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시간은 멀게 느껴지다가도 때로는 바로 눈앞의 장면처럼 또렷하게 떠오른다. 30년 전 한의과대학에 합격했던 순간도 그렇다. 향우회 선배의 소개로 고향에서 개원 중이던 대선배를 찾아뵙고 식사를 함께한 자리에서 선배는 한의학 책을 건네주셨다. “내 동기가 쓴 책이야.”라며 건넨 책 가운데 한 권의 제목은 ‘음양이 뭐지’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책은 설명이라기보다 질문에 가까웠던 것 같다. 서양 과학과 논리에 익숙했던 나에게 음양이라는 개념은 낯설고 막연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공부를 이어가면서 그 의미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고 점차 생생한 개념으로 다가왔다. 그럼에도 진료실에서 환자에게 설명하려 하면 처음 이 개념을 접했을 때의 낯섦이 떠올라, 어떻게 하면 더 쉽게 전달할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된다. 음양이라는 말은 해가 비치는 언덕의 밝은 쪽을 양, 그늘진 반대편을 음이라 부른 데서 시작되었다. 밝은 쪽이 생기면 자연히 그늘이 생기듯 이 개념에는 상대성이 담겨 있다. 낮과 밤이 교대로 오고 계절이 순환하듯 자연은 늘 두 흐름 속에서 움직인다. ‘주역(周易)’에서는 이를 두고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라 했다. 한 번 음이 되고 한 번 양이 되는 그 끊임없는 변화의 움직임 자체가 곧 대자연의 질서이자 도(道)라는 뜻이다. 한의학에서는 이러한 조화로운 동적 평형이 유지되는 상태를 건강이라 본다. 최근의 생리학 연구들은 음양을 인체 조절 시스템의 항상성(Homeostasis)이라는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있다. 특히 신경-내분비-면역(NEI) 네트워크 연구는 이를 잘 보여준다. 우리 몸의 뇌와 호르몬, 면역계는 독립된 기관이 아니라 서로 긴밀하게 신호를 주고받으며 하나의 통합된 조절 시스템으로 작동한다. 예를 들어 외부의 위협이나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을 때 교감신경이 활성화되는 것은 ‘양’의 급격한 항진으로 볼 수 있다. 이때 분비되는 아드레날린과 코르티솔 같은 호르몬은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에너지를 집중시키지만, 이러한 상태가 장기화되면 면역 기능을 억제하고 만성적인 염증 반응을 유발할 수 있다. 반대로 충분한 휴식과 이완을 담당하는 부교감신경의 활성화는 ‘음’의 보충과 회복에 해당한다. 결국 음양의 조화란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 활동과 휴식, 염증과 항염 반응이 균형을 이루며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해 가는 생리적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임상에서 만나는 많은 환자들은 검사상 뚜렷한 이상이 없는 기능저하 상태를 나타낸다. 피로와 불면, 소화불량, 통증을 호소한다. 오랜 스트레스와 긴장 속에서 자율신경과 호르몬, 면역 조절의 균형이 흔들린 경우가 많다. 이런 상황에서 치료는 과잉된 양을 덜고 음을 회복한다. 단순히 증상을 없애는 데 그치지 않고 몸이 스스로 균형을 회복하도록 돕는 과정이 된다. 충분한 수면과 휴식, 규칙적인 생활, 호흡과 이완 같은 기본적인 회복 과정이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황제내경’에서는 음양을 천지의 도이자 만물을 다스리는 근본이라고 말한다. 음양은 서로 다른 힘이 균형을 이루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동적 평형을 보이는 자연의 상태를 표현하는 개념이다. 진정한 건강이란 더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몸이 원래 가지고 있던 조화와 균형을 회복하는 것이 아닐까. 이 오래된 지혜는 지금도 여전히 살아 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2부(류경진 부장판사)는 지난 12일 오후 12·3 내란 중요임무에 종사하고 특정 언론사 단전·단수 지시를 전달한 혐의 등을 받는 이상민 전 행정안전부 장관에 대해 징역 7년을 선고했다. 판결 직후 이상민은 변호사와 주변 사람에게 빙긋 미소를 지어보였다. 징역7년에 웃음을 보인 그는 이번 재판의 승리자였다. 그의 미소가 증거하듯 지금 대한민국의 내란재판은 표류하고 있다. 같은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7부 우인성 부장판사는 김건희 씨의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자본시장법 위반) 및 무상 여론조사 수수(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를 무죄로 판단했다. 