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슬라의 일론 머스크가 세상을 깜짝 놀랄만한 파괴적 혁신을 추진하고 있다. 머스크는 늘 남들보다 다른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본다. 그는 화성과 달에 인간의 정착촌을 건설하려는 희망을 품고 있으며, 그 전 단계로 인간의 우주관광을 현실화시키고 있다. 머스크가 또 다른 도전에 나서고 있다. 오픈AI, 구글 등 수많은 글로벌 IT 기업들은 인공지능(AI) 기술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지상에서 데이터센터 건설에 고민 중이다. 그러나 일론 머스크는 우주에다 AI 데이터센터를 구축하려 든다. 머스크의 핵심 기업으로 테슬라, 스페이스X, xAI, 뉴럴링크를 손꼽을 수 있다. 그런데 최근 스페이스X는 xAI를 합병하여 자회사로 만들었다. 그 이유는 우주 AI 생태계를 선점하기 위해 위성 100만 개로 연결되는 우주데이터센터 건설을 추진하기 위함이었다. 데이터센터를 대지가 아닌 우주에서 만들면, 태양에너지를 활용할 수 있으며, 냉각 문제도 해결할 수 있고 부지확보에 고민할 필요도 없다. 스페이스X는 그간 저궤도 상업 위성인 스타링크를 운영해온 노하우를 갖고 있다. 일론 머스크는 “2∼3년 내 우주에서 AI를 가장 저렴하게 사용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주데이터센터는 테슬라의 피지컬 AI 비전과 연결고리를 가진다. 테슬라는 프리몬트 전기차 생산 공장을 휴머노이드 로봇 공장으로 전환할 정도로 로봇산업에 집중하고 있다. 테슬라는 세계 전기차 시장에서 중국 BYD에 1위 자리를 내주었으며, 미국에서도 시장점유율이 떨어지고 있다. 머스크는 향후 휴머노이드 로봇과 로보택시에 특화할 것이다. 스페이스X의 우주데이터센터는 각종 데이터를 분석하여 지상에 있는 테슬라의 로보택시와 휴머노이드 로봇 등 고객들에게 정보를 주게 될 것이다. 머스크가 우주데이터센터를 가동한다면,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오픈AI, 중국 경쟁사 등에는 큰일이다. AI 경쟁 무대가 지상에서 우주로 바뀌게 되어, 경쟁자들이 스페이스X의 경쟁력 우위를 따라가기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스페이스X가 미래 6G 통신인 스타링크에 이어 우주데이터센터까지 선점할 경우, 일론 머스크는 미래산업 선구자로서 그 위상을 또다시 떨치게 될 것이다. 머스크는 “10년 내 달에 자체 성장도시를 건설하는 데 집중하겠다”는 의지를 보인다. 영화 속에서나 보았던 것처럼 달에 도시를 만드는 꿈이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스페이스X는 2027년까지 우주선 스타십을 무인 상태로 달 표면에 착륙시킬 계획이다. 우주데이터센터가 완성된 후, 테슬라는 달에 도시를 건설하기 위해 휴머노이드 로봇 옵티머스를 대량으로 보낼 것이다. 지구와 달에서 인간과 휴머노이드 로봇이 공존하여 살고, 로보택시가 끝없이 다니는 세상을 보게 될 날도 멀지 않았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기업 혁신가이다. 테슬라 일론 머스크는 남보다 잘하는 일에 집중하는 특성을 보이고 있으며, 산업변화에 발 빠르게 대처한다. 국내기업들도 미래사회가 우주시대라는 점을 간파해야 한다. 우주 시대를 지배하려면 먼저 꿈을 꾸어야 한다. 우리 기업 CEO들도 단기적인 사고가 아닌 먼 미래를 꿰뚫어 보는 통찰력을 갖고 세상을 바라보길 기대한다.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 올림픽이 막을 내렸다. 지난 4년간 대회를 준비해온 선수들의 노력과 기록들은 많은 이들의 박수 속에 마무리되었다. 대개 올림픽의 화려한 개막과 경기 과정에는 수많은 시선이 쏠리지만, 축제가 끝난 뒤의 풍경에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낮기 마련이다. 올림픽을 위해 조성된 부지와 건물이 이후 어떻게 쓰이는지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번 밀라노 올림픽은 대회 이후, 시민의 삶의 질과 도시의 지속가능성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대표적인 사례가 포르타 로마나(Porta Romana) 지구에 위치한 올림픽 선수촌이다. 이곳은 대회가 끝난 후, 학생들을 위한 영구적인(permanent) 주거 구역으로 활용될 예정이다. 밀라노의 사례는 공공부지를 공공의 목적으로 어떻게 활용해야 할 것인가, 즉 공공부지가 누구를 향해야 하는가를 진지하게 고민하게 한다. 특히 지방선거를 앞두고 논의가 활발해진 서울 용산정비창(용산국제업무지구) 개발 계획은 밀라노의 사례와 대비되는 지점이 많다. 현재 서울시의 계획에 따르면, 축구장 70개를 합친 크기의 대규모 부지에서 주택으로 공급할 물량은 약 3500호밖에 되지 않으며, 그중 공공임대주택은 525호에 불과하다. 서울의 주거 문제가 매우 심각함에도 불구하고, 공적 임대 기능의 비중이 매우 낮게 책정되어 있다. 여기에는 해당 부지를 매각해 한국철도공사의 부채를 해결하겠다는 논리가 전제되어 있다. 물론 공기업의 재무 건전성 회복은 우리 사회가 함께 풀어가야 할 과제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철도 요금을 포함한 경영상의 문제로 인한 부채를 공적 자산인 토지 매각으로 해결하려는 접근은 재고되어야 한다. 