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 선포 이후 거의 3개월이 흐르는 현재 대한민국은 민주제도의 후퇴를 목격하고 가슴을 졸이며 대통령 탄핵 과정을 지켜보며 완벽하지 않지만, 그동안 이룩해 놓은 민주제도의 회복을 바라고 있다. 물론 탄핵을 반대하며 자신들의 사적 이익을 추구하며 헌법을 무시하는 어리석은 세력들도 있긴 하다. 이들의 대부분의 행동양식은 강약약강을 기초로 하기에 정권이 바뀌면 그들의 주류세력은 사라질 것이다. 물론 정신적으로 아픈 사람들은 어느 정도 남아있긴 하겠지만. 중요한 것은 이런 일련의 사태로 인해 한국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일상이 더욱 팍팍해졌다는 것이다. 국내 한 일간지가 인용한 미국의 유명 경제지의 기사 내용을 보자: 미 보수경제지 ‘포브스’는 지난 6일 ‘윤석열의 필사적인 곡예가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살인자(Killer)인 이유’란 제목의 분석 기사에서, 한국 경제에 엄청난 손실을 초래한 비상계엄을 한 마디로 ‘지디피 살인자’로 표현했다. 기사는 말미에 섬뜩한 문장으로 끝난다. “윤 대통령의 이기적인 계엄령 사태가 초래한 값비싼 대가는 한국인 5,100만 명이 시간을 두고서 분할해 지불하게 될 것이다.” 이렇듯 현재 우리 사회는 먹고살기 힘든 상황이다. 의료대란(현재 지속 중) 때 나온 유행어, “각자도생”은 현재 진행형이고 앞으로 얼마나 더 연장될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 자신도 스스로 살 궁리를 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살아날 길을 찾을 수 없다면 어찌해야 할까? 여기서 우리는 더욱 지혜로워야 한다. 일자리가 없고 벌이를 할 수 없다면 역으로 씀씀이를 줄여야 할 것이다. 각자도생의 진리가 여기에 있다. 마치도 겨울에 동굴에 들어가 겨울잠(hibernation)을 자는 곰처럼 가장 에너지를 적게 쓰는 모드로 돌입하는 것도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일 수도 있다. 한 발짝 더 나아가서 이런 비상시국이 아니더라도 이제는 지구상의 자원이 고갈되는 상황이고 세계적 기후재난 중이기에 지구상의 인류 모두가 에너지를 가능한 적게 쓰는 “상시 하이버네이션 상황”으로 돌입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자본주의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세계체제 안에서 이런 주제에 관심이 없을 수도 있지만 이는 우리 인류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유일한 길일 수 있다. 미국의 사상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는 1845년에서 1847년까지 월든(미국 보스톤 근처,walden pond)의 숲속에서 한 평 정도의 오두막을 짓고 살면서 인간이 최소한의 물질로 자급자족하며 얼마나 단순하게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 수 있는지 실험하며 저술 활동을 했다. 이로써 헨리의 사상은 훗날 러시아의 톨스토이,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 미국의 마틴 루터 킹 목사, 남아공의 넬슨 만델라 대통령을 비롯한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사실, 인류 역사상 종단, 종파를 막론하고 소위 “수도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그런 단순하고 “청빈한 삶”을 자발적으로 살아왔다. 가톨릭교회의 수도자(사제 아니고 수녀와 수사)들은 3대 서원(Three vows, 하느님 앞에서 하는 약속)을 한다. 청빈, 정결, 순명이다. 이 세 가지 서원의 직접적 목적은 ‘자유’다. 청빈은 물질로부터의 자유, 정결은 사람으로부터의 자유, 순명은 내 의지로부터의 자유이다. 이렇게 세 가지 서원으로 얻은 자유를 가지고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예수의 가르침 혹은 예수가 주신 임무(mission)는 선교, 포교, 전도가 아니다. 예수는 교회를 세우라거나 교회의 멤버십을 늘리라고 한 적이 없다. 예수가 초대 교종(교황)인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강조하며 주신 임무는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이다. 여기서 양은 겁이 많고 약한 존재의 상징이다. 그러니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할 일은 우리 주변에 있는 “약자들”의 편에 서서 그들과 함께하는 것이다. 광화문파의 전씨나 여의도파의 손씨처럼 예수의 이름을 팔아 정치적 세력에 기생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이 아니다.
