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가 중앙 지방시대위원회에 2조 6000억여 원 규모의 2025년 경기도 지방시대 시행계획을 제출했다. 시행계획에는 지역 간 불균형 해소와 지역맞춤형 발전을 도모하고 도민에게 더 고른 기회를 제공한다는 복안이 담겼다. 도는 이번 계획을 통해 제3차 지역균형발전사업, 지방소멸대응기금 사업 등 주요 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다. ‘기회의 경기’ 실현이라는 목표가 잘 구현돼 고질적인 불균형 해소에 의미 있는 성과를 도출해내길 당부한다. ‘손잡고 나아가는 기회의 경기’라는 비전 아래 마련된 ‘2025년 경기도 지방시대 시행계획’은 5대 전략, 22대 핵심과제, 136개 세부사업으로 구성됐다. 5개 전략 주요 목표는 사람과 기업이 성장하는 탄탄한 사회경제적 토대로 구축과 누구든 어디서나 편안한 일상을 누리는 질 높은 삶의 터전 창출이다. 도는 민선8기 주요 공약사업과 중앙정부의 지방 공약 등을 포함한 세부사업 추진을 위해 국비, 지방비, 민자 포함 총 2조 6136억 원의 투자 계획을 수립했다. 제3차 지역균형발전사업은 도내 저발전지역인 가평·양평·연천군, 포천·여주·동두천시의 산업경제, 관광인프라, 도로교통, 문화체육, 교육복지 등 주민 삶의 질과 지역경쟁력을 높이는 내용이다. 대표적인 사업은 포천시 태봉근린공원 조성 사업으로 도·시비 95억 원과 민간자본을 병행해 추진하는 사업이다. 구체적으로 공원 부지에는 커뮤니티 광장, 공영주차장, 생활 SOC뿐만 아니라 지방소멸대응기금과 연계한 에듀케어 플랫폼이 내년에 조성된다. 지방소멸대응기금 사업은 도내 인구감소지역인 가평·연천군, 인구감소관심지역인 포천·동두천시에 기반 시설 조성과 지역 활력을 제고하기 위해 추진한다. 특히 침체된 경기와 맞물려 인구 유출이 심화 중인 연천군에는 2곳뿐인 목욕탕 중 신서면 진주목욕탕이 폐업함에 따라 1층에 목욕탕과 북카페를, 2층에 외국인 게스트하우스를 조성해 외국인 계절 근로자, 외출 나온 군 장병, 관광객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한다. 해당 계획은 지난 25일 경기도 지방시대위원회에서 심의·의결을 마친 것으로서, 지방자치와 지역균형발전을 촉진하기 위해 ‘지방자치분권 및 지역균형발전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수립하는 법정계획이다. 도는 이번 계획을 통해 도민 주도 행정체계 구축, 인재가 성장하는 교육환경 조성, 첨단 산업 중심의 성장 동력 확보 등 여러 분야에서 지방자치와 지역균형발전을 실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겠다는 방침이다. 전국 최대의 지방자치단체장으로서 보폭을 넓혀가고 있는 김동연 경기도지사가 내세우는 대표적인 정책 콘셉트는 ‘기회’다. 김 지사는 최근 “대한민국에서 기득권은 임계치를 넘었다”며 “권력기관, 공직사회, 정치권에 이르는 기득권 공화국을 해체하고 기회 공화국으로 나아가야 새로운 대한민국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대통령실, 기획재정부, 검찰, 전관 카르텔, 거대 양당의 기득권과 국회의원 특권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제안이다. 경기도의 ‘2025년 경기도 지방시대 시행계획’은 김동연 지사의 이 같은 개념과 맞닿아 있다. 시행계획을 통해 도민 주도 행정체계 구축, 인재가 성장하는 교육환경 조성, 첨단 산업 중심의 성장 동력 확보 등 여러 분야에서 지방자치와 지역균형발전을 실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겠다는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 국가사회의 기득권 폐해가 임계치를 넘었다는 김동연 지사의 문제 인식은 백번 옳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각계각층에 무참히 번지고 있는 무한 갈등 국면에서 복원력을 상실해가고 있는 징후마저 뚜렷하다. 경기도가 그동안 백방으로 해법을 모색해온 균형발전 문제만 하더라도 이젠 정말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2025년 경기도 지방시대 시행계획’이 지역 간 불균형 해소를 견인해가는 강력한 마중물로 작동되길 기대한다.
