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견주는 한국의 전통주 중 하나로, 봄에 피는 진달래꽃을 넣어 빚은 술이다. 그 이름만 들어도 화사한 봄 풍경과 함께하는 한 잔이 떠오른다. 진달래는 봄의 시작을 알리는 꽃으로, 우리 삶 속에서 오래전부터 사랑받아 온 존재다. 삼월 삼짇날이 되면 찹쌀가루를 익반죽하여 기름에 지진 화전 위에 진달래꽃을 얹어 함께 나눠 먹으면서 봄놀이를 즐기던 풍경은, 단순한 계절의 낭만을 넘어 우리의 식문화 속에 깊이 뿌리내려 있다. 특히 진달래는 사람들에게 자연의 기운을 가장 먼저 전해주는 상징적인 꽃이기도 하다. 두견주가 탄생하게 된 데에는 고려 개국공신 복지겸(卜智謙)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복지겸이 병을 얻어 온갖 약을 써도 차도가 없자, 그의 어린 딸이 아미산에 올라 100일 기도를 드렸다. 그때 신선이 나타나 “아미산에 만개한 진달래꽃으로 술을 빚되, 반드시 안샘(현 면천초등학교 뒤의 우물)의 물을 사용하고, 100일 후에 마시며 뜰에 은행나무 두 그루를 심어 정성을 다하라”고 일러주었다. 딸이 신선의 가르침대로 하자 아버지의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고 전해진다. 이로 인해 두견주는 ‘효심이 빚은 술’로도 불린다. 이외에도 '산림경제', '임원십육지', '동국세시기', 빙허각 규합총서' 등 여러 고문헌에서 면천 지역에서 두견주를 빚었다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면천에는 지금도 복지겸의 딸이 심었다고 전해지는 은행나무 두 그루가 남아 있으며, 이 나무들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마을을 지키고 있다. 두견주는 1986년 11월, 국가무형문화재 제86-2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면천두견주보존회를 중심으로 그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진달래는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약용 효과로도 알려져 있다. 항염, 진통, 해열 등의 효능이 있다고 전해지며, 이처럼 실용적인 가치를 가진 꽃이기에 두견주라는 전통주에 더욱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두견주를 만들기 위해서는 진달래꽃 외에도 쌀, 물, 누룩이 필요하다.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진달래꽃을 채취하는 시기와 상태다. 대부분 4월 초에서 중순 사이에 꽃이 피는데, 진달래는 활짝 폈을 때 채취하는 것이 가장 좋다. 일반적으로는 반쯤 핀 꽃이 향이 가장 좋다고 하지만, 진달래는 예외로, 만개했을 때 채취한다. 향보다는 꽃술에는 약간의 독성이 있으므로 반드시 제거한 후 사용해야 한다. 두견주는 깨끗이 씻은 진달래꽃을 찹쌀과 함께 발효시켜 빚는다. 발효가 끝난 뒤에는 술을 곱게 여과하고, 꽃향기가 술에 잘 배도록 충분히 숙성시킨다. 이렇게 빚어진 두견주는 진달래의 은은한 향과 함께, 부드럽고 깔끔한 맛을 자랑한다. 봄의 향기를 머금은 이 술은 한 해의 첫 꽃이 피는 시기에 빚어지는 만큼, 그 의미 또한 각별하다. 두견주는 단순히 마시는 술이 아니다. 사람과 자연을 이어주는 매개이자, 계절의 기운을 전하는 감동적인 경험이기도 하다. 술을 만드는 과정에서 진달래꽃을 직접 만지고 다루는 동안, 사람들은 자연과 호흡하며 평온함과 기쁨을 느끼게 된다. 결국 두견주는 봄의 향기와 자연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담아낸 한국의 전통주다. 진달래꽃이 지닌 상징성과 함께, 두견주 한 잔을 음미하는 순간, 인간과 자연이 하나 되는 깊은 울림이 전해진다. 진달래꽃이 만개하는 이 계절, 두견주 한 잔과 함께 봄의 선물과 전통의 향기를 느껴보는 것은, 한국 문화의 진수를 체험하는 특별한 방법이 될 것이다.
