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도쿄 방문길에 ‘오모테산도 힐즈’를 찾았다. 일본에서 공부한 지인이 추천한 곳인데, 처음엔 막연히 유명 관광지이려니 했다. 시부야구의 오모테산도 언덕길에 위치한 ‘오모테산도 힐즈’는 주상복합 건물로, 1927년에 지어진 ‘도준카이 아오야마 아파트’를 2005년에 새로 개발한 곳이었다. 그리 높지 않은 이 건물은 언덕길 따라 길이가 약 250m 정도로 길었고, 언덕길 높은 쪽은 옛 아파트 건물 일부를 그대로 남겨 품고 있는 형태였다. 설계자가 유명 건축가 안도 다다오라니, 건물 이곳저곳을 다시 살펴보게 되었다. 이 건물은 설계 당시 주변 가로수길과 조화를 이루도록 높이를 제한한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지상 6층 지하 6층의 건물로 지어졌고, 지역의 랜드마크로 과시하는 건물이 아니라 거리 풍경과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하였다. 또 다른 특징은 건물 안 가운데에 언덕길 경사 그대로 약 700m 길이의 나선형 슬로프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엘리베이터를 타는 대신 슬로프를 따라 걸으니, 마치 언덕길을 걸으며 쇼핑하는 것 같았다. 역시 안도 다다오다. 환경과 어우러지며 사람을 위하는 건물, 지역의 역사를 잇는 ‘오모테산도 힐즈’였다. 건축계의 노벨상인 프리츠커상을 수상하였고, 노출 콘크리트 건축으로 유명한 안도 다다오. 그런데 그는 건축에 대한 전문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고등학교 시절에 아마추어 권투선수로 뛰고, 트럭 운전사를 하기도 했는데, 헌책방에서 르 코르뷔지에 설계도면 책을 발견한 후 그의 길은 달라졌다. 세계를 여행하며 독학으로 건축 공부를 하였고, 고졸 학력으로 세계 유수의 명문대에서 건축을 가르쳤다. 그리고 그는 작업할 때 건축주의 요구 사항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직감 위주로 일을 밀어붙이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직감이 안도 다다오 건축양식을 만들어 온 것인가. 오하이오주립대학교 앵거스 플레처 교수는 그의 저서 「고유지능」(2025)에서 직관, 상상력, 감정, 상식 등 인간 고유의 사고방식은 AI가 결코 구현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면서, 이를 ‘고유지능’이라 명명하였다. 인간의 뇌를 논리적이라고 보는 것은 잘못된 관점이라며, 인간의 비논리적 지능이 데이터에 의존하는 AI 회로보다 수백만 년 앞서 우리 조상에게 미지의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고 진화해 왔다는 것이다. 논리는 예외를 생각하지 않으며, 그저 분류하기를 좋아한다. 좋다 나쁘다, 정상이다 이상하다, 검다 희다 등. 이러한 판단은 AI의 사고방식이다. 인간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고 혁신을 이루는 것은 논리의 산물이 아니라 우리 뇌의 고유한 기능인 직관에서 시작된다고 하였다. 직감으로 건축한다는 안도 다다오를 보니, 인간의 ‘고유지능’이 무엇이며 어떤 것의 원동력이 되는지 이해된다. 지난달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에서 AI의 진화가 인류의 제어 범위를 벗어나는 임계점에 다가서고 있다고 경계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대학가는 AI시대 교육을 어떻게 혁신해야 할지 골몰하고 있다. AI학과를 신설하고 기존 과에 AI를 덮어 융합학과라는 것을 만드는 것들이 대응책은 아닐 것이다.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 교수는 AI가 장악할 수 없는 마지막 영역으로 ‘비언어적 지혜’와 ‘비판적 사고’를 꼽았다. 엥거스 플레처도 유발 하라리도 AI가 대체하지 못하는 인간의 고유 영역이 있다고 분석한다. 그것을 제대로 알고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교육 개혁의 기초가 되어야 할 것이다. 데이터로 환산할 수 없는 인간의 ‘고유지능’이 AI가 초래할 수 있는 위협으로부터 인간을 지키는 해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설 명절을 맞아 친정집에 갔다. 북적이는 가족들로 소란스러운 틈을 잠시 벗어나 오랜만에 엄마의 방을 둘러보았다. 입었던 옷가지와 매일 쓰는 물건들이 흩어져 있었다. 작은 책상에는 펼쳐둔 성경책과 마시다 만 물컵이 놓여 있었다. 혼자 잠들고 일어나는 침대에는 엄마가 누웠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부피가 묵직한 겨울 이불이 정리되지 않은 채 한곳으로 밀려나 있었다. 