람의 인생을 변하게 한 음악’부터. 시인을 탱고에 빠지게 한 영화는 영국의 샐리 포터 감독,주연의 탱고 레슨(The Tango Lesson)인데 영화 OST 중 샐리 포터가 직접 작사, 노래하고 첼리스트 요요마가 연주한 ‘I am you’를 추천한다. 물론 세상 좋아져서 유튜브로도 감상 가능하다. 반듯, 우아, 고상한 H교수 머리에 꽃 달게 한 플라멩코 추천곡은 스페인 출신 피아니스트 다비드 페냐 도란테스가 만들고 연주한 집시들의 노래 오로브로이(Orobroy)인데 반드시 끝까지 들으시라. 감동을 넘어 잠시의 감전 상태를 실감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집시음악은 몰도바 출신의 세르게이 트로파노프가 고향을 그리며 만들고 연주한 몰도바(Moldova). 이 세 곡만으로도 당신을 ‘헤어나오기 힘든’ 월드뮤직의 늪에 빠뜨릴 자신이 있다. (유튜브에서 ‘김여수의 월드뮤직기행’을 검색하면 소개한 곡들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경기신문의 오피니언 면이 새로운 필진들과 함께 더욱 풍성해집니다. 경험과 지식을 갖춘 각계 전문가들과 쉽고 유익한 글로 독자 여러분을 만납니다. 유튜브 채널 ‘이덕일 역사 tv’를 운영하고 있는 이덕일 (사)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이 매주 월요일 ‘이덕일의 역사를 말하다’를 통해 흥미롭고 적확한 역사를 전달합니다. 매주 수요일마다 찾아가는 안휘 소설가의 ‘안휘의 시시비비’는 날카로운 논조로 정치·사회적 이슈를 예리하게 짚어낼 예정입니다. ‘파리, 그리고 서울’에서는 최인숙 고려대학교 평화와민주주의연구소 연구교수가 한국과 프랑스의 정치·사회현상을 분석합니다. 임선일 경기도교육연구원 연구위원은 ‘임선일의 오지랖’으로, 이강석 전 남양주시 부시장의 ‘이강석의 경기돋보기’을 통해 세상을 보는 새 창을 엽니다. ‘경기시론’에서는 김영호 e-뉴스라인 대표와 한세대학교 윤준영 교수가, ‘교육현장에서’는 강유진 냉천초등학교 교사가 새로 참여합니다. ‘안보의 창’으로는 이일환 경기대학교 정치전문대학원 겸임교수, 송건영 단국대학교 국방정책및리더십연구소 개원연구원의 글을 선보입니다. ‘통일사색’에서는 김형석 전 통일부 차관과 이성원 남북체육교류협회 부회장이 남북 관계에 대한 이슈를 되짚어봅니다. 김병우 다울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 안영노 안녕소사이어티 대표, 장금용 ㈜한국기업연구원 대표, 서재교 우리사회적경제연구소 대표이사가 ‘전환의 시대, 사회적 경제’를 통해 사회적 경제에 대한 이야기를 흥미롭게 풀어갈 예정입니다. 부천청소년법률센터장을 맡고 있는 김광민 변호사가 ‘법률칼럼’의 새로운 얼굴로 독자들을 찾아갑니다. 매주 월요일 연재되는 전문가 칼럼으로는 배은주 경희다강한의원 원장의 ‘아침보약’과 가수 손스타의 ‘손스타의 스타트랙’이 연재됩니다. 김현대 한양대학교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의 ‘미디어칼럼’ 방현석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의 ‘문화산책’, 고향갑 극작가의 ‘난독일기’가 새로운 시각을 제시합니다. ‘월드뮤직’ 콘서트를 기획해 온 김여수 작가가 ‘세상의 모든 음악’을 주제로 한 음악 칼럼을 선보입니다. ‘생활에세이’에는 전민식 작가, 고형권 작가, 김경희 수필가가 합류해 독자님들의 감성을 두드립니다.
