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계의 큰 별이요, 국민배우라 불린 안성기가 지난 1월 5일 74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그는 다섯 살 때 아역배우로 데뷔하여 70년간 170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우리나라 3대 영화상인 청룡영화상, 백상예술대상, 대종상영화제의 남우주연상을 받아 트리플 크라운을 이루었으며, 그 외 수상 경력도 너무나 화려하다. 영화계는 특별히 고인이 주연을 내려놓기 시작했던 1990년대 후반 이후 그의 모습을 높이 산다. 조연도 흔쾌히 출연했고, 작은 역을 맡아서도 혼신을 다해 연기했다. 앞자리를 내어주고 뒤로 물러서 스스로 내리막길을 갈 때에도 그 길을 아름답게 만들었던 그였다. 그는 한결같이 후배나 스태프들의 어려움을 헤아리고 그들의 필요를 도왔다. 한국 영화계가 어려울 때 스크린 쿼터제 폐지를 위한 영화인공동대책위원장을 맡았고, 단편영화제 집행위원장으로 우리나라 독립영화의 후원자를 자처했으며, 유니세프 친선대사를 맡기도 했다. 영화인으로서의 품격을 갖추고 선한 영향력을 보인 그의 유산을 계승하겠다는 후배들의 다짐이 이어지고 있다. 이제 영화가 아닌 그의 아들 이야기를 할까 한다. 십수 년 전 한 잡지에서 안성기의 둘째 아들 안필립(1991년생)에 관한 기사를 읽었다. 그가 사진을 전공하기 위해 시카고 예술대학을 지원할 때 아버지의 표정을 담은 사진들을 포트폴리오로 제출했고, 그것으로 3만 달러 전액 장학금을 받았다는 일화였다. 유명 배우의 표정 사진이면 그 표정을 지은 배우의 공이 더 큰 게 아닌가 싶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작품 기획과 사진 표현 등은 온전히 사진작가의 능력으로 검증받았을 것이다. 가장 가까이에 계신 아버지의 모습에서 예술성을 표현해 낸 것은 아버지의 배우로서의 능력과 인품을 알아차렸기 때문일 것이다. 환하게 웃을 때 더 진하게 깊어지는 주름이 인상적인 안성기의 표정은 정말 그 자체가 예술이다. 힘들고 지쳐 아버지를 떠올리고 싶을 때면 그 사진에 담겼던 아버지의 깊은 사랑을 떠올릴 수 있지 않을까. 장례식장에서 첫째 아들 안다빈(1988년생)은 30여 년 전 아빠가 준 편지를 읽어 모든 이의 눈시울을 붉게 만들었다. ‘항상 겸손하고 정직하며 남을 사랑할 줄 아는 넓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는 편지 내용은 우리 모두에게 들려주는 듯하다. 안성기가 두 아들을 일찍이 유학 보낸 건 그들이 누구의 아들로 살기보다 스스로의 모습으로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안다빈이 2006년 미국 화단에 등단할 당시, 그는 색약을 극복한 압도적인 묘사력의 화가로 주목받았다. 화가로서는 치명적인 색약을 극복하고자 그는 색보다 형태와 질감, 빛의 유입에 따라 만들어지는 명암에 집중하는 하이퍼리얼리즘으로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갔다. 안다빈의 작품 '휴식(Repose) 2025'을 인스타그램에서 보았다. 빛을 받아 형체가 드러난 청자 앞으로 약간 두꺼운 나무판자가 놓여있고, 그 위에 메모지 같은 하얀 종이가 있는데, 그 위로 일에 몰두하다 잠시 벗어놓은 안경과 검은 가죽끈 시계가 놓였다. 그런데 안경 너머로 종이에 쓴 글씨, ‘아빠,’가 보인다. 그는 아버지가 남기고 가신 따뜻한 기억을 잘 보존하고 싶다, 한동안은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작품 속에 담게 될 것 같다고 썼다. 세상 아버지의 마음은 다 한결같을 것이다. 19세기 러시아 사회의 세대 갈등과 사상 충돌을 그린 소설, 이반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1862)'에서도 아들 바자로프는 죽음을 앞두고서야 자신의 니힐리즘이 삶 전체를 설명하지 못했고, 아버지의 사랑과 헌신이 진실임을 체감한다. 아버지의 사랑은 큰 나무와 같다. 故 안성기 배우의 영면을 빈다.