다시 시작하는 대한민국이다. 그동안 우리는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갈등의 시간을 보냈다. 이제 우리의 소중했던 일상으로 돌아가 이웃과 정을 나누는 따뜻한 민족으로 다시금 살아가야 한다. 맹자(孟子)는 우리에게 네 가지 마음, 사단(四端)이 있다고 했다. 다른 사람의 불행을 측은히 여기는 마음(측은지심, 惻隱之心), 자신의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악을 미워하는 마음(수오지심, 羞惡之心), 겸허하게 양보하는 마음(사양지심, 辭讓之心), 그리고 옳고 그름을 가릴 줄 아는 마음(시비지심, 是非之心)이다. 이 사단이 바로 인의예지(仁義禮智) 즉, 사덕(四德)으로 발전한다. 소통에 있어 인의예지는 매우 중요하다. 어진 인품으로 옳음을 쫓고, 예의를 지키며, 지혜로운 대화를 할 수 있다면 그 대화는 매우 풍성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상대방을 배려하고 예의를 담아 지혜롭게 소통하는 방법으로 쿠션어를 추천한다. 흔히 대화에 있어 사실을 전달한다고 해도 서로의 감정이 상할 수 있다. 이럴 때 쿠션어를 활용하면 좋다. 쿠션어는 우리가 늘 사용하는 푹신한 쿠션(Cushion)에 언어를 합친 말이다. 대화를 부드럽게 만들고, 상대방의 기분을 배려한 감정의 쿠션 역할을 한다는 뜻이다.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이 드러나 갈등을 줄이는 대화의 완충재라고 할 수 있다. 쿠션어는 무언가를 부탁하거나 다른 사람의 의견에 대한 반대 혹은 제안이나 요청에 대한 거절 등 부정적인 말을 하게 될 때 사용하면 좋다. ‘괜찮으시다면’,‘죄송하지만',‘번거로우시겠지만',‘바쁘시겠지만' 등의 표현이다. 이런 쿠션어를 활용하는 경우는 다음과 같다. 먼저, 상대에게 무엇인가 부탁하는 경우다. 예를 들어“바쁘시겠지만, 저를 좀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혹시 시간이 괜찮으시면 이것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갑작스럽게 말씀드려 죄송하지만, 이 문서를 좀 작성해 주실 수 있을까요?”라고 표현하면 매우 정중한 느낌을 전달할 수 있다. 다음으로, 어떤 사안에 대해 의사결정을 할 때 상대의 의견과 다른 경우 사용하면 좋다. “네, 맞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저는 좀 다르게도 생각해봤습니다.”, “그 의견에 동의합니다만 다른 관점에서 좀 더 생각해봐야 할 부분이 있지 않을까요?”처럼 말하면 대화의 긴장감을 낮출 수 있다. 마지막으로, 상대의 제안이나 요청을 거절해야 할 때는 “제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아쉽게도 이번에는 제가 여력이 안 되네요.”,“좋은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만 이번에는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안타깝네요.” 등으로 예의를 갖춰 거절하는 것이 좋다. 앞서 맹자가 언급한 사단과 사덕으로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으로 서로를 바라보면 어떨까! 일상에서든 비즈니스에서든 쿠션어로 시작하는 대화라면 갈등은 줄어들고 서로 간의 미소와 배려로 충만할 것이다. 다만, 상대와의 관계성에 따라 적절히 사용하기를 추천한다. 감정이 안 담긴 쿠션어는 상대에게 오히려 형식적이라는 느낌을 줄 수 있어 역효과가 생길 수 있다. 또한, 너무 많이 사용하면 지나치게 예의를 지키는 것으로 보여 인간관계에서 거리감을 생길 수 있다. 진심을 담아 적절히 쿠션어를 활용해보자!
인구절벽을 넘어 인구소멸 우려마저 대두한 우리 국가사회에 부부 공동육아 모델을 찾는 일은 절박한 과제가 되었다. 경기도가 양육에 대한 가치관 변화와 가족 문화 패러다임 전환을 위해 ‘아빠 양육자 지원사업’을 통합 운영하기로 했다. 여성가족국은 앞으로 경기도여성가족재단과 인구보건복지협회 경기지회, 시군 가족센터 등 유관기관과 협업체계를 구축해 아빠 양육사업을 운영하게 된다. 경기도의 정책변화가 우리 양육문화 혁신의 마중물이 되어 큰 성과를 내길 기대한다. 경기도는 각 부서별로 운영됐던 기존의 아빠 양육 지원사업을 도 여성가족국에서 통합 관리하기로 했다. 도는 현재 아빠 양육 맞춤형 콘텐츠 개발, 경기도 아빠하이, 경기도 아빠스쿨, 경기 100인의 아빠단, 라떼파파 육아나눔터 등 5개의 아빠 양육사업을 추진·운영 중이다. 아빠 양육 맞춤형 콘텐츠 개발은 여성가족재단이 담당하고 있다. 상반기에 아빠 양육 관련 놀이·지역별 체험 활동 등을 제공하는 경기도 아빠하이를 운영하게 된다. 아빠하이에는 550여 명의 참여가 예정돼 있다. 참여자는 지난달에 모집공고를 통해 선정됐으며 지난 5일 아이와 함께하는 그림책 연계 원예교육 활동을 시작으로 프로그램 운영을 시작했다. 이어서 하반기 7월에는 맞춤형 전문교육(공통교육·자녀발달주기별 교육)과 전문가 코칭·상담, 아빠들 간 교류 활동 등을 제공하는 신규 사업인 경기도 아빠스쿨을 운영할 계획이다. 