정치는 진실을 추구하지 않는다. 정치는 허위와 비밀을 ‘정당하게’ 활용하며, 이로써 권력이 목적으로 했던 ‘더욱 고귀한 바’를 달성하면 그만이다. 진실은 취사 선택된다. 역사에는 거짓 선동을 반복함으로써 권력을 쟁취, 유지, 확대한 정치적 사례가 숱하게 많다. 선동은 얼마나 매력적인가. 허위 정보, 고정관념, 폭력적 환상, 공포가 반복되며 정교화될 때 우리는 처음에는 거짓이라고 인식했던 메시지조차 진실로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우리는 진실에 관심이 없다. 진실은 어렵고 드물다. 그러니 많은 경우 심지어 민주적 국가에서도, 권력자가 진실을 추구할 유인은 없다. 권력자에게는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보다 더 쉬운 수단이 얼마든지 있다. 권력이 진실 추구를 표방한다면 어떨까. 이는 성공하기 힘든 목표인데, 진실성을 판단하는 주체의 자율성을 통제하려는 열망을 통제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진실과 허위를 판단하는 권력 앞에 진실이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가. “무엇이 진실인가?”라는 물음에 권력은 필요에 따라 다른 답을 내놓기 십상이다. 언론은 진실 추구를 목적으로 한다. 이 또한 녹록하지 않다. 2016년 트럼프 선거본부를 이끌었고, 트럼프 정권의 백악관 수석 전략가를 지냈으며, 수백만 페이스북 이용자의 개인정보를 이용하여 미국 대선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진 케임브리지 애널리티카의 부사장이었던 스티브 배넌은 2019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하려는 것은 그저 ‘때리고, 때리고, 때리는 것’ 그렇게 하여 추진력을 유지하는 것이다. 우리의 상대는 미디어다. 그리고 미디어는 멍청하고 게을러서 한 번에 하나밖에 다루지 못한다. 우리는 홍수를 만들면 된다.” 유능한 언론에 성공이 보장된 것도 아니다. 언론이 지속 가능하기 위해서는 진실을 밝혀낸 언론에 경제적, 사회적 보상이 주어져야 한다. 그러나 진실은 어렵고 드물다. 좋은 보도를 응원하지만, 좋은 보도를 진득하게 읽어내는 건 고역이다. 고백하건대, 진실은 나에게도 인기가 없다. 이렇듯 진실은 정치의 친구였던 적이 없다. 그러니 역설적으로 우리는 허위의 시대를 잘 살아낼 수 있다.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고 있다는 자명한 사실 뿐이다. 우리는 자신과 타인으로 구성된 어떤 이야기 속에서 살아간다. 진실과 허위가 뒤엉켜 있는 이야기로부터 우리는 타인의 위치를 확인하고, 이로써 자신의 위치를 짐작한다. 이야기를 쓰는 것은 결국 우리다. 그 이야기가 드높은 환대와 용기로 쓰이길 바란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전쟁의 비극을 그려낸 작가 커트 보니것은 그의 소설 <타이탄의 세이렌>에서 하모늄이라는 외계 생명체를 묘사한다. 집단생활을 하는 하모늄은 허위와 폭력의 장막이 둘러쳐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언어 단 두 가지를 제시한다. 두 메시지는 서로에게 응답한다. 첫 번째 메시지는 “나 여기 있어, 나 여기 있어, 나 여기 있어”이고, 두 번째 메시지는 “네가 있어서 기뻐, 네가 있어 기뻐, 네가 있어 기뻐”이다.
또 터졌다. 시대적 비극인 대형 전세사기 사건을 막겠다고 내놓는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요란한 대책들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수원시 일대에서 또 70억 원 규모의 피해가 발생했다는 소식이 불거졌다. 변명의 여지 없이, 당국이 추진하고 있는 정책들이 허술하기 짝이 없다는 얘기다. 실효성이 확실히 담보된 예방책을 하루빨리 실행해야 한다. 나라의 미래인 젊은이들을 한순간에 생지옥으로 몰아넣는 전세사기 범죄에 언제까지 이렇게 질질 끌려다닐 작정인가. 수원시 일대에서 또 70억 원 규모의 전세사기 피해가 발생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피해자 대부분은 20~30대 사회초년생으로 1억 원이 넘는 전세보증금을 잃고 개인회생을 준비하는 등 피해가 극심한 것으로 나타났다. 경기신문 취재에 따르면 지난 6일 한 인테리어 업자가 사기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그는 수원시 팔달구 우만동과 인계동 일대에서 전세사기를 일으킨 혐의를 받고 있다. 피의자가 소유한 우만동 원룸 건물에는 총 27세대, 인계동 투룸 건물 2채에는 총 38세대가 거주하고 있다. 입주민 모두 1억 원 이상의 전세보증금을 지불한 만큼 총피해 금액은 약 78억 원에 달한다. 전세사기 피해자 대부분은 20~30대 사회초년생들이다. 피해자들의 하소연은 하나같이 눈물겹다. 입주민들은 피의자가 전세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하게 되자 지난해 중순쯤 돌연 잠적했다고 설명했다. 집을 찾아갔으나 아무도 없었고, 우편함에는 관리비가 오랜 기간 미납됐다는 등의 독촉장이 다수 꽂혀있었다고 전했다. 우만동 원룸에 거주한 또 다른 피해자는 “전세사기를 당하면서 피의자의 행방을 쫒기 위해 결혼식을 미뤄야 했다”며 “빚을 지며 전세보증금을 구했지만, 이 모두 잃게 되면서 현재 개인회생을 준비 중”이라고 호소했다. 팔달구 투룸에 거주하는 다른 피해자는 “입주자들과 함께 시내 한 주택에서 가까스로 발견한 ‘진행 중인 공사 대금이 들어오면 전세보증금을 꼭 돌려주겠다’는 각서까지 작성했으나 현재 단 한 푼도 돌려받지 못했다”고 토로했다. 