나는 가만히 서서 한 사람이 머문 공간을 바라보았다. 엄마는 이 방에서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 밤이면 무슨 생각을 할까. 문득, 엄마의 시간이 궁금해졌다. 때로는 짐이었고 때로는 힘이 되었을 자식들을 키워내고, 물러난 자리는 홀로 남은 방이었다. 그 방을 보며 알았다. 독거(獨居)는 공간이 아니라 고요히 흐르는 시간이라는 것을. 엄마의 방을 보고 있자니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났다. 아버지는 치매가 심해지면서 요양병원에 모셨다. 병원에 처음 가셨을 때부터 아버지는 우리를 볼 때마다 집에 가겠다고 했다. 기억은 흐릿해졌어도, 돌아가야 할 방향만은 몸 어딘가에 남아 있었던 것일까. 낯선 곳에서 혼자서 잠들고 깨어나 가족들을 하염없이 기다렸을 아버지 생각이 났다. 아버지가 계시는 요양병원에 면회를 다녀오던 날들의 무거웠던 기억이 지금까지 생생하게 남아 있다. 아니 에르노의 『세월』 마지막 페이지에, 요양원 현관에서 잠옷과 슬리퍼 차림으로, 더러운 종이를 내밀며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달라고 울던 남자가 나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읽었던 터라 그 장면은 오래 마음에 남았다. 나는 그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다시 아버지를 만났다. 엄마가 드셔야 할 영양제 복용법을 설명하는데, 갑자기 엄마가 그랬다. 나는 이다음에 요양원에는 가지 않을 테니 절대 보내지 말라고. 형제들은 잠시 말을 잃고 엄마를 쳐다보았다. 나는 농담처럼 “아버지는 보내놓고?”라고 물었다. 엄마는 단호하게 말했다. “네 아버지와 나는 다르다.” 우리는 웃으며 뭐가 다르냐고 되물었고, 곧바로 그러니 영양제 잘 챙겨 드시라는 말을 협박하듯 건넸다. 그러나 웃음이 잦아든 뒤에도 엄마의 말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그 말 속에는 두려움과 고집, 그리고 끝까지 스스로를 지키고 싶다는 마음이 함께 들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타인의 상황은 쉽게 받아들이면서도, 자신만큼은 끝내 예외이기를 바라는지도 모른다. 엄마는 오늘도 그 방에서 잠들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언젠가 그런 밤을 맞이할 것이다. 소란스러웠던 시간도 잠시, 명절을 보내고 나면 자식들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다. 식탁은 다시 조용해지고, 거실의 불은 일찍 꺼진다. 늙은 부모는 둘이거나 홀로 남는다. 하루는 길어지고, 말은 줄어든다. 그러나 노년의 삶만이 사람을 홀로이게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무리 속에 섞여 있다가도 결국은 각자의 시간으로 돌아온다. 우리는 관계 속에 기대어 살아가지만, 저마다의 방으로 돌아가 하루를 마무리한다. 그것은 더 이상 공간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 존재 방식이 된다. 당신의 방은, 그 안에 깃든 시간은 어떤 모습일까. 혼자 남는 순간에 우리는 무엇을 떠올리게 될까. 누구의 이름을 부르고, 어떤 기억을 붙들고 있을까. 인간은 처음부터 아름다운 독신(獨身)이다.
설 명절 기간에 수입 농축수산물이 국산으로 둔갑해 판매된 사례가 대거 적발돼온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산 프리미엄’을 노린 원산지 표시 위반은 물가를 끌어 올리는 것은 물론 시장의 신뢰를 흔드는 악덕 상술이다. 값싼 수입 식품 재료를 ‘포대갈이’, ‘상표 둔갑’ 등의 수법으로 엄청난 부당이득을 취하는 상술은 어제오늘의 부정 유통 사례가 아니다. 더욱더 정밀한 근절대책으로 이제는 완전히 차단해야 한다는 여론이다.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소속 문금주 의원(민주당), 정희용 의원(국민의힘) 등이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으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21년부터 2025년까지 최근 5년간 원산지 표시 위반으로 적발된 업체는 모두 1만6072곳으로 집계됐다. 정부의 단속이 강화되면서 연간 적발률은 2021년 1.8%, 2022년 1.7%, 2023년 1.4%, 2024년 1.3%, 2025년 1.2% 등으로 매년 낮아지는 추세다. 그러나 설 특별 단속 기간의 수치는 2021년 4.1%, 2022년 3.5%, 2023년 4.74%, 2024년 3.3%, 2025년 3.9% 등으로 연간 평균(1.4%)보다 2.7배나 높았다. 이는 설 명절을 전후하여 원산지 표시법 위반업체가 급증하는 현상을 대변한다. 