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시의 큰 나무인 최동호 선생이 지난달 20일,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에서 한국문학의 미래에 관한 뜻깊은 강연을 했다. 주제는 ‘디지털 전환기 한국 현대시의 지향점과 시노래의 문화적 가치’였다. 이 강연은 MIT의 인간통찰 협력연구 프로그램인 MITIC(MIT Human Insight Collaborative)가 주관하는, ‘마스터 클래스 시리즈’의 초빙 강사 자격으로 이루어졌다. 선생은 여기서 해당 주제에 대해 심도 있는 견해를 제시했고, 현지 청중에게 깊은 감명을 남겼다. 한국문학이 주요한 세계 무대에서 그 의의와 보람을 증명한 ‘사건’이자 지금까지 없던 새로운 주제론적 접근이었고, 한국문학으로서는 새 강역(疆域)의 개척이었다. 한국문학의 세계화는, 안방에 앉아 구두선(口頭禪)으로 내놓는 주장에서 말미암지 않는다. 새로운 아이템을 들고 그 현장을 찾아가며, 활달한 소통으로 현지 문화예술인들의 공명(共鳴)을 자아내는 기량과 노고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한국의 문학계나 문화정책 당국에서는 이와 같은 구체적 사례를 부양(浮揚)하는 데 수고를 아끼지 않아야 한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일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기에 그렇다. 선생은 미국, 러시아, 이탈리아, 스페인, 헝가리, 루마니아, 몽골, 몰드바 등의 나라에서 시집이 출판되었고 1921년 미국 ‘제니마문학상’, 몰도바공화국 ‘작가연맹문학상’, 2024년 이탈리아 코모시의 국제시축제 ‘올해의 최고시인상’, 그리고 2025년 루마니아 잘라우시작가연맹 ‘그랑프리상’의 수상자다. 한국 시인으로서는 이제까지 없던 이력이요 수상 경력이다. 한국문학 세계화의 최전방 첨단 세력으로 선생을 주목하는 이유다. 그런가 하면 국내에서는 1996년 현대불교문학상을 시작으로 대산문학상, 박두진문학상, 만해대상, 정지용문학상 등 다수의 문학상을 수상했다. 2004년 한국시학회 회장을 시작으로 한국 문학평론가협회 회장, 한국시인협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2019년 대한민국예술원 문학분과 회원이 되었으며, 2025년 3월 ‘문학의집서울’ 이사장이 되었다. 1980년 전후부터 30년 넘게 비평가로 활동하면서 동양 시학을 천착하여 ‘서정시의 삼각형이론’, ‘디지털 사행시’ 등의 이론을 정립하여 한국 시학 이론에 중요한 이론적 토대를 마련한 당사자이기도 하다. 필자가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대학 4학년 때였다. 당시 선생은 경남대에서 경희대로 이적(移籍)했고, 필자는 언론사 지망생에서 대학원 진학으로 갓 생애의 진로를 바꾼 시기였다. 그 젊은 나이에 문학평론가의 길로 접어든 어간(於間)에 선명한 푯대로 선생이 계셨다. 그의 정신주의와 생명사상은 그 무렵에 벌써 찬연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돌이켜 보면 언제나 존경의 아름이면서 동시에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서 있는 분이었다. 그는 강단에서 말로만 가르치는 교수가 아니었으며 근본과 실용을 포괄하는, 눈이 높고 국량(局量)이 넓은 스승이었다. 또한 가장 많은 제자를 문단에 내보낸 명조련사이기도 했다. 선생과 더불어 선인선과(善因善果)의 미덕을 쌓아가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 상대방의 문제다. 당연히 필자도 그렇다.
지난 2월 25일, 전국 법원장들이 한자리에 모여 국회가 개정을 추진하는 ‘사법개혁 3법’에 대해 집단적인 우려를 표명했다. 사법부의 독립성을 침해할 소지가 크다는 것이 이들의 주된 논리다. 하지만 국민의 시각에서 볼 때, 이번 법원장 회의의 모습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특권의식이 그 배경이고, 작금의 사법 불신을 자초한 과오에 대한 통렬한 반성이 결여된 적반하장식 행보로 비춰질 뿐이다. 사법부가 ‘독립’이라는 가치를 내세우기 전에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질문은 하나다. 과연 우리 법원이 국민의 상식과 법 감정에 부합하는 정의를 실현해 왔는가 하는 점이다. 지난 해 대선국면에서 보여준 대법원의 대선 개입 논란은 사법부의 독립성에 치명적인 오점을 남겼다. 특히 국민적 공분을 샀던 ‘윤석열 내란수괴 구속취소’와 같은 납득하기 어려운 판결들은 사법부가 법리가 아닌 정치를 하고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헌법과 법률에 따라 양심껏 심판해야 할 법관들이 오히려 권력의 눈치를 보거나 특정 진영의 방패막이 역할을 자처해온 것은 아닌지 뼈저린 성찰이 선행되어야 했다. 