창원지법 형사4부 김인택 부장판사는 정치 브로커 명태균 씨와 국민의힘 김영선 전 의원의 '세비 반띵'(정치자금법 위반) 혐의에 마찬가지로 무죄를 때렸다. 내란재판은 아니지만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 오세용 부장판사는 곽상도 전 국민의힘 의원의 뇌물 50억원 은닉(범죄수익은닉규제법 위반) 및 아들 곽병채 씨의 '퇴직금' 명목 50억 원 수수(특가법상 뇌물) 혐의에 대해 각각 공소기각과 무죄 판결을 내렸다. 곽상도 역시 활짝 웃고 있었다. 대한민국의 재판이 바야흐로 뽑기가 되어가고 있다. 같은 내란주요임무종사자인 한덕수 전총리는 23년 형을 받은 반면 이상민은 7년 형을 받았다. 심지어 이상민은 박성재(전 외교부장관)와 더불어 구속영장이 기각되어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았다. 어떤 판사가 배정되는가에 따라 구속, 불구속이 갈리고 판결은 춤을 춘다. 대한민국 대법원 앞에는 왼손에는 법전을, 오른손에는 저울을 들고 눈을 부릅뜬 여신상이 세워져 있다. 일반적으로 서구에서 사법부의 상징으로 세우는 정의의 여신 디케(Dike)는 눈을 가린채 왼손에는 칼을, 오른손에는 저울을 들고 있다. 지위나 재물 등 보이는 것에 현혹되지 말고 치우침 없이 칼같이 단호하게 정의를 실현하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디케의 눈가리개를 벗긴 대한민국 사법부는 온갖 기득권카르텔의 눈치와 이해관계에 휘둘릴 수밖에 없다. 그러니 여신이 들고 있는 책은 법전이 아니라 청탁인명부나 뇌물장부일 것이라는 추측도 과장이 아니다. 역사학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그리스 헤로도토스는 저서 ‘역사’에서 BC500년 경 페르시아 캄비세스2세의 재판에 대해 다루고 있다. 당시 황실판관이었던 시삼네스가 뇌물을 받고 부정한 재판을 거듭했던 모양이다. 시삼네스는 부자가 되어 호화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지만 억울한 사람들이 늘어갔다. 이를 알게 된 캄비세스2세는 가장 가혹한 형벌인 산사람의 껍질을 벗기는 형벌을 시삼네스에게 내리고 벗긴 가죽을 재판관 의자에 깔도록 명령했다. 덧보태 캄비세스2세는 이 의자에 앉을 새 재판관으로 시삼네스의 아들인 오타네스를 임명했다고 한다. 날마다 아버지의 가죽을 귀감으로 삼아 공정한 재판을 하라는 추상같은 지침이었다. 19일 판결이 예정된 윤석열 재판은 룸살롱접대와 ‘봉숭아학당 재판’으로 유명한 지귀연판사가 맡고 있다. “김영선이 좀 해줘라”라는 대통령의 전화음성도 알아듣지 못하고 증거부족이라며 무죄를 때리는 판사가 즐비한 대한민국 사법부, 이럴 바에는 차라리 모든 재판을 최첨단의 AI에게 맡기는 것이 더 현명하지 않을까? 그러면 AI시대정신에 부합함과 아울러 최소한 지금보다는 양질의 판결을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어제의 범죄를 벌하지 않음은 내일의 범죄에 용기를 준다. 공화국 프랑스는 관용으로 건설되지 않는다”는 알베르까뮈의 외침을 다시 새긴다.
국가 경제는 제조업 성과에 달려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제조업은 국가경쟁력의 핵심 기반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제조업은 국내총생산(GDP)의 약 30%를 차지한다. 이처럼 제조업은 국가 경제의 근간이자 일자리 창출의 원천이다. 하지만 최근 제조업은 저성장·노동력 부족·기술 경쟁 심화 등 여러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제조업의 근원은 뿌리산업이다. 한데 중국 뿌리산업의 높은 경쟁력 및 젊은 층의 기피 등으로 위기에 처해 있다. ‘뿌리 기술’이란 주조(鑄造), 금형, 소성가공, 용접, 표면처리, 열처리 등 제조업의 전반에 걸쳐 활용되는 공정 기술로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기술을 말한다. "뿌리산업은 이 같은 뿌리 기술을 활용해 사업을 영위하는 업종이거나 뿌리 기술에 활용되는 장비 제조업종으로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업종을 말한다. 기초적인 제조업을 의미한다. KPIC(국가뿌리산업진흥센터)에서 정의된 뿌리산업으로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자동차, 조선, 정보통신(IT) 등 국가기간산업인 주력 제조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기초산업으로 주조, 금형, 소성가공, 용접, 표면처리, 열처리가 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산업을 떠받치고 있는 주요 분야는 제조업이다. 모두가 잘 아는 삼성, 현대그룹, SK, LG, 두산 등의 대기업들도 모회사를 모두 제조업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대기업에서 만드는 완제품들은 모두 기초적인 부품이 필요하다. 이때, 중간 단계의 제품을 생산하는 산업들이 뿌리산업이라고 할 수 있다. 