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부터 MBTI가 유행하면서 대화상대의 MBTI를 묻는 경우가 종종 있다. MBTI, 마이어스-브릭스 유형 지표(Myers-Briggs Type Indicator, 1962)는 마이어스와 브릭스가 융(Jung)의 심리 유형론을 토대로 고안한 성격 유형 검사로, 4가지 척도의 관점에서 인간을 이해한다. 많이 알려져 있듯이 E(외향)-I(내향), S(감각)-N(직관), T(사고)-F(감정), J(판단)-P(인식)로 이루어진 4가지 선호지표로 조합된 MBTI의 성격유형은 16가지로 나타날 수 있으며, 인간의 대인관계, 정보처리, 의사결정, 행동양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 중, 사고형(Thinking)과 감정형(Feeling) 유형의 사람이 만나서 대화를 한다면 어떤 대화양상이 나타날지 생각해보자. 연구에 의하면 사고형과 감정형은 개인이 의사결정을 내리는 방식을 설명한다. 사고형은 논리와 객관적인 사실을 중요하게 여기며, 분석적 사고로, 의사결정을 한다. 반면, 감정형은 공감과 인간관계를 중시하며, 상황적인 특성에 따라 의사결정을 내린다. 이 두 유형의 대화에는 접근방식의 차이가 있다. 가령, 아는 지인에게 풀기 어려운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사고형은 “어떤 문제였어?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처럼 문제의 원인과 해결책에 집중한다. 반면, 감정형은“힘들었겠네, 어떤 기분이었을지 이해돼”라고 표현하며, 지인의 감정을 먼저 살핀다. 이렇게 문제를 대하는 접근방식이 다른 두 유형의 사람이 대화하면 당연히 서로를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생길 수 있다. 대화의 어려움이 있다면 상대방을 비난하기보다 상대방에 대한 이해를 통해 대화로 빚어지는 갈등을 줄이는 것이 현명하다. 사고형은 감정형과 어떤 문제에 직면했을 때, 그 문제의 원인과 해결책을 고려하겠지만, 문제의 해답을 내놓는 것 이상으로 감정형과의 관계 속에서 감정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감정형은 자신의 감정이 무시당했다고 여기고, 서운할 수 있다. 첫째, 상대방의 이야기를 눈 맞추면서 끝까지 진지하게 듣는다. 경청은 사람의 마음을 얻는 가장 큰 힘이다. 둘째, 상대의 감정을 인정하고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 감정을 살피기에 앞서 문제의 해결책만 제시하려 든다면 감정형은 사고형에 대해 공감능력이 부족하다고 느낄 수 있다. “아, 속상했겠네, 많이 힘들었겠다”라는 말에서 감정형은 위로를 받을 수 있다. 셋째, 자신의 해결책을 제안의 형식으로 말한다. 감정형은 사고형의 말하는 방식이 직설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감정형은 발생한 문제에 대해 사고형과 대화할 때 다음과 같이 해보면 좋겠다. 첫째, 말하고자 하는 바를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문제의 배경과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하면 좋다. 말이 길어질수록 감정은 해소될 수 있지만, 사고형은 말의 내용에 핵심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둘째, 사고형의 말하는 바를 감정적으로 이해하지 말아야 한다. 셋째, 문제에 대해 느끼는 바를 설명하고, 사고형의 의견을 경청한다. 이러한 노력으로 두 유형은 서로가 몰랐던 새로운 지식과 경험을 하게 되고, 인간관계와 문제해결에 있어 서로에게 부족한 면을 채우는 시너지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지역 곳곳의 도로 위, 무리한 끼어들기나 교차로 내 꼬리물기, 새치기 유턴처럼 ‘잠깐이면 되겠지’ 싶은 운전이 점점 늘고 있다. 비긴급 상황에서도 법규를 무시하고 진행하는 일부 구급차량 역시 예외가 아니다. 이런 반복적이고 이기적인 교통법규 위반은 결국 모두의 불편과 사고로 이어지고, 더 나아가 교통질서 전반에 대한 불신과 무관심까지 불러온다. 이에 경찰은 교통질서 회복을 위해 ‘도로 위 5대 반칙행위’ 근절을 핵심 과제로 삼고, ▲새치기 유턴 ▲꼬리물기 ▲끼어들기 ▲비긴급 구급차 법규 위반 ▲버스전용차로 위반에 대한 집중 홍보와 계도, 단속 활동을 강화하고 있다. 특히 경찰에서는 민원 다발 구간 및 사고 취약 지점을 중심으로 7~9월 집중 홍보·계도, 9~12월 집중단속을 실시하며, 유관기관과의 협업을 통한 교통시설 개선도 연중 함께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교통질서는 단속만으로 바로 설 수 없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작은 배려가 큰 질서를 이룬다는 슬로건처럼 운전자 스스로의 배려의식과 시민 모두의 양보가 큰 질서를 이룰 수 있다. 작은 편의를 위해 위반한 한 사람이, 누군가의 소중한 삶을 망칠 수도 있다. 법규를 지키는 것이 불편해 보일 수 있지만, 결국 우리가 안전하게 살아가는 최소한의 약속임을 기억해야 한다. 지금 이 순간, 나부터 시작하는 준법 운전으로 더 안전하고 여유로운 도로 환경을 우리 스스로 만들어가길 바란다.