지난 25일 윤석열 대통령의 최후진술을 끝으로 탄핵심판 변론기일이 종료됐다. 지난 해 12월 14일 국회가 탄핵소추의결서를 헌재에 접수하면서 시작된 탄핵심판은 두 차례의 변론준비기일과 11차례의 변론기일을 거쳤다. 12.3 비상계엄 당시 국회, 선관위 등 헌법기관에 대한 계엄군 투입 장면은 전 세계로 생중계 된 탓에 헌법상 쟁점은 크게 없어 보였으나, 헌재가 11차례의 변론기일을 진행한 것은 대통령 탄핵이라는 사안의 중대성 측면에서 정치적 고려를 한 것으로 보인다. 11차례의 변론기일 과정을 되돌아보면 탄핵심판의 본질에서 벗어난 정치적 주장이 대부분이었다. 대통령의 비상계엄 권한은 우리나라 헌법과 법률이 매우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비상계엄이 수반하는 국민의 기본권 침해가 엄청나고 일시적으로 헌정질서가 중단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12.3 비상계엄에서 윤 대통령이 군대를 동원해 헌법기관을 침탈하고, 국회의원 등 정치인과 언론인 등에게 체포 명령을 내린 것이 헌법과 법률에 위배 되는지 판단하는 것이 탄핵심판의 본질이다. 윤 대통령이 주장하는 부정선거 의혹, 야당의 일방적 국회 운영 등은 탄핵심판의 본질을 벗어난 정치적 주장일 뿐이다. 탄핵심판 과정은 윤 대통령에게 마지막 기회였다. 하지만 윤 대통령은 마치 본인이 왕조시대의 군주인양 망상적 세계관에 사로잡혀 벌인 참담한 실수에 대해 헌법과 국민들에게 참회할 마지막 기회마저 외면했다. 탄핵심판 내내 ‘통치행위’, ‘계몽령’ 타령 등 갖가지 궤변을 쏟아내며 국민을 염장지르는 행태만 보여왔다. 어느정도 예상은 했지만 68분 동안 A4용지 77장에 달하는 원고를 읽어내린 그의 최후진술은 최악이었다. 무엇보다 자신의 위헌 위법행위가 가져온 대한민국의 위기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었다는 것이 놀라웠고, 국민에 대한 형식적 사과조차 하지 않는 모습은 경악스러웠다. 윤 대통령은 ‘부정선거 음모론’에 더 나간 발언도 이어갔다. 최후진술에서 그는 ‘간첩’이라는 단어를 무려 22번 언급했다. 민주당은 물론 자신을 반대했던 모든 집단이 북한의 지령에 따라 움직였을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또한 그는 “저는 잠시 멈춰 서 있지만 많은 국민들, 특히 우리 청년들이 대한민국이 처한 상황을 직시하고 주권을 되찾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나서고 있다”거나 “엄동설한에 저를 지키겠다며 거리로 나선 국민들을 봤다”는 등 마지막 순간까지 일부 극우세력에 지지를 호소하며 일말의 뉘우침도 없다는 것을 확인시켜 줬다. 헌법을 수호하고 국민의 기본권을 수호해야 할 의무가 있는 대통령의 발언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뿐이었다. 지금은 헌재의 시간이다. 모든 변론 절차는 마무리 되었고, 재판관 평의 절차를 거쳐 최종 선고만 남았다. 이번 헌재의 결정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결정하는 순간이 될 것이다. 12.3 비상계엄으로 촉발된 경제, 민생, 안보, 외교, 사회통합 등 대한민국 전체에 드리워진 위기의 그림자를 확실하고 명쾌하게 걷어내야 한다. 헌재는 헌법적 가치와 헌법적 근거에만 충실하기 바란다. 어떠한 정치적 고려도 있어서는 안된다. 또한 비상계엄 행위에 대해 위헌, 위법 여부에만 충실한 평의과정이 되어야 할 것이고, 일부 이견이 있다면 며칠 밤을 세워서라도 만장일치 의견을 모아야 한다. 그래야 12.3 내란세력이 만들어 논 사회 갈등을 말끔히 봉합할 수 있다. 대통령이 군대를 동원해 헌법과 법률을 위반하면서까지 국헌문란과 헌정질서를 파괴한 행위가 면책된다면 대한민국에서 내란은 끊이지 않고 재발될 것이다. 탄핵이 기각된다면 윤 대통령은 복귀 후 바로 비상계엄을 발동할 것이 뻔하다. 국회는 봉쇄되고, 언론은 통제되며, 집회결사의 자유는 중지될 것이고, 정치인 법관을 망라하고 반대세력은 모두 체포될 것이다. 경제는 회복불능 상태에 빠져들 것이다. 이것이 이번 탄핵 평의의 본질이다. 대다수 법조계 인사들이 만장일치 탄핵을 예상하는 이유다. 대한민국을 위기의 수렁에서 건져 낼 역사적 책무가 헌법재판관들에게 지워진 것은 안타깝지만, 나라의 생명줄인 헌법을 수호한다는 일념으로 국민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결정을 내릴 것이라 확신한다.