이 사업은 참여자들에게 자녀 양육과 관련된 전문적이고 자녀의 발달상황에 맞는 교육을 제공하며, 올해에는 18세 미만 미성년 자녀를 둔 남성·예비 남성 양육자 150명을 교육할 예정이다. 인구보건복지협회 경기지회는 ‘멘토아빠단’이 참여자들에게 저출생 대응 인식개선과 남성 육아 실천 필요성을 일깨우는 경기 100인의 아빠단을 진행한다. 또 시·군 육아나눔터 협력사업인 라떼파파는 육아나눔터 등에 아빠 육아 맞춤형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커뮤니티 활동 등을 지원하는 사업이다. 현재 10개소를 운영 중이다. 경기도는 지난해 도내 아빠 1200명이 자녀와 함께 놀이·체험·소통·캠페인에 참여하는 경기도 아빠하이를 진행한 데 이어 경기 100인 아빠단의 프로그램과 캠페인, 전문가 특강 등을 운영했다. 아울러 라떼파파 육아나눔터 9개소에서 아빠 육아프로그램을 지원했고 이 지원사업에 연 3183명이 이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아버님 날 낳으시고, 어머님 날 기르시니(父兮生我 母兮鞠我)’는 정철이 강원도 관찰사였을 때 백성을 교화하기 위해 지은 ‘훈민가’에 처음 나타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말은 사실 시경(詩經)에 나오는데, 정철이 인용 없이 베낀 결과라는 해석이 있다. 명심보감과 조선 중기의 문인 주세붕의 오륜가에도 등장한다. 부계 혈통의 이데올로기가 확립된 이후 부계 혈통의 유지 및 강화를 위해 널리 퍼트렸다는 비판적 해석이 있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아버지는 자녀 양육에서 주도적인 참여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여성들도 사회활동, 특히 직장생활 등 일상적으로 직업을 갖고 살아가는 생활로 문화가 바뀌면서 비로소 공동육아의 개념이 정립돼가고 있다. 더욱이 출산 기피 현상으로 인한 인구절벽 사태는 육아를 단지 여성에게만 일임하는 문화의 허점이 극적으로 조명되기 시작했다. 경기도가 ‘아빠 양육자 지원사업’을 통합 운영하기로 한 것은 아빠 양육을 종합적으로 관리하고 발전시켜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정책변화로 해석된다. 남성이 육아를 담당하는 일이 흉허물이 되던 시대는 확실히 지났다. 남성들의 육아 능력을 향상하는 일은 양성평등은 물론 인구소멸대책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테마로 등장했다. 남성 육아의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통합 지원과 유관기관 협업·연계가 수반되는 경기도의 정책변화가 새로운 부부 공동육아 모델을 창출함으로써 양육문화의 혁신을 견인해내길 기대한다.
작년 12.3 위헌, 불법 계엄 선포 이후 4.4 헌법재판소 윤석열 대통령 파면 선고까지 민주공화국을 지키기 위한 대한국민의 헌신은 눈부셨다. 계엄 선포일 밤 국회의사당에서, 국회 탄핵 의결을 위해 여의도에서, 윤석열을 관저에서 끌어내기 위해 한남동에서, 트랙터를 몰고 상경한 ‘전봉준 투쟁단’과 연대해 서울 입성을 이뤄냈던 남태령에서, 그리고 헌법재판소의 신속한 파면 결정을 촉구하며 광화문에서, 우리 국민은 때로는 비장하게, 때로는 신명 나게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서 빛의 혁명을 만들어냈다. 탄핵을 함께 끌어낸 헌정수호 정치인들은 일상을 뒤로 하고 그 아스팔트 위의 생고생을 마다하지 않은 국민을 ‘위대한 국민’이라고 칭송하고 있다. 그런데 그 ‘위대한 국민’이, ‘대한민국의 모든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헌법 1조 2항의 그 ‘국민’이 주권행사를 위한 국민투표를 할 수가 없다. 2014년 국민투표법이 위헌 판결을 받았고, 무려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국회의 직무 유기로 법 개정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통령 권한대행 한덕수, 최상목이 헌법재판관을 임명하지 않으며 자행한 위헌적 직무유기를 지금 국회도 하고 있다. 현재 국회에 국민투표법 개정법률안 4건이 계류돼 있다. 내란 행위를 옹호했던 국민의힘 당 도움 없이도, 국회 과반이 넘는 의석수의 더불어민주당이 마음만 먹으면 당장 그 국민투표법을 개정할 수 있다. 헌법재판소의 판결 지연을 겪으며 주권자는, 주권자가 선출하지 않은 헌재 재판관 9명에게 주권자의 총의를 재심판받아야 하는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헌재가 다행히 정의로운 판결을 내렸지만, 다음 정권에서 내란 종식을 위해 또 적지 않은 헌재 판결이 예견되는 상황에서 ‘위대한 국민’은 그 ‘위대함’을 또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서 일상을 포기하며 입증해야 할 것 같은 슬픈 예감이 든다. 