‘2025년 경기도 사회조사’ 결과 도민의 삶 만족도와 행복감이 함께 상승한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지난 2021년부터 지난해까지 도민의 삶 만족도와 행복감은 꾸준히 상승해 모두 평균 6점대를 웃돌아 전반적으로 개선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동시에 삶의 걱정 정도가 5.5점으로 과거(2021년 5.1 점·2023년 5.4점)와 비교해 소폭 상승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만족과 걱정이 동반 상승하는 난기류를 정밀 분석해 정책에 적극 반영해야 할 것이다. 경기도는 20일 ‘2025년 경기도 사회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지난해 8월 20일부터 9월 3일까지 도내 3만 1740가구, 15세 이상 도민 5만 9942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다. 이 조사 결과 도민 삶의 만족도·행복감이 모두 평균 6점대를 웃돌아 전반적인 생활지표가 개선된 것으로 나타났다. 조사에서 삶에 대한 만족도는 10점 만점에 6.3점으로서 이는 지난 2021년(5.8점), 2023년(6.2점)과 비교해 소폭 증가한 수치를 보였다. 전체 응답자 중 만족(6~10점)이 57.6%, 보통(5점)이 33.7%, 불만족(0~4점)이 8.8%인 것으로 집계됐다. 가구원수별 만족도에서는 1인 가구가 6.1점, 2인 가구가 6.3점, 3인 가구가 6.4점, 4인 가구와 5인 가구 이상이 각각 6.5점으로 조사돼 다세대 가구일수록 만족도가 높은 것으로 나타나 이채로웠다. 느끼는 행복 정도를 점수로 물은 결과는 평균 6.5점으로 집계됐다. 이 역시 지난 2021년(6.0점)과 2023년(6.4점)에 비해 소폭 증가한 수치다. 응답자 중 65.9%가 ‘행복하다(6~10점)’, 24.6%가 ‘보통이다(5점)’, 9.5%가 ‘행복하지 않다(0~4점)’고 각각 응답했다. 7점대가 16.8%, 8점대가 16.8%로 나타났다. 살고 있는 시·군 만족도는 평균 6.2점으로 집계됐다. 응답자 중 55.3%가 만족, 35.2%가 보통, 9.4%가 불만족한 것으로 조사됐다. 거주 시·군에 불만족하는 이유를 살펴보면 교통이 불편해서가 37.3%, 편의시설이 부족해서가 21.7%, 주거시설이 열악해서가 15.3%, 주차시설이 부족해서가 12.0%, 교육환경이 열악해서가 6.7%, 치안 방범이 불안해서가 3.3% 순으로 집계됐다. 조사 결과 행복 정도에 대한 수치와 걱정의 정도에 대한 수치가 동반 상승했다는 점은 놓치지 말아야 할 특이한 대목이다. 도민이 인식하는 걱정의 정도는 5.5점으로 과거(2021년 5.1 점·2023년 5.4점)와 비교해 소폭 상승했다. 이는 행복과 걱정이 삶에 동시에 혼재돼 있음을 보여준다. 걱정의 정도에 대한 질문에 응답자 44.1%가 ‘걱정하지 않는다’고 응답해 가장 많았으나 29.0%가 ‘걱정한다’, 27.1%가 ‘보통’이라고 각각 답했다. 아울러 10년 후 경기지역에 거주할지 묻는 질문에는 ‘매우 그렇다’가 25.1%, ‘그런 편이다’가 46.9%, ‘보통이다’가 20.8%, ‘그렇지 않은 편이다’가 5.7%, ‘전혀 그렇지 않다’가 1.4%로 각각 조사됐다. 응답자들은 거주지 선택 시 직장·사업 및 취업(32.5%)을 우선적으로 고려한다고 응답했다. 이어 병원·할인점·문화센터 등 편의시설(18.2%), 경제적 가치 상승(13.2%), 경제적 여건(12.1%), 교육 여건(8.3%), 공원·녹지 등 자연환경(7.3%), 가족·친인척 및 지인들이 살아서(5.9%), 기타(2.5%) 등의 순으로 집계됐다. 경기도는 대한민국의 중심이다. 경기도민의 행복도가 오르는 것은 곧 이 나라 국민의 행복 지수가 상승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행복하긴 한 데 걱정스럽다’는 건 이율배반적인 현상이 아니다. 행복을 주는 요소들이 늘어나기는 하지만, 행복이 유지될 것인지, 안전한 삶을 지속할 수 있는지에 대한 불안 역시 증가하고 있다는 뜻이다. 도민들의 이런 엇갈리는 정서를 따로 떼어내어서 정밀하게 분석하고 대안을 찾아낼 필요가 있다. 만족도·행복도가 상승하고 있으니 ‘걱정’이 커지고 있는 현상쯤은 무시해도 된다고 안일하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중심 경기도의 정책은 더 선진적이어야 한다.