저마다 우리 사회의 위기가 심각하다고 말한다. 누구나 위기가 나날이 심화되고 있음을 느낀다. 각종 차별과 혐오로 인해 갈등하고 분열된 우리 사회는 마침내 모든 이슈에서 극화되는 양상마저 보인다. 토론과 이해, 의견 수렴, 사회적 합의 도출을 위한 상호적 대화가 아니라 일방적 발화가 난무하고 있다. 의사소통은 이성에 기반을 둔 대화에서 가능하다. 대화는 상호 존중에 기반을 둔다. 자신과 타인을 연결해 공동체를 유지한다. 사적 영역과 공정 영역을 연결하는 여론도 대화에서 시작된다. 우리 편이 아닌 다른 편은 곧 적이 되는, 그래서 설득하지 않으려는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공허하다. 흔히 언론은 제4부로 불린다.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 각각이 독립적으로 권력을 행사하고 서로의 권력을 견제하는 삼권분립은 현대 민주주의의 토대다. 여기에서 언론은 삼권에 대한 감시를 통해 권력 남용을 막는다. 언론이 이러한 역할을 하고 삼권 못지않은 권력을 가질 수 있는 근거는 시민의 알 권리를 대리하기 때문이다. 언론 자유에 대한 근거도 마찬가지다. 언론은 삼권에 대한 여론이 형성되게 할 뿐 아니라, 여론을 삼권에 전달하기도 한다. 공론장으로서 언론이 작동하는 것이다. 이처럼 제4부로서 언론은 균형 잡힌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언론의 역할이 제대로 수행되지 않은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 현재 여러 민주주의 사회는 심각한 도전과 위기에 처해 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이는 상당 부분 언론 현실과 관련이 있다. 언론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회적 대화는 이뤄지지 않고 주의, 주장이 난무하고 있다. 여론 형성과 전달이 제대로 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많은 언론보도는 ‘열린 입과 닫은 귀’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무엇을 듣고 생각해야 하는지, 무엇에 대해 얘기해야 하는지를 제시하지 않는다. 기록하는 기자는 많지만, 질문하는 기자를 찾기 어렵다. 사실을 보도하려 애쓴다고 하지만, 사실 너머의 진실에 다가가려는 노력은 드물다. 그러다 보니 언론보도가 사회 갈등과 분열의 근거로 제시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역설적이지만 현재 사회 갈등과 분열을 조장한다고 비판받는 언론의 전통적 주요 기능 중 하나는 사회 통합이다. 즉 언론은 다양한 의견과 가치를 반영해 보도한다. 또한 토론의 장을 제공해 시민들 간 의사소통을 증진시키고 상호 이해를 돕는다. 이를 통해 공동체 발전을 위한 사회적 합의에 도달함으로써 공동체 의식과 신뢰를 강화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언론의 사회 통합 기능은 현재와 같은 민주주의 위기 상황에서 강조될 수밖에 없다. 최근 우리는 국내외 사례에서 민주주의 사회체제가 얼마나 연약한지를 목격해 오고 있다. 공고하다고 믿었던 민주주의가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불안감이 팽배하다. 민주적 절차는 사라지고 오직 세 대결만이 부각되는 현실은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를 깊게 한다. 이에 우리 언론에 대한 아쉬움이 크다. 사회 극화를 조장하는 주장이나 의견을 그대로 싣는 보도가 적지 않다. 있는 사실을 그대로 보도한다고 하지만, 검증 없는 단순 전달은 언론의 역할이 아니다. 무엇보다 공론장 역할을 방기하는 언론이 여럿이다. 사회 갈등과 분열의 원인이라는 오명은 우리 언론이 자초한 부분이 많다.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 복원을 위해 언론의 사회 통합 기능이 강조돼야 할 지금이다.
분류가 잘 된 것은 아름답지요. 이를테면, 계절을 나누고 때와 장소에 맞게 차려입을 수 있도록 정리가 된 드레스룸 말입니다. 엄마의 옷장은 그야말로 옷 무덤이었어요. 나는 엄마의 허락을 받아 옷장에서 꺼낸 옷들을 방바닥에 쌓았습니다. 옷이 든 바구니와 서랍까지 쏟자, 방 한가운데가 봉분처럼 우뚝 솟았습니다. 온갖 색이 뒤섞여 한쪽은 푸르고, 한쪽은 검고 붉어 고르게 자라지 못한 뗏장 같았어요. 헤집어 놓은 옷에서 취향 같은 것은 발견할 수가 없었어요. 엄마의 옷에는 비싼 값을 자랑하는 라벨 대신 고단했던 삶이 붙어있습니다. 쌓인 옷가지는 헌옷 수거함에서 나온 것 같아, 다 갖다 버려도 아깝지 않아 보였는데요. 신기하게도 엄마의 눈에는 버릴 것이 없는지, 자꾸만 내 주변을 서성였습니다.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벌이며, 나는 버릴 것을 더 많이 골라냈습니다. 옷은 날개가 아니었습니다. 무릎이 나오고 보풀이 인, 수많은 계절이 한꺼번에 걸어 나왔습니다. 주머니 속에서 동전이 나오고 포장지가 붙어버린 사탕도 나왔습니다. 다른 옷에 짓눌린 스웨터의 한쪽 팔이 축 늘어져 있고, 치마는 마치 보자기 같았어요. 세탁을 잘못해서 줄어버린 니트와, 늘어진 티셔츠를 다 입을 수 있는 엄마의 몸은 놀랍기만 합니다. 엄마는 몰래 옷을 추려내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기도 했어요. 내 눈빛을 못 이기고 슬그머니 다시 내려놓기는 했습니다. 