그는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해 결국 직장까지 그만둬야 했다”며 “입주민 모두 어린 나이에 억대에 달하는 빚을 떠안게 됐다. 앞으로 우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느냐”고 호소했다. 그동안 전세사기 사건을 해결하겠다고 내놓은 정부와 정치권의 대응은 소리만 요란했지, 막상 시장에서 법과 제도의 허점을 파고드는 사기꾼들의 범의(犯意)를 차단하는 데는 역부족이 아니냐는 의심이 든다. 제일 한심한 것은 이미 진행됐거나 진행 중인 사태의 진상 파악부터 제대로 하고 있는지다. 한 사람이 수십~수백 채의 집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시한폭탄이나 다름없는데 그 현상을 파악하고 예방하는 일조차도 왜 이리 실행이 더딘지를 알 길이 없다. 피해자 구제를 위한 입법이나 제도 마련에 공을 들이는 일은 물론 중요하다. 2023년 말까지 국토교통부에서 인정한 전세사기 피해자만 2만 5578명에 이른다. 작년 9월 말까지 주택도시보증공사(HUG)에 접수된 전세 보증사고 피해 금액의 합계는 전국적으로 13조7907억원, 경기도에서만 4조2284억원(30.7%)에 이른다. 상상을 초월하는 비극이 진행 중인 것이다. 경기도가 27일 수원 경기대학교 텔레컨벤션센터에서 개최하는 경기 안전전세 프로젝트 ‘부동산 컨퍼런스 2025’를 주목한다. 전세사기 예방 및 안전한 부동산 거래 활성화를 위한 정책과 신기술을 공유하고, 공인중개사의 전문성을 강화하기 위해 마련됐다는데 부디 속 시원한 해법들이 쏟아져 나오길 기대한다. 전세사기는 세상을 향해 비상하려는 젊은이들의 발목을 무참히 낚아채는 흉악한 올무다. 그 덫을 제거하는 일은 온전히 중앙·지방정부와 정치권의 몫이다. 논의 중인 ‘주택 소유 제한’, ‘전세사기 피의자 가중처벌’ 규정부터 과감히 진전시켜야 한다. 정말 중요한 것은 이미 범행 중이거나 잠재된 전세사기 시한폭탄들을 찾아내어 신속히 제거하는 일이다. 애꿎게 희생당하고 있는 청춘들의 비명이 이만큼 계속됐으면 이제는 속 시원한 해법이 나올 때도 되지 않았는가.
새벽이 열리면 산에 오릅니다. 오른 산에는 벌써 사람으로 가득합니다. 들뜬 눈동자들이 한 곳을 바라봅니다. 저물었던 해가 산 너머에서 다시 떠오릅니다. 지고 뜸과 상관없이 해는 같은 해입니다. 달라진 게 있다면 새로운 하루의 시작이라는 믿음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시간조차 헌것과 새것이 있다고 믿습니다. 믿음은 진리보다 쉽게 전염되어서 돌이키기 힘듭니다. 새로운 날이 시작되었다는 믿음, 그 믿음에 전염된 사람들이 동쪽 하늘을 바라보고 섰습니다. 나 또한 전염된 눈빛을 다독이며 같은 방향으로 향합니다. 산인지, 오름인지, 새로움인지, 태양인지..... 분명치 않은 대상을 향해 사람들은 해묵은 마음의 짐을 벗어 던집니다. 벗어 던진 짐들이 바윗덩이가 되어 산비탈을 굴러 내려갑니다. 오르다 오르다, 끝내 굴러떨어지고 마는 시지프의 바윗돌 같습니다. 어쩌면, 시지프의 바위는 신화 속에만 존재하는 헛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쇠똥구리를 보면서 느낀 부끄러움도 그래서일 것입니다. 굴리는 방향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뒷발로 쇠똥을 굴리는 녀석과 나는 닮았습니다. 녀석과 내가 이르고자 하는 삶의 정상은 몇 덩이의 쇠똥을 굴려야 도달할 수 있을까요. 굴리고 또 굴린다고 정상에 도달할 수 있기는 할까요. 설혹, 그렇게 굴리고 또 굴려 정상에 오르면 무엇이 남을까요. 머물 수 없어 다시 지상으로 굴러떨어지고 마는 시지프의 바위처럼, 도시의 밑바닥으로 추락하는 건 아닐까요. 그럴 거라는 걸 알면서도, 애써 기어오르는 것은 반항의 몸짓일지 모릅니다. 카뮈가 『시지프 신화』에서 밝혔듯이, 한없이 올라도 굴러떨어질 수밖에 없는 부조리에 대한 반항 말입니다. 쉼 없이 바위를 굴려야 살아남을 수 있는, 인간의 영원한 노동은 부조리입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명명백백한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카뮈는 세상에 만연한 온갖 부조리로부터 세 가지 대안을 끌어냈습니다. 자유와 반항과 열정이 그것입니다. 그러한 의식의 활동을 통해 죽음으로의 초대를 삶의 법칙으로 바꿉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래서 나는 자살을 거부한다.”라고 선언합니다. 생각의 깊이가 얕은 나로서는, 카뮈의 철학적 사유(思惟)를 헤아리기 힘듭니다. 그의 책을 읽고도 부조리로부터 행복으로 나아가는 길을 찾지 못했습니다. 다만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숙명으로 받아들이지 말자는 오기 비슷함입니다. 끝없이 추락해도 기어코 산 정상으로 밀어 올리는 바위 같다고나 할까요. 쓰고픈 건 많은데 녹여내지 못합니다. 쓰지 못함의 정체는, 씀의 안쪽에서 흘겨보는 곁눈질입니다. 흘겨보는 눈빛으로도 상처를 입는구나. 신발 끈을 고쳐 맬 때마다 손톱 밑이 아립니다. 내 안의 내가 등을 돌리고 서서 눈을 흘길 때, 날 선 칼이 바짝 목을 겨눕니다. 서둘러 길을 나서지만 겨눈 칼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나진 못합니다. 까만 하늘에 걸린 은하수가 무색합니다. 오래 걷고 멀리 걷습니다. 걸음은 길과 길을 따라 정처 없이 이어지는데, 길의 모양새는 반듯하지 못하고 꾸부렁거립니다. 꾸부렁길의 끄트머리는 어김없이 산길로 이어집니다. 어제 올랐던 산을 오늘 다시 오릅니다. 오르는 내내, 미움이라거나 상처 같은 것들을 산 밑으로 굴려 보냅니다. 겨울도 함께 굴러갑니다.
