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말’이란 말의 의미 정체(正體)는 무엇일까. ‘막’이란 접두어는 ‘함부로 한다’는 뜻을 품고 있다. ‘막가파’, ‘막가자는 거냐?’, ‘막되어 먹은 놈’ 등의 ‘막’이 바로 그것이다. ‘막’에는 ‘거칠다’라는 뜻도 있다. 막걸리는 ‘막’(거칠게)과 ‘거르다’가 합성된 말로, ‘거칠게 걸러낸 술’이라는 뜻이다. 막말은 함부로 거칠게 해 대는 말이다. 나쁜 말, 맞다. 또 ‘막’은 ‘밑바닥’, ‘낮은’ 등의 뜻도 있다. ‘막장 인생’이 ‘밑바닥 인생’으로, ‘막노동’이 ‘별다른 기술 없이 몸으로 감당하는 밑바닥 등급의 노동’으로 통하는 데서, ‘막도장’이란 말이 ‘임시변통의 상황에서 아무렇게나 만든 값싼 도장’이었던 데서, 막말의 숨은 의미소를 볼 수 있다. 막말은 말의 품격으로서는 밑바닥 수준의 말이다. 나쁜 말, 맞다. ‘막’은 ‘끝’, ‘마지막’ 등의 뜻도 있다. ‘막차’란 말이 ‘마지막 차’를 일컫는 데서, ‘막내’가 ‘맨끝의 자식’을 뜻하는 데서, ‘막판’이 ‘마지막 판’임을 나타내는 데서, ‘막다른 길’이 ‘길이 끝나는 곳’임을 뜻하는 데서 ‘막’의 의미를 읽을 수 있다. ‘막’에는 심리적으로 ‘마지막 의식’이 숨어 있다. ‘마지막 의식’이란 무엇이겠는가. 역사와 인간에 대한 특별한 성찰이 있는 사람에게는 마지막 의식이 비장한 가치로 승화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내일이 없다는 의식, 즉 허무나 퇴폐의 감정으로 흐른다. 그러므로 막말은 심리적으로 마지막의 궁지에 몰린 상태에서, 까짓것 될 대로 되라지 하는 심정으로 내지르는 말이다. 마지막이니, 지금 이후라는 것을 생각할 이유가 없다. 그럴 때의 막말이란 어떤 극언도 주저할 이유가 없다. 중요한 것은 허무와 분노와 좌절감이 막말을 만들어 내기도 하지만, 그 반대의 생테도 엄연히 존재하고 작동한다는 점이다. 즉 별생각 없이 막말 쓰는 습관을 쌓아 나가다 보면, 나의 심리적 지향에 허무와 분노, 불만과 좌절, 원망과 저주 등의 악령이 들어어 살게 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급전직하(急轉直下) 추락하여 신음하고 있는 나의 불쌍한 자존감을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점이야말로 우리의 가정·사회 교육이 유념해야 하는 대목이다. 언어에는 마성(魔性)이 있다. 언어는 자신을 사용하는 주체(인간)의 의식을 잠식하듯 지배하는 마력을 가지고 있다. 막말은 이를 여실하게 보여준다. 어쩔 수 없이 막말을 듣고 살아야 하는 세상이 되었다. 대화적 양심으로 거르지 않고 내지르는, 감정의 해방구가 된 SNS 공간이 널려있기 때문이다. 그런 SNS의 생태가 나의 일상 언어 영역으로 세차게 들어왔다. 아니, 그런 SNS 공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생태를 우리는 살고 있지 않은가. 막말이 일상적 언어생태가 되어 버렸다. SNS 생태에서의 막말 현상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현실의 언어문화로 옮겨 오게 마련이다. 자기 욕망의 좌절을 남 탓으로 몰아가려는 심리가 막말을 전방위로 투사한다. 어떤 SNS에서 내 나름대로 합리적인 답글을 올려놓았는데, 누군가 무작정 나를 망가뜨리는 막말 댓글로 자기감정을 배설한다. 나는 내 답글을 조용히 내린다. 세상은 막말을 그냥 자극적으로 소비하며 즐기는 듯하다. 자극성 강한, 돌직구 막말들에 감정적 후련함을 따라가는 사이, 그 후련함의 몇 배쯤 되는 해독을 너나없이 모두 나누어 가지고 사는 세상 아닌지 모르겠다.