우리가 전혀 모르는 아프리카 언어, 이를테면 탄자니아 등지에서 쓰이는 스와힐리어(Swahili)를 듣고, 그 말의 소리에서 어떤 느낌을 가진다면 그것은 얼마나 유효한 느낌이 될 수 있을까. 생판 모르는 말소리를 듣고 어떻게 그 의미에 다가갈 수 있겠는가. 설령 어떤 느낌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개인의 임의적인 반응에 지나지 않아서, 그 느낌을 일반화하여 공감을 요청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말소리가 동물의 모양이나 소리를 나타낼 때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 아프리카 구전 동화를 국내에 알리는 동화책이 나왔을 때, 아프리카 동물들의 움직임과 모양을 나타내는 말이 아프리카 사람들의 실제 말 그대로 소개되었는데, 필자의 느낌으로는 상당한 공감이 갔다. 물론 여기에는 코끼리나 사자나 하마나 원숭이 등을 동물원에서 보았던 나의 감각적 경험이 작용하였을 것이다. 예를 들면 스와힐리어에서는 사자의 포효를 ‘응구루마(nguruma)’라고 한다든지, 몸집이 큰 동물이 쿵쿵 발을 구르는 걸 ‘삐가 두무 두무(piga dumu dumu)’라고 한다든지, 원숭이 등이 껑충껑충 뛰는 형용을 ‘꾸루카루카(Kurukaruka)’라는 음성 상징으로 나타내는 것은, 이들 말소리를 따라해 보면 그럴 법하다는 생각이 든다. 줄루어에서 새 날갯짓 소리를 ‘푸푸(fufufu)’로 표현하는 것도, 동물들이 달리는 모습을 ‘우쿠기짐마(ukugijima)’라고 하는 데서도 느낌상 수긍이 간다. 또 이들 말소리에 문화적 맥락도 작용한다. 즉 동물은 신화와 속담에 자주 등장하며, 움직임과 모양을 묘사하는 말이 상징적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예컨대 치타의 빠른 달리기를 묘사하는 말에는 용맹과 힘을 상징하는 느낌이 장착되는 것이다. 탄자니아 한인회장인 김태균 작가가 최근에 쓴 '최초의 낮-아프리카 잠언'은 그가 원주민들과 더불어 오랜 탄자나아 현지 생활에서 섭렵한 아프리카 잠언을 화두로 해서 우를 깊은 명상적 사유로 이끄는 보배스러운 지혜를 내장한 책이다. 작가가 이 책을 통해서 전하려는 아프리카 사람들의 전통적 지혜는 아프리카의 대자연과 생명들이 살아가는 위대한 생태 섭리에서 생겨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작가 또한 이런 통찰을 바탕으로 아프리카 잠언을 안내한다. 그것을 전하는 작가의 어조는 사색적이고 암유적이다. 때로는 경건한 영성의 목소리로 자신의 사유를 전한다. 아프리카 잠언을 계승하고 그것에 초월적 믿음을 부여하는 아프리카인의 목소리와 결을 같이한다. 작가는 이 책에서 아프리카 잠언의 현지인 발음을 그대로 소개해 놓았다. 예를 들면 “길을 잃는 것도 길을 배우는 방법이다(Kupotea njia ndio kujua njia/쿠포테아 은지아 온디오 쿠주아 은지아)라는 구절이 있다. 나는 스와힐리어의 음절들을 따라서 이 잠언을 소리내어 보았는데, 무의미하지 않았다. 그 음절들의 주름 사이로 배어 있는 아프리카의 지혜들이 손을 내미는 느낌이다. 무언가 생명력 있는 소리로 감득되는 듯하다. 물론 이는 논리적으로 변증 될 수 있는 감득은 아니다. 낯선 언어의 말소리 자체에 대한 음성적 상상력이라고나 할까. 다른 언어, 다른 문화에 대한 넉넉한 상상력으로 다가간다는 데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연말연시 사람들은 새해에 잘 될 거라고 응원했다. 나는 ‘고독이 축복이 될 때까지’라며 방에 흐리게 박혀있었다. 이곳 남한산성 밑 고골에는 하남 교산 3기 신도시 재개발로 주인이 버리고 간 개들이 들개라는 오명을 쓰고 쓰레기를 뒤진다. 빈집에 몸을 숨긴 길고양이들과 남은 몇 집은 서로의 불빛에 의지하고 있다. 멀쩡했던 마을은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포클레인에 휩쓸려 전쟁이 지나간 것처럼 참혹하다. 그 틈을 이용한 고물상들은 창틀, 전선, 전등, 정원수, 심지어 축대였던 돌을 뜯어내 돈벌이를 한다. 군락지 소나무 숲은 전기톱 공세로 황량하기 그지없다. 갈 곳을 찾지 못해 남아있는 집을 상대로 LH는 소송을 걸었다고 윽박지른다. ‘선이주 후 철거’를 약속했던 그들, 곳곳에 쇠기둥을 박고 가림막을 설치했다. 뉴스에서나 볼만한 터전을 빼앗기고 자살한 사람들처럼 내가 궁지에 몰릴 거라고는 상상해 본 적 없었다. LH는 마치 이곳의 추억과 기억까지 보상한 양 이사 가라고 압박한다. 이곳에서 태어나 한평생을 보낸 집주인 아저씨와 노모는 정든 고향을 떠나기 싫어 말라 갔다. 떠나지 않으면 불이익을 줄 거라는 서류를 받고 주민들은 지난해 난민처럼 이사 갔다. 집주인 노모는 고골을 떠나자마자 병원에 입원했지만 결국 돌아가셨다, 죽음보다 더한 불이익 있을까. 고양이 발바닥만 한 땅만 있어도 냉이는 꽃을 피운다. 나는 그 땅마저 없어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차라리 길고양이와 들개 신세가 낫겠다는 생각을 한다. 주말 독주를 마시고 싶었다. 친한 동생에게 전화했다. ‘고객이 전화를 받지 않으니 음성을 남겨주십시오’, ‘가족과 있겠지?’ 고아 새도 집을 찾아가는 저녁, 전설에 나오는 붉은여우라도 내려올 같은 칠흑의 밤이다. 주워 온 길고양이 꽃님이, 주인 없는 복만이와 ‘궁남’에게 먹을 것을 주자 꼬리가 모터처럼 돌아간다. 보드카를 잔에 따르고 찬물을 부었다. 집이 추워 얼음은 필요 없다. 술잔은 고요하다. 잠이 들었다. 펄럭거리는 비닐 소리에 새벽에 눈을 떴다. 시베리아 털모자를 쓰고 잠바를 걸치고 마당에 나갔다. 텃밭에 배추가 노르스름한 잎만 남고 뜯어졌다. 속이 안 찬 배추를 봄동 만들려고 그대로 두었었다. ‘세상에 어떤 놈이 배추 서리를 한 거야?’ 자세히 들여다보니 고라니였다. 간혹 마을로 내려온 고라니를 개들이 쫓는다.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그랬을까? 어제 낮에 시멘트 틈에 진돗개가 새끼 두 마리를 낳았다는 말을 들었다. 평소 같으면 달려갔을 것이다. 복수가 차 버려진 진돗개를 병원에 데리고 가고 유기묘를 입양시킨 내게 지인들이 하는 말이 있다. ‘너나 잘하세요’ 일전에 부여에 계신 선생님을 뵈러 갔다. 궁남지 근처 쓰레기 더미에 눈비 맞고 30cm 안 된 쇠사슬에 개가 묶여 있었다. 소유권 따위 따져볼 여유도 없이 그 개를 집으로 데려왔다. 나에게는 법보다 생명이 우선이다. 한때 이 개는 주인에게 사랑을 받았겠지? 개 이름을 ‘궁남’이라고 지었다. 오지랖은 궁남이로 끝내겠다고 다짐하면서도 배가 등에 닿은 개와 도로를 가로지르는 고양이에게 먹을 것을 던져준다. 추위를 피해 천장으로 숨은 고양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시끄러워야, 잠 좀 자자!’고 소리 지른다. 그러나 오늘도 무사한 그들이 한없이 고맙다.
