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동구는 수도권 철강 산업의 심장부다. 동구의 아침은 오랫동안 철강의 뜨거운 숨결과 함께 시작됐다. 거대한 굴뚝에서 피어오르던 연기와 공장의 소음은 단순한 소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도시의 엔진이 오늘도 힘차게 돌아가고 있다는, 안도감 섞인 신호였다. 현대제철과 동국제강(현 동국CM) 등 대한민국 산업화의 뼈대를 세운 기업들이 자리한 이곳은 동구의 오늘을 지탱해 온 경제적 근간이자 자부심이었다. 새롭게 출범할 제물포구(동구·중구)는 전체 면적의 50% 이상이 공업지역으로 이루어진 도시다. 도시의 절반 이상이 산업 현장이라는 사실은 지역의 운명이 입주 기업들의 흥망성쇠와 궤를 같이하며, 주민들의 삶이 ‘양질의 일자리’ 확보에 달려 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지금, 그 견고하던 심장 박동에 이상 신호가 감지되고 있다. 현대제철 인천공장이 최근 건설 경기 침체와 저가 중국산 철강의 공세로 인해 철근 생산 설비 일부를 폐쇄하기로 결정하며, 연간 생산량이 160만 톤에서 80만 톤으로 ‘반 토막’이 났다. 동국제강 역시 상황은 다르지 않다. 면적의 절반 이상을 산업에 내어준 우리에게 철강 산업의 위기는 곧 경제적 질식이자, ‘도시 소멸’의 전주곡이다. 필자가 동구청장으로 재임하던 시절, 철강 산업은 도시를 지탱하는 버팀목인 동시에 주민들과 함께 해결해야 할 환경적 과제였다. 기업이 지역 경제에 기여하는 만큼, 공정 과정의 환경 이슈는 주민의 삶의 질과 직결된 민감한 현안이었다. 당시 우리는 기업에 환경 개선을 위한 강력한 투자를 요구했고, 기업 역시 이에 응답하며 상생의 길을 모색해 왔다. 그러나 지금의 설비 폐쇄는 그동안 쌓아온 ‘상생의 노력’마저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 공장이 가동을 멈춘다는 것은 환경 개선을 위한 설비 투자와 친환경 공정으로의 전환 기회조차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진정한 환경 정의는 단순히 공장의 문을 닫는 것이 아니다. 기업이 지역에 남아 탄소중립 시대에 걸맞은 ‘그린스틸’ 생산 기지로 거듭날 수 있도록 지원함으로써, 우리 아이들을 위한 좋은 일자리를 지켜내는 데서 완성된다. 다행히 정부는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대책을 마련 중이다. 최근 구윤철 부총리가 인천을 찾아 지역 산업 현안을 살피며 ‘산업위기선제대응지역’ 지정을 전향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밝힌 것이 그 신호탄이다. 국회에서도 허종식 국회의원이 ‘K-스틸법’ 통과 등 실질적인 대책 마련에 앞장서고 있다. 반면, 가장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인천시의 행보에는 산업 정책이 보이지 않는다는 비판이 크다. 정부의 결정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인천시 차원의 자체적인 대책은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미 선제대응지역으로 지정되어 회복 동력을 가동 중인 타 지역과 비교하면 인천시의 대응은 답답하기만 하다. 유정복 시장의 생활 밀착형 정책들의 가치를 폄훼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도시의 뿌리인 산업 기반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행정의 우선순위는 더 냉철해야 한다. 뿌리가 썩어가는데 꽃잎에만 물을 준들 그 아름다움이 얼마나 가겠는가. 산업이 무너지고 일자리가 증발하는 순간, 주민들의 소박한 일상 자체가 통째로 사라질 수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지금 인천시에 필요한 것은 ‘지정 검토’가 아니라 ‘전격적인 실행’이다. 인천의 철강 이슈는 단순한 기업의 문제를 넘어 제물포구의 역사이자 주민의 삶이 달린 문제다. 환경과 경제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서라도 기업의 설비 투자를 유도하고 산업 위기를 극복할 구체적인 시 차원의 정책을 즉각 가동해야 한다. 좋은 일자리를 확보하고 지키는 것, 그것이 곧 제물포구의 미래를 여는 유일한 길이다. 위기는 시간을 주지 않는다.
