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를 졸업한 지 오래인데도 나는 아직도 때때로 시험을 보는 꿈을 꾼다. 시간에 쫓겨 문제지를 다 풀지 못하거나, 백지의 답안지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는 꿈이다. 깨고 나면 꿈이었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얼마 전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른 고3 수험생들을 보며, 그 꿈이 다시 떠올랐다. 우리는 학교를 떠났지만, 여전히 각자의 삶에서 자기만의 문제지를 풀고 있는 수험생 같은 존재가 아닌가 싶었다. 어른이 되면 시험이 끝날 줄 알았다. 그러나 시험은 늘 삶의 다른 형식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점수나 성취의 문제가 아니라, 삶이 끊임없이 던지는 질문에 답을 찾는 과정이었다. 우리는 어떤 지점을 넘어야만 다음으로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중요한 순간들 앞에서 흔들린다.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그 선택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더 많은 선택을 복잡한 방식으로 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예상과 전혀 다른 상황에 빠지게 되는 순간도 있다. 기대보다 실망을 안겨주었던 자리가 오히려 자신에게 필요한 기회가 되기도 하고, 반대로 큰 기대를 품었던 일이 나와 맞지 않는 자리임을 시간이 지난 후에 알았다. 가까스로 잡은 기회를 놓쳤을 때, 오랫동안 준비한 일이 허사로 돌아갔을 때 모든 것이 끝난 듯 보였지만, 실은 어느 것도 끝이 아니었다. 돌아보면 우리는 이미 수많은 문을 지나왔다. 한 개의 문을 통과하면 또 다른 한 개의 문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두 개 혹은 세 개, 그보다 더 많은 문이 앞에 있었다. 그것은 통과해야 하는 문이기도 했지만, 선택해야 하는 방향이기도 했다. 활짝 열려 있는 문이 있었고, 아무리 두드려도 열리지 않아 절망하던 순간이 있었다. 때때로 길을 잘못 든 적이 있었지만, 그 길을 지나오지 않았다면 지금의 자리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라는 사실도 뒤늦게 알게 되었다. 무엇이 되느냐가 삶의 목적이었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어떤 형태로 살아가든 그것은 결국 삶을 유지하기 위한 여러 방식 중 하나였을 뿐이었다.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나 자신으로 남는 일. 그 단순한 사실을 이해하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했다. 앞으로도 우리는 여러 번 멈추고, 여러 번 길을 잃고, 다시 방향을 바꿀 것이다. 어떤 선택은 너무 성급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또 어떤 것은 뒤늦게 의미를 드러낼 것이다. 때로는 놓쳐 버린 것을 아쉬워할 수도 있지만, 그것들 덕분에 새로운 길이 열렸다는 걸 깨닫는 순간도 있을 것이다. 인생은 단 한 번의 선택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개의 문을 두드리고 열어보며 조금씩 자신에게 맞는 길을 찾아가는 과정에 가깝다. 그러니 망설이는 시간이 길어도 괜찮다. 그 망설임 속에서 자신이 가야 할 방향이 조금씩 드러나기 때문이다. 열여덟이거나 열아홉인 그대들, 혹여 기대만큼의 결과가 나오지 않아도 괜찮다. 아무것도 망치지 않았고,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지금 앞에 놓여 있는 문은 여러 개 중 하나일 뿐이라는 것을 기억하면 좋겠다. 어른들 또한 그렇게 수십 번 멈추고, 돌고 돌아 여기까지 왔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다. 그러니 절망은 가장 늦게 습득하는 언어이기를, 어떤 문이라도 거침없이 밀고 잡아당기기를, 그리고 열린 곳을 향하여 한 걸음씩 나아가기를 응원한다.
