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비일비재하게 발생하는 ‘유령집회’와 ‘알박기 집회’가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법의 사각지대를 파고들어 집회 형식으로 타인 또는 다른 집단의 정당한 헌법적 ‘집회·결사의 자유’를 침해하는 이 같은 얌체 행위는 심각한 폐해다. ‘집회’가 목적이 아니라 ‘장소 선점 장악’이라는 불순한 목적으로 자행되는 편법 행위는 제도적으로 막아야 한다. 특히 상습적으로 이런 일을 벌이는 개인이나 단체부터 과태료 가중부과 등 강력한 조치가 필요하다. 집회 신고만 하고 실제 집회는 하지 않는 것을 이른바 ‘유령집회’라고 한다. 더 나아가 집회는 거의 하지 않으면서 장기간 특정 장소를 선점해 집회 신고를 하는 방법으로 다른 단체의 집회나 행사를 차단하는 것은 ‘알박기 집회’라고 한다. 적극적으로는 집회 장소를 다른 사람들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막아내려는 목적으로 선점하는 것이고, 소극적으로는 예고 플래카드 등을 통해서 자신들의 주장을 알리는 편법적 목적으로 악용한다. 경기신문이 입수한 경찰청 공공데이터포털 자료에 다르면 전국 집회 신고 건수는 2021년 357만 9541건에서 2022년 430만 4917건으로 37%가량 증가했다.그러나 실제 집회가 열린 건수는 2021년 8만 6348건, 2022년 7만 6031건으로, 미개최율이 무려 98%에 달하고 있다. 2023년에도 290만 7251건이 신고됐으나 개최 건수는 7만 9395건에 불과하다. 지난해 1월부터 10월까지도 미개최율은 96.6%에 달하고 있다. ‘유령집회’ 또는 ‘알박기 집회’의 경우 집회를 통해 자신들의 주장을 알리는 것보다는 장소 선점이 주목적이다. 그 과정에서 주민 불편과 도시 미관 저해는 물론이고 경찰과 지자체의 행정력 낭비 또한 중대한 문제점이 아닐 수 없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2016년 집회 철회 신고를 하지 않을 경우 과태료를 부과할 수 있도록 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을 개정했다. 하지만 이 법은 사문화된 실정이다. 선순위 단체와 후순위 단체의 중복 집회가 발생한 경우에만 과태료 부과가 가능해 결과적으로 ‘신고만 하고 열지 않는 집회’를 막을 장치는 사실상 없다. 유령집회로 인한 경찰의 부담은 심대하다. 일단 집회 신고가 접수되면 경찰은 참가 인원을 기준으로 경비 규모를 산정하고, 줄곧 동향을 점검해야 한다. 집회 당일 아침에 갑자기 집회 취소를 통보하는 경우도 잦다. 참가 인원을 과도하게 부풀려 신고하는 이른바 ‘뻥튀기 집회’도 문제다. 경기신문 취재 결과, 100명 이상 집회를 신고한 사례 중 상당수는 실제 참가 인원이 현저히 미달했다. 집회·결사의 자유는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이다. 그러다 보니 경찰과 지자체 모두 현수막 철거 등 적법한 행정 조치를 하지 못하고 서로 책임을 떠넘기기에 급급한 형편이다. 상황을 이대로 방치해서는 안 된다. 다른 국민의 정당한 헌법적 권리를 박탈하고 주거환경을 어지럽히면서 공권력의 막대한 낭비를 초래하는 ‘유령·알박기 집회’는 반드시 개선돼야 한다. 현행 집시법상 집회 인원 과장 신고 자체를 제재하기는 어렵다. 허가제가 아니라 신고제인 집회 신고를 반려하게 되면 곧바로 기본권 침해 논란이 벌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법조계 전문가들은 상습적인 유령집회나 알박기 집회 주최자에 대해서는 집회 우선순위를 제한하거나 집회방해죄, 권력남용죄를 적용할 수 있다는 견해를 내놓기도 한다. 전문가들의 조언 중에서는 “제재의 방향을 처벌이 아닌 ‘불이익 부여’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는 아이디어에 눈길이 간다. ‘유령집회’나 ‘알박기 집회’를 반복적으로 저지르는 주최 측에 대해서 가중된 과태료를 부담시켜 자제하도록 유도하는 것도 좋은 방안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신고는 해놓고 실제 집회를 여는 경우가 5%도 되지 않는 불순한 이 엉터리 ‘집회의 자유’를 방치해야 하는 불합리라니, 결코 안 될 일이다.