이는 부채 해소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주거권 보장’이라는 더 넓고 중요한 의미의 공익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게 한다. 무엇보다 한 번 민간에 매각된 공공부지는 다시 시민의 품으로 되돌리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시민이 누려야 할 안정적인 삶의 기반을 영구히 포기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 결정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가용 부지가 부족한 도심에서 공공부지를 단순히 경제적 수단으로만 활용하는 방식은 재고되어야 한다. 오히려 공공부지를 도시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계기이자 방법으로 여기는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 일례로 서울의 경우, 주거 불안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공공부지 개발의 최우선 순위를 ‘시민의 주거권 보장’에 두고 이에 맞는 공간을 기획하는 결단이 필요하다. 랜드마크의 화려한 외형이나 분양 수익의 수치보다 그 도시에서 그 땅을 딛고 살아갈 시민들의 일상이 먼저 고려되어야 한다. 결국 공공부지의 활용 방식은 그 사회가 무엇을 가장 가치 있게 여기는지를 보여주는 척도다. 토지는 유한한 자원이며, 공공이 소유한 공공부지는 시민 모두의 공유 자산이다. 이 자산이 시장 논리에 따른 수익 극대화에만 치중하여 사용된다면, 그 과정에서 소외되는 시민들의 자리는 좁아질 수밖에 없다. 밀라노 올림픽 선수촌의 변화를 지켜보는 일은 우리에게 공공부지의 본 의미를 일깨우는 소중한 준거점이 될 것이다. 한국의 공공부지가 우리 도시의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며 공동체의 지속가능성을 일궈내는 단단한 토대가 되기를 기대한다.
100세 시대, 퇴직 후 시간은 역할을 상실한 잔여 인생이 아니라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또 다른 시간이다. 나는 주위의 다양한 삶을 통해 중노년기 삶은 얼마를 소유하느냐가 아니라 삶의 주요 요소들에 대한 비움과 재설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중노년기에 있어 건강은 관리의 대상이 아니라 관계의 대상인 것 같다. 젊은 시절, 건강이 ‘성취’라면, 이때의 건강은 ‘협상’이다. 신체는 더 이상 무한히 복원되지 않는다. 따라서 무리한 도전보다 지속 가능한 리듬이 중요하다. 규칙적인 수면, 균형 잡힌 식사, 적정한 운동은 삶의 독립성을 지키는 최소 조건이다. 특히 근력과 정신건강의 유지는 단순한 체력이 아니라 존엄의 문제다. 타인의 도움을 최소화할 수 있는 신체적 자율성은 곧 심리적 자율성으로 이어진다. 나이가 들면 또한 관계의 재정비가 필요하다. 인간관계는 양보다 질이 중요해진다. 모든 관계를 유지하려는 태도는 오히려 소진을 야기한다. 상호 존중과 정서적 안정을 주는 밀도 있는 관계에 집중하고, 의무감만 존재하는 관계는 정중히 거리를 두는 용기가 필요하다. 배우자와의 관계 역시 ‘역할’ 중심에서 ‘동반자’로 전환되어야 한다. 자녀가 독립한 이후, 부부는 다시 낯선 두 개인으로 마주한다. 이때 대화의 회복은 노년의 고독을 예방하는 가장 확실한 자산이다. 경제적 태도의 전환 또한 요구된다. 중노년기의 재정은 확장이 아니라 안정이 중요하다. 수입이 줄어드는 시기에는 과도한 투자나 소비보다는 자산 및 지출의 구조를 재편해야 한다. 재정적 안정은 단순한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심리적 평온의 기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의 의미를 재정의해야 한다. 은퇴는 사회적 역할의 상실이 아니라 역할의 전환이다. 직업이 사라져도 ‘쓸모’는 사라지지 않는다. 멘토링, 봉사활동, 재능기부, 지식 나눔 등은 자신을 사회와 다시 연결시키는 통로이다. 인간은 기여할 때 생동감을 느낀다. 노동이 아닌 기여로써의 활동은 중노년기의 자존감을 지탱하는 핵심이다. 배움의 끈 역시 놓지 말아야 한다. 뇌는 나이가 먹는다고 굳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용 여부에 따라 달라진다. 새로운 언어, 악기, 디지털 기술 등에 대한 도전과 그림이나 글쓰기, 독서토론, 보드게임 같은 취미를 즐길 줄 알아야 한다. 배움과 취미는 단순한 시간을 죽이는 도구가 아니라 시간을 살리는 기술이며, 인지적 건강을 지키는 전략이다. 몰입의 순간, 우리는 외로움을 느낄 틈이 없다. 오히려 “이 나이에 이런 걸 시작해도 될까?”라는 망설임을 넘어설 때, 삶은 다시 활기를 얻는다. 마지막으로, 죽음을 사유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는 비관이 아니라 삶을 선명하게 만드는 철학적 태도다. 유한성을 인정할 때 비로소 삶의 우선순위가 분명해진다. 소유보다 경험, 경쟁보다 평온,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중노년기의 지혜는 더 많이 가지는 데 있지 않고, 무엇을 내려놓을지 아는 데 있다. 복잡했던 관계나 과도한 욕심, 그리고 타인의 기대를 하나둘씩 내려놓고 자신과 마주할 때 내 삶의 지표들이 가리키는 방향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이로써 바야흐로 어느 시기보다 충만하고 행복한 삶을 맞이할 수 있다.