북한 노동신문은 지난 12월 27일 헌법절 53주년을 맞아 국기게양 및 선서의식을 김정은 총비서가 참석한 가운데 만수대의사당에서 진행했다고 보도했다. 김정은 위원장은 선서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자주권과 조선인민의 이익을 옹호하고 국가와 인민을 위해 복무하는 책임있는 일원으로서 인민의 복리와 국가의 장성발전을 도모함에 무한히 성실하며 공화국 헌법을 철저히 수호하고 법적 의무를 엄격히 이행”하겠다고 했다. 남한에서 대통령이 국회에서 취임 선서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북한 헌법절은 1972년 12월 27일 최고인민회의에서 사회주의헌법을 채택해 국가 주석직을 신설하고 김일성이 주석에 올라 유일지배체제를 완성한 날이다. 그런데 1972년 12월 27일은 남한의 60대 이상에게도 낯설지 않은 날이다. 이날 남한에서는 유신헌법이 발효됐다. 남과 북이 하필이면 같은 날에 1인 독재체제 완성과 영구집권을 위한 헌법을 채택하고 발효했는지 우연이라고만 하기에는 설명이 어렵다. 당시 남북은 세계적인 데탕트 분위기를 타고 1971년부터 시작된 남북적십자회담이 활발히 진행됐고, 1972년 7월 4일에는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의 3대 통일원칙을 천명한 7·4남북공동선언이 발표되며 통일에 대한 기대가 한반도 전역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그러나 활발히 진행되던 남북회담은 1972년 12월 27일 북한에서는 사회주의헌법 채택으로 김일성 1인 독재체제가 완성되고, 남한에서도 유신체제가 성립되면서 시들어져 갔다. 박정희 정부와 김일성 정부는 이후 남북 대화에는 관심을 끊고 각자 1인자의 영구 독재를 위한 내부통제 강화에 매진한다. 한반도 분단 상황은 남북을 주변국들의 이해관계를 위한 희생양이 되게 할 뿐만 아니라, 남북의 통치자들에게도 권력강화를 위한 아주 유용한 수단으로 적절히 활용됐다. 그런데 그동안 하루 쉬는 공휴일 정도로 여겨졌던 헌법절 행사에 김정은이 직접 참석하며 헌법을 부각하고 있다. 김정은은 주체사상을 통해 통치하던 김일성, 김정일과 달리 법과 제도를 통해 사회통합을 이루어 내고 국제사회 정상국가로 인정받으려 한다. 김정은 시대 북한은 교육·의료·주택 등 인민생활 향상과 지역균형발전 등에 관련된 법들을 정비하고 역점 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는데, 이는 정상 국가의 기본적 기능들이다. 김정은이 인민의 지지와 국제사회 인정을 위해 인민대중제일주의를 통치이념으로 하고 법제화를 통해 이를 실현하려는 것이다. 최근 연구를 보면 김정은 집권 이후 2024년 2월까지 12년간 481건의 법을 제·개정했는데, 김일성 집권기 49건, 김정일 집권기 17년간 461건이 제·개정된 것과 확연히 차이가 난다. 물론 우리 기준에서 한참 미흡하지만, 김정은은 선대에서 강조한 주체사상이나 선군정치보다는 국가를 내세우며 법과 제도화를 통해 대내외에 정상국가 모습을 보여주며 변화된 북한 주민들의 지지를 끌어내려 한다. 오늘날 북한은 과거에 우리가 생각했던 주체사상과 절대자의 자의적인 지시만으로 통치되는 빈곤에 허덕이는 나라가 아니다. 우리가 섬나라의 한계를 극복하고 국제사회 진정한 선진국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남북 교류협력과 한반도 평화가 반드시 필요한데, 그것은 먼저 북한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이해할 때 가능한 일이다.