수도권 북부 지역, 특히 접경지역은 한국전쟁의 정전협정 체결일인 1953년 7월 27일 이후 지금까지 72년 넘게 국가 안보를 위해 제약을 받아왔다. 중첩된 규제로 인해 주민 삶의 질은 상대적으로 저하되고 오지나 다를 바 없는 환경을 인내하며 살아야 했다. 정부는 2011년 접경지역 발전종합계획을 수립했고 2019년엔 이 계획의 일부를 수정했다. 투자실적이 없거나 실현 가능성이 낮은 민자 사업들을 과감히 조정하고 사업추진 효율성을 높이겠다는 것이다. ▲남북 교류협력 기반조성 ▲생태·평화 관광 활성화 ▲생활 SOC 확충 등 정주여건 개선 ▲균형발전 기반구축 등의 사업이 추가됐고 2030년까지 13조2000 억 원을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지역민들은 근본적인 대책이 마련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접경지역을 수도권정비법상 수도권에서 제외해달라는 것이다. 수도권정비법의 제정 사유는 수도권의 과도한 인구 및 산업 집중을 억제하고 국토의 균형 발전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지역 개발을 저해하고 인구 감소와 경제 침체를 가속화한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이에 지난 9월 박정 국회의원(더불어민주당, 파주시을)과 김성원 국회의원(국민의힘, 동두천시·양주시·연천군)은 ‘접경지역 지원 특별법’ 일부 개정 법률안을 대표 발의했다. 국가가 접경지역 농민들의 영농활동을 보장하고 안전을 확보하도록 하는 내용이다. 개정안은 국가가 접경지역 영농활동을 보장·지원하도록 하는 책무를 명시했으며 지뢰 등으로 인한 피해 방지 조치를 국가가 취하도록 하고 군사 활동으로 불가피하게 영농활동을 제한할 경우 최소한의 범위로 그치도록 하는 원칙을 신설했다. 개정안은 지난 12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에 상정됐다. 또 다른 문제점은 미군기지가 이전됨으로써 지역 경제 기반이 약화됐다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반환 공여지의 개발 가능성 또한 낮다. 이에 국회에서 주한미군 반환공여지에 대한 특별법 개정안이 잇따라 발의되고 있다. 이재강 의원(더불어민주당, 의정부을)은 ‘주한미군 공여구역주변지역 등 지원 특별법’과 ‘정부조직법’ 일부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미군공여지 개발을 총괄하는 정부조직 개발청을 신설하고 미군공여지와 주변지역은 국토부 장관이 우선 개발제한구역 해제를 검토할 수 있는 내용이 들어 있다. 박지혜 의원(더불어민주당, 의정부갑) 역시 미군공여지를 도로, 공원, 주차장 등 공공목적으로 임시 사용하는 경우 무상사용을 허용하는 등의 내용이 담긴 개정안을 발의했다. 김병주(더불어민주당, 남양주을) 최고위원도 ‘주한미군 공여구역주변지역 등 지원 특별법’ 개정안을 발의하고 12일 의정부시 가능동 캠프 레드클라우드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날 발표한 개정안의 주요 내용은 미군공여지 개발 방식을 ‘매각’에서 ‘임대’로 전환해 장기간 방치된 미군공여지 개발에 속도를 높이자는 것이다.(관련기사: 경기신문 13일자 3면, ‘주한미군 공여지, 임대 통한 개발로 해법 바꿔야’) 주한미군이 나간 뒤 반환된 공여지는 최대 20년 안에 분할상환 방식으로 매입해야 하는데 매입 우선순위는 공여지가 있는 지방정부다. 하지만 재정상태가 열악한 지방정부는 매입을 못하고 있다. 캠프 레드클라우드의 경우 부지 면적은 83만 6000㎡이며 매입가는 1조 3000억 원에 달한다. 따라서 장기간 방치되고 있는 공여지를 매입이 아닌 최대 99년 장기 임대방식으로 전환하고, 연간 임대료를 재산가의 1/100 수준으로 완화해 지방정부의 재정 부담을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공공시설 무상사용, 개발제한구역 우선 해제 등의 내용도 있다. 경기북부 주민들은 김 의원의 개정안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개정안이 통과되면 의정부 캠프 레드클라우드를 비롯한 경기북부 미군공여지의 개발이 속도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특별한 희생엔 특별한 보상이 필요하다’는 이재명 대통령의 말처럼 그동안의 희생에 대한 정당한 보상은 필요하다.
꼬꼬마 한의사 시절, 내가 인턴을 했던 병원은 중풍 전문병원이었다. 급성기 뇌경색·뇌출혈 환자들이 끊임없이 입원했고, 인턴들의 호출기는 하루에도 수십 번 울려댔다. 어느 날 점심 두어 숟갈을 뜨려던 순간, 호출기가 울렸다. ‘왼쪽 대뇌의 절반 이상이 손상된 중대뇌동맥 뇌경색 환자가 L-tube를 또 뽑았다는 연락’이었다. 전날에도 두 번 뽑은 분이었다. 병실로 올라가 튜브를 삽입하려 하자, 환자는 마비되지 않은 손으로 튜브를 잡아채 바닥에 내던졌다. 다시 넣으면 또 빼고, 실어증으로 인해 6인실 병동 전체가 울릴 만큼 우우우— 하고 울부짖는 소리만 들렸다. 다섯 번, 여섯 번. 잠시 생각이 스쳤다. “이렇게까지 거부하는데 꼭 넣어야 할까?” 그러나 당시 나는 열정적인 인턴이었다. 병실이 쩌렁쩌렁 울릴 큰 소리로 말했다. “지금 너무 힘들지만, 치료하면 좋아질 수 있어요. 그런데 이걸 끼어야 좋아질 수 있어요. 최선을 다해서 살 수 있을 만큼은 살아봐야 하잖아요.....”로 시작되는 이야기를 한지 5분이 지났을까 그의 눈빛이 흔들리며, 몸부림이 조금 가라앉았다. 나는 다시 L-tube를 삽입했고 그는 영양섭취가 가능해졌다. 