한국 현대시의 큰 나무인 최동호 선생이 지난달 20일,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에서 한국문학의 미래에 관한 뜻깊은 강연을 했다. 주제는 ‘디지털 전환기 한국 현대시의 지향점과 시노래의 문화적 가치’였다. 이 강연은 MIT의 인간통찰 협력연구 프로그램인 MITIC(MIT Human Insight Collaborative)가 주관하는, ‘마스터 클래스 시리즈’의 초빙 강사 자격으로 이루어졌다. 선생은 여기서 해당 주제에 대해 심도 있는 견해를 제시했고, 현지 청중에게 깊은 감명을 남겼다. 한국문학이 주요한 세계 무대에서 그 의의와 보람을 증명한 ‘사건’이자 지금까지 없던 새로운 주제론적 접근이었고, 한국문학으로서는 새 강역(疆域)의 개척이었다. 한국문학의 세계화는, 안방에 앉아 구두선(口頭禪)으로 내놓는 주장에서 말미암지 않는다. 새로운 아이템을 들고 그 현장을 찾아가며, 활달한 소통으로 현지 문화예술인들의 공명(共鳴)을 자아내는 기량과 노고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한국의 문학계나 문화정책 당국에서는 이와 같은 구체적 사례를 부양(浮揚)하는 데 수고를 아끼지 않아야 한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일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기에 그렇다. 선생은 미국, 러시아, 이탈리아, 스페인, 헝가리, 루마니아, 몽골, 몰드바 등의 나라에서 시집이 출판되었고 1921년 미국 ‘제니마문학상’, 몰도바공화국 ‘작가연맹문학상’, 2024년 이탈리아 코모시의 국제시축제 ‘올해의 최고시인상’, 그리고 2025년 루마니아 잘라우시작가연맹 ‘그랑프리상’의 수상자다. 한국 시인으로서는 이제까지 없던 이력이요 수상 경력이다. 한국문학 세계화의 최전방 첨단 세력으로 선생을 주목하는 이유다. 그런가 하면 국내에서는 1996년 현대불교문학상을 시작으로 대산문학상, 박두진문학상, 만해대상, 정지용문학상 등 다수의 문학상을 수상했다. 2004년 한국시학회 회장을 시작으로 한국 문학평론가협회 회장, 한국시인협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2019년 대한민국예술원 문학분과 회원이 되었으며, 2025년 3월 ‘문학의집서울’ 이사장이 되었다. 1980년 전후부터 30년 넘게 비평가로 활동하면서 동양 시학을 천착하여 ‘서정시의 삼각형이론’, ‘디지털 사행시’ 등의 이론을 정립하여 한국 시학 이론에 중요한 이론적 토대를 마련한 당사자이기도 하다. 필자가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대학 4학년 때였다. 당시 선생은 경남대에서 경희대로 이적(移籍)했고, 필자는 언론사 지망생에서 대학원 진학으로 갓 생애의 진로를 바꾼 시기였다. 그 젊은 나이에 문학평론가의 길로 접어든 어간(於間)에 선명한 푯대로 선생이 계셨다. 그의 정신주의와 생명사상은 그 무렵에 벌써 찬연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돌이켜 보면 언제나 존경의 아름이면서 동시에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서 있는 분이었다. 그는 강단에서 말로만 가르치는 교수가 아니었으며 근본과 실용을 포괄하는, 눈이 높고 국량(局量)이 넓은 스승이었다. 또한 가장 많은 제자를 문단에 내보낸 명조련사이기도 했다. 선생과 더불어 선인선과(善因善果)의 미덕을 쌓아가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 상대방의 문제다. 당연히 필자도 그렇다.
