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픈AI의 챗GPT가 세상에 나온 후 폭발적인 관심을 끌고 있으며 인공지능(AI)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글로벌 IT 산업의 화두는 AI이며, 오픈AI CEO인 샘 올트먼 등이 AI 기술 진보를 주도하고 있다. 글로벌 빅테크들은 인간 수준인 범용인공지능(AGI) 기술을 비롯해 인간을 초월하는 초인공지능(ASI) 또는 초지능(superintelligence) AI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노벨 물리학 수상자인 힌튼 교수는 “5∼20년 안에 초지능이 등장한다”라고 예측하였으며 올트먼과 함께 AI 기술 양대 산맥으로 알려진 구글 딥마인드 CEO 허사비스도 “인간 수준의 AI가 5∼10년 내 나타날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샘 올트먼은 “AGI는 트럼프 2기 중에 개발될 것이고, 딥러닝을 통해 초지능이 수천일 안에 나타날 수도 있다”라고 언급하였으며 초지능 기술 개발을 목표로 삼고 있다. 그는 “로봇이 로봇을 생산하는 시대가 될 것이다”라고 한다. 이 말은 AGI·ASI 기술을 장착한 휴머노이드 로봇이 사람을 대신하여 로봇 공장을 운영한다는 뜻이다. 인류 사회는 조만간 엄청난 파괴적 혁신을 보게 될 것이다. 소프트뱅크 회장인 손정의는 “10년 내 ASI가 온다. 인간보다 1만 배나 우수한 초지능 AI를 만들겠다”라면서 초지능 AI시대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오픈AI에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AI 반도체 업계 제왕인 엔비디아 젠슨 황은 향후 로봇과 자율주행차의 AI 반도체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AGI·ASI 기술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메타 CEO 마크 저커버그도 초지능 AI에 기업의 사활을 걸고 있다. 저커버그는 초지능연구소를 신설하였으며, AI 스타트업인 스케일AI 지분을 확보하고 창업자 알렉산더 왕을 영입하였다. 오픈AI를 대상으로 집중적인 AI 인재 영입작업을 벌인 끝에 올해 약 12명의 AI 전문가를 스카우트했다. 저커버그는 플랫폼 사업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기회를 찾아 초지능 AI 사업에 주력하려는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다. 올해 1월 CES 2025에서 엔비디아 젠슨 황이 피지컬 AI시대를 예고하였다. 첨단 AI 기술이 휴머노이드 로봇에 접목된다고 상상해보자. 공상과학 영화에서는 휴머노이드 로봇이 공장이나 일상생활에서 사람과 함께 공존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과거에는 “그러한 일이 가능할 것인가?”라고 의심했으나, 이제는 상상이 현실이 되는 세상이 되고 있다. 자율주행차도 획기적인 변화를 맞게 될 것이다. 구글은 딥마인드의 초지능 AI 기술을 활용하여 웨이모의 로보택시 기술 수준을 높일 것이며, 테슬라도 로보택시와 휴머노이드 로봇 옵티머스에 스타트업 xAI의 AGI·ASI 기술을 적용하여 ‘초지능 피지컬 AI 시대’의 주역이 되고자 할 것이다. 향후 우리 사회는 5차 산업혁명시대라는 새로운 혁신사회를 맞이하게 된다. 초지능 AI, 양자컴퓨터, AI 반도체 기술이 상호 시너지 작용을 일으켜 자율주행차, 휴머노이드 로봇, 우주산업 등 모든 산업에서 대변혁을 만들어 낼 것이다. 정부와 우리 기업들도 초지능 AI시대 준비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야 한다.
신화는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려는 가장 오래된 방식이다. 아직 과학이 도달하지 못한 시대, 인간은 자연과 삶의 고통을 이야기로 설명했다. 그 이야기 속에서 노동은 단순한 활동이 아니라, 신과 인간의 관계를 정의하는 중요한 행위로 등장한다. 노동은 신이 인간에게 내린 형벌이었을까, 아니면 인간이 신에게 도달하기 위한 수단이었을까? 가장 유명한 노동의 기원 신화는 성경 속 에덴동산 이야기다.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은 대가로 낙원에서 추방당하고, 흙을 일구며 땀 흘려 살아가야 했다. 노동은 신의 형벌이었고, 고통의 상징이었다. 고대 그리스에서도 판도라가 열어버린 상자에서 온갖 재앙과 함께 노동이 인간에게 주어졌다. 이 역시 인간의 욕망이 불러온 결과로서 노동은 벌이었다. 