요즘 감사하게도 바쁜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이런 저런 일정이 촘촘히 이어지면서, 말 그대로 ‘휴일 없는 나날’을 보내는 중이다. 피곤하다고 말하면 사치처럼 들릴까 조심스럽지만, 사실 가장 큰 고민은 딱 하루쯤 텅 빈 휴일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심각한 건 아니고 단지 잠깐, 아주 잠깐만 나를 내려놓고 싶은 마음이 있을 뿐이다. 이런 감정은 나만의 문제가 아니다. 요즘 사람들은 누구나 한두 번쯤 ‘번아웃’이라는 말을 입에 올린다. ‘번아웃(burnout)’은 원래 물리적인 용어다. 불에 타서 더 이상 작동하지 않게 된 상태, 혹은 연료가 고갈된 상황을 의미했다. 이 단어가 심리적, 직업적 맥락에서 쓰이기 시작한 건 1970년대다. 미국의 심리학자 허버트 프루이덴버거(Herbert Freudenberger)가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관찰한 만성 피로, 무기력, 냉소적인 태도를 묘사하기 위해 처음 사용했다. 세계보건기구(WHO)도 번아웃을 "만성적인 직장 스트레스로 인한 신체적, 정신적 탈진 상태"라고 정의한다. 과거에는 특정 직군, 예를 들면 교사나 간호사, 예술가처럼 감정 노동 강도가 높은 사람들에게서 주로 나타나는 증상으로 여겨졌지만,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것 같다. ‘번아웃이 온 것 같다’ 라는 말을 주변에서 종종 듣게 된다. 그래서, 번아웃이라는 말은 지친다는 말보다 더 깊이 체감되는 피로의 표현처럼 들린다. 문제는 이 감정이 곧잘 개인의 무능이나 게으름으로 연결된다는 점이다. 일을 조금 줄이거나 쉰다고 생각하면, 이상한 죄책감이 따라붙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은 사치처럼 느껴지고, 재충전의 시간이라기보다 뒤처지는 듯 느껴진다. 일을 끝내고 남는 여가 시간에도 운동이나 자기계발, 부업 등 무언가 생산적인 일을 해야할 것 같은 마음이 드는 요즘 같은 시대엔 쉼은 종종 실패처럼 여겨진다. 아프다고 말할 용기보다 ‘힘들다’고 말할 용기가 더 필요하다. 하지만 지쳤다는 건, 애썼다는 증거가 아닐까. 무언가에 진심이었고, 꾸준히 임했고, 멈추지 않았기 때문에 탈진한 것이다. 그러니 번아웃은 무능의 결과가 아니라 열정적으로 일했다는 증거다. 오히려 아무런 애착도 없고, 아무런 욕심도 없던 사람은 번아웃을 겪지 않을 것이다. 타오른 적이 없던 사람은 꺼질 일도 없을테니까. 즉, 번아웃은 노력하지 않은 자에게는 오지 않는다. 번아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당신이 진심으로, 그리고 열정적으로 무언가에 몰두해왔다는 증거다. 때로는 지치고 힘들어 쓰러질 듯한 순간도 있겠지만, 그 속에서 자신을 더 깊이 들여다보고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하게 된다. 삶이란 원래 완벽하지 않으며, 흔들리고 무너지기도 하는 여정이다. 그 흔들림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성장하고 단단해진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있으랴. 마치 번아웃이 온 것 같이 힘들다면, 내 스스로가 더 이상 해낼 수 없다는 신호가 아니라, 열심히 흔들리고 있다는 자연스러운 징표일 수 있다. 내 안의 불꽃이 잠시 잦아들었을 뿐, 다시 살아날 수 있는 불씨는 우리 모두의 안에 있다. 그러니, 힘겨움 속에서도 스스로에게 조금 더 너그러워지길 바란다. 당신의 그 힘겨움과 고단함 역시 의미 있고 소중한 여정의 일부임을 잊지 말길 바란다.
