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겨울은 과연 봄이 오기는 할까 라는 의구심을 가질 정도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너무 혹독했다. 그러나 봄이 오긴 왔나보다. 겨울을 이겨내고 마른 가지마다 연한 녹색의 새순이 돋아나고 벚꽃 꽃망울이 터지려고 한다. 벤치에 앉아서 아파트 놀이터에 나와서 깔깔대며 노는 아이들을 보니 이게 바로 봄이구나 싶다. 한 아이와 엄마가 시소를 타고 있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리듬감이 보는 나의 어깨를 들썩이게 한다. 시소타는 모습을 한참 보고있자니 아, 인생을 즐겁게 사는 게 이런 거구나 하는 감동이 밀려왔다. 헌법처럼 너무나 확실하고 당연한 것이지만 시소타기를 시작하는 순간 나의 의무는 앞에 앉은 이를 높여주는 것이고, 나의 권리는 앞에 앉은 이로 인하여 내가 높아진다는 점이다. 시소를 재미있게 타려면 대충하지 말고 내 몸무게를 실어 내 있는 힘을 다해서 상대방을 높여줘야 한다. 칭찬에 인색한 사람들은 남을 높이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서 칭찬할 일이 있을 때에도 그다지 상대방을 높여주지 못한다. 상대방을 높여주었을 때에 나 또한 내 앞의 상대로 인해 높아질 수 있는 것인데. 높이 올랐을 때의 환희, 상쾌함, 짜릿함은 누구라도 놓치고 싶지 않은 느낌이다. 누구나 거기서 머물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것을 고집하면 시소타기는 불가능해진다. 높이 올라서도 우리는 욕심의 키를 낮추고 서슴없이 낮아질 줄 아는 나의 여유가 상대방에게 넓은 웃음을 주고 서로의 근심의 무게를 가뿐하게 한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모두 자기만의 삶이 있다. 근심의 무게가 다르고 가진 것도 다르고 능력도 다르다. 몸무게가 가벼운 아이를 위하여 엄마는 아이 쪽으로 더 가까이 가서 앉아서 몸무게를 맞추고 시소를 타고 있는 모습에서 세상의 약자와 강자가 함께 어울려 재미있게 사는 비결을 발견했다. 바로 강자가 약자 쪽으로, 그러니까 무게중심 쪽으로 다가가는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얼마나 잘못 살고 있는지 한탄스러웠다. 언제나 강자는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고 굳건히 앉아있고 약자들을 자신의 발밑에 두려고 하니 이 사회의 무게중심이 맞지 않아 삐그덕거린다는 사실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시소타기와 같이 밸런스가 중요하다. 상대방이 없으면 나 혼자서 시소를 타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너무 어렵다. 내 앞에 누가 앉느냐에 따라서 힘과 위치를 조절해야 한다. 우리의 삶도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어울려 즐겁게 살기 위해서는 나를 상대방에게 맞추는 노력이 필요하다. 특히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것이 성숙한 시민의 모습이다. 한참 재미있게 놀던 아이와 엄마가 시소에서 내려와서 집으로 돌아갔다. 우리도 언젠가 우리의 인생 시소에서 내릴 때가 있을 것이다. 그때 자신의 힘만 과시하면서 요지부동이었던 이의 인생은 과연 즐겁고 보람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혼자서는 높아지기 참 어려운 세상을, 혼자서는 낮아져도 기쁘지 않은 세상을, 우리가 마주앉은 시작부터 삶의 마지막 자리까지 이렇게 높이며 낮아지며 쿵쿵 쿵덕쿵 기쁨으로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모든 것이 새로워지는 봄, 그리고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대한민국, 지금까지 상대를 높이지 못해 언제나 부조화만 보였던 이들도 시소 한번 타보고 인생을 그렇게 재미있고 가치있게 살았으면 좋겠다.