빙핵을 구출하라! 빙하가 빠르게 녹고 있다. 지구 온난화가 1.5°C에서 4°C 사이로 유지될 경우, 전 세계 산악 빙하는 2100년까지 전체 질량의 41%를 잃게 된다. 빙하가 사라지면 현재 얼음으로 덮인 많은 발원지 하천이 사막화 되고 인류는 대참사를 면할 수 없게 된다. 산과 빙하는 수많은 수로의 발원지로 지구 수문 순환의 중요한 역할을 한다. 따뜻한 계절에 눈과 빙하가 주기적으로 녹아 생기는 담수는 하천과 강으로 직접 흘러 들어가거나 토양으로 스며들어 토양 수분과 지하수를 보충한다. 이는 지구인 약 20억 명의 담수로 활용된다. 이처럼 빙하는 우리 인류의 생명줄인 셈이다. 과학자들은 빙핵 구출작전에 돌입했다. 일명 빙핵저장고(Ice Memory) 프로젝트. 이는 현재 위협받고 있는 기후 데이터를 지정학적 또는 기술적 압력 없이 미래 세대가 활용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2015년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센터(CNRS), 그르노블 알프스대학교, 프랑스 개발연구소(IRD), 이탈리아 국립연구위원회(CNR), 베네치아 카포스카리대학교가 공동으로 출범시킨 이 프로젝트에는 세계 13개국 연구자, 대학, 정부, 기업이 참여하고 있다. 모나코 알베르 2세 재단은 장기적인 활동 구조를 구축할 수 있게 지원하고 있다. 이들은 지난 달 14일 프랑스-이탈리아의 공동 연구 기지인 남극의 콩코르디아에 빙핵저장고를 개장했다. 해발 3,200미터 고지에 자리한 이 기지에는 몽블랑과 그랑콩뱅 산에서 채취한 빙핵이 타임캡슐로 보관됐다. 안데스산맥과 코카서스산맥 등의 빙핵도 추가될 전망이다. 100미터 두께의 알프스 빙핵들이 콩코르디아로 가는 여정은 험난했다. 쇄빙선을 타고 유럽을 출발해 바다를 건너 남극에 도착한 후 특수 항공기를 타고 기지에 착륙한 것이다. 프랑스 폴 에밀 빅토르 극지 연구소와 이탈리아 남극 연구소가 공동 관리하는 이곳은 -50°C에서 -54°C 사이의 안정적인 온도를 유지한다. 길이 35미터, 폭과 높이 5미터의 이 구조물은 지표면 아래 9미터 깊이의 눈 속에 굴착돼 있다. 콘크리트나 산업 자재는 전혀 사용되지 않았다. 남극에 오염 유발 시설을 금지하는 마드리드 의정서를 준수한 것이다. 남극은 또한 법적 중립지역으로 1959년 조약에 의해 어떤 국가도 영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센터에 따르면, 2000년 이후 산악 빙하는 지역에 따라 부피가 2%에서 39%까지 감소했다. 이로 인해 녹은 물이 땅속 깊숙이 스며들면서 오래된 빙층을 변질시키고 일부 빙핵은 고정밀 분석에 사용될 수 없을 정도로 과학적 가치가 떨어졌다. 빙핵저장고 재단 회장이자 베른대학의 기후학자인 토마스 슈토커는 “빙하의 소실은 수천 년 묵은 기후 기록의 소멸로 이어진다”고 지적한다. 일단 녹으면 이 얼음은 대기, 에어로졸, 온실가스에 대한 풍부한 정보와 함께 영원히 복구할 수 없게 된다. 빙하코어에는 오염물질, 화산이나 사막먼지, 심지어 DNA의 흔적까지 포함돼 있다. 이를 통해 과학자들은 수 세기 또는 수천 년에 걸친 특정 기간의 환경 조건을 재구성할 수 있다. 따라서 빙핵 구출 작전은 인류 공동의 유산으로 수년에 걸쳐 앞으로도 계속돼야 한다. 국경을 초월하며, 지정학적 긴장과도 무관하며, 전 세계의 과학적 이익만을 위해 오롯이 존재할 것이다. 오는 2045년까지 20개의 빙하에서 빙핵을 시추해야 한다. 이 작업을 수행하려면 재단은 공공자금, 후원단체, 과학적 파트너십이 지금보다 더 필요하다. 많은 이의 관심과 후원이 봇물처럼 이어질 수 있길 기원해 본다.
지난달 29일 국토교통부가 ‘1·29 도심 주택공급 확대 및 신속화 방안’을 발표했다. 9·7 공급대책의 후속 조치다. 내용은 서울·경기·인천 등 수도권 핵심 입지에서 총 6만 가구를 공급하는 것이다. 서울 여의도 면적의 1.7배이며 판교 신도시 2개 규모다. 지역별로는 서울이 26곳 3만 2000가구, 경기 18곳 2만 8000가구, 인천 2곳 100가구 등이다. 이 가운데는 과천 경마장·방첩사령부 이전 부지가 포함돼 있다. 과천 경마장·방첩사 부지엔 9800가구가 들어설 계획이다. 그런데 과천시민과 인근 주민들, 과천시, 한국마사회의 반발이 거세다. 과천시의 입장은 이미 진행 중인 개발 사업에 더해 9800가구가 또 들어선다면 도시 기반 시설 수용 능력이 초과된다는 것이다. 지금 진행 중인 공공주택지구 사업만 해도 지식정보타운, 과천과천지구, 주암지구, 갈현지구 등 4곳이나 된다. 이런 이유로 신계용 과천시장은 공식 반대 입장을 내놓은 바 있다. 과천시의회도 2일 열린 제295회 임시회에서 ‘과천 경마공원·국군방첩사 부지 9800호 주택 공급 계획 철회 촉구 결의안’을 채택했다. 시의회는 정부가 발표한 과천 경마공원·국군방첩사 부지 내 주택 9800호 공급 계획이 과천시의 교통·교육·환경 등 도시 수용 여건을 일절 고려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추진됐다며 즉각적으로 철회하라고 촉구했다. 정부 계획을 현실과 괴리된 구호로 시민을 기만하는 고밀도 주거 확대 계획에 지나지 않으며, “과천시를 정책 실험 대상이자 희생양으로 삼는 폭력적인 행위”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기존 과천시 주택 공급 계획이 이미 시 인구의 1.7배에 달하고, 교통·하수 등 생활 인프라가 부족한 상황에서 일방적인 개발은 시민들의 불편만 가중시킬 뿐”이란 내용이 포함된 결의문은 국토교통부 등 관련기관에 발송됐다. 한국마사회노동조합 역시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이들은 “과천 경마공원이 단순한 개발 대상지가 아니라 연간 420만 명의 국민이 찾는 수도권 핵심 레저·문화 자산“이라면서 어떤 사전 협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자행된 불통 행정의 전형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노조는 성명서를 통해 “2만4000명의 말 산업 종사자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산업 학살”이라면서 “유일하게 흑자를 내는 과천 경마장을 일방적으로 없애는 것은 산업 종사자를 거리로 내몰고, 시민들의 여가권을 침해하는 행정 폭거”라고 반발했다. 