이제 블록버스터의 시대는 끝이 났다. 천만 관객 운운은 쥬라기 월드 시대에나 가능한 꼴이 됐다. 물론 세계 영화계를 얘기하는 것, 특히 할리우드 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 시장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할리우드는 여전히 할리우드이며 유럽은 여전히 유럽이다. 그들의 극장 문화는 코로나19 이전으로 완벽하게 복귀했다. 한국만 여전히 코로나19 이전 때에 비해 시장을 50~60% 복구 선까지 밖에 회복하지 못했다. 1년 관객 수는 2019년 2억 2667만 명으로 최고점을 찍었으나 코로나 시기를 경유한 현재 올해 상반기는 4492만 명으로 나타났다. 이런 식이라면 올 한 해는 1억 명을 넘지 못하게 된다. 이건 꼭 국산 상업영화가 극심하게 부족해서만도 아니다. 국내 극장가에는 국산 영화로는 현재 ‘여름이 지나가면’ ‘봄밤’ 등 독립영화나 저예산 상업영화들로만 채워져 있다. 모두 5천 명 정도의 관객들을 모았다. 애초 규모의 경제학이 실현될 수 없다. 또 한편으로 흑묘백묘 전술도 안 먹히고 있다. 한국 영화가 안되면 할리우드 영화들이 잘돼 줘야 한다. 그런데 이제 그것도 되지 않는다. ‘F1 더 무비’는 국내 관객 143만 명 선에 그치고 있어 주연인 브래드 피트의 이름을 무색하게 하고 있고 ‘쥬라기 월드 : 새로운 시작’도 175만 명 선, ‘슈퍼맨’ 역시 아직 개봉 초기이긴 하지만 60만 명을 못 넘고 있다. 코로나 이전 때 같으면 첫 주 개봉 때 대체로 120~150만 명 선을 유지하던 게 할리우드 여름용 블록버스터들이었다. 이제 한국에서 그런 시절은 끝났다. 이렇게 된 데에는 코로나19가 아무리 치명적이었다 해도 그 모든 걸 차치하고 시장 사이즈가 너무 작기 때문이라는 구조적 문제가 한방에 시장을 휘청거리게 만든 셈이다. 5200만이라는 적은 인구에 극장 외에도 OTT, 프로야구, 팝스타 공연 등등 관심거리가 최고로 다양해진 시대이다. OTT 가입자 수는 넷플릭스만 대략 1200만으로 기록을 경신하고 있으며 월간 이용자 수는 1500만 명 선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프로야구 관중 수는 지난해 1천만을 넘겼다. 공연 역시 올 초 경기도 고양종합운동장에서 열린 콜드플레이 콘서트의 경우 6회 공연에 30만 명을 몰아갔다.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은 이제 극장을 가지 않는다. 자 어떻게 할 것인가. 극장용 영화와 비(非) 극장용 영화의 통합 정책으로 시장을 단일 사이즈로 가져가되 규모는 키우는 쪽으로 해야 한다. 상업영화의 경우 한국 시장으로는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는 만큼 해외시장을 겨냥한 기획이 이루어져야 한다. 예컨대 나홍진 감독이 마이클 패스벤더, 알리시아 비칸데르 등 할리우드 스타를 캐스팅해 750억 원짜리 영화를 제작 중인 것은 지나치게 위험해 보이긴 해도 누군가 시도는 해야 하는 일로 평가된다. 그 한편으로 독립영화, 예술영화는 정부 주도하에 꾸준히 그 문화를 지켜 내야 한다. 산업과 문화를 분리하는 것, 극장과 OTT의 매출을 통합하는 것, 거기서부터 문제의 해결을 시작해야 한다.