휠체어는 단순한 이동보조 수단이 아니고 그 사람의 다리다. 2025년 을사년 유난히 눈이 많이 온다. 작년 여름 역대 최고의 더위가 엄습하고 11월 폭설이 내리더니 올겨울 눈과 추위가 잦다. 많은 사람들이 종종거리며 조심스레 길을 오간다. 그 가운데 휠체어도 윙윙거리며 네발로 길은 걷는다. 도로는 나름 제설들이 되는데 인도는 여전히 하얀세상이다. '사람중심 사람이 먼저다'라지만 눈이 오고 나면 보이는 세상은 여전히 차 먼저이다. 그 와중에 종종 센터로 휠체어 구난 요청이 들어온다. 그럼, 센터는 바로 온 직원들이 긴장하고 출동을 한다. 이 추위에 장애인 당사자의 건강이나 생명의 존폐까지 올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위험이 닥치면 당연히 119를 떠올리겠지만 보장구를 사용하는 장애인들이나 스쿠터 사용하는 어르신들은 그렇지 못하다 119가 오면, 사람만 구난한다. 휠체어는 구난하지 않는다. 혹자는 "사람이 중요하지, 휠체어나 스쿠터가 뭐가 중요하냐"고 말하겠지만 보장구를 이용하는 사람에게는 보장구는 신체의 일부이기 때문에 보장구를 버리고 몸만 구난 된다는 건 본인의 삶을 포기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제는 휠체어 구난 시스템이 필요한 시기다.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전동휠체어를 탄 장애인이나 전동스쿠터를 탄 어르신들을 자주 본다. 그만큼 이동 약자들의 이동수단으로 보편화 되어간다는 이야기이다. 2050년이 되면 인구의 반이 노인인 초고령사회가 된다. 이는 앞으로 휠체어나 전동스쿠터 사용이 무한대로 늘어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휠체어나 전동스쿠터를 긴급 구난하는 구조시스템 가동이 필요하다. 특히, 폭염과 강추위 앞에 취약한 배터리를 사용하는 휠체어나 스쿠터를 사용하는 이동 약자들의 특성상 그들의 안전과 생존을 보장하기 위한 최소한의 시스템이다. 방법은 많다고 하지만, 한다면 119와 함께 교통약자이동지원센터를 연계할 수도 있고, 어느 지자체처럼 휠체어 구난 차량을 운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보장구수리센터에 인력이나 차량 예산을 지원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좋은 도시나 살만한 도시의 척도는 복지일 것이라 확신한다. 선진국일수록 장애인정 범주가 넓어 장애 출현율이 높다. 초고령 사회가 돼가는 대한민국도 장애인과 노인, 이동 약자들의 맞춤 복지가 필요하다. 그 가운데 하나가 위급에 빠진 휠체어나 전동스쿠터 구난시스템이다. 사람들은 전제한다. '고장 나면 몸이 안 가면 되지' 하고... 우리는 알아야 한다. 자전거나 자동차를 이동의 보조 수단으로 타는 것처럼 이동약자들이 휠체어나 스쿠터를 타는 것이 아니란 것을. 그들에게 휠체어나 스쿠터를 버리고 몸만 가라는 건 다리 두 쪽을 잘라 버리고 가라는 말과 같다는 것을. 따라서 사람이 먼저인 세상을 위한다면 사람과 휠체어를 함께 구조 구난할 수 있는 시스템 정립이 꼭 필요하다. 사람과 지구가 같이 간다면 더 가치 있는 삶이 되지 않을까.