지난 4월 6일 우원식 국회의장의 개헌 제안과 이후 여야 정당의 발언에도 ‘위대한 국민’에게 헌법적 권한을 드리겠다는 뜻이 보이질 않았기 때문이다. 대통령 4년 중임이나 임기 단축 등 대통령 권력에 대한 언급이 주였고, 국민발안제 등 주권자의 직접 민주 권력을 강화할 개헌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주권자의 입법권을 보장하고 헌법도 바꿀 수 있는 국민발안제는 1972년 유신헌법을 만들며 없앤 조항이다. 민주헌법이라는 1987년 제정된 헌법에도 빠져있다. 2020년 3월 20대 국회 막바지에 국민발안제를 넣은 개헌안이 국회의원 148명 발의로 제안된 적이 있으나 폐기됐다. 당시 제안 의원 중에는 현재 22대 국회의 국회의장, 부의장,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선관위원장, 이재명 경선캠프의 선대위원장, 총괄본부장, 정책본부장을 비롯해 34명의 의원이 있다. 20대 국회 때 제안했던 법안을 지금 국회에서, 더구나 내란 종식의 동지인 ‘위대한 국민’에게 헌정하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 내란 옹호 정당과 개헌을 논의할 필요도 없다. 더불어민주당은 서둘러 국민투표법을 개정하고 국민발안 원포인트 개헌을 대선과 함께 추진하기 바란다. ‘위대한 국민’이 아스팔트 위가 아니어도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기 바란다. 그것이 ‘위대한 국민’과 함께 내란 종식을 할 ‘진짜 대한민국’의 도구가 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차기 행정부는 제6공화국 정부들 중 정책의 변동성(volatility)이 가장 높은 정부가 될 것이다. 세 가지 요인 때문이다. 첫째, 여대야소 정국. 차기 정부는 여대야소 정부로 국정을 시작할 가능성이 높다. 여소야대 정부보다 여대야소 정부에서 비토 플레이어(veto player)의 숫자가 더 적다. 대통령의 정책 추진에 대한 제도적 저항이 약해진다. 정부 조직의 전면적 변화도 주로 여대야소 정부에서 실현되어 왔다. 둘째, 트럼프 효과. 트럼프 2기 행정부의 행태가 초래하는 정치심리학적 효과가 있다. 트럼프 2기 행정부는 2차 대전 당시 독일의 전격전(Blitzkrieg)이 떠오를 정도로 신속하고도 전방위적으로 행정입법을 쏟아내고 있다. 매일같이 “이슈로 이슈를 덮고” 있다. 트럼프 정부가 백악관에 신앙위원회(The White House “Faith” Office)를 설치했다는, 정교분리의 관점에서 경악할 뉴스는 주목조차 받지 못하고 있다. 일국의 대통령이 정상회담에서 모욕을 당하고, 멕시코만이 아메리카만으로 개명을 당하고, 그린란드와 파나마가 합병을 당하며, 파리기후협약이 무시당하고, 이제는 세상 모든 나라가 관세 폭격을 당하는 마당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전격전을 지켜보면서 모두가 어느새 “무감각”해졌다. 대통령의 권한 행사에 대한 기대치도 닻(anchor)의 위치가 조정되었다. 여론도. 차기 행정부도. 셋째, 계엄 효과. 2024년 12월 3일 불법 계엄과 그 이후 전개된 일련의 사건들이 이미 유사한 정치심리학적 효과를 낳았다. 대통령에게는 헌법이 정한 여러 권한들이 있다. 비상계엄과 같은 국가긴급권도 그중 하나였다. 12월 3일 이전에는 버튼이 있다고 해서 아무 버튼이나 다 누를 리는 없다는 공감대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12월 3일 이후에는 대통령이 어느 버튼이라도 누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게 되었다. 동료 시민들 중 20%가, 헌법 제77조 제1항에서 정한 계엄선포권을 행사한 것은 대통령 고유의 권한행사이자 고도의 통치행위라고 정색하고 주장했었다. 헌법 제77조 제1항의 계엄선포권이 존중받아야 할 통치행위라면, 차기 대통령이 가령 헌법 제76조 제1항에서 정한 긴급재정경제명령을 행사한다면, 그것은 존중받아야 할 통치행위가 아니겠는가? 차기 대통령이 뭘 하든 뭐가 문제인가. 계엄을 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분명히 이런 논증이 흔해질 것이다.) 12월 3일과 그 이후를 지나면서 우리 모두 과거라면 ‘극단적’이나 ‘급진적’이라고 불렀을 조치들에도 무덤덤해졌다. 불법계엄 효과, 트럼프 효과, 비토 플레이어의 부재가 결합하여, 차기 행정부는 한동안 신속하고 전방위적인 정책 변화를 저항 없이 추진할 수 있을 것이다. 낙관적으로 보면 개혁의 골든타임이고, 비관적으로 보면 변동성과 불안정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불안해한다. 그러나 좋은 일에도 마가 끼듯이,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 하나쯤 있기 마련이다. 베일리쉬 경이 말한 것처럼 혼돈은 사다리다(Chaos is a ladder). 차기 정부가 교육 개혁, 규제 개혁, 노동 개혁, 연금 개혁, 의료 개혁, 자본시장 개혁, 기타 개혁 중 어느 하나라도 성공하기를 희망한다.