급격한 인구감소로 지방소멸을 우려하고 있는 지역들과 달리 화성특례시에서는 최근 빠른 인구 증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2023년에 인구 100만 명을 돌파, 특례시가 됐다. 나라살림연구소에서 최근 발간한 2015~2025년 전국 지자체 인구 및 예산 변화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화성시 인구는 11년 간 79.1%나 증가했다. 출생율은 수도권 평균 0.59명보다 높은 0.72명이나 된다. 지난해 화성시의 출생아 수는 7200명으로 전년도의 6714명보다 500명 가까이 늘어났다. 2년 연속 전국 기초지방정부 출생아 수 1위다. 일자리가 넉넉하고 살기가 좋으면 사람이 모이고 출산도 증가한다는 말은 맞았다. 화성시에는 대규모 산업단지와 크고 작은 기업들이 들어서면서 양질의 일자리가 창출되고 GTX-A, SRT 등 교통과 생활기반이 확충되고 있다. 화성시엔 경기도 기초지방정부 가운데 사업체 수가 가장 많다. 12만1189개나 된다.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남양연구소 등 대기업도 자리하고 있다. 제조업체 수 전국 1위, 지역 내 총생산(GRDP) 95조1507억 원(2022년 기준) 전국 1위다. 이 같은 인구 증가에 알맞은 행정 수요 확대가 필요하다. 이와 함께 지방의원도 확대돼야 한다는 것이 지방의회의 주장이다. 화성특례시의회의 경우 인구 증가와 행정 수요 확대에도 불구, 시의회의 의원 정수는 여전히 일반 기초지방정부 수준에 머물러 있어 의정 활동에 큰 제약이 있다며 의원 정수 확대를 골자로 한 제도 개선을 촉구하고 있다.(관련기사: 경기신문 14일자 8면 ‘화성시의회, 의원 정수 확대 촉구’) 화성시의회 의원 수는 25명이다. 화성시의회는 앞으로 최소 32명까지 증원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100만 명이 넘는 대도시임에도 여전히 일반 기초자치단체와 동일한 잣대를 적용받고 있다고 불만을 드러낸다. “인구 대비 의원 수가 가장 적은 편에 속하며, 시정 감시와 정책 대안을 마련하는 데 구조적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화성시의회는 “지방의회의 대표성과 민주적 정당성을 회복하고, 급격히 팽창하는 도시의 행정수요를 반영할 수 있는 유연성 확보를 위해 제도적 개선이 시급하다”고 밝혔다. 따라서 ▲인구 감소 지역에서 급성장 지역으로의 정수 이전 허용 ▲정량지표 기반 정수 배분 현실화 ▲국회 및 행안부 차원의 제도 정비 촉구 등 관련 법 개정을 요구했다. 오산시의회도 1991년 지방자치제 시행 당시 인구 6만7000여명이었지만 현재는 약 25만명으로 증가했는데도 여전히 기초의원 정수는 7명에 머물러 있다며 증원을 요구하고 있다. 오산시의회 이상복 의장은 지난 1월 14일 경기도시·군의회의장협의회 제175회 정례회의에서 ‘진정한 투표 가치 평등 실현을 위한 경기도 기초의원 정수 확대 건의의 건’을 제안했다. 경기도시·군의회의장협의회는 이를 만장일치로 채택하기도 했다. 협의회는 경기도 기초의원 1인당 평균 인구는 전국평균 1만6789명의 약 1.76배에 달하는 2만9569명이나 된다고 밝혔다. 심한 경우 기초의원 1인당 인구가 4배 가까이 차이를 보이고 있다면서 이러한 불균형은 투표 가치의 불평등을 심화시켜 경기도민의 헌법상 권리인 평등 선거권을 침해하고 있다고 반발했다. 의원수가 적으면 지역 현안문제를 충분히 논의하고 해결하지 못한다는 이들의 말에 공감한다. 민주적 대표성의 불균형도 발생할 수 있다. ‘지역 간 역차별’ ‘지방분권과 지방자치를 강화하려는 시대 흐름과 역행하는 처사’여서 기초의원 정수 확대 조정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목소리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러나 지방의회에 대한 비판과 함께 무용론이 제기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지방의원들의 반사회적 행위는 잊을 만하면 터져 나온다. 성 추문 사건, 폭행사건, 음주운전, 막말, 이권개입 등 비리와 일탈, 추문으로 바람 잘 날 없다. 이런 상황에서 지방의원을 늘리자는 주장이 국민들의 호응을 받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따라서 공감대를 확산시키기 위해서는 지방의원 스스로의 마음가짐과 처신을 올바로 해야 할 것이다.