주민들도 정부의 발표가 나자마자 ‘과천경마공원이전반대비상대책위원회’를 결성했다. 정보공개청구 서명운동을 벌이는 한편 지난 7일 오후엔 과천 중앙광장에서 정부 계획안 반대 집회를 개최했다.(관련기사: 경기신문 9일자 6면, ‘경마공원·방첩사 부지 주택 공급 계획에 과천 시민 반발 확산’) 지역과 말 산업계가 모두 우려하고 있는 것이다. 과천시 뿐 아니라 의왕 등 인접 도시들도 우려를 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미 포화 상태인 교통체계에 부담이 되기 때문이다. 도시 기반 시설 수용 능력 초과라는 문제 외에도 반대이유는 또 있다. 지역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과천시는 500억 원을 마사회 레저세로 받고 있다. 이는 시 연간예산 약 5000억 원 중 10%에 해당하는 거액이다. 만약 경마공원이 타 지역으로 이전할 시 이 지방세 수입은 사라진다. 시 재정 자립도에 악영향을 주게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다. 경마공원에 근무하는 종사자는 약 3000명에 달하는데 이들 대부분은 과천과 인근도시에 살고 있다. 이들이 직업을 상실하면 지역 상권도 움츠러들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과천 경마공원 폐쇄로 인해 한국마사회 재정에 문제가 생기고 말 산업분야가 타격을 입을 것이란 예상도 할 수 있다. 마사회 매출이 줄어들면 농축산 지원에 사용되는 축산발전기금도 감소, 농촌 경제에도 영향을 줄 것이란 우려까지도 나온다. 따라서 정부의 도심 주택공급 확대 정책을 반대하지는 않지만 지역별 특성을 감안해 좀 더 심사숙고한 뒤 추진하기 바란다.
얼마 전 현대자동차가 생산 현장에 로봇을 투입하기로 한 결정에 대해 노조가 강하게 반발하며 저지에 나섰다는 보도를 접했다. 그 소식을 들으며 분노보다 먼저 든 감정은 피로감이었다. 우리는 언제까지 같은 논쟁을 반복해야 하는가. 기술은 이미 다음 단계로 이동했는데, 노동을 둘러싼 언어와 투쟁 방식은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고 기술은 이미 다음 단계로 이동했는데, 노동계의 투쟁 방식은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다. 노조의 주장은 익숙하다. 로봇은 일자리를 빼앗고, 자동화는 노동자를 거리로 내몬다는 것이다. 이 논리는 역사적으로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산업혁명 역시 대량 실업과 사회적 혼란을 낳았다. 그러나 지금의 자동화는 과거와 질적으로 다르다. AI와 로봇은 인간의 팔과 다리를 대체하는 수준을 넘어, 생산 과정 전체에서 인간의 개입 자체를 줄이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일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구호 하나로 이 변화를 막을 수 있다고 믿는 척한다. 냉정하게 말해, 로봇을 막아서 지켜낼 수 있는 일자리는 이미 미래의 일자리가 아니다. 글로벌 경쟁 속에서 자동화를 거부한 기업은 도태되고, 그 결과 남는 것은 보호된 노동이 아니라 사라진 산업이다. 로봇을 거부한다고 노동이 존속되는 것이 아니라, 로봇을 받아들이지 못한 구조가 먼저 무너진다. 기술을 막는 투쟁은 결국 노동자를 보호하지 못한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노조의 투쟁이 여전히 ‘고용 유지’라는 단일 목표에 갇혀 있다는 점이다. 자동화로 사라지는 일자리는 특정 기업의 문제가 아니라 문명적 전환의 결과다. 그럼에도 노동은 여전히 생존의 유일한 조건으로 설정되고, 노동에서 밀려난 인간은 곧바로 실패자이자 잉여로 취급된다. 이것이 바로 문제의 핵심이다. 노동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노동만이 인간의 자격을 증명하던 시대가 끝나가고 있음에도 우리는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로봇은 노동자의 적이 아니라, 노동이라는 굴레에서 인간을 해방시킬 잠재력을 지닌 존재다. 문제는 로봇이 아니라, 로봇이 만들어낸 부와 효율을 누가 소유하고 어떻게 분배하느냐다. 로봇이 생산을 담당한다면 인간은 더 이상 단순한 임금노동자가 아니라, 생산 구조의 소유자이자 기여자로 재정의되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논쟁에는 이 질문이 빠져 있다. AI 시대의 노동 문제는 더 이상 “일자리를 지킬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노동이 줄어드는 사회에서 인간은 무엇으로 존엄을 증명할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로봇을 적으로 삼는 순간 인간은 미래를 거부하게 된다. 필요한 것은 저지가 아니라 전환이다. 노동을 지키는 싸움이 아니라, 노동 이후의 인간을 설계하는 싸움이 지금 우리에게 요구되고 있다. 로봇은 이미 현장에 들어왔다. 남은 선택지는 명확하다. 과거의 노동을 붙잡고 몰락을 함께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기여의 질서를 설계하며 인간의 자리를 재정의할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지 않는 한, 로봇과의 싸움은 결국 인간 내부의 싸움으로 되돌아올 것이다. 결국 AI와 로봇의 확산은 노동의 위기가 아니라 상상력의 위기다. 우리는 기술의 속도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 없이도 인간이 존엄할 수 있다는 발상을 아직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그것이 문제다.