세계 5대 갯벌 중 하나가 우리나라 서해안이다. 그 서해 갯벌의 중심에 인천시가 있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섬으로 둘러싸여 있어 수산물이 풍부하고 다양하다. 다양한 해양 생물들의 서식·산란장인 것이다. 이런 조건을 가진 인천 앞바다에서 나는 대표적인 특산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새우, 조개, 굴 등이다. 새우의 경우 소래포구와 강화 앞바다에서 많이 잡히고 품질도 우수하다. 바지락, 맛조개, 동죽 등 다양한 조개류가 인천 갯벌에서 자란다. 갯벌의 미세한 퇴적물은 풍부한 영양분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적합한 염분과 수온을 가진 인천 앞바다는 김 양식에도 최적지여서 양질의 김이 생산된다. 강화도와 영흥도의 김은 전국에서 알아주는 품질을 자랑한다. 굴 역시 인천 앞바다가 자랑하는 맛과 향을 가진 특산품이라고 할 수 있다. 조수 간만의 차이가 크고 바닷물이 차가운데다 갯벌의 영양 성분 역시 굴의 성장을 돕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천지역 섬 지역에서 조개류가 사라지고 있다고 한다. 바닷모래 채취와 환경 변화로 인해 어획량이 급감하고 있다. 인천 섬 인근 해역에서 바닷모래 채취가 무분별하게 이뤄져 꽃게·조개류 산란장이 축소되고 있는 것이다. 어패류 산란장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해수욕장과 썰물 때 드러나는 풀등에는 모래가 줄어들어 자갈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바닷모래 채취는 1984년부터 시작됐다. 대단위 건설공사로 강모래가 고갈되자 인천앞바다에서 바닷모래를 채취하기 시작했다. 기후 변화와 환경오염도 한몫하고 있다. 최근엔 인근 화력발전소도 인천바다 수산물 감소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인천환경운동연합이 지난해 12월 30일 발표한 성명서에 따르면 화력발전소에서 배출되는 온배수로 인천 섬 지역 굴이 사라지고 있다며 인천시의 조사를 촉구했다.(관련기사: 경기신문 12월 31일자 15면, ‘인천 앞바다 굴 사라졌는데도 市는 뒷짐… 환경단체 조사 촉구’) 실제로 인천환경운동연합이 덕적도를 방문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굴이 사라졌으며 고동이나 따개비조차 없는 매끈한 바위들만 가득했다는 것이다. “남아있는 굴 또한 상태가 심각해 영글었다는 표현을 도저히 쓸 수 없었다”는 한 어촌계원의 증언과 함께, 과거 굴이 가득했던 갯바위와 무인도까지 가릴 것 없이 껍데기마저 녹아 없어지고 있다는 대이작도, 승봉도 어촌계장들의 말도 전했다. 인천환경운동연합은 인근 화력발전소에서 나오는 온배수에 포함된 총염소를 원인으로 지목했다. 화력발전소에서 발전하고 남은 열을 식힌 온배수를 바다에 배출한다. 이 과정에서 취수구에 따개비나 홍합이 붙는 것을 막기 위해 해수전해설비를 갖추고 차아염소산사트륨을 지속적으로 살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에 인천환경운동연합은 인천시에 온배수가 실제 원인인지 공신력 있는 기관에서 즉각, 체계적으로 조사하라고 요구했다. 만약 온배수가 문제라면 모든 발전소가 해당할 수 있다. 인천에 있는 발전소는 영흥발전소(석탄화력발전), 인천·신인천·서인천·포스코에너지(가스화력발전소)외에도 논현·송도·영종에도 소규모 발전소가 가동되고 있다. 따라서 온배수 문제는 한 발전소만의 문제가 아니기에 모든 발전소를 포함한 종합적이고 광역적인 조사가 필요하다는 이들의 주장에 공감할 수밖에 없다. 인천환경운동연합은 “앞으로는 ‘열’뿐만 아니라 ‘총염소’ 등 해양오염 물질의 영향을 포함한 피해 범위 설정과 피해 조사, 복원 대책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총염소 등 화학적 성분의 독성으로 인한 해양생물의 집단 폐사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주장처럼 인천시는 공신력 있는 조사기관에 의뢰해 염소 성분을 포함한 온배수 영향 실태를 밝혀야 한다. 해류, 조석 등 환경적 변수까지 고려한 과학적 피해 예측 모델과 지역별 피해 현황을 종합적으로 반영해야 할 것이다. ‘인천 해양생태계 전체의 붕괴 신호’라는 경고를 흘려보내서는 안 된다.