오픈AI의 챗GPT가 세상에 나온 후 폭발적인 관심을 끌고 있으며 인공지능(AI)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글로벌 IT 산업의 화두는 AI이며, 오픈AI CEO인 샘 올트먼 등이 AI 기술 진보를 주도하고 있다. 글로벌 빅테크들은 인간 수준인 범용인공지능(AGI) 기술을 비롯해 인간을 초월하는 초인공지능(ASI) 또는 초지능(superintelligence) AI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노벨 물리학 수상자인 힌튼 교수는 “5∼20년 안에 초지능이 등장한다”라고 예측하였으며 올트먼과 함께 AI 기술 양대 산맥으로 알려진 구글 딥마인드 CEO 허사비스도 “인간 수준의 AI가 5∼10년 내 나타날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샘 올트먼은 “AGI는 트럼프 2기 중에 개발될 것이고, 딥러닝을 통해 초지능이 수천일 안에 나타날 수도 있다”라고 언급하였으며 초지능 기술 개발을 목표로 삼고 있다. 그는 “로봇이 로봇을 생산하는 시대가 될 것이다”라고 한다. 이 말은 AGI·ASI 기술을 장착한 휴머노이드 로봇이 사람을 대신하여 로봇 공장을 운영한다는 뜻이다. 인류 사회는 조만간 엄청난 파괴적 혁신을 보게 될 것이다. 소프트뱅크 회장인 손정의는 “10년 내 ASI가 온다. 인간보다 1만 배나 우수한 초지능 AI를 만들겠다”라면서 초지능 AI시대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오픈AI에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AI 반도체 업계 제왕인 엔비디아 젠슨 황은 향후 로봇과 자율주행차의 AI 반도체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AGI·ASI 기술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메타 CEO 마크 저커버그도 초지능 AI에 기업의 사활을 걸고 있다. 저커버그는 초지능연구소를 신설하였으며, AI 스타트업인 스케일AI 지분을 확보하고 창업자 알렉산더 왕을 영입하였다. 오픈AI를 대상으로 집중적인 AI 인재 영입작업을 벌인 끝에 올해 약 12명의 AI 전문가를 스카우트했다. 저커버그는 플랫폼 사업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기회를 찾아 초지능 AI 사업에 주력하려는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다. 올해 1월 CES 2025에서 엔비디아 젠슨 황이 피지컬 AI시대를 예고하였다. 첨단 AI 기술이 휴머노이드 로봇에 접목된다고 상상해보자. 공상과학 영화에서는 휴머노이드 로봇이 공장이나 일상생활에서 사람과 함께 공존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과거에는 “그러한 일이 가능할 것인가?”라고 의심했으나, 이제는 상상이 현실이 되는 세상이 되고 있다. 자율주행차도 획기적인 변화를 맞게 될 것이다. 구글은 딥마인드의 초지능 AI 기술을 활용하여 웨이모의 로보택시 기술 수준을 높일 것이며, 테슬라도 로보택시와 휴머노이드 로봇 옵티머스에 스타트업 xAI의 AGI·ASI 기술을 적용하여 ‘초지능 피지컬 AI 시대’의 주역이 되고자 할 것이다. 향후 우리 사회는 5차 산업혁명시대라는 새로운 혁신사회를 맞이하게 된다. 초지능 AI, 양자컴퓨터, AI 반도체 기술이 상호 시너지 작용을 일으켜 자율주행차, 휴머노이드 로봇, 우주산업 등 모든 산업에서 대변혁을 만들어 낼 것이다. 정부와 우리 기업들도 초지능 AI시대 준비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야 한다.
신화는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려는 가장 오래된 방식이다. 아직 과학이 도달하지 못한 시대, 인간은 자연과 삶의 고통을 이야기로 설명했다. 그 이야기 속에서 노동은 단순한 활동이 아니라, 신과 인간의 관계를 정의하는 중요한 행위로 등장한다. 노동은 신이 인간에게 내린 형벌이었을까, 아니면 인간이 신에게 도달하기 위한 수단이었을까? 가장 유명한 노동의 기원 신화는 성경 속 에덴동산 이야기다.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은 대가로 낙원에서 추방당하고, 흙을 일구며 땀 흘려 살아가야 했다. 노동은 신의 형벌이었고, 고통의 상징이었다. 고대 그리스에서도 판도라가 열어버린 상자에서 온갖 재앙과 함께 노동이 인간에게 주어졌다. 이 역시 인간의 욕망이 불러온 결과로서 노동은 벌이었다. 그러나 모든 신화가 노동을 고통으로만 묘사하지는 않았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신화에서는 신들이 지친 끝에 인간을 만들어 대신 노동하게 했고, 인간은 노동을 통해 신에게 제물을 바쳤다. 여기서 노동은 신과의 계약이자, 신성한 의무였다. 북유럽 신화의 토르 역시 번개와 천둥의 신이자 대장장이 신으로, 노동과 힘, 창조의 상징이었다. 이처럼 노동은 고통이면서도 창조이고, 저주이면서도 축복이었다. 노동의 이중성은 결국 인간 존재의 본질을 비춘다. 신들은 인간에게 노동을 부과했지만, 그 노동을 통해 인간은 문명을 세우고, 땅을 일구며, 예술을 창조했다. 고통스럽지만 의미 있는 일. 신들은 인간에게 고통을 주었지만, 그 안에 창조의 가능성을 숨겨두었다. 이는 곧 신화가 노동을 단순히 고통으로 그리지 않는 이유다. 신들은 인간에게 세계를 짓는 능력을 부여했고, 인간은 노동을 통해 자신만의 세계를 형성했다. 노동은 인간이 신으로부터 받은 형벌이자 축복이라는 이중적 메시지를 동시에 품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고대의 신화 속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의 삶 속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우리가 매일 아침 일어나 출근하고,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고, 서로 협력하며 살아가는 모든 행위가 이 오래된 이야기의 연장선 위에 있다. 현대 사회의 시스템은 진보했지만, 노동의 본질은 여전히 존재의 조건이자 삶의 기반으로 남아 있다. 노동은 인간에게 고통을 주었지만 동시에 자율성과 성취, 그리고 사회적 연대를 가능하게 했다. 신화 속 신들이 인간에게 던졌던 메시지는 단순한 교훈이 아니라, 인간이 세계 속에서 스스로의 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그렇기에 노동은 단순한 생계 활동이 아니라, 인간이 의미를 창조하는 방식이다. 우리는 일하며 살아가고, 살아 있기 때문에 일한다. 그것은 여전히 우리 안에 살아 있는 신화다. 노동을 둘러싼 신화는 결국 인간이 삶의 고통을 어떻게 해석해왔는지를 보여준다. 단순한 저주가 아니라, 인간이 존재의 의미를 만들어내는 창조의 무대. 신이 인간에게 던진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너는 무엇을 위해 일하는가?" 이 물음은 우리가 매일 맞이하는 새벽과도 같다. 우리는 또다시, 손을 들고 하루를 시작한다. 신화는 끝나지 않았다.