보일러가 고장 났습니다. 하필이면 기온이 영하로 뚝 떨어져 버린 날이었어요. 그것도 저녁 무렵이었지요. 대리점에 전화했지만, 일과가 끝난 시간이라 보일러 기사는 다음날에야 방문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예상한 일이었지만 난감했습니다. 날이 어두워질수록 집안은 점점 더 싸늘해졌어요. 추운 겨울이라지만 실내에서조차 몸을 움츠린 채 서성이는데, 순간 짜증이 치밀어 올라왔습니다. 그러고는 이토록 사소한 일에 반응하는 나를 보며 마음이 또 가라앉아버렸지요. 잠깐의 불편도 참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게 아찔했습니다.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쌓아두었습니다. 씻는 일이 가장 큰 문제로 다가왔어요. 차가운 물로 이를 닦고, 고양이 세수를 했어요. 전기포트에라도 물을 끓이면 될 것을, 그건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따뜻한 물이 그리웠습니다. 이미 경험한 것, 오래 누려서 익숙한 것이 끊겨버리자, 그리움은 더 선명해졌습니다. 그 틈으로 묻혀 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몸 하나가 다 들어가는 빨간 고무통. 우리는 속옷만 입고 엄마의 호명을 기다리며 오돌오돌 떨고 있었어요. 차례를 기다리며 먼저 들어가기 싫다고 뻗대다가 다 씻고 나온 사람을 부러워하기도 했지요.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는 고무통 속은 따뜻했습니다. 살이 벗겨지도록 벅벅 몸을 밀어대는 엄마의 손길만 아니었다면, 그 속에서 나오기 싫을 만큼 좋았죠. 그리고 겨울 아침에는 이불 속에서 나오기 싫어 늦장을 부리는 날이 많았습니다. 그러면 들통에 데운 물은 어느새 동이 나버렸어요. 게으름을 피운 대가는 차가운 물로 몸을 씻고 학교에 가는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불편한 줄 몰랐습니다. 그때는 다 그렇게 살았으니까요. 보일러 기사가 방문하겠다고 약속한 아침은 오지 않을 시간처럼 길게 느껴집니다. 카프카의 『성』에서 측량기사 K가 끝내 성에 들어가지 못하는 내용이 떠올랐습니다. 천천히 마음을 다독였어요. 그러자 안락함에 길들어진 나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하룻밤의 불편을 어떤 불행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모습 말이에요. 하루가 아닌 매일의 일상을 그렇게 살아내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텐데요. 새해가 시작되고 세운 계획들과 이루고 싶은 꿈의 목록에는 나만 있었어요. 다른 이들의 건강과 행복을 얼마나 간절하게 품어 보았나, 생각했습니다. 보일러 기사는 약속한 시각보다 더 늦게 도착했습니다. 그래도 괜찮았습니다. 보일러는 결국 수리가 아닌 교체를 해야 했지요. 그것도 괜찮았어요. 드디어 집안에 온기가 돌고 수도꼭지를 돌리자 따뜻한 물이 콸콸 쏟아졌습니다. 마치 새로운 샘을 판 것 같았어요. 하룻밤 사이에 꼬질꼬질해진 몸을 씻었습니다. 따뜻한 물로 몸을 씻으며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깨끗함을 유지하고, 품위를 지닐 수 있게 해주는 것들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매일 당연하게 누려온 일상에 작은 균열이 생기고 나서야, 우리가 얼마나 편리한 구조 속에서 살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이 마음 역시 곧 잊히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따뜻한 물을 쉽게 쓸 수 없는 집들을 떠올렸습니다. 보일러 온수의 온도를 이전보다 낮게 설정했습니다. 너무 뜨겁지 않게요. 차가움과 따뜻함 속에서 비로소 잠깐,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생각했습니다.
새해를 맞아 여러분은 어떤 계획을 세우고 계시는가? 색다른 여행을 꿈꾸고 있지는 않으신지? 식상한 일상으로부터 탈피하고 싶은 이들에게 소개하고픈 곳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나라 상투메 프린시페(São Tomé et Príncipe)가 바로 그곳이다. ‘성 토마스’와 ‘왕자’를 의미하는 이 두 섬은 대서양 한가운데 울창하게 솟아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가봉 해안과 적도, 그리고 그리니치 자오선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다. 자연 애호가나 하이킹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최적의 여행지다. 원시 그대로의 보석이자 세상 변방에 자리한 무공해 파라다이스이니까. 이 진가를 알아 본 유네스코는 지난 9월, 나라 전체를 생물권 보전지역으로 정했다. 한 국가를 통째로 지정한 예는 유례가 없는 일이다. 상투메 프린시페는 1975년까지 식민지였다. 포르투갈의 탐험가인 산타렘과 에스코바르는 1470년 12월과 1471년 1월 각각 이 섬을 발견했다. 그 당시 군도는 숲으로 뒤덮인 무인도였다. 물론 지금도 대부분 야생 그대로이지만 말이다. 울창한 열대우림으로 뒤덮여 있고 구리 빛 모래 해변이 가장자리를 따라 펼쳐져 있다. 포르투갈인들은 이 섬들을 노예무역의 중심지로 삼았다. 그러나 19세기 말에 세계적인 코코아 생산지로 탈바꿈시켰고 1913년 급기야 세계 최대의 카카오 성지로 만들었다. 이후 유럽 지주들은 ‘로사스(roças)’라는 광활한 농장을 관리했지만 지금은 방치된 상태다. 다행히 남아프리카의 한 억만장자가 섬에 매료돼 복원 사업을 벌이고 그중 하나를 매력적인 호텔로 단장했다. 카카오 농장 또한 카카오 열매 수확부터 초콜릿 제조 과정까지 직접 체험할 수 있게 복원됐다. 이 군도는 예나 지금이나 해로로 접근하는 것이 좋다. 로빈슨 크루소가 돼 프라이데이를 만나고 싶다면 주저 말고 떠나라. 