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만하면 대형 화재사고가 발생하곤 하는 경기도 지역 물류센터 건설현장의 안전불감증이 여전한 것으로 나타나 충격이다. 기억하기조차 끔찍한 화마 재앙을 겪고도 물류창고 건설현장이 안전관리 허점을 온전하게 보완하지 않은 채 ‘대형인재 화약고’처럼 남아있다는 것은 미개한 안전의식을 증명하는 것이다. 안전교육 강화는 물론 엄중한 규제·감시, 관련 법·규정의 완비가 시급하다. 경기도는 지난해 12월 20일부터 이달 10일까지 도내 물류창고 건설현장 50곳에 대해 도·시군 합동 점검을 실시했다. 물류창고 공사현장 10곳은 도에서, 나머지 40곳은 시군에서 점검하는 방식이었다. 그 결과 시스템 비계 설치 미흡 등 안전 관련 문제점 145건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문제점들은 안전 난간대 및 계단 설치 미흡이 22%인 32건으로 가장 많았고, 이어..
검찰총장에서 대통령으로 직행한 윤석열 정부의 검찰이 제1야당 대표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헌정사상 초유의 사건이다. 당연히 국회의원 불체포특권이 주목받고 있다. 현직 국회의원인 이재명 대표를 체포하기 위해서는 국회의 동의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국회의원 불체포특권은 헌법 제44조에 규정된 권리다. 국회의원의 특권이라 불리지만 국회의 특권에 더 가깝다. 불체포특권은 과거 왕권이 의회를 무력화시키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 도입되었다. 왕권이 특정 의원의 신상을 구금함으로써 의회 권력을 무력화시키려 할 때 이에 대한 의회의 방어수단이다. 즉, 왕권으로부터 의회 권력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다. 그렇기에 국회의원의 불체포특권의 본질은 국회의원이 아닌 국회의 권리다. 구속영장이 청구되자마자 이재명 대표를 향해 불체포특권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주장이 쏟아지고 있다. 하지만 불체포특권의 본질을 생각한다면 이는 이재명 대표가 판단할 권리가 아닌 국회가 내려놓을지 말지 결정할 문제다. 불체포특권은 이재명이라는 개인을 위해 존재하는 권리가 아닌, 국회의 보호를 위한 권리이기 때문이다. 왕권이 존재하던 시절, 왕권의 독주로부터 의회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었던 권리가 여태 살아있다고 비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한 권리가 삼권이 분립되고 민주주의가 발전한 오늘날 존재할 필요가 있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불체포특권은 1603년 영국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당시 영국은 스튜어트 왕조가 들어설 때였고 조선의 임금은 선조였다. 하지만 최소한 대한민국의 정치판은 그때보다 지금이 더욱 무협스러울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집권하자마자 국민의힘 대표였던 이준석이 결국 기소도 제대로 못 한 검찰의 수사 속에서 떨어져 나갔다. 이후 당대표 경선 과정에서 나경원 후보가 대통령실의 노골적인 압박 속에서 떨어져 나갔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여론조사 1위를 달리던 안철수 후보 역시 대통령실의 노골적인 압박과 소위 윤핵관들의 공격에 시달리고 있다. 다크호스로 떠오른 천하람 후보 또한 대통령실과 윤핵관으로부터 융단폭격을 당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윤석열 대통령의 신임을 받고 있다는 김기현 후보를 위한 집단행동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물론 제1야당 대표에 대한 공격은 이보다 훨씬 심각하다. 대통령의 의회 권력에 대한 노골적인 개입이고 탄압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은 1603년 스튜어트왕조 시대 영국, 선종 임금의 조선과 전혀 다른 세상이다. 하지만 적어도 대통령만은 그때보다 훨씬 전근대적이다. 여당 대표를 자신의 입맛에 맞는 이로 꼽고 제1야당 대표를 구속하려는 것은 결국 야당을 탄압하고 여당 의원들을 자신의 휘하로 만들어 국회를 장악하겠다는 의도일 것이기 때문이다. 윤석열 왕조에서 국회의원의 불체포특권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충분하다. 아직까지 의회가 대통령으로부터 보호받아야 이유 또한 충분하다.