지난 4일 헌법재판소가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소추를 인용했다. 이날 중소기업중앙회가 입장문을 냈다. “고물가·고금리·고환율에 따른 내수 부진 장기화로 중소기업은 활력을 잃어가고 소상공인·자영업자 폐업이 급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정치적 대립과 갈등을 봉합하고 한국경제의 위기 극복과 역동성 회복을 위해 국민 모두의 힘과 지혜를 모아달라고 호소했다. 국회에는 “대한민국의 새로운 성장 비전 제시와 국민 통합의 리더십을 발휘”해달라고 했고, 정부에는 "경제 불확실성 해소와 대외 리스크 관리에 모든 역량을 집중해 달라”고 촉구했다. 실제로 최근 자영업자들은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때보다 더 모진 세월을 보내고 있다. 지난 달 27일 한국은행이 발표한 ‘금융안정 상황’ 보고서를 보면 그 심각성이 느껴진다.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해 말 기준 금융권 빚을 제때 갚지 못한 자영업자(다중채무자 중 저소득·저신용 차주) 수는 42만 7000명이었다. 이는 2년 6개월 만에 3배 이상 늘어난 것이다. 통계청 자료도 우울함을 더해준다. 올해 1월 기준 자영업자 수는 지난해 11월에 비해 단 두 달 만에 20만 명이 줄었다. 자영업자들은 코로나19 대유행 때보다 더 심각하다고 입을 모은다. 대한민국 경제가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위기에 처해있으며 “그 위기의 맨 앞에 대한민국 소상공인들이 있다”는 이들의 주장은 사실이다. 연합회의 푸념에 가슴이 답답하다. “소상공인의 위기가 대한민국 경제 전체로 파급되는 형국”이라며 정부와 정치권이 힘을 모아 경제를 살리는 일에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고양된 정치적 열기를 경제로 돌려, 전 경제주체들이 안심하고 생업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나가야 한다는 이들의 말은 지극히 당연하다. 얼마 전 SNS에 올라온 ‘저희 어무니 가게’로 시작되는 글은 자영업자들의 어려움을 느끼게 해준다. 수원시 팔달구의 한 생선구이집 자녀의 글로, 큰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저희 어무니 가게에요. 도와주세요ㅠㅠ. 거의 10년을 장사하고 계신데 생선값은 오르고 손님은 줄고 하루 일당도 안 나오는 상황이에요...폐업할까 고민이세요”라는 글에 많은 격려 댓글이 달렸다. 이 글을 읽은 김동연 경기도지사도 지난 4일 조용히 이 식당을 찾아가 점심을 먹었다. 기획조정실장, 경제실장, 자치행정국장, 경기도시장상권진흥원장, 대변인 등 도청 간부들도 함께 했다. 김지사는 자영업자를 돕기 위한 식당과 시장 방문을 이어가고 있다. 설렁탕집에서 신년 기자회견을 하고, 생선구이집에서 힘내GO카드 상담을 했다. 비빔국수집과 농수산물도매시장도 방문하는 등 서민경제를 위한 행보를 이어나가고 있다. 김 지사는 현장에서 살기 힘들다고 호소하는 자영업자들에게 “많이 힘들어도 꼭 살아남아야 한다. 최선을 다해 돕겠다”는 약속을 해왔다. 지난 1월 13일 수원시 한 설렁탕집에서 열린 신년 기자간담회에서는 경제 위기 극복을 위한 ‘대한민국 비상 경영 3대 조치’를 제안하며 민생 경제 회복과 기업 투자 활성화를 위한 구체적인 대책을 발표하기도 했다. 정부의 경제 정책을 ‘조삼모사’와 같다고 비판했다. 경제 정책의 첫 단추부터 잘못 채워졌다는 것이다. 김 지사의 3대 조치 중에는 소상공인, 자영업자, 중소기업을 위한 지원방안도 담긴 ‘슈퍼 추경 50조’가 있다. 추경 50조 원 가운데 15조 원 이상을 소상공인, 자영업자, 중소기업 지원용으로 편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민생회복지원금’도 ‘전 국민 일률 지급’보다는, 자영업자들을 포함해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는 취약계층 위주로 촘촘하고 두텁게 지원해야 한다는 입장도 밝혔다. 전 국민 일률지급이냐, 취약계층 집중 지원이냐 하는 문제는 국민들의 뜻을 좀 더 확인해 볼 필요가 있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중소 자영업자들은 지금 백척간두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이들이 무너지는 것은 대한민국 경제의 최전선이 무너지는 것이다. 정부와 정치권이 반드시 제일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다.