입을 것과 버릴 것을 분류하며 엄마의 세월을 갈라놓았습니다. 옷 속에서 시간은 십 년이고 이십 년이고 훌쩍 넘나들었어요. 좋은 옷은 아끼느라 못 입고, 낡은 옷은 익숙해서 버리지 못했습니다.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속옷을 버리지 못했고, 동생과 내가 싫증나서 입지 않은 오래된 옷도 있었어요. 엄마는 외할머니에 대한 기억과 자신을 엄마라 부르는 딸들, 그 사이에서 날마다 늙어갑니다. 옷을 들출 때마다 엄마 냄새가 났는데요, 그 냄새가 언제까지나 사라지지 않았으면, 잠시 헛된 마음을 품었습니다. 낡고 헤진 것들을 골라내느라 애를 먹었습니다. 엄마의 옷장, 아니 옷 무덤 속에서 버릴 것과 입을 것으로 분류하는 일이 쉽기도 했고 어렵기도 했습니다. 나의 기준으로는 쉬웠지만 엄마의 마음과 뜻을 헤아려 가치를 매기는 일은 어려웠습니다. 한눈에 보이도록 정리한 옷장은 보기에 좋았습니다. 한 사람의 이미지를 완성하는 옷은, 그가 품은 욕망의 기호로 읽히기도 하지요. 자신을 표현하고 드러내기 좋은 수단이면서 몸의 결점을 숨길 수도 있으니까요. 어쩌면 숨기려는 마음은 더한 욕망일지도 모릅니다.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입을까? 엄마의 옷을 비우는 데는 낡고 헤진 것이 기준이 되었지만, 누군가는 더 아름다운 이유와 의미로 비워내고 정리하겠지요. 환절기의 옷장을 정리하는 일은, 다가오는 계절을 마중하는 일 같아요. 어디만큼 왔는지, 저편을 향해 미리 손을 흔드는 일. 봄을 기다리며 엄마의 옷장을 정리했습니다. 유독 길게 느껴지는 겨울이었어요. 슬픔과 혼돈의 겨울을 지나 봄을 기다리는 마음에 조급함이 입니다. 언 땅을 뚫고 올라올 새순을 기다립니다. 선명하게 드러날 색을요. 봄이 오면 비워낸 엄마의 옷장에도 화사한 봄옷 한 벌 들여야겠습니다. 옷장 속에 혹시 운 좋게 내 눈을 피한, 요란한 꽃무늬 스카프 같은 게 걸려있을지도 모르겠어요. 버리지 못한 것이 무엇인지, 이제 나의 옷장을 열어볼 차례입니다. 옷장 속에 꼭꼭 숨겨진 나의 색(色)을 보겠습니다.
나 때는 말이다, 호환마마 보다 무서운 것이 빨갱이였다. 학교 화단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는 이승복 어린이 동상이 있었다. 세종대왕, 유관순 동상보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를 외쳤다는 이승복 어린이 동상이 더 잘 보이는 곳에 세워졌다. 1년에 한 차례씩 꼬박꼬박 반공웅변대회가 열리면 웅변학원에서 써준 북한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찬 원고를 목이 터져라 외치고는 했다. 북한에서 날아왔다는 삐라를 주워 경찰서에 가져다주면 책받침도, 공책도 푸짐하게 주었다. 잊을만하면 간첩단 사건이 터졌다. 한 가족이 간첩이기도 했고, 심지어 어촌의 한 마을 전체가 간첩이기도 했다. 수지 김이라는 간첩은 홍콩에서 남편을 납치해 북한에 데려가려다 의문사를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간첩단 사건 중 상당수는 세월이 한 참 지난 후 재심을 통해 무죄로 뒤집혔다. 수지 김은 간첩은커녕 남편에게 살해당한 억울한 피해자로 밝혀졌다. 간첩 사건은 유독 선거 때 터지고는 했다. ‘간첩’이라는 두 글자는 모든 뉴스를 집어삼켰다. 사회문제든 정치문제든 그 어떤 이슈도 간첩 사건 앞에서는 가십거리조차 되지 못했다. 나중에 알려진 일이지만 간첩 사건 뒤에는 어김없이 중앙정보부, 국가안전기획부 등 이름은 바뀌었지만 같은 조직인 현 국가정보원이 있었다. 그들이 조작해 낸 간첩단 사건 중 후에 재심을 통해 무죄가 선고된 사건만 해도 수두룩 빽빽일 것이다. 나 때는 그랬다. 빨갱이가 가장 무서웠고, 반공은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였다. 하지만 어느새 세상이 바뀐 듯했다. 수사기관이 총동원되어, 심지어 재판부까지 하나로 짬짜미로 묶여 무고한 대학생들을 빨갱이로 몰아넣은 부림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변호인’이 흥행에 대성공했다. 빨갱이 영화가 극장에서 상영되고 천만이 넘는 시민이 관람하다니 천지가 개벽할 일이었다. 그렇게 빨갱이 사냥은 우리 곁을 떠나 도시전설로 남는 듯했다. 그런데 말이다, 세상이 바뀌기는 정말 바뀐 것 같다. 집권 여당인 국민의힘 전 대변인인 김민수는 홍장원 전 국정원 제1차장을 가리켜 북한이 보낸 빨갱이라고 했다. 수없이 많은 간첩단 사건을 조작해 냈던 중앙정보부, 국가안전기획부의 후신인 국정원의 ‘넘버 투’가 빨갱이라니, 세상 참 많이 변했다. 아직은 대통령인 윤석열은 헌법재판소 최후 변론에서 정부를 비판한 모든 행위를 싸잡아 “북한의 지령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대통령이 북한의 지령을 받은 빨갱이라고 지목한 그들은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는 것 같다. 지난 수십 년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레드컴플렉스, 빨갱이 사냥, 반공 이데올로기는 이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접어드는 것 같다. 빨갱이를 때려잡던 정보기관 이인자가 빨갱이라 공격 받을 정도로 '빨갱이'는 희화화되었다. 대통령이 빨갱이라 지목해도 정신 나간 이의 헛소리 정도로 치부될 정도로 빨갱이의 힘은 희석되었다. 이제 정말 빨갱이는 '라떼'가 된 것 같다. 우울한 현실에서 찾은 그나마 한 줄기 희망이지 않을까? 빨갱이가 “라떼는 말이다”의 소재가 되었으니.