최근 연합뉴스는 2023년 6월 인천 송도신도시 부영타워에 둥지를 튼 재외동포청이 서울 이전을 검토하고 있다는 재외동포청장과의 신년 인터뷰를 보도했다. 애초 서울 입지를 선호해 온 재외동포 단체들은 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반면, 재외동포청 유치의 당사자인 인천광역시와 지역 언론·시민사회는 반발하고 있다. 현 청사 임대차 계약 만료를 앞둔 이 논란은 2026년 재외동포청이 추진해야 할 동포 데이터베이스(DB) 구축, 핵심 민원 해소, 한인 사회 네트워크 강화, 포용적 귀환동포 정책, 정책 추진체계 일원화 등 중점 과제를 압도하며 최대 현안으로 부상했다.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정치권도 사태 진화에 나섰지만, ‘검토–보류’와 ‘철회–사과 요구’가 맞서는 공방만 이어질 뿐 논쟁의 초점은 흐려지고 있다. 출범 3년도 채 되지 않은 신생 중앙행정기관의 본청 위치를 둘러싼 논란이 제기된 이유를 차분히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근본적으로는 2023년 4월 재외동포청 본청은 인천 송도로, 통합민원실은 서울 광화문으로 이원화한 결정에서 비롯됐다. 당시에는 국제공항·항만 접근성, 개항과 근대 이민사의 상징성, 국제도시로서의 성장 가능성, 지역 균형 발전이라는 정책적 명분과 함께 동포 접근 편의성과 업무 효율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선택이었다. 다만 대통령실과 외교부, 인천시 모두 유치 이후 재외동포청의 안정적 정착과 신뢰 구축을 위한 중장기 전략을 충분히 마련했는지는 점검할 대목이다. 현실적으로 재외동포 다수는 인천·부산·제주 등을 통해 출입국하더라도 체류 중 주요 활동은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중심지인 서울에서 해결한다. 지난 3년간 재외동포들의 시선에서 인천이 ‘동포 친화도시’로 인식돼 왔는지에 대한 성찰도 필요하다. 재외동포청이 송도에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으나 접근성이 쉽지 않다는 의견이 적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2018년 재외동포재단의 제주 서귀포 이전 당시 제기됐던 불편한 기억이 여전히 동포사회에 남아 있다는 점 역시 이번 논란의 배경으로 읽힌다. 재외동포청은 단순한 중앙행정기관이 아니다. 전 세계 181개국에 흩어져 사는 708만 재외동포의 역사와 정체성을 보듬고, 현실을 이해하며, 미래를 설계하는 글로벌 행정 플랫폼이다. 그렇다면 이 기관이 뿌리내릴 도시는 단순한 행정·교통 입지를 넘어 재외동포·다문화·이민정책을 통합적으로 설계하고 지속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인프라와 역량을 갖춘 공간이어야 한다. 그래야 재외동포들에게 재외동포청이 오가다 들르는 곳이 아니라 신뢰하고 찾는 공간이 될 수 있다. 이번 이전 논란은 재외동포청이 왜 특정 도시에 자리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진다. 이에 대한 설득력 있는 답이 제시되지 않는다면 유사한 논쟁은 반복될 가능성이 크다. 인천이 재외동포청을 계속 품고자 한다면 존치 여부를 넘어 동포 친화 행정과 중장기 비전을 보다 구체적으로 제시해야 한다. 이는 재외동포청 유치를 원하는 다른 지자체에도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과제다. 예컨대 재외동포들이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독립 청사 마련, 차세대와 외국인 청년이 K-팝·드라마·영화·푸드·IT·한국어 등 한류 콘텐츠를 체험·교류할 수 있는 인프라 구축이 필요하다. 재외동포를 단순한 투자 대상이 아니라 사람·자본·정보가 선순환하는 협력의 주체로 인식하는 관점 전환도 요구된다. 지역 언론, 교육청, 대학, 공공기관과 기업이 재외동포 이해와 교류, 채용 확대에 함께 나서야 한다. 이러한 성과는 단기간에 완성되기 어렵다. 그러나 지금은 단기·중기·장기로 ‘동포 정책도시’, ‘동포 참여도시’, ‘동포 귀환도시’로 설계할 수 있는 절호의 시기다. 국제기구나 정부 기관 모두 유치보다 유지가 어렵다. 재외동포청의 합리적 요구에 중앙정부와 지자체가 함께 응답하지 못한다면 708만 재외동포의 신뢰를 얻기 어렵다. 지금의 쟁점은 임대료나 통근 문제도, 인천이냐 서울이냐의 선택도 아니다. 어디가 재외동포의 마음을 얻을 준비가 되어 있고, 이를 실천할 인프라와 역량을 갖추고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이제 이 질문에 감정이나 시시비비가 아닌 정책과 비전으로 답해야 할 때다.