이번 법원장 회의에서 나온 발언들을 살펴보면 실망감은 더욱 커진다. 이들은 사법개혁 3법이 법관의 독립성을 해치고 사법 행정의 효율성을 저해한다고 강변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법왜곡죄에 대해선 범죄 구성요건이 추상적이어서 심대한 부작용이 발생할 것이다.” “재판소원은 재판 확벙 지연으로 국민 피해가 우려된다.” “대법관 증원은 4명만 증원하자”는 주장이다. 그러나 사법개혁 논의가 이 지경에 이른 근본적인 원인은 사법부 스스로가 개혁의 시간을 허비했기 때문이다. 재판 지연으로 인한 국민적 고통은 외면한 채, 법관의 처우 개선과 권한 강화에만 몰두해온 사법부가 이제 와서 입법부의 사법개혁 논의를 비난하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다. 국민이 부여한 신뢰를 스스로 저버린 사법부에 대해 주권자의 대의기관인 국회가 제도적 보완책을 마련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당연한 작동 원리다. 사법부는 국회에서 만들어진 법에 따라 판정을 하는 기관이지, 법을 만드는 기관이 아니다. 대한민국 헌법 제40조는 “입법권은 국회에 속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사회적 합의를 거쳐 법률을 제정하거나 개정하는 것은 입법부 본연의 권한이자 의무다. 만약 해당 법률에 위헌적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헌법재판소의 심판을 통해 가려질 영역이다. 법원의 수장들이 입법 단계에서부터 집단적으로 실력 행사에 나서는 것은 삼권분립의 경계를 허무는 위험한 발상이다. 이는 마치 자신들이 입법부와 국민 위에 군림하는 초법적 존재인 양 착각하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현재 사법부가 직면한 위기는 외부의 공격 때문이 아니라 내부의 자정시스템 붕괴에서 비롯된 것이다. 공정성을 잃은 판결, 제 식구 감싸기식 징계, 관료화된 사법 행정이 국민의 신뢰를 갉아먹었다. 법원장들은 입장문을 내기 전에, 왜 국민이 사법부의 판결보다 정치권의 개혁안에 더 귀를 기울이는지부터 자문해야 한다. 국민은 정치하는 판사가 아니라, 법과 원칙에 충실한 판사를 원한다. 어제부터 국회 본회의에서 처리되고 있는 ‘사법개혁 3법’에 대해 여러 비판과 사회적 논란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논란의 해소는 국회라는 공론의 장에서 국민 의견을 수렴하면서 이뤄져야 하고, 최종적으로는 헌법재판소에서 결정하면 된다. 이것이 대한민국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민주주의 원리이고 정신이다. 사법부는 이제라도 본연의 임무인 '공정한 재판'을 위한 내부 제도정비와 개혁에 나서야 한다. 재판 지연과 널뛰기 판결로 피해보는 국민이 없도록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사법부 독립의 방패와 사법부의 존엄한 권위는 법원장들의 성명이 아니라, 국민이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판결에서 나온다는 점을 명심하기 바란다. 국민의 개혁 요구를 겸허히 수용하고, 스스로를 도려내는 고통을 감내해야 할 시점이다. 반성 없는 사법부에 돌아갈 국민의 신뢰는 단 한 뼘도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기도 내 학교에서 다음 달부터 시행되는 ‘학생맞춤형통합지원(학맞통)’을 놓고 부실 운영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이 제도를 담당할 전문 인력이 크게 부족하기 때문이다. 도내 약 2526개 학교 가운데 학맞통 업무를 담당할 교육복지사가 배치된 곳은 고작 151곳으로서 전체의 6%에 불과하다. 이 정도의 인력으로 정책의 실효성을 기대하기란 어렵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인력공급 확대를 비롯한 제대로 된 지원체제가 시급하다. 지난해 1월 21일 제정돼 오는 3월 1일부터 전면 시행될 예정인 ‘학생맞춤통합지원법’은 모든 학생의 교육받을 권리를 보장하고, 전인적 인재로 성장하는 데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하는 법안이다. 학업 부진, 정서 문제, 학교폭력, 빈곤, 가족 갈등, 또래 관계 어려움 등 복합적 위기 상황에 놓인 학생을 학교가 직접 발굴해 지원하는 제도인 셈이다. 학맞통은 학생에 대한 ‘통합 진단’을 바탕으로 ‘맞춤형 지원’을 제공하기 위해 추진되며, 학령인구가 감소하는 가운데 복합적 어려움을 겪는 학생이 늘어나는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그동안에도 학생 지원을 위한 다양한 정책과 사업이 운영되어 왔으나 각 사업이 분절적으로 추진되면서 지원의 중복, 사각지대 발생, 통합적 관리 등의 한계가 존재했다. 