냉장고 속에서 사과 몇 개가 나왔다. 단단했던 사과는 쭈글쭈글 말라가고 있었다. 이렇게 될 때까지 잊고 있던 내가 한심했다. 맛보다도 붉은 빛깔을 잃어버린 것이 더 속상했다. 과일만큼 예쁜 식물이 있을까. 꽃과는 다른 차원의 얘기다. 나는 과일을 무척 좋아한다. 그러다보니 과일가게 앞을 지날 때는 발걸음이 저절로 멈춰진다. 그 앞에서 과일을 구경하는 일은 소소한 행복감을 준다. 요즘에는 과일가게라고 부를만한 곳이 많지 않아서 예전처럼 그런 행복을 누리지는 못한다. 대형마트에 자리를 내 준 과일코너에서는 그런 기분이 느껴지지 않는다. 과일 앞에서는 침샘이 폭발한다. 봄이면 깨알 같은 씨앗이 톡톡 박힌 귀여운 딸기는 가까이 다가가기도 전에 단내를 풍긴다. 무더운 여름의 푸른 수박과 노란 참외가 가득한 과일가게는 대지의 건강함을 한껏 보여주는 장소 같다. 철마다 다른 과일들이 진열되어 있는 과일가게 앞에서는 그것들을 지나간 햇살과 바람과 비를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사람을 생각한다. 더위와 갈증을 풀어주는 한여름의 수박 같은 사람, 빼곡한 이야기를 알알이 매달고 있는 포도송이 같은 사람, 한 입 베어 물면 새콤한 과즙이 가득 고이는 여름 끝물의 풋사과 같은 사람을. 단단한 사람, 무른 사람, 속을 절대 보여주지 않는 사람, 덤덤하지만 늘 그대로인 사람을. 과일을 좋아하지만 복숭아는 내가 먹지 못하는 과일이다. 털 알레르기 때문이다. 예민한 피부를 가진 탓에 살짝 닿기만 해도 종일 따끔거린다. 보송보송한 털이 감싸고 있는 분홍빛 복숭아는 언젠가는 극복하고 싶은 과일이다. 이것은 내가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들에 대한 고백이기도 하다. 그러니 아름다운 당신들은 아무런 죄가 없다. 비와 바람을 이기고 탐스럽게 열매 맺은 과일처럼, 우리는 각자의 고난을 이기고 드러난 열매들이다. 그러니 자신만의 시선으로 다른 사람의 빛과 어둠을 함부로 말하지 않았으면 한다. 여기까지 오느라 애썼다고 말 건네주는 사람이면 좋겠다. 과일은 혐오 속에서 자라지 않았다. 바람과 햇살과 태풍을 오롯이 견디고 여물었다. 맛과 모양과 빛깔이 다르지만 과육에 가득 담긴 비타민. 우리는 서로의 삶에 활력을 줄 수 있는 비타민 같은 존재들이다. 과일가게를 지날 때 달콤한 향기를 풍기며 제 색을 보여주는 과일의 세계가 얼마나 아름다운 지 그 앞에 발걸음을 멈추어 봐도 좋겠다. 오래전 흐릿한 전구 아래 반질반질하게 닦인 사과와 탱글탱글한 귤이 반짝이던 허름한 과일가게가 있었다. 겨울을 따스하게 밝혀주던 그런 옛날이 있었다. “언니는 참 사람을 좋아해.” 오래전 친한 후배가 내게 한 말이다. 나는 정말 사람을 좋아하는가? 사는 동안 내내 혼란스러웠다. 사람은 좋아하는 것에서 상처 입는 존재라는 것을 아는데 오래 걸렸다. 냉장고 속에서 말라가는 줄도 모르고 방치한 사과를 버리지 않고 다 먹어야겠다. 과일만큼 예쁜 식물이 있을까, 사람만큼 좋은 것이 있을까. 다시, 좋아하는 것에서 행복해지는 법을 알아가는 시간이다. 뜨거운 햇살과 세찬 비바람 속에서도 과일이 달게 익어가고 있다. 사람도 그럴 것이다. 내 삶의 풋내 나는 시간을 다녀간 그대들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
약 1년 전인 2024년 6월 24일 경기 화성시에 있는 일차전지 업체 아리셀 공장 3동 2층에 쌓여 있던 리튬 배터리 더미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첫 배터리 폭발 이후 동시다발적인 폭발이 발생하면서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됐다. 이 사고로 23명(내국인 5명, 중국 국적 17명, 라오스 국적 1명)이 사망했고 8명이 다쳤다. 리튬 배터리의 군납 기준을 맞추려는 욕심에 근로자의 안전을 뒷전으로 두면서 불거진 총체적인 인재(人災)라는 것이 경찰의 수사결과였다. ‘군납 기준을 맞추기 위한 검사용 시료 바꿔치기’ ‘타 기관으로부터 받은 시험성적서의 데이터를 조작해 제출’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하루 평균 생산량의 두 배를 목표로 제조 공정을 무리하게 가동했다. 참사가 발생 이틀 전에도 발열전지 1개가 폭발했지만 별도의 조치를 하지 않았다. 숙련되지 않은 일용직 근로자들이 투입됐고, 공장 내 대피로를 제대로 조성하지 않았다. 1년이 지났다. 32명의 사상자가 난 참사였지만 아리셀 대표 등은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입장을 유지, 유족과 피해자들을 분노케 하고 있다. 이에 23일 아리셀산재피해가족협의회와 아리셀중대재해참사대책위는 수원지법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유가족의 분노를 키우고 있다면서 “23명의 노동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박 대표는 보석 허가로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반드시 살인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관련기사: 24일자 7면, 아리셀 참사 유가족, ‘적반하장’ 박순관에 울분 토로) 사고 이후 박순관 아리셀 대표는 중대재해처벌법 위반 등의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그러나 자신을 ‘단순 투자자’라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원인을 알 수 없는 사고였다’, ‘저는 경영책임자가 아니다’라고 책임을 회피하며 사고 원인이 사망한 희생자들에게 있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경찰 조사 결과 ‘불량 전지의 열폭주’로 불이 났고, ‘비상구 설치와 같은 대피경로 확보미흡’이 대형 인명피해의 원인이라고 경찰이 밝혔음에도 말이다. 게다가 희생자 유가족들을 대상으로 민사소송까지 제기하려 했다니 그 후안무치에 말문이 막힌다. 