지난 2월 25일, 전국 법원장들이 한자리에 모여 국회가 개정을 추진하는 ‘사법개혁 3법’에 대해 집단적인 우려를 표명했다. 사법부의 독립성을 침해할 소지가 크다는 것이 이들의 주된 논리다. 하지만 국민의 시각에서 볼 때, 이번 법원장 회의의 모습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특권의식이 그 배경이고, 작금의 사법 불신을 자초한 과오에 대한 통렬한 반성이 결여된 적반하장식 행보로 비춰질 뿐이다. 사법부가 ‘독립’이라는 가치를 내세우기 전에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질문은 하나다. 과연 우리 법원이 국민의 상식과 법 감정에 부합하는 정의를 실현해 왔는가 하는 점이다. 지난 해 대선국면에서 보여준 대법원의 대선 개입 논란은 사법부의 독립성에 치명적인 오점을 남겼다. 특히 국민적 공분을 샀던 ‘윤석열 내란수괴 구속취소’와 같은 납득하기 어려운 판결들은 사법부가 법리가 아닌 정치를 하고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헌법과 법률에 따라 양심껏 심판해야 할 법관들이 오히려 권력의 눈치를 보거나 특정 진영의 방패막이 역할을 자처해온 것은 아닌지 뼈저린 성찰이 선행되어야 했다. 이번 법원장 회의에서 나온 발언들을 살펴보면 실망감은 더욱 커진다. 이들은 사법개혁 3법이 법관의 독립성을 해치고 사법 행정의 효율성을 저해한다고 강변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법왜곡죄에 대해선 범죄 구성요건이 추상적이어서 심대한 부작용이 발생할 것이다.” “재판소원은 재판 확벙 지연으로 국민 피해가 우려된다.” “대법관 증원은 4명만 증원하자”는 주장이다. 그러나 사법개혁 논의가 이 지경에 이른 근본적인 원인은 사법부 스스로가 개혁의 시간을 허비했기 때문이다. 재판 지연으로 인한 국민적 고통은 외면한 채, 법관의 처우 개선과 권한 강화에만 몰두해온 사법부가 이제 와서 입법부의 사법개혁 논의를 비난하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다. 국민이 부여한 신뢰를 스스로 저버린 사법부에 대해 주권자의 대의기관인 국회가 제도적 보완책을 마련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당연한 작동 원리다. 사법부는 국회에서 만들어진 법에 따라 판정을 하는 기관이지, 법을 만드는 기관이 아니다. 대한민국 헌법 제40조는 “입법권은 국회에 속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사회적 합의를 거쳐 법률을 제정하거나 개정하는 것은 입법부 본연의 권한이자 의무다. 만약 해당 법률에 위헌적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헌법재판소의 심판을 통해 가려질 영역이다. 법원의 수장들이 입법 단계에서부터 집단적으로 실력 행사에 나서는 것은 삼권분립의 경계를 허무는 위험한 발상이다. 이는 마치 자신들이 입법부와 국민 위에 군림하는 초법적 존재인 양 착각하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현재 사법부가 직면한 위기는 외부의 공격 때문이 아니라 내부의 자정시스템 붕괴에서 비롯된 것이다. 공정성을 잃은 판결, 제 식구 감싸기식 징계, 관료화된 사법 행정이 국민의 신뢰를 갉아먹었다. 법원장들은 입장문을 내기 전에, 왜 국민이 사법부의 판결보다 정치권의 개혁안에 더 귀를 기울이는지부터 자문해야 한다. 국민은 정치하는 판사가 아니라, 법과 원칙에 충실한 판사를 원한다. 어제부터 국회 본회의에서 처리되고 있는 ‘사법개혁 3법’에 대해 여러 비판과 사회적 논란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논란의 해소는 국회라는 공론의 장에서 국민 의견을 수렴하면서 이뤄져야 하고, 최종적으로는 헌법재판소에서 결정하면 된다. 이것이 대한민국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민주주의 원리이고 정신이다. 사법부는 이제라도 본연의 임무인 '공정한 재판'을 위한 내부 제도정비와 개혁에 나서야 한다. 재판 지연과 널뛰기 판결로 피해보는 국민이 없도록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사법부 독립의 방패와 사법부의 존엄한 권위는 법원장들의 성명이 아니라, 국민이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판결에서 나온다는 점을 명심하기 바란다. 국민의 개혁 요구를 겸허히 수용하고, 스스로를 도려내는 고통을 감내해야 할 시점이다. 