이재명 대통령이 집권 초기 내란 수습과 경제 회복의 기세를 몰아 수도권 집값 난제 정면 돌파를 천명하고 나섰다. “15년 동안 안 먹고 모아야 집 한 채 살 수 있다”는 대통령의 신년 발언은 다주택자 양도세 면제 불가 방침과 맞물리며 여론의 뜨거운 쟁점이 됐다. 정책의 성패를 가를 공론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할 주체는 단연 언론이다. 하지만 지난 2월 초 우리가 목격한 것은 권력을 감시하고 사실을 검증하는 언론의 모습이 아니라, 특정 이익집단의 언어를 무비판적으로 복제하는 ‘확성기’의 모습이었다. 발단은 지난 2월 3일 대한상공회의소가 배포한 보도자료였다. 영국의 이민 컨설팅 업체 헨리앤파트너스의 자료를 인용해 ‘한국 고액 자산가 2400명이 상속세 부담 때문에 해외로 유출됐다’는 자극적인 내용을 담았다. 연합뉴스·조선·중앙·동아일보를 비롯한 도하의 수많은 언론은 기다렸다는 듯 ‘부자 탈출’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쏟아냈다. 그것도 취재원이 요청한 2월 3일 12시 "상속세 60% 낼 바에 한국 떠납니다"(이데일리)류의 기사였다. 비판적 검증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이 ‘기사’들의 실체는 며칠 만에 처참하게 드러났다. 해당 보고서는 이미 2025년부터 영국 조세정의네트워크 등에 의해 방법론적 오류가 지적된 자료였다. SNS 프로필 기반의 추정치일 뿐이었고, 정작 원문에는 상속세가 이민의 원인이라는 언급조차 없었다. 대한상의가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한 데이터를 언론이 최소한의 확인도 없이 공인해준 셈이다. 결국 대통령이 SNS를 통해 “고의적 가짜뉴스”라며 질타하고서야 대한상의는 사과했고 기사들은 수정되거나 삭제됐다. 저널리즘의 바이블로 불리는 <저널리즘의 기본 요소>에서 강조했듯, 저널리즘의 제1 원칙은 ‘검증의 규율’이다. 사실 여부를 확인하고 맥락을 짚어내는 검증은 단순한 정보 전달과 저널리즘을 구분 짓는 유일한 기준이다. 하지만 이번 사태에서 한국 언론은 이 기초적인 문턱조차 넘지 못했다. 재계가 던진 ‘상속세 인하’라는 프레임에 매몰돼, 그것이 공공의 통계인지 사설 기관의 마케팅 자료인지조차 가려내지 못했다. 더 뼈아픈 지점은 언론이 스스로 해야 할 검증을 ‘권력’이 대신했다는 아이러니다. 대통령의 지적이 있고 나서야 비로소 사실 확인에 나선 언론의 모습은, 우리 언론이 누구의 목소리에 반응하고 누구의 이익을 대변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특히 부동산이나 조세 같은 전문 영역에서 언론이 비판적 질문을 포기하고 보도자료를 ‘복사해서 붙여넣기’ 하는 관행은 독자에 대한 기만이자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이다. 언론의 신뢰는 단순히 중립적인 태도를 취한다고 얻어지지 않는다. 이해당사자의 주장을 그대로 옮기는 것은 중립이 아니라 무능이며 방임이다. 보도자료 배포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그 안에 담긴 숫자의 진실성이다. 만약 이번에도 언론이 “바빠서 확인하지 못했다”거나 “상의의 자료라 믿었다”는 변명 뒤에 숨는다면, 다음에도 똑같은 오보의 악순환은 반복될 것이다. 대한상의와 최태원 회장의 사과로 이번 해프닝은 일단락되는 모양새지만, 언론의 숙제는 그대로다. 스스로가 이해집단의 확성기였음을 통감하지 않는다면, 저널리즘의 미래는 없다. 보도자료가 도착했을 때 언론이 택해야 할 것은 ‘전송’ 버튼이 아니라 ‘의심’의 눈초리여야 한다.