이제 웬만한 식당은 테이블마다 키오스크가 있어서 손님이 앉은 채 주문하고 계산까지 한다. 무인커피숍에서는 로봇이 주문한 커피를 만들어 준다. 사무실에서도 많은 일들을 AI가 대신하고 있다. 번역은 말할 것도 없고 기획서 작성, 광고물 제작까지 생성형 AI에 맡겨 본다. 사람은 그저 제대로 되었나 훑어보며 감탄사만 연발하면 되게 되었다. 산업 현장도 마찬가지다. 자동차뿐만 아니라 집도 로봇 공정으로 며칠 만에 뚝딱 지어낸다. 부식을 막기 위해 대형 선박의 외관을 세척하는 일도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잠수부 대신 로봇이 수행하고 있다. 오픈 AI의 챗GPT를 필두로 저비용 고성능의 딥시크 R1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생성형 AI 서비스들이 출시되어 경쟁하고 있다. 이를 직접 사용해보고 효과를 체감하면서 AI 파급력은 커졌고, 우려도 높아졌다. 기술혁신이 일자리를 없애고 양극화를 심화시킬 것이라는 우려는 산업혁명의 전 과정에 등장하였다. 산업혁명기마다 많은 전문가들이 ‘이번은 다르다’고 주장했지만 결과적으로 일자리 수는 줄지 않았고 일의 형태가 바뀌어 왔다. 그러나 AI가 일으킨 새로운 4차 산업혁명은 다르다는 주장이 강하게 제기되기도 했다. 세계경제포럼의 ‘일자리의 미래 2023’ 보고서는, 2023년부터 2027년까지 5년간 8300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생산현장의 일자리를 AI가 대체하게 되더라도 이를 통해 늘어난 수익이 새로운 투자를 유발하면서 새 일자리들을 창출한다고 분석한다. 뿐만 아니라 AI로 인해 새로운 직업도 생겨나고 있다. 데이터 분석가, 머신러닝 엔지니어, 로봇 유지보수 전문가 등이 그것이다. 1970년대 미국의 로봇 공학자 한스 모라벡은 부호화되어 있는 정보는 인공지능에게는 쉽지만 인간에게는 어렵고, 반대로 부호화하기 힘든 정보는 사람에게는 쉽지만 인공지능에게는 어렵다는 ‘모라벡의 역설’을 주장했다. 모라벡 패러독스는 인간이 AI와 더불어 협업사회, 공존시대를 이끌어갈 것을 예상하게 한다. 감성이나 창조성으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는가 하면, 사람이 하던 일이었는데 완전히 자동화되어 이제는 인공지능이 전적으로 수행하는 일이 있다. 인공지능이 사람이 하는 일을 보조하는 일도 생겼고, 사람이 인공지능이 하는 일을 보조하는 일자리도 만들어졌다. 그리고 인공지능이 사람의 일을 확장하여, 그동안은 사람이 할 수 없던 일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새로운 일도 등장했다. e-커머스나 메타버스가 바로 과거에는 불가능했으나 인공지능으로 가능해진 일자리들이다. AI 기술의 발전은 경제적 불평등을 심화시킬 수 있어 AI패권을 두고 국가 간 갈등이 드러나기도 한다. 이 달 10일 프랑스에서 개최된 인공지능 정상회의에서 ‘사람과 지구를 위한 지속 가능하고 포용적인 인공지능에 관한 선언문’에 미국은 서명하지 않았다. 인공지능을 둘러싸고 중국과의 패권경쟁에 나선 트럼프 행정부는 성장지향적인 인공지능 정책으로 미국이 인공지능 기술의 세계 표준이 되어야 한다는 뜻을 드러낸 것이다. 미래 사회에 관한 여러 저술로 주목을 받은 제이슨 생커는 그의 저서 '로봇시대 일자리의 미래'(2020)에서 미래 사회를 로보칼립스(Robocalypse)와 로보토피아(Robotopia) 양극으로 대별하였다. 로보칼립스는 모든 직업이 자동화로 인해 사라지고, 기계가 인류를 멸망케 하는 극단으로 조명한다. 반면 로보토피아는 로봇이 모든 일을 다 하므로 사람들은 무한히 자유를 누리게 되는 세상을 그린다. AI가 불러올 미래는 단지 기술과 일자리 문제에 국한 되는 것이 아닐 것이다. 기술 경쟁 너머 자국을 위한 규제와 정책이 맞물리게 되는 지점은 로보칼립스와 로보토피아 사이 어디쯤이 될까.