25년이 지난 지금, 그때의 확신은 질문으로 바뀌었다. 만약 그 환자가 중증 치매였다면? 말기 암으로 고통만 남은 상태였다면? 혹은 그 자리에 내가 누워 있었다면, 나는 여전히 “살아야 한다”고 말할 수 있었을까? 최근 ‘죽을 권리’를 다룬 10여 편의 연구들을 살펴보면, 결론은 단순하지 않다. 많은 논문들은 먼저 “존엄”의 개념부터 다시 검토해야 한다고 말한다. 자기결정만을 존엄의 기준으로 삼기보다, 인간의 관계성·취약성·돌봄의 조건을 함께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 여러 연구는 조력죽음이 도입된 사회에서 취약 계층이 오히려 ‘죽어도 된다’는 압력을 받을 위험을 지적한다. 장애인·독거노인·경제적 취약층일수록 “삶의 부담을 타인에게 넘기지 않기 위해 죽음을 선택하는” 왜곡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경고다. 의료윤리 연구들은 또 다른 측면을 지적한다. 조력죽음은 환자의 선택 문제를 넘어서, 의사의 역할과 정체성 자체를 흔드는 문제라는 것이다. 생명을 지키는 것이 직업적 본질인 의료인이 죽음을 돕는다는 행위는 개인 윤리와 직업적 양심의 깊은 충돌을 낳는다. 한편 법제도를 분석한 논문들은 조력죽음을 안전하게 설계하는 것이 생각보다 훨씬 어렵다고 말한다. ‘회복 불가능성’ 판단, 반복적 의사 확인, 남용 위험 등은 완벽히 통제할 수 없으며, 제도화는 곧 사회적 가치의 큰 전환을 의미한다. 한국의 경우, 조력죽음은 허용되지 않고 임종 과정에서의 연명의료 중단만 가능하다. 의사 2명이 회생불가·급속 악화·사망 임박 상태를 확인해야 하며, 불필요한 연명치료만 중단할 수 있다. 즉 한국의 제도는 “죽음을 선택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다한 생명에 무의미한 고통을 더하지 않도록 하는 것”에 가깝다. 결국 질문은 죽음이 아니라 삶의 조건으로 돌아온다. L-tube를 뽑던 그의 마음은, 짐작컨데 고통을 견딜 수 없다는 표현이 아니었을까. 최근 연구들이 공통으로 말하는 것도 같다. 죽을 권리를 말하기 전에,사람이 버티고 살아갈 수 있는 ‘조건과 돌봄’을 먼저 갖추어야 한다. 죽을 권리에 대한 질문은 답이 미완이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논의되어야 할 것은 살 수 있는 권리, 견딜 수 있는 삶의 환경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소사역 앞이 분주합니다. 성모병원 쪽으로 뚫린 굴은 삼 번 출구입니다. 장례식장도 가톨릭대학도 그쪽에 있습니다. 병원까지 가는 길은 재개발 공사가 한창입니다. 집은 뜯기고 땅은 파였습니다. 재개발 공사로부터 자유로운 건물은 성당뿐입니다. 그래설까요. 그쪽을 향해 굴을 나서는 이들의 얼굴에는 늦가을이 만연합니다. 아니, 설익은 초겨울이라고 해야 더 어울릴까요. 일 번 출구 역시 붐비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소사지구대 방향인데, 길을 건너면 오십 층 아파트가 즐비합니다. 나이 지긋한 동네를 헐어내고 새롭게 지은 젊은 아파트 단지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걸 도시재생이라고 부릅니다. 주거재생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정확한 뜻은 잘 모르겠습니다. 언제부터였을까요. 당신과 내가 사는 세상에서는 새것이 대접받습니다. 번뜩이고 아찔한 신상일수록 귀한 몸값을 받습니다. 집도 옷도 차도 신상이라야 값을 쳐줍니다. 패션도 기술도 취향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래 묵을 시간조차 허락하지 않는 게 나와 당신이 사는 세상입니다. 신상이 아닌데도 대접받는 건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뿐입니다. 골동품이거나 보석이거나 주식이거나 땅문서가 아니고선 내밀기조차 부끄럽습니다. 아침을 먹고 느긋하게 나섰으니까, 열 시쯤 됐을까요. 도로에 그려진 횡단보도 표시를 보며 길을 건넜습니다. 일 번 출구를 나와 소사지구대 맞은편 방향으로요. 오십 층 아파트가 서 있는 그쪽 말입니다. 깜짝 추위에 머플러로 목을 감고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였겠지요. 마주치는 사람들도 마스크로 얼굴을 감추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맞은편 도로에 서 있는 할아버지를 보았습니다. 자전거를 끌고 서 있었는데 신호가 바뀔 때까지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글쎄요. “말 좀 물읍시다.”라고 했는지, “길 좀 물읍시다.”라고 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기억나는 건 내 앞을 가로막은 할아버지의 자전거 앞바퀴뿐입니다. 가까이서 보니 여든도 넘어 보였습니다. 끌고 서 있는 자전거 역시 지긋하게 나이를 먹었고요. 어찌 가야 하느냐고 물은 곳은 전철로 삼십 분쯤 걸리는 곳이었습니다. 두 정거장 가서 환승도 해야 했고요. 하지만 할아버지는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자전거 타고 갈 수 있는 길을 알려달라고 하면서요. 너무 멀다고 말했지만 여전히 고개를 가로저어서, 손짓발짓을 섞어가며 알려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찌어찌 알려드리긴 했지만 발길을 돌리기 힘들었습니다. 