청소년들을 상담하는 상담사분들을 통해서 청소년들의 자해와 자살이 늘고 있다는 말을 몇 년 전부터 들어왔다. OECD 자살률 1위라는 통계를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10~19세의 자살률은 20년 전인 2003년의 4.5명에서 2023년의 7.9명으로, 20~29세도 2003년의 15.3에서 2023년에는 22.2명으로 증가했다. 10대에서 30대까지 사망원인 중 1위가 자살이다. 소리 없는 비명이 들리는 듯하다. 최근에 보도된 오요안나, 김새론의 비보에 더해서 이 글을 쓰는 도중에 무심코 연 인터넷 창에 자살로 추정되는 청년의 죽음에 관한 기사가 또 새로 게시되었다. 연이은 비보에 단련되어 무뎌졌다고 생각했던 가슴이 저릿해지고 몸이 쑤시는 것처럼 아프다. 그들의 고통을 짐작해볼 수 있는 기사들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넘어선 위기감이 든다. 모두가 연결된 세상 가까운 누군가에게도 당장 내일이라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인생의 회전목마에서는 그 누군가가 내가 될 수도 있다.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국제자살연구학회 회장을 지냈고 국제자살예방협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로리 오코너 교수는 자살을 생각한다는 신호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무언가에 갇힌 것만 같다는 말.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짐만 된다는 말. 미래가 절망적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한다. 상실, 거부, 스트레스를 일으키는 사건을 겪었고 이 때문에 고생하고 있다. 기분이 이상하게 좋아 보이는 경우에 이는 그가 자살이 문제의 해결책이 될 것이라고 마음을 굳혔기 때문일 수 있다. 수면·식사·음주·약물 복용 등의 행위나 위험을 감수하는 행위에 뚜렷한 변화가 생겼다. 자해 경험이 있거나 전에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다.” 이런 신호를 보았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구체적으로 자살 생각이 있는지 물어보는 게 필요하다. 그런 질문이 선뜻 가능한 일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연구들에 의하면 오히려 누군가에게 자살 생각이 있는지 묻는다고 그 사람에게 자살할 생각을 주입한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오히려 이런 질문이 생명을 구하는 대화의 시작이 될 수 있다. 그러면 어떻게 대화해야 도움이 될까. NHS 스코틀랜드 보건기관이 자살 예방 대처를 위해 개발한 대화의 기술을 소개해 본다. 잘 들어주기, 연민의 마음을 가지기, 신뢰하고 협력하기로 요약된다. 자살 신호가 보이는 누군가에게 자살 생각을 물었을 때 “맞아 자살 생각이 있어”라는 대답을 들었다면 우선 중요한 것은 충고나 조언 혹은 판단적인 말이 아닌 잘 들어주기다.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네 아니오’의 대답이 나오는 질문이 아닌 열린 질문을 한다. 나오는 대답을 부드럽게 살피고 이해한 다음 답한다. 언어적, 비언어적 피드백을 통해서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노력과 발전을 인정해준다. 진심 어린 마음으로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 수 있는 강점과 행동을 식별, 인정하고 이를 말과 몸짓으로 표현한다. 들은 내용을 다시 조금 다르게 바꾸어 말해주고 요약하는 것도 상대의 말을 이해했다는 것을 상대방이 확인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연민은 공감에 바탕 해서 용기를 내어 타인의 고통을 헤아리고 해결하려고 하는 지혜의 마음이다.극심한 고통속에 있는 이에게 안전감을 느낄 수 있는 신뢰와 협력의 관계는 살만한 삶을 위해서 필요한 치료나 도움으로 연결할 수 있는 토대가 된다.
통계청에 따르면 2023년 우리나라 출생아 수는 전년보다 1만 9200명(7.7%) 감소한 23만 명이었다. 이는 역대 최저치를 경신한 것이다. 출생아 수는 8년 동안 계속 감소했다. 그런데 지난해엔 반등되고 있다는 징후가 포착돼 희망을 주고 있다. 지난해 11월 출산율이 증가한 것으로 밝혀졌다. 자세한 통계가 나와야 알겠지만 출생아 수는 2023년 23만 명 수준에서 지난해 24만 명에 가까워진 것으로 추측된다. 여성 1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출생아 수인 합계출산율도 2023년 0.72명에서 2024년 0.75명 수준으로 상승했을 것이라는 게 정부의 예상이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지속적 출산율 증가를 기대할 수 없다는 말도 나온다. 그동안 출산이나 혼인을 미룬 부부들이 비로소 아이를 갖기 시작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통계청은 이전까지 출생아 수가 워낙 적었던 데 따른 기저효과와 함께, 코로나19 팬데믹 종료 이후 혼인건수가 증가한 때문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여기에 더해 지방정부들이 둘째 이상 출산을 지원하는 정책도 효과가 있었을 것이라고 풀이했다. 어쨌거나 당분간이나마 회복세가 예상된다니 반갑다. 청년들이 혼인과 출산을 기피하고 있는 이유는 한마디로 “먹기 살기 힘들기 때문”이다. 혼자 벌어서는 가정을 꾸려나가면서 집을 장만하기 어렵다. 맞벌이를 하자면 아이를 낳아 기르기 힘들다. 교육에 드는 비용도 만만치 않다. 맞벌이를 한다 해도 벅차다. 따라서 국가 차원의 실효성 있는 출산대책이 요구된다. 이 말은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저출산 대책들이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는 뜻이다. 전문가들은 국가 차원의 획기적인 대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즉 소액 지원금을 비롯한 자잘한 정책, 일회성 정책을 시행하기 보다는 가임부부들과 혼인을 생각하고 있는 젊은 남녀가 고개를 끄덕일 만한 과감한 지원 정책을 펼쳐야 한다는 것이다. 없애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 잡다한 생색내기용 정책 대신 아이를 낳고 키우는 데 확실하게 도움이 되는 굵직한 정책에 예산을 집중 투입해야 한다. 아울러 직장과 가정의 일을 함께 할 수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이는 정부가 앞장서서 정책적으로 노력해야 할 일이다. 아울러 기업들의 인식도 개선돼야 한다. 