소위 대목을 중심으로 폭리를 취하기 위한 위법 행위가 자행되고 있다는 얘기인 셈이다. 명절을 전후하여 어딘가 허술한 구멍을 파고드는 위법 행위가 집중되는 현상을 증명한다. 원산지 표시 위반으로 적발된 성수품은 품목별로 돼지고기가 3700건으로 가장 많았고, 소고기 1723건, 닭고기 1191건, 오징어 479건, 명태 285건 등이 뒤를 이었다. 캐나다산 삼겹살을 국내산으로 속여 판매하거나, 미국산 소고기로 조리한 갈비탕을 한우로 표시한 사례, 중국산 밤을 국내산으로 둔갑시킨 사례도 있었다. 설 명절에 적발된 경우만 따로 분석하면 원산지를 속여 판매한 품목은 돼지고기가 593건으로 가장 많았다. 다음으로는 배추김치 493건, 쇠고기 250건, 두부류 206건, 닭고기 111건 등으로 조사됐다. 돼지고기와 배추김치를 합치면 전체 위반 건수의 41%를 차지한다. 업태별로는 일반음식점의 위반 행위가 1045건(47%)으로 최다였다. 가공·제조업체(335건), 식육·축산물 판매업(260건)이 뒤를 이었다. 통신판매업에서는 62건이 적발됐다. 원산지 표시 위반이 끼치는 피해는 실로 막심하다. ‘국내 산업의 피해’가 가장 크다. 국산 둔갑 제품은 가격 경쟁력을 무기로 국산 정품의 시장을 잠식해 국내 제조업체의 매출 감소, 생산량 축소, 고용 불안정 등의 문제로 직결된다. ‘소비자 권리 침해’도 보통 문제가 아니다. 허위표시는 소비자의 ‘알 권리’를 침해할 뿐 아니라, 안전하지 않은 제품 구매로 이어질 수 있어 실질적인 피해를 유발한다. 원산지는 소비자가 제품의 품질, 안정성, 브랜드 신뢰도를 판단하는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국제 신인도 하락도 문제다. 국산 둔갑 제품이 유통되면, 주요 교역국과의 통상 분쟁, 상호 신뢰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 특히 자국산 보호를 위한 고율 관세, 통관 심사 강화 등으로 강력히 대응하고 있는 미국 같은 나라에 대한 우리 기업의 수출 길을 막는 부작용을 초래하게 된다. 원산지 표시 위반은 과다한 이득을 노린 일종의 사기 행위다. 소비자가 국산인지 수입품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표시 규정을 개선해야 한다는 주장이 계속되고 있다. 상품의 뒷면에 작은 글씨로 표시되는 원산지 표시의 불합리성을 꼬집는 지적이다. ‘지키는 사람 열이 도둑 하나를 못 당한다’는 속담이 있다. 그만큼 소비자들이 관심을 기울여서 감시하고 적발해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원산지를 속이기 위해 아예 포대갈이하듯이 수입산을 국산으로 둔갑시키는 행위는 훨씬 더 적극적으로 색출해내야 한다. 특히 식품의 경우 국민의 보건 위생관리를 위해서도 단속과 계도, 그리고 대국민 홍보를 대폭 확대할 가치가 있다.
경기도가 방위산업 육성을 위해 추진한 경기국방벤처센터는 2025년 9월 공모를 시작으로 경기 북부 4개 시(의정부시, 양주시, 동두천시, 포천시)가 신청한 가운데, 사업계획 발표회(PT)를 거쳐 10월 23일 포천시가 최종 선정됐다. 포천시는 대진대학교의 국방, 방위산업 특화 분야인 RISE 사업단과의 연계를 염두에 두고 사무소 역시 대진대학교 내 산학협력단에 두고 있다. 경기도는 판교 중심의 방위산업을 경기 북부지역과의 균형발전을 고려하여 경기 북부지역 지자체를 대상으로 공모에 들어간 결과다. 경기도는 최근 ‘K-방산'의 성장에 발맞춰 경기 북부를 중심으로 경기국방벤처센터를 설립하고, 이를 마중물 삼아 방위산업 혁신 클러스터를 조성하는 전략을 본격화하고 있다. 경기도는 방위사업청 산하 국방기술진흥연구소(국기연)와 협력하여 도내 중소·벤처기업의 국방 시장 진입을 돕는 전초기지로서 경기국방벤처센터를 설립하였다. 경기 남부 판교 중심의 방위산업기업이 과연 경기 북부지역의 포천시에 입주할 것인가? 경기도는 경기국방벤처센터 유치를 시작으로 경기 북부(포천, 양주, 동두천 등)를 아우르는 방위산업 혁신 클러스터 구축을 목표로 하고 있다. 혹자는 포천의 승진 과학화 훈련장, 다락대 시험장 등 국내 최대 규모의 시험 시설을 활용하여 드론, 로봇 등 유무인 복합체계의 실증 환경 제공을 제공하는 “테스트베드(Test-bed)” 전략을 추구하거나, 현실적으로 판교에 경기국방벤처센터 지부를 두어야 한다는 주장까지 있다. 또는 2026년 중 방위사업청이 주관하는 ‘방산혁신클러스터' 공모 사업에 경기도가 도전하여 국비 확보와 국가적 방산 거점 지위를 굳히자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경기국방벤처센터 개소식은 2026년 2월이고, 경기국방벤처센터장을 비롯한 전문인력 채용 등 실질적 업무 개시는 2026년 중후반기로 예측된다. 아직 업무도 개시하지 않는 경기국방벤처센터 개소에 대한 기대가 크다. AI 시대‘K-방산’을 이끌어 갈 남북한 접경지역에 위치하는 경기국방벤처센터의 역할은 우리나라 국방산업과 함께 경기 북부지역 경제 활성화에도 큰 역할을 하리라 본다. 이럴수록 준비를 더 꼼꼼히 할 필요가 있다. 