문명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고요한 원시의 땅, 이 야생의 땅에 거북이들은 겨울철 알을 낳으러 모여 든다. 상투메 프린시페는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가장 부자 나라일 것이다. 국가가 보유한 돈이야 별 볼일 없지만 광활한 원시림과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깨끗한 해변으로 치면 어떤 나라가 대적할 수 있겠는가. 안전하면서도 때 묻지 않은 자연이 간직된 곳은 없다고들 한다. 하지만 상투메 프린시페는 그렇지 않다. 이곳에는 아직 상업 적인 때가 끼지 않았다. 눈이 시리게 찬란한 바다에 구불구불 이어진 해안선과 그 너머로 어우러진 유적지, 그야말로 환상이다. 제국주의 시대 포르투갈인이 건설한 성 세바스티앙 요새는 현재 국립 박물관으로 탈바꿈돼 에콰도르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게 해 준다. 대통령궁 맞은편에 있는 은총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과 그 내부 벽면을 장식한 모자이크 역시 더없이 아름답다. 거리 여기저기에는 허물어져 가는 식민지 시대의 건물들이 500년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시장 근처에는 노랑 택시들이 빈티지 오토바이들과 뒤엉켜 이색적인 풍경을 자아낸다. 높고 뾰족한 바위들은 푸른 초목 위로 솟아올라 하늘을 찌르고 프린시페의 공원 중심부에 우뚝 선 봉우리는 63빌딩을 능가한다. 바늘 만에서 바라보는 이 풍경은 마치 돌로 된 거인이다. 순수의 나라 상투메 프린시페는 독립 50주년을 맞았다. 인구의 70%가 35세 미만으로 세계에서 가장 젊은 나라, 이 나라가 2026년 여러분을 향해 손짓하고 있다.
필자는 요즘 물구나무서기를 연습하고 있다. 처음부터 맨 땅에서 균형을 잡는 일은 불가능하다. 어색하다. 체중을 팔에 실어본 경험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손목이 먼저 아프고, 시선은 어디를 둬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 벽에 기대어 다리를 들어 올리고, 손바닥에 체중을 실은 채 숨을 고른다. 이마저도 쉽지 않다. 1분도 버티기가 힘들다. 다리가 공중으로 뜨는 순간, 몸은 본능적으로 균형을 거부한다. 넘어질 것 같다는 두려움이 먼저 앞선다. 몇날 며칠을 시도하다보면 조금 나아진 듯하다가도, 어느 지점에서 더 이상 나아지지 않는 순간이 찾아온다. 흔한 말로 ‘벽’을 느낀다. 아무리 연습해도 넘어가지 않는, 분명하지만 설명하기 어려운 한계. 그 벽을 넘기 위해 근력을 키우는 일은 물론, 손의 각도, 시선의 위치, 호흡의 리듬, 몸을 맡기는 감각 등의 여러 기술도 몸에 익혀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그리고 그 감각은 누가 대신 알려줄 수 없다. 실패를 반복하며 스스로 몸으로 익혀야 한다. 그래서 물구나무서기에서 가장 시간이 오래 걸리는 구간은, 넘어지지 않는 법을 배우는 순간이 아니라, 아직 넘어가지도 못한 채 제자리에서 버티는 시간이다. 그리고 이 단계를 넘어가기까진 생각보다 훨씬 긴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우리가 인생에서 만나는 난관도 크게 다르지 않다. 난관을 넘어서는 일은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우리는 매번, 빨리 그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 벽을 넘어가기 위해 필요한 시간이 있다. 수없이 실패하며 벽 앞에 서 있던 시간,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였던 연습의 시간 말이다. 우리는 난관을 빨리 통과해야 하는, 오래 머물러서는 안 되는 장애물처럼 여긴다. 그래서 벽 앞에 있는 시간을 실패로 생각하는 것 같다. 아무 변화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그 시간은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돌아보면, 성장은 그 시간 속에서 이루어진다. 겉으로 드러나는 변화가 없을 뿐, 몸과 마음은 조용히 적응하고 방향을 익혀가고 있다. 모든 사람에게 난관은 찾아온다. 그것이 일의 형태이든, 관계이든, 혹은 스스로에 대한 의심이든 다르지 않다. 중요한 건 그 앞에서 어떤 태도로 머무르냐는 것이다. 누군가는 벽 앞에서 물러서고, 누군가는 같은 자리에서 다시 손을 짚는다. 특히 어려운 것은, 이 시간이 얼마나 더 필요한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언제쯤 나아질지, 어느 순간 갑자기 벽을 넘게 될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조급해진다. 남들은 이미 다음 단계로 간 것처럼 보이고, 나만 뒤처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그 시간은 분명 우리를 다음 단계로 데려가기 위한 과정이다. 넘어지지 않기 위해 버티는 시간, 흔들리면서도 다시 중심을 잡아보는 시간이 결국 우리를 단단하게 만든다. 그래서 난관 앞에서 스스로를 다그치지 않았으면 한다. 아직 넘어가지 못했다고 해서, 잘못 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자리에 서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충분히 애쓰고 있다는 증거다. 난관은 누구에게나 오지만, 그 시간을 견디는 사람만이 결국 다음 자세로 넘어간다. 오늘도 넘어지지 않고 버텼다면, 이미 한 걸음은 나아간 셈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더 큰 각오가 아니라, 지금의 자세를 하루만 더 유지해보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각자의 벽 앞에서, 다시 한 번 손을 짚어보자. 그 시간이 결국 우리를 바꿀 것이다.