권일송 시인은 1981년 1월 1일 어느 신문에 '목숨의 노래'라는 시를 발표했다. ‘ㅡ 병든 세월일랑 한 칼에 잘라내어/ 일렁이는 불씨의 아침을 맞는/ 전라도 쟁기꾼들이여…’라고. 그 시를 읽고 남녘의 농부들을 생각했다. ‘쟁기꾼들이여!’라는 시행이 머릿속에 강하게 입력되었다. 나는 농부의 아들 쟁기꾼 자손으로 이 땅에 왔다. 죽는 순간까지도 이 진실과 운명을 부끄러워하거나 숨기고 싶지 않았다. 착한 농군(農軍)의 아들이란 자존심으로 젊은 시절을 보냈다. 운명의 길에서 몸부림칠지언정 원망 없이 가자고 마음 다잡았다. 그랬는데 내 나이 젊음에서 멀어지다 보니 조금 흔들리고 있다. 세상이 기계화와 경제에 치중되다 보니 쟁기꾼은 가라 경운기가 왔다. 아니 경운기도 꺼져라 트랙터가 왔다. ‘너도 가라 AI가 농사고 뭐고 다 할 것이다’는 세상 속에 갇히고 말았다. 젊어서의 일이다. 사는 게 힘들고 비위가 상하면 전라선 완행열차를 타고 여수 순천 쪽으로 떠났다. 완행열차 안 사람들은 소박하고 순진했다. 잘 살지는 못해도 자기 삶을 원망하지 않았다. 착한 쟁기꾼 후손으로 고단해 보여도 누구를 탓하지 않고 살아가는 백성의 모습 그대로였다. 섬진강 따라 서서히 달려가는 느림보 기차의 걸음은 차창 밖 풍경을 바라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창 밖 풍경은 한국인으로 살아가는 착하고 복된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산이요 강이요 들녘이었다. 3월에는 교회에서 원로 분을 모시고 안 박사와 윤 회장이 운전하면서 박경리 선생의 소설 '토지'의 배경이 된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를 찾아갔다. 평사리의 최참판 댁은 서희와 길상이의 애틋한 사랑이 깃든 곳이다. 영화 ‘토지’는 김수용 감독, 김지미 이순재 김희라 허장강이 출연한 1974년 작품이다. 최참판 댁 외양간에는 큼직한 암소가 있었다. 꼭 실물 같은 암소요 송아지였다. 순하게 생긴 암소가 서서 머리를 디밀고 있는 형상이 보기에 좋았다. 그곳을 지나 뒷길 대나무 숲길을 걸어가는데 소 울음소리가 제법 들을 맛이었다. 발길 멈추고 고개 돌려 소 있는 곳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박경리 선생은 박완서 작가가 의과대학 다니던 아들을 잃고 밥도 못 먹고 있을 때 원주로 불러서 ‘밥을 안 먹으면 죽는다’고 입을 쥐어박으며 기어이 밥을 먹도록 했다고 한다. 선생은 1946년 결혼하여 50년, 6·25 사변 때 남편과 사별한 입장이었다. 그런 그는 언젠가 그랬다. ‘아들 낳고 딸 낳고 남편 뒷바라지와 살림에 매달리면서 언제 글을 쓸 수 있겠느냐’고. 홀로 살아가면서 오로지 작품 활동에만 전념했다는 뜻이었다. 2008년 어린이날 돌아가신 그는 서울에서 강원도 원주로 원주에서 진주여고로 운구차가 이동하는데 그 뒤를 잇는 수많은 조문객 행렬이 당시의 화제 중 화제였다. 사위인 김지하 씨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한국인의 어머니요 작가로서 문학적 큰 영혼의 소유자이었기에 가능한 일었을 것이다. 딸 김영주는 2008년 6월 15일 '버리고 갈 것 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는 선생의 유고 시집을 내며, 서문에서 어머니가 마지막 순간까지 펜을 놓지 않았고 남아 있는 모든 기운을 사르면서 남기신 39편의 시를 모아 책으로 엮었다고 했다. 나는 수필문학 강의를 할 때마다 이 시집 속 '옛날의 그 집'이란 시 중 마지막의 “모진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는 내용을 소개하면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진안군 백운면 신원리 팔공산 ‘데미샘’은 섬진강의 발원지로써 광양만 바다까지 500여 리를 남쪽으로 흐른다. 강물은 흘러가면서 자연과 인간의 삶을 살찌우고 있다. 3월의 그날 최참판 댁 옆 박경리 선생 문학관 앞에서 작달막한 체구에 안경을 걸치고 책을 펴 들고 서 있는 그의 동상을 경건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문학관에서는 선생의 체취며 영혼을 대하듯 살펴보았다. 점심은 하동읍 신기에서 먹었다. 그때 나는 창 밖 나뭇가지에서 매화를 만나 인사를 나눴다. 식사가 끝난 뒤 일행은 화개장터로 향했다. 그 순간 바라보던 섬진강은 맑고 여리시 푸르렀다. 강물은 내게 말했다. ‘강은 흘러 바다로 가고, 인생은 마침내 죽음으로 가는 것. 물이 그릇을 따르듯 살라고, 그러나 움트기 직전 나무처럼 온몸으로 밀어 올리는 힘을 잊지 말라고.