반성 없는 사법부에 돌아갈 국민의 신뢰는 단 한 뼘도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기도 내 학교에서 다음 달부터 시행되는 ‘학생맞춤형통합지원(학맞통)’을 놓고 부실 운영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이 제도를 담당할 전문 인력이 크게 부족하기 때문이다. 도내 약 2526개 학교 가운데 학맞통 업무를 담당할 교육복지사가 배치된 곳은 고작 151곳으로서 전체의 6%에 불과하다. 이 정도의 인력으로 정책의 실효성을 기대하기란 어렵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인력공급 확대를 비롯한 제대로 된 지원체제가 시급하다. 지난해 1월 21일 제정돼 오는 3월 1일부터 전면 시행될 예정인 ‘학생맞춤통합지원법’은 모든 학생의 교육받을 권리를 보장하고, 전인적 인재로 성장하는 데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하는 법안이다. 학업 부진, 정서 문제, 학교폭력, 빈곤, 가족 갈등, 또래 관계 어려움 등 복합적 위기 상황에 놓인 학생을 학교가 직접 발굴해 지원하는 제도인 셈이다. 학맞통은 학생에 대한 ‘통합 진단’을 바탕으로 ‘맞춤형 지원’을 제공하기 위해 추진되며, 학령인구가 감소하는 가운데 복합적 어려움을 겪는 학생이 늘어나는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그동안에도 학생 지원을 위한 다양한 정책과 사업이 운영되어 왔으나 각 사업이 분절적으로 추진되면서 지원의 중복, 사각지대 발생, 통합적 관리 등의 한계가 존재했다. 교육부는 이러한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학맞통으로 어려움을 겪는 학생을 조기에 진단하고, 학생별 상황에 맞는 맞춤형 통합지원을 가능하게 하겠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학맞통은 기존의 개별적 지원 체계를 기관 간 연계 중심으로 전환해 학생 맞춤형 지원을 도모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실제 현장에서는 이 정책을 놓고 담당 교사에게 업무가 집중되고 인력 부족으로 위기 학생 발굴 자체가 쉽지 않으리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꾸준히 제기돼 왔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은 언론 인터뷰에서 학교와 교사에게 업무를 떠넘기는 방식으로는 실현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이하 교총)가 전국 교원 4,647명을 설문 조사한 결과, 교사의 52.9%, 교장·교감의 46.2%가 학맞통 시행을 위한 학교의 준비가 부족하다고 응답하기도 했다. 일부 학교에서는 업무 부담을 이유로 담당자 지정에 소극적이거나 의뢰 절차가 지연될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위기 학생 문제는 학습 부진이나 빈곤, 이주 배경, 학교폭력 등 다양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한 교사나 부서만으로 해결하기 어렵다고 분석한다. 때문에 상담교사, 교육복지사, 보건교사, 담임교사 등이 함께 참여하는 협업 구조가 필수적이다. 교육지원청 학맞통 센터는 학교 내에서 해결이 어려울 경우 외부 기관을 연계해 맞춤형 지원을 제공한다. 그런 만큼 실제로 교육복지사가 배치된 경기지역 학교에서는 학맞통 센터가 효과적으로 작동될 경우 학교 내에서 처리하기 어려운 문제의 상당 부분을 자체 네트워크를 통해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밝히고 있다. 이미 교장과 교감, 상담교사, 교육복지사 등이 참여하는 협의체를 장기간 운영하며 결석이나 정서적 어려움 등 위험 신호를 조기에 포착하고 맞춤형 지원을 이어가고 있는 학교도 없지 않지만,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상담교사나 교육복지사가 없는 학교에서는 정서적 위기 학생에 대한 대응이 제한될 수밖에 없다. 특히 취약계층 비율이 낮은 학교일수록 지원 체계가 미흡한 경우도 적지 않다는 지적이다. 태부족한 관련 예산도 선결과제다. 학교별 학맞통 지원 예산은 연간 약 100만 원에 불과해 협의회 운영비 정도에 그칠 판이다. 교육계에서는 복합 위기 학생 지원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 전문 인력 확충과 안정적인 재정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교사의 정서적, 사회적 지원은 학생의 발달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통합지원 정책이 교사의 역할을 어떻게 정의해 나가느냐에 따라 제도의 성과 역시 달라질 수 있으리라는 분석이다.
