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여행 경비는 10달러를 넘지 않는다" ‘10달러 원칙’은 청년 시절 나만의 여행 방식이었다. 아시아 대륙을 가로지르는 긴 여정 긴 시간 방랑생활의 규율이기도 했다. 숙박지는 대개 싸구려 도미토리였는데 침구는 때에 찌들어 불결했다. 게다가 벼룩과 빈대의 습격은 고역이었다. 적도의 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고 벌레에 물려 밤새 가려움에 박박 긁어댔다. 그러다 생각해낸 것이 김장용 비닐이었다. 침대 매트리스 위에 비닐을 깔아 해충이 침구를 뚫고 올라오는 걸 막았다. 바스락대는 촉감이 거슬렸지만 참을 수 없는 가려움에 시달리는 것보다 나았다. 대형 비닐은 내 장기 배낭여행 필수품이었다. 도시에서 도시로의 이동은 밤 버스를 이용했다. 경비를 줄이기 위해서였다. 웅크린 채 앉아서 잠을 청해야 했지만 선선한 밤하늘 아름다운 별들 사이로 길을 만들며..
한 해가 저물고 새해를 맞는다. 개인이나 국가나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지난 1년간 걸어왔다. 코로나 3년차로 향하는 길목에는 고통과 신음의 외침만 공허하게 자리 잡고 있다. 과거를 딛고 희망과 설렘의 시간을 준비해야 한다. 그러나 2022년도 국내외적으로 놓인 여건들은 벌써부터 우리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다. 우선 먹고사는 문제다. 양질의 일자리 감소, 급증한 국가와 가계부채, 인구감소, 자산 양극화 등 곳곳에서 발목을 잡고 있다. 주요 20개국(G20) 증시 대표지수 가운데 18위에 그친 코스피 상승률이 한국 경제의 현주소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물가 상승세도 새해에 쉽게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정부는 이미 대선 직후 전기‧가스 요금 인상을 예고하는 등 물가 압력은 더욱 거세질 기세다. 나라밖 사정은 더욱 녹록지 않다. 미‧중 대치..
다사다난했던 2021년을 보내는 이즈음 러시아-우크라이나 사태가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푸틴은 우크라이나 동부 접경지역에 대규모 군사력을 집결시키고 미국과 NATO에 사실상의 최후통첩장을 날리면서 일촉즉발 결전의 위기감을 높이고 있다. 자국의 외교부 홈페이지에 요구조건을 공개하는 매우 이례적인 방식을 택함으로써 벼랑 끝 전술을 구사하고 있다. 심지어 1997년 이전의 NATO로 되돌아가는 요구조건은 너무 과하여 미국과 NATO가 받아들이기 어려워 보인다. 2008년 조지아 전쟁, 2014년 크리미아 병합 및 우크라이나 돈바스 반군 지원 사건 등 러시아의 과거 행동은 전쟁발발 가능성에 대한 우려감을 높인다. 과연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할까? 필자는 감히 예단컨대 대규모 침공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주된 이유는 푸틴의 대외 정책의 기조가 군사력을 앞세우는 ‘지정학 전략’보다 비용효율성을 중시하고 군사력을 보완적으로 활용하는 ‘지경학 전략’에 무게를 두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언뜻 보기와는 달리 푸틴은 비용효율성을 중시하는 지경학 전략을 영리하게 운용함으로써 상당한 대외 성과를 거두고 있다. 이것은 그의 장기집권을 가능하게 하는 핵심 요소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2008년 조지아와의 전쟁에서 성공한 요인은 세 가지이다. 첫째, 조지아가 NATO 회원국이 아니기 때문에 NATO의 군사적 개입을 우려하지 않았고, 둘째, 조지아의 군사력 또한 매우 허약하여 손쉬운 승리를 예상하였기에 비용 대비 이익이 컸다. 셋째, 조지아가 먼저 남오세티야를 공격하였기에 거주하는 러시아 민족을 보호한다는 명분까지 갖추었다. 2014년 크림반도 병합과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의 반군 지원 사례도 조지아와의 전쟁과 유사한 조건을 갖추었다. 우크라이나 또한 NATO 회원국이 아니었고, 크림반도에는 이미 러시아군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크림반도의 주민 대부분과 우크라이나 돈바스지역 주민의 상당수가 러시아 민족이었다. 게다가 친러정권이었던 야누코비치 정권을 축출한 유로마이단 혁명이 명분을 제공하였다. 비록 사후에 서방국가로부터 경제제재를 받게되었지만 그로 인한 손실보다 이익이 훨씬 컸다. 러시아가 개입할만한데도 개입하지 않은 반대 사례에서도 러시아의 비용효율성 중시전략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2007년 에스토니아가 소련 청동군인 동상을 철거한 사건에 대하여 러시아는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다. 