덜그럭거리며 자전거 페달을 굴리는 무르팍이 내 아버지의 흑백사진 같아서, 기우뚱거리며 나아가는 바퀴 두 개가 추레한 나의 어제와 내일 같아서, 바지 주머니에 손을 감추고 멀뚱멀뚱 서 있어야 했습니다. 하루 종일 자전거가 눈에 밟혔습니다. 생각할수록 사람과 자전거는 닮았습니다. 사람이든 자전거든, 넘어지지 않으려면 쉼 없이 발을 굴러야 합니다. 방향을 정하는 건 핸들이지만 나아가는 힘은 바퀴에서 나오는 것도 같습니다. 결정은 머리가 하지만 몸 없이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바퀴 두 개가 서로를 밀고 당기듯이 사람 또한 누군가에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무언가에 기대서 살아간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누구든 무엇이든, 어제를 밀어내고 내일을 향해 나아가는 힘은 신뢰에서 나옵니다. 나아가는 방향이 어디든 개의치 않고 기댈 수 있음 또한 그래서일 겁니다. 당신은 지금 어디를 향해 나아가고 계십니까. 나는 멈춤 앞에 서서 건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고학력 청년 장기 실업자 증가세가 심상치 않다. 경기 부진에 따른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대내외 환경 악화로 인해 고용시장 흐름 자체가 변하고 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대졸 신규 취업 희망자들과 경력직을 원하는 대기업의 고용 방향 간의 미스매치 현상도 구조적 악화를 부채질하고 있다. 정부의 고용 정책은 변화된 환경에 맞도록 새판짜기에 들어가야 할 것이다. 대기업들이 서둘러 투자·고용 약속을 과감히, 선제적으로 이행하는 게 급선무다. 지난달 전체 실업자(65만 8000명) 중 장기 실업자 비율은 18.1%였다. 같은 10월 예전 통계와 비교할 경우 1999년 통계 작성 시작 이래 최고 수준이다. 외환위기 여파가 계속되던 1999년 10월(17.7%)보다도 높았다. 통계상 호전되는 듯 보였던 청년층(15~29세) 고용률과 실업률마저 나빠지면서 청년 고용시장의 장기적 침체 우려마저 나온다. 4년제 대학교 졸업 이상 학력을 지닌 20∼30대 중 장기 실업자는 3만 5000명으로, 지난해 9월(3만 6000명) 이후 13개월 만에 가장 많다. 국가통계포털(KOSIS) 등에 따르면 구직활동을 6개월 이상 했는데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장기 실업자는 지난달 기준 11만 9000명으로, 2021년 10월(12만 8000명) 이후 가장 많았다. 장기 실업자는 코로나19 시절인 2020년 5월∼2021년 12월 계속해서 10만 명에 달했고, 이후 잠시 주춤했다가 지난달 급증했다. 전체 장기 실업자 비율은 지난 4월 9.3%로 한 자릿수였지만, 5월 11.4%로 두 자릿수로 올라선 뒤 6개월 만에 2배 수준으로 높아졌다. 이러한 현상은 4년제 대학교 졸업 이상 학력을 지난 고학력 청년층 중 장기 실업자가 급속히 늘어났기 때문으로 보인다. 장기 실업자와 더불어 구직을 포기한 20, 30대 ‘그냥 쉬었음’ 인구가 가파르게 늘어 걱정거리로 떠오르고 있다. 지난달 고용 동향을 보면 전체 취업자 수는 2904만 명으로 지난해 동기 대비 소폭(19만3000명·0.7%) 늘었으나 내용상 60세 이상의 고령 취업이 주도했다. 30대 ‘그냥 쉬었음’ 인구는 33만 명에 달하며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20대 ‘그냥 쉬었음’ 인구도 40만 2000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1% 증가하면서 역대 최고를 찍었다. ‘그냥 쉬었음’ 인구는 비경제활동인구로 분류돼 실업률 통계에는 잡히지 않기 때문에 착시 현상을 일으킨다. 구직활동 자체를 포기한 ‘쉬었음’ 청년계층이 줄었음에도 고학력 청년 장기 실업자가 늘어나는 것은 ‘일자리 미스매치’ 현상이 해소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고학력 청년층이 대기업 문을 두드리지만, 정작 대기업은 경력직 채용을 원하는 소위 미스매치 현상이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얘기다. 이 미스매치 현상이 길어지면 청년층 고용 한파가 일시적 취업난에 그치지 않고 장기적 기회 상실로 고착화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우려스러운 것은 닥쳐오는 대미 3500억 달러 투자에 따른 고용 위축, 인공지능(AI) 기술 발전이 청년층 미스매치의 악화를 더 구조적으로 악화시킬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이다. 이 같은 변화들은 정책 당국이 급변하는 일자리 환경에 더 이상 소극적인 자세로 대응해서는 안 될 중대한 사유다. 구조적 변화를 읽어 내지 못한 채 단기적 구직난 해소에 급급하다는 세간의 비판을 허투루 들어서는 안 된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좋은 일자리 창출’이 최선의 해법이다. 지난 16일 한미 관세협상 후속 민관 합동회의에서 삼성·SK·현대차·LG 등 주요 그룹은 향후 5년간 총 800조 원이 넘는 대규모 투자를 약속했다. 대기업들의 이 약속은 선언적 의미에 그치지 않고 반드시, 그리고 속도감 있게 이행되어야 한다. 정부와 기업의 시와 때와 장소에 맞는 적절한 대응만이 청년들을 절박한 실업 지옥에서 구해낼 수 있다.
