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한 예능프로에서 달인이라는 호칭으로 익숙한 개그맨 김병만 씨가 발목부상이라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완벽에 가까운 피겨 스케이팅 솜씨를 보여줬다. 심각한 통증에도 놀라운 연기를 보인 그의 모습은 보는 이에게 커다란 감동을 주었고, 결국 심사를 보던 김연아 씨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려야 했을 정도로 가슴이 찡한 장면이었다. 필자 역시 최근에 TV를 보면서 이토록 깊은 감동을 받은 기억은 없다. 그러나 의사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무척이나 걱정이 되는 상황이다. 이미 김병만 씨는 2002년 촬영을 하다가 양쪽 발목 인대가 끊어지는 사고를 당했고, 2008년에는 부분 골절로 뼈 조각 일부가 떨어져 나왔는데도 그냥 방치하고 방송 출연을 강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병만 씨의 투혼은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지만, 우리 몸은 나이가 들수록 젊었을 때 무리했던 후유증을 앓게 된다. 만일 과거 2차례의 부상 때 충분한 치료를 받았다면 이번에는 쉽게 스케이팅 연습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국 야구의 전설이었던 최동원 선수도 한국 시리즈 7게임 중에서 5게임에 등판해서 4게임을 완투하며 팀의 우승을 일궈 냈지만 그 후에는 인상적인 플레이를 못 보여주다가 은퇴한 적
제4회 경기국제 보트쇼 4일째,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2011 ASIA MARINE CONFERENCE 해양레저 강습 프로그램이 있었다. 첫 번째 강사로 대한민국 최초 해양대 탐험팀 최종열 탐험가가 나왔다. 최종열 탐험가는 충청북도 제천 출신으로 내륙에서 태어나 높은 산의 정기를 받은 남자다. 바다와 거리가 먼 한 남자의 도전이 기적을 창조한 이야기가 무척이나 감동적이었다. 탐험가는 바다에서 대한민국을 만나고 싶었고, 마침내 바다에서 대한민국을 만난 최초의 탐험가가 됐다. 그는 대한민국 최초로 인천 덕적도를 출발해 제주도 끝자락 마라도, 이어도를 지나 우리의 섬 독도까지 오직 희망으로 노를 저어 2천500㎞를 73일 만에 정복했다. 최 탐험가는 바다에서 다시는 육지로 돌아올 수 없을지라도 바다를 향해 희망의 노를 저어 마침내 대한민국 바다를 가슴에 안을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작은 체구의 몸 어디에서 태양 같은 열정이 쏟아져 나올까? 산 사람이 어떻게 바다를 정복하려 했을까? 탐험가는 가지 말아야 할 곳에 가야되는 것이라며 그것이 곧 ‘도전’이라고 말한다. 바다는 때때로 어머니 가슴 같다가도 어느 순간 성난 사자처럼 변한다. 탐험은 목숨을 담보로 떠나는 것이
근당 양택동은 國展 초대작가로서 1985년부터 서예전문지 ‘월간 서예’에 ‘근 300년간의 중국 서학’과 ‘예술가 오창석 등 각각 1년씩 연재했으며, ‘애국의 창‘을 4년간 연재했고 월간 아티스트에 중국 문화의 뿌리를 5회에 걸쳐 연재했다. 이밖에도 각 신문지상에 한자학 강의와 근당의 고전 산책을 각각 65회 연재했으며 현재 한국서예박물관장과 세계서예전북 비엔나레 조직위원이자 작가 선정위원이다. -한국서예박물관장(현) -(사)대한민국현대미술대전 심사위원장 -(재)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 공모대전심사위원장 -(사)국제서예가협회한국본부이사(현)-한국현대서예연구원장(현) --(사)경기도서예대전 심사위원장
2002년 6월 15일, 그대의 탄생은 가슴 벅찬 축복이었다 지난 아홉 해, 그대, 영원히 타오르는 횃불로 눈물겹고 엄숙한 이 땅 곳곳 밝혔다 휴전선의 무거운 침묵도 북한강 치욕스런 흐름도 서민들 거칠고 깊은 주름도 남남의 갈등도 환해져 푸르른 하늘 넘치는 폭죽 웃음이었다 그날 이후 날마다 축제였다 그대, 바른 소리로 귀를 열었다 그대, 정직한 지면으로 마음을 열었다 그대, 이 땅의 두려운 예언이었다 시민의 지혜로운 눈빛으로 경기발전의 동력으로 언론창달의 기수로 모든 이의 기대이었고 모든 이의 희망이었다 그리하여 가난하고 낮은 곳에 따스한 미래를 풍요롭고 높은 곳에 사회적 책무를 힘 있고 단단한 곳에 정의의 실현을 직필로 그려온 그대 이제 새벽을 밟고 오는 새 빛으로 가슴 벅차다 - 충북 청주 출생, 1986년 <세계의 문학>을 통해 문단활동 시작 - 인하대학교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경기 화성교육장 역임 - 시집으로 <떠돌이의 노래>, <강 깊은 당신 편지>, <굴욕은 아름답다>, <부론에서 길을 잃다>, <혹독한 기다림 위에 있다>, 장시 <사당 바우덕이> 등 상재 - 현재 안성에