마치 꿈을 꾼 것 같다. 지난 3년이 아스라하다. 산불 현장에서 사위를 둘러보니 연기만 자욱한데 불타고 남은 폐허만 드러나는 느낌이랄까.. 순간 “나는 폐허 속을 부끄럽게 살고 있다..”로 시작되던 구절이 떠올랐다. 작년 11월, ‘더 이상 이대로는 대한민국을 지탱할 수 없다’며 각계각층에서 봇물 터지듯 윤석열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던 때 나온 경희대의 시국선언문이었다. 윤석열이 대통령이 된 때부터 2년반, 검찰공화국은 파멸이란 낭떠러지를 향해 내달리는 폭주기관차였다. 퇴진을 요구하는 시국선언이 줄을 잇자 대통령은 비상계엄선포로 화답했다. 그로부터 123일 만에 그는 파면되었다. 대통령에 오른지 1,061일, 용산의 천일야화는 막을 내렸다. 과연 대한민국 흑역사는 이제 끝났을까? 매일 거짓이 쌓아올린 성은 높아져 갔다. 장모의 사기, 아내의 조작과 농단, 검찰의 비리와 전횡을 덮기 위해 입벌구(입만 벌리면 구라)가 되었고 국어는 한없이 타락했다. 임기내내 야당과 시민사회를 반국가단체로 낙인찍었으며 야당지도자는 범죄자 취급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한국정치판의 참담한 전통을 짚어봐야 한다.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 이승만이 4.19로 쫒겨난 이후 박정희는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그 이후 전두환과 노태우는 반란수괴 및 비리혐의로 구속되었고 이명박은 비자금으로, 박근혜는 국정농단으로 징역을 살았다. 그리고 윤석열까지 대한민국 보수세력을 대표하던 대통령은 5연속 파면당하고 구속되는 전통을 만들고 있다. 그들이 망가뜨린 정치의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이 감당해야 했다. 경제는 폭망하고 외교는 치욕이었다. 국격은 추락했고 도탄에 빠진 서민들의 삶은 누추해져만 갔다. 대통령이 때아닌 빨갱이 타령으로 혐오를 부추길 때 아스팔트 위에는 살벌한 적의만 켜켜이 쌓였다. 급기야 법원이 초토화되었다. 이 모두 누구의 잘못인가? 거듭해서 이토록 무지하고 무도한 자를 대통령에 뽑은 것은 국민들이다. 하지만 선거에 이길 수만 있다면, 그래서 같이 부귀영화를 누릴 수만 있다면 수단방법을 가리지않고 끔찍한 자를 옹립한 집단은 ‘국민의힘’이다. 몰랐다고? 그럴 리가 없다. 그들은 공화국이 위기에 처했어도 자신들의 안위만 생각하며 친위쿠데타를 옹호한 공범이자 위헌정당이다. 아직 내란은 끝나지 않았다. 지금도 내란종사 혐의자를 헌법재판관에 지명하며 권력유지에 혈안이 되어있다. 총리고 뭐고 이 집단은 하나 제대로 된 사람이 없다. 그 정당에서 대통령에 나서겠다는 사람이 십여명에 이른다고 한다. 파렴치하고 후안무치하다. 내란의 후유증은 넓고도 깊다. 우리는 지금 폐허 속에서 공화국을 다시 재건해야 한다. 산불은 잔불정리가 생명이다. 그들이 심어놓은 체계와 잔당까지 청산하지 못한다면 공화국은 언제든지 위험에 빠질 수밖에 없다. 알베르까뮈의 말처럼 “공화국은 관용으로 건설되지 않는다!” 페르시아 세헤라자데의 천일야화는 신드밧드, 알라딘이 등장하는 환상 속의 해피엔딩이었다. 대한민국 김건희와 윤석열이 용산에서 만들어간 천일야화는 무엇이었을까? 대왕고래와 마약밀수, 극우유투버나 천공이 주인공이었을까? 땅에서 넘어진 자는 땅을 짚어야 일어서는 법, 내란은 최소한 수괴를 처단함은 물론 위헌정당 해산까지 이어져야 대한민국의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될 것이다. 이제는 정상인들의 정치를 보고싶다. 그래야 대한민국도 희망이 있다.
4월 4일 드디어 윤석열 탄핵이 완결됐다. 탄핵 절차가 진행된 지 111일 만에 헌법재판소 재판관 전원일치의 결정으로, 비상계엄 선포 이후 4달 만에 비로소 헌정질서가 회복됐다. 헌재의 발표 소식은 전 세계로 타전됐다.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는 모두 톱기사로 보도했고, 영국 BBC방송은 기뻐하는 시민들의 함성이 마치 월드컵 우승한 것 같다고 했고, CNN은 생중계했다. 그만큼 대한민국의 소식이 세계적 이슈가 된 것이다. 실제로 21세기 들어서 전 세계는 민주주의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미국은 극우파 트럼프 대통령이, 이탈리아의 총리도 극우파 출신이며, 아르헨티나에서도 극우적 지도자가 등장하였다. 튀르키예는 22년 독재 중인 대통령이 집권 연장을 위해 야당 지도자를 체포했다. 민주화의 모범국가인 대한민국의 계엄발동은 충격이지만 그것을 시민의 힘으로 2시간 만에 해제시켰고 사법적 판단으로 현직 대통령을 탄핵하니 세계인의 부러움과 표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과정은 험난했다. 야만적인 레거시 미디어의 공격과 막가파 같은 여당 의원들의 행태, 그리고 한술 더 뜨는 개신교 목사들의 저질스러운 망언과 이들에 세뇌되어 날뛰는 극우적 행동대 등 국론을 분열시키는 암초들이 곳곳에서 등장했다. 스웨덴 예테보리대학의 ‘민주주의다양성연구소(V-Dem)’에서는 한국을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선거민주주의 국가군으로 추락시켰다. 즉, 선거만 자유롭게 보장되는 민주주의일 뿐 독재화가 여전히 진행 중인 국가라는 것이다.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에서는 한국이 완전한 민주주의에서 ‘결함있는 민주주의국가(flawed democracy)’로 하향시켰으며, 미국은 핵산업과 관련해 민감국가로 지정했다. 우리도 다른 국가처럼 이렇게 무너지는가 싶었다. 실제로 어렵게 체포된 윤을 일개 판사와 검찰총장은 어처구니없는 방식으로 석방시키고, 경호차장 등 체포집행을 방해한 자들에 대한 영장 발부는 기각되는 등 하루하루가 살 떨리는 순간들이었다. 엄동설한 속에서 헌재의 판결을 기다리며 광화문 등 전국의 거리에 모인 시민과 결정을 촉구하는 시민대표단과 야당 의원들의 단식 등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면서 매일을 버텼다. 드디어 4일 헌재의 윤 파면 선언이 나오자, 서로를 부둥켜안았고 함성은 하늘을 찔렀다. 위대한 국민의 승리였고 다시 한번 전 세계에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회복력이 증명되었다. 마침 TV에서는 인기리에 “폭싹 속았수다(수고하셨습니다)”가 방영되고 있었다. 6~70년대를 살아오신 어머니 아버지에 바치는 헌사처럼 우리도 그들이 넘겨준 나라를 이렇게 지켜내고 있음을 자랑해도 될는지. “폭싹 속았수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겨우 산 하나 넘었을 뿐이다. 윤은 파면으로 직위를 잃었지만, 여전히 대행을 통해서 위법적인 인사권을 행사하고 있으며 그의 함께 역모를 꾸민 주요 종사자들과 협조자들은 아직도 요직을 차지하고 있다. 일제 잔재의 청산은 고사하고 민주화 과정의 수많은 피해 사례와 가해자들에 대한 제대로 된 청산도 못한 대한민국이다. 하물며 내란범들을 두고 어찌 민주주의를 논할 수 있으며 엉망진창으로 만든 나라는 또 어떻게 복구하려는가. 아직은 ‘수고하였다’고 자위할 때가 아니다. 우리의 민주주의를 향한 노정(路程)은 끝나지 않았고 어쩌면 이제 시작일 뿐이다.