사필귀정이다. 헌법재판소가 4일 황당한 계엄령을 선포한 윤석열 대통령 탄핵을 전원일치 인용했다. 윤 대통령은 파면됐다. 지난해 12월 3일 윤 대통령이 계엄령을 전격 선포했다. 비상계엄은 대통령이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를 맞았을 때 헌법에 따라 선포할 수 있다. 이를테면 적과 교전 상태여서 군사상으로 필요하거나,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돼 행정·사법 기능 수행이 현저히 곤란한 경우에만 공공 안녕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선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윤 전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이유는 “거대 야당의 탄핵 남발과 예산 삭감 등으로 국정이 마비됐으며 경고하기 위해서”였다. 즉 민주당의 입법 독재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야당을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세력’으로 규정했으며 국회를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붕괴시키는 괴물이라고 규정했다. “일거에 척결하겠다”고 했다. 정치인을 체포하고, 국회를 무력화시키겠다는 뜻이다. 계엄사령부 포고령 제1호는 ▲국회와 지방의회, 정당의 활동과 정치적 결사, 집회, 시위 등 일체의 정치활동 금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거나, 전복을 기도하는 일체의 행위 금지, 가짜뉴스, 여론조작, 허위선동 금지 ▲모든 언론과 출판 계엄사 통제 ▲파업, 태업, 집회행위 금지 등이다. ‘처단’ 대상도 있었다. ▲의료현장 이탈의료인은 48시간 내 본업에 복귀, 위반시는 계엄법에 의해 처단하겠다는 내용이다. 말 안 들으면 의사들도 처단하겠다는 무시무시한 엄포다. 포고령 위반자는 영장 없이 체포, 구금, 압수수색을 할 수 있으며, 계엄법 제 14조(벌칙)에 의해 처단하겠다고 발표했다. 이후 우리나라는 극심한 혼란상황에 빠졌다. 정치는 물론이고 서민 경제는 비상 상황에 처해 있다. 국제 신인도와 국격까지 추락했다. 더욱 심각한 것은 국론이 분열되어 국민들이 탄핵 찬성과 반대를 외치며 대립하게 됐다는 것이다. 거의 매일 수많은 인파가 거리로 뛰쳐나왔고 일부는 서로를 향한 원망와 저주의 말을 내뱉으며 살벌하게 대치했다. 극렬분자들은 법원을 습격해 난장판을 만들기도 했다. 전쟁터가 따로 없었다. 그동안 독재에 맞서 피 흘리며 이뤄놓은 민주주의가 위협당하는 장면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났다. 남북 분단에 이어 여야, 동서, 빈부, 노소, 남녀 간의 갈등 등 사회 곳곳에서 분단의 조짐이 드러나고 있다. 지난해 12월 조계종 총무원장 진우스님은 “대한민국은 역사, 문화, 경제, 안보와 국민 의식 수준에 있어서 세계 최고의 반열에 오른 세계 10대 강국으로 평가받고 있다. 우리 국민은 스스로 민주주의를 선택했고, 고난의 역사를 극복하며 이룩해 온 민주주의에 대한 드높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수많은 대립 속에서도 법과 원칙을 기준으로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온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역사는 비상계엄령 선포로 후퇴했다고 탄식한 바 있다. 특히 전기한 것처럼 우리 사회에서는 정치적 양극화가 극도로 심화되고 있다. 상대방에 대한 불신과 분노·갈등은 점점 커져만 간다. 한 유튜버는 ”만약 그게(탄핵 기각) 안 되면 몇몇 죽이고, 분신자살 하겠다“는 내용의 글을 올리기도 했다. “오래 전부터 계획했고 실현 가능하다” “이미 목숨 걸었고 아깝지 않다”는 말도 덧붙여 보는 이들을 경악케 했다. 절대로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이는 민주주의의 가치를 훼손하고 퇴행시킬 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국격을 훼손시키는 일이다. 따라서 정치권은 극단적 혼란과 분열을 부추기지 말고 국민 통합에 앞장서야 한다. 일부 종교인들의 살기 섞인 선동도 이젠 중단돼야 한다. 지난 3월 5일 7대 종단 대표로 구성된 한국종교지도자협의회는 “헌법재판소는 대한민국의 최후의 보루로서 모두는 그 결정에 승복해야 한다”고 했다. 내전으로 치달을 수 있는 국가적 위기를 원만히 해결하기 위해서 국민, 정부, 정치권이 이 권고를 받아들여야 한다.