그러나 모든 신화가 노동을 고통으로만 묘사하지는 않았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신화에서는 신들이 지친 끝에 인간을 만들어 대신 노동하게 했고, 인간은 노동을 통해 신에게 제물을 바쳤다. 여기서 노동은 신과의 계약이자, 신성한 의무였다. 북유럽 신화의 토르 역시 번개와 천둥의 신이자 대장장이 신으로, 노동과 힘, 창조의 상징이었다. 이처럼 노동은 고통이면서도 창조이고, 저주이면서도 축복이었다. 노동의 이중성은 결국 인간 존재의 본질을 비춘다. 신들은 인간에게 노동을 부과했지만, 그 노동을 통해 인간은 문명을 세우고, 땅을 일구며, 예술을 창조했다. 고통스럽지만 의미 있는 일. 신들은 인간에게 고통을 주었지만, 그 안에 창조의 가능성을 숨겨두었다. 이는 곧 신화가 노동을 단순히 고통으로 그리지 않는 이유다. 신들은 인간에게 세계를 짓는 능력을 부여했고, 인간은 노동을 통해 자신만의 세계를 형성했다. 노동은 인간이 신으로부터 받은 형벌이자 축복이라는 이중적 메시지를 동시에 품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고대의 신화 속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의 삶 속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우리가 매일 아침 일어나 출근하고,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고, 서로 협력하며 살아가는 모든 행위가 이 오래된 이야기의 연장선 위에 있다. 현대 사회의 시스템은 진보했지만, 노동의 본질은 여전히 존재의 조건이자 삶의 기반으로 남아 있다. 노동은 인간에게 고통을 주었지만 동시에 자율성과 성취, 그리고 사회적 연대를 가능하게 했다. 신화 속 신들이 인간에게 던졌던 메시지는 단순한 교훈이 아니라, 인간이 세계 속에서 스스로의 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그렇기에 노동은 단순한 생계 활동이 아니라, 인간이 의미를 창조하는 방식이다. 우리는 일하며 살아가고, 살아 있기 때문에 일한다. 그것은 여전히 우리 안에 살아 있는 신화다. 노동을 둘러싼 신화는 결국 인간이 삶의 고통을 어떻게 해석해왔는지를 보여준다. 단순한 저주가 아니라, 인간이 존재의 의미를 만들어내는 창조의 무대. 신이 인간에게 던진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너는 무엇을 위해 일하는가?" 이 물음은 우리가 매일 맞이하는 새벽과도 같다. 우리는 또다시, 손을 들고 하루를 시작한다. 신화는 끝나지 않았다.
의대 증원에 반발하며 학교를 떠났던 의대생들이 전원 복귀를 선언해 길었던 의정갈등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의료시스템을 멍들인 골칫거리 갈등을 풀어낼 실마리가 떠올랐다는 점은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원칙을 저버린 극단행동에 결국 정부가 특혜로 해결책을 모색해서는 안 된다는 경계의 목소리도 명징하다. 무책임한 의정갈등이 빚어낸 국민적 손해는 실로 막대하다. 극심했던 의정갈등을 반면교사하여 의료개혁의 큰길을 닦아내길 기대한다. 대한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학생협회(의대협)가 전원 복귀를 선언한 데 대해 여론은 일단 긍정적이다. 의대협 측이 교육의 총량이나 질적인 측면에서 압축이나 날림 없이 제대로 교육을 받겠다고 한 대목도 당연한 태도로 받아들여진다. 의료공백이 한계에 달하고 있는 시점에 지긋지긋한 악순환을 끝내는 길은 시급히 열어야 할 발등에 떨어진 불이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투병하는 환자들과 가족들의 처지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이 문제를 둘러싼 국민적 갈망을 빙자하여 원칙을 지나치게 벗어난 해법 모색은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환자와 가족들의 눈물 어린 호소에도 불구하고 사태 악화에 일조한 의대생들에게는 최소한의 책임은 물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분명히 있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특히 동료·후배의 수업 복귀를 막기 위해 블랙리스트를 작성하거나, 복귀자에 대한 조롱과 비방을 서슴지 않았던 일도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탈들이다. 