낙산 공원 가을 단풍이 한창이던 10월의 마지막 날, 한양도성길 성곽 아래 자리한 우리 대학에서는 해외 각국에서 온 유학생들을 위한 작은 축제가 펼쳐졌다. 낯설고도 재미난 한국문화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그동안 갈고 닦은 한국어 실력을 기반으로 한바탕 경연을 펼치는 ‘외국인 한국어 뽐내기 대회’가 열린 것이다. 400여 명의 참가자들이 학교 대강당을 가득 채운 채 하루 종일 웃음꽃을 피웠다. 개인 참가자들이 각각 일정한 주제로 발표를 선보이는 한국어 말하기 대회는 여타 기관에서도 종종 개최되는 편이지만, 여러 명이 하나의 팀을 이루어 주제를 선정하고 대본을 쓰고 외워 연습한 후 팀별로 무대에 올라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펼치는 이런 형식의 말하기 대회는 흔치 않아 자부심을 느끼며 이어가는 우리 기관의 특별 행사이기도 하다. 사실 이런 대회는 기획 단계부터 몇 달이 소요되는 데다, 준비 과정 내내 학생들도, 교사들도, 행정팀도 하나같이 품이 많이 들고, 대회 당일에도 고려해야 할 요소들이 너무 많아 다양한 층위의 협력이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에 매년 꾸준히 대회를 운영해 간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어느덧 13회차를 맞이한 이번 대회에는 해외 자매대학 참가팀에, 뉴욕의 고등학교에서 보내온 축하 영상까지 더해져 대회의 열기와 온기를 한층 더했다. 참가자들을 위한 커피 차와 츄러스 차가 이른 아침부터 캠퍼스에 마련되어 학생들은 음료와 간식을 나누며 친구들과 사진도 찍고 즐거운 추억을 만들기도 했다. 유학생들에게는 한국어 발표 능력 향상의 기회를 제공하고 학교에 대한 소속감과 자긍심을 고취한다는 점, 또한 서로 다른 국가 및 지역을 배경으로 한 유학생과 한국인 학생들 사이에 교류의 장을 마련하여 구성원 간 상호 문화 이해의 경험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행사다. 올해는 특히 언어교육센터 설립 2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해서 이를 기념하는 대회로 기획되었던 까닭에 지난 몇 달 내내 몸도 마음도 분주했다. ‘스터디 코리아 프로젝트’라는 이름의 정부 유학생 유치 정책이 본격적으로 시행된 것이 20여 년 전이니, 우리 대학의 유학생 교육 사업도 한국 정부의 유학생 유치 정책과 역사를 같이하고 있는 셈이다. 그간의 성과를 짚어보고 앞으로의 과제와 비전을 조망해 본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자리이기도 했다. 지난 9월 교육부가 발표한 통계자료에 따르면 국내 유학생 수는 25만 3424명으로 지난해보다 21.3%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2023년 8월 ‘스터디 코리아 300K 프로젝트’에서 선언했던 2027년 30만 명 유치 목표가 조기 달성될 것이라는 전망이 있기도 하다. 유학생의 양적 확장은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셈이고, 이제는 유학 강국으로 도약하기 위한 제도 정비와 동반 성장을 위한 섬세한 논의들이 필요한 때다. 유치에 초점을 두던 시기를 지나 취업과 정주로 이어지도록 하는 일련의 정책들이 마련되고는 있으나, 교육 현장과 얼마나 밀접하게 연동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교육의 장으로 들어온 유학생들을 얼마나 품을 준비가 되었는지를 대학은 여러 각도에서 고민해야 할 것이다. 안정적 체류와 학업을 위한 관리 및 지원 시스템 구축, 유학생과 한국인 학생들이 교류하고 소통할 수 있는 다양한 기회 제공, 뿐만 아니라 교수 및 직원 등 모든 구성원을 위한 상호 문화 이해 교육의 장이 반드시 마련되어야 한다.