기존 국방벤처센터와 차별화 내지 특성화는 물론 경기 남북부지역 균형발전까지 고려해야 한다. 국방기술진흥연구소(국기연)를 포함한 중앙정부, 경기도와 포천시 포함 경기 북부지역 지자체, 대진대학교의 각자 역할이 중요하다. 대진대학교는 국방 및 방위산업 연구와 인력 양성 역할을, 포천시는 경기국방벤처센터 입주기업 모집을 위한 파격적인 인센티브 제공, 경기도는 다른 국방벤처센터 내지는 방위산업 클러스터와는 차별화된 방위산업 아이템 선정, 중앙정부와 경기도는 경기 북부지역 방위산업 육성을 위한 예산 지원과 경기 남북 균형발전 도모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동안 접경지역과 국가안보라는 특별한 희생에 대한 특별한 보상 차원은 별론으로 하더라도, 경기 북부지역을 “테스트베드(Test-bed)”라는 현실적 이유로 경기 남부 판교로 다시 기업이 집중되는 우를 범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과천 경마장(렛츠런파크) 이전에 따른 경기지역 지방자치단체들의 유치전이 뜨겁다. 이는 정부가 최근 부동산 공급 대책 중 하나로 과천에는 경마장(115만㎡)과 인근 방첩사(28만㎡)를 함께 이전하고 이 부지를 통합 개발해 9800가구를 공급한다는 계획을 발표한 데 따른 것이다. 이에 경기도는 과천 경마장을 경기도 내 미군 반환 공여지나 서해안 간척지로 이전할 것을 요청했다. 경기도가 경마장 이전지 기본원칙을 밝히자 파주·화성·안산·포천시가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하고 유치 총력전을 펴고 있다. 경마장 이전지 기본원칙을 밝히자 발 빠르게 움직인 지자체는 파주시와 화성시다. 파주시는 미군 반환 공여지인 캠프 게리 오웬을 유치 부지로 정한 것으로 알려졌고, 화성시는 서해안 간척지 화옹지구로의 이전을 검토하고 있다. 여기뿐만 아니다. 다른 지자체들도 속속 경마장 유치전에 뛰어들고 있다. 서해안 간척지가 있는 안산시는 유치 타당성 검토와 함께 교통 인프라 확장 및 제도적 분석을 병행하는 종합 전략 마련을 내세우며 유치전에 참전했고, 미군 반환 공여지가 상당한 포천시는 19일 부시장을 단장으로 하는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하고 유치 전략 수립에 착수했다. 반면 과천시는 경마장 이전은 불가하다는 입장이다. 과천시는 경마장 이전 시 수백억 원의 세수 증발을 우려하고 있다. 과천시는 경마장이 지난해 경기도에 낸 레저세 중 징수교부금 3%와 인구수·재정자립도 등에 따른 조정교부금 등으로 485억 원을 받았다. 과천시 본예산 4471억 원의 10.8%에 해당하는 금액이다.과천시민들은 이전 반대 시위 및 집회를 이어가고 있다. 마사회 노조 또한 "경마장 이전을 골자로 한 정부의 주택 공급 계획은 수십 년간 국민과 함께해 온 한국 경마의 심장을 파괴하겠다는 행정 폭거로 수용할 수 없다"며 이전 계획이 철회될 때까지 투쟁하기로 결의했다. 이처럼 경마장을 둘러싼 정부와 지자체들의 셈법이 복잡하게 얽히는 모양새이다. ‘주택 공급’이라는 정부 정책을 고려하고, 지자체들의 입장까지 수렴해 합리적으로 결정해야 할 기준이 마련돼야 한다. 경마장과 같은 대규모 사행성 및 특수 시설을 이전할 때는 단순한 위치 변경을 넘어 경제, 사회, 환경적 측면에서 복합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경제적 영향 및 세수 변화다. 경기도는 과천 경마장으로부터 도세인 레저세로 한해 2000억 원가량을 받고 있다. 과천시는 약 500억 원 이상의 레저세와 지방교육세를 창출하고 있다. 따라서 이전 시 기존 지자체의 세수 감소와 신규 유치 지역의 세수 증대에 대한 균형이 필요하다. 경마장 주변 상인들의 생계 대책과 마사회 노동조합 등 종사자들의 고용 안정성 확보가 필수적이다. 미래 성장 가능성과 시장 트렌드 반영이다. 국내 경마 인구 전망 및 미래를 생각한 중국 시장 등 외부 수요를 고려한 위치 선정이나 시설 현대화가 필수적이다. 교통 및 인프라 구축이 필요 요건이다. 경마장은 주말에 집중적인 교통 수요가 발생하기에 전철역 접근성 및 도로망 확충 등 교통 대책이 필수적이다. 아울러 단순한 도박 시설이 아닌 지역 친화적인 공원 등 공공성을 강화한 형태의 이전이 검토돼야 한다. 님비(NIMBY) 및 핌피(PIMFY) 현상도 가볍게 볼 수 없다. 도박장 시설에 대한 혐오 시설 인식으로 인한 주민 반대와 지역 균형 발전을 명분으로 한 유치 경쟁이 동시에 발생하므로, 주민 의견 수렴 절차가 있어야 한다. 환경 영향 평가도 빼놓을 수 없다. 대규모 대지 조성에 따른 환경 악화 가능성을 평가해야 한다. 경마장 주변 주거 환경에 미치는 소음, 경관 저해 요소 또한 고려 사항이다. 경마장 이전은 ‘세수 확보(유치)’와 ‘지역 혐오 시설 해소(이전)’라는 상반된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사업이다. 따라서 지자체 간 유치 경쟁 상황에서의 타당성 검토, 교통 인프라, 주민 동의, 상권 대책 등이 종합적으로 수립돼 결정돼야 함을 당부한다.