교육부와 대학은 일단 환영하면서도 적잖이 당혹한 모습이다. 의과대학은 지금처럼 수업 거부가 계속된다면 내년부터 24·25·26학번이 동시에 수업을 듣는 사상 초유의 ‘트리플링’을 피할 수 없게 된 상황이다. 하지만 2학기 복귀를 통한 학업 관리는 그리 간단치가 않다. 의대생들은 지난 5월 1만9457명 중 8305명이 유급, 46명이 제적 통보를 받았다. 아직은 이 중 3개 대학 853명만 유급이 확정됐다. 교육부와 대학 관계자들은 2학기 복학이 여의하다고 해도, 올해 학업을 마치기란 불가능하다는 분석을 내놓는다. 본과생은 연간 40주 이상의 전공 수업을 받아야 하는데, 당장 다음 주에 복학하더라도 내년 2월까지 32주밖에 남지 않은 상태인 까닭이다. 특혜 없이는 본과 4학년생이 올해 의사국가시험을 응시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기졸업자나 졸업예정자만 응시할 수 있는 올해 국시 응시 기간은 오는 21~25일로 목전에 다다랐다. 본과 4학년 학생들의 졸업 가능 여부와 국가시험 추가 응시 기회 제공 등은 복지부와의 협의도 필요하다. 기존 커리큘럼이 진행 중인상황에서 뒤늦게 복학하는 의대생들을 위해 대학이 교수와 공간을 특별히 제공해야 하는데, 과정과 학사 운영 부담이 여간 벅찬 게 아니다. 의대생들의 갑작스러운 ‘전원 복귀’ 선언이 여전히 의료체계의 마비를 걸고 특혜를 노린 겁박 의도의 소산이라면 문제는 달라진다. 대학의 유급 결정이 이어지자 이를 무효로 만들려는 시도가 아니냐는 일각의 의구심에 대해서는 분명한 규명이 필요하다. 물론 ‘의대생 전원 복귀’라는 변곡점을 잘 소화하여 피폐해진 의료체계를 하루빨리 정상화해낼 책무는 당연히 정부 당국과 정치권의 몫이다. 의정갈등이 빚어내고 있는 의료시스템 붕괴와 왜곡 현상으로 인해 국민 건강 균형은 피로도가 극에 달하면서 심각하게 어긋나 있는 게 사실이다. 효과적인 소통을 일궈내지 못한 채 정책을 줄곧 밀어붙인 전 정부의 무능이나 힘없는 환자를 볼모로 의사로서의 엄중한 사회적 책무를 내팽개친 무정한 의료인들이 빚어낸 ‘무책임한 갈등’을 아픈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어쨌든 의료개혁의 해야 할 것 아닌가. 세상의 모든 갈등을 오직 ‘남탓’으로만 덮어씌워 놓고 해법을 떠밀어대는 어리석음은 이제 끝내야 한다. 의료인들이 적극적으로 주도하여 직접 만든 의료개혁안이 온 국민의 지지를 받는 그 날이 오길 고대해 마지않는다. 의정갈등의 암담한 터널 속에서 불의의 질병을 앓다가 속절없이 스러져 간 수많은 국민의 삶을 긍휼과 반성의 눈으로 되돌아볼 시간이다.
미국에 사는 한 노파가 변호사에게 두 가지 유언을 했다. 첫째는 죽게 되면 화장할 것. 두 번째로는 유골은 반드시 뉴욕 맨해튼 최대 번화가에 뿌려줄 것이었다. 의아했던 변호사가 노파에게 물었다. “왜 하필이면 뉴욕 맨해튼입니까?” 노파는 말했다. “쇼핑을 좋아하는 내 딸들이 반드시 일주일에 두 번은 방문해 줄 것 같아서요.”라고. 사람도 나이 들어 동진강 폐선 같이 뻘 속에 처박혀 있는 듯하면, 한국이나 미국이나 관심 밖의 삶으로써 비루먹은 망아지 꼴이 되는가 싶다. 나는 해방둥이 세대로서 스스로의 심장을 펌프질하며 열광하는 삶을 살아야 할 이유가 분명했다. 그 힘으로 가정의 안정과 가족들을 건사했다. 열광하는 삶에서 한결같은 삶을 고집하며 살아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바쁠 것 없는 노인세대가 되었다. 미국 노파의 심정을 이해하고 넘어가야 할 남은 인생의 계절이다. 그래서인지 유머 같은 노파의 이야기가 울음보다 더 서글픈 정서의 현을 건드린다.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청년의 꼭지점에서는 우정에 대한 철학도 자못 심각했다. ‘대신 죽어줄 친구나 천하를 반분할 수 있는 우정의 도를 저울질하기도 했다. 공무원으로 취직하기 위해서는 신원조회가 필수였다. 그 당시 신원조회서 양식에는 친구 이름을 적도록 되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은 사회적 상식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좋은 친구가 될 노력보다 편하게 대해주는 친구가 좋다는 이기심도 컸다. 고향 친구가 좋다는 뿌리의식과 성취의 성향에 따른 길동무가 좋기도 했다. 나에게는 국립대학과 교육계에서 근무하던 가까운 친구가 있었다. 안정된 직장에서 세상사 따질 것 없이 살아가는 선한 친구들이었다. 그 친구들과 만나 술을 마시며 여행 일정도 잡아 함께 떠나 낯선 길 위의 시간을 공유하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내 몸과 정신에는 열정이 넘쳤다. 함께 술을 마실 때, 오늘은 2차 3차 갈지도 모르니 내 몸의 소화기관에 잘 부탁한다고 하면 그런대로 들어주었다. 