후진국에서나 벌어질 법한 사고가 또 터졌다. 안성시 서운면 산평리 서울세종고속도로 천안~안성 구간 9공구 천용천교 건설 현장에서다. 교각에 올려놓았던 상판 4개가 떨어져 내렸다. 공사현장 상부에서 작업 중이던 노동자 10명도 52m 아래로 추락했다. 4명이 목숨을 잃고 6명이 중·경상을 당했다.(관련기사:경기신문 26일자 1면, ‘고속도로 다리 통째로 우르르…사상자 10명 발생’) 이 사고로 목숨을 잃은 노동자들의 명복을 빈다. 아울러 유가족들에게 위로를 전한다. 부상자들의 쾌유도 기원한다. 현장을 지나가던 차량 블랙박스에 찍힌 사고 현장 모습을 보면 흡사 재난영화의 한 장면처럼 소름이 돋는다. 지난 1994년 성수대교 참사 때의 처참한 기억도 소환된다. 현장을 취재한 기자는 당시의 처참했던 공사장 상황을 보도했다.(경기신문 25일자 인터넷판, ‘아수라장 된 안성 고속도로 공사장 붕괴 사고 현장’) ‘사고 현장은 시멘트와 철근 등 붕괴된 상판 잔해로 아수라장이 됐다. 교각 위에는 작업자 안전을 위해 설치된 철제 울타리가 무너진 상판과 충돌해 휘어 있었으며, 상판을 설치하는 데 사용된 런처 장비도 휜 채로 아슬아슬하게 놓여 있다.’ 그러면서 인근 주민들의 놀란 심정을 전했다. “아내와 외출 준비를 하던 중 갑자기 ‘쿵’ 하는 굉음이 들렸다. 급히 나가 보니 어제까지 멀쩡했던 다리가 사라져 있었다”며 “생전 들어본 적 없는 소리와 함께 땅이 흔들려 지진이라도 난 줄 알았다”는 것이다. 다른 주민도 “땅이 울리고 흰 먼지가 자욱했다. 매일 아침부터 작업자들이 나와 일하던 곳이라 피해가 클 것 같아 안타깝다”고 했다. 사고 직후 소방당국은 대응2단계를 발령했다가 곧바로 ‘국가소방동원령’으로 격상했다. 국가소방동원령은 해당 재난지역 지방정부의 소방력 만으로는 대응하기 어렵다고 판단될 경우 국가 차원에서 소방력을 재난현장에 동원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경기도소방재난본부, 충남소방재난본부는 물론 전국의 119특수구조대, 119화학구조센터 대원과 장비 등이 동원됐다. 경기남부경찰청은 78명 규모의 수사전담팀을 편성하고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했으며 고용노동부도 사고 직후 작업 중지 명령과 함께 박상우 장관을 본부장으로 사고대책본부를 수립하고 2차관, 한국도로공사 사장 등을 현장에 급파하기도 했다. 대한적십자사 경기도지사도 긴급구호활동을 전개했다. 구호차량과 직원, 봉사원을 급파해 지원했다. 김동연 경기도지사는 사고소식을 듣자마자 예정된 행사 참석을 취소하고 사고 현장에 도착, “모든 자원을 동원해서 인명구조를 최우선으로 하라”며 빠른 시간 내에 구조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면서 “작업하고 있는 소방대원들 안전 확보에도 최선을 다해달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김진경 경기도의회 의장 역시 앞서 예정된 행사 참석을 취소하고 고속도로 붕괴사고 현장을 찾아가 “가능한 모든 자원을 투입해 상황이 잘 수습될 수 있도록 전력을 다해달라”고 당부했다. 아직 정확한 사고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소방당국은 이번 사고가 교각 위에 교량 상판을 올려놓던 과정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경찰 수사 결과가 나오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아직까지는 섣불리 원인을 논할 수 없다. 현장 감식 등을 통해 구체적인 사고 원인이 규명돼야 한다. 따라서 경찰의 치밀한 수사와 함께 시공사인 현대 엔지니어링의 적극적인 협조가 필요하다. 처참한 사고 현장모습을 보면서 떠오르는 말은 ‘안전불감증’이다. 아직도 건설 현장을 비롯, 이 나라에 안전 불감증이 만연해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국민의힘 김대식 원내수석대변인의 말처럼 “대형 사회기반시설 건설 과정에서의 안전관리 부실과 구조적 결함이 원인이 된 것은 아닌지 철저한 조사”가 이루어져야 한다. 더불어민주당 윤종군 원내대변인의 “사고의 원인을 명확히 규명해 철저한 재발방지 대책을 수립해야 한다”는 말에도 적극 공감한다. 언제까지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일’만 반복할 것인가.
새 학기 시작을 앞두고 학교 안전 문제와 입시·교육과정 변화로 인한 불확실성 증가로 학생, 학부모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대전 초등학교 학생 피살사건을 계기로 불거진 학교 안전 이슈에다가 입시제도 등 교육 환경이 어느 것 하나 안정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정부와 지역 교육청 등 교육 당국의 신속한 대책 마련으로 새 학기 교육 시스템을 완비해야 할 것이다. 교육 환경의 불확실성이 학생과 교육자들의 안정감을 크게 해치고 있다. 경기신문 취재에 따르면 내달 4일 2025학년도 1학기가 시작되지만, 개학 전부터 이어진 각종 사건 사고와 교육과정 변화로 학교 현장에는 우려가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 10일 대전 서구의 한 초등학교에서 정신이 온전치 못한 40대 교사가 학교에 재학 중이던 1학년 학생을 살해하는 충격적 사건이 발생했다. 교육 당국은 해당 사건이 방과 후 돌봄 시간에 발생했다는 점에 주목해 대책 마련에 속도를 내고 있으나 대책이 미흡하다는 지적은 끊이지 않고 있다. 특히 임용시험에서부터 ‘고위험 교사’를 거른다는 방향의 정책은 사회적 낙인효과로 인한 부작용, 실효성에 대한 의문 등으로 발표 단계에서부터 교원단체, 일부 학부모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경기도교육청도 교육부 방침에 맞춰 늘봄학교에 참여하는 모든 학생의 대면 인계, 동행 귀가를 원칙으로 한다는 공문을 각 교육지원청에 발송했으나 학부모들의 반발이 심한 상황이다. 맞벌이 등으로 아이를 돌볼 여유가 없어 돌봄교실을 이용하고 있는 학부모들의 상황과 어긋나는 게 가장 큰 문제다. 개학이 며칠 남지 않은 상황에서 학부모들의 우려는 이만저만이 아니다. 