화묵회 회원들의 열정을 감상할 수 있는 전시가 열린다. 화묵회는 수원미술전시관 제2전시실에서 24일까지 여덟 번째 ‘華墨會(화묵회)’ 전을 연다. 김동율, 김여수, 송은순, 오길종 등 11명의 작가가 모여 우리 주변 곳곳의 정취를 그렸다. 그 중 작가 경효순은 ‘시대의 두 얼굴’ 이라는 작품에서 고층 아파트와 판자촌을 그려 빈곤과 풍요를 표현했다. 상대적 빈곤은 인간의 내면에 내재된 욕심과 탐욕이 만들어 낸 것임을 역설적으로 나타냈다. 작가 김보선은 ‘봄날의 그리움’ 이라는 작품에서 행복했던 봄날의 그리움을 표현함으로써 따스한 봄날에 대한 추억에 젖어들게 만든다. 또 작가 김종년의 ‘소나무’ 작품은 척박한 땅에서도 굳건히 뿌리를 내리는 생명력을 뽐내며, 굽이치고 옹이 박힌 모습으로 삶을 위로하고 희망을 전한다. 작가 이형숙은 ‘기억 저편에선’ 이라는 작품에서 옛 동네 골목길을 표현해 우리 마음의 향수를 불러 일으킨다. 출품 작가 = 경효순, 김동율, 김보선, 김여수, 김종년, 김태조, 송은순, 오길종, 이형숙, 최강로, 김승호(문의 : 031-228-3647)
“나라 없는 설움을 어떻게 말로 다하겠나. 요즘 사람들이야 정부가 잘하니 못하니 하지만 그 시절에는 불만을 털어놓을 나라조차 없었어.” 독립운동이 한창이던 1939년 당시 인천상업고등학교(현 인천고등학교)에 입학한 열여덟 정홍택(87) 옹은 일본인 교장의 끝없는 멸시속에서 나라없는 설움을 뼈저리게 느꼈다. 매일 오전 조회시간마다 한인 학생들에게 ‘대 일본제국에 대한 충성’을 강요하며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학생들에게는 매질과 구박을 일삼았다. 정 옹은 일제의 만행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오로지 나라를 되찾는 길 밖에 없다며 한인 동급생인 고(故) 정태윤, 가재연, 고윤희, 김여수와 함께 ‘오륜조’라는 비밀조직을 만들었다. 정 옹은 어렸을 적 이웃사촌이었던 심훈 선생의 가르침대로 인천·경기지역 학교를 돌며 징병반대와 창씨개명 반대 운동을 시작했다. 1941년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교졸업장을 빼앗길 뻔한 정옹은 어렵사리 서울상업은행에 들어가 낮엔 직장인으로 밤에는 독립운동에 열정을 쏟아냈다. 그해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과의 전쟁이 시작되면서 정 옹과 오륜조는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는 확신 속에 독립운동에 박차를 가했다. 하지만 1943년 징병반대운동의 내용이 담긴 전단지를 가지고 전국을 돌던 송대필(당시 일본 명치대학생) 동지가 충청북도 영동경찰서에 붙잡히면서 정 옹의 양손에도 수갑이 채워졌다. “일본 순사들과 마주쳤을 때 이제 죽겠거니 했지. 차디찬 감방에서 골병이 들어 사람이 죽어나가도 눈하나 깜작하지 않는 시절이었거든.” 이루 말할 수 없는 모진 고문을 버텨낸 정 옹은 2년 여간의 옥고를 치른 끝에 1945년 8월17일, 대한민국이 광복을 맞은지 이틀이 지나서야 자유의 빛을 볼 수 있었다. 정 옹은 당시 심훈 선생의 시 ‘그날이 오면’을 빌려 “그날(독립)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육조 앞 넓은 길을 울며 뛰고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 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둘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라고 광복의 기쁨을 표현했다. 정 옹은 “그 때의 말할 수 없는 그 기쁨과 소중함을 요즘 사람들은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 같다”며 “나라라는 가장 큰 울타리속에 국민들이 있다는 사실을 절대 잊어서는 안될 것”이라고 당부했다. 한편 정 옹은 독립운동을 하다 출소했다는 것을 입증할 만한 증빙 자료가 없어 60여년 동안 국가 유공자로 지정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동안 꾸준히 광복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국가 유공자로 인정해 줄 것을 요구해온 정 옹은 지난해 2월 꿈에 그리던 국가 유공자로 인정받았다.