그 무렵 친구들과 안골에 있는 ‘송아지’라는 음식점을 가끔 들렀다. 젊은 주인은 산을 좋아해 등산을 자주 한다고 했다. 나는 산악연맹 고문이었기에 그와의 대화는 반죽이 맞았다. 여름날 그 집에서 술을 마시게 되었을 때다. 말수 적은 친구가 내게 건배사를 하라고 했다. 갑작스러웠다. 머릿속 회전 속도를 죄며 생각해 보아도 멋진 건배사가 떠오르지 않았다. 옆에서는 젊은 아가씨가 우리에게 서빙을 하고 있었다. 생각 끝에 몇 가지 건배사에서 콕 찍어다 쓴다는 게 ‘마돈나’이었다. 내가 ‘마돈나’ 하면 함께 ‘마돈나’ 하자고 했다. 이어서 내가 선창을 하고 같이 술잔을 부딪치며 “마돈나”를 크게 외쳤다. 옆에 있던 아가씨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마시고 돈 내고 나가자는 뜻’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친구들과 함께 한바탕 크게 웃었다. 날씬한 몸매에 서글서글한 눈매의 아가씨는 명 건배사라고 하고서 웃음을 날리며 주방을 향해 걸어갔다. ‘마돈나’라고 하면 미국의 음악가요 배우로서의 마돈나(Madonna)가 떠오른다. 우리 시대의 젊음을 고스란히 껴안아 섹시하게 느껴졌던 여인이다. 그래서 나는 잊어먹지 않고 기회가 오면 마돈나를 선창하곤 한다. 건배사는 ‘하늘 건(乾)’, ‘마를 건’으로서 술잔을 쉽게 비우자는 뜻이다. 조선시대 선비들도 원 샷을 즐겼다고 하는 것을 보면, 술 마시는 분위기도 시원시원한 모습이 좋았던 것 같다. 건배사는 분위기를 모아 주석의 흥을 돋우는 아나운서의 멘트 같은 것으로 자축의 뜻이 크다. 그런데 보통 술자리에서는 그 순간의 기분을 살려 사양하지 말고 즐겁게 마시자는 의미가 우선이다. 그래서일까. 젊은 층에서는 ‘마취제’ (마시고 취하는 게 제일이다)라는 건배사를 많이 쓰고, 중국의 건배사에는 ‘우정이 깊으면 링거 맞는 것도 두려워하지 말고 마셔’라는 건배사가 있다고 한다. ‘인생이 쓰면 술이 달다.’는 말이 있다. 이제는 가슴 뛰는 즐거움도, 내일 죽어도 오케이 하면서 술 마실 일도, 체력도, 주변사람도 없다. 세상도 사회도 미국의 노파 같이 외롭고 건조할 뿐이다. 그래도 마음만은 친구들과 즐거운 마음으로 술 한 잔 마시며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을’ 노래하면서, ‘푸른 건배사’로써 힘껏 “마돈나!”를 외치고 싶다. 이 더위에 건배사라도 푸르고 희망찬 기운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6월은 계절의 경계에 선다. 봄은 자취를 감추고 여름의 숨결이 서서히 일상을 감싼다. 햇살은 짙어지고 공기는 점점 무거워진다. 예로부터 사람들은 무더위를 이겨내기 위한 자신만의 지혜를 찾아왔다. 그중 하나가 바로 술이다. 단지 취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계절을 건너는 한 방식으로서의 술. 바로 과하주(過夏酒)다. 과하주는 이름 그대로 ‘여름을 지나기 위한 술’이다. 1418년 '조선왕조실록'에 처음 등장하며, 조선시대 양반가에서는 주로 5월 무렵 담가 초여름부터 마셨다. 높은 온도에서도 상하지 않도록, 발효주에 증류주인 소주를 더해 보존성을 높였다. 그 풍미는 더위에 지친 몸과 마음에 묵직한 안정을 주었다. 무더위를 이겨내는 데 중요한 건 단순한 시원함이 아니라, 어쩌면 그런 ‘깊이’였는지도 모른다. 맛은 한마디로 깊고 조화롭다. 구수한 곡물 향이 먼저 퍼지고, 뒤이어 진한 단맛과 은은한 산미가 느껴진다. 차가움으로 혀를 자극하기보다, 온전한 발효가 주는 풍미로 입안을 부드럽게 감싼다. 특히 간장이나 된장 같은 짭조름한 장맛과 잘 어울려, 여름철 보리밥이나 찌개류와 곁들이면 더욱 궁합이 좋다. 고문헌에서나 찾아볼 수 있었던 과하주를 지금은 몇몇 양조장에서 전통 방식을 되살려 그 깊은 맛을 이어가고 있다. 느리고 정성스러운 발효가 필요한 술인 만큼, 그 풍미는 현대인의 입맛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빠르게 흘러가는 계절 속에서 잠시 멈추어, 과거의 ‘슬로우 라이프’를 음미하게 해주는 술이다. 대표적인 과하주로는 화양의 ‘풍정사계 하’, 술아원의 ‘경성과하주’, 지시울의 ‘화전일취 백화’, 한통술의 ‘과하주 힙 스칼렛’, 객제의 ‘감탄주’, 국순당의 ‘백세주과하’, 제이앤제이브루어리의 ‘청혼골드’, 노금주가의 ‘일지춘과하주’, 한영석발효연구소의 ‘여해과하주’ 등이 있다. 여름은 누구에게나 버겁다. 햇살이 지나치게 강하거나 숨 막히는 밤이 계속될 때, 시원한 맥주 대신 서늘하게 식힌 과하주 한 잔을 택해보자. 입술에 닿는 순간, 조선의 여름을 건너던 선인들의 지혜가 고요히 스며든다. 과하주는 단지 마시는 술이 아니라, 계절을 견디는 지혜다.