당시 사고로 남편을 잃은 유가족 최현주 씨에 따르면 남편이 “계속 전지에서 미세 발열이 나 원인을 파악해야 한다”고 건의했지만 “아리셀은 오히려 제 남편이 방치했고 화재로 이어졌다”고 뒤집어씌우면서 민사소송으로 위협하며 합의하자고 했단다. 합의 조건은 ‘처벌불원서’였다고 한다. 23명의 노동자가 목숨을 잃고 8명이 부상을 당했는데 업체의 대표에 대한 처벌을 원치 않는다고 서명해야 하는 것이 맞느냐는 최 씨의 하소연을 재판부는 귀담아 들어야 할 것이다. 사고 이후 산업안전 관리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은 고조됐다. 하지만 아리셀 측은 여전히 책임을 회피하고 있으며 유가족들의 고통은 하루하루 심해지고 있다. 유가족들은 사고 직후 대책위원회를 조직하고 아리셀 모회사인 에스코넥 앞에서 농성도 했다. 그럼에도 사측은 진심 어린 사과나 직접적인 보상 조치 없이 사건을 덮으려 한다며 분노하고 있다. 이로 인해 깊은 상처도 받고 있다.(관련기사: 23일자 7면, 화성 아리셀 참사 후 1년…아직도 ‘책임지는 자’ 없다) 이에 유족들은 수원지법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박순관 아리셀 대표 등 책임자에 대한 엄벌을 촉구하는 서명운동에 돌입했다. “생명을 경시한 죽음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관계자들에 대한 철저한 처벌만이 또 다른 참사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며 엄벌을 촉구했다. 이들은 “박순관은 법원의 보석 허가로 석방돼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면서 “참사는 끝나지 않았다. 박순관이 중대재해처벌법으로 강력한 처벌을 받도록 재판 방청, 서명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리셀 측이 책임 있는 사과와 피해 보상, 재발 방지를 위한 실질적 조치를 내놓길 바란다. 아울러 노동자의 안전을 위한 제도의 촘촘한 정비도 필요하다.
짧게는 6개월 길게는 3년여를 우리 국민을 잠 못 이루게 하는 윤석열 정권은 마침내 끝이 났다. 박근혜 정권과 윤석열 정권, 시퍼렇게 살아있는 두 권력을 촛불과 응원봉으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갈아치웠다는 것은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다. 이는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실제로 보면 민주 시민들의 불의에 대한 단호한 의분과 민주제도에 대한 실천적 의지로 가능했다고 본다. 그리고 이제 새로운 정권 이재명 대통령의 국민주권 정부가 탄생했고 많은 시민의 환호와 희망 안에서 출범했다. 그동안 답답한 여러 사안에 대해, 특별히 새로운 정부에서 이재명 대통령과 함께 일할 사람들을 추천하거나 정책 제안을 자유롭게 추천하고 제안하도록 국민을 독려하고 있다. 정말 상쾌한 분위기로 새 정부가 출범하여 부지런하게 움직이는 모습이다. 그런데 한쪽에서 통합정치를 해야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예수의 가장 유명한 말씀 중의 하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어떤 이들은 이러한 논리로 그동안 “상대 당의 주요 인물들을 박해한 자들을 용서하고 통합적 정치를 해야 한다“고 역설하기도 한다. 물론 겸연쩍은 표정으로 해야 할 말을 너무도 당당하게 외친다. 이재명 정권도 출범할 때부터 통합정치를 확실하게 표명했다. 복수의 정치를 해서는 국민통합을 이룰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복수(revenge)는 항상 또 복수를 부른다. 하여, 보복의 정치는 낮은 수준의 정치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실정법을 어긴 사람들을 없던 일로 무마하고 좋은 게 좋다고 그냥 덮어두고 넘어가기를 원하는가? 모든 국민의 상식에 이 질문을 던지면 거의 99.999%는 슬그머니 구렁이 담 넘듯 넘어가는 것에 반대할 것이다. 그러니, 통합과 용서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이고 나라를 이끌어 가는,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실정법을 어긴 사람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그에 맞는 적절한 처벌을 해야 한다. 이를 보복 정치네 통합의 정치를 왜 안 하냐 등의 어리석은 말로 공정과 정의를 이뤄야 하는 새 정부의 발목을 잡는다면 우리는 앞으로 또 다른 내란을 보게 될 것이다. 하여, 이번 국민주권 정부는 투명하고 단호하게 법을 어긴 사람들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처벌해야 한다. 일제 강점기가 끝나고 미군정과 리승만 정권에 의해 우리 국민을 탄압한 친일 인사들을 무죄 방면하고 오히려 권력을 쥐여 줬기에(일본 순사가 그대로 경찰이 되는 둥) 지금까지 그 자손들이 그 기득권으로 힘을 휘두르며 주권자를 무시하고 있다. 하여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하루빨리 범법자들을 수사하고 재판하여 마땅한 처벌을 해야 한다. 그리고 내란 우두머리를 “즉시항고”도 하지 않아 반바지 입고 돌아다니게 하는 검찰, 청문회 전에 총리 후보자의 이야기도 들어보지도 않고 일개 시의원의 고발에 “즉시수사” 배당하는 검찰은 하루빨리 해체되어야 한다. 검찰 개혁법안은 국회에서 통과되면 유예기간 없이 “즉시 실행”해야 한다. 덧붙여 독일 나찌 시절의 “히틀러 유겐트(히틀러 소년단)”처럼 아이들에게 편향되고 거짓된 선전을 가르치고 가스라이팅 시키는 리박스쿨(리승만, 박정히 스쿨)도 엄밀하게 수사해야 한다!