에스토니아는 당시 NATO 회원국이었다. 또 2010년 6월 키르기스스탄 남부지역에서 우즈베키스탄계 주민들과 종족충돌 사건이 일어났을 때 키르기스스탄이 러시아에 지원을 요청했음에도 러시아는 개입하지 않았다. 개입 비용에 비하여 이득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상 살펴본 분석에 비추어 현재의 우크라이나 사태를 살펴보자. 우크라이나는 여전히 NATO 회원국이 아니다. 하지만 과거와는 달리 2014년 이후 미국과 NATO의 군사적 지원 확대 덕분에 우크라이나군의 전력은 과거와 달리 매우 강화되었다. 또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강화된 국가정체성은 대러시아 응전 결의를 높여주고 있다. 현재 돈바스 지역에서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군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지 못한 사실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비록 NATO가 개입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거론되는 대러시아 경제제재의 수준은 매우 높다. 즉 국제무역결제스스템을 관장하는 스위프트(SWIFT)에서 축출, 루블화의 환전 금지, 최근 완성된 노르트스트림2 가스관의 개통 보류 등으로 인한 경제적 손실은 측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크다. 더군다나 2014년 유로마이단 혁명과 같은 개입 명분도 찾기 어렵다. 러시아의 섣부른 군사행동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악몽을 다시 현실화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푸틴은 구소련이 붕괴한 주된 요인 중 하나였던 아프가니스탄 침공 실패의 교훈을 잊지 않고 있을 것이다. 더욱이 러시아의 군사력을 포함한 종합국력은 아직 미국 및 NATO와 대적할만큼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푸틴은 지경학 전략 기조, 즉 보수적인 대외 군사력 운용 전략 하에서 우크라이나군이 선제적으로 돈바스 지역 반군과 대형 교전을 벌이지 않는 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푸틴이 이번 군사행동으로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우크라이나, 조지아를 비롯한 과거 구소련권에 속하였던 주변 국가들의 추가적 NATO 가입을 저지하는 것일 것이다. 부수적으로 친러국가인 벨라루스에 군사력을 배치할 수도 있다. 하지만 러시아의 행동 범위는 구소련 당시의 세력권내에서 제한적이고 신중하다. 러시아의 행위를 중국의 행위와 연계하여 신냉전의 도래를 말하는 것은 성급하다.
“법과 원칙에 따라” 검찰총장 당시 국민의 힘 윤석열 후보가 입에 달고 다녔던 말이다. 윤석열 검찰총장은 “법과 원칙에 따라” 살아있는 권력이라는 법무부 장관 가족을 수사했다고 주장했고 이를 바탕으로 공정의 아이콘으로 떠올라 제1 야당 대선 후보까지 되었다. 하지만 최근 조국 전 법무부 장관 가족 수사는 ‘동양대 강사 휴게실 PC’라는 위법하게 수집된 증거로 기소했다는 법원의 판단을 받았다. 윤 후보가 검찰총장 재직 시절 입에 달고 다녔던 “법과 원칙에 따라”는 도대체 무엇인지 혼란스럽다. 그런데 최근 윤 후보는 그 의심에 기름을 붓는 발언을 했다. “이런 확정적 중범죄, 다른 변명의 여지가 없는 후보”가 그것이다. 지난 28일 한국방송기자클럽 토론회에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를 지칭해 한 말이다. “법원 원칙에 따라”를 입에 달고 다..
세상에서 최악의 통증 세 가지를 꼽아보라면, 대개는 자신이나 가족이 겪은 병치레를 근거로 답할 것이다. 나는 통풍(痛風), 산통(産痛), 참척(慘慽)의 고통을 꼽는다. 참척은 부모 앞에서 자식이 먼저 죽는 비극을 말한다. 악상(惡喪)이라고도 한다. 이 셋 가운데 가장 아픈 병은 무엇일까. 하나를 고르라면 나는 통풍이라고 답할 가능성이 높다. 현재 통풍을 앓고 있거나 심하게 앓았던 사람들은 이 문답을 어리석다고 무시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서른 살 때 처음 어느 날 밤, 원인을 알 수 없는 무시무시한 통증을 겪었다. 6.25처럼 그날 잊을 수 없다. 병원에 가서 통풍이라는 관절염인 걸 알게 되었다. 이후 20년 동안 나의 투병사는 과장 없이 핏빛이다. 처절하고 혹독했다. 어린 딸 앞에 두고 울었다. 초반에는 1년에 두세 차례, 나이 들면서는 분기에 한 번, 이후에는 한 달..