최근 비일비재하게 발생하는 ‘유령집회’와 ‘알박기 집회’가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법의 사각지대를 파고들어 집회 형식으로 타인 또는 다른 집단의 정당한 헌법적 ‘집회·결사의 자유’를 침해하는 이 같은 얌체 행위는 심각한 폐해다. ‘집회’가 목적이 아니라 ‘장소 선점 장악’이라는 불순한 목적으로 자행되는 편법 행위는 제도적으로 막아야 한다. 특히 상습적으로 이런 일을 벌이는 개인이나 단체부터 과태료 가중부과 등 강력한 조치가 필요하다. 집회 신고만 하고 실제 집회는 하지 않는 것을 이른바 ‘유령집회’라고 한다. 더 나아가 집회는 거의 하지 않으면서 장기간 특정 장소를 선점해 집회 신고를 하는 방법으로 다른 단체의 집회나 행사를 차단하는 것은 ‘알박기 집회’라고 한다. 적극적으로는 집회 장소를 다른 사람들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막아내려는 목적으로 선점하는 것이고, 소극적으로는 예고 플래카드 등을 통해서 자신들의 주장을 알리는 편법적 목적으로 악용한다. 경기신문이 입수한 경찰청 공공데이터포털 자료에 다르면 전국 집회 신고 건수는 2021년 357만 9541건에서 2022년 430만 4917건으로 37%가량 증가했다.그러나 실제 집회가 열린 건수는 2021년 8만 6348건, 2022년 7만 6031건으로, 미개최율이 무려 98%에 달하고 있다. 2023년에도 290만 7251건이 신고됐으나 개최 건수는 7만 9395건에 불과하다. 지난해 1월부터 10월까지도 미개최율은 96.6%에 달하고 있다. ‘유령집회’ 또는 ‘알박기 집회’의 경우 집회를 통해 자신들의 주장을 알리는 것보다는 장소 선점이 주목적이다. 그 과정에서 주민 불편과 도시 미관 저해는 물론이고 경찰과 지자체의 행정력 낭비 또한 중대한 문제점이 아닐 수 없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2016년 집회 철회 신고를 하지 않을 경우 과태료를 부과할 수 있도록 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을 개정했다. 하지만 이 법은 사문화된 실정이다. 선순위 단체와 후순위 단체의 중복 집회가 발생한 경우에만 과태료 부과가 가능해 결과적으로 ‘신고만 하고 열지 않는 집회’를 막을 장치는 사실상 없다. 유령집회로 인한 경찰의 부담은 심대하다. 일단 집회 신고가 접수되면 경찰은 참가 인원을 기준으로 경비 규모를 산정하고, 줄곧 동향을 점검해야 한다. 집회 당일 아침에 갑자기 집회 취소를 통보하는 경우도 잦다. 참가 인원을 과도하게 부풀려 신고하는 이른바 ‘뻥튀기 집회’도 문제다. 경기신문 취재 결과, 100명 이상 집회를 신고한 사례 중 상당수는 실제 참가 인원이 현저히 미달했다. 집회·결사의 자유는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이다. 그러다 보니 경찰과 지자체 모두 현수막 철거 등 적법한 행정 조치를 하지 못하고 서로 책임을 떠넘기기에 급급한 형편이다. 상황을 이대로 방치해서는 안 된다. 다른 국민의 정당한 헌법적 권리를 박탈하고 주거환경을 어지럽히면서 공권력의 막대한 낭비를 초래하는 ‘유령·알박기 집회’는 반드시 개선돼야 한다. 현행 집시법상 집회 인원 과장 신고 자체를 제재하기는 어렵다. 허가제가 아니라 신고제인 집회 신고를 반려하게 되면 곧바로 기본권 침해 논란이 벌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법조계 전문가들은 상습적인 유령집회나 알박기 집회 주최자에 대해서는 집회 우선순위를 제한하거나 집회방해죄, 권력남용죄를 적용할 수 있다는 견해를 내놓기도 한다. 전문가들의 조언 중에서는 “제재의 방향을 처벌이 아닌 ‘불이익 부여’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는 아이디어에 눈길이 간다. ‘유령집회’나 ‘알박기 집회’를 반복적으로 저지르는 주최 측에 대해서 가중된 과태료를 부담시켜 자제하도록 유도하는 것도 좋은 방안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신고는 해놓고 실제 집회를 여는 경우가 5%도 되지 않는 불순한 이 엉터리 ‘집회의 자유’를 방치해야 하는 불합리라니, 결코 안 될 일이다.
보일러가 고장 났습니다. 하필이면 기온이 영하로 뚝 떨어져 버린 날이었어요. 그것도 저녁 무렵이었지요. 대리점에 전화했지만, 일과가 끝난 시간이라 보일러 기사는 다음날에야 방문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예상한 일이었지만 난감했습니다. 날이 어두워질수록 집안은 점점 더 싸늘해졌어요. 추운 겨울이라지만 실내에서조차 몸을 움츠린 채 서성이는데, 순간 짜증이 치밀어 올라왔습니다. 그러고는 이토록 사소한 일에 반응하는 나를 보며 마음이 또 가라앉아버렸지요. 잠깐의 불편도 참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게 아찔했습니다.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쌓아두었습니다. 씻는 일이 가장 큰 문제로 다가왔어요. 차가운 물로 이를 닦고, 고양이 세수를 했어요. 전기포트에라도 물을 끓이면 될 것을, 그건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따뜻한 물이 그리웠습니다. 이미 경험한 것, 오래 누려서 익숙한 것이 끊겨버리자, 그리움은 더 선명해졌습니다. 그 틈으로 묻혀 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몸 하나가 다 들어가는 빨간 고무통. 우리는 속옷만 입고 엄마의 호명을 기다리며 오돌오돌 떨고 있었어요. 차례를 기다리며 먼저 들어가기 싫다고 뻗대다가 다 씻고 나온 사람을 부러워하기도 했지요.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는 고무통 속은 따뜻했습니다. 살이 벗겨지도록 벅벅 몸을 밀어대는 엄마의 손길만 아니었다면, 그 속에서 나오기 싫을 만큼 좋았죠. 그리고 겨울 아침에는 이불 속에서 나오기 싫어 늦장을 부리는 날이 많았습니다. 그러면 들통에 데운 물은 어느새 동이 나버렸어요. 게으름을 피운 대가는 차가운 물로 몸을 씻고 학교에 가는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불편한 줄 몰랐습니다. 그때는 다 그렇게 살았으니까요. 보일러 기사가 방문하겠다고 약속한 아침은 오지 않을 시간처럼 길게 느껴집니다. 카프카의 『성』에서 측량기사 K가 끝내 성에 들어가지 못하는 내용이 떠올랐습니다. 천천히 마음을 다독였어요. 그러자 안락함에 길들어진 나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하룻밤의 불편을 어떤 불행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모습 말이에요. 하루가 아닌 매일의 일상을 그렇게 살아내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텐데요. 새해가 시작되고 세운 계획들과 이루고 싶은 꿈의 목록에는 나만 있었어요. 다른 이들의 건강과 행복을 얼마나 간절하게 품어 보았나, 생각했습니다. 보일러 기사는 약속한 시각보다 더 늦게 도착했습니다. 그래도 괜찮았습니다. 보일러는 결국 수리가 아닌 교체를 해야 했지요. 그것도 괜찮았어요. 드디어 집안에 온기가 돌고 수도꼭지를 돌리자 따뜻한 물이 콸콸 쏟아졌습니다. 마치 새로운 샘을 판 것 같았어요. 하룻밤 사이에 꼬질꼬질해진 몸을 씻었습니다. 따뜻한 물로 몸을 씻으며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깨끗함을 유지하고, 품위를 지닐 수 있게 해주는 것들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매일 당연하게 누려온 일상에 작은 균열이 생기고 나서야, 우리가 얼마나 편리한 구조 속에서 살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이 마음 역시 곧 잊히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따뜻한 물을 쉽게 쓸 수 없는 집들을 떠올렸습니다. 보일러 온수의 온도를 이전보다 낮게 설정했습니다. 너무 뜨겁지 않게요. 차가움과 따뜻함 속에서 비로소 잠깐,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생각했습니다.