요즘은 혼자 살기 꽤 괜찮은 세상이다. 어쩌면 너무 괜찮아서 조금 이상할 정도다. 굳이 사람을 만나지 않아도 하루가 굴러간다. 배달 앱으로 끼니를 해결하고, 은행은 손바닥 안에서 끝난다. 장을 보러 나가지 않아도 되고, 택배는 문 앞까지 온다. 심지어 외로움조차 사람을 통하지 않는다. 인공지능과 대화를 나누며 하루를 정리하고, 고민을 털어놓고, 위로를 받는다. 이쯤 되면, 세상이 점점 더 혼자서 살아가도록 진화하는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혼자’라는 말이 자꾸 걸린다. 내가 하루 종일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고 해서 정말 사람을 만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일까. 내가 주문한 음식에는 누군가의 노동이 들어 있고, 인공지능의 문장에는 수많은 사람의 지식과 시간이 겹쳐 있다. 나는 혼자 방 안에 앉아 있지만, 실은 보이지 않는 타인들의 어깨 위에 기대어 하루를 보내고 있는 셈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폴리스적 동물’이라 불렀다. 공동체를 떠나서는 온전할 수 없는 존재라는 뜻이라고 한다. 느낌은 좀 다르지만 여전히 유효한 말처럼 느껴진다. 마을 광장은 사라졌지만, 대신 더 촘촘한 네트워크가 생겼다.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연결은 끊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넓고 얕게,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서로에게 닿아 있다. 문제는 이 연결이 너무 매끈하다는 데 있는 것 같다. 너무 쉽게 연결되고, 너무 빨리 반응이 돌아온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사람의 존재가 지워진다. 그래서 그 무게를 자주 잊는다. 내가 던진 말 한 줄이 누군가에게 어떻게 남는지, 내가 누른 버튼 하나가 어디까지 흘러가는지 잘 상상하지 않는다. 나도 그렇다. 편리함에 익숙해질수록 책임감은 희미해지고, 어딘가 무심해진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한다. 우리는 여전히 마을에 모여 살고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며 살면서도, 혼자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말하자면 나는 누군가에게 기대어 서있다. 누군가의 어깨에 내 체중을 싣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누군가도 나에게 조금은 기대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그 생각을 하면 마음이 약간 불편해진다. 동시에 조금은 조심스러워진다. 이미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고 있다면, 굳이 더 날을 세울 이유가 있을까 싶어진다. 거창한 연대나 희생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미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살고 있다면, 조금 더 나은 영향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다. 내가 닿는 자리만이라도, 말하자면 조금 덜 차갑게 만들 수는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혼자 살기 좋은 시대라고들 하지만, 나는 점점 그 말이 정확하지 않다고 느낀다. 우리는 혼자 살 수 있게 된 것이 아니라, 서로의 존재를 덜 의식해도 살 수 있게 된 것 아닐까. 이미 충분히 얽혀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잠시 잊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어차피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간다면, 차라리 서로에게 조금 더 괜찮은 이웃이 되는 편이 낫겠다. 대단한 선의를 베풀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내가 기대고 있는 이 세계가 누군가의 어깨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 그리고 누군가가 내 어깨에도 아주 잠깐은 몸을 기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 요즘 나는 그 정도의 태도만이라도 지키며 살고 싶다.