교육부는 이러한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학맞통으로 어려움을 겪는 학생을 조기에 진단하고, 학생별 상황에 맞는 맞춤형 통합지원을 가능하게 하겠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학맞통은 기존의 개별적 지원 체계를 기관 간 연계 중심으로 전환해 학생 맞춤형 지원을 도모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실제 현장에서는 이 정책을 놓고 담당 교사에게 업무가 집중되고 인력 부족으로 위기 학생 발굴 자체가 쉽지 않으리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꾸준히 제기돼 왔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은 언론 인터뷰에서 학교와 교사에게 업무를 떠넘기는 방식으로는 실현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이하 교총)가 전국 교원 4,647명을 설문 조사한 결과, 교사의 52.9%, 교장·교감의 46.2%가 학맞통 시행을 위한 학교의 준비가 부족하다고 응답하기도 했다. 일부 학교에서는 업무 부담을 이유로 담당자 지정에 소극적이거나 의뢰 절차가 지연될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위기 학생 문제는 학습 부진이나 빈곤, 이주 배경, 학교폭력 등 다양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한 교사나 부서만으로 해결하기 어렵다고 분석한다. 때문에 상담교사, 교육복지사, 보건교사, 담임교사 등이 함께 참여하는 협업 구조가 필수적이다. 교육지원청 학맞통 센터는 학교 내에서 해결이 어려울 경우 외부 기관을 연계해 맞춤형 지원을 제공한다. 그런 만큼 실제로 교육복지사가 배치된 경기지역 학교에서는 학맞통 센터가 효과적으로 작동될 경우 학교 내에서 처리하기 어려운 문제의 상당 부분을 자체 네트워크를 통해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밝히고 있다. 이미 교장과 교감, 상담교사, 교육복지사 등이 참여하는 협의체를 장기간 운영하며 결석이나 정서적 어려움 등 위험 신호를 조기에 포착하고 맞춤형 지원을 이어가고 있는 학교도 없지 않지만,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상담교사나 교육복지사가 없는 학교에서는 정서적 위기 학생에 대한 대응이 제한될 수밖에 없다. 특히 취약계층 비율이 낮은 학교일수록 지원 체계가 미흡한 경우도 적지 않다는 지적이다. 태부족한 관련 예산도 선결과제다. 학교별 학맞통 지원 예산은 연간 약 100만 원에 불과해 협의회 운영비 정도에 그칠 판이다. 교육계에서는 복합 위기 학생 지원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 전문 인력 확충과 안정적인 재정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교사의 정서적, 사회적 지원은 학생의 발달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통합지원 정책이 교사의 역할을 어떻게 정의해 나가느냐에 따라 제도의 성과 역시 달라질 수 있으리라는 분석이다.
정조의 원행을묘 백리길은 숭례문에서 서울역을 지나고 청파동입구교차로에서 경부선 철도 밑의 쌍굴다리 2차선 도로를 건너 남북 방향 6차선의 청파로를 만난다. 너푸내란 하천과 옛길을 함께 복개하여 만든 도로다. 옛 문헌과 지도에는 한자 蔓(넝쿨 만), 草(풀 초), 川(내 천)의 뜻을 따서 蔓草川(만초천)으로 표기했다. 무악재에서 발원하여 인왕산의 서남쪽과 안산의 동남쪽 골짜기의 물을 모아 남쪽으로 흐르다가 원효대교 부근에서 한강에 합류한다. 6차선의 청파로 건너편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빌딩 앞에 청파배다리의 표지석이 있는데, 이렇게 적혀 있다. “청파배다리 터(靑坡舟橋址) : 청파·원효로로 통하는 주요 길목과 만초천(蔓草川, 너푸내)이 만나는 지점에 놓였던 돌다리인 청파배다리가 있던 곳이다. 원래는 북쪽으로 300여m 떨어진 철길 위에 있었다.” 이 지역은 넓은 면적을 차지하는 남대문 정거장, 즉 지금의 서울역이 1900년 7월 8일에 생기면서 옛길과 너푸내의 유로가 꽤 변했다. 너푸내를 건너던 청파배다리의 위치가 북쪽 300여 m 떨어진 철길 위에 있었다는 문구가 그래서 기록됐다. 다만 일제강점기의 1:5만 지형도에는 쌍굴다리 길로 경부선 철길 밑을 지나 청파배다리 표지석 부근에서 너푸내를 건넜다. 표지석의 설명 중 “청파·원효로로 통하는 주요 길목과 만초천(너푸내)이 만나는 지점”이라는 표현은 많이 고칠 필요가 있다. 실제보다 내용을 너무 축소했다. 숭례문을 나와 ①경기도 남서부, 충청남도, 전라도, 경상도 서남부를 향한 고을 사람들이 나룻배를 타던 동재기나루 ②경기도의 시흥·안산·인천 고을의 사람들이 건너던 노들나루 ③국가의 조세를 나르던 세곡선이 가장 많이 모이던 항구 용산나루를 오가던 사람들이 이 길을 통했다. 