전국동시조합장선거의 막이 올랐다. 2월 21~22일 후보등록을 마치고 23일부터 선거운동 첫 주를 소화하고 있다. 이번 선거는 총 1,347개 조합에서 3,082명이 등록하여 경쟁률이 평균 2.3대 1이라고 한다. 가장 높게는 7명이 경쟁을 하는 곳도 있고, 단일후보만 등록하여 무투표가 된 곳도 289개로 전체의 21%나 된다. 지난 선거 204개 15%에 비해 엄청난 증가다. 지난 선거 때 비슷한 규모인 1,344개 조합에서 3,475명 등록으로 2.6대 1을 기록했으니 약 400명의 후보가 사라진 것이다. 무투표 지역을 제외하면 실제로 피를 말리는 경쟁을 치를 조합은 1,058개 조합이고 2793명의 후보가 2.64대 1의 경쟁률로 지난번 2.87대 1에 비해 매우 낮은 실질 경쟁률을 나타낸 것이다. 80% 이상의 높은 투표율이라는 높은 관심을 보이는 선거에, 권한도 막강한 자리에 경쟁..
지난 1월 13일부터 경기도내 수원시, 용인시, 고양시와 경상남도 창원시에 특례시란 명칭이 붙었다. 이들 4개 도시는 모두 인구가 100만 명이 넘는 이상 대도시다. 그럼에도 큰 도시로서 대접을 받지 못했다. 사람으로 치면 어른으로 성장했음에도 옷은 어린이옷을 줬고 음식도 소량만 지급했다. 이에 대해 2021년 당시 염태영 수원시장(현 경기도 경제부지사)은 한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인구 115만의 울산시와 122만의 수원시가 있다. 그런데 115만 울산시는 광역이고, 122만 수원시는 기초시다. 중앙정부가 지원하는 건강가족지원센터라는 게 기초단위로 하나씩 있는데 울산은 5개, 수원은 1개다. 형평성에 맞나? 이제는 광역시가 아니더라도 100만 이상 특례시는 별도 기준을 적용해야 되는 게 아닌가”라면서 시민들이 받고 있는 차별이 너무 크다고 지적했..
요즘 MZ세대들은 극장에서 애국가 나오면 일어서고 대한뉴스와 문화영화를 봐야 본영화를 볼 수 있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모를 거다. 1994년까지 그랬다. 주권자로서의 국민보다 국민의 계몽과 동원이 중요시되던 국가권위주의 시대의 문화현상이다. 사회발전과 민주주의 성숙에 따라 슬그머니 사라졌다. 국민, 시민, 대중, 백성, 민중 등은 비슷한 듯 다르다. 역사 속에서 창조되고 의미가 부여된 언어라 그 단어가 힘 받던 시대의 정신을 이해해야 정확한 의미전달이 가능하다. 5,60년대 미국사회학은 대중(mass)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매스미디어 발전으로 등장한 익명적 대중이 갖는 사회적 의미와 특성을 연구하고 대중문화를 다양한 각도로 비추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70-90년대에 가장 역동적인 단어가 민중이었다. 민중은 노동자, 농민, 소상공인, 도시빈민 그리고 일부 지식인 등 피지배계층의 연합이다. 유신에 대한 저항과 산업사회의 경제적 차별에 대한 개선이 요구되면서 민중이 저항과 변혁의 주체로 떠올랐다. 지식인과 민중의 결합이 한국현대사 변혁의 큰 흐름이던 시절이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소련과 동유럽의 사회주의 체제 붕괴 이후 민중이란 말이 갖는 지배력이 점차 상실되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시민의 개념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시민은 사회공동체의 주권자이자 동시에 권리와 의무를 행하는 구성원으로서 공동체의 긍정적 가치를 구현하고자 하는 이성적 사람이다. 한국현대사에서 시민은 18세기 서구와는 달리 민주주의 가치를 구현하고자 올바른 사고를 하는 국민이라 포괄적으로 정의된다. 2000년대 들어 산업사회가 정보사회로 진행되고 사회의 중추세력으로 화이트칼라가 양산되어 중산층이 두터워지며 민중의 역할과 의미가 줄어들었다. 1989년 설립된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은 시대적 요구에 맞는 시민의 각성자 역할을 수행했다. 금융실명제, 고위공무원재산등록, 토지공개념, 지방자치제 등은 경실련이 지속적으로 제안하여 실현된 굵직한 국가정책이다. 시민운동은 시민이 주체가 되어 합법적 공간에서 사회변화와 공공선을 추구하는 의식적 집단활동이다. 