한덕수 권한대행이 국회 몫으로 선출된 마은혁 헌법재판관을 늑장 임명하면서 대통령 몫 헌법재판관 후보 두 명을 지명했다. 헌정사에 유례가 없는 ‘끼워넣기·알박기 인사’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심판 중 박한철 당시 헌법재판소장이 임기만료로 퇴임했을 때, 황교안 당시 대통령 권한대행이 재판관 임명을 검토했으나 법조계의 다수의견을 받아들여 포기한 바 있다. 아직도 황당한 부정선거 음모론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극우인사인 황교안 전 총리도 하지 않았던 위헌적인 일을 수십년 경력의 관료출신인 한덕수 총리가 하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 권한대행은 헌법상 제한적인 통수권을 행사해야 하는 일시적인 지위에 불과하다. 3달 전 한 대행 스스로 주장했던 입장이다. 당시 한 대행은 국회가 선출한 재판관 3명(마은혁·정계선·조한창) 임명을 거부하며 “권한대행은 헌법기관 임명을 포함한 대통령의 중대한 고유권한 행사는 자제하라는 것이 우리 헌법과 법률에 담긴 정신”이라고 밝혔다. 국회의 권한을 침해하면서 형식적인 임명권까지 거부하던 한 대행이 불과 3개월만에 입장을 뒤집고 대통령의 중대한 고유권한을 행사하겠다고 하니 어느 국민이 납득하겠는가. 한 대행은 대통령이 아니라 총리다. 한 권한대행의 탄핵심판에서 헌법재판소는 권한대행에 대한 국회 탄핵소추안 가결 정족수는 150명 이라고 판시했다. 200명이 필요한 대통령의 지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권한대행에 불과한 총리가 대통령 몫의 헌법재판관 후보자를 지명하는 것은 위헌이다. 헌법학회의 다수 견해도 권한대행은 소극적·현상유지적 권한만 행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회나 대법원장이 지명한 후보자들을 대통령 권한대행이 임명하는 것은 소극적 권한 행사로 이해되지만 대통령 몫의 후보자 지명은 적극적 권한 행사이기 때문에 권한대행이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의 범위를 넘어선 월권이라는 것이 법조계 다수설이다. 법률적 절차적 논란도 심각하지만 헌법재판관 후보자로 이완규 법제처장을 임명한 것은 더 황당하고 더 심각하다. 이 처장이 누구인가. 윤석열 처가 의혹 관련 소송 대리인으로도 활동했던 윤 전 대통령의 40년 지기이자 내란사건 수사대상이다. 12.3 계엄선포 다음 날 이상민 전 행정안전부 장관 등과 ‘대통령 안가 회동’에 참석한 인물이다. 회동 직후에 휴대폰도 교체했다. 공수처에 고발되어 조만간 내란 공범 혐의로 조사를 받아야 할 처지다. 헌법재판소는 윤 전 대통령 탄핵 결정문에서 ‘대통령이 국민을 배반했다’고 규정했다. 윤 전 대통령이 헌법을 중대하게 위반해 탄핵된지 나흘 만에 탄핵당한 전 대통령의 최측근을 더구나 공수처 조사가 예정되어 있는 사람을 헌법재판관 후보로 지명한 것은 ‘국민을 배반’한 행위로 비난받아 마땅하다. 한 대행은 "사심 없이 오로지 나라를 위해 슬기로운 결정을 내리고자 최선을 다했다"며 "제 결정의 책임은 오롯이 저에게 있다"고 했다. 그러나 총리는 책임질 능력이 없는 신분이다. 민주적 정당성이 없는 신분이기 때문이다. 본인이 책임질 수도 없는 권한 밖의 일을 벌이면서 책임지겠다는 것은 믿을 국민은 없다. 헌법기구의 구성은 6·3 대선에서 선출될 차기 대통령 임명을 통해 완성하는 게 법리와 순리에 맞다. 윤 전 대통령 탄핵 이후에도 국정은 수습되기 보다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민심은 스스로 안정을 되찾고 있으나, 오히려 한 권한대행 등 국무위원들이 혼란을 부추기고 있는 형국이다. 국민 앞에 석고대죄를 해도 부족한 권한대행 체제가 대통령 놀이에 빠져 있어서야 되겠는가. 한 대행은 헌법재판관 지명을 철회하고 국정안정에만 몰두하길 바란다. 한 권한대행 체제의 남은 임무는 두 가지다. 6.3 대통령선거의 안정적 관리와 경제안정이다. 특히 미국발 관세폭탄으로 금융시장과 외환시장이 극도로 불안하고, 실물경제 또한 극심한 내수위축으로 모든 경제상황이 풍전등화다. 속죄한다는 마음으로 이 두 가지의 임무에만 집중하고, 나머지 사회 현안과 중장기적 국가과제는 6월 4일 들어서는 새 정부에 맡겨야 할 것이다.