인공지능의 성능이 발전하면서 진실과 허위의 경계는 한층 더 허물어졌다. BBC는 인공지능으로 제작된 아동 성착취물의 증가로 인해 실제 위험에 빠진 아동을 구하는 데 쓰여야 할 시간이 낭비되고 있는 현실을 보도했다. 관련 기관들은 존재하지도 않는 아동이 혹여나 진짜 사람일까 우려하며 확인을 거듭하게 되었다. 이대로라면 실제 위험에 처한 아동을 ‘가짜’라고 잘못 판단하여 구조에 나서지 않는 오류를 범할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니 생성형 인공지능으로 만들어진 성착취물에는 실제 피해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허위다.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유통되고 있는 성착취물이 실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로부터 생존의 기회를 앗아버릴 수 있으니 말이다. 혹자는 인공지능이 생성한 성착취물을 또 다른 인공지능으로 식별해내면 되는 문제가 아니겠느냐고 주장한다. 기술 잡는 기술을 기대하면서 말이다. 기술의 문제를 다른 기술로 막고, 이를 우회하는 다른 기술이 등장하며, 서로의 꽁무니를 쫓는 추격전이 과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근본적인 해결책은 단연 기업과 이용자 모두의 기술 윤리 회복이다. 표현의 자유가 다른 모든 것에 우선하지는 않는다는 당연한 사실을 주지하는 것 말이다. 표현의 자유가 갖는 의의를 조롱이라도 하듯, ‘자유로운’ 온라인 플랫폼 텔래그램이 성착취물 유통의 온상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려보자. 2013년 에드워드 스노든의 내부고발을 통해 9.11 테러 이후 국가와 기업이 결탁하여 전 세계인을 감시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텔레그램은 표현의 자유가 사라졌다는 세계적인 두려움 속에서 혜성같이 등장했다. 텔레그램은 ‘지구상 모든 사람을 위한 자유’라는 아이디어 그 자체였다. 그러나 출시 12년여가 지난 지금, 텔레그램은 딥페이크 성착취물 문제를 증폭한 기업이 되었다. 텔레그램이 약속한 ‘통신의 자유’는 비밀 채널에서 아동성착취물(Child Sexual Abuse Material, CSAM)을 비롯한 온갖 종류의 성착취를 사실상 방조했다. 스탠포드 인터넷 감시소(Stanford Internet Observatory, SIO)는 텔레그램이 사적 채널에서의 아동성착취물 거래 행위를 암묵적으로 허용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사인 간 통신에 대한 텔레그램의 정책은 다른 빅테크 플랫폼에 비해 너무도 자유로워서, 아동성착취물 유통과 어린이에 대한 성애화, 그루밍 등에 대해 아무런 제재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기술은 인간의 행위를 유도한다. 텔레그램의 익명성과 보안, 사법 공백은 자극적인 ‘표현’을 통해 수익을 좇는 이용자를 만들어냈다. 국가의 감시에서 자유로운 공간이라는 이상은 인권을 적극적으로 희롱하는 이용자들의 피난처로 전락했다. 그렇게 텔레그램은 자유의 이름으로 세탁된 부를 축적했다. 산적한 정치 현안과 복잡하게 전개되는 해외 정세 속에서도 성착취물 유통 문제는 멈추지 않았다. 딥페이크 성착취물 산업은 자유를 앞세워 유지되고 있다. 누구의 자유이고 무엇을 위한 자유인가. 표현의 자유를 내세워 누구를 침묵시키고 있는가.