환경연합과 참여연대도 역할을 했다. 지금은 교육에 의해 증가된 이성적 시민과 경제적 여유로 두터워진 중산층이 사회의 기본토대를 이루고 있다. 지향점과 가치가 사회 변혁을 통해 대안을 만들어야 했던 70-80년대와 다른 것은 당연하다. 민노총 노동자 중 대기업 노동자는 이미 경제적 중산층에 들어와 있다. 내 이익을 위한 쟁의가 사회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시민, 중산층의 손실로 이어진다면 공공선은 어디에 설정해야 할까. 집단의 이익과 사회공동체의 이익이 상충될 때 판단의 기준 문제다. 금융노조와 대기업노조 등은 이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폐일언하여 민중의 시대는 가고 지금은 시민의 시대다. 지금의 모순은 제도보다는 운용하는 사람들의 이기심과 낙후된 의식에서 비롯된다. 투쟁에 의한 변혁으로 해결하기에는 사회가 다원화되고 경제적으로 성장했다. 공동체를 위한 시민의식의 발로가 해결의 시발점이다. 정치권도마찬가지다. 민중의 시대에 변혁의 주체로, 기득권자로, 방관자로 어떠한 삶을 살아왔던 이젠 시민의 시대에 걸맞게 각자 과거에 형성된 자신의 가치체계를 점검하고 손보자. 집단의 이익이 전체 공동체에, 지금의 이익이 미래에도 이익이 되는 게 바람직하다. 시대가 바뀌면 생각도 바뀌어야 한다는 게 참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시대가 바뀌면서 생각이 바뀌고 생각이 바뀌면서 시대가 바뀌는 게 삶의 변증법 아니겠는가.
꼭 다루고 싶었다. 그러나 시의성을 잃으면 의미가 반감되는 주제들 때문에 불가피하게 뒤로 미뤘다. 두 달이 다 된 시점에서 이 이슈를 끄집어냈다.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갈수록 악화될 거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조선일보가 눈길을 끈 신년기획을 했다.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하나의 나라, 두쪽 난 국민’이란 이름으로 6일간 연속보도를 했다. 1월 3일자 《국민 40% “정치성향 다르면 밥도 먹기 싫다”》는 제목의 1면 머릿기사를 포함, 매일 2∼3면을 할애했다. 기사 내용에는 ‘정치성향이 다르면 본인이나 자녀의 결혼이 불편하다는 답도 42%에 달했다’는 조사내용도 담았다. ‘정치적 양극화가 우리 일상까지 지배하며 국가적 리스크로 떠올랐다’며 우려도 했다. 이 신문은 신년호인 1월 2일자에 윤석열 대통령의 인터뷰가 아니었다면, 신년호에 실릴 예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치 20년 전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당선자 시절 오마이뉴스와 단독 인터뷰했던 것처럼 특정 언론사와 인터뷰는 상징성을 띤다. 언론의 사회통합 기능은 고전적 가치 중의 하나다. 그런 측면에서 조선일보의 문제 제기는 적절했다. 그러나 원인 진단과 해결책은 공감을 자아내기엔 크게 부족했다. 이 여론조사를 다루는 방식이 갈등 유발형 편집이었다. 3일자 2면에 《민주당 지지층, 정권 바뀌자 “방역 잘한다” 84%→33%》라고 통제목을 달았다. 국민의힘 지지층은 24%에서 87%를 늘어 변화폭이 더 컸다. 그럼에도 민주당 지지층이 더 문제인 것처럼 부각했다. 무엇보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언론의 책임을 간과했다. 1월 5일자에 문희상 전 국회의장의 인터뷰는 “김어준·가세연 출연 정치인들 한심, 국가경영 자격 없어”라는 제목으로 보도했다. 문제의 원인을 새로 출현한 미디어로 국한했다. 국민분열 해소의 출발점이라며 사설에서 제시한 대책도 피상적이다. ‘양극단 지지층에 정치인이 영합하고 있다’거나 ‘국민분열엔 정치인과 지지층 모두에 책임이 있다’고 훈계하고 있다. 뼈대 있는 언론이라고 자처하는 전통언론의 정파성이 정치적 양극화에 가장 큰 책임이 있다. 전통언론이 역할을 바로 했다면 독자들이 유튜브나 SNS를 찾았겠나 돌아봐야 했다. 문희상 전 국회의장은 김대중정치학교장이다. 김대중 정신을 한국 정치에 심기 위해 힘을 쏟고 있다. 