서울 도성에서 지방을 오가는 사방팔방의 길 중 압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오가던 길이다. 그래서 도성 안을 제외하면 이곳보다 많은 사람들이 밟고 건넌 돌다리는 없었다. 그런 사실을 표지석의 지금 설명문만으로는 상상하기 어렵다. 좀 아쉽다. 1795년 윤2월 9일, 숭례문을 나온 원행을묘 행렬이 처음으로 만난 다리가 청파배다리(靑坡舟橋)다. 그런데 다른 문헌이나 지도에는 그냥 배다리(舟橋)였고, 『원행정례』에는 청파다리(靑坡橋)로 기록했다. 청파배다리는 노들나루에 배다리가 만들어지면서 구별하기 위해 청파를 붙여서 표기한 것이다. 배다리라 부른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전국적으로 흔하진 않아도 꽤 있는 지명이었다. 청파배다리를 지나 작작골(雀雀洞)-돌모루(石隅)란 지명이 오랫동안 길 가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이 구간 어디쯤, 필자가 현재의 위치를 찾지 못한 栗園峴(율원현)이란 한자 지명의 앞길에서 정조 임금은 이렇게 명했다. “백성들이 좁은 옆길(夾路)에서 원행 행렬을 자유롭게 구경할 수 있도록 금하지 말라!” 안전과 권위에 손상이 갈 수 있음에도 재위 20년 임금으로서의 자신감과 인자함이 넘쳐흐르는 마음의 표현이다. 권위주의 시대 대통령의 행차 시 미리 동원된 사람 말고는 쉽게 접근조차 하지 못하게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던 것과 대조된다. 백성과 함께 호흡하고 싶었던 임금 정조, 원행을묘 백리길은 국민과 함께 호흡하는 정치를 향한 갈망의 순례길이다.
언어 수행 차원에서 인격 발달의 성숙을 보이는 인간을 말하라면, ‘듣는 인간’이 여기에 근접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듣는 인간’에게서 ‘긍정의 철학’을 확인하기 때문이다. 그 긍정성은 개인의 성숙에 그치지 않는다. 긍정의 지향이 관계들의 선순환과 소통을 대화적 세계로 나아가게 한다는 점에서 성숙이 돋보인다. 일상 현실 속 사람들의 구체적 언어 수행에서 인간적 성숙을 감득하게 하는 장면도 ‘말하는 인간’보다는 ‘듣는 인간’에게서 경험할 때가 많다. ‘듣는 인간’은 불가피하게 실천적이다. 이는 ‘지금 여기’에서 말하기와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지는 듣기의 현재성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때의 ‘듣는 인간’은 ‘잘 듣는(들으려는) 인간’이다. ‘잘 듣는 인간’에서 ‘잘’은 기능적 숙련만을 뜻하지 않는다. 지각의 뛰어남과 정의(情意 Affective)의 원만 풍성함과 윤리의 아름다움을 모두 실천해 내는 수준을 뜻한다. ‘잘 듣는 인간’은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언급한 로고스와 파토스와 에토스의 자질을 자신의 듣는 역량 수준으로 고르게 녹여 넣은 사람이라 할 것이다. ‘듣는다’의 함의는 참으로 깊고 두텁다. 논어의 이인(里仁)편에는 ‘조문도 석사가의(朝聞道 夕死可矣)’라는 구절이 나온다. “아침에 도(道)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라는 뜻이다.여기서도 ‘듣다(聞)’를 두고 수많은 주석과 해석이 존재한다. 자전이 밝히는 ‘聞(듣다)’의 뜻만 해도, 가르침을 받다, 알다, 널리 견문하다, 들려주다, 삼가 말하다, 냄새 맡다, 방문하다, 서신을 보내다 등의 뜻이 있다. ‘듣다(聞)’의 의미는 정말 간단치 않다. 청문회(聽聞會,Hearing)라는 듣기 현상은 어떠한가. ‘청(聽)도 듣는 것이고, ’문(聞)도 듣는 것이니, 오로지 듣는 모임을 뜻하는 이 말에서 우리는 혼돈스러운 듣기 현상을 본다. 정치적 이해와 전략을 거칠게 구사하며 듣기를 운영하는 청문회, 듣기라고 해 놓고 듣기보다는 정파 간 싸움의 말하기로 일관하는 청문회는 이제는 익숙하다. 증인을 닦달하는 방식으로 증인에게 들으려고 한다. 이 또한 모두 듣기의 현상이다. 듣기가 제도로 운용되는 장면에서 진실로 ‘듣는 능력’은 무엇으로 규정되어야 할 것인가. 고민하지 않을 수없다. 듣는 행위는 생활에서 항용 영위되는 일상의 언어 행위이지만, 듣는 행위만큼 일상을 뛰어넘어 신령한 영역에 가닿는 것도 드물다. 고대 사회에서 있었던 신탁(神託)이라는 의식은 인류의 보편이라 할 수 있는데, 신탁이란 신의 소리를 듣는 것이다. 제관이 신전에 가서 인간의 문제를 신에게 올리고 신의 대답을 듣는 것이 신탁이다. 형식과 유형은 달라도 인류가 신을 듣는 방식은 비슷했다. 어떤 초월적 존재를 인간이 느끼고 영적으로 교감하는 방식은 대체로 ‘듣는다’에 의탁하는 경우가 많다. 신을 듣는다는 의식에 기대어서 신의 현존을 공동체가 받아들이는 모습이라 하겠다. 말에 의존하지 않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뜻을 전한다는, 이른바 불립문자(不立文字)의 경지에도 이런 초월적 듣기가 알게 모르게 관여하는 것 아닐까. 듣는 행위와 듣는 현상을 두고 그것을 해석하는 일은 참으로 복잡하고 미묘해졌다. 디지털 미디어가 온갖 전언을 우리들 귀에 들이대는 이 시대는 더더욱 그러하다. ‘잘 듣는 인간’의 이상적인 모습을 찾아보기가 그만큼 더 어려워진 세상이 되었다.