경기도가 ‘아리셀 참사(화성 전지공장 화재사고)’ 1주기를 맞아 참사의 원인부터 대응책까지 담은 종합보고서 ‘눈물까지 통역해 달라–경기도 전지공장 화재사고, 그 기록과 과제’를 발간한다고 밝혔다. 도의 자기성찰 기록이자 지방정부가 피해자 목소리로 완성한 국내 최초 ‘피해자 중심’ 종합보고서라는 설명이다. 기억하기조차 두려운 ‘아리셀 참사’의 희생을 교훈 삼을 특별한 대책이 마련돼야 한다. 다시는 이 같은 참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예방·대응 지침서로 활용되어 기록물의 효용성을 더욱 넓혀나가길 기대한다. 보고서는 1부 경기도의 대응, 2부 자문위원회의 분석과 권고로 구성됐다. 1부는 CCTV 분석, 화재 진압과 소방본부의 재현 실험, 긴급생계비·통역·의료·심리지원 등 도의 대응을 시간순으로 정리했다. 보고서에는 특히 김동연 경기도지사의 ‘이주노동자도 경기도민’이라는 선언 아래 법적 지원체계가 불명확한 외국인 유가족까지 차별 없이 지원한 전국 최초 사회적 재난 지원, 재난안전대책본부의 현장 설치, 솔루션회의 등 새로운 대응 체계에 대한 논의 과정과 성과가 포함됐다. 현장 관계자들의 발언을 구술형 기록으로 재구성해 기존 행정 백서와는 다른 ‘기억 중심의 기록물’로 완성됐다. 2부에는 ‘경기도 전지공장 화재 조사 및 회복 자문위원회’ 제언을 중심으로 이민 사회, 노동, 안전정책 전환, 위로금 제도화 등 실제 정책 수용 내용과 향후 과제가 담겼다. 도는 화재 당시 ‘리튬전지 화재에 물을 이용한 소화 방식이 옳았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해 대응 매뉴얼의 적절성을 되짚고 반성과 성찰을 통해 실질적인 정책 변화를 이끌어 냈다. 경기도는 우선 ‘이주노동자 보호정책’을 ‘이민사회 정책’으로 확장했다. 지난해 7월 전국 최초로 이민사회국을 신설했으며 다음 달에는 이민사회통합지원센터를 개소한다. 이를 통해 노동, 안전, 정착지원, 차별 예방 등 4개 분야 33개 과제를 추진 중이다. 사회적 재난 대응 방식도 손봤다. 법의 사각지대를 넘어 이주노동자를 포함한 모든 피해자, 유가족들에게 긴급생계비를 지급했고 이후에는 전국 최초로 중경상 피해자까지 지원하는 ‘경기도형 재난위로금’을 정착시켰다. 이밖에 산업 안전정책도 구조적 전환을 모색 중이다. 전국 최초로 주 4.5일제 시범사업을 도입해 노동시간 단축을 통해 산재 예방을 도모하고 노동안전지킴이 인력을 확대하고 산재율을 반영한 정책 인센티브제도 마련할 방침이다. 특히 근로감독 권한 일부를 지방정부가 공유할 수 있도록 법 개정을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무려 32명의 사상자를 낸 화성 아리셀 공장 화재는 소름 끼치는 악몽이다. 발생한 지 한 해가 지났지만, 유가족들의 고통은 날로 깊어지고 있다. 사고 이후 박순관 아리셀 대표는 중대재해처벌법 위반 등의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지만, 법정에서는 “나는 단순 투자자”라는 입장을 고수하며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현장은 복구 없이 방치돼 참사의 기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사고 현장은 말이 안 될 정도로 허점투성이였고, 허술한 안전의식이 얼마나 참혹한 재난을 불러오는지를 생생하게 증명하고 있다. 다시는 참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국가사회를 건설해나가는 것이 희생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그러나 미안하지만, ‘아리셀 참사’ 1년이 지난 지금도 그런 교훈이 제대로 실천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사회적 재난의 예방과 대응 매뉴얼로 쓰이길 간절히 바란다”는 김동연 경기도지사의 당부처럼 경기도가 발간한 이번 종합보고서 ‘눈물까지 통역해 달라–경기도 전지공장 화재사고, 그 기록과 과제’가 재난을 예방하고, 사고 발생에 대응하는 유용한 지침서로 발전돼가길 기대한다. 절대로 사고가 나지 않는 사회는 무결점 안전시스템의 구축을 통한 철저한 예방과 허점 없는 대응 매뉴얼의 완성만이 견인한다. 다시 한번 희생자들의 명복을 빈다.