그가 지난해 정치학교 1기 수강생들을 위한 강의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은 선거에서 아무리 서운한 결과가 나오더라도 유권자인 국민을 탓하지 말 것을 후배 정치인들에게 당부했다”는 취지로 특강을 했다. 라디오 청취률 1위를 놓치지 않았고, 새로운 유튜브 방송 시작 4일 만에 구독자 수 100만을 돌파한 방송인과의 대담에 출연하는 정치인을 두고 ‘한심한 정치인’이라고 말하는 건 독단이다. 유권자인 청취자를 모독하는 발언이다. 구미에 맞는 발언을 해주는 취재원을 과포장해주는 것도 통합을 저해한다. 조선일보의 신년기획이 공감을 받지 못했다. 전통언론이 조장한 정파성을 조사에서 뺏기 때문이다.
일하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다고 하여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죄악이다. 노동만큼 인간을 고상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없다. 사람은 노동하지 않고는 인간적 존엄성을 유지할 수 없다. 무위도식하는 사람들이 겉치장에 그토록 애쓰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들은 그렇게 꾸미지 않으면 사람들로부터 경멸당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땀 흘려 일하며 자신이 먹을 빵을 제 손으로 얻으려 하지 않는 사람들 속에, 진정한 종교적 이해와 순수한 도덕성이 존재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존 러스킨) 지극히 확실하고 순수한 기쁨의 하나는 노동 뒤의 휴식이다. (칸트) 가장 탁월한 재능도 무위도식하면 사장된다. (몽테뉴) 공정함이란 자신이 남에게 주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남에게서 받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노동과 자신이 이용하는 남의 노동을 저울질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언제 어느 때 스스로 일할 능력을 잃고 남의 노동력을 가로채야 하게 될지 모른다. 그러므로 되도록 공정함을 잃지 않기 위해, 평소에 자기가 취하는 것보다 많은 것을 남에게 주도록 노력해야 한다./ 주요 출처: 톨스토이 『인생이란 무엇인가』
한국경제 침체에 대한 잇따른 신호음속에 한국은행이 현행 금리(3.5%)를 동결했다. 하지만 글로벌 불확실성으로 ‘고금리’의 장기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올들어 이달 20일까지 누적 무역수지 적자 규모가 186억달러를 넘어섰다. 올 50일 만의 이같은 수치는 지난해 연간 무역적자(475억달러)의 40%에 근접하는 매우 충격적인 수치다. 무역수지는 12개월 연속 적자 위기를 맞고 있는데, 이는 IMF 사태를 앞둔 1995년 1월~1997년 5월 이후 처음이다. 수출은 주력 품목인 반도체를 중심으로 수직 낙하한 반면 수입은 가스 등 에너지가 급증했다. 이로인해 한은이 23일 일단 금리 인상 행진을 멈췄지만 글로벌 여건은 추가 금리 인상을 지속적으로 압박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달 미국 경제가 고용과 물가에 이어 소비까지 강력한 것으로 나타나면서 미국의 고금리 기..
민선8기를 시작으로 시정의 최우선을 ‘시민’과 ‘민생’을 중심으로 펼쳐왔다. 2023년 연두순시 현장에서 14개 읍면동 방문을 통해 시민의 의견을 경청하였고, 발로 뛰는 민원처리를 실천하고 있다. 민생현장에서의 신속한 민원처리, 규제개선, 반도체특화, 이천쌀 소비 촉진 등 피부에 와 닿는 시책을 추진하고 있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바로 우리 모두와 함께 이천에 살고 있는 다양한 ‘가족’이다. 가족의 형태는 다양하게 변화하고 있다. 예전의 가족은 할아버지, 할머니와 부모님, 자녀가 함께 사는 형태였다면, 지금 시대의 가족의 형태는 조손가족, 한부모 가족, 주말가족, 1인 가족, 다문화 가족 등 가족의 생활방식까지도 변화하고 있어 시민의 요구에 맞춘 가족정책이 뒷받침 되어야 시민이 행복할 수 있다. 올해 가족정책의 핵심 키워드는 “가족의 다..