자동차·조선·반도체와 같은 기존 국내 주력산업뿐만 아니라, 사물인터넷·로봇·에너지·환경 등 미래 신산업의 기술력을 뒷받침하는 기반 산업인 것이다. 문제가 적잖다. 대부분의 강소기업 이상의 회사들은 막대한 매출을 보이며 산업을 선도하는 반면 중소기업들은 다단계 하청 문제가 있다. 대기업에 납품해도 거의 본전치기하는 경우가 많고, 경기가 변동하면 적자 나는 경우가 있다. 그 탓에 월급도 적고, 근무환경도 좋지 못하다. 정부는 이에 뿌리산업 범위를 10년 만에 전면 개편하고 뿌리 기업을 3만 개에서 9만 개로 확대하는 등 적극적인 지원에 나서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국정현안점검조정회의에서 ‘뿌리 4.0 경쟁력 강화 마스터플랜’을 확정·발표하기도 했다. 뿌리 소재 범위를 금속을 포함해 플라스틱, 고무, 펄프 등 6개로 늘릴 예정이다. 부품 장비를 만들 때 소재 가공기술인 뿌리 기술은 6개에서 사출·프레스, 3D 프린팅 등 14개로 확대된다. '뿌리산업 진흥법’을 전면 개정, ‘차세대 뿌리산업진흥법’으로 제명을 변경하고 뿌리산업 범위, 뿌리산업 발전위원회 확대, 금융지원 등의 근거를 마련된다. 그러나 상기와 같은 지원에도 불구하고 청년들에게 뿌리산업은 고생하고 월급은 적고, 앞으로도 적을 그저 그런 직업군이 모인 분류로써 이미지를 탈피하는 게 긴요하다. 마침 인천광역시가 뿌리산업 포럼을 개최해 주목되고 있다. ‘우리는 왜 인천 뿌리산업을 위기라고 불러왔는가’를 주제로 한 실태조사 결과를 토대로 인천 뿌리산업의 산업 구조와 변화 가능성을 분석해 대안을 제시한 것은 뜻깊다. 또한 ‘청년 뿌리 기업 재직자의 직장 만족과 이직’을 주제로 청년 근로자의 직무 만족도와 이직 요인을 분석하고, 일자리 여건 개선과 인력 유입을 위한 정책적 시사점을 제시해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뿌리산업을 단순히 ‘위기 산업’으로 바라보는 인식을 넘어, 객관적인 실태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산업과 일자리의 가능성을 함께 논의한 자리라는 측면에서 인천형 뿌리산업 육성과 청년 일자리 창출에 크게 기대되고 있다. 인천시는 현장 기반 실태조사와 정책 소통을 지속 강화해 지역 뿌리산업의 경쟁력을 높이고 지속가능한 양질의 일자리 창출에 힘쓰길 당부한다. 나아가 미래지향적 친환경 신사업에서 제조업의 대안을 찾아야 한다. 여타 시·도 또한 제조업은 경쟁력 있는 우리 산업의 뿌리이자 미래 먹거리의 원천임을 재인식할 때다.
우연찮은 기회에 다카이치가 이끄는 자민당이 중의원을 뽑는 총선에서 단독으로 과반 233석을 훨씬 뛰어넘는 압도적인 의석수(316석)를 차지하며 압승을 거둘 때 도쿄에 체류했다. 날이 많이 흐렸고 진눈깨비가 내리다가 폭설의 분위기가 감돌았다. 세상은 고요했다. 에노시마 기차역 슬램 덩크 관광지에는 푸릇한 한국 청춘들이 몰려들었다. 다카이치든 자민당이든, 중도당이든, 공명당이든 일본 사람들은 정치에 무심해 보였다. 하루 이틀 머물다 스쳐 가는 사람처럼 일본 국민은 정치는 정치, 민생은 민생이라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카사카에 있는 방송국 TBS 앞에는 공산당 깃발을 꽂은 유세차 위에서 초로의 여성 당원이 목소리를 높여 뭔가를 얘기하고 있었다. 빌보드 팻말에는 부자증세라 쓰여있었다. 도쿄를 안내했던 영화 관계자 지인이 말했다. “들어 보면 일본 공산당 친구들이 가장 정확한 얘기를 해요. 똑똑한 애들은 역시 좌파이긴 해요.” 다카이치가 이겼으니 센카쿠 분쟁 문제니, 쿠릴 열도 반환 문제를 둘러싼 정책이 바뀔 것이다. 성향이 공격적이니만큼 자국 중심주의를 내세우며 군사력을 강화할 것이다. 자위대 설치와 운용범위에 관한 법률을 바꾸고 무엇보다 평화헌법이란 미명으로 대외 공격을 감행할 수 있는 군사법안을 마련할 것이다. 한국과 관련해서는 독도 이슈, 그들로서는 다케시마 이슈에 불을 붙일 수도 있을 것이나 많은 언론은 다카이치가 거기까지 무리수를 두지는 않을 것이라고 내다 보고 있다. 일본에서 30년 가까이 사는 친구는 종종 그의 일본인 친구와 독도-다케시마 문제로 언쟁 아닌 언쟁을 벌인다고 한다. 사실 한일 친구들은 아예 이 문제를 대화의 주제로 꺼내는 것을 극력 피한다고 한다. 그럼에도 만약 얘기가 나올 때를 대비해 그가 알려준 대처방안에 무릎을 쳤다. 일본 거주 30년째 한국인은 순수 일본인에게 “너희들은 다케시마 문제로 어디까지 갈 수 있느냐?”고 묻는다는 것이다. 대체로 일본인들은 이 질문에 쭈뼛거리기가 십상인데 거기에 이렇게 답을 던져주면 더 이상 얘기를 이어가지 않게 된다고 한다. “우리? 한국 사람은 독도 문제로 전쟁도 불사할걸? 너희들은 독도를 사이에 놓고 우리와 전쟁을 벌일 수 있어? 감당할 수 있겠어?”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이런저런 영화들이 있다. 송원근 감독의 <김복동>(2019)이 대표적이다. 조금 멀게는 변영주 감독의 <낮은 목소리 – 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1995)이 있다. 30년 가까이 적어도 영화는 공정한 역사관, 올바른 여성관을 세우고, 가르쳐 오고, 전파하려 노력해 왔다. 