문화재청은 25일 문화재위원회를 대폭 개편, 새로운 문화재위원과 전문위원 명단을 발표했다. 이번 개편은 '문화재위원회 규정'의 개정에 따른 후속조치로, 문화재위원은 59명에서 86명으로, 전문위원은 122명에서 173명으로 각각 늘었다. 문화재청은 이번 개편에서 문화재위원 64명을 새로 위촉하는 등 위원회 심의의 일관성을 유지하고 관련 분야의 대표성.전문성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고 밝혔다. 또 문화재 제도분과를 신설, 분과가 모두 8개로 늘어났다. 이들 위원 및 전문위원은 26일부터 2년 임기로 문화재의 보존관리 및 활용에 관한 사항을 조사.심의하게 된다. 다음은 문화재위원 명단-. ▲건조물문화재분과 = 김동욱(56.경기대 교수), 김동현(66.한국전통문화학교 석좌교수), 김봉건(47.국립문화재연구소장), 김수진(64.서울대 교수), 김은영(66.한국과학기술연구원 연구위원), 박언곤(60.홍익대 교수), 장충식(62.동국대 교수), 천병옥(67.한국전통의장연구소장), 최석원(54.공주대 총장), 최효승(60.청주대 교수), 홍성목(68.서울대 명예교수) ▲동산문화재분과 = 강경숙(63.충북대 교수), 김리나(61.홍익대 교수), 김상옥(56.통도사 성보박물관장), 남문현(61.건국대 산업대학원장), 안휘준(63.서울대 교수), 유홍준(54.명지대 교수), 윤용이(56.명지대 교수), 이건무(56.국립중앙박물관장), 이동환(64.고려대 교수), 이오희(55.호암미술관 문화재보존연구소장), 장충식(62.동국대 박물관장), 최승희(66.서울대 교수), 홍선표(54.이화여대 교수) ▲사적분과 = 고혜령(57.국사편찬위원회 연구관), 김동욱(56.경기대 교수), 김정동(55.목원대 교수), 노중국(54.계명대 교수), 이성무(66.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장석하(50.경일대 교수), 전형택(58.전남대 교수), 정영화(61.영남대 교수), 정재훈(65.한국전통문화학교 석좌교수), 조유전(61.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 최규성(62.상명대 교수), 한영우(65.서울대 교수) ▲무형문화재분과 = 고승관(60.홍익대 교수), 김명자(58.안동대 교수), 김지희(64.대구가톨릭대 교수), 박범훈(55.중앙대 교수), 박성실(59.단국대 교수), 양선희(50.세종대 교수), 윤근(57.중앙대 교수), 윤미용(57.국립국악원장), 이성천(67.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이종철(59.국립민속박물관장), 이필영(50.한남대 교수), 임돈희(59.동국대 교수), 임학선(53.성균관대 교수), 전경수(54.서울대 교수), 최래옥(63.한양대 교수), 추원교(53.한양대 교수) ▲천연기념물분과 = 구태희(59.경희대 교수), 김수진(64.서울대 교수), 김익수(61.전북대 교수), 김학범(51.한경대 교수), 송준임(54.이화여대 교수), 양승영(65.경북대 교수), 윤일병(68.고려대 명예교수), 이경준(58.서울대 교수), 이광춘(59.상지대 교수), 이은복(60.한서대 교수), 이인규(67.서울대 명예교수), 이흥식(61.서울대 교수) ▲매장문화재분과 = 김동현(66.한국전통문화학교 석좌교수), 배기동(51.한양대 교수), 심정보(53.한밭대 교수), 이강승(54.충남대 교수), 이건무(56.국립중앙박물관장), 이인숙(54.전 경기도박물관장), 이현혜(54.한림대 교수), 임효택(59.동의대 교수), 정영화(61.영남대 교수), 조유전(61.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 최병현(55.숭실대 교수) ▲문화재제도분과 = 김여수(67.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사무총장), 박은정(51.이화여대 교수), 서승완(65.한국법제연구원장), 송쌍종(61.서울시립대 세무대학원장), 이규방(53.국토연구원장), 이영욱(46.한국문화관광정책연구원장), 이인호(67.한국국제교류재단 이사장), 임승남(52.대한불교 조계종 기획실장), 황윤원(49.한국행정연구원장) ▲박물관분과 = 강내희(52.문화연대 정책기획위원장), 김봉렬(45.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김종규(64.한국박물관협회 회장), 박성래(63.한국외대 교수), 박현수(58.영남대 교수), 심정자(59.한남대 교수), 안휘준(63.서울대 교수), 오용자(63.성신여대 교수), 이강승(54.충남대 교수), 정양모(69.전 국립중앙박물관장), 지순임(56.상명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