창간 9돌의 기쁨도 잠깐, 지방언론의 냉혹한 현실에 몸서리치게 한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지난 1년을 달려왔는가. 사회를 뒤 흔들만한 연이은 특종으로 독자로부터 사랑을 받아 왔다고 치자. 그렇다면 우리가 이렇게 고갈된 자원에 경제적 풍요로움 마저도 포기한채 1년을 버텨 왔겠는가. 경기신문은 경기·인천지역에서는 처음으로 28면 상시 발행체제를 유지해 오고 있었다. 바로 1년 전 오늘 경기신문은 32면 발행을 독자여러분들께 약속드린 적이 있다. 독자와 더불어 새시대를 열고 또 새시대에 동참한다는 뜻에서 다양한 정보를 보다 많이 독자들에게 제공하겠다는 각오도 다졌다. 그러나 그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오히려 24면으로 감면 발행하는 수모를 감수해야 했다. 시장은 우리를 그렇게 쉬운 상대쯤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재정난에 허덕이는 지방언론의 활성화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최근 경기민주언론시민연합 주최로 열린 ‘지방언론의 현황과 발전방안’이란 주제의 토론에서 이용성 한서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지방언론의 현주소를 냉혹하게 지적하고 있다. “지역신문들이 관공서의 광고수익에 의존하면서 토착세력과 예산 편성 등에 대한 감시와 견제,
대학등록금 문제가 대두된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60년대에도 소 팔고 논 팔아 공부를 가르쳤고 이것이 가계를 휘청거리게 했다. 요즘 이 문제가 불거진 이유는 학생과 학부모들의 부담을 덜어주려는 생각에서 나왔으리라 보며 여야가 큰소리로 외치는 걸 보면 좋은 방법이 나올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정치권에서 순수하게 대학생 등록금 부담을 덜어주고 싶은 의지가 있느냐다. 여당이나 야당이 내놓는 대학등록금정책은 크게는 차이가 없다. 반값등록금, 가슴에 와 닿는다. 반값만 내고 대학을 다닐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용어가 주는 의미가 매력을 갖는 것은 등록금 부담이 큰 학부모나 학생으로서는 솔깃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좋은 정책이지만 실현가능성도 검토해야 한다. 여야는 등록금 수혜범위에 차이가 있다. 경제적으로 도움을 필요로 하는 학생부터 단계적으로 혜택을 주는 방안과 아예 전체 학생을 대상으로 혜택을 주는 방안 등이다. 여기에 드는 예산은 막대하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자기 당비나 개인재산으로 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국민세금 아니면 유사한 방법으로 해결해야 하고 이는 많은 문제를 낳는다. 통계상 차이는 있지만 모든 대학생의 등록금을 반값으로 줄이는 데에 연간…
6월의 산은 바다처럼 푸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연초록 빛깔이었던 산을 여름은 잠깐 동안에 푸른 숲으로 만들었다. 이른 봄 눈부신 꽃을 피우던 산 벚나무와 다람쥐가 뛰어 놀던 갈참나무가 하늘 높이 가지를 벋었다. 하늘을 찌를 듯이 곧게 자란 소나무와 잣나무 사이로 단풍나무와 싸리나무가 고개를 내밀고 우거진 잡목들과 바위틈에서 자라는 억새풀도 푸른 산을 만드는데 한몫을 하고 있었다. 나무는 산을 참 아름답게 꾸민다. 봄이 오면 나무들은 강한 생명력으로 싹이 돋고 꽃을 피우며 여름에는 푸른 숲을 만든다. 가을에는 고운 단풍으로 새 옷을 갈아입고, 겨울에는 다시 하얀 옷으로 갈아입는다. 나무들은 얼핏 보아 아무렇게나 자라는 것 같으나 자연의 질서 속에서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며 산다. 들에 핀 들꽃 역시 마찬가지다. 들꽃은 누가 물을 주거나 가꾸지 않아도 햇빛과 공기와 비를 맞으며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들꽃들은 서로 모여 산다. 산자락을 따라 오르는 길가에는 들꽃들이 가득 피어 있었다. 가장 먼저 새봄맞이를 하던 냉이는 노란 꽃을 피웠고 연보라 빛 제비꽃이 진자리에는 토끼풀이 주저앉아 흰 꽃을 피우고 있었다. 둥근 방석처럼 퍼진 질경이도 꽃대를 세우고 자잘
사전적 의미로 ‘자기를 가르쳐서 인도하는 사람’이라는 스승은 다른 말로 사부, 선생님, 심지어 쌤에 이르기 까지 다양하게 불리운다. 나의 중고교 시절에는 학생들끼리는 영어, 수학, 공업, 상업 등 담당과목명으로만 호칭되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학창시절의 많은 스승님들이 떠오른다. 초등학교 시절의 신순남, 설창훈, 박경오, 신숙자, 박유화, 김석회 선생님, 중고교 시절 담임이셨던 이영실, 이미재, 신광주, 이영우, 이명우, 김태형 선생님 그리고 대학교, 대학원 시절 지도교수이셨던 이준구, 김태종 선생님들까지 정말 고마웠던 많은 분들의 얼굴과 말씀들이 생각난다. 별다른 의심 없이 한 말씀 한 말씀을 흡수하던 시절이었기에, 딱히 한 분만이 아니라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많은 분들의 훈육이 지금의 내 모습에 체화되어 있는 것 같다. 스승과 관련해 가장 유명한 속담은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말라’일 것이다. 스승의 절대적인 권위에 대한 표현이지만, 다른 일면으로는 그런 대우를 받는 스승으로서의 막중한 책임이 느껴지기도 하는 말이다. 정보의 생산과 유통이 그리고 사람들간의 교류가 지금보다 부족했던 예전에는 서당·학교 선생님들은 학생들에겐 거의 절대적인 존재라 할 수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