나처럼 몰랐을까. 몰라서, 신神은 죽었다고 말했을까. 어떤 사람은, 그의 말을 선언이 아니라 절규라고 해석했다. 신이 없는 세상에서 인간이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목격한 자의 고백이라고 했다. 또 다른 사람은, 신은 사랑이고 정의이며 자비라고 했다. 그런 해석을 두 귀로 똑똑히 들었지만 나는 여전히 모르겠다. 정말 신은 그 해석대로인가. 그러하다면, 신의 이름 아래 벌어지고 있는 온갖 죄악은 무엇인가. 전쟁과 차별과 혐오는 무엇인가. 그것도 사랑인가. 사랑이라면, 피난민의 천막을 조준하는 총구는 정의이고, 어린 학생의 교실을 관통하는 미사일은 자비인가. 글쎄, 나는 잘 모르겠다. 인간은 끝없이 신을 부르짖으며 살아가는데, 정작 인간의 부름에 답하는 신을 나는 아직껏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묻는다. 내 안의 나에게 내가 묻는다. 신은 존재하는가. 거룩하게 살아서 임하는가. 거룩하게 임한다면, 왜 말이 없는가. 도대체 왜, 사랑은 보이지 않고 정의는 부러지고 자비는 도망치는가. 도대체 어느 구석 어떤 경계에 존재하기에 빌고 또 빌어도 대답이 없는가. 혹시, 신은 존재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진 게 아닐까. ‘of our own making.’ 그렇게 태어난 게 종교가 아닐까. 인간의 욕망과 두려움이 빚어낸 그림자의 형상처럼. 중요한 건, 오늘도 누군가는 그 그림자를 향해 기도를 올린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발사한 미사일이 적국의 하늘에 심판의 불비를 내리게 하소서. 우리의 믿음을 따르지 않는 자들의 앞날에 은혜가 아닌 재앙이 임하게 하소서. 도대체 어떤 신의 가르침이 이리도 폭력적일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이해할 수 없다. 아니, 이해하기 싫다. 이해하는 순간, 나도 그 폭력에 동의하게 될까 두렵다. 그들은 신을 말하지만, 나는 그들에게서 인간의 욕망을 본다. 신의 뜻이라 외치는 입에서 나오는 건 끝없는 분열과 증오, 그리고 돈이다. 당연히 믿음은 숫자로 계산되고 교단은 재벌이 된 지 오래다. 그러니 그럴 수밖에. 당신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가. 낮은 곳에 임해야 할 십자가는 세상 꼭대기에서 날마다 당당하다. 중생의 눈물을 외면한 자비는 불단 앞에 쌓이는 공양물의 공덕과 찬탄 속에 거룩하다. 기도는 값비싼 음향기기 속에서 흩어지고, 신의 메시지는 편집되어 자막으로 나붙는다. 녹음되고 편집된 메시지에도 사랑과 헌신은 존재할까. 있다면, 어디에서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글쎄, 나는 잘 모르겠다. 지금의 종교는 정말 신을 섬기고 있는 건지. 아니면 신의 이름을 빌려서, 인간 자신의 욕망을 섬기고 있지는 않은지. 그럼에도 나는 신을 믿는다. 무너지고 삐뚤어진 종교를 바로 세울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신이니까. 신의 이름을 팔아 치부하고 득세하는 무리를 단죄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 역시 그분이니까. 내가 신을 우러름도 그래서다. 나는 신을 흠모하고 경외한다. 신을 모신다고 지은 온갖 건물을 흠모함이 아니다. 나는 교회와 사찰을 경외하지 않는다. 나의 우러름의 대상은 종교 지도자가 아니다. 내가 진정 사랑하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신의 가르침이고, 모두가 부처일 수 있다는 신의 깨우침이다. 인간의 탐욕을 넘어서려는 노력과 의지가 없다면, 종교는 언제까지나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낸 허상에 갇혀있을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여전히 나는 신을 기다린다. 그분이 보낸 응답이 이미 우리 자신에게 존재함을 깨닫는 그 순간까지.
어느 토요일, 한 환자 분이 “ 덕분에 몸이 많이 좋아졌어요” 라고 인사를 한다. 좋아졌고 편해졌다는 말은 한의사로써 언제 들어도 반갑고 기쁘다. 실제로 자율신경검사 (Heart rate variability;HRV)결과도 개선되었다. 이분은 맵고 짠 자극적인 음식이나 튀긴 밀가루 음식 혹은 맥주와 같은 찬음식을 먹으면 더부룩하게 소화가 안되거나 설사를 자주 해서 내원하였다. 항상 음식을 먹을때는 소화가 되지 않을까 설사를 하지 않을까 긴장하고 염려하였다고 했다. 한약을 복용하면서 한약의 멀티타겟의 효과로 인해 대변과 소화기능, 그리고 60대가 넘어가면서 쉬 피로해지는 컨디션이 같이 좋아졌다. 한의사의 한약처방은 단일성분이 아닌 복합성분으로 이루어진다. 일부단일성분을 추출하거나 화학적 합성한 성분이 아닌 자연물인 식물 혹은 동물성 약재를 사용한다. 그리고 대개는 더욱 효과적이기에 단일약재보다 여러 종류의 약재를 복합적으로 조합하여 처방한다. 한약처방의 의도는 기계적인 관점으로 국소적 메커니즘에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닌 시스템론적인 전인적인 관점에서 인체라는 복잡계의 에너지시스템의 항상성을 조절해주는데 이 과정에서 멀티타겟, 즉, 다양한 증상군에 효과를 나타낸다. 한약의 이런 특징은 단일성분의 추출물에 비해서 연구가 쉽지는 않지만 최근에 한약의 효과와 적용에 대한 연구들이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다. 한약과 장내미생물에 관한 연구들도 최근에 다양하게 발표되고 있는데 요약하면 한약은 물리적, 화학적, 면역학적, 미생물학적으로 장내환경을 보호한다. 장 점막 세포 간의 밀착 연결을 강화하여 병원균 침입을 방지하며 장의 점액분비를 촉진하며 면역세포를 활성화하여 항균작용을 증가시키고 유익균을 증가시키고 병원균을 억제한다. 