교육부와 법무부는 지난 2월 12일 ‘교육국제화역량 인증대학 및 유학생 유치·관리 실태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교육국제화역량 인증제’는 대학의 국제화 역량을 체계적으로 점검하고 개선하기 위해 2012년부터 관계 부처가 합동으로 시행해 온 제도다. 유학생 유치 확대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불법 체류 등 부작용을 예방하기 위해 각종 지표로 대학을 평가하고, 일정 기준을 충족한 대학에는 인증 자격을 부여해 사증 발급 절차 간소화 등의 혜택을 제공한다. 반면 출입국관리법 위반 등 유학생 유치·관리 부실이 확인될 경우 제재를 가하도록 설계된 것이 제도의 핵심이다. 정부의 유학생 유치 정책인 ‘스터디 코리아 프로젝트’가 처음 시행된 2004년, 국내 외국인 유학생 수는 처음으로 1만 명을 넘어섰다. 이후 꾸준히 증가해 2025년에는 25만 명을 상회하는 규모로 성장했다. 양적 확대가 가속화되면서 단순한 유치 경쟁을 넘어 안정적이고 책임 있는 관리 체계의 필요성이 커졌고,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인증제가 정착해 왔다. 이번 평가는 제4주기 기본계획 개편 내용을 반영해 대학의 행정적 부담은 완화하되, 부실한 유학생 관리에 대해서는 제재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개선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한국어 능력 기준을 단계적으로 상향 조정해 학업 수행 역량을 보다 엄격히 점검하도록 했고, 출입국관리법 위반 대학에 대한 제재 기간을 기존 1년에서 최대 3년까지 확대했다. 또한 전문대학의 특성을 고려한 별도 평가지표를 마련한 점도 중요한 변화다. 이번 심사에서는 학위과정 181개교, 어학연수과정 123개교가 인증대학으로 지정되었으며, 이 중 39개교가 우수인증대학으로 별도 선정되었다. 교육부가 공개한 사례를 보면, 우수인증대학들은 유학생 선발에서부터 입학·적응, 학업 및 정서 지원, 진로와 취업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예컨대 한성대학교는 유학생 지원의 출발점을 입학 이후가 아니라 입학 이전 준비 단계로 설정하고, 언어교육센터의 어학연수 과정부터 학부·대학원에 이르는 전 과정을 연계하는 전주기 관리 시스템을 구축해 운영하고 있다. 서울시립대학교는 예비 입학생을 우선 선발한 뒤 한국어능력시험(TOPIK) 기준을 충족하면 정식 입학하도록 하는 제도를 운영하고 있으며, 경북대학교는 비자 전문 강사 초빙을 통해 취업·정주 관련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울산과학기술원은 전문적 정신건강 지원 체계를 마련해 유학생의 심리적 안정과 적응을 돕고 있다. 유학생 30만 명 시대를 향해 가는 지금, 이번 교육국제화역량 우수인증 발표는 분명한 메시지를 던진다. 유학생을 단기적 재정 보완 수단으로 바라보는 시각으로는 건강한 국제화 생태계를 구축하기 어렵다. 한국 대학의 국제화는 이제 단순한 숫자 경쟁을 넘어, 지속 가능한 관리 시스템과 대학 구성원 및 사회 전반의 성숙으로 나아가야 할 시점이다.
병오년 설이 지났다. 2026년, 대한민국이 마주한 시대정신은 단연 불확실성이다. 국제 질서는 거칠게 요동치고, 인공지능과 디지털 기술 혁명은 산업과 노동의 지형을 근본부터 뒤흔든다. 세대·이념·진영 간 균열과 저출산·초고령·양극화는 공동체의 신뢰 자산을 잠식하고 있다. 이제는 정부의 국정목표나 대통령 개인의 리더십만으로 국가의 미래를 예측하고 설명하기 어려운 국면에 들어섰다. 이럴수록 주권의 주체인 국민은 멈추지 않고 질문해야 한다. 정치·경제·사회·문화는 물론 인구·교육·과학·복지, 안보·외교·통일·재외동포, 에너지·산업·노동·이민, 국토·균형발전·부동산과 기후·정보환경·주식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영역이 동시에 시험대에 올랐다.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바꾸며 무엇을 내려놓을 것인가. 답을 미리 정해두고 설득에 나서는 정치로는 감당하기 어렵다. 질문은 무지를 드러내는 행위가 아니다. 질문이 사라진 공동체는 정체와 퇴보로 향한다. 알면서도 묻고, 이해했다고 여겨도 다시 점검하는 사회만이 불확실성의 강을 건널 수 있다. 2014년 겨울, 히브리대학교를 찾았을 때의 일이다. 히브리어 집중과정인 울판 관계자는 한국인 유학생들이 좀처럼 질문하지 않는다고 했다. 사소해 보여도 곧바로 묻는 다른 학생들과 대비된다는 평가였다. 모르는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질문 자체를 주저한다는 것이다. 질문은 정답을 얻는 기술이 아니라 사고를 단련하는 태도다. 이해되지 않으면 묻고, 의심이 들면 확인하며, 합의가 필요하면 공개적으로 토론하는 과정이 곧 질문이다. 이때 구성원들의 자세가 중요하다. 아는 것은 분명히 답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말하며, 오류가 드러나면 수정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질문이 정교해질수록 질문자와 답변자는 같은 방향으로 나아간다. 동양 고전 예기 학기편의 ‘교학상장(敎學相長)’은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에서 서로 성장한다는 통찰을 전한다. 논어 공야장편의 “묻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不恥下問)”는 구절도 다르지 않다. 