내년 최저임금이 시간당 1만 320원으로 결정됐다. 1만 320원은 올해 최저임금(1만 30원)보다 290원(2.9%) 높은 금액으로서, 내년도 최저임금의 월 환산액(월 노동시간 209시간 기준)은 215만 6880원이다. 이번 최종안은 2008년 이후 17년 만에 근로자·사용자·공익위원 합의로 결정돼 특별한 의미가 있다. 이번 결정을 계기로, 걸핏하면 극한 갈등으로 치닫는 노사문화에 양보와 타협의 미덕이 깊게 퍼지면서 ‘상생 정신’이 폭넓게 발현되는 변화가 나타나길 기대한다. 최저임금을 심의·의결하는 노·사·공 사회적 대화 기구인 최저임금위원회는 정부세종청사에서 지난 10일 제12차 전원회의를 열고 2026년도 최저임금을 이같이 의결했다. 내년도 최저임금은 근로자위원 중 민주노총 위원 4명이 불참한 가운데 노·사·공 위원 23명의 합의로 결정됐다. 이번 인상률은 1%대였던 올해(1.7%)나 2021년(1.5%)보다는 높지만 상당히 낮은 수준이다. 특히 역대 정부 첫해 인상률 중에서는 두 번째로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최저임금위원회는 이미 지난 회의 때 공익위원 심의 촉진구간(1.8%∼4.1%)이 제시된 상황에서 이날 마무리 짓는 것을 목표로 심의에 들어갔다. 민주노총 위원 4명이 예상보다 낮은 심의 촉진구간에 반발하며 퇴장해 근로자위원은 한국노총 측 5명만 남았으나, 노사는 9·10차 수정안을 제시하며 격차를 좁혀 나갔다. 10차 수정안에서 노동계는 1만 430원, 경영계는 1만 230원을 제시해 격차는 200원까지 줄었고, 이후 공익위원들의 조율 등에 힘입어 최종 합의에 도달했다. 노·사·공 합의를 통한 최저임금 결정은 1988년 최저임금 제도 도입 이후 8번째다. 가장 최근 합의는 2008년 결정된 2009년도 최저임금이 마지막이었다. 최저임금위원회는 의결한 내년도 최저임금안은 내년 1월 1일부터 효력이 발생한다. 최저임금위원회에 사용자 측으로 참가한 한국경영자총협회는 대체로 긍정적인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이재명 정부 출범 전부터 최저임금 대폭 인상을 요구했던 노동계는 예상을 벗어난 인상 폭에 반발하고 있다. 최저임금제도로 인해 가장 영향을 크게 받으면서도 논의기구에서 번번이 제외되는 소상공인연합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인상을 최대한 자제했다곤 해도 여전히 누적된 인건비 인상 여파 등으로 한계에 몰려 있는 소상공인 처지에선 부담이 과도한 게 사실이다. 지난해 폐업 신고를 한 사업자가 처음으로 100만 명을 넘었다. 이번 최저임금 결정 이후 “일자리안정자금 부활, 소상공인 경영 안정 자금 지원 확대 등 다각적인 방안을 실효성 있게 마련하라”고 목소리를 낸 소상공인연합회의 주장에 귀를 기울여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최저임금은 실업급여, 육아휴직급여 등 수십 개 법령과 연동된 국가 정책의 주요 기준으로서 그 영향력이 막대하다. 객관적 지표에 근거하고 업종·지역별 여건 등을 고려해 최저임금을 합리적으로 결정하는 틀을 더욱 발전시키는 일은 해묵은 숙제로 그대로 남아 있다. 노사 갈등이 여전히 전방위 갈등 환경의 뿌리 중 하나인 우리 국가사회에서 모처럼 노·사·공 합의 방식으로 최저임금이 결정됐다는 것은 가볍지 않은 의미를 남긴다. 결과에 불만이 많은 노동조합 측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지만, ‘합의’의 관행을 구축하는 일의 커다란 가치를 더 높게 인식해야 한다. ‘상생’이라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갈등구조 혁신은 이 시대의 온갖 난제의 해법을 관통하는 키워드다. 생각이 다르고, 이해관계가 다른 계층 집단의 협상에서 ‘양보와 타협’보다도 더 유용한 미덕은 없다. 세상 모든 협상을 전쟁처럼 여겨 ‘전부가 아니면 전무(全無)’라는 극단적 승패의 눈으로 바라보는 이 못된 습성부터 바꿔야 한다. 17년 만에 이룬 최저임금 근로자·사용자·공익위원 합의 결정을 가벼이 보지 말자.