이제 자녀 출산과 양육은 개인의 일이 아니다. 지역과 국가의 운명이 걸린 사회적인 문제라는 인식이 확대 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경기연구원이 발간한 ‘저출생 극복, 근로시간 단축과 일·생활 균형 확보부터!’ 보고서는 관심을 끌만 하다. 경기연구원은 “2021년 기준 OECD 국가 중 5번째로 높은 연간 근로시간이 보여주듯, 장시간 일하는 문화가 경제활동과 가족적 책무의 양립을 어렵게 한다”며 저출생 극복을 위해 현행 법정 근로시간인 주40시간을 주35시간으로 단축할 필요가 있다는 연구결과를 내놓았다. 보고서는 ‘육아 관련 제도의 낮은 실효성’과 ‘장시간 노동문화’가 일·가정 양립을 어렵게 하고, 출산에까지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며 초저출산의 여러 요인 중 하나라고 밝혔다. 지난해 전국 20~59세 노동자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도 제시했다. 일·생활 불균형의 이유로 장시간 일하는 문화와 과도한 업무량을 꼽았다.(남자 26.1%, 여자의 24.6%) 20대 여성은 39.3%로 특히 높았다. 다수의 30대 여성도 업무량과 노동시간이 많다(31.5%)고 답했다. 장시간 노동과 과도한 업무로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다. 일하는 시간을 줄여야 한다는 응답을 한 30~40대 남자와 20~30대 여성은 절반이나 됐다. 이들은 출산과 양육의 주 연령대다. 경기연구원은 제도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 공공기관이 우선 도입하자고 했다. “통근 시간 일부를 노동시간으로 인정하는 방안도 선제적으로 검토하자”는 제안도 했다. 육아기 자녀를 돌보는 노동자를 대상으로 근무시간을 더 단축시키자는 제안도 긍정적으로 생각해 볼 때가 됐다.
민주주의는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목소리가 동등한 가치를 가질 때 비로소 완성된다. 이는 중앙정부의 정책 결정 과정에서뿐만 아니라, 지방자치 단위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어야 하는 원칙이다. 우리나라 지방자치는 지난 30여 년 간 지속 발전해 왔으며, 이제는 지역 주민의 실질적인 삶과 밀접하게 연결된 정책을 결정하는 중요한 기제로 자리 잡았다. 지방자치가 그 본래의 기능을 온전히 수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충족돼야 할 요건이 있다. 지역 주민의 목소리가 온전히 반영될 수 있도록, 지방의회가 그 역할을 충분히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 경기도 기초의원 정수의 불균형은 이 같은 기본 원칙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으며, 대의민주주의의 본질을 훼손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경기도는 우리나라 최대 광역도시로, 전체 인구의 27%에 해당하는 1370만 명이 거주하고 있다. 그러나 지역주민의 생활과 가장 밀접하게 지역 발전과 민의를 대변해야 하는 기초의원은 전국 2988명 중 15%에 불과한 463명에 머물러 있다. 이는 단순한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민주적 대표성의 불균형을 의미한다. 기초의원 1인당 평균 인구수를 비교해 보아도 그 차이는 더욱 극명해진다. 전국적으로 기초의원 1인당 평균 인구수는 약 1만 6789명이지만, 경기도에서는 2만 9569명에 이른다. 특히 오산시는 그 불균형이 가장 심각한 수준에 속한다. 1991년 지방자치제 시행 당시 오산시의 인구는 6만 7000여 명에 불과했으나 현재는 약 25만 명에 달하며, 행정동도 기존 6개에서 8개로 증가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변화에도 불구하고 기초의원 정수는 여전히 7명에 머물러 있다. 이는 기초의원 1인당 인구수가 3만 4471명에 달하는 것으로, 전국 평균보다 2배 이상 많은 수준이며, 오산시와 같이 의원정수가 7명인 전국 54개 지자체 기초의원 1인당 평균 인구수가 8560명으로 감안하면 4배에 가까운 차이를 보인다. 그만큼 만나야 할 주민이 많다는 얘기이고, 단순 비교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을지 모르지만 오산시의회 의원의 업무 강도가 타 의회 의원의 4배에 달한다는 의미도 된다. 지방의원은 지역 주민을 대변하고 정책을 결정하며 집행부를 견제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하지만 이러한 불균형 속에서 그 역할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헌법이 보장하는 평등권의 원칙에 따르면 모든 국민은 동등한 권리를 가지며 특정한 지역에 산다는 이유로 차별을 받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현재 경기도의 상황을 보면 지역에 따라 유권자의 투표 가치가 현저히 달라지는 심각한 불균형이 존재한다. 이는 단순한 행정 문제를 넘어 헌법 가치에도 위배되는 사안이다. 헌법재판소가 2018년 선거구 획정과 관련해 허용 가능한 인구 편차 기준을 기존 4:1에서 3:1로 강화한 것도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을 반영한 결정이었다. 이 기준을 적용하면 현재 경기도의 기초의원 정수는 최소 80명 이상 증원돼야 하며, 이는 단순한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필연적인 조치라고 할 수 있다. 경기도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역동적인 변화를 겪고 있는 지역으로, 특례시로 지정된 5개 도시 중 4곳(수원, 용인, 고양, 화성)이 경기도에 속한다. 이들 지역은 급속한 인구 증가와 도시 확장으로 행정 수요가 나날이 증가하고 있다. 일각에선 이러한 사정과는 달리 기초의회 의원 정수를 늘리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의견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일부 기초의원들의 각종 일탈행위가 매년 끊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계에선 의원 수를 늘려야 한다는 논의도 이어져 오고 있다. 견제와 균형의 원리에 따라 집행기관을 제대로 견제할 수 있도록 입법기관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1991년 지방자치 부활이후 지방자치단체는 그 규모가 날로 비대해졌다. 예산 규모만 보더라도, 최근 20년 동안 전국 지자체의 총 예산 규모는 2004년 111조 원에서 2024년 434조 원으로 4배 늘었다. 