경기도에 거주하는 여성 4명 중 1명이 일상생활에서 스토킹, 교제 폭력, 디지털 성폭력 등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는 충격적인 조사 결과가 나왔다. 여성 폭력은 우리가 타파해야 할 성차별 문화 중 으뜸 항목이다. 1988년에 여성정책 총괄·조정업무를 전담하는 정무장관(제2)실이 설치된 이래 역대 정부는 모두 성평등 정책을 강화해 왔다. 그런데도 아직 우리 사회에 여성 폭력의 공포가 이렇게 깊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진정한 성평등 선진국으로 가기 위한 일대 각성이 필요하다. 경기도여성가족재단은 지난 2022년에 이어 두 번째로 여성 폭력 실태 조사를 실시해 ‘2025년 경기도 여성폭력 실태조사’ 보고서를 발간했다. 재단은 경기도에 거주하는 만 19~79세 여성 2000명을 대상으로 신체적, 정서적, 성적, 경제적, 스토킹, 디지털 성폭력 등 6개 폭력 유형별 피해 경험, 폭력 피해 발생 상황에서의 대처, 폭력에 대한 인식 등을 조사했다. 조사 결과 응답자 중 무려 24.0%가 ‘성추행이나 성폭력 피해에 대한 두려움’을 느낀다고 답변한 점이 눈에 띈다. 적어도 여성의 4분의 1은 일상적으로 성적 폭력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며 산다는 뜻이어서 안타깝다. 폭력에 대한 두려움은 ‘늦은 밤거리를 지나가거나 택시를 탈 때 두렵다’(57.3%)고 느끼는 경우가 가장 많았다. 그다음으로 ‘불법 촬영에 대한 두려움’(39.1%), ‘집에 혼자 있을 때 낯선 사람의 방문에 대한 두려움’(38.4%) 순이었다. 폭력 피해에 대한 두려움은 전반적으로 19세·20대와 30대 등 젊은 층에서 높게 나타났다. 특히 불법 촬영에 대한 두려움, 낯선 사람의 방문, 늦은 밤거리 이동 등의 경우 19세·20대와 30대의 경우 50%를 웃돌았다. 20~30대 여성들은 일상적 삶의 많은 순간에 폭력 피해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보고서에 나타난 최근 1년간 폭력 유형별 실제 피해 경험률을 살펴보면, 정서적 폭력 18.7%, 성적 폭력 9.1%, 신체적 폭력 5.6%, 경제적 폭력 2.0%, 스토킹 1.2%, 디지털 성폭력 0.5% 순이었다. 성평등가족부는 현행 성폭력방지법에 따라 공공기관 등에서 의무적으로 성희롱 방지 조치, 성매매·성폭력·가정폭력 예방 교육 등을 시행한다.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는 ‘찾아가는 폭력예방교육’을 통해 지역사회 인식 개선 도모하고 있다. 아동·청소년을 상대로는 지역 아동·청소년 성교육 전문기관(청소년성문화센터)을 운영하고 있다. 경기도는 전국 최초의 젠더폭력 피해자 통합 대응 플랫폼으로서 ‘경기도젠더폭력통합대응단’을 구성해 운영하고 있다. 365일 24시간 언제나 성별, 나이, 국적, 장애 등과 상관없이, 하나의 통합창구로 빈틈없이, 끝까지 피해자를 지원한다는 개념이다. 이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경기도 여성의 젠더폭력에 대한 두려움이 심각한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조사 결과는 제도적 정책적 성과에 대한 부정적인 현장 민심으로 읽힌다. 특히 이번 조사 결과에서 취약한 위치에 있는 여성들의 폭력 피해가 상대적으로 높게 나타나 사각지대의 존재가 드러난 점은 유의해야 할 대목이다. 폭력 유형별 피해율, 친밀한 관계에서의 폭력 피해율, 복합 피해율 모두 고령자, 저학력, 저소득, 별거·이혼·사별, 임시·일용 근로자, 기능·단순노무직 등에서 높게 나타났다. 이는 앞으로 정책 방향이 어떻게 설계돼야 하는지를 넉넉히 시사한다. 취약 계층 여성들이 위기 국면에서 즉각적으로 보호받는 등 안심하고 일상을 누릴 수 있는 안전 시스템이 더 촘촘하고 깊숙하게 마련돼야 한다. 현시점에서 가장 중점적으로 점검해야 할 요소는 매너리즘에 빠져서 시행하는 행정의 효율성 문제다. 숫자에 얽매여 ‘실적’에만 매몰되는 관습적 행정의 폐단을 혁파하는 일이 시급하다. 정량적인 ‘실적’ 지향과 정성적인 ‘성과’ 도출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경기도여성가족재단의 이번 조사 결과는 현행 성평등 정책에 날카로운 비판지점을 노정하고 있다.