대한민국 사회연대경제(SSE)가 거대한 전환의 파도를 맞이하고 있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정책 기조가 급변하며 사회적경제에 대한 지원 체계가 재편되는 시점이다. 누군가는 위기를 말하지만, 20년 이상 이 현장을 지켜온 전문가의 시각에서 지금은 오히려 보조금 의존에서 벗어나 ‘자립’과 ‘연대’라는 본연의 가치를 증명해야 할 진정한 승부처다. 이러한 격변의 시기에 경기도 안산에서 들려온 ‘2030 안산사회연대경제 비전 선포’ 소식은 경기도를 넘어 대한민국 사회연대경제가 나아가야 할 명확한 이정표를 제시하고 있다. 지난 2026년 1월 21일, 안산문화예술의전당에 모인 200여 명의 사회연대경제 주체들은 ‘안산을 경기도 사회연대경제의 모범도시로 만들자’는 기치 아래 2030년까지의 구체적인 로드맵을 선포했다. 이번 선포식이 특별한 이유는 단순히 구호에 그치지 않고, 정책 환경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실천적 과제들을 매우 구체적이고 도전적으로 설정했다는 점에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조직화의 규모’다. 안산은 2030년까지 안산시 인구의 15%인 약 10만 명을 사회연대경제 조합원으로 조직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이는 사회연대경제가 특정 소수의 활동이 아니라, 시민의 일상을 지탱하는 보편적인 경제 체제로 자리 잡아야 한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다. 의료, 돌봄, 에너지, 먹거리 등 삶의 핵심 영역에서 시민들이 사회연대경제를 직접 경험하게 함으로써 정책 변화에도 흔들리지 않는 튼튼한 시민적 지지 기반을 구축하겠다는 전략이다. 둘째는 ‘금융의 자립’이다. 정부 보조금 축소라는 외부 환경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안산은 매년 5천만 원 이상의 자조기금을 조성하여 2030년까지 최소 5억 원의 연대자조기금을 확보하기로 했다. 이는 금융협동조합인 신협 등과 협력하여 사회적 금융의 실질적인 토대를 닦겠다는 선언이다. 스스로 자금을 모으고(자조), 이를 필요한 곳에 융통하는(상호부조) 금융 시스템의 확보야말로 자립적 생태계의 핵심이다. 셋째는 ‘비즈니스 모델의 통합과 확장’이다. 안산은 재생에너지 100MW 달성, 협동조합형 아파트 건설, 통합 돌봄 네트워크 구축 등 굵직한 통합 비즈니스 모델을 제시했다. 특히 기후위기 대응을 위해 공공주차장과 유휴 부지를 활용한 태양광 발전소를 시민협동조합 방식으로 추진하겠다는 대목은 사회적 가치와 경제적 이익공유를 동시에 실현하는 영리한 전략이다. 이러한 안산의 실험은 경기도 내 타 시·군 사회연대경제 조직들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이제는 개별기업의 생존을 넘어, 상호출자와 조합원 교류를 통한 ‘상호이익 네트워크’를 구축해야 한다. 또한, 안산시 사회연대경제대학의 재개설 계획처럼 전문 인재와 활동가를 지속적으로 양성하는 교육 플랫폼을 갖추는 것도 필수적이다. 전환의 시대, 경기도 사회연대경제 기업들이 부응해야 할 핵심은 ‘관성과의 결별’이다. 공공 보조금에 의존하는 수동적 자세에서 벗어나, 시민의 필요를 해결하는 강력한 비즈니스 모델로 승부해야 한다. 안산이 선포한 비전처럼 사람과 공동체의 존엄을 최우선에 두면서도, 투명한 정보공개와 민주적 참여를 통해 경영의 신뢰를 확보해야 한다. 안산 사회연대경제 주체들이 다짐한 ‘서로의 손을 놓지 않고 연대와 협동의 정신으로 한 걸음 나아가겠다’는 약속은 지금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외침이다. 안산이 쏘아 올린 이 비전이 경기도 전체로 확산되어, 사회연대경제가 지역공동체의 회복력을 높이는 실질적인 대안 체계로 우뚝 서기를 기대한다.