정조의 원행을묘 백리길은 숭례문에서 서울역을 지나고 청파동입구교차로에서 경부선 철도 밑의 쌍굴다리 2차선 도로를 건너 남북 방향 6차선의 청파로를 만난다. 너푸내란 하천과 옛길을 함께 복개하여 만든 도로다. 옛 문헌과 지도에는 한자 蔓(넝쿨 만), 草(풀 초), 川(내 천)의 뜻을 따서 蔓草川(만초천)으로 표기했다. 무악재에서 발원하여 인왕산의 서남쪽과 안산의 동남쪽 골짜기의 물을 모아 남쪽으로 흐르다가 원효대교 부근에서 한강에 합류한다. 6차선의 청파로 건너편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빌딩 앞에 청파배다리의 표지석이 있는데, 이렇게 적혀 있다. “청파배다리 터(靑坡舟橋址) : 청파·원효로로 통하는 주요 길목과 만초천(蔓草川, 너푸내)이 만나는 지점에 놓였던 돌다리인 청파배다리가 있던 곳이다. 원래는 북쪽으로 300여m 떨어진 철길 위에 있었다.” 이 지역은 넓은 면적을 차지하는 남대문 정거장, 즉 지금의 서울역이 1900년 7월 8일에 생기면서 옛길과 너푸내의 유로가 꽤 변했다. 너푸내를 건너던 청파배다리의 위치가 북쪽 300여 m 떨어진 철길 위에 있었다는 문구가 그래서 기록됐다. 다만 일제강점기의 1:5만 지형도에는 쌍굴다리 길로 경부선 철길 밑을 지나 청파배다리 표지석 부근에서 너푸내를 건넜다. 표지석의 설명 중 “청파·원효로로 통하는 주요 길목과 만초천(너푸내)이 만나는 지점”이라는 표현은 많이 고칠 필요가 있다. 실제보다 내용을 너무 축소했다. 숭례문을 나와 ①경기도 남서부, 충청남도, 전라도, 경상도 서남부를 향한 고을 사람들이 나룻배를 타던 동재기나루 ②경기도의 시흥·안산·인천 고을의 사람들이 건너던 노들나루 ③국가의 조세를 나르던 세곡선이 가장 많이 모이던 항구 용산나루를 오가던 사람들이 이 길을 통했다. 서울 도성에서 지방을 오가는 사방팔방의 길 중 압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오가던 길이다. 그래서 도성 안을 제외하면 이곳보다 많은 사람들이 밟고 건넌 돌다리는 없었다. 그런 사실을 표지석의 지금 설명문만으로는 상상하기 어렵다. 좀 아쉽다. 1795년 윤2월 9일, 숭례문을 나온 원행을묘 행렬이 처음으로 만난 다리가 청파배다리(靑坡舟橋)다. 그런데 다른 문헌이나 지도에는 그냥 배다리(舟橋)였고, 『원행정례』에는 청파다리(靑坡橋)로 기록했다. 청파배다리는 노들나루에 배다리가 만들어지면서 구별하기 위해 청파를 붙여서 표기한 것이다. 배다리라 부른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전국적으로 흔하진 않아도 꽤 있는 지명이었다. 청파배다리를 지나 작작골(雀雀洞)-돌모루(石隅)란 지명이 오랫동안 길 가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이 구간 어디쯤, 필자가 현재의 위치를 찾지 못한 栗園峴(율원현)이란 한자 지명의 앞길에서 정조 임금은 이렇게 명했다. “백성들이 좁은 옆길(夾路)에서 원행 행렬을 자유롭게 구경할 수 있도록 금하지 말라!” 안전과 권위에 손상이 갈 수 있음에도 재위 20년 임금으로서의 자신감과 인자함이 넘쳐흐르는 마음의 표현이다. 권위주의 시대 대통령의 행차 시 미리 동원된 사람 말고는 쉽게 접근조차 하지 못하게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던 것과 대조된다. 백성과 함께 호흡하고 싶었던 임금 정조, 원행을묘 백리길은 국민과 함께 호흡하는 정치를 향한 갈망의 순례길이다.
언어 수행 차원에서 인격 발달의 성숙을 보이는 인간을 말하라면, ‘듣는 인간’이 여기에 근접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듣는 인간’에게서 ‘긍정의 철학’을 확인하기 때문이다. 그 긍정성은 개인의 성숙에 그치지 않는다. 긍정의 지향이 관계들의 선순환과 소통을 대화적 세계로 나아가게 한다는 점에서 성숙이 돋보인다. 일상 현실 속 사람들의 구체적 언어 수행에서 인간적 성숙을 감득하게 하는 장면도 ‘말하는 인간’보다는 ‘듣는 인간’에게서 경험할 때가 많다. ‘듣는 인간’은 불가피하게 실천적이다. 이는 ‘지금 여기’에서 말하기와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지는 듣기의 현재성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때의 ‘듣는 인간’은 ‘잘 듣는(들으려는) 인간’이다. ‘잘 듣는 인간’에서 ‘잘’은 기능적 숙련만을 뜻하지 않는다. 지각의 뛰어남과 정의(情意 Affective)의 원만 풍성함과 윤리의 아름다움을 모두 실천해 내는 수준을 뜻한다. ‘잘 듣는 인간’은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언급한 로고스와 파토스와 에토스의 자질을 자신의 듣는 역량 수준으로 고르게 녹여 넣은 사람이라 할 것이다. ‘듣는다’의 함의는 참으로 깊고 두텁다. 논어의 이인(里仁)편에는 ‘조문도 석사가의(朝聞道 夕死可矣)’라는 구절이 나온다. “아침에 도(道)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라는 뜻이다.여기서도 ‘듣다(聞)’를 두고 수많은 주석과 해석이 존재한다. 자전이 밝히는 ‘聞(듣다)’의 뜻만 해도, 가르침을 받다, 알다, 널리 견문하다, 들려주다, 삼가 말하다, 냄새 맡다, 방문하다, 서신을 보내다 등의 뜻이 있다. ‘듣다(聞)’의 의미는 정말 간단치 않다. 