이재명 대통령이 경기도지사 시절이던 2019년 시행했던 “청정계곡 복원 사업”을 통해 경기도의 청정계곡을 전 국민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한 지 6년 차에 접어들었다. 나는 가평군의 청정계곡이 있는 마을의 주민들과 함께 계곡을 생태친화적으로 관리하는 것은 물론 계곡 주변 주민들의 삶의 질도 향상시키는 마을공동체 사업을 지원하고 있다. 아직도 피서객들의 무질서한 계곡 이용으로 오염과 눈살 찌푸리는 상황이 안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처음에 비해 자율적으로 생태친화적인 피서를 하는 분들이 늘어나는 긍정적인 변화를 체감하고 있다. 큰 변화 중 하나는 계곡에서 고기를 구워 먹는 등의 불법 취사를 하기보다는 도시락에 조리된 먹거리를 담아와서 먹고 빈 그릇을 그대로 가져가 쓰레기 발생도 줄이는 피서객들이 늘었다. 음식물 쓰레기 봉투를 가져와서 발생한 쓰레기를 갖고 가는 일들도 늘어났다. 특히 수박 같은 경우는 쓰레기양이 많아서 아예 집에서 먹기 좋게 썰어서 도시락에 담아와 먹는 경우도 늘어나는 추세다. 그런데 최근 물놀이 현장에서 자주 발생하는 난감한 상황이 바로 반려견 수영의 경우다. 국립·도립·군립공원의 경우 '자연공원법'에 의해서 반려견 출입 자체를 제한할 수 있지만, 대부분의 일반 하천 및 계곡은 명시적인 법규가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동물보호법' 제16조(등록대상동물의 관리 등)에 따르면 견주는 외출 시 ‘목줄’ 착용이 의무화돼 있다. 이 조항에 따라 판단해 본다면 사람이 많은 피서지에서 반려견 수영 시 ‘목줄’ 착용을 하지 않으면 법을 위반하게 된다. 그런데 만약 목줄을 하고 반려견 수영을 시킨다거나 물놀이를 함께 할 경우는 어떻게 될까? 잘 훈련받은 반려견을 보며 즐거워하는 피서객들도 있지만 반려견의 배설물, 털, 그리고 질병 전파 가능성 등 위생 및 수질 오염 문제로 인해 반려견을 계곡물에 데리고 들어오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피서객들도 있다. 그러다 보니 종종 피서객들끼리 낯을 붉히는 경우가 생긴다. 경기도는 여름 휴가철 하천·계곡의 수질 관리 특히 대장균 수치 등 위생과 관련한 조사를 정기적으로 실시한다. 만약 그 수치가 기준을 초과하면 이용객과 주민의 물놀이는 중단될 수도 있다. 아직 그런 일이 있었다는 소식을 들어본 적은 없지만 위생과 관련해 예민한 분들은 반려견의 출입에 매우 강한 거부감을 표현한다. 반려견 수영 막아달라고 계곡지킴이 역할을 하는 주민들에게 요구를 하지만 누구 편을 들기가 어렵다. 독자들의 의견은 어떤지 궁금하다. 인공지능 검색을 해보니 외국도 반려견 수영에 대해서 지역마다 기준이 다르다고 알려준다. 수질 오염, 다른 이용객과의 마찰을 방지하기 위해 제한하는 곳도 있고, 반려견 전용 수영 구역을 마련하는 곳도 있다고 한다. 지자체는 자체 조례를 통해 특정 하천이나 계곡의 이용에 대한 규칙을 정할 수 있다. 우리나라 전체 가구 중 반려견을 키우는 가구 비율이 2024년 기준 26.7%라고 한다. 4가구당 1가구꼴이다. 다양한 반려동물들까지 생각한다면 그 수는 더 늘어난다. 만약 자신이 기르는 뱀을 계곡물에 수영하게 해준다면? 위생적으로 뱀이 반려견보다 문제가 없을지 모르지만 심리적인 거부감은 더 클 것 같다. 지자체마다 관련 조례를 서둘러 만들어야 할 것 같다.
K-Pop 데몬 헌터스의 OST가 미국 스포티파이 차트 Top 10을 도배하는 것을 보면서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에스파의 ‘광야’ 컨셉은 옳았다. SM이 틀렸던 것이 아니라 너무 빨랐던 것이다. 버추얼 아이돌은 먹힌다. 버추얼 아이돌과 사람 아이돌의 시너지의 현실화가 목전이다. 그래서 뉴진스의 퇴장이 새삼 다시 안타깝다. K-컬쳐가 또다시 상승장의 물결을 탔는데, 물이 들어 오고 있는데, 노 저을 사공이 하나라도 더 있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버추얼 아티스트의 이점을 ‘휴먼 리스크’가 없다는 점에서 찾는다. 휴먼 리스크 중 상당 부분이 법률 리스크다. 멀게는 동방신기의 해체부터 가깝게는 뉴진스의 가처분까지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휴먼 리스크는 결국 법정을 무대로 삼는다. 국내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가장 큰 리스크 중 하나가 법정 싸움이다. 우리의 ‘높은 문화의 힘’을 더욱 드높이려면, 법질서의 분쟁 해결 기능이 더 나아져야 한다. 소송은 이기고 지는 싸움이다. 전부 아니면 전무(All or nothing), 1 아니면 0이 되기 마련이다. 현실의 분쟁이 전적인 선과 전적인 악 사이의 대결인 경우는 거의 없다. 시시한 약자와 시시한 강자의 싸움인 경우가 훨씬 많다. 그런데도 소송이 시작되면 누군가는 이기고 누군가는 져야 한다. 법원이 이 문제를 가장 잘 안다. 그래서 당사자들의 합의를 권하고, 화해를 권고하고, 사건을 조정에 회부한다. 정부도 이 문제를 잘 안다. 그래서 다양한 재판 외 분쟁 해결 절차를 운영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사법형 조정 기관과 행정형 조정 기관이 십수 개가 넘는다. 건설, 환경, 방송, 통신, 의료, … 분야도 다양하다. 조정 제도는 실제로 분쟁을 사전에 신속하게 진화시키는 효과가 있다. 당사자들의 재판청구권을 존중하여 일방의 의사만으로 조정을 거부할 수 있게 만들더라도 여전히 효과가 있다.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분쟁도 소송이 아닌 조정에 의한 분쟁 해결, 승자와 패자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패자가 되지 않을 수 있는 활로를 찾아 주는 재판 외 분쟁 해결이 국룰로 정착되도록 할 수는 없을까? 아티스트의 잘못이 명백한 사안도 있고, 반대로 기업의 잘못이 명백한 사안도 있다. 그러나 그 어느 경우이든 가처분부터 대법원 판결까지 수년간 소송을 거치면서 승자와 패자를 나누는 것은 최종 승자에게도 출혈이고, 최종 패자에게는 파멸이며, 산업 전체에는 손실이고, “한류”에 유해하거나 무익하지, 유익하지는 않아 보인다. 결과적으로는 변호사 빼고 모두가 패자다. 인간 아티스트들의 휴먼 리스크, 특히 법률 리스크가 소모적인 소송전으로 현실화되어 거위 배 가르기로 끝나버린다면, 십수 년에 걸친 업계인들의 투자는 허공으로 사라지는 것이고, 미래 먹거리의 가능성들도 없어져버리는 것이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개인의 인성을 욕하거나 개별 기업의 추태를 욕하고 끝낼 일이 아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들”의 양성을 고민해야 한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언론중재위원회와 유사하게, 엔터테인먼트분쟁중재위원회라도 만들면 어떨까.