2021년 한 해가 저물어간다. 코로나19로 인한 피로감과 무기력함은 지난해와 똑같이 우리를 힘들게 했다. 전 지구적인 환란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피폐할 정도로 망가트렸다. 누구나 겪었던 이 불행한 시간은 보상받을 길이 없어 더 안타깝다. 그러나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개인적인 은혜와 원한은 사회적 참사와는 다르게 생각해야 한다. 모두가 경험하는 감사함은 사회를 풍요롭게 하고 함께 경험하는 아픔은 서로 의지가 된다. 하지만 개인이 경험하는 사랑과 고통은 오롯이 개인의 몫이기 때문에 홀로 감내해야 한다. 그래서 더 감사하고 또 힘들다. 얼마 전, 신경정신과 의사와 대화를 나눴다. 그분의 말에 따르면, 심리적인 상처를 서로 주고받은 경우에 병원을 찾아오는 환자의 대부분은 피해자라는 것이다. 가해자가 병원을 찾아 자기가 한 일에 대해 힘들어..
사전, 지도, 시계, mp3, 카메라, 종이신문, 녹음기, 달력...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즉답은 어려울거다. 하지만 듣고 나면 다소 허탈해진다.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사라져가는 제품이다. 지금이야 스마트폰을 통하여 너무나 당연하게 사용하지만 불과 십수 년 전만 해도 우리는 이것을 별도로 사서 썼다. 인류학자들은 지구상의 인류는(Homo) 대략 25종이 살았다고 말한다. 이중 호모사피엔스가 살아남아 현생인류의 조상이 되었다. 사피엔스란 말처럼 생각하는 기능이 다른 육체적 조건의 우위를 이겨낸 것이다. 인터넷의 보급 이후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인류의 삶은 혁신적 변화가 가속화되고 있다. 영국의 이코노미스트(Economist)란 잡지에서는 우리의 삶을 포노사피엔스(Phono Sapience)라 지칭하였다. 우리나라에 이 개념을 디지털 사회의..
최근 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가 내놓은 ‘2021 KB 자영업 보고서: 수도권 소상공인의 코로나19 영향 조사’에 의하면 소상공인 상당수가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이 계속될 경우 휴·폐업을 고려하고 있을 정도로 경영상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연매출 50억 원 이하 또는 직원 10인 이하 소상공인 700명(서울 460명, 경기 194명, 인천 46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 결과다. ‘앞으로 3년간 코로나19가 지속된다면’이란 질문에 응답자의 48%가 매출 하락으로 휴·폐업을 고려하고 있다고 답한 것이다. 응답자들은 ‘낮은 수익과 큰 손실’(42%) ‘코로나19 종식 이후에도 경기회복이 더딜 것’(30%) ‘경영관리 어려움’(17%) 등을 호소했다. 실제로 소상공인들은 방문손님 감소(40%), 사회적 거리두기에 따른 영업제한(32%) 등으로 전체 매출이 2020년엔..
군대를 제대한 아들이 집 근처 편의점 알바를 뛰었다. 늦게 퇴근한 아들이랑 쐬주 한 잔하며 얘기를 나누다보니 시급이 최저임금에도 못미친다. 왜그러냐고 물었더니 “에이, 아빠.. 편의점에 최저임금 다 주는 자리 없어요”한다. 가슴 한켠이 짠했다. 법적 최저기준조차 보호받지 못하는 녀석에게 애비는 해줄 말이 입안에서 맴돌았다. 월 150만 원이라도 받고 일하고 싶다는 사람이 있으면 일할 수 있게 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한 대통령 후보가 떠올랐다. ‘윤석열표 공정’은 집 앞 골목부터 진작에 실현되고 있었다. 그는 못배우고 가난한 사람은 자유가 뭔지도 모르고 필요하지도 않다고 했다. 그의 말이 옳았다. 아들은 부당한 조건에 맞서 일하지 않을 자유를 행사하지 못했다. 아들에게 궁핍할 자유는 필요치 않았다. 이런 아들이 요즘 말로 빡쳤다. 윤석열 후..
아이들이 도착하기 전 교실의 아침은 학부모님들에게 받는 연락으로부터 시작된다. 대부분 당일 결석과 관련된 연락이 주를 이루고, 사정이 생겨서 일찍 조퇴시켜달라는 내용이 그다음을 차지한다. 가끔은 아이의 몸이 안 좋지만, 등교시킬 테니 상태가 나빠지면 집으로 보내 달라는 내용도 있다. 며칠 전에는 조금 특별한 연락을 받았다. 우리 반 친구 A가 코로나 백신 접종을 해서 다음 날 집에서 휴식을 취하기로 했었다. 나에게도 이미 결석하겠다고 말해둔 상태였다. 막상 당일이 되자 A가 부모님께 학교에 가서 재미있는 수업을 들어야 한다고 우겨서 하는 수 없이 등교시킨다는 내용이었다. 접종 후 증상이 걱정되니 잘 지켜봐 달라는 당부가 함께 왔다. A가 부모님에게 걱정을 끼치면서까지 참여하고 싶어 했던 수업은 햄스터 로봇을 활용한 코딩 수업이었다. 태블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