그런데 윤석열 집권 이후 뉴라이트들이 번식하고 번성하면서 위안부 할머니 문제 역시 매춘부라 공격하고 매도하는 천박한 극우들이 판치고 있다. <봉오동 전투>(2019)도 만들고 <밀정>(2016)도 만들며 영화는 독립운동의 가치를 드높이려 했지만 밀정보다 못한 친일주의자들은 홍범도 흉상을 철거하려 했고 한국의 독립이 운동의 내적 동인에 의해서라기보다 외세의 지원에 의한 해방이라고 폄하해왔다. 이런 자들은 다카이치의 압승에 축하주를 들고 있을까. 이런 자들은 일본의 재 무장화를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그들에게 묻는 말은 똑같은 것이다. 당신들은 독도 문제를 사이에 두고 다카이치 파와 어디까지 갈 수 있을 것인가. 전쟁도 불사할 수 있을 것인가. 과연 그럴 수 있을 것인가. 적어도 몇 편의 영화만이라도 보기를 바란다. 영화에서라도 애국을 배우고 일본의 진위, 실체, 좋은 점과 나쁜 점을 구분하고 배우기를 바란다. 이상 일본에서 목격한 자민당 압승의 단상.
1월 30일 교육부가 발표한 ‘2026년 민주시민교육 추진계획’의 핵심은 ‘학생들이 헌법 가치와 원리를 이해하고 삶과 연계하여 실천할 수 있도록 학교 현장의 헌법교육을 강화’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는 그동안 우리 교육과정에서 헌법교육을 도외시해왔다는 사실의 방증이기도 하다. 내 경우를 봐도 초·중·고는 물론 대학 시절에도 헌법을 제대로 본 적 없이 사회에 진출했다. 특별히 대학에서 헌법을 전공하지 않으면 우리나라 교육과정에서 헌법의 한 줄도 볼 기회가 없는 것이 일반적 현실이다. 2월 10일 <MBC PD수첩 – 통일교와 공모자들> 편에 드러난 가평군의 전·현직 군수, 정치인들의 모습은 그런 탈헌법적 현실이 만든 우리들의 일그러진 자화상이었다. 헌법과는 무관한 부끄럽고 안타까운 모습들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헌법의 빈틈으로 사이비가 파고들었다. 가평군민으로서 옆에서 지켜본 통일교의 활동은 전방위적이다. 군민들의 생업, 여가, 교육 등 일상의 다양한 영역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물이 스며들 듯 침투한다. 가정, 사랑, 평화 등 보편적이고 희망적인 표현을 사용하며 건강하고 상식적인 가치관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현혹한다. 그 와중에 주민들에게 표를 받아야 하는 정치인들은 헌법적 가치에 입각한 실천을 하기보다는, 그 현혹된 주민의 환심을 사려는 행태를 보이며, 오히려 주민을 현혹하는 데 앞장섰다. 이런 상황에서 교육부의 계획 발표 이후 국민의힘 수석대변인은 "청소년 정치 참여 확대라는 순기능보다 자칫 교실이 정치판으로 변질될 가능성은 심히 우려스러운 부분"이라는 논평을 냈다. 헌법교육 또한 정쟁의 대상이 되는 현실이 안타깝다. 최근 <시사인>과 청소년 독립언론 <토끼풀>이 수도권 30명의 학생을 심층 인터뷰한 결과, 학교에서 정치 이야기를 나눠 본 학생은 단 한 명뿐이었다. 그 비어 있는 정치 토론 환경을 메꾸는 것은 극우적인 정치 밈과 괴담들이었다. 그것들은 특히 2024년 12월 3일 윤석열의 내란 이후 본격적으로 유행되었다고 한다. 보수를 참칭한 윤석열 사이비가 역시 헌법의 공백을 파고든 것이다. 헌법을 가르치지 않는 공화국은 모래성과 같다. 우리가 탄핵당할 수준의 대통령을 뽑고, 극우와 팬덤 정치가 득세하는 것이 그 증거다. 민주공화국의 주민들이 교실과 일상에서 사이비보다 헌법을 가깝게 느끼고 내면화할 수 있도록 민주시민교육이 잘 추진되길 바란다. 이번 글로 2023년 12월부터 써 온 ‘촌스러운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23편의 글을 통해 나의 ‘촌스러움’이 기존의 ‘촌스러움’의 의미가 아님을 독자들께서 이해하셨으리라고 생각한다. 한 줄로 질주하던 무리가 뒤를 돌아 반대 방향으로 가게 되면 선두와 꼴찌의 처지가 뒤바뀐다. 도시화, 산업화로 질주하던 무리의 앞에 지역소멸과 기후재앙이 자리 잡고 있다. 그래도 계속 죽음의 길로 질주하고 있다. 이제 뒤를 돌아 살림의 발향으로 가길 간절히 바란다. 그 절박한 마음으로 뒤로 돌아가는 담대한 전환을 위해 나는 이번 지방선거에 가평군수로 출마한다. 대의제 중앙집권이 아닌 직접민주 지역자치의 깃발을 들고 신당을 창당하며 출마한다. 이제 가평군에서 펼쳐지는 촌스러운 이야기를 독자들이 뉴스로 보실 수 있는 실천을 할 것이다. 그동안 나의 부족한 글을 읽어주신 독자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6·3 지방선거가 불과 110일 남았다. 과거 이 시기에 각 정당은 경쟁적으로 인재도 발굴하고 국민친화적 정책도 발표했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유권자에게 더 다가가기 위해 경쟁하는 모습은 낯익은 장면이었다. 그러나 제1야당 국민의 힘의 최근 모습을 보면 많이 낯설다. 설 연휴를 앞두고 민생은 나아지지 않고 있고 대외 경제 불확실성은 가중되고 있는데, 국힘은 오로지 ‘누가 누구를 징계하고, 누가 공천권을 쥐느냐’는 권력 투쟁에만 매몰되어 있는 탓이다. 