약 5년 전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는 대한민국을 선진국으로 격상시켰다. 하지만 한국은 주택 공급을 이유로 주민들을 강제 이주시키고 인권을 유린하는 후진국형 문제를 여전히 재현하고 있다. 하남 교산 역시 재개발 명분을 앞세워 포클레인을 끌고 들어와 나무, 집, 물류창고, 농협, 마트, 학교, 교회를 무참히 부수고 있다. 내가 사는 남한산성 산밑도 굉음 소리와 시멘트, 철근 덩어리로 덮여간다. 나는 철거 명령을 받았지만, 아직 갈 곳을 정하지 못하고 있다. 폐허가 된 마을은 을씨년스럽기 그지없다. 난로 위에서 끓고 있는 물 주전자의 수증기가 유일한 온기다. 나는 LH에서 등기로 날아온 서류를 받아 들고 뒤적이다 겁에 질렸다. 방안을 서성거리다 불안한 맘을 억누르려고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소장이 날아왔어, 계란 껍데기 같은 이 집에 30,000,100원 부당이득금을 내야 한다면서 당장 떠나라는 거야!” 같은 처지에 놓은 뒷집 주인은 거처를 구하러 다녀봤지만, 살인적인 집값 때문에 어찌할지 모르겠다고 한다. 천정부지로 오른 임대료에 LH에서 쫓겨난 주민들의 임차수요까지 겹쳐 하남 부근의 주거비 인플레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다. 70대 노인 심씨는 계곡 건너 본인 소유 비닐하우스에 짐을 옮길 거라고 한다. 최소한의 물건만 챙겨 가야 해서 정든 물건은 모두 버려야 한다. 백숙집을 운영하던 부부는 주민이 모두 떠나 시내 식당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러 다닌다. 정부는 50년간 묶여있던 그린벨트를 풀면서 하남을 제2의 강남으로 만든다고 애드벌룬을 띄웠다. 누구를 위한 제2의 강남인지 알 수 없지만, 주민들은 온갖 이주 협박에 시달려야 했다. 정부는 다주택자에게 세금을 중과한다고 하지만 피해를 보는 것은 결국 가난한 세입자다. 그들은 임차인에게 세금을 전가하면 된다. 돈 있는 서울 사람들은 10억짜리 전세 사느니 경기도에 똘똘한 한 채를 마련하는 것이 대세라고 한다. 아무리 집을 짓고 세금을 먹이고 대출 금리를 조정해도 우리 같은 영세 세입자는 여전히 집을 살 수 없다. 내 처지는 밥솥 뒤에 숨어 사는 초록 사마귀 같다. 매일 숨어 살 수만은 없어 몰래 주방 밖으로 나가기 위해 환풍기 전선을 움켜잡았다. 발가락에 힘을 주다 그만 떨어졌다. ‘이대로 허무하게 죽는 걸까.’ 소리치고 싶지만 내 마지막 비명에 귀 기울일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다. 가스레인지의 기름때를 닦다 멈췄다. 사마귀를 손으로 들어 식탁 위 한쪽 모서리에 놓았다. 창문 틈에 올려놓아도 다시 기어 내려온다. 손으로 끌어당기면서 ‘너도 갈 곳이 없구나. 사는 게 죽는 것보다 어려운 것은 나뿐만이 아니구나. 사마귀야, 그래, 너와 주방을 공유하자, 쫓겨날 때까지.’ 함박눈이 내려 폐허가 된 마을을 덮었다. 창문 너머 세상이 산뜻했다. 눈길을 안으로 돌리자 갈색으로 변한 사마귀를 고양이가 발톱으로 갈기갈기 찢고 있었다. 놀란 나는 고양이 등을 내리쳤다. 이 잔인한 놈! 사마귀 조각을 주워 봉투에 담았다. 봄에 묻어줄까 하다 그때가 된다고 별수 있겠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호두나무 아래 묻어주었다. 사마귀를 묻어주면서 내 상황이 사마귀보다는 나은 것 같아 잠시 위로를 받는다. 갈 곳 없는 것들의 겨울밤은 유난히 춥기만 하다.
2026년 밀라노-코르티나 동계 올림픽 치러진 가운데, 올림픽 선수들보다도 스포츠 중계에 더 큰 관심이 쏠리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세계인의 축제 올림픽의 열기가 차갑게 식어야 했던 까닭은 무엇일까. 그 배경에는 스포츠 중계권의 역사와 자본의 논리가 자리 잡고 있다. 1938년은 미국 메이저리그 구단들에 뜻깊은 해였다. 야구 경기 실황을 중계할 수 있는 배타적 권리를 법원으로부터 인정받은 해이기 때문이다. 메이저리그 야구단 피츠버그 파이러츠 소유주는 일부 라디오 방송사들과 파이러츠의 경기를 방송할 수 있다는 내용의 계약을 체결하였다. 그러자 라디오 방송사 KQV는 창의적인 방법을 떠올렸다. KQV는 파이러츠와 계약 없이, 야구장 밖에서 경기를 관람하면서 방송을 전송하려 한 것이다. 법정 다툼이 벌어졌고, 법원은 파이러츠 구단이 야구 경기 실황 중계에 대한 배타적인 권리를 가진다고 판시하였다. 1938년 이루어진 피츠버그 애슬레틱 대 KQV 방송사 판결이다. 이로써 개별 구단은 방송사와 중계방송을 판매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갖게 되었다. 역으로, 방송사가 스포츠를 중계하기 위해서는 K리그, KBO, FIFA, IOC 등 스포츠 경기 주관자와의 권리 계약을 통해 중계권을 사전에 확보해야 한다. 