위 환자분에게 한약치료와 함께 장기능을 개선하기 위한 일상생활 습관도 함께 안내하였다. 컨디션 좋아짐에 따라서 은퇴 후에도 독서와 글쓰기에 매진하고 있었는데 요즈음 연구 독서주제가 확장되었다.“장이 정말 몸의 건강에 중요하더라구요, 요즘 덕분에 장과 뇌 공부 많이 하고 있습니다. ”하신다, 내 몸에 대해서 잘 아는것도 치료의 일부이다. 장내미생물의 환경은 장의 건강뿐만아니라 장은 제 2의 뇌라고 불릴 정도로 감정을 조절하는 신경전달물질의 생성과 직접 관련되며 몸 전체의 염증과 면역전반에 관여된다. 이 장내미생물이 자라고 정원을 장에 비유하자면 이 정원을 잘 가꾸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햇빛, 물, 잡초 솎아내기 토양에 거름주기, 정성스레 가꾸어주기 등의 모든 노력이 도움이 된다. 뇌와 몸, 뇌와 장의 관계에 대해서 40년동안 연구해 온 의학박사 에머런 마이어는 먹는 것 뿐만 아니라 운동, 마음챙김, 스트레스관리를 비롯한 생활 습관이 건강한 장을 위해서 필요하다고 말한다. 소화, 설사, 과민성 대장증후군이 식이요법 운동과 생활관리 등으로 해결이 되지 않을 때 한의학치료는 증상을 개선하면서 장내미생물의 환경을 같이 개선한다. 음식뿐만 아니라 약도 잘 먹는게 중요하다. 약식동원의 관점으로 처방하고 치료하는 한약치료는 증상과 함께 면역, 뇌기능이 함께 좋아지는 것이니 최소한 일거이득이다. 뇌와 장, 몸과 마음 인체의 모든 기관은 서로 영향을 받으면서 조절된다. 그렇기에 몸과 마음 전체를 고려한 한의학치료는 장기적으로도 인체를 조화로운 건강으로 안내한다.
운전면허를 갓 취득한 초보 운전자 사이에서 불법 ‘사설 방문 운전 연수’가 암암리에 성행하고 있다. 사고가 발생할 경우 보험이 안 되는 것은 물론 정규학원에서 사용하는 자동차와 달리 조수석 연수 강사가 응급 시 사용할 수 있는 브레이크 장치도 없는 자동차로 운행하는 것 자체가 위태롭기 짝이 없는 행동이다. 일부 비용 절감을 위해 저지르는 위험천만한 행동은 강력하게 제어돼야 한다. 제대로 된 근절·차단책이 마련돼야 할 것이다. 도로교통법상 등록된 운전학원 외 장소에서 유상으로 운전 교육을 하는 것은 불법이다. 하지만, SNS나 오픈채팅방 등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여전히 이 같은 불법 연수가 아무렇지 않게 이뤄지고 있는 실정이다. 경기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온라인에 ‘운전 연수’를 키워드로 오픈 채팅방을 검색하면 ‘장롱 탈출 운전 연수’, ‘드라이빙’ 등 수십 개의 대화방이 나타난다. 이들 중 다수는 간단한 질문 몇 가지를 통해 연수를 예약할 수 있는 구조로 돼 있다. 자차 보유 여부, 희망 일정 등을 입력하면 즉시 연수가 연결되는 방식이다. 특히 방학 시즌을 맞아 대학생과 사회초년생 사이에 운전 연수 수요가 급증하면서 비용과 시간 부담이 적은 사설 연수로 눈을 돌리는 경우가 많다. 취재진이 사설 연수 강사에게 불법성에 대해 묻자 “걸릴 일 없다. 아는 사이끼리 운전 알려주는 것처럼 하면 된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기존 학원에 비해 절반 가격에 연수를 받을 수 있어 이용한 사람들도 적지 않다. 이용자 중에는 시간과 장소를 선택해 가르쳐주는 게 편리했지만, 불법인 줄 몰랐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전문가들은 “안전과 법적 문제 모두를 안고 있는 매우 위험한 선택”이라고 경고한다. 도로교통법 제116조는 등록되지 않은 시설에서 유상 운전 교육을 하는 것을 명백히 금지하고 있으며, 위반 시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 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질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이 같은 불법 연수는 해마다 증가 추세다. 실제 경찰청에 따르면 2020년 38건이었던 불법 운전 연수 적발 건수는 지난해 117건으로 3배 이상 늘었다. 경찰은 최근 불법 연수 업자들이 단속을 피하기 위해 선입금을 유도하거나,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사례까지 포착하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안전이다. 운전학원 차량과 달리, 사설 연수 차량은 조수석에 별도의 브레이크가 없거나, 임시로 장착한 ‘핸드 브레이크’ 수준인 경우가 많아 사고 위험이 크다. 연수 도중 사고가 나더라도 강사가 보험에 가입돼 있지 않아 연수자가 직접 피해를 떠안을 가능성도 있다. 경찰의 단속은 인터넷에 운전 연수를 검색해 노출되는 업체 등의 불법 연수 장면을 채증해 단속하거나 제보를 받는 방식으로 제재에 나서고 있다. 그러나 현장을 포착해도 영업 사실을 숨기고 ‘친척’이라거나 ‘지인’임을 앞세워 방어하는 바람에 단속이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사설 운전 연수’는 문자 그대로 소탐대실(小貪大失)의 위험성이 대단히 높은 어리석은 행동이다. 교통사고는 인명피해와 연결될 확률이 가장 높은 안전사고 중 하나 아닌가. 자신의 안위는 물론 무고한 타인의 생명까지 위험에 빠트릴 수 있는 최악의 만용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불법이지만 안 걸린다’는 맹신은 그릇된 인식의 소산이다. 끔찍한 교통사고 재난 문제가 어디 걸리고 안 걸리는 게 핵심인가. 경찰 단속을 피할 수 있기만 하다면 뭐든지 해도 된다는 인식이야말로 공공의 적이다. 경비를 절감할 수 있다는 이유 하나로 ‘사설 운전 연수’가 아무렇지도 않게 횡행하는 풍조는 강력히 시정돼야 한다. 특히 갓 운전면허를 취득한 젊은이들이 시작부터 그릇되고 위험한 방식으로 운전능력을 배양하는 일이 없도록 어른들이 잘 이끌어야 한다. 시작을 잘못하면 끝이 결코 좋을 수 없다. ‘사설 운전 연수’ 영업은 근절돼야 한다.