2024년 12월 3일 대통령의 비상계엄령으로 시작된 혼란은 2025년4월4일 헌법재판소 탄핵 선고 인용으로 마무리되었다. 이제는 대한민국 정치가 탈북민 사회에 남긴 문제를 생각해 볼 시간이다. 하나의 사건을 동시에 경험했어도 느끼는 감정과 생각의 차이는 다르다. 다르다는 이유로 상대를 비난하는 언어와 선동은 상상을 초월했다. 무엇이 진실인지 가려보기 어려웠다. 탄핵정국에서 바라본 탈북민 사회는 대한민국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분열의 축소판 같았다. 대통령을 지킨다고 태극기를 들고 매일 집회에 참가하는 사람과 민주주의를 파괴한 대통령을 파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탈북민으로 갈라졌다. 각자 다른 생각과 주장을 가지고 국회 연단에 서기도 했다. 자신의 소신을 탈북민 커뮤니티에 내놓기도 하지만 대부분 침묵했다. 침묵의 의미는 탄핵 찬반에서 중립이거나 파면에 동의한다. 파면에는 동의하지만 그렇다고 대통령 탄핵을 반대하는 주장과 맞붙어 정신력을 소모할만큼 정치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정치에 관심 있다 하더라도 탄핵에 찬성하면 민주당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기에 침묵한다. 탄핵 반대는 국민의 힘, 즉 보수를 지지하는 주장에 힘을 싣는다. 주장에 힘을 싣는 이유는, 보수 정당인 국민의 힘에서 탈북민에게 국회의원 자리를 주었고, 진보정당인 민주당은 탈북민에 관심이 없기에 국회의원을 배출하지 못했다. 이 외에도 민주당에 대한 불신이 크기 때문에, 탈북민은 당연히 보수를 지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소통하지 못하는 국회처럼 탈북민 사회도 날카로운 언어로 상처받고 상처를 주고 있다. 탈북민을 대표하는 국회의원과 탄핵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공산주의자’, ‘빨갱이’라는 역사적 트라우마가 있는 단어를 사용해 갈등을 불러온다. 탈북민 존재 의미가 마치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증명하는데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반도는 이념으로 분단되었고 아직 치유하지 못한 트라우마가 있다. 1990년대 ‘고난의 행군’으로 고향을 떠난 탈북민 역시 전쟁에 비교될 만큼 이산의 아픔과 상처가 있다. 고향이라고 하지만 다시는 돌아보고 싶지 않다. 다시 태어나 새로운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고자 한다. 그러나 분단사회에서 과거를 잊고 현재를 살기란 어렵다. 대통령의 탄핵과 같은 혼란이 있을 때마다 소용돌이 정치에 탈북민이 있었다. 대통령의 탄핵을 반대하는 탈북민의 주장처럼 정말로 민주당은 탈북민을 소홀히 하는가. 그리고 탈북민 출신 국회의원을 배출한 국민의 힘은 정말로 탈북민에 관심이 많은가. 지금이야말로 탈북문학이 필요한 시간이다. 문학은 나를 돌아보고, 세상을 보게 한다. 문학은 나의 존재와 가치를 알게 한다. 아프고 상처받은 사람이 글을 쓴다. 북에서나 남에서나 결핍이 없었던 사람, 경험과 능력도 없으면서 리더의 자리에 앉은 사람이 어찌 슬픔을 알겠는가. 문학은 글로써 나를 증명하고 스스로 사회의 필요성을 만들어간다. 그것은 불러서 꽃이 되기보다 존재 자체만으로 사회를 아름답게 만드는 일이다. 탈북민 사회에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럼에도 탈북문학에 대한 사회의 관심은 저조하다. 불과 몇 명을 선정하는 탈북민 문학공모가 정직한 심사를 거쳐 훌륭한 문인을 배출하기를 기대한다. 대통령의 비상계엄령으로 혼란한 정치판에 분열과 갈등보다 지적인 대화로 소통할 수 있는 탈북문학이 필요한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