예산이 비대해진만큼 그 권한도 커진 집행부에 비해, 견제와 감시의 역학을 해야 할 기초의회 의원은 2006년의 2888명에서 현재 2988명으로 단 1% 증가에 그쳤다. 지방자치 활성화에 대한 유권자들의 요구가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날로 비대해지는 행정기관에 대한 감시와 견제를 위해서는 최소한의 의원 정수 확대가 불가피하다는 주장이 나오는 배경이다. 이러한 불균형을 바로잡기 위해 정부와 국회가 적극 나서야 한다. 특히 공직선거법 개정을 통해 기초의원 정수를 조정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조치다. 이는 단순한 숫자의 조정이 아니라 경기도민의 투표 가치가 공정하게 반영될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조치이며, 지방자치의 근본 취지를 다시금 되새기는 계기가 될 것이다. 지방자치는 단순한 행정적 기능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가 실현되는 공간이다. 그러나 현재 경기도의 기초의원 정수 불균형은 이러한 가치를 실현하는 데 있어 중대한 걸림돌이 되고 있다. 이제는 더 이상 이러한 불균형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 경기도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인구가 거주하는 광역자치단체이며, 그만큼 지역 주민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구조를 마련하는 것이 절실한 과제다. 오산시의회는 정부와 국회가 이러한 문제의 심각성을 깊이 인식하고 지방자치의 미래를 위한 책임 있는 행동을 보여줄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 [ 경기신문 = 지명신 기자 ]
무슨 일을 하든 먼저 마음이 동(動)해야 한다. 마음이 긍정적으로 반응할 때 과정도 순탄하고 결과 또한 좋다. 만약 마음이 부정적으로 작동하면 과정이 아무리 매끄럽다 해도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무슨 일이든 마음이 불편하면 어딘가 모르게 어색하고, 손과 발이 얼어붙고, 입과 머리가 둔해진다. 작년 연말부터 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누구의 잘못과 허물을 말하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서로의 마음이 뒤틀어져 있다. 국가의 근간이 흔들리는 것은 정도(正道)보다 사도(邪道)가 우세한 까닭이다. 게다가 과거 해석은 혼란스럽고 현실 진단은 차분하지 않고 미래 전망은 진정성이 없다. 남(南)과 북(北)은 자유민주주의와 인민민주주의로 갈라져 80년 동안 딴살림하고 있다.이것도 정상적이지 않다. 이런 상태가 몇 년 더 지속된다면 우리 사회는 2045년 G5 진입이나 남북통일은 고사하고 남-북-재외동포사회를 하나로 잇는 ‘글로벌 코리안 네트워크 공동체’ 실현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국가 존립이 위태로운 이때, 남녀노소 빈부귀천 지위고하 불문하고 정신을 바짝 차리고 흐트러진 마음을 잡아야 한다. 개인·가정·사회·국가는 각자 따로인 것 같아도 씨줄과 날줄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 유기체(有機體)와 같다. 개인의 성공·실패가 하나둘 모여 궁극적으로는 더 큰 공동체의 진로와 향방에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이런 기본적인 사항을 무시하거나 폄하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먾다. 이런 사람들은 국가·사회를 위한 미래 지도자로 나설 자격도 명분도 없다. 지구촌이 로컬(local)에서 글로벌(global)로, 글로벌에서 글로컬(glocal)로 진화·성숙되는 지금, 우리 국민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품격(品格) 있는 리더의 출현을 기대한다. 며칠 후면 3·1절 106주년이다. 과연 어떤 내용의 3·1절 경축사가 나올지 매우 궁금하다. 1919년 3·1운동 이후 우리 사회는 너나 할 것 없이 대한인의 자주독립과 대한민국의 건국, 한민족의 산업화·민주화·세게화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1945년 이후 해방된 제3세계 국가들에게는 닮고 싶은 롤 모델이었고, 기존의 서구 선진국들에게는 함께 하고 싶은 매력인 파트너였다. 이런 기세를 계속 살려 나가야 한다. 또다시 분열과 대립 반목과 갈등으로 세월을 허비할 수는 없다. 우리 사회를 다시 움직이게 하려면 다음 몇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가 대세가 되고, 조만간 우주시대가 열린다 하더라도 과거를 온전히 이해하고 현재를 철저히 분석하고 미래를 자신 있게 예측할 수 있는 ‘역사를 읽는 힘’, 즉 축적(縮積)된 사심(史心)을 가진 리더들이 사회 구석구석에 자리해야 한다. 특히 국가·사회 리더라면 개개인의 자긍심 회복과 공동체의 통합에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맥락(脈絡)을 찾는데 능수능란해야 한다. 둘째, 국민들은 세계사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인류사회의 염원이 무엇인지를 적확(的確)하게 알아야 한다. 어설픈 공약이나 급조된 정책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국익도 중요하고 국가발전도 시급하지만 세계평화와 인류행복의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기억에서 지워야 한다. 말로만 통합·통일을 외치기 이전에 단군의 홍익(弘益)·이화(理化), UN의 지속가능한 발전목표(SDGs)를 실천하는 세계시민으로 거듭 나야 한다. 셋째, 개인이 자유롭고 가족이 우애하고 사회가 공평하며 국가가 책임지는 공동체 윤리를 재건해야 한다. 세대·연령·언어·성·국적·문화·종교·이념·사상·인종 간의 다름과 차이를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내부가 이런 선순환 구조로 재편될 때 2600만 북한동포를 품을 수 있고, 700만 재외동포와 상생할 수 있다. 이것이 진정한 ‘글로벌 코리안 네트워크 공동체’이다. 우리는 지금 역사의 변곡점에 또다시 서 있다. 멕시코한인 이민 120주년, 을사늑약 120주년, 광복 80주년, 한·일 국교정상화 60주년 등 모두가 을사년에 있었던 대사건들이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 모두의 마음을 동(動)하게 하는 희망의 메시지, 즉 방성대곡(放聲大哭)이 아닌 방성대곡(放聲大曲)이 요구된다. 다가오는 3·1절, 국민의 마음을 움직이고, 동포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뜻깊고 경사스러운 민족대통합의 날이 되길 간절히 소망한다.