중국 배우 저우둥위(주동우)의 출연작 <먼 훗날 우리>는 2018년 개봉 당시 중국 국내에서만 약 13억 7000만 위안(우리 돈 약 2500억 원)을 벌어들였다. 한국에서는 개봉하지 않았다. 비슷한 시기 넷플릭스를 통해 전 세계에 알려졌다. 최근 개봉한 한국 영화 <만약에 우리>는 <먼 훗날 우리>의 리메이크 영화이다. 이 한국 영화는 지난 세밑(12월 31일)에 개봉해 2주 만에 관객 120만 명을 모았다. <만약에 우리>의 흥행은 여러 시그널을 주고 있다. 사실 원작인 <먼 훗날 우리>는 대만 감독이 만든 것이어서 중국 영화계의 일국양제(一國兩制) 시스템을 은근히 구현한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이번 한국의 리메이크와 흥행 성공의 예감 역시 한-중간의 새로운 문화협력을 넘어 지난 시대에 내려진 한한령(限韓令)의 중단을 알리는 신호탄이 될 수도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다른 각도로 보면, 극장과 OTT 플랫폼 특히 넷플릭스가 공생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먼 훗날 우리>가 넷플릭스로 공개된 이상 그것을 다시 극장용으로 만든다는 것은 의미 없는 일로 치부되기 쉽다. 그러나 극장 관객들은 종종 별도로 존재하며 넷플릭스에 이미 나왔다는 것이 오히려 입소문의 프로모션으로 작동했음을 이번 사례가 보여준다. 그건 넷플릭스의 이해관계와도 상통하는 얘기이다. 넷플릭스의 경우 해외 유수 영화제에 자사 영화 콘텐츠를 탑재하는 데 여러 제약이 따른다. 칸에는 출품하지 못한다. 베니스는 그걸 이용해 넷플릭스를 전격 수용하고 있다. 베를린은 제한적이다. 미국 아카데미 영화상에 후보가 되기 위해서는 무조건 극장에 갔다 와야 한다. 최소 2주 이상이다. 조지 클루니 주연의 영화 <제이 켈리> 같은 영화가 국내에서 2주 이상 극장 개봉을 단행한 것도 그 같은 넷플릭스의 전략 때문이다. 넷플릭스는 이걸 작품의 프로모션으로 활용하고 있다. 극장 측에서는 이왕 하는 거, 보다 상업적이고 대중적인 영화의 사전 극장 개봉, 사전 프로모션의 경우 수가 더 많아지길 희망하고 있다. 어쨌든 새해 벽두에 예상치 못한 한국 영화 히트작이 나왔다. 2008년이 배경인 영화다. 미래에 대해 늘 불안하고 흔들릴 수밖에 없는 20대 청춘들의 얘기를 담았다. 그들에게는 늘 ‘만약’이 중요한 법이다. 기대와 후회의 정서를 모두 담고 있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약 20년 전 얘기지만 그것이 오히려 지금 20대들의 복고 감성마저 자극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배우 출신으로 <82년생 김지영>을 만들어 촉망을 한눈에 받았던 감독 김도영의 두 번째 영화이다. 기량이 뛰어난 감독의 발굴이 다시 이루어진 셈이다. 구교환이 다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고 문가영의 인기가 올라가고 있다. 새로운 청춘 아이콘이 탄생할 것으로 보인다. 넷플릭스에 있는 저위둥위 주연의 중국 콘텐츠 <먼 훗날 우리>의 조회수도 덩달아 다시 올라갈 가능성이 높다. 연말 청룡영화상 공연 무대에서 폭발한 박정민 – (가수) 화사 커플의 인기에 이어 한국 콘텐츠에 멜로 붐을 일으킬 조짐도 보인다. 하긴, 한국에는 지금 멜로 감성이 필요할 때이기도 하다. 가뜩이나 사회와 정치, 국제 환경 뉴스가 삭막할 때이다.