청문회(聽聞會,Hearing)라는 듣기 현상은 어떠한가. ‘청(聽)도 듣는 것이고, ’문(聞)도 듣는 것이니, 오로지 듣는 모임을 뜻하는 이 말에서 우리는 혼돈스러운 듣기 현상을 본다. 정치적 이해와 전략을 거칠게 구사하며 듣기를 운영하는 청문회, 듣기라고 해 놓고 듣기보다는 정파 간 싸움의 말하기로 일관하는 청문회는 이제는 익숙하다. 증인을 닦달하는 방식으로 증인에게 들으려고 한다. 이 또한 모두 듣기의 현상이다. 듣기가 제도로 운용되는 장면에서 진실로 ‘듣는 능력’은 무엇으로 규정되어야 할 것인가. 고민하지 않을 수없다. 듣는 행위는 생활에서 항용 영위되는 일상의 언어 행위이지만, 듣는 행위만큼 일상을 뛰어넘어 신령한 영역에 가닿는 것도 드물다. 고대 사회에서 있었던 신탁(神託)이라는 의식은 인류의 보편이라 할 수 있는데, 신탁이란 신의 소리를 듣는 것이다. 제관이 신전에 가서 인간의 문제를 신에게 올리고 신의 대답을 듣는 것이 신탁이다. 형식과 유형은 달라도 인류가 신을 듣는 방식은 비슷했다. 어떤 초월적 존재를 인간이 느끼고 영적으로 교감하는 방식은 대체로 ‘듣는다’에 의탁하는 경우가 많다. 신을 듣는다는 의식에 기대어서 신의 현존을 공동체가 받아들이는 모습이라 하겠다. 말에 의존하지 않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뜻을 전한다는, 이른바 불립문자(不立文字)의 경지에도 이런 초월적 듣기가 알게 모르게 관여하는 것 아닐까. 듣는 행위와 듣는 현상을 두고 그것을 해석하는 일은 참으로 복잡하고 미묘해졌다. 디지털 미디어가 온갖 전언을 우리들 귀에 들이대는 이 시대는 더더욱 그러하다. ‘잘 듣는 인간’의 이상적인 모습을 찾아보기가 그만큼 더 어려워진 세상이 되었다.
약 5년 전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는 대한민국을 선진국으로 격상시켰다. 하지만 한국은 주택 공급을 이유로 주민들을 강제 이주시키고 인권을 유린하는 후진국형 문제를 여전히 재현하고 있다. 하남 교산 역시 재개발 명분을 앞세워 포클레인을 끌고 들어와 나무, 집, 물류창고, 농협, 마트, 학교, 교회를 무참히 부수고 있다. 내가 사는 남한산성 산밑도 굉음 소리와 시멘트, 철근 덩어리로 덮여간다. 나는 철거 명령을 받았지만, 아직 갈 곳을 정하지 못하고 있다. 폐허가 된 마을은 을씨년스럽기 그지없다. 난로 위에서 끓고 있는 물 주전자의 수증기가 유일한 온기다. 나는 LH에서 등기로 날아온 서류를 받아 들고 뒤적이다 겁에 질렸다. 방안을 서성거리다 불안한 맘을 억누르려고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소장이 날아왔어, 계란 껍데기 같은 이 집에 30,000,100원 부당이득금을 내야 한다면서 당장 떠나라는 거야!” 같은 처지에 놓은 뒷집 주인은 거처를 구하러 다녀봤지만, 살인적인 집값 때문에 어찌할지 모르겠다고 한다. 천정부지로 오른 임대료에 LH에서 쫓겨난 주민들의 임차수요까지 겹쳐 하남 부근의 주거비 인플레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다. 70대 노인 심씨는 계곡 건너 본인 소유 비닐하우스에 짐을 옮길 거라고 한다. 최소한의 물건만 챙겨 가야 해서 정든 물건은 모두 버려야 한다. 백숙집을 운영하던 부부는 주민이 모두 떠나 시내 식당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러 다닌다. 정부는 50년간 묶여있던 그린벨트를 풀면서 하남을 제2의 강남으로 만든다고 애드벌룬을 띄웠다. 누구를 위한 제2의 강남인지 알 수 없지만, 주민들은 온갖 이주 협박에 시달려야 했다. 정부는 다주택자에게 세금을 중과한다고 하지만 피해를 보는 것은 결국 가난한 세입자다. 그들은 임차인에게 세금을 전가하면 된다. 돈 있는 서울 사람들은 10억짜리 전세 사느니 경기도에 똘똘한 한 채를 마련하는 것이 대세라고 한다. 아무리 집을 짓고 세금을 먹이고 대출 금리를 조정해도 우리 같은 영세 세입자는 여전히 집을 살 수 없다. 내 처지는 밥솥 뒤에 숨어 사는 초록 사마귀 같다. 매일 숨어 살 수만은 없어 몰래 주방 밖으로 나가기 위해 환풍기 전선을 움켜잡았다. 발가락에 힘을 주다 그만 떨어졌다. ‘이대로 허무하게 죽는 걸까.’ 소리치고 싶지만 내 마지막 비명에 귀 기울일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다. 가스레인지의 기름때를 닦다 멈췄다. 사마귀를 손으로 들어 식탁 위 한쪽 모서리에 놓았다. 창문 틈에 올려놓아도 다시 기어 내려온다. 손으로 끌어당기면서 ‘너도 갈 곳이 없구나. 사는 게 죽는 것보다 어려운 것은 나뿐만이 아니구나. 사마귀야, 그래, 너와 주방을 공유하자, 쫓겨날 때까지.’ 함박눈이 내려 폐허가 된 마을을 덮었다. 창문 너머 세상이 산뜻했다. 눈길을 안으로 돌리자 갈색으로 변한 사마귀를 고양이가 발톱으로 갈기갈기 찢고 있었다. 놀란 나는 고양이 등을 내리쳤다. 이 잔인한 놈! 사마귀 조각을 주워 봉투에 담았다. 봄에 묻어줄까 하다 그때가 된다고 별수 있겠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호두나무 아래 묻어주었다. 사마귀를 묻어주면서 내 상황이 사마귀보다는 나은 것 같아 잠시 위로를 받는다. 갈 곳 없는 것들의 겨울밤은 유난히 춥기만 하다.