헌법재판소는 4월 4일 오전 11시에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 심판 선고를 한다. 그동안 헌법재판소 내부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온갖 지라시가 난무할 수밖에 없는데, 그 지라시 속 주장들은 대체로 근거가 없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하지만 헌법재판소 내부에서 무언가가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애초에 민주당은 이번 계엄 사태가 명확하고 간단한 사안이므로 탄핵 결정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할 정도였지만, 선고 시점이 4월 4일까지 늦춰진 것을 보면, 헌재 내부에서 뭔가가 있었다고 추론하는 것은 전혀 어색하지 않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지라시에서 등장하는 ‘5:3 기각설’을 단순한 가짜뉴스로 치부하기는 어렵다. ‘5:3 기각설’이 설득력을 갖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기각 결정이 내려지더라도 4:4의 의견 분포라면 큰 문제는 발생하지 않는다. 4:4라면 마은혁 후보자가 임명되든 그렇지 않든, 기각은 확정적이기 때문이다. 반면, 6:2로 탄핵 인용이 확실한 상황이라도 역시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마은혁이라는 새로운 인물의 합류가 인용 여부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헌법재판관들의 의견이 5:3으로 나뉘어 있는 상태에서 선고가 내려지면 상황은 달라진다. 이 경우 마은혁 후보자의 임명 여부가 대통령 탄핵의 가부를 결정짓는 핵심 요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마은혁 후보자가 임명된다면 5:3은 6:3으로 바뀔 가능성이 크고, 그렇게 되면 윤 대통령의 탄핵은 인용된다. 헌법재판소가 고민했을 부분은 바로 이 지점일 수 있다. 만약 헌재가 5:3으로 대통령 탄핵을 기각하게 되면, 이러한 결정은 위헌 논란에 휘말릴 가능성이 크다. 민주당은 한덕수 대통령 권한 대행이 마은혁 후보자의 임명을 지연시켜 헌재 결정을 오염시켰다고 주장하며, 해당 헌법재판소 결정의 정당성을 문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한덕수 권한 대행의 위헌적 행위로 인해 발생한 헌재 결정은 무효라는 주장이 제기될 수 있다는 것이다. 헌법재판소는 이러한 논란을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아무리 헌법재판관들의 이념 성향이 다르더라도, 같은 기관에 소속된 구성원으로서 정치권이 헌재 결정을 두고 ‘정당성’을 문제 삼는 상황은 피하고 싶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이는 헌법재판소의 존재 이유와도 맞닿아 있는 사안이다. 이러한 이유로 헌법재판관들은 5:3 구조를 4:4로 만들거나 6:2로 바꾸기 위해 노력했을 가능성이 있고, 그 과정에서 재판관 1명의 의견을 조율하는 데 시간이 걸렸을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4월 4일 선고 기일이 잡혔다는 것은 5:3 구도가 6:2 또는 4:4로 정리되었음을 시사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추론할 수 있다. 이제 곧 결과가 발표될 것이다. 어떤 결론이 나오든, 이번 사안이 대한민국의 제도에 대한 신뢰를 높이는 방향으로 매듭지어지길 바란다. 이런 차원에서, 이번 탄핵 심판 결과에 대한 승복 여부는 그만큼 중요한 사안이다. 윤 대통령이 승복 의사를 분명히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최근 서울과 경기지역의 아파트 등 주택가격이 하락하면서 전세값 역시 하락하고 있다고 합니다. 