대낮에 하교할 때도 대면 인계, 동행 귀가가 필수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면 공교육 서비스는 더 이용하기 어려워지지 않겠느냐는 학부모들의 걱정 속에서 학생, 교사 모두를 불편하고 위축되게 만드는 정책에 대한 이견이 표출되고 있다. 뿐만이 아니다. 중·고등학교의 경우도 입시 변화, 정책 변화로 인한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올해는 고교학점제가 전면 적용되는 첫해인데다가 AI 디지털교과서 도입, 특히 2028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대변화’가 예고된 만큼 어느 해보다도 변화가 큰 해다. 2028학년도 수능은 기존 ‘개별과목’에 대한 평가에서 ‘통합과목’에 대한 평가로 변화하며 국어·수학·탐구 과목은 선택형이 아닌 통합형으로 일원화된다. 수능 개편안과 서술형 확대로 입학 전 걱정이 큰 학생들은 입시 정보를 하나하나 파악하고 이해해 맞는 전략을 짜기가 어렵다고 토로한다.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에게는 의대 정원 확대도 입시 불확실성을 높이는 큰 요소다. 최상위권 학생, ‘N수생’들이 지원하는 의대 증원 규모에 따라 지원하고자 하는 학교와 학과의 입시 결과가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당초 교육부는 입시 계획에 차질이 없도록 이달 말까지 이번 학년도 의대 증원 규모를 확정 짓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하지만 2025학번 의대 신입생들에게도 휴학을 강요하는 등 의대생들의 복귀 조짐이 보이지 않아 증원 확정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교육 정책과 교육 환경은 예측과 신뢰가 가능해야 한다. 교육이 갖는 영속성이라는 특성 때문에, 급변이 불가피할 경우를 제외하고는 절차가 안정돼 준비하는 과정에서부터 아이들이 흔들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천만뜻밖으로 발생한 ‘정신질환 교사에 의한 초등학생 피살’이라는 끔찍한 사건으로 인해 올해는 학교 안전 문제에 중대한 의문부호가 떠오르는 바람에 교육계의 혼란은 더욱 심해졌다. 안전한 학교 정책 구축에서부터 입시 정책, 학교 운영 정책에 이르기까지 관심 정책들이 하루빨리 정돈돼야 할 것이다. 학부모와 학생들이 교육 정책 당국과 학교를 믿고 마음 편히 살 수 있는 국가사회가 돼야 한다. 믿을 만한 교육 환경의 조속한 구축을 위해 모두가 최선을 다해야 할 시점이다.
1795년 윤2월 9일, 조선왕조 통틀어 가장 장엄한 7박 8일의 정치 퍼포먼스가 시작됐다. 양력으로 환산하면 3월 29일로 매화꽃이 한창인 봄이었고, 길가 여기저기에는 농사일을 시작한 백성들이 바삐 움직였다. '원행을묘정리의궤(園行乙卯整理儀軌)'(1796)에 수록된 행렬 그림인 반차도(班次圖)에는 1,779명의 인원과 779필의 말이 등장하고, 정조의 친위대인 장용영(壯勇營)을 비롯하여 군사 4,500여 명을 합하면 6천 명을 훌쩍 넘는 거대한 규모였다고 한다. 권위주의 시대는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정조의 효심만을 부각시키며 정치적 의미를 축소하고자 했다. 하지만 민주주의 시대인 요즘도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은 정치적으로 계획되고 정치적으로 해석된다. 대통령의 결정이 국가와 국민의 삶에 미치는 힘이 그 누구보다도 지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물며 권력이 혈연을 통해 승계되던 조선에서는 어떠했겠는가?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할아버지 영조(재위: 1724~1776)에 이어 1776년 3월 10일에 임금의 자리에 올라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를 외친 지 20년이 다 되어가는 시점이었다.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환갑잔치를, 자신이 펼치고자 했던 개혁정치의 불가역성을 선언하고 과시하기 위한 정치 퍼포먼스로 만들고자 1년여 전부터 치밀하게 계획하여 실행했다. 고도의 이미지 정치다. 창덕궁에서 화성행궁-현륭원을 오가는 5일간의 행차도 예외일 수 없다. 단순히 안전하게 오갈 수 있는 길의 의미를 뛰어넘는 정치적 함의를 부여하여 검소하면서도 장엄한 정치적 관광(觀光)의 모습으로 계획했다. 이 소중한 역사의 길이 옛 문헌의 기록과 그림, 길과 그 위에 점점이 펼쳐지는 많은 유적과 이야기로 21세기의 우리에게 전해지며 함께 걸어보지 않겠냐는 손짓을 하고 있다. 조선 최고의 지도 제작자 김정호의 '대동지지'에 수도 서울에서 융건릉까지 100리로 기록돼 있으니 ‘정조의 원행을묘 백리길’이라 명명하면 딱 좋지 않을까? 필자는 2024년 9월 14일과 15일 이틀에 걸쳐 창덕궁의 돈화문부터 융건릉의 입구까지 전 구간을 직접 걸어봤다. 18일에는 동일한 코스를 자동차로 이동하며 현대의 미터법으로 측정했는데, 정조의 원행을묘 날짜별 이동 코스와 거리는 이렇다. ①윤2월 9일 [오전] 창덕궁 돈화문 → 숭례문(2.8km) → 용양봉저정(5.8km) [오후] 구로디지털단지역(5.6km) → 시흥행궁(4.0km) * 구간 (18.2km) ⓶윤2월 10일 [오전] 시흥행궁 → 안양역(6km) → 사근행궁(7.5km) [오후] 노송지대(4.1km) → 화성행궁(5.2km) * 구간(22.8km) ⓷윤2월 12일 [오전] 화성행궁 → 세류역(4.2km) → 안녕리 표석(4.9km) → 융건릉입구(2.9km) * 구간(12.0km) 전 구간의 합계는 53.0km인데, 하루 만에 걸어서 돌파할 현대인은 없을 것 같다. 첫째 날 18.2km, 둘째 날 22.8km, 셋째 날 12.0km의 일정을 그대로 따라 걸어가면 도전해 볼 만하지 않을까? 혹시 저질 체력의 소유자라면 오전과 오후의 일정을 각각 하루로 계산하여 5일로 잡으면 별로 어렵지 않을 것 같은데, 너무 무리인가? 필자는 이후에도 두 번을 더 걸었다.