의대 증원에 반발하며 학교를 떠났던 의대생들이 전원 복귀를 선언해 길었던 의정갈등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의료시스템을 멍들인 골칫거리 갈등을 풀어낼 실마리가 떠올랐다는 점은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원칙을 저버린 극단행동에 결국 정부가 특혜로 해결책을 모색해서는 안 된다는 경계의 목소리도 명징하다. 무책임한 의정갈등이 빚어낸 국민적 손해는 실로 막대하다. 극심했던 의정갈등을 반면교사하여 의료개혁의 큰길을 닦아내길 기대한다. 대한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학생협회(의대협)가 전원 복귀를 선언한 데 대해 여론은 일단 긍정적이다. 의대협 측이 교육의 총량이나 질적인 측면에서 압축이나 날림 없이 제대로 교육을 받겠다고 한 대목도 당연한 태도로 받아들여진다. 의료공백이 한계에 달하고 있는 시점에 지긋지긋한 악순환을 끝내는 길은 시급히 열어야 할 발등에 떨어진 불이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투병하는 환자들과 가족들의 처지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이 문제를 둘러싼 국민적 갈망을 빙자하여 원칙을 지나치게 벗어난 해법 모색은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환자와 가족들의 눈물 어린 호소에도 불구하고 사태 악화에 일조한 의대생들에게는 최소한의 책임은 물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분명히 있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특히 동료·후배의 수업 복귀를 막기 위해 블랙리스트를 작성하거나, 복귀자에 대한 조롱과 비방을 서슴지 않았던 일도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탈들이다. 교육부와 대학은 일단 환영하면서도 적잖이 당혹한 모습이다. 의과대학은 지금처럼 수업 거부가 계속된다면 내년부터 24·25·26학번이 동시에 수업을 듣는 사상 초유의 ‘트리플링’을 피할 수 없게 된 상황이다. 하지만 2학기 복귀를 통한 학업 관리는 그리 간단치가 않다. 의대생들은 지난 5월 1만9457명 중 8305명이 유급, 46명이 제적 통보를 받았다. 아직은 이 중 3개 대학 853명만 유급이 확정됐다. 교육부와 대학 관계자들은 2학기 복학이 여의하다고 해도, 올해 학업을 마치기란 불가능하다는 분석을 내놓는다. 본과생은 연간 40주 이상의 전공 수업을 받아야 하는데, 당장 다음 주에 복학하더라도 내년 2월까지 32주밖에 남지 않은 상태인 까닭이다. 특혜 없이는 본과 4학년생이 올해 의사국가시험을 응시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기졸업자나 졸업예정자만 응시할 수 있는 올해 국시 응시 기간은 오는 21~25일로 목전에 다다랐다. 본과 4학년 학생들의 졸업 가능 여부와 국가시험 추가 응시 기회 제공 등은 복지부와의 협의도 필요하다. 기존 커리큘럼이 진행 중인상황에서 뒤늦게 복학하는 의대생들을 위해 대학이 교수와 공간을 특별히 제공해야 하는데, 과정과 학사 운영 부담이 여간 벅찬 게 아니다. 의대생들의 갑작스러운 ‘전원 복귀’ 선언이 여전히 의료체계의 마비를 걸고 특혜를 노린 겁박 의도의 소산이라면 문제는 달라진다. 대학의 유급 결정이 이어지자 이를 무효로 만들려는 시도가 아니냐는 일각의 의구심에 대해서는 분명한 규명이 필요하다. 물론 ‘의대생 전원 복귀’라는 변곡점을 잘 소화하여 피폐해진 의료체계를 하루빨리 정상화해낼 책무는 당연히 정부 당국과 정치권의 몫이다. 의정갈등이 빚어내고 있는 의료시스템 붕괴와 왜곡 현상으로 인해 국민 건강 균형은 피로도가 극에 달하면서 심각하게 어긋나 있는 게 사실이다. 효과적인 소통을 일궈내지 못한 채 정책을 줄곧 밀어붙인 전 정부의 무능이나 힘없는 환자를 볼모로 의사로서의 엄중한 사회적 책무를 내팽개친 무정한 의료인들이 빚어낸 ‘무책임한 갈등’을 아픈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어쨌든 의료개혁의 해야 할 것 아닌가. 세상의 모든 갈등을 오직 ‘남탓’으로만 덮어씌워 놓고 해법을 떠밀어대는 어리석음은 이제 끝내야 한다. 의료인들이 적극적으로 주도하여 직접 만든 의료개혁안이 온 국민의 지지를 받는 그 날이 오길 고대해 마지않는다. 의정갈등의 암담한 터널 속에서 불의의 질병을 앓다가 속절없이 스러져 간 수많은 국민의 삶을 긍휼과 반성의 눈으로 되돌아볼 시간이다.