OECD 자살률 1위를 면하기 위해 번개탄 생산 금지라는 졸속 정책이 발표됐다. 정부는 병충해에 취약하다는 이유로 전라북도 대표 쌀인 신동진 수매를 전면 중단하고, 참동진으로 대체한단다. 게다가 난방비 폭탄에는 “안 쓰는 게 답”이라는 답을 내놨다. 도대체 국민을 위한 정책의 신중성이 보이질 않는다. 눈 떠보니 선진국이었던 대한민국이 눈 뜬 채로 후진국이 됐다. 가히 인스턴트의 나라가 아닐 수 없다. 한편, ‘50억 뇌물’ 곽상도 무죄 판결로 이 정부의 공정과 상식은 애저녁에 물 건너갔다. 법과 원칙은 법조계의 그들만을 위한 옹호의 수사학에 불과했다. “김건희 계좌, 주가조작에 활용당했다”는 대통령실의 해명은 저잣거리의 안줏거리가 됐다. 결국 민(民)이 바로서지 못하면, 민은 지배층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고대 중국에서 민이라는 단어는 한 쪽 눈을 찔러 상해를 입힌 노예를 가리켰다. 윤 정권은 국민을 고대 중국의 민의 개념으로 바라보고 있다. 국민을 섬겨야 할 대상이 아니라 지배해야 할 대상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언론도 일조했다. 언론은 권력 감시 기관이 아니라 검찰의 언론플레이를 위한 도구 역할에 충실했다. 법조기자는 당연한 것도 의심하고 취재해야 하는 신분이라는 것을 잊었다. 강자에 머리 숙이는 샐러리맨에 불과했다. 검찰이 흘리는 피의사실을 단독보도의 이름으로 생중계해 네이버 페이지 뷰를 올리기에 급급하다. 게다가 관저 이전에 천공이 개입했다는 의혹 제기에 명예를 먹고 사는 우리의 국군은 진땀을 흘려야 했다. 물론 의혹을 제기한 국회의원과 기자는 고발이 되고 수사를 당한다. 정상적인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다. 선출된 대통령이 국민을 섬기기는커녕 무속을 섬기는 세상이라면, 김기현-안철수의 탄핵 논란이 그냥 나온 얘기는 아닐 것이다. 이런 가운데, 지난 21일 윤 대통령은 기어코 제1야당, 원내 제1당 이재명 대표에 대한 체포동의 요구서를 재가했다. 헌정 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구속 영장에 물증이 없다”는 것은 보수 언론도 인정하는 팩트다. 27일 국회에서 체포동의안이 부결되더라도 검찰의 집요함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제도상으로 체포동의안 부결은 국민의 뜻이건만 정치검찰은 국민이든, 국민이 선출한 권력이든 그들의 눈 아래에 둔 지 오래됐다. 이런 문제의 해결에 보수와 진보 진영논리로는 답이 없다. 양측은 모두 무조건 이재명 대표 구속, 무조건 이재명 대표 무죄의 정치적 신념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검찰은 보수도 진보도 아닌, 검찰조직의 권력 유지에 몰두하는 괴물일지도 모른다. 유우성 간첩 사건은 이미 조작 수사로 판명된 바 있다. 변희재의 말대로 “최서원 태블릿, 대장동 비리 사건 등이 정치검사들에 의해 조작됐다”면, 이보다 심각한 범죄 행위는 없을 것이다. 수사권으로 진실을 조작하고 사건을 왜곡하는 나라에서 공정과 상식, 법과 원칙은 있을 수 없다. 검사들이 기득권 보호에만 관심을 두면, 발전적 미래를 위한 공론장은 만들어질 수 없다. 정적을 죽이는 전쟁은 여기서 끝내야 한다. 패자를 죽이면 언젠가 역으로 잔혹하게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불길한 예감을 갖고 하는 정치엔 국민의 국정 불신만 커질 뿐이다. 이래선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