1919년 3·1운동 때 수원지역에서는 격렬한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지식인과 학생, 상인, 종교인, 농민, 그리고 사회적으로 천시되던 계급인 기생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계층이 적극 참여했다. 그러나 국가로부터 서훈이나 표창을 받지 못한 독립운동가들이 많다. 남아 있는 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올해는 광복 80년이 되는 해이다. 무심한 세월이 흘러 자신의 생명과 재산, 가족까지 포기하면서 나라와 겨레를 위해 헌신한 애국지사들은 잊혀 가고 후손들은 여전히 곤궁한 생활을 면치 못하고 있다. 반면 친일 매국노들의 후손은 정·재계, 심지어 학계에서도 주류로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조선총독부로부터 받은 친일재산을 돌려달라는 소송전도 벌이고 있다. 송병준은 친일파 중에서도 악질로 꼽힌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 해산과 내정권 이양을 일본에 넘긴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에 찬성한 7명의 친일파인 정미칠적(丁未七賊) 중 한명으로 일제 식민지화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한 민족적 배신자다. 그의 증손자가 인천 부평구 미군부대(캠프마켓) 일대 땅 약 13만평(36만 5000㎡)을 돌려달라며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그러나 2011년 재판부는 “해당 부동산은 친일반민족행위자 송병준이 조선총독부로부터 받은 친일재산에 해당돼 국가 소유라고 판단한 원심은 정당하다”고 판결했다. 하지만 을사오적 중 한명으로 대표적인 친일 매국노의 대명사 이완용의 증손은 친일 행위로 형성한 재산을 매각해 해외로 이주했다. 이완용으로부터 물려받은 서울 북아현동 일대 2354㎡(약 712평)의 땅을 팔아 캐나다로 떠난 것이다. 이에 광복회는 “친일반민족행위자들에게 ‘친일 재산을 빼돌리는 법’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정부의 중대한 직무유기가 아닐 수 없다”며 수사기관의 수사를 촉구했다. 참담한 일이다. 이제라도 친일무리들이 저지른 악질적 매국매족행위에 대한 상세한 연구와 엄정한 평가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아울러 온몸으로 일제에 저항한 애국지사들의 기록을 찾아내 서훈과 표창 등 포상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그런 면에서 수원시가 펼치고 있는 독립운동가 발굴사업을 칭찬한다. 수원시는 2008년 수원박물관 개관 후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독립운동가를 발굴하고, 그들이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을 수 있도록 끊임없는 노력을 펼쳤다. 수원시는 광복 80주년을 맞아 그동안 발굴한 13인의 독립운동가 특별기획전을 수원광교박물관에서 12월까지 열고 있다. 전시회에 소개된 13인의 독립운동가는 수원시가 발굴해 국가서훈을 받은 인물들이다. 기생 신분으로 만세운동을 했던 김향화(1897~미상)지사는 1919년 3월 29일 수원예기조합원 30여 명과 건강 검사를 받으러 가던 도중 화성행궁을 헐고 지은 수원자혜의원 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현장에서 체포돼 극심한 고문을 받았다. 고등학생 신분으로 비밀결사 조직을 결성하고 상해 임시정부로 건너가려다 체포돼 모진 고문 끝에 순국한 이선경(1902~1921)지사도 있다. 반제국주의 기사를 기고한 혐의로 옥고를 치른 유병기(1895~미상), 일제의 수탈로 고통받던 소작농을 돕기 위해 농민조합 활동을 했던 장주문(1906~미상), 세 번의 옥고에도 독립운동을 멈추지 않았던 차계영(1913~1946), 노동자와 함께 독립운동에 나선 수원의 두 여성 최경창(1918~미상)과 홍종례(1919~미상) 등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의 위대한 활동이 소개되고 있으니 반드시 방문하길 권한다. 수원박물관은 최근 김노적(1895.~1963), 이현경(1899.~미상), 문용배(1916.~미상), 윤경의(1893.~미상), 임학수(1923.~미상), 정재억(1910.~미상), 최병두(1925.~미상) 지사 등 총 7명의 수원 출신 독립운동가에 대한 포상을 국가보훈부에 신청했다. “후손이 없거나 증거자료가 부족해 아직 서훈을 받지 못한 인물의 숭고한 희생을 밝힘으로써 후손들에게도 그 정신이 이어지기를 바란다“는 수원박물관 관계자의 마음은 우리와 같다.