미국에 사는 한 노파가 변호사에게 두 가지 유언을 했다. 첫째는 죽게 되면 화장할 것. 두 번째로는 유골은 반드시 뉴욕 맨해튼 최대 번화가에 뿌려줄 것이었다. 의아했던 변호사가 노파에게 물었다. “왜 하필이면 뉴욕 맨해튼입니까?” 노파는 말했다. “쇼핑을 좋아하는 내 딸들이 반드시 일주일에 두 번은 방문해 줄 것 같아서요.”라고. 사람도 나이 들어 동진강 폐선 같이 뻘 속에 처박혀 있는 듯하면, 한국이나 미국이나 관심 밖의 삶으로써 비루먹은 망아지 꼴이 되는가 싶다. 나는 해방둥이 세대로서 스스로의 심장을 펌프질하며 열광하는 삶을 살아야 할 이유가 분명했다. 그 힘으로 가정의 안정과 가족들을 건사했다. 열광하는 삶에서 한결같은 삶을 고집하며 살아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바쁠 것 없는 노인세대가 되었다. 미국 노파의 심정을 이해하고 넘어가야 할 남은 인생의 계절이다. 그래서인지 유머 같은 노파의 이야기가 울음보다 더 서글픈 정서의 현을 건드린다.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청년의 꼭지점에서는 우정에 대한 철학도 자못 심각했다. ‘대신 죽어줄 친구나 천하를 반분할 수 있는 우정의 도를 저울질하기도 했다. 공무원으로 취직하기 위해서는 신원조회가 필수였다. 그 당시 신원조회서 양식에는 친구 이름을 적도록 되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은 사회적 상식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좋은 친구가 될 노력보다 편하게 대해주는 친구가 좋다는 이기심도 컸다. 고향 친구가 좋다는 뿌리의식과 성취의 성향에 따른 길동무가 좋기도 했다. 나에게는 국립대학과 교육계에서 근무하던 가까운 친구가 있었다. 안정된 직장에서 세상사 따질 것 없이 살아가는 선한 친구들이었다. 그 친구들과 만나 술을 마시며 여행 일정도 잡아 함께 떠나 낯선 길 위의 시간을 공유하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내 몸과 정신에는 열정이 넘쳤다. 함께 술을 마실 때, 오늘은 2차 3차 갈지도 모르니 내 몸의 소화기관에 잘 부탁한다고 하면 그런대로 들어주었다. 그 무렵 친구들과 안골에 있는 ‘송아지’라는 음식점을 가끔 들렀다. 젊은 주인은 산을 좋아해 등산을 자주 한다고 했다. 나는 산악연맹 고문이었기에 그와의 대화는 반죽이 맞았다. 여름날 그 집에서 술을 마시게 되었을 때다. 말수 적은 친구가 내게 건배사를 하라고 했다. 갑작스러웠다. 머릿속 회전 속도를 죄며 생각해 보아도 멋진 건배사가 떠오르지 않았다. 옆에서는 젊은 아가씨가 우리에게 서빙을 하고 있었다. 생각 끝에 몇 가지 건배사에서 콕 찍어다 쓴다는 게 ‘마돈나’이었다. 내가 ‘마돈나’ 하면 함께 ‘마돈나’ 하자고 했다. 이어서 내가 선창을 하고 같이 술잔을 부딪치며 “마돈나”를 크게 외쳤다. 옆에 있던 아가씨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마시고 돈 내고 나가자는 뜻’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친구들과 함께 한바탕 크게 웃었다. 날씬한 몸매에 서글서글한 눈매의 아가씨는 명 건배사라고 하고서 웃음을 날리며 주방을 향해 걸어갔다. ‘마돈나’라고 하면 미국의 음악가요 배우로서의 마돈나(Madonna)가 떠오른다. 우리 시대의 젊음을 고스란히 껴안아 섹시하게 느껴졌던 여인이다. 그래서 나는 잊어먹지 않고 기회가 오면 마돈나를 선창하곤 한다. 