현재 국힘은 당권파와 비당권파의 ‘정치적 내전’ 상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 갈등의 핵심은 당 지도부와 이른바 ‘친한계’ 사이의 전면전이다. 한동훈 전 대표의 제명 사태 이후 당내 분열은 봉합되기는커녕 중앙당과 서울시당 간의 ‘징계 전쟁’으로 번졌다. 지난 1월 말 보수 유튜버 고성국씨의 ‘전두환 존영 게시’ 발언으로 촉발된 설화(舌禍)는 친한계의 징계 요구로 이어졌고, 이에 맞서 당권파는 배현진 의원의 성명 발표 과정을 문제 삼아 중앙당 윤리위 제소라는 맞불을 놨다. 결국 서울시당은 고 씨에게 ‘탈당 권유’를, 중앙당 윤리위는 배 의원을 소환 조사하는 이른바 ‘징계 대전’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공당의 윤리 기구가 정적 제거를 위한 계파 보복의 수단으로 전락하고, 당의 중심을 잡아야 할 지도부와 수도권 전열을 정비해야 할 서울시당이 서로를 ‘적’으로 규정하고 숙청의 칼날을 휘두르는 모습은 목불인견이다. 여기에 오세훈 서울시장까지 가세해 장동혁 대표의 사퇴를 압박하며 갈등의 전선은 더욱 복잡해지고 있다. 특히 당 지도부가 인구 50만 명 이상 대도시의 기초단체장 공천권을 중앙당이 행사하겠다는 당헌·당규 개정을 추진하면서 폭발한 ‘공천권 사유화’ 논란은 이번 갈등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지방선거를 코앞에 두고 지방분권과 정당 민주주의라는 가치는 실종된 채 오로지 당권 장악을 위해 공천권을 무기화하려는 장동혁 대표의 속내를 드러낸 것이다. 제1야당 이렇게 내부 권력 쟁탈전에 골몰하는 동안 국민의 삶은 방치되고 있다. 최근 트럼프 대통령은 대한민국 국회에서 관세협상 비준을 미루고 있다며 25%관세 환원을 하겠다며 압박하고 있다. 정부와 산업계는 비상이 걸렸고, 글로벌 반도체 성지인 경기도 도민들은 위기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다. 국정 운영의 한 축인 야당이라면 마땅히 정부와 머리를 맞대고 통상 전략을 점검하며 정부를 압박해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 그러나 지금 국힘에서는 ‘민생’이나 ‘경제’라는 단어는 계파 간의 비난을 위한 수사(修辭)로만 쓰일 뿐이다. 국힘 지지율이 20%대로 추락한지 수 개월째다. 당 지도부가 반대파를 몰아내는 데만 열을 올린다면, 중도층 이탈은 막을 수 없을뿐더러 보수층의 외면도 피하기 어렵다. 당연히 그 결과는 지방선거 참배로 이어질 것이다. 과거 보수 정당이 오만과 독선에 빠져 공천 갈등을 빚을 때마다 국민이 어떤 심판을 내렸는지 회상해 보기 바란다. 국힘은 지금이라도 소모적인 ‘징계 정치’와 공천권 다툼을 즉각 중단하고 지방선거를 앞둔 정당의 모습으로 돌아와야 한다. 이재명 정부의 부족한 점을 찾아내 책임있게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윤어게인 세력이 아니라 합리적인 보수 인사들을 선거의 전면에 내세워 국민과 소통하는 지방선거를 준비해야 한다. 지도부는 당내 다양성을 인정하고 소통하는 포용적 리더십을 보여야 하며, 각 계파는 당의 존립 자체가 위태롭다는 위기의식을 공유해야 한다. 지방선거는 당권파의 세력을 확장하는 도구가 아니라, 지역 주민의 삶을 책임질 일꾼을 뽑는 축제의 장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정치는 국민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이지, 국민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이 아니다. 제1야당이 민생이라는 본분을 잊고 권력 투쟁에만 몰두한다면 결국 국민이 결정하는 엄중한 심판대에서 자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국민의힘은 ‘자멸의 길’로 갈 것인지, ‘국민과 동행하는 길’로 갈 것인지 이제 결단해야 한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경기도는 11일부터 오는 3월 10일까지 도내 8개 시,군을 대상으로 평화경제특구 후보지 공개모집을 진행하고 있다. 이번 공모는 단순한 지역개발 사업이 아니다. 접경지역이라는 이유로 수십 년간 감내해 온 안보 부담과 구조적 제약에 대해서 국가가 어떤 방식으로 응답할 것인지를 가늠하는 중요한 정책적 분기점인 만큼, 이 질문에 앞서 포천은 더 이상 뒤로 밀려나서는 안된다. 포천은 법적으로 수도권에 속해 있으며. 수도권정비계획법에 따른 각종 규제는 예외 없이 적용돼 왔다. 그러나 산업 인프라, 인구 유입, 재정 여건, 도시 기능 어느 하나 수도권다운 혜택을 온전히 누려본 적은 없다. 군사시설 보호구역, 사격장과 훈련장, 반복되는 소음과 진동, 출입 통제와 토지 이용 제한은 포천 시민의 일상이었다. 국가는 안보를 이유로 포천의 발전 가능성을 제약해 왔고, 포천은 그 제약을 오랜 시간 감내해 왔다. 이제는 분명히 짚어야 한다. 안보를 위해 희생이 요구되었다면, 그에 대한 보상 역시 국가의 책임이라는 점이다. 같은 접경지역으로 분류되고, 이번 평화경제특구 후보지 대상으로 거론되고 있는 고양,파주,김포,양주와 포천의 현실은 분명히 다르다. 