김동연 경기도지사가 이태원 참사 이후 대책으로 마련한 ‘안전예방 핫라인’의 안전점검 신청 건수가 크게 늘고 도민들의 만족도도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는 소식이다. 주민들의 안전 의식을 높이는 동시에 정책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의미여서 고무적이 아닐 수 없다. 일상 가장 가까운 곳에서 안전사고 위험성을 신고하고 지방정부가 이에 신속하게 대처하는 체계야말로 바람직하다. 정책을 더욱 효율적으로 다듬고 발전시켜갈 가치가 충분하다. 김 지사는 지난 2022년 이태원 참사에 따른 후속 대책으로 같은 해 11월 관련 부서에 안전예방 핫라인 도입을 지시했다. 핫라인이 도입되면서 곧바로 안전점검 신청 건수가 큰 폭으로 증가한 데 이어 2023년 이후에도 연평균 증가율을 20%대 이상 유지하고 있다. 경기도가 밝힌 도민들의 연도별 안전점검 신청 건수를 살펴보면 2022년은 225건, 2023년은 324건, 2024년은 384건, 2025년은 473건이다. ‘안전예방 핫라인’은 활용 증가율이 높아지는 동시에 정책 서비스에 대한 도민들의 만족도 또한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도에 따르면 안전예방 핫라인 만족도 조사 결과, 응답자(201명) 중 매우 만족이 50%, 만족이 32%, 보통이 15%, 불만족이 3%로 각각 조사됐다. 서비스 만족 응답률을 종합하면 대다수(82%) 도민들이 만족감을 표시하고 있는 셈이다. 서비스에 불만족한다는 의견의 경우는 대체로 ‘민간시설에 대한 지원 부족 등’인 것으로 나타났다. 안전예방 핫라인은 경기도민 전용 안전예방 신고 수단으로서 안전에 위험이 되는 요소를 발견하거나 위험을 느끼는 도민 누구나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 기존 도민안전점검청구제에는 없던 전용전화(핫라인) 방식을 추가하는 등 접근성도 강화됐다. 안전점검 신청은 안전예방 핫라인 전용전화는 물론 누리집·카카오톡 채널을 통해 24시간 연중 가능하다. 지난해 접수된 안전점검 신청 분야 비율은 시설물이 447건, 생활안전이 20건 재난·기타가 6건으로 시설물 관련 접수가 많았다. 작년 8월 안전예방 핫라인으로 도내 한 지자체의 고층건물(시설물) 지붕에서 콘크리트 낙하물이 떨어진다는 신고가 접수돼 즉시 처리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도는 관할 지자체와 협의해 즉각적인 현장점검과 3D영상 공개, 위험 구간 도로 통제, 낙하물 방지망 설치 등 안전조치를 재빨리 진행해 피해를 막았다. 안전점검 신청서가 접수된 이후 현장점검·컨설팅까지의 2025년도의 평균 처리 기간도 전년 4.4일에서 4.2일로 단축됐다. 도는 올해부터 주요 안전조치 권고사항이 이행되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도 사후관리를 강화할 예정이다. 경기도의 여론조사에서 나타난 ‘민간시설에 대한 지원 부족 등’에 대한 불만족 대목을 주목해야 한다. 도민 안전을 위협하는 요소들을 관리하는 일이 공공시설에 치우치는 건 완전하지 않다. 위험성을 안고 있는 민간시설의 경우, 예산 문제 등으로 손을 대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한 게 현실이다. 그러다 보니 안전사고 위험성이 제기된다고 해도 신속하게 해결책을 찾지 못하는 케이스가 한둘이 아니다. 사고가 발생하여 일어나는 비극성은 공공시설과 민간시설이 따로 있을 턱이 없다. 민간시설이라고 해도 안전관리 부실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공공이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는 것이다. 일단 위험한 시설물이나 행사, 집회 등이 발견됐다고 하면, 행정력과 제도와 예산을 총동원하여 이를 우선 해결하고 넘어가야 한다. 부지불식간에 일어나는 대형 안전사고들을 분석해보면 하나같이 우연을 가장한 ‘안전불감증’이라는 필연적 요인이 존재한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크고 작은 안전사고는 ‘예방’보다 더 확실한 해법이 없다. 그야말로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가는’ 철두철미한 자세가 필요하다. 경기도의 ‘안전예방 핫라인’이 우리 사회의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어리석음을 일소하는 최고의 안전 정책으로 발전해 가길 기대한다.
팔란티어의 창업주 피터 틸의 <제로 투 원>(한국경제신문, 2014)에 나오는 내용이다: 사람을 채용하려고 면접을 볼 때 내가 자주 하는 질문이 하나 있다. “정말 중요한 진실인데 남들이 당신한테 동의해주지 않는 것은 무엇입니까?”(13면) 좋은 대답은 다음과 같은 형식을 취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X라고 믿지만, 진실은 정반대예요.”(14면) 흔히들 믿고 있는 잘못된 믿음을 찾아낼 수 있다면 반대로 그 뒤에 숨겨진, 통념과는 다른 진실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21면). 잘못된 믿음인지는 알 수 없지만 흔히들 받아들이고 있는 믿음이 있다. 인공지능이 모든 전문직을 대체할 것이고, 법률가들도 대체할 것이라는 믿음이다. 벌써부터 이러한 믿음에 따라 변호사 시장의 신규 채용이 줄어들고 있다는 뉴스가 나온다. 국내 10대 로펌의 신입 변호사 채용 인원이 작년에 비해 23.3% 감소했는데, AI 확산의 영향이라고 한다. 미국 노동통계국장도 “앞으로 법조계로는 절대 진로를 정하면 안 된다”, “로펌들은 인공지능에 리서치를 시키면 된다는 입장”이라고 말했다고 한다(해럴드경제, 문과 전문직 ‘사망 선고’ 나왔다... “법조계 진로 절대 안돼”, 2026. 1. 6.자 기사). 변호사 시험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는 후배들을 향해 선배들은 “자리가 없다”는 “걱정”부터 해 주느라 호들갑이다. 요즘은 모두가 서로를 향해 “너의 노동력은 대체 가능하고 무가치하다”고 말하느라 바빠 보인다. “인공지능이 사람의 일을 해 줄 것이므로 이제 사람은 뽑을 필요가 없다.” 