지방선거를 앞둔 시점마다 반복적으로 제기되는 문제가 있다. 바로 임기를 얼마 남기지 않은 지방자치단체장의 대규모 인사, 이른바 선심·보은·정실 인사 논란이다. 최근 일부 지역에서도 특정 인맥이나 측근 위주의 인사가 단행되거나 예고되고 있다는 이야기가 공직사회 안팎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인사는 단순한 자리 이동이 아니다. 조직의 가치관과 운영 철학이 고스란히 반영되는 행정의 핵심이다. 그럼에도 임기 말에 이루어지는 무리한 인사는 공정성과 책임 행정이라는 지방자치의 기본 원칙을 흔들 수 있다는 점에서 가볍게 넘길 사안이 아니다. 가장 큰 문제는 공정성에 대한 신뢰 훼손이다. 성과와 역량보다는 개인적 친분이나 정치적 고려가 인사의 기준이 된다는 인식이 확산됨에 따라 다수의 공무원들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된다. “열심히 일해도 소용없다”라는 냉소가 조직 전반에 퍼지면 행정의 동력은 급격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점은 차기 지방정부의 인사권 침해 문제다. 임기 종료를 앞두고 국·과장급을 포함한 대규모 인사를 단행하거나 핵심 보직에 장기 근무가 가능한 인사를 배치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다음 단체장의 합법적인 인사권을 제약하는 효과를 낳는다. 이는 선거를 통해 새롭게 부여될 권한과 책임의 범위를 미리 잠식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다. 이러한 인사 관행은 결국 행정의 정치화라는 부작용으로 이어진다. 공직사회가 주민이 아닌 특정 세력이나 개인의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인식이 자리 잡을 경우, 그 피해는 고스란히 시민에게 돌아간다. 행정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면 정책 추진력 역시 약화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첫째, 선거를 앞둔 일정 기간에는 불가피한 결원 보충을 제외한 대규모 인사를 자제하는 관행이 정착되어야 한다. 둘째, 인사 기준과 절차를 보다 투명하게 공개해 불필요한 오해와 의혹을 차단해야 한다. 셋째, 임기 말 인사에 대해 보다 엄정한 시선으로 감시하고, 원칙에서 벗어난 인사에 대해서는 분명한 문제 제기가 가능해야 한다. 끝으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메시지다. “인사는 개인의 것이 아니라 조직과 시민의 것”이라는 원칙을 분명히 하고, 공정성과 책임을 중시하는 인사 운영이 계속될 것이라는 신뢰를 공직사회에 주어야 한다. 이는 소외감을 느끼는 다수의 공무원들에게 최소한의 희망이자, 행정의 안정성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가 될 것이다. 선출직의 임기는 유한하지만, 행정의 신뢰는 지속되어야 한다. 임기 말일수록 더 절제되고 책임있는 인사 운영이 요구되는 이유다. [ 경기신문 = 이화우 기자 ]
지난달 생중계로 화제가 되었던 정부 부처별 업무보고에서 낯익은 주제가 들려왔다. 문화체육관광부 보고에 대한 대통령 질의 중 일부이다. 정리해 인용하자면 이렇다. “해외 순방을 다녀보니 한글을 배우는 기관 단위가 다양하게 있더군요. 세종학당, 한글학교, 한국학교... 세종학당은 어떻게 지정하는 겁니까? 몇 개나 있어요? 예산이 얼마나 되나요? 수요가 많다면서요?” 평소 동료 교수나 지인에게서 종종 마주하게 되던 질문을 대국민 국정보고 자리에서 듣게 되니 반가움이 밀려왔다. 한국어교육을 담당하는 기관이나 정부 부처는 대상에 따라 목적에 따라 매우 다양하다. 국정보고 자리에서 언급되었던 해외 교육기관들만 한정하여 살펴보더라도 한글학교는 재외동포를 대상으로 하며 외교부 재외동포청에서 관리한다. 한국학교는 교육부에서 관리하는 정규 교육기관으로 주재원 자녀 등 대한민국 국적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다. 세종학당은 외국인 학습자를 대상으로 하는 교육기관으로 문화체육관광부에서 관리한다. 재외동포 사회에서 자생하여 계승어로서의 한국어교육을 담당하는 한글학교나 한국의 정규 교육과정을 기반으로 운영되는 한국학교와는 달리 세종학당은 K팝이나 K드라마, 웹툰, 뷰티, 패션 등 다양한 영역에 관심과 흥미를 지닌 학습자들이 모여들어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배우는 곳이다. 세종학당 수강생들은 대부분 열렬한 한국문화의 애호가이자 전파자이며 장차 유학 및 취업 등 다양한 경로로 한국에 유입될 수 있는 잠재적 인력이다. 해외 한국어교육의 대표적 플랫폼인 세종학당은 2007년 몽골 울란바토르에서 최초로 설립되었다. 같은 해 미국, 중국 등 3개국 13개소에 개설되었으며 당시 수강생 규모는 연간 740명 수준이었다. 그로부터 18년이 지난 2025년 현재 세종학당은 전 세계 87개국 252개소에서 운영 중이다. 수강 대기자만 1만 2천 명에 달하며 연간 수강생 수는 21만 명, 누적 학습자 수는 106만 명에 달한다. 앞으로 매년 20개씩 늘려 2030년까지 360개소로 확대하겠다는 계획이다. 프랑스의 알리앙스 프랑세즈, 중국의 공자학당 등과 같이 국가 브랜드로서 또 ‘한국문화 수출의 교두보’로서 세종학당이 제대로 기능하게 하려면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있다. ‘지원은 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정부 문화 정책의 대원칙이 세종학당 신규 지정 및 운영 과정에도 적용될 필요가 있다. 국가가 주도하되 현지의 특성을 고려하여 실제 작동 가능한 제도와 규정들이 마련되어야 하며 교원의 보수 체제 및 학당 운영 지원 예산 등에 있어서도 지역에 따라 현실화할 필요가 있다. 언어교육 및 문화교육 역량을 갖춘 우수한 교수 인력 유입 및 재교육 방안, AI 시대에 맞는 매체 및 플랫폼 전환 방안도 고민해야 한다. 지난 11일 제83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매기 강 감독의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최우수 애니메이션 영화상과 최우수 주제가상을 수상했다. 앞서 2021년에는 정이삭 감독의 ‘미나리’가, 2020년에는 한국 영화 최초로 ‘기생충’이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했다. 당시 봉준호 감독은 수상 소감에서 ‘1인치 정도 되는 장벽을 뛰어넘으면 훨씬 더 많은 영화를 즐길 수 있다‘고 말했다. 다소 다른 맥락이기는 하나, 언어 장벽만 낮춰 줄 수 있다면 한국문화 전파의 무한한 미래를 열어갈 수 있다. 지금이 그 일을 해야 할 때이다.