시장은 여전히 가라앉아 있고 관객 동원력은 떨어져 있지만 역설적으로 이른바 종(種) 다양성은 높게 나타나고 있다. 다양한 영화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는 얘기이다. 물론 계절적인 요인도 무시하지는 못한다. 연말이고, 해를 넘기기 전에 ‘묵은’ 영화들을 밀어내려는 상황이기도 하다. 특히 배급을 지원받은 독립영화의 경우 약속된 규정에 따라 해를 넘기기 어려울 작품도 꽤 있는 형국이다. 그럼에도 상당히 수작인 작품들, 다양한 국적의 영화들이 줄을 잇는다. 특히 눈에 띄는 외화들이 많다. 예컨대 대만 영화 '왼손잡이 소녀'는 미국 션 베이커가 프로듀서로 참여한 작품이다. 대만 영화가 요즘 뜨고 있다. 중국 제작의 블록버스터 '난징사진관'은 중국에서는 8452만 명이라는 믿을 수 없는 관객 수가 나오고 있는 작품이다. 30억 위안, 6160억 원을 벌어들였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3만 명 선을 가까스로 밀어붙이고 있다. 중국식 ‘국뽕’이라는 평가, 혹은 객관적 근거가 부족하고 편견이나 오해에 기반한 혐중 정서의 영향을 받는 탓으로도 보인다. 그럼에도 이 작품 역시 꽤 괜찮은 수작으로 평가된다. 1937년 난징 대학살의 비극을 올바르고, 무엇보다 품위 있게 전달하고 있다. 영화적 재미도 높은 작품이다. 관객 수, 흥행 정도나 양상과 상관없이 '1980 사북'과 같은 다큐멘터리가 극장 한구석을 끈기 있게 차지하려 애쓰는 모습도 유의 깊게 지켜봐야 할 대목이다. 이런 다큐가 선제적으로 성을 쌓아야 극 영화들이 그 안에서 많이 만들어질 수가 있다. 수작의 다큐는 장편 상업영화로 가는 길목을 만들어 낼 것이다. 힘들더라도 극장의 다양성이 유지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일본 영화는 현재 두 편이 화제이다. 일본 국내에서만 1200만 관객을 모은 '국보'가 한국 상륙을 준비 중이다. 19일에 전국 개봉한다. '국보'는 가부키 명인에 관한 얘기이고 짐작하겠지만 매우 일본적인 작품이다. 넷플릭스 사무라이 6부작 드라마인 '이쿠사카미' 역시 한동안 전 세계를 휩쓸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전설의 영화 '바람의 검심' 시리즈를 뛰어넘을 가능성이 큰데 이는 순전히 넷플릭스가 지닌 글로벌 네트워크의 힘이다. 요즘의 일본 영화는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과 '체인소맨: 레제편' 등 극장판 애니메이션이 국내는 말할 것도 없고, 북미와 남미 박스오피스를 점령한 상태이다. 일본 메이저 배급사인 도호는 '국보'의 여세를 몰아 한국 유수 제작사와의 협업을 서두르고 있다. 이른바 판을 키우고 있다. 결과적으로는 다양한 작품의 토대가 시장의 규모를 확장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한국도 협업 구조를 확충하고 있다. 김지운 감독이 '더 홀'을 만들고 있다. 할리우드 배우 테오 제임스가 나오는 미국 자본의 영화이다. 나홍진 감독은 1000억 원짜리 3부작 설이 돌고 있는 '호프'를 완성 중이다. 역시 마이클 패스벤더, 알리시아 비칸데르 등 할리우드 스타들이 나온다. 트럼프가 일으킨 무역 전쟁으로 전 세계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영화산업은 더 하다. 개별 단위를 넘어선 국제 협업의 작품들을 만들어 나가는 것, 시장을 공유하는 것이야말로 생존의 길이다. 새로운 전략과 전술이 필요할 때이다.
내년도 정부 예산안 중 큰 폭으로 늘어난 ‘아동수당’과 관련해 ‘수도권 역차별’ 논란이 일고 있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는 지난 12일 비수도권 아동수당을 우대하는 ‘지역별 차등 지급’ 예산안이 포함된 2026년도 예산안을 처리했다. 이로 인해 경기 66만 명·인천 14만 명 이상의 아동이 추가지급 대상에서 제외돼 ‘역차별’ 논란이 불거졌다. 특히 수도권 기초생활수급자 아동들의 불이익에 대한 무대책이 문제다. 보완책이 모색돼야 한다는 여론이다. 국회 보건복지위를 통과한 ‘아동수당 지급’ 예산은 아동의 건강한 성장을 지원하기 위해 매월 10만 원의 수당을 지급하는 것으로, 내년도 예산안은 올해 1조 9588억 2300만 원에서 무려 26.7%(5233억 4600만 원) 증액시킨 2조 4821억 6900만 원이다. 예산이 크게 늘어난 것은 ‘지급 대상 연령을 만 8세 미만(0〜7세)에서 만 9세 미만(0〜8세)으로 확대’, ‘비수도권 아동 5000원, 인구감소지역 중 우대지역 아동 1만 원, 특별지역 아동 2만 원’, 인구감소지역에서 지역 화폐로 아동수당을 지급할 경우 1만 원을 각각 추가 지급하도록 한 데 따른 것이다. 하지만 수도권은 지급 대상 연령이 만 9세 미만으로 확대될 뿐 인구감소지역 중 우대지역에 포함된 4개 군(가평·연천·강화·옹진)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 아동은 추가 지급(최소 5000원〜최대 3만 원) 대상에서 제외돼 있다. 경기도의 경우, 올해 아동수당 지원대상 수가 지난 9월말 기준 66만 689명으로 전체(218만 1120명의)의 31.1%를 차지하고 있고, 내년에 만 9세 미만으로 확대되면 지원대상 아동 수는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균형발전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정책이라고 해도 문제는 수도권 저소득층 자녀들이 받게 되는 불이익이다. ‘2023 아동지표’에 따르면 기초생활수급자인 아동(0〜18세)의 수는 인구 비례에 따라 경기 6만 9962명, 인천 2만 7056명, 서울 4만 4154명으로 다른 지자체에 비해 많은 편이다. 