‘우(迂)’는 우여곡절(迂餘曲折)의 첫 글자이다. 우여곡절은 일상에서 상투어처럼 쓰이는 사자성어이다. 쓰기에 따라서는 고급스런 느낌도 준다. 국어사전에서는 ‘여러가지로 뒤얽힌 복잡한 사정이나 변화’로 풀이해 놓았다. 상투어로 보인다는 건, 말의 뜻이 자못 심오한데도 그런 것 별로 의식하지 못하고 그냥 기능적으로만 쓴다는 뜻이다. 현대인의 약점이기도 하다. 한자 ‘우(迂)’는 잘 쓰지 않는 한자다. '한자 자전'에서 이 글자를 찾으면 ‘멀다’라는 뜻으로도 나오고, ‘에돌다’라는 뜻으로도 나온다. 그런데 ‘멀다’라는 뜻이나 ‘에돌다’라는 뜻은 그야말로 서로 멀지 않다. 사촌쯤 되는 친밀한 뜻이다. ‘에돌다’라는 말을 국어사전에서 다시 찾아보면, ‘곧바로 나아가지 않고 멀리 피하여 돌다’로 풀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迂)’가 지닌 ‘멀다’라는 뜻에는 단순히 거리가 멀다는 뜻보다는 그 어떤 대상을 정면으로 다가가지 않고, 오히려 그걸 멀리 두고 돌아서(피해서) 가려 한다는 뜻이 숨어 있다. ‘우회(迂回)’라는 말이 떠오른다. 곧바로 가지 않고 멀리 돌아서 가는 것이 ‘우회(迂回)’이다. 이 한자어에 대응하는 고유어가 ‘에돌다’임을 확인할 수 있다. 살아가다 보면 곧바로 가지 못하고 멀리 돌아서 가게 될 때가 있다. 우회하지 않고 살아 온 자, 누가 있겠는가. 때로는 가던 길을 울면서 돌아선 적도 있고, 때로는 위기 앞에서 돌아서 가겠다고 스스로 결심한 적도 있다. 누군가 자기 인생의 ‘우여곡절’을 절절하게 말하며 ‘우(迂)’의 시간을 고백하는 걸 듣노라면, 그 우회가 운명적이다 하는 생각이 든다. ‘우회의 인생길’은 내 현실을 감당해 내려는 깨달음의 길일 수도 있고, ‘도전의 길’일 수도 있다. 우회의 인생길, 거기에는 하늘의 섭리가 배경으로 놓이기도 하고, 인간의 깊은 성찰이 스며들기도 한다. 모세의 지도 아래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을 탈출하여 바로 가나안 땅으로 오지 않고, 광야에서 40년을 에돌며 우회했던 사건에 대한 성서 해석학적 의미는 참으로 풍성하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回軍)은 긴 역사의 흐름으로 보면 ‘우회의 지혜’를 살린 것이라 할 수 있다. 신흥하는 세력 명(明)을 치러 곧바로 나아가다가 그 길을 우회하고 되돌려 온 것은 그가 뒷날 조선을 세워 나라를 보전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15세기 유럽의 해양 세력들이 바다를 통해 인도로 가겠다고 해서 나아갔지만, 그들이 도달한 곳은 오늘날의 아메리카 대륙(서인도 제도)이었다. 자기들도 모르는 우회의 길을 갔던 셈이다. 그 우회는 오류였던가? 그렇지 않다.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사건으로 흘러가게 했다. 전쟁의 기술에서는 적의 강한 예봉(銳鋒)은 무조건 피하여 우회할 것을 강조한다. 삼국지에 수백 번도 더 나오는 장면이다. 이보전진(二步前進)을 위한 일보후퇴(一步後退)에는 우회의 진경이 담겨 있다. 적을 험지로 유인하려고 후퇴를 연출하는 것은 우회가 지략의 경지에 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인생의 먼 길을 가며 우회를 생각지 않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돌아서 가야만 닿게 되는 것이 인생 행로의 숨은 질서라는 너그러운 생각도 든다. 돌아서 가는 우회의 생(生)이 있으므로 해서 그 인생은 모종의 심연을 배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