스포츠 경기 주관자는 경기 규칙을 마련하고, 경기 참가자에게 자격을 부여하는 등 많은 역할을 수행하는데, 경기를 방송할 주관 방송사를 선정하는 것 또한 주관자의 중요한 역할이다. 스포츠 경기 주관자에게 중계권 판매는 대회 개최 비용을 회수하는 핵심 수익원이다. 이에 IOC 등 주관자들은 누가 대회장에 출입·촬영할 수 있는지, 누가 선수들을 인터뷰할 수 있는지 등을 엄격히 관리하여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을 지키려 한다. 막대한 비용을 지급하고 독점 중계권을 확보한 방송사 역시 스포츠를 ‘킬러 콘텐츠’로 활용한 투자와 거래를 진행한다. 경기 중계에 대한 배타적 권리는 인터넷 스트리밍 영역까지 확장되어 권리자의 허락 없는 인터넷 중계는 차단될 수 있다. “세계인의 축제”는 이러한 거래를 거쳐 우리에게 도달한다. 문제는 JTBC가 2026년 동계 올림픽부터 2032년 하계 올림픽까지 4개 대회의 한국 내 중계권을 독점하면서 발생했다. 보도에 따르면 JTBC가 IOC에 지급한 중계 방송권료만 3,300억 원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며, 지상파 3사와의 재판매 협상은 결렬되었다. 게다가 네이버의 치지직이 뉴미디어 독점 중계권을 확보함에 따라, 유튜브나 SNS를 통한 자유로운 영상 소비마저 차단되었다. 현지로 날아갈 수 없는 절대다수의 대중에게 올림픽은 곧 미디어 이벤트다. 기술의 발전으로 TV를 넘어 OTT, 소셜 미디어 등 올림픽을 즐길 수 있는 창구는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이용자에게는 자신이 원하는 경로를 통해 자유롭게 콘텐츠를 소비하고 재가공할 권리가 제공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번 올림픽은 중계권료라는 자본의 논리로 인해 TV 시청의 선택권은 물론, 온라인상에서 저작물을 편집·공유하며 즐기는 문화마저 위축되었다. 스포츠 대회가 가진 공공재적 성격과 상업적 가치 사이의 균형이 무너진 셈이다. 올림픽이 세계인의 축제이기 위해서는 중계권의 배타적 수익 논리보다, 자유롭고 유연한 미디어 생태계가 절실하다.
지난 13일 통계청에 따르면 화성특례시는 최근 2년 새 4만 4000여 명이나 증가했다. 급격한 도시 성장으로 인구는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하지만 교통, 치안, 의료, 교육, 체육 등 여러 부문에서의 인프라를 제대로 갖추려면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시급히 해소돼야 할 부문 가운데 하나는 치안 공백이다. 화성특례시는 2025년 1월 특례시 출범과 함께 올해 2월 4개 구청 출범시켰다. 서울특별시의 1.4배에 달하는 면적(844㎢)과 전국 기초지방정부 가운데 4위에 해당하는 인구를 보유하고 있다. 그럼에도 경찰서는 두 곳밖에 없다. 화성동탄경찰서(동탄신도시권·정남·병점)와 화성서부경찰서(봉담·양감·향남·우정·장안·송·새솔동권) 단 두 곳의 경찰서만 운영되고 있다. 같은 특례시인 수원시(4곳)와 고양시(3곳), 용인시(3곳)와 비교된다. 인구 규모와 면적을 고려하면 최소 3~4곳의 경찰서가 필요함에도 화성시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지난 해 11월에도 인구 증가와 광범위한 행정구역으로 인한 시민 안전 확보와 치안 대응력 강화를 위해 경찰서 1개소를 추가 신설해 달라고 경기남부경찰청에 공식 건의한바 있다. 특히 신도시급 대단위 아파트들이 들어서는 봉담지구의 경우 각종 인프라 부족으로 주민들의 큰 불편을 겪고 있다. 내리지구의 경우 보육과 의료 인프라가 크게 부족하다. 2024년 약 4000세대가 입주함으로써 영유아 보육 수요가 급증했지만 보육시설이 턱없이 부족해 주민들의 불만이 크다. 봉담지역과 인근 서부권은 응급의료와 소아진료 인프라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다. 다행히 지난해 10월 보건복지부가 호원의료재단이 화성 봉담읍에 추진 중인 종합병원 건립을 최종 승인함으로써 의료격차가 어느 정도 해소될 것으로 보인다. 이 지역 주민들이 분통을 터트리는 또 다른 이유는 교통문제다. 급증하는 인구에 비해 교통 인프라는 턱없이 부족하다. 통행 수요가 크게 증가했으나, 교통망은 여전히 과거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이에 주민들은 시내·광역버스 노선의 확충과 배차 간격 조정, 내리~상기리 터널 공사 조기 착공 등 교통대책을 마련해 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화성시 공식 홈페이지 ‘시민소통광장’에 게시된 주민의 이 호소는 하루 만에 시장 공식 답변 요건인 동의 1000명을 넘었다. 그리고 정명근 화성시장은 공식 답변을 통해 “해당지역의 개발상황과 대중교통 이용수요를 모니터링 해 대중교통 이용불편 해소 및 도로망확충을 통한 교통체증 해소를 위해 적극 노력하겠다“고 답변했다. 