2026년 밀라노-코르티나 동계 올림픽 치러진 가운데, 올림픽 선수들보다도 스포츠 중계에 더 큰 관심이 쏠리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세계인의 축제 올림픽의 열기가 차갑게 식어야 했던 까닭은 무엇일까. 그 배경에는 스포츠 중계권의 역사와 자본의 논리가 자리 잡고 있다. 1938년은 미국 메이저리그 구단들에 뜻깊은 해였다. 야구 경기 실황을 중계할 수 있는 배타적 권리를 법원으로부터 인정받은 해이기 때문이다. 메이저리그 야구단 피츠버그 파이러츠 소유주는 일부 라디오 방송사들과 파이러츠의 경기를 방송할 수 있다는 내용의 계약을 체결하였다. 그러자 라디오 방송사 KQV는 창의적인 방법을 떠올렸다. KQV는 파이러츠와 계약 없이, 야구장 밖에서 경기를 관람하면서 방송을 전송하려 한 것이다. 법정 다툼이 벌어졌고, 법원은 파이러츠 구단이 야구 경기 실황 중계에 대한 배타적인 권리를 가진다고 판시하였다. 1938년 이루어진 피츠버그 애슬레틱 대 KQV 방송사 판결이다. 이로써 개별 구단은 방송사와 중계방송을 판매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갖게 되었다. 역으로, 방송사가 스포츠를 중계하기 위해서는 K리그, KBO, FIFA, IOC 등 스포츠 경기 주관자와의 권리 계약을 통해 중계권을 사전에 확보해야 한다. 스포츠 경기 주관자는 경기 규칙을 마련하고, 경기 참가자에게 자격을 부여하는 등 많은 역할을 수행하는데, 경기를 방송할 주관 방송사를 선정하는 것 또한 주관자의 중요한 역할이다. 스포츠 경기 주관자에게 중계권 판매는 대회 개최 비용을 회수하는 핵심 수익원이다. 이에 IOC 등 주관자들은 누가 대회장에 출입·촬영할 수 있는지, 누가 선수들을 인터뷰할 수 있는지 등을 엄격히 관리하여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을 지키려 한다. 막대한 비용을 지급하고 독점 중계권을 확보한 방송사 역시 스포츠를 ‘킬러 콘텐츠’로 활용한 투자와 거래를 진행한다. 경기 중계에 대한 배타적 권리는 인터넷 스트리밍 영역까지 확장되어 권리자의 허락 없는 인터넷 중계는 차단될 수 있다. “세계인의 축제”는 이러한 거래를 거쳐 우리에게 도달한다. 문제는 JTBC가 2026년 동계 올림픽부터 2032년 하계 올림픽까지 4개 대회의 한국 내 중계권을 독점하면서 발생했다. 보도에 따르면 JTBC가 IOC에 지급한 중계 방송권료만 3,300억 원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며, 지상파 3사와의 재판매 협상은 결렬되었다. 게다가 네이버의 치지직이 뉴미디어 독점 중계권을 확보함에 따라, 유튜브나 SNS를 통한 자유로운 영상 소비마저 차단되었다. 현지로 날아갈 수 없는 절대다수의 대중에게 올림픽은 곧 미디어 이벤트다. 기술의 발전으로 TV를 넘어 OTT, 소셜 미디어 등 올림픽을 즐길 수 있는 창구는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이용자에게는 자신이 원하는 경로를 통해 자유롭게 콘텐츠를 소비하고 재가공할 권리가 제공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번 올림픽은 중계권료라는 자본의 논리로 인해 TV 시청의 선택권은 물론, 온라인상에서 저작물을 편집·공유하며 즐기는 문화마저 위축되었다. 스포츠 대회가 가진 공공재적 성격과 상업적 가치 사이의 균형이 무너진 셈이다. 올림픽이 세계인의 축제이기 위해서는 중계권의 배타적 수익 논리보다, 자유롭고 유연한 미디어 생태계가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