이들 도시는 이미 자족 기능을 갖춘 성장 궤도에 올라섰고, 산업과 인구, 도시 인프라 면에서 포천과는 다른 단계에 도달해 있다. 접경이라는 행정적 분류만으로 모든 지역을 동일선상에 놓고 정책을 설계하는 것은 형평이 아니다. 국가 전략사업은 가장 절실한 곳에 우선 배치되어야 하며, 평화경제특구 역시 그 원칙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 특히 이번 평화경제특구 지정과 관련해서는, 현재 우리 시가 유치 노력을 경주하고 있는 기회발전특구와의 정책적 연계를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기회발전특구는 기업의 이전과 대규모 투자를 유도하기 위해 세제 감면, 재정 지원, 규제 특례, 정주 여건 개선 등을 종합적으로 제공하는 제도로, 우리 시 역시 이를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삼기 위해 지속적인 준비와 노력을 이어가고 있다. 이러한 기회발전특구와 평화경제특구가 함께 지정된다면, 정책 효과는 단순한 합이 아니라 상호 증폭되는 시너지로 나타날 수 있다. 평화경제특구가 접경지역의 안보,평화,경제를 결합한 국가 전략 공간을 제시하는 제도라면, 기회발전특구는 그 공간 안으로 기업과 자본을 실제로 유입시키는 강력한 실행 장치가 된다. 두 특구가 결합될 경우, 포천은 국가 전략사업의 실증과 사업화, 산업 집적과 일자리 창출이 동시에 이뤄지는 핵심 거점으로 도약할 수 있다. 이는 접경지역 정책이 선언을 넘어 실질적인 성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 포천은 이미 군사,안보 인프라가 도시 전반에 내재된 지역이다. 이를 규제의 대상으로만 둘 것이 아니라, 방위산업과 안보 기술, 드론·로봇, 재난·안전 분야 등 첨단 산업의 실증과 제조, 인력 양성이 집적되는 공간으로 전환해야 한다. 여기에 평화경제특구의 정책적 틀과 기회발전특구의 투자 유인책이 함께 작동한다면, 접경지역의 구조적 한계를 기회로 전환하는 선순환 구조를 구축할 수 있다. 이는 포천만을 위한 선택이 아니라, 수도권 과밀 해소와 접경지역 안정이라는 국가적 과제를 동시에 해결하는 합리적인 전략이기도 하다. 이와 더불어 경기도는 이번 평화경제특구 후보지 선정 이후, 그 결과를 토대로 '경기도 평화경제특구 개발계획 수립 연구용역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이 연구용역은 형식적인 절차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접경지역이 실제로 겪어온 제약과 희생, 그리고 각 지역이 가진 잠재력을 어떻게 정책 패키지로 묶어 투자와 일자리로 연결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설계도가 되어야 한다. 특히 포천은 수도권 규제와 안보 제약이 중첩된 지역인 만큼, 이 현실이 초기 단계부터 충실히 반영되지 않는다면 평화경제특구의 실효성은 크게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에 필자는 포천시의회 의장으로서, 평화경제특구 유치를 위한 노력에 어떠한 역할도 아끼지 않을 것이다. 제도적 정비가 필요하다면 적극적으로 나서고, 정책적 논의와 공론화가 요구된다면 그 책임을 회피하지 않을 것이다. 동시에 집행부 역시 이번 공모 대응을 단순한 형식적 신청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평화경제특구와 기회발전특구의 연계를 포함해, 포천이 무엇을 할 수 있고 국가가 무엇을 얻게 되는지를 분명히 보여주는 전략적 계획을 마련해야 한다. 포천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 평화경제특구는 먼 미래의 구상이 아니라, 지금 반드시 잡아야 할 현재의 기회다. 국가가 안보를 이유로 포천의 발전을 제약해 왔다면, 이제 국가는 정책으로 그 책임을 응답해야 한다. 끝으로 그 응답은 선언이 아니라 지정이 되어야 하며, 평화와 기회가 결합될 도시, 포천은 선택의 대상이 아니라 답이어야 한다.
남북관계 단절이 장기화되면서 DMZ 평화는 더욱 중요한 안보 과제가 되었다. 전쟁 방지와 군사적 긴장 완화를 위해 접경 지역의 군사활동을 제한한 2018년의 남북 합의가 전 정부 때 무력화되면서 한반도는 극히 위험해졌다. 새 정부는 9·19 군사합의 복원을 대선공약으로, 접경 지역 평화 대책 및 법제 정비를 국정과제로 채택했다. 통일부는 작년 12월의 업무보고에서 “2026년 한반도 평화공존 원년 만들기”를 목표로 “남북관계 단절의 벽에 바늘구멍을 뚫기 위한 노력”을 선제적·집중적으로 추진한다는 야심찬 계획을 밝혔다. 페이스메이커 역할 강화를 위한 평화교류 프로젝트로 서울~베이징 철도 연결, 원산갈마 평화관광 등 다양한 창의적 방안이 제시됐다. DMZ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추진체계로서 국회와의 관련 법률 제정안 협조, ‘평화경제특구법’ 시행에 따른 접경 지역 대상의 특구 기본계획 수립, 파주 등 3개 구간의 DMZ ‘평화의 길’ 재개방 등도 포함됐다. 지난 3일 발표한 ‘이재명 정부의 한반도 평화공존 정책’ 설명서에는 이 내용들이 포괄적·체계적으로 수록되어 있다. 국회에서는 ‘DMZ의 평화적 이용 지원에 관한 법률안’이 입법 중이다. 