이럴 때 꼭 나오는 말이 ‘불출’이다. 아마 한자로는 아니 不에 나올 出쯤 되리라. ‘계엄당국’이 작성한 것으로도 알려진, 수거(收去)해서 척결(剔抉)할 500명 리스트는 ‘시대적 해석’이 필요하다. 그 명단에도 들지 못한 이들이 요즘 스스로를 냉소적으로 불출이라 부른단다. 이번 시태에만 국한된 것은 물론 아니다. 국어사전의 불출(不出)의 뜻은 ‘밖으로 나가지 아니함’이다. 문을 닫아걸고 나오지 않는다는 두문불출(杜門不出)과 이어지겠다. 저기도 못 끼니 마땅히 두문불출해야 할 정도로 못난 사람이라는, 자기비하의 비아냥일 터. 차별과 비하의 의미가 포함됐을 수 있으니 주의하라는 문구가 붙은 두 번째 설명은 ‘못나고 어리석은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다. 아하, 저 비아냥의 뜻과 상통하는 군. 하여간 (중요한) 유명인 리스트다. 그 중에는 당장 체포할 이들도 있다. 처음에 세상(언론)은 수거라는 ‘희한한 용어’에 놀라더니 낱낱의 그 이름들을 보고는 자못 정색하는 표정이다. 저 명단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에 관한 고민이겠다. 이는 ‘이번 사태의 불출’을 정의하는 (정서적) 기준이리라. MBC 한겨레 경향 등을 참고해 내용을 정리해 보자. 노 전 사령관이란 자의 수첩, A부터 D까지 등급 지은 대상 중 A등급에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조국 전 의원, 문재인 전 대통령, 유시민 작가 등 정치인들의 이름이 있었다 한다. 2023년 이재명 대표 구속영장을 기각한 유창훈 판사, 순직해병 사망 사건 수사 외압 의혹을 제기한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 방송인 김제동, 차범근 전 축구대표팀 감독의 이름 등을 비롯해 민주노총·전교조·민변 관련 이름도 있었다는 것이다. 문화 체육계까지 참 다양하다. ‘처리 방안'도 기괴(奇怪) 처참(悽慘)하다. 수거집단을 연평도 제주도로 보내며 이송 중 사고, 수용시설 폭파. 외부 침투 후 사살 같은 집단살해의 의도가 담겼다고 MBC는 보도했다. 1, 2, 3차 등 ‘500여 명 ’수집‘의 '수거계획‘을 적었다. 계엄 이후 차례로 체포, 처리(처치)한다는 계획으로 보인다. 윤 대통령 등에 보고됐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고 이 언론들은 전했다. 불출이 아닌, 저 500여 명 리스트에 든 분들 등골이 오싹했겠다. 죽었다 살아난 거다. 필자 같은, 불출인 ‘보통 사람들’은 가슴 쓸어내리며 안도하고 (속으로나마 참극 피한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미국작가 유진 오닐의 ‘잘못 태어난 자를 위한 달’이란 희곡이 있다. 얼핏 책 목록을 보니 어떤 번역 판(版)은 ‘불출들의 달’이라고 제목이 달렸다. 우리 출판계의 아이디어에 무릎을 쳤다. 아, 불출은 ‘잘못 태어난 자’라는 뜻이로구나. 저 냉소적 아이러니, 별처럼 반짝반짝 빛난다. 관점에 따라 예외는 있겠으되, 저 500여 명 중 상당수는 우리 공동체의 정직(正直)과 평화를 위해 ‘나’를 흔쾌히 할애(割愛)하거나 심지어 희생까지 하는 선각(先覺)들이다. 저기 끼지 못한 ‘다행(多幸)’을 ‘불출’이라 여기는 이 불출의 마음은 여태 복잡하다. 옳은 일을 위해 나서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는 사회는, 필시 ‘잘못 태어난 사회’일 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