건배사는 ‘하늘 건(乾)’, ‘마를 건’으로서 술잔을 쉽게 비우자는 뜻이다. 조선시대 선비들도 원 샷을 즐겼다고 하는 것을 보면, 술 마시는 분위기도 시원시원한 모습이 좋았던 것 같다. 건배사는 분위기를 모아 주석의 흥을 돋우는 아나운서의 멘트 같은 것으로 자축의 뜻이 크다. 그런데 보통 술자리에서는 그 순간의 기분을 살려 사양하지 말고 즐겁게 마시자는 의미가 우선이다. 그래서일까. 젊은 층에서는 ‘마취제’ (마시고 취하는 게 제일이다)라는 건배사를 많이 쓰고, 중국의 건배사에는 ‘우정이 깊으면 링거 맞는 것도 두려워하지 말고 마셔’라는 건배사가 있다고 한다. ‘인생이 쓰면 술이 달다.’는 말이 있다. 이제는 가슴 뛰는 즐거움도, 내일 죽어도 오케이 하면서 술 마실 일도, 체력도, 주변사람도 없다. 세상도 사회도 미국의 노파 같이 외롭고 건조할 뿐이다. 그래도 마음만은 친구들과 즐거운 마음으로 술 한 잔 마시며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을’ 노래하면서, ‘푸른 건배사’로써 힘껏 “마돈나!”를 외치고 싶다. 이 더위에 건배사라도 푸르고 희망찬 기운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6월은 계절의 경계에 선다. 봄은 자취를 감추고 여름의 숨결이 서서히 일상을 감싼다. 햇살은 짙어지고 공기는 점점 무거워진다. 예로부터 사람들은 무더위를 이겨내기 위한 자신만의 지혜를 찾아왔다. 그중 하나가 바로 술이다. 단지 취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계절을 건너는 한 방식으로서의 술. 바로 과하주(過夏酒)다. 과하주는 이름 그대로 ‘여름을 지나기 위한 술’이다. 1418년 '조선왕조실록'에 처음 등장하며, 조선시대 양반가에서는 주로 5월 무렵 담가 초여름부터 마셨다. 높은 온도에서도 상하지 않도록, 발효주에 증류주인 소주를 더해 보존성을 높였다. 그 풍미는 더위에 지친 몸과 마음에 묵직한 안정을 주었다. 무더위를 이겨내는 데 중요한 건 단순한 시원함이 아니라, 어쩌면 그런 ‘깊이’였는지도 모른다. 맛은 한마디로 깊고 조화롭다. 구수한 곡물 향이 먼저 퍼지고, 뒤이어 진한 단맛과 은은한 산미가 느껴진다. 차가움으로 혀를 자극하기보다, 온전한 발효가 주는 풍미로 입안을 부드럽게 감싼다. 특히 간장이나 된장 같은 짭조름한 장맛과 잘 어울려, 여름철 보리밥이나 찌개류와 곁들이면 더욱 궁합이 좋다. 고문헌에서나 찾아볼 수 있었던 과하주를 지금은 몇몇 양조장에서 전통 방식을 되살려 그 깊은 맛을 이어가고 있다. 느리고 정성스러운 발효가 필요한 술인 만큼, 그 풍미는 현대인의 입맛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빠르게 흘러가는 계절 속에서 잠시 멈추어, 과거의 ‘슬로우 라이프’를 음미하게 해주는 술이다. 대표적인 과하주로는 화양의 ‘풍정사계 하’, 술아원의 ‘경성과하주’, 지시울의 ‘화전일취 백화’, 한통술의 ‘과하주 힙 스칼렛’, 객제의 ‘감탄주’, 국순당의 ‘백세주과하’, 제이앤제이브루어리의 ‘청혼골드’, 노금주가의 ‘일지춘과하주’, 한영석발효연구소의 ‘여해과하주’ 등이 있다. 여름은 누구에게나 버겁다. 햇살이 지나치게 강하거나 숨 막히는 밤이 계속될 때, 시원한 맥주 대신 서늘하게 식힌 과하주 한 잔을 택해보자. 입술에 닿는 순간, 조선의 여름을 건너던 선인들의 지혜가 고요히 스며든다. 과하주는 단지 마시는 술이 아니라, 계절을 견디는 지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