정부가 야심차게 내세운 ‘민생회복 소비쿠폰’ 정책은 당초엔 국비 80%, 지방비 20%를 부담하는 구조로 설계됐고, 이에 대해 많은 지방정부들이 재정 부담을 호소했다. 이후 국회 논의 과정에서 ‘전액 국비’로 수정되며 일말의 안도감이 돌았지만 결국 마지막 순간,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 다시 지방정부가 10%를 부담하는 ‘9:1 분담안’으로 뒤집혔다. 과연 이 과정을 이해할 수 있는 국민이 얼마나 될까. 처음엔 정부 스스로가 말했다. 지역의 재정 여건을 고려해 전액 국비로 지원하겠다고. 책임 있는 자세, 공약 이행의 의지로 읽혔다. 그런데 불과 며칠 만에 다시 지방비 10%를 부담시키는 구조로 후퇴했다. 국회 예결위는 이 결정의 이유를 명확히 밝히지도 않았다. 중앙정부가 지역 여건을 고려하겠다는 것과 달리 정작 국회는 지역 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결정을 내렸다. 국회의원은 ‘국가 전체’를 위한다는 명분과 함께 각자의 ‘지역 대표성’을 바탕으로 존재한다. 국회가 가장 중요한 ‘지역의 재정 현실’을 외면한 채 지방정부에 추가 부담을 안긴 것이다. 그런 가운데 일부 지역에서는 지방의회 의원들조차 이번 소비쿠폰 정책에 반대하며 전액 기부 의사를 밝히고 있다. 단순한 ‘기부 퍼포먼스’가 아니라 지역의 열악한 재정 상황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체감하고 있는 시의원으로서의 현실적 판단이다. 시민의 세금이 결국 빚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구조라면 현금성 소비쿠폰이 능사가 아니라는 입장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처럼 지역 사정을 가장 잘 아는 시의원들마저 우려를 표하고 있는 마당에, 정작 지역을 대표한다는 국회의원들이 ‘재정건전성’에 대한 고민 없이 이런 구조를 확정지었다는 점은 더욱 뼈아프다. 지역의 목소리를 중앙에 전달하라고 뽑은 사람들인데, 현실은 지역의 고통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지방의 시의원만도 못한 국회라면 그 존재 이유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인천시만 해도 이번 사업으로 인해 수백억 원의 지방비를 추가로 마련해야 한다. 이미 빠듯한 살림에 빚을 내서라도 중앙정부의 공약을 뒷받침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게 과연 온당한 일인가? 중앙의 책임을 지방에 전가하고, 지방은 빚을 내 중앙정부의 손을 들어줘야 하는 구조, 이것이 과연 ‘공정한 분담’인가? 더 큰 문제는 신뢰다. 정부가 전액 국비로 부담하겠다고 밝히자, 지방정부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인천시 역시 당초 1700억 원 가까운 지방비 부담을 계산하며 지방채 발행까지 검토하던 절박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다행’이라던 분위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불과 며칠 만에 다시 ‘지방비 분담’이라는 말이 흘러나왔고, 말 바꾸기도 문제지만, 그에 따른 책임은 아무도 지지 않았다. 지방은 다시 원점에서 재검토에 들어가야 했고, 빚을 내서라도 중앙의 공약을 떠맡아야 할 판이다. 이것이 과연 신뢰 기반의 정책 결정인가? 정책 발표는 빠르고 요란했지만, 정작 책임과 재정 구조는 끝내 불투명했다. ‘속도’와 ‘실용’을 내세웠지만, 현장에선 ‘혼선’과 ‘혼돈’만 남았다. 지방정부가 없는 중앙정부도 없고, 현장을 외면한 공약이란 그저 종잇장에 불과하다. 중앙정부가 정말 국민을 위한다면 그 책임도 자신이 져야 한다. 빚을 내서 공약을 대신 이행하는 것이 지방의 역할이어선 안 된다. 이런 구조가 반복된다면 지방정부는 점점 스스로 결정하고 실행할 수 있는 여지를 잃게 될 것이다. 재정은 줄고, 정책은 정해져 있고, 선택지는 사라진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지방자치를 하고 있는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지방의 재정 여건을 안다고 했던 그 말, 책임지겠다는 약속, 이제 와서 되돌릴 수 없다면 적어도 구멍 난 지방 재정을 다시 메울 수 있는 실질적인 대책부터 내놓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