언론을 상대하는 업무를 맡는 분들에게 긴히 청한다. 사람을 하늘처럼 받들겠다는 이재명 정부에서도 반(反)민주적인 이 퇴영적(退嬰的) 언어로 (나를 비롯한) 숱한 ‘인간’들이 통칭될 줄은 몰랐다. 누구라고 기분 개운할까? 김민석 국무총리 후보자에 관한 몇 언론의 글들에,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관형사’가 떠억 그 명칭(총리) 앞에 또 붙었더라.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우리 모두의 집합(개념)인 만인은 그 일인(대통령)의 아래(一人之下)이면서 동시에 총리의 아래(萬人之上)라는 직설적 언어다. 임금 말고는 모두가 그의 아래라는, 왕조(王朝)시대 영의정의 위상을 표현하던 말이다. 대통령이나 그의 대변인, 또는 총리 후보가 그런 말이나 연상(聯想)작용을 부를 개념을 썼을 리는 없다고 본다. 벼락 떨어질 것이 빤히 보이지 않는가. ‘대통령의 입’ 강유정 대변인은, ‘어공’이지만, 언사(言事) 계통의 ‘국대급 선수’로 글 계통에서 눈길을 많이 받던 세련된 문필가다. 한국어의 구조, 작동의 원리를 꿴 듯한 평이(平易)하면서 명료한 문체가 특징이다. ‘기자들의 글’도 아는 인사다. 현실적으로는 논란도 있을 수 있지만, 대통령과 총리가 사람 또는 (유권자이면서 납세자인) 시민의 윗길이라는 건 도리(道理)에도 정치적(기준)으로도 적합지 않다. 더 꺼내기 싫은 얘기지만, 리박(리승만 박정희)시대 쯤의 구태(舊態) 아니냐. 허나 예상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강 선수’쯤 되면, “제발 이런 구시대의 망발(妄發)같은 언어가 이제는 안 나오도록 조심해 주시오.”라고 기자들에게 요구를 했어야 하지 않을까? 대변인 조직 구동(驅動)의 ‘안전장치’로 삼을 수도 있겠다. ‘만인지상’의 속뜻을 모르고 여태 해오던 대로 관행적 관습적 말투로 쓰지 않았을까? 언론 동업자로 더 부끄러운 상황이지만, 남의 글 베껴 쓰다 난 ‘사고’였을 수도 있다. 그러다 대통령이나 대변인의 의도와는 판이하게, ‘지 혼자만의 문법’을 펼치게 된 것은 아닐지. 50여 년 전 대통령 박정희가 ‘한자 지우고 한글로만 쓰라’고 한 후 한국어는 발음기호 모음처럼 됐다. 한자를 알던 이들은 상당 기간 별로 불편하지 않았을 수 있다. 허나 점차 한국어(어휘)의 여러 뜻들이 구름과 안개 속에 갇히게 됐다. 최근 문해력 파동의 원인일 터다. 지금도 한자 숙어(熟語)에 유식한 (체하는) 이들, 특히 일부 정치가들은 시민 대부분이 ‘한자 없이 교육받은 언중(言衆)’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맹자왈공자왈 맹꽁타령 못 버리더라. 하릴없이 아우세대 자녀세대는 바보행세를 해줘야 하는지. 글쟁이로 사족(蛇足 뱀다리)같은 이런 말 덧대는 것은 후배세대에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한 자괴감이면서, 소통의 이런 불협화(不協和)가 빚을 더 큰 재앙을 저어함이다. 대변인 등 공보 (기업)홍보 등의 업무를 맡는 이들은 늘 말과 글을 청명(晴明)하게 빗질하는 중요한 직책이다. 보도자료 작성 같은 언어 작업에서 시민 또는 소비대중과 각급 언론(인)의 수준에 보다 정밀하게 초점 맞추자는 청을 드리는 까닭이다. 이런 사례, 공보-언론 같은 전문가 사이의 정밀한 소통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세상 말귀와 글눈 틔우는 계기로 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