체육인프라 확충도 주민 숙원 가운데 하나다. 도시 팽창과 아파트 입주 증가로 생활체육 수요가 크게 늘었지만, 이를 감당할 공공 복합체육시설 공급이 부족하다.(경기신문 20일자 5면, ‘화성시 봉담읍 11만 도시 체육 인프라 가뭄…수강신청은 전쟁등록’) 봉담읍의 인구는 11만 4000여 명이다. 그럼에도 공공 복합체육시설은 2곳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인기가 좋은 수영장 강습은 접수가 시작되자마자 곧바로 마감되곤 한다. 주민들이 ‘수강신청 전쟁’이라고 말할 정도다. 보도에 따르면 접수에 실패한 주민들이 동탄·향남 등 인근 지역 시설을 이용하고 있다고 한다. 경기신문은 “수영 강습을 신청하려고 여러 차례 도전했지만 번번이 대기 순번에서 밀려 결국 다른 지역 시설을 이용하고 있다”는 주민의 말을 전했다. 이에 주민들은 추가 시설 확충을 요구하고 있다. 그럼에도 시는 “인구 규모 대비 시설 2곳으로도 운영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지역 내 수요를 충분히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가 존재함에도 말이다. 이 지역은 방과 후 체육활동과 생활체육 프로그램 수요도 급증하고 있음에도 기반 시설 확충은 이루어지 않고 있다. 전성균 시의원(개혁신당, 동탄4동, 동탄5동, 동탄6동)의 말처럼 지역의 정주 여건을 높이고 지역 간 격차를 줄이기 위해서는 체육시설 확충 방안을 선제적으로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지난주 도쿄 방문길에 ‘오모테산도 힐즈’를 찾았다. 일본에서 공부한 지인이 추천한 곳인데, 처음엔 막연히 유명 관광지이려니 했다. 시부야구의 오모테산도 언덕길에 위치한 ‘오모테산도 힐즈’는 주상복합 건물로, 1927년에 지어진 ‘도준카이 아오야마 아파트’를 2005년에 새로 개발한 곳이었다. 그리 높지 않은 이 건물은 언덕길 따라 길이가 약 250m 정도로 길었고, 언덕길 높은 쪽은 옛 아파트 건물 일부를 그대로 남겨 품고 있는 형태였다. 설계자가 유명 건축가 안도 다다오라니, 건물 이곳저곳을 다시 살펴보게 되었다. 이 건물은 설계 당시 주변 가로수길과 조화를 이루도록 높이를 제한한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지상 6층 지하 6층의 건물로 지어졌고, 지역의 랜드마크로 과시하는 건물이 아니라 거리 풍경과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하였다. 또 다른 특징은 건물 안 가운데에 언덕길 경사 그대로 약 700m 길이의 나선형 슬로프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엘리베이터를 타는 대신 슬로프를 따라 걸으니, 마치 언덕길을 걸으며 쇼핑하는 것 같았다. 역시 안도 다다오다. 환경과 어우러지며 사람을 위하는 건물, 지역의 역사를 잇는 ‘오모테산도 힐즈’였다. 건축계의 노벨상인 프리츠커상을 수상하였고, 노출 콘크리트 건축으로 유명한 안도 다다오. 그런데 그는 건축에 대한 전문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고등학교 시절에 아마추어 권투선수로 뛰고, 트럭 운전사를 하기도 했는데, 헌책방에서 르 코르뷔지에 설계도면 책을 발견한 후 그의 길은 달라졌다. 세계를 여행하며 독학으로 건축 공부를 하였고, 고졸 학력으로 세계 유수의 명문대에서 건축을 가르쳤다. 그리고 그는 작업할 때 건축주의 요구 사항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직감 위주로 일을 밀어붙이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직감이 안도 다다오 건축양식을 만들어 온 것인가. 오하이오주립대학교 앵거스 플레처 교수는 그의 저서 「고유지능」(2025)에서 직관, 상상력, 감정, 상식 등 인간 고유의 사고방식은 AI가 결코 구현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면서, 이를 ‘고유지능’이라 명명하였다. 인간의 뇌를 논리적이라고 보는 것은 잘못된 관점이라며, 인간의 비논리적 지능이 데이터에 의존하는 AI 회로보다 수백만 년 앞서 우리 조상에게 미지의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고 진화해 왔다는 것이다. 논리는 예외를 생각하지 않으며, 그저 분류하기를 좋아한다. 좋다 나쁘다, 정상이다 이상하다, 검다 희다 등. 이러한 판단은 AI의 사고방식이다. 인간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고 혁신을 이루는 것은 논리의 산물이 아니라 우리 뇌의 고유한 기능인 직관에서 시작된다고 하였다. 직감으로 건축한다는 안도 다다오를 보니, 인간의 ‘고유지능’이 무엇이며 어떤 것의 원동력이 되는지 이해된다. 