출산율이 0.7명대로 급감하고, 고령 인구가 빠르게 늘면서 인구소멸 위기가 닥치고 있다. 생산인구는 급격히 감소하고 있으며 지방소멸 위기 또한 많은 지역이 극복해야할 시급한 과제가 됐다. 하지만 예외인 도시도 있다. 화성특례시다. 지난 8일 행정안전부가 발표한 2025년 주민등록 인구통계를 보면 2025년도 화성시 출생아 수가 8116명이었다. 한 해 전 출생아 수가 7283명이었는데 이보다 833명(11.4%)이나 늘어났다. 3년 연속 전국에서 가장 많은 아이가 태어난 도시가 화성시다. 한 마디로 말하면 ‘아이를 키우기 좋은 도시’라는 얘기다. 실제로 화성시가 기울인 노력을 살펴보면 ‘출산율 1위’라는 성과는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시는 그동안 ‘선제적인 저출생 대응정책’을 펼쳤다. 지난해만 해도 저출생 대책에 투입한 예산이 4809억 원이나 된다. 이 예산은 출산지원금 확대, 다자녀 기준 완화, 보육환경 개선 등의 사업에 투입됐다. 출산 가정의 경제적 부담을 줄이기 위한 출산지원금의 경우 첫째 100만 원, 둘째·셋째 200만 원, 넷째 이상 300만 원인데 총 112억 원을 지급했다. 다자녀 기준도 ‘3자녀’에서 ‘2자녀’로 완화해 공영주차장·공공캠핑장·공연장관람료 등을 50% 감면했는데 이로 인해 기존 1만 5000가구에서 7만 가구(약 24만명)가 감면 혜택 대상이 됐다고 한다. 시가 운영하는 어린이집은 전국 최대 규모로써 163곳이나 된다. 보육 사각지대를 해소하기 위한 맞춤형 돌봄서비스인 화성형 아이키움터·휴일어린이집과 다함께돌봄센터 등도 계속 확대하고 있다. 시는 올해 저출생대책 예산을 5445억원으로 확정했다. 지난해에 비해 13.2%(636억 원)나 증액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1대1 밀착 산후조리 정책’을 펼치고 있다. 이 정책은 이재명 대통령 과거에 적극 추진했던 ‘산후조리 정책’을 한 단계 더 발전시킨 것이다. 이 대통령은 지난 2016년 성남시장 시절 전국 최초로 산후조리비 지급 사업을 추진한바 있다. 경기도지사로 재임하면서는 ▲공공산후조리원 설치 ▲산후조리비 지원사업을 본격 추진하기도 했다. 시는 이 같은 사업에서 진일보, ‘화성형 산후조리 모델’을 구축했다. 2030세대 산모의 선호 변화를 반영해 ▲산모·신생아 건강관리사 파견 ▲산후조리비 지원 등 3대 핵심사업을 유기적으로 연계했다. ‘산후조리비 지원’ ‘1대1 맞춤 방문 서비스’ ‘전문 인력에 의한 돌봄’을 하나의 체계로 결합해 ▲맞춤형 ▲선택형 ▲방문형 구조를 모두 갖췄다. 특히 눈에 띄는 정책은 집으로 건강관리사가 찾아오는 ‘화성형 산후조리’ 정책이다. 경제적 여건으로 산후조리원을 이용하기 어려운 가정, 감염 우려, 첫째 자녀 돌봄 등으로 조리원 입소가 현실적으로 힘든 산모들을 위한 ‘산모·신생아 건강관리사 지원사업’이다. 소득 기준을 전면 폐지, 화성시의 모든 출산가정이 대상이다. 산모의 회복 관리와 신생아 돌봄은 물론, 수유·목욕·위생관리, 육아 교육까지 1대1로 종합 지원한다. 산후조리원 이용 여부와 관계없이 동일한 수준의 전문 돌봄을 받을 수 있다니 안심하고 출산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산후조리비도 신생아를 키우는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지난해엔 산후조리비 지원사업에 총 43억 2000만 원이 투입돼 8205명의 산모가 혜택을 받았다. 소득 수준이나 산후조리원 이용 여부와 관계없이 보편적으로 영아 1인당 50만 원을 지역화폐로 지급했는데 사설 산후조리원 이용료, 의료비, 약국, 산모·신생아 용품, 영양식, 식재료 구입 등 관내 가맹점 어디에서나 사용할 수 있어서 신생아 가정에 실질적인 도움이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물론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약간이나마 기여했을 것이다. 정명근 화성시장의 말처럼 ‘3년 연속 전국 출생아 수 1위’는 “젊은 도시 화성의 역동성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지표”라고 할 만 하다. “출산 후 회복과 돌봄을 혼자가 아니라 사회와 공동체가 함께 책임져야 한다”는 정 시장의 뜻에 공감한다.