법조계도 마찬가지다. “인공지능은 법률가도 대체할 것이고, 법률가가 필요 없을 것이다.”, “주니어부터 필요 없어진다. 시니어가 인공지능을 활용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법률가 없이 인공지능만으로 법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법률가의 일은 줄어들 것이다. 법률가도 줄여야 한다.” 이런 믿음들은 잘못된 믿음인지는 알 수 없지만 통념이 되어 가고 있는 믿음이다. 이런 시대에는, 인공지능 시대에도 법률가들이 그들의 새로운 일을 찾을 수 있으며, 인공지능 시대이기에 법률가들이 할 일이 더 많아질 수 있고 법률가들이 더 많이 필요할 수 있다는 생각이야말로 통념과는 다른 생각이다. 정작 팔란티어의 창업주는 2014년에 이렇게 썼다: 어느 쪽도 더 뛰어난 컴퓨터가 반드시 인간 노동자를 대체할 것이라는 그 전제에 대해서는 의문을 품지 않는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전제다. 컴퓨터는 인간의 보완물이지, 대체물이 아니다. 앞으로 수십 년 동안 가장 가치 있는 기업을 세울 기업가들은 인간을 한물간 폐물로 만들려고 시도하는 사람이 아니라 인간의 능력을 키워줄 방법을 찾는 사람일 것이다(186면). 분별력을 가진 인간이 수십 년 후에 훨씬 더 나은 세상을 만들 가능성도 아직 남아 있다. 컴퓨터는 단순히 인간이 이미 하고 있는 일만 더 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을 할 수 있게 도와줄 것이다(199면). 미래는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것이다. 다른 법률가들을 한물간 폐물로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능력을 키워줄 방법을 찾으려는 사람이 인공지능 시대의 새로운 활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기다릴 수 있음은 행운입니다. 기다림의 반대편에는 조급함이 있고, 체념이 있고, 재촉이 있습니다. 얼핏 어울리지 않는 단어 같지만, 조건에 따라 기다림의 반대편에 서는 건 제각각입니다. 기다림이 시간을 의미할 때, 반대편에 서는 건 조급함입니다. 기다림이 희망을 품은 상태라면 체념은 절망에 짓눌린 상태이고, 기다림이 배려로 쓰일 때 코웃음을 날리는 건 재촉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다림은 불행이기보다 다행에 가깝습니다. 다행이기로는 기다릴 수 있는 사람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기다릴 수 있는 사람은 떠남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봄을 기다릴 수 있음은 겨울을 떠나보낼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어떠십니까. 당신도 나처럼, 그늘진 시간을 뒤로 하고 온기가 머무는 계절로 나아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그렇다면 나와 당신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적어도 우리의 일정표에는 모든 날, 모든 순간이 기다림이라는 두근거림으로 빼곡할 테니까요. 올겨울은 유난히 춥습니다. 그래서겠지요. 겨울과 작별하려는 사람 또한 많습니다. 그들에게 겨울은 꽁꽁 얼어붙은 땅과 하늘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전쟁과 기아는 계절과 상관없는 겨울입니다. 그 겨울이 지구별 곳곳에 눈물 폭탄을 투하하고 있습니다. 가자지구와 우즈베키스탄은 벌써 몇 해째 겨울입니다. 봄은 없고 겨울만 연속인 건 소말리아와 에티오피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에게 겨울은 공습경보와 굶주림의 다른 이름이라서, 봄은 태어나기도 전에 영양실조로 쓰러집니다. 오지 않는 봄은 우리가 사는 땅에도 엄연합니다. 영양실조로 쓰러지는 봄은 전쟁과 기아의 계절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오지 않는 봄은 조급함과 체념과 재촉을 지나, 결국 도피로 모습을 바꿉니다. 기다림으로부터의 도피는 삶으로부터의 도피와 다르지 않습니다. 세상과의 완전한 결별을 위해 한강 다리 난간에 멈춰서고, 인터넷 사이트에 “내일 죽을 겁니다”라는 글을 올리는 것도 그래서일 겁니다. 겨울은 누구에게나 춥습니다. 당신과 나라고 달라질 건 없습니다. 당신이 외투로 버티는 겨울을 나는 털모자로 견딜 뿐입니다. 당신과 나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자신만의 겨울을 버티고 견딥니다. 성적과 취업, 결혼과 육아, 질병과 이별, 고독과 우울이라는 겨울 말입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렇게 맞서는 용기를 또 다른 겨울에서 얻는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을 버리려고 한강 다리 난간에 멈춰 섰던 사람도 그렇습니다. 그를 살린 건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던 소녀였습니다. 생면부지의 사람 앞에서 멈춰 선 소녀의 자전거 바퀴가 죽음의 강을 건너려는 그를 붙들었습니다. 인터넷 사이트에 “내일 죽을 겁니다”라고 글을 썼던 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루만 남은 그의 삶을 연장시킨 건 누군지도 모를 사람들의 댓글이었습니다. “내일은 내 월급날이야. 같이 맛있는 것 사 먹자.” “모레는 나랑 같이 노래방 가지 않을래?” “글피에 영화 보러 가자. 아바타 개봉했더라.” 그렇게 꼬리를 문 댓글은 한 달 동안의 약속으로 이어졌습니다. 신을 믿지 않는 내게도 신의 형상과 음성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신은 자전거를 탄 소녀의 모습으로 오셔서, 댓글 가득 아기천사와 관세음보살을 남겼습니다. 이 겨울, 당신의 봄은 어디만큼 왔습니까. 당신의 겨울 너머에도 소녀의 자전거가 멈춰 섰으면 좋겠습니다.