질문에는 지위도, 나이도 없다. 끊임없이 서로 묻고 답하는 공동체만이 길을 찾는다. 멈춰 서서 답만 기다리는 순간 길은 막힌다. 그러나 한 걸음 내딛고 질문을 던질 때, 막혀 보이던 길은 다시 열린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또 하나의 구호가 아니다. 질문을 생활화하는 문화다. 정책 결정 과정에서 반대 의견을 존중하고, 데이터와 근거로 검증하며, 시행착오와 실패를 기록해 다음 선택의 자산으로 삼는 열린 시스템 말이다. 질문과 대화를 두려워하는 리더십은 공동체를 분열시키지만, 질문과 대화를 환영하는 리더십은 공동체를 단결시키고 전진시킨다. 대한민국의 미래는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얼마나 성실하게 묻고 답하느냐에 달려 있다. 무엇을 지켜야 하고, 무엇을 고쳐야 하며, 무엇을 새롭게 발전시켜야 하는지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과 점검. 그 질문을 멈추지 않는 사회만이 불확실성의 시대를 건널 수 있다. 국가의 운명은 결국 정답을 강요하는 목소리가 아니라, 질문을 멈추지 않는 태도에서 갈린다.
자동차에 탑재되는 ACC(Adaptive Cruise Control:적응형 순항제어기능) 장치에 대한 맹신이 고속도로 등에서 발생하는 2·3차 사고의 치사율을 높이는 것으로 나타나 비상이다. 운전자들이 ‘운전 보조장치’에 불과한 시스템을 마치 ‘완전자율주행’ 장치로 착각하는 것이 문제인데, 이 같은 오신(誤信)은 자동차 회사의 부실한 홍보도 영향이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맹신을 개선하는 것을 포함한 사고 방지를 위한 적극적인 조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경찰에 따르면 최근 고속도로 등에서 발생하는 2·3차 사고 가해 차량은 대부분 ACC 기능을 사용 중이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최근 3년(2023~2025년)간 경기남부 고속도로 교통사고 사망자 110명 중 34명(31%)이 2차 사고로 숨졌다. 한국도로공사 통계에서도 최근 6년간 ACC 사용 중 발생한 고속도로 사고는 31건이며 사망자는 21명으로 집계된다. ACC는 운전자가 설정해 놓은 속도를 유지하면서 앞차와의 간격까지 자동으로 조절해주는 기능이다. 앞차가 속도를 줄이면 내 차도 알아서 속도를 줄이고, 앞차가 다시 속도를 내면 내 차도 따라 속도를 낸다. 장거리 운전할 때 피로도 덜고, 졸음운전 위험도 줄여준다고 해서 많이 사용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ACC는 어디까지나 ‘운전자를 보조하는 장치’라는 사실이다. 모든 상황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대처하는 것이 아니라, 센서나 카메라가 인식하는 범위 내에서만 제한적으로 작동한다. 갑자기 끼어드는 차나 도로에 떨어진 장애물, 아니면 이미 사고로 멈춰 있는 차량을 ACC가 제대로 인지하지 못할 수도 있다. 교통안전공단에 따르면, 대부분 ACC는 건조한 노면과 평지, 일반적인 중량을 기준으로 작동한다. 비나 눈, 안개와 같은 악천후에는 카메라와 센서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을 수 있다. 젖은 노면에서는 제동 거리가 늘어나 앞차와의 거리 유지가 어려워지며, 탑승자가 많아 차량 무게가 늘어난 경우나 내리막길, 굽잇길에서도 사고가 발생할 위험이 크다는 게 공단 측의 설명이다. 또, 전방 차량의 속도가 현저히 느리거나 정차한 경우와 공사 중이거나 사고 처리 현장에서도 추돌 가능성이 있다고 덧붙였다. 때문에, ACC에 대한 의존은 금물이다. 운전자는 필요시 즉각적으로 운전대 조작과 속도 조절을 할 수 있도록 대비해야 한다. 또한, 기능을 안전하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자동차 사용 설명서를 꼼꼼히 확인하고, 주의사항을 숙지하는 것도 필요하다. 경찰은 ACC 사고 예방을 위해 도로관리청·소방과 협의해 사고 접수 단계에서부터 본선 대피를 적극 안내하도록 시스템을 보완할 계획이다. 한국도로공사와 합동으로 안내판·현수막·라디오 방송 등을 활용한 ‘비트박스(비상등 켜고, 트렁크 열고, 밖으로 대피, 스마트폰 신고)’ 캠페인도 강화한다. 매월 1회 이상 고속도로 2차 사고 대응 FTX를 실시해 현장 근무자 안전 확보에도 총력을 기울인다는 방침이다. 전문가들은 우선 ‘ACC는 만능이 아니다’라는 것을 항상 기억하라고 조언한다. 비나 눈, 안개 등으로 센서나 카메라의 인식이 흐려질 수 있는 까닭에 악천후나 야간 운전 시에는 ACC 사용을 자제하는 것이 좋다. 복잡한 도로나 공사 구간, 갑작스러운 차선 변경이 잦은 곳에서도 ACC가 오작동할 가능성이 높으므로 사용하지 않는 것이 안전하다. ACC 설정 간격을 충분히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다. 자동차 판매 과정에서 소비자들이 ACC 기능에 대해서 과도하게 신뢰하도록 잘못된 영향력을 미치고 있지는 않은지에 대한 검토도 필요하다. 기능의 한계를 충분히 숙지하지 않고 ‘반자동’ 보조장치를 ‘완전자율주행’ 장치인 양 사용하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 멈춰 서 있는 차량을 ACC 기능 탑재 차량이 대책 없이 들이받는 심각한 사고에 이렇게 허술하게 대응해서는 안 될 시점이다.