복지위 수석전문위원도 내년도 예산안 검토보고를 통해 “복지정책적 측면에서 추가 지급 대상에서 제외돼 있는 수도권 거주 저소득층 아동에 대해서 추가 지급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아동수당’ 예산 수도권 역차별 문제는 소관 상임위인 국회에서 여야가 첨예하게 맞선 논란이기도 하다. 국민의힘 경기도당위원장인 김선교(여주양평) 의원은 “왜 수도권 서민 빈곤층 아동이 지역의 부잣집 아동보다 수당을 덜 받아야 하느냐”고 성토한다. 국민의힘 복지위 간사인 김미애 의원도 “아동수당은 소득이나 거주지와 무관하게 아동의 기본적 권리 증진을 위한 보편복지 제도인데 수도권에 산다는 이유로 차별해선 안 된다”고 비판한다. 여당은 ‘국토균형발전’의 가치를 지켜야 한다는 주장을 앞세운다. 더불어민주당 김남희 의원은 “이런 복지제도 운영을 통해 앞으로 국토 균형발전을 하겠다는 메시지를 읽을 수 있는 것”이라며 “추가적인 논의는 불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비수도권 아동수당 우대 정책을 비판하는 측은 하필이면 비교적 물가가 비싼 지역인 수도권 거주 아동들에 대해 ‘역차별’하느냐고 지적한다. 그러나 정책을 찬성하는 측은 수도권 아동이 받는 문화, 교통 등의 복지 혜택이 더 크다는 점을 들어 당위성을 강조한다. 소멸 위기에 내몰리고 있는 지역의 난제를 풀어가기 위한 정부의 지원이 다각도로 펼쳐져야 한다는 논리에 반대할 명분은 없다. 다만 이런 차별화된 시책의 경우에는 정책의 사각지대가 존재하는지에 대한 정밀한 검토와 보완책 마련은 필수다. 정책을 통해 정치적 이익을 추구하려는 정당의 입장을 헤아리지 못하는 바 아니다. 그러나 저소득층 복지 문제와 같이 정책의 사각지대가 존재할 개연성이 높은 영역에서의 정략적인 ‘다른 목소리’는 백해무익(百害無益)하다. ‘균형발전’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실질적으로 풀어가면서도, 정책의 허점을 보완해가는 노력 또한 소홀해서는 안 된다. 변화된 내년도 ‘아동수당 지급’ 예산에서 지적되고 있는 ‘수도권 아동 역차별’ 문제는 보완책을 마련해야 한다.
‘산은 강을 낳고, 강은 숲을 가꾼다.’ 산과 강, 강과 숲. 거기에 공기가 있어 내가 산소를 호흡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으로 강 가운데의 섬 같은 산을 하염 없이 바라보았다. 모든 걸 잃어버린 사람에게는 인간의 체온이 종교라는 어느 시인의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예고 없이 찾아온 친구 차를 타고 진안고원 ‘용담호’에서 나는 한동안 언어를 잊고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사는지를 모르면 그날그날 아무렇게나 살게 된다는 생각과 함께. 1971년 일이다. 대전고등학교 김영덕 교감선생님으로부터 그의 저서 '나무도 보고 숲도 보고'라는 수필집을 받았다. 책을 호롱불 심지 돋워가며 읽었다. 곧바로 감상문을 써 보내드리며 나도 수필을 공부하며 쓰고 있다고 했다. 그분은 써 논 글을 한 편 보내달라고 했다. 나는 농사일로 고생하시던 어머니가 좌골신경통으로 허리 다리의 통증을 방바닥을 치며 호소하는데, 소낙비로 인한 빗물은 온 마당을 넘실대고 있는 안타까움을 작품화한 수필을 우편으로 보냈다. 선생님은 나를 초대하였고 나는 처음으로 대전고등학교를 찾아가 인사드리고 하룻밤을 보낸 뒤 돌아왔다. 수필 공부로 맺은 첫 인연이요 은인이었다. 그분의 책을 읽고 보이지 않는 나무의 뿌리를 볼 수 있었다. 꽃씨 또한 뿌리의 결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세상 모든 게 눈에 보이는 것만이 다는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발바닥이 두꺼운 이유는 인생의 가시밭길을 걸어가기 위해서란 생각도 하게 되었다. 그동안 나이에 매이지 않고 열심히 걸었다. 내가 가야 할 길은 문학적 수필의 길이라고 발바닥 힘을 빌려 걷고 또 걸었다. 독서는 직관을 발달시키고 직관은 독서를 효과적으로 만든다고 했다. 그동안 책은 겸손한 사람으로서 공부하다 갈 것이라는 데 있어 나의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때로는 피곤이 나비처럼 다가오고 후회는 벌처럼 쏘아대기도 했다. 그런 어느 날, 원로 배우 신구 씨가 예능프로그램에서 인생을 돌아보며 꺼낸 말이 곧 나의 말이었다. “다양하게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 취미가 별로 없다면서, 즐기며 살았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했다. 많은 은퇴자들의 의견도 같을 것이다. 나도 그중 한 사람으로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 내 마음에 맞는 꽃을 피우기 위한 길 아니었던가! 하고 자위한다. 그래 ‘나무도 보고 숲도 보자’ 하면서 나무는 나요, 숲은 우리들이다. 그동안 가장이었던 나는 나무였고, 가족은 숲이었다. 가족이 숲이요 이웃이 숲인 것을 크게 생각하지 못했다. 인생이란 게 내 곁에 꽃병이 있었으면, 약병이 놓이고, 혈압약과 영양제가 있었다면, 치약과 구두약도 있었던 것을. 깊이 생각해보지 못했다. 내게 있어 책은 영혼의 솔 메이트(Soul Mate)요, 책장을 넘길 때 코끝에 닿는 냄새는 잊을 수 없는 운명의 냄새였다. 책을 읽으며 책과 함께 살아가면서 나무도 보고 숲도 보아야겠다. 지식은 나무요 지혜는 숲이라는 생각으로-. 결혼행진곡이 연주될 때 개그맨 고(故) 전유성 씨가 유언으로 남겨 묘비명이 된 “웃지 마 너도 곧 와”라는 의미도 나무와 숲이라는 차원에서 생각해 보면서.