최근 한 해군 사관후보생 임관식 전광판에 비친 청년의 좌우명이 화제가 되었다. 재벌가 4세로 알려진 이지호 씨의 문장은 이랬다. “고통 없이 인간은 진화하지 못한다, 그러니 즐겨라.” 가득한 풍요를 손에 쥔 이가 하필 ‘고통’과 ‘진화’를 삶의 지표로 삼았다는 사실이 신선하다. 그는 아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고통을 회피하는 안락함은 결국 성장을 마비시킨다는 사실을 말이다. 올더스 헉슬리의 소설 ‘멋진 신세계’에는 고통 없는 유토피아가 등장한다. 시민들은 불편한 감정이 들 때마다 ‘소마(Soma)’라는 약을 먹는다. 소마는 즉각적인 행복을 주지만, 동시에 인간이 고통을 통해 현실을 직시하고 진화할 수 있는 통로를 차단한다. 분노하지 않으니 저항하지 않고, 슬퍼하지 않으니 깊이 사랑할 수 없다. 모든 감정은 연결되어 있어, 고통을 느끼는 신경을 마비시키면 사랑과 환희를 느끼는 감각마저 함께 무뎌지기 때문이다. 소마의 진짜 부작용은 육체의 질병이 아니라, 고통을 자양분 삼아 성장하는 인간 고유의 능력을 앗아가는 ‘영혼의 마비’였다. 현실의 우리는 기쁘고 만족스럽기도 하지만 자주 아프고 쓰라리다. 좌절의 순간은 대다수의 사람에게 필수 코스다. 그렇기에 우리도 고통을 잊게 해줄 안식처를 찾는다. 운동이나 독서, 관계, 술 혹은 몰입할 수 있는 취미가 삶을 지탱하는 ‘건강한 쉼표’가 된다면 문제 될 것이 없다. 진짜 문제는 안식을 넘어선 ‘차단’을 선택할 때 발생한다. 삶의 문제를 해결하며 스스로 진화할 기회 자체를 지워버린다면, 그것은 더 이상 휴식이 아니라 회피가 아닐까. 한의원에서 항불안제를 장기 복용하는 분들을 마주할 때가 있다. 일상이 불가능할 정도의 위기 상황에서 항불안제는 감당할 만한 수준으로 불안을 낮춰주는 조력자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불안 조절을 온통 약물에만 의존한다면, 약은 조력자가 아닌 우리 삶의 주권을 앗아가는 현실판 ‘소마’가 된다. 특히 벤조디아제핀은 주의가 필요하다. 뇌의 억제성 신경전달물질인 GABA 수용체에 결합해 신경세포의 흥분을 강제로 가라앉히는 이 약물은 급성 불안에 즉각적인 안도를 준다. 시작은 쉽지만, 소마가 된 벤조디아제핀은 치명적인 대가를 요구한다. 장기 복용 시 뇌는 인위적인 평화에 적응해 내성을 형성하고, 약 없이는 단 한 시간도 버틸 수 없는 의존의 늪에 빠뜨린다. 특히 3개월 이상의 장기 복용이 알츠하이머 치매 위험을 50%까지 높일 수 있다는 임상 연구들은 섬뜩한 경고를 보낸다. 불안을 지우려다 나를 기억하고 진화시킬 능력까지 지워버리는 셈이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일까. 핵심은 불안을 ‘제거’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 것이다. 불안은 삶에 조정이 필요하다는 신호다. 그 신호를 완전히 꺼버리는 대신,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낮추는 지혜가 필요하다. 약물을 줄일 때는 ‘애슈턴 매뉴얼’과 같은 점진적 감축 원칙을 통해 뇌가 스스로 적응할 시간을 주어야 한다. 한의학적 접근으로 자율신경계의 복원력을 높이고, 신체 기반의 치료를 병행하며 ‘불안과 함께 살아가며 진화하는 힘’을 키워야 한다. 불안은 적이 아니다. 불안이 없다면 우리는 위험을 감지하지 못하고, 변화의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다. 술이나 소마, 항불안제는 순간적으로 삶에서 오는 고통을 가릴 뿐 우리 삶을 대신 살아주지는 않는다. 불안을 잠재우는 대신 그것을 딛고 일어서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야말로, 우리가 살아있으며 진화하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