어떤 시간은 멀게 느껴지다가도 때로는 바로 눈앞의 장면처럼 또렷하게 떠오른다. 30년 전 한의과대학에 합격했던 순간도 그렇다. 향우회 선배의 소개로 고향에서 개원 중이던 대선배를 찾아뵙고 식사를 함께한 자리에서 선배는 한의학 책을 건네주셨다. “내 동기가 쓴 책이야.”라며 건넨 책 가운데 한 권의 제목은 ‘음양이 뭐지’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책은 설명이라기보다 질문에 가까웠던 것 같다. 서양 과학과 논리에 익숙했던 나에게 음양이라는 개념은 낯설고 막연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공부를 이어가면서 그 의미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고 점차 생생한 개념으로 다가왔다. 그럼에도 진료실에서 환자에게 설명하려 하면 처음 이 개념을 접했을 때의 낯섦이 떠올라, 어떻게 하면 더 쉽게 전달할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된다. 음양이라는 말은 해가 비치는 언덕의 밝은 쪽을 양, 그늘진 반대편을 음이라 부른 데서 시작되었다. 밝은 쪽이 생기면 자연히 그늘이 생기듯 이 개념에는 상대성이 담겨 있다. 낮과 밤이 교대로 오고 계절이 순환하듯 자연은 늘 두 흐름 속에서 움직인다. ‘주역(周易)’에서는 이를 두고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라 했다. 한 번 음이 되고 한 번 양이 되는 그 끊임없는 변화의 움직임 자체가 곧 대자연의 질서이자 도(道)라는 뜻이다. 한의학에서는 이러한 조화로운 동적 평형이 유지되는 상태를 건강이라 본다. 최근의 생리학 연구들은 음양을 인체 조절 시스템의 항상성(Homeostasis)이라는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있다. 특히 신경-내분비-면역(NEI) 네트워크 연구는 이를 잘 보여준다. 우리 몸의 뇌와 호르몬, 면역계는 독립된 기관이 아니라 서로 긴밀하게 신호를 주고받으며 하나의 통합된 조절 시스템으로 작동한다. 예를 들어 외부의 위협이나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을 때 교감신경이 활성화되는 것은 ‘양’의 급격한 항진으로 볼 수 있다. 이때 분비되는 아드레날린과 코르티솔 같은 호르몬은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에너지를 집중시키지만, 이러한 상태가 장기화되면 면역 기능을 억제하고 만성적인 염증 반응을 유발할 수 있다. 반대로 충분한 휴식과 이완을 담당하는 부교감신경의 활성화는 ‘음’의 보충과 회복에 해당한다. 결국 음양의 조화란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 활동과 휴식, 염증과 항염 반응이 균형을 이루며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해 가는 생리적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임상에서 만나는 많은 환자들은 검사상 뚜렷한 이상이 없는 기능저하 상태를 나타낸다. 피로와 불면, 소화불량, 통증을 호소한다. 오랜 스트레스와 긴장 속에서 자율신경과 호르몬, 면역 조절의 균형이 흔들린 경우가 많다. 이런 상황에서 치료는 과잉된 양을 덜고 음을 회복한다. 단순히 증상을 없애는 데 그치지 않고 몸이 스스로 균형을 회복하도록 돕는 과정이 된다. 충분한 수면과 휴식, 규칙적인 생활, 호흡과 이완 같은 기본적인 회복 과정이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황제내경’에서는 음양을 천지의 도이자 만물을 다스리는 근본이라고 말한다. 음양은 서로 다른 힘이 균형을 이루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동적 평형을 보이는 자연의 상태를 표현하는 개념이다. 진정한 건강이란 더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몸이 원래 가지고 있던 조화와 균형을 회복하는 것이 아닐까. 이 오래된 지혜는 지금도 여전히 살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