지속 가능한 개발과 안전은 공동체 발전의 중요한 두 축이다. 특히 생명과 직결된 안전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최우선 가치여야 한다. 이런 점에서 경기도와 경기주택도시공사가 K-컬처밸리 아레나 사업의 안전성을 들어 사업 기간을 조정한 점은 아쉽지만 불가피한 상황이기에 긍정 평가한다. 경기도와 경기주택도시공사는 지난해 10월 세계 최고 수준의 공연 기획사인 라이브네이션 컨소시엄을 K-컬처밸리 아레나 사업의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하고 협상을 진행해 왔다. 당초 계획대로라면 라이브네이션 컨소시엄은 2월 20일 기본 협약을 체결하고, 17% 공정률을 보이고 있는 아레나 구조물을 인수해야 한다. 그리고 그 구조물의 원형을 유지해서 아레나를 건설하게 돼 있다. 그런데 최근 라이브네이션 측은 향후 발생할 수 있는 잠재적 하자를 완벽히 차단하고, 국제적 신뢰를 확보하기 위해 기존 구조물에 대한 정밀 안전 점검을 요구했다. 이에 경기도와 경기주택도시공사는 기술적 안전성을 확보하는 것이 사업 성공에 필수불가결 하다고 판단하고 라이브네이션 의견을 수용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기존 구조물 점검에만 그치지 않고, 흙막이 시설과 지반 등 안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점검 요소들을 전반적으로 확대했다. 안전 점검 과업의 깊이와 범위가 대폭 확대됨에 따라, 안전 점검 기간은 기존 4개월에서 8개월로 연장됐다. 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위험 요소까지 사전에 확인해, 도민들이 안심하고 이용할 수 있는 기반을 탄탄하게 마련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로 보인다. 합리적 판단이다. 아무리 급하다고 실을 바늘허리에 감아선 바느질을 할 수 없는 이치와 같다. 대형 프로젝트일수록 일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 자칫 서두르면 오히려 일을 그르치거나 실패할 수 있는 개연성이 크다. 일에는 차례가 있어, 급함이 있어도 충실한 과정이 긴요하다. 더구나 주민 등 공공의 안전이 좌우되는 공공 건축물의 경우 절차적 원칙과 규정을 무시하면 참담한 재난으로 이어지는 사례를 숱하게 보아왔던 터다. 따라서 이번 기회에 글로벌 위상을 보일 수 있는 아레나 건설을 위해 세계적 기술력을 갖춘 국내 기술자를 참여시켜 국제 기준을 충족하는 정밀 안전 점검을 하길 바란다. 또한 K-컬처밸리의 장기적 가치와 아레나 건설의 완성도를 높이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복합 문화 거점을 조성하고 주민 삶에 기여하기 위해 경기도와 경기주택도시공사, 라이브네이션은 협상 연장 기간 동안 함께 논의할 주제도 적잖다. 무엇보다 글로벌 공연 수요에 대응할 수 있도록 아레나 사업 범위 확대다. K-컬처의 글로벌 흥행으로 라이브 공연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으나, 대한민국 내 대형 국제 공연장인 아레나 부족으로 인해 '코리아 패싱' 현상이 발생하는 등 인프라 확충이 시급한 상황이다. K팝 공연이 음원·음반 매출을 능가하는 핵심 산업이 됐으나, 이를 수용할 3~5만 명 이상 규모의 전용 공연장이 거의 없다. 대형 공연장 확보 실패로 해외 유명 아티스트들이 아시아 투어에서 한국을 제외하거나, 국내 가수의 공연이 소규모 공연장에서 열리는 현상이 빈번한 현실이다. 라이브네이션과 같은 글로벌 기획사와의 전략적 협의를 통해 세계적 수준의 아레나를 완성하고, 임시공연장을 활용하는 등 단계적인 인프라 확충이 필요한 시점이다. 안전성과 편의성, 다양한 활용성을 두루 갖춘 대형 공연장들이 완공되면 한국은 K-pop 종주국으로서의 위상을 강화하고, 관광 및 지역 경제 활성화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21세기는 정보화와 기술 발전을 기반으로 경제와 문화가 융합돼 문화적 가치가 핵심 경쟁력이 되는 ‘문화의 세기’다. 경제의 문화화와 문화의 경제화가 진전되면서 삶의 질 향상, 다양성 존중, 문화 향유권이 중요한 가치로 부상하고 있다. 사리가 이러하기에 경기도와 경기주택도시공사의 글로벌 수준 K-컬처밸리 아레나 사업이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