지난달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에서 AI의 진화가 인류의 제어 범위를 벗어나는 임계점에 다가서고 있다고 경계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대학가는 AI시대 교육을 어떻게 혁신해야 할지 골몰하고 있다. AI학과를 신설하고 기존 과에 AI를 덮어 융합학과라는 것을 만드는 것들이 대응책은 아닐 것이다.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 교수는 AI가 장악할 수 없는 마지막 영역으로 ‘비언어적 지혜’와 ‘비판적 사고’를 꼽았다. 엥거스 플레처도 유발 하라리도 AI가 대체하지 못하는 인간의 고유 영역이 있다고 분석한다. 그것을 제대로 알고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교육 개혁의 기초가 되어야 할 것이다. 데이터로 환산할 수 없는 인간의 ‘고유지능’이 AI가 초래할 수 있는 위협으로부터 인간을 지키는 해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설 명절을 맞아 친정집에 갔다. 북적이는 가족들로 소란스러운 틈을 잠시 벗어나 오랜만에 엄마의 방을 둘러보았다. 입었던 옷가지와 매일 쓰는 물건들이 흩어져 있었다. 작은 책상에는 펼쳐둔 성경책과 마시다 만 물컵이 놓여 있었다. 혼자 잠들고 일어나는 침대에는 엄마가 누웠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부피가 묵직한 겨울 이불이 정리되지 않은 채 한곳으로 밀려나 있었다. 나는 가만히 서서 한 사람이 머문 공간을 바라보았다. 엄마는 이 방에서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 밤이면 무슨 생각을 할까. 문득, 엄마의 시간이 궁금해졌다. 때로는 짐이었고 때로는 힘이 되었을 자식들을 키워내고, 물러난 자리는 홀로 남은 방이었다. 그 방을 보며 알았다. 독거(獨居)는 공간이 아니라 고요히 흐르는 시간이라는 것을. 엄마의 방을 보고 있자니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났다. 아버지는 치매가 심해지면서 요양병원에 모셨다. 병원에 처음 가셨을 때부터 아버지는 우리를 볼 때마다 집에 가겠다고 했다. 기억은 흐릿해졌어도, 돌아가야 할 방향만은 몸 어딘가에 남아 있었던 것일까. 낯선 곳에서 혼자서 잠들고 깨어나 가족들을 하염없이 기다렸을 아버지 생각이 났다. 아버지가 계시는 요양병원에 면회를 다녀오던 날들의 무거웠던 기억이 지금까지 생생하게 남아 있다. 아니 에르노의 『세월』 마지막 페이지에, 요양원 현관에서 잠옷과 슬리퍼 차림으로, 더러운 종이를 내밀며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달라고 울던 남자가 나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읽었던 터라 그 장면은 오래 마음에 남았다. 나는 그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다시 아버지를 만났다. 엄마가 드셔야 할 영양제 복용법을 설명하는데, 갑자기 엄마가 그랬다. 나는 이다음에 요양원에는 가지 않을 테니 절대 보내지 말라고. 형제들은 잠시 말을 잃고 엄마를 쳐다보았다. 나는 농담처럼 “아버지는 보내놓고?”라고 물었다. 엄마는 단호하게 말했다. “네 아버지와 나는 다르다.” 우리는 웃으며 뭐가 다르냐고 되물었고, 곧바로 그러니 영양제 잘 챙겨 드시라는 말을 협박하듯 건넸다. 그러나 웃음이 잦아든 뒤에도 엄마의 말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그 말 속에는 두려움과 고집, 그리고 끝까지 스스로를 지키고 싶다는 마음이 함께 들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타인의 상황은 쉽게 받아들이면서도, 자신만큼은 끝내 예외이기를 바라는지도 모른다. 엄마는 오늘도 그 방에서 잠들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언젠가 그런 밤을 맞이할 것이다. 소란스러웠던 시간도 잠시, 명절을 보내고 나면 자식들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다. 식탁은 다시 조용해지고, 거실의 불은 일찍 꺼진다. 늙은 부모는 둘이거나 홀로 남는다. 하루는 길어지고, 말은 줄어든다. 그러나 노년의 삶만이 사람을 홀로이게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무리 속에 섞여 있다가도 결국은 각자의 시간으로 돌아온다. 우리는 관계 속에 기대어 살아가지만, 저마다의 방으로 돌아가 하루를 마무리한다. 그것은 더 이상 공간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 존재 방식이 된다. 당신의 방은, 그 안에 깃든 시간은 어떤 모습일까. 혼자 남는 순간에 우리는 무엇을 떠올리게 될까. 누구의 이름을 부르고, 어떤 기억을 붙들고 있을까. 인간은 처음부터 아름다운 독신(獨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