이는 DMZ의 생태 가치를 보전하고 평화적 이용을 지원하기 위해 평화와 남북협력 증진, 자연환경 보전, 문화재 보존, 생태·평화관광 등에 관한 종합계획 수립과 관련 위원회 구성을 규정하고 있다. 법안에는 관련 사업을 위해 필요한 경우 우리 정부가 DMZ 출입 및 물자·장비 반입 등을 승인하는 특례 규정도 있다. 이와 관련하여 통일부는 우리의 영토 주권과 한반도 평화 공존에 대한 분명한 입장 하에 관계부처 정책 조정 등을 통해 법률 제정을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그런데, DMZ를 관할하는 유엔사에서 강력한 반대 의견을 표하면서 문제가 꼬였다. 1월 28일 유엔사는 기자간담회를 열어 정전협정(1조) 규정상 유엔군사령관이 군인 및 민간인의 DMZ 출입 승인 권한을 전적으로 갖고 있다면서 관련 법 통과는 정전협정에 대한 정면 위반이자 한국 정부의 이탈 선언이라고 강변했다. 정전협정 서문에서 “협정 규정이 순전히 군사적 성질에 속한다”는 표현도 협정이 정치적 합의(평화협정)가 아니라는 뜻일 뿐 유엔사의 민사행정 권한을 제약하지 않는다고 적시했다. 한국 정부의 정책과 입법 권한이 정전협정 규정과 충돌하는 이번 사안이 심각하기는 하지만 역사적 해결의 선례도 있다. 1975년 유엔 총회에서 유엔사 해체가 결의되자 한미 정부 합의로 유엔사의 전쟁 억제 및 전력 운용 기능을 한미연합사로 이관하고 정전협정 관리 기능만 남겼다. 1990년 한국 방위의 한국화 과정에서는 판문점 군사정전위 수석대표를 한국군 장성으로 넘겼다. 2000년대 남북교류가 확대되면서 유엔사의 DMZ 관할권을 나눠 철도·도로 건설을 위한 한국 정부의 관리권도 인정했다. 최근 국방부는 남방한계선에서 북쪽으로 추진 설치된 DMZ 방책선을 기준으로 그 남쪽에 대한 출입 승인 권한을 한국 정부가 갖자는 절충안을 냈고, 유엔사는 여전히 난색을 표한다는 전언이다. 이제 이 문제는 한미 정부가 한반도 평화관리와 한국의 역할 확대 차원에서 전략적으로 논의할 때가 되었다.
이번 달로 대학 강단을 내려온다. 30대부터 매달려 왔던 대학 강의가 어느덧 정년이 되어 마무리하는 순간이 된 것이다. 즐겁고 영광이었지만 가족과 주변 분들에게는 나의 행복에 비례해서 많은 희생을 강요한 시간이기도 했다. 그래도 개인적으로는 보람으로 가득 찼던 순간들이었음은 틀림없다. 전공이 정치학이고 그중에서도 한국 정치사상을 전공하다 보니 배워야 할 것들 천지이고 깊이를 더 할수록 존경해야 할 분들이 넘쳐났다. 그럼에도 연구의 순간은 늘 행복했다. 한국 근대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는 수운 최제우가 창도한 동학사상에 빠졌고, 오늘 대한민국의 기원인 임시정부의 정치적 근간이 된 조소앙의 삼균주의라는 정치사상을 연구할 수 있었던 것도 크나큰 영광이자 보람이었다. 비록 수운 최제우나 조소앙의 사상 근처에도 못 가지만 스스로의 수준을 잘 알기에 만족하며 보낸 연구 시간이었다. 얕은 지식이나마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행복도 뺄 수 없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좌우명인 “지금 최선을 다 하고 있는가?”를 되새기며 자신에게 늘 “나는 강의실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를 묻고 또 묻기를 거듭했다. 그래도 부끄러웠던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조금 더 열심히 가르치고, 좀 더 진지하게 상담해 주고 지도해 주었어야 하는데 하는 아쉬움 가득한 순간들이 우선 기억되고 있다. 지금껏 교육계에 있었던 입장에서 오늘 사회에 일정 정도 책임이 있음도 고백한다. 어쩌다가 오늘 한국 사회가 공동체 의식보다는 그저 개인적 이익에 매몰되어 버렸는가. 정의는 고사하고 상식마저 통하지 않는 사회가 되어버린 것은 아닌지. 인성 교육은 어디 가고 그저 테크닉에만 몰두하는 강의실은 또 어쩌란 말인가. 그 많은 부조리의 원인은 어디 있는가. 오로지 대학입시 하나에 인생의 승부를 걸어야 하는 한국 교육의 문제를 너무도 잘 알면서도 해결책 하나 내놓지 못하는 무력감과 자괴감 역시 부인키 어렵다. 심지어 어느 순간부터는 부모의 능력이 자식의 능력으로 세습되는 우리 사회의 모습에는 더 심한 모멸감까지 느꼈다면 지나칠까. 어느 설문조사에 의하면 한국 사회의 계층 이동이 활발하다고 느끼는 성인은 4명 중 1명에 그친다고 한다. ‘계층 사다리’가 불가능한 이유는 자녀의 성공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교육이 아니라 부모의 사회·경제적 배경이라는 것이다. 결국 국민의 68%는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원이 자녀의 지위에 영향을 주며 그렇지 않는다는 응답은 0.7%라고 한다. 사회 지도층은 늘 국민을 위한다고 하면서 자신들만의 특권 카르텔을 형성해 놓고 그 아성을 지키고 계승시키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따라서 그들은 정책의 최우선을 자신들이 거주하는 서울 수도권으로, 집값은 오직 강남이 기준이고, 교육은 서울 대치동이 교본으로 만들었다. 오로지 문과는 법대요, 이과는 의대만 존중받는 사회를 만든 것 또한 그들이다. 의사는 죽는 순간까지 면허가 살아있고, 법조인은 그들만의 리그에서 일반인은 상상할 수도 없는 수임료를 논하기에 어쩔 수 없이 모든 국민은 자식들을 그리로 집중케 한다. 엄격한 신분제 사회에서 만민평등과 생명 존엄을 외친 동학사상과 조소앙의 삼균주의가 그린 정치와 경제 그리고 교육의 균등함이 실현되는 사회는 진정 이상론자들만의 세상에서나 존재하는 것인가. 강단을 떠나지만 다짐한다. "스승님들이 추구한 사회를 만드는데 더욱 박차를 가하겠습니다."