어느새 11월이다. 달력을 넘기다 보면 한 해가 참 빠르게 흘러갔다는 생각이 든다. 아침 공기는 차가워지고, 해는 짧아졌다. 계절이 깊어질수록 하루하루의 끝엔 잔잔한 정적이 내려앉고 ‘나는 올해를 잘 살아냈을까?’ 라는 생각이 문득 찾아오는 요즘이다. 아직 끝나지 않은 올해의 끝자락에서, 이미 지나가 버린 나날들을 천천히 돌아본다. 올해는 유난히 많은 일들이 있었다. 익숙했던 것들을 내려놓고, 새로운 것을 시작해야 했고, 예상치 못한 만남과 감격스러운 경험도 했다. 그 속에서 기쁨도, 후회, 감동 등의 감정도 함께 남았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내다 보니 어느새 11월이다. 시간이 점점 빨리 간다는 지겹도록 진부한 말을 공감하며 뱉게 될 줄이야. 물론 지치기도 했지만, 마음 한켠이 따뜻하고 뿌듯하기도 하다. 돌아본다는 것은 단순히 지난 일을 되새기는 게 아니다. 내가 어떤 사람으로 변했는지, 무엇을 배우고 놓쳤는지를 살피는 일이다. 사람들은 종종 미래를 준비하느라 바쁘게 달리지만, 때로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볼 때에야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멀리 왔는지 알게 된다. 올해의 나는 작년의 나보다 조금 더 말랑해졌고, 어떤 일에는 더 마음을 열게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한 해였다. 올해를 돌아보며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사람들’이다. 함께 웃고, 고민하고, 버텨준 사람들 덕분에 버거운 순간들도 견딜 수 있었다. 인생에서 관계는 언제나 마음의 온도를 조절해 주는 존재 같다. 바쁜 하루 속에서도 잠깐의 대화가 마음을 데워주고, 예상치 못한 위로가 하루를 다시 일으켜 세운다. 우리는 결국 사람으로 인해 다치기도 하고, 또 사람으로 인해 회복된다. 올해의 나는 그런 관계의 힘을 다시금 느꼈다. 그리고 ‘초심’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어떤 일을 오래 하다 보면 처음의 마음이 희미해질 때가 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나를 이 자리까지 데려온 건 거창한 목표가 아니라 ‘지금 이 일을 좋아한다’라는 단순한 마음이었다. 때로는 지치고 흔들렸지만, 그 마음이 있었기에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올해의 끝자락에서는 다짐한다. 초심을 잃지 않되, 그 위에 더 깊어진 마음을 쌓아가자고. 11월은 어쩐지 시간을 천천히 걷게 만든다. 한 해의 끝자락에 서면, 우리는 자연스레 마음의 속도를 늦추는 것 같다. 올해가 가는 게 아쉬워 붙잡기도 하고, 남은 한 달을 잘 살기 위해 다짐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스스로를 다독여보면 어떨까. 잘 달려온 자신을 칭찬하고, 때로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되는 여유를 허락해도 좋다. 돌아봄은 후회를 위한 일이 아니라, 내일을 위한 준비이기 때문이다. 이제 곧 올해의 마지막 달이 다가온다. 남은 한 달 동안 나는 조금 더 따뜻하게 살고 싶다.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고, 주변 사람의 안부를 물으며 작은 기쁨을 더 자주 느끼려 한다. 어쩌면 그것이 한 해를 잘 마무리하는 가장 좋은 방법 아닐까. 시간은 언제나 앞으로 흐르지만, 우리의 마음은 가끔 뒤를 돌아보며 자란다. 지나온 계절을 천천히 되짚으며, 그 안에서 배운 것들을 가슴에 새기자. 그렇게 한 해의 끝에 서 있는 우리는, 다시 시작할 준비를 한다. 11월이 그래서 좋다. 한 해의 끝자락에서 잠시 멈춰 서서, 내가 걸어온 길을 찬찬히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올해를 잘 보내주기 위한 준비가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