새해를 맞아 여러분은 어떤 계획을 세우고 계시는가? 색다른 여행을 꿈꾸고 있지는 않으신지? 식상한 일상으로부터 탈피하고 싶은 이들에게 소개하고픈 곳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나라 상투메 프린시페(São Tomé et Príncipe)가 바로 그곳이다. ‘성 토마스’와 ‘왕자’를 의미하는 이 두 섬은 대서양 한가운데 울창하게 솟아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가봉 해안과 적도, 그리고 그리니치 자오선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다. 자연 애호가나 하이킹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최적의 여행지다. 원시 그대로의 보석이자 세상 변방에 자리한 무공해 파라다이스이니까. 이 진가를 알아 본 유네스코는 지난 9월, 나라 전체를 생물권 보전지역으로 정했다. 한 국가를 통째로 지정한 예는 유례가 없는 일이다. 상투메 프린시페는 1975년까지 식민지였다. 포르투갈의 탐험가인 산타렘과 에스코바르는 1470년 12월과 1471년 1월 각각 이 섬을 발견했다. 그 당시 군도는 숲으로 뒤덮인 무인도였다. 물론 지금도 대부분 야생 그대로이지만 말이다. 울창한 열대우림으로 뒤덮여 있고 구리 빛 모래 해변이 가장자리를 따라 펼쳐져 있다. 포르투갈인들은 이 섬들을 노예무역의 중심지로 삼았다. 그러나 19세기 말에 세계적인 코코아 생산지로 탈바꿈시켰고 1913년 급기야 세계 최대의 카카오 성지로 만들었다. 이후 유럽 지주들은 ‘로사스(roças)’라는 광활한 농장을 관리했지만 지금은 방치된 상태다. 다행히 남아프리카의 한 억만장자가 섬에 매료돼 복원 사업을 벌이고 그중 하나를 매력적인 호텔로 단장했다. 카카오 농장 또한 카카오 열매 수확부터 초콜릿 제조 과정까지 직접 체험할 수 있게 복원됐다. 이 군도는 예나 지금이나 해로로 접근하는 것이 좋다. 로빈슨 크루소가 돼 프라이데이를 만나고 싶다면 주저 말고 떠나라. 문명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고요한 원시의 땅, 이 야생의 땅에 거북이들은 겨울철 알을 낳으러 모여 든다. 상투메 프린시페는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가장 부자 나라일 것이다. 국가가 보유한 돈이야 별 볼일 없지만 광활한 원시림과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깨끗한 해변으로 치면 어떤 나라가 대적할 수 있겠는가. 안전하면서도 때 묻지 않은 자연이 간직된 곳은 없다고들 한다. 하지만 상투메 프린시페는 그렇지 않다. 이곳에는 아직 상업 적인 때가 끼지 않았다. 눈이 시리게 찬란한 바다에 구불구불 이어진 해안선과 그 너머로 어우러진 유적지, 그야말로 환상이다. 제국주의 시대 포르투갈인이 건설한 성 세바스티앙 요새는 현재 국립 박물관으로 탈바꿈돼 에콰도르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게 해 준다. 대통령궁 맞은편에 있는 은총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과 그 내부 벽면을 장식한 모자이크 역시 더없이 아름답다. 거리 여기저기에는 허물어져 가는 식민지 시대의 건물들이 500년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시장 근처에는 노랑 택시들이 빈티지 오토바이들과 뒤엉켜 이색적인 풍경을 자아낸다. 높고 뾰족한 바위들은 푸른 초목 위로 솟아올라 하늘을 찌르고 프린시페의 공원 중심부에 우뚝 선 봉우리는 63빌딩을 능가한다. 바늘 만에서 바라보는 이 풍경은 마치 돌로 된 거인이다. 순수의 나라 상투메 프린시페는 독립 50주년을 맞았다. 인구의 70%가 35세 미만으로 세계에서 가장 젊은 나라, 이 나라가 2026년 여러분을 향해 손짓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