지역의료에 대한 불신이 수도권, 비수도권을 막론하고 악화하는 심각한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비수도권에서의 필수의료에 대한 불신은 거의 바닥 수준으로 조사돼 열악한 현실을 반영했다. 이런 가운데 정부가 발표한 의대 정원 규모를 놓고 의사협회 등이 반발하고 있어 의정 갈등이 민심을 흔드는 먹구름이 되지 않을까 우려스러운 상황이다. 악화일로인 이 문제를 언제까지 미봉하여 방치할 셈인가. 위정자들과 의료계는 책임감을 더욱 높여야 할 것이다. 경기연구원은 ‘지역의료에 대한 국민인식조사’를 실시한 결과, 국민 대다수는 지역의료를 신뢰하지 못하고 있으며 특히 비수도권 주민들의 불신이 심각한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해당 조사는 전국 성인 남녀 2000명을 대상으로 진행됐으며, 조사에 따르면 ‘응급상황 발생 시 골든타임 내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응답한 국민은 25.7%뿐이었다. 특히 비수도권 주민은 15.5%만이 긍정적으로 응답해 수도권(35.3%)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심한 불안감을 호소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역 필수의료 서비스에 대한 신뢰도 역시 30.6%에 그쳐 낮은 수치를 보였으며, 비수도권 주민은 17.8%로 수도권(42.7%)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지역의료 전반에 대한 만족도도 전체 35.0%, 비수도권은 19.5%로 지역을 불문하고 낮은 편이었다. 결국 지방 환자들이 수도권 대형병원으로 쏠리는 현상의 핵심 원인이 바로 이런 요소 때문으로 해석된다. 그럼에도 국민들의 지역의료에 대한 이용 의지는 여전히 높아 전문성 강화만 제대로 된다면 문제 해결의 단초를 마련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게 한다. 응답자들은 만성질환 진료는 동네 의원을 선호하고, 중증질환 진료는 수도권 대형병원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였다. 응답자의 68.3%가 ‘지역의료의 전문성이 강화된다면 중증질환 진료 시에도 지역병원을 이용하겠다’고 답했다. 또 지역의료 이용을 위한 가장 중요한 요건으로도 ‘전문성 강화(69.4%)’를 1순위로 꼽았다. 70.1%가 ‘지역의료 이용에 대한 인센티브가 필요하다’고 응답했고 ‘주치의 제도’ 도입에 대해서도 과반수(54.4%)가 필요성을 인정했다. 이런 가운데 보건복지부는 10일 서울 정부서울청사에서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보정심)를 열고 2027~2031학년도 의사 인력 양성 규모를 확정했다. 2027학년도 의과대학 입학정원을 490명 늘리는 데 이어 2028~2029년에는 해마다 613명, 2030년~2031년에는 연 813명씩 확대해 5년간 누적 증원 규모는 3342명, 연평균 668명이다. 증원 대상은 서울을 제외한 전국 32개 의과대학이며, 늘어나는 인력은 100% 지역의사제로 선발된다. 관건은 의료계 반발이다. 김택우 대한의사협회 회장은 증원에 반대하며 보정심 회의 도중 퇴장했고 증원 규모는 표결로 확정됐다. 한국환자단체연합회도 정부가 교육 부담을 고려해 첫해에 증원분의 80%만 반영한 데 대해 “환자들이 피해를 볼 것”이라며 우려를 표명했다. 역대 정권들이 의료 개혁을 추진할 적마다 일어났던 갈등의 소용돌이는 온 국민의 기억 속에 남은 씁쓸한 장면들이다. 필수의료 부족과 지역의료 전문성 제고 문제는 더 이상 미뤄둘 수 없는 고질적 과제다. 이젠 해결해야 한다. 주민들이 지역의료를 신뢰하고 실제로 이용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의료 이용 정책’ 마련이 급선무라는 경기연구원의 제안에 주목한다. 경기연구원의 제안은 ‘지역의료 이용에 대한 강력한 인센티브 제도 도입’, ‘전문성 특화 공공병원 육성’, ‘지역 명의(名醫) 양성 시스템 구축’ 등으로 압축된다. 병원을 찾는 국민이 제일 먼저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 하나씩 해법을 찾아 들어가는 절차가 필요하다. 믿을 만한 의사와 이용자에 대한 인센티브 제도까지 있다면 지역의료를 외면하고 왜 다른 선택을 할까. 오직 국민의 평등한 건강 복지만 중심에 놓고 방책을 헤아리는 신실한 자세가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