한 부동산 업체의 조사에 따르면 2년 전보다 전세보증금이 내린 아파트는 38.6%이고 분기별 전세보증금의 하락폭 역시 커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변화는 임차인의 입장에서는 주거비 부담이 경감되는 측면도 있지만 반대로 임대인의 자금 여력에 따라 전세보증금을 돌려받기 어려워지는 위험이 증가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원칙적으로는 임대인은 임대차가 종료되면 임차인이 이사를 나갈 때 전세보증금을 돌려주어야 하지만 현실에서는 새로운 임차인이 들어와야 전세보증금을 돌려주게 됩니다. 따라서 임대차 기간의 만료를 앞두고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계획하는 세입자들의 걱정이 커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보통 세입자들은 보증금을 받아서 이사가는 집의 잔금을 치를 계획을 세우는데, 집주인이 제때 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한다면 세입자에는 곤란한 일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걱정을 해결하기 위한 좋은 방법은 임대차계약을 체결하면서 또는 임대차기간의 50%가 지나기 전에 주택도시보증공사(HUG)나 SGI서울보증보험의 ‘전세보증금 반환보증 보험’에 가입을 하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보증보험에 가입하기 위하여 임대인의 동의가 필요하였지만 이제는 임대인의 동의없이도 가입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아쉽게도 전세보증금 반환보증 보험에 가입을 하지 않았거나 할 수 없다면, 집주인에게 1개월 전까지 임대차계약을 갱신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표시하여야 합니다. 하지만 가급적 여유 있게 3개월 이전에는 집주인에게 이야기를 하여 보증금을 준비할 수 있는 여유를 주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이삿날이 다가옴에도 집주인이 보증금을 못돌려 준다고 하는 경우에는 ‘임차권등기명령’을 신청하여야 합니다. 통상 임차인들은 보증금을 보호하기 위해 확정일자를 받게 되는데, 확정일자는 주민등록상 주소지를 옮기게 되면 그 효력이 없어지게 됩니다. 특히 새로 이사 가는 집의 보증금을 보호하기 위해 확정일자를 받으려면 전입신고가 필수적이므로 이 경우 곤란한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이럴 때 ‘임차권등기명령’을 신청하게 되면 해당 부동산의 등기부등본에 임차권과 관련된 사항이 등기가 되어 새로운 주소지에 전입신고를 하더라도 보증금을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임차권등기명령은 법원에 이를 신청을 하는 별도의 절차가 거쳐야 하기 때문에 통상 한 달 정도의 시간이 소요됩니다. 만약 이를 기다릴 여유가 없다면 일단 집에 최소한의 짐을 남겨두고 집주인에게 점유를 넘기지 않은 채 이사를 하고, 이사 간 주소로 전입신고를 하는 것도 잠시 미루어두어야 합니다. 만약 전입신고를 하여 주민등록상의 주소지가 이전되면 기존의 확정일자에 기한 우선변제력이 인정되지 않아 보증금이 보호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은 임시적인 방법에 불과하므로 보증금의 반환이 지연될 것이라고 예상이 되면 신속하게 임차권등기명령을 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딥페이크 기술을 악용한 성범죄의 심각성이 대두되고 있지만 정작 재판에 넘겨진 가해자 중 절반이 집행유예에 그친 것으로 확인돼 충격이다. 딥페이크 성범죄는 2019년 ‘N번방 사건’을 계기로 사회적으로 공론화됐고, 이후 꾸준히 증가해왔다. 눈에 보이지 않는 피해가 드러난 피해의 수십 배는 될 것으로 유추되는 이 독버섯 범죄는 반드시, 그리고 신속히 제거돼야 한다. 철저한 예방과 강력 처벌, 유효한 교화대책만이 그 해답이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여성연구 2025년 1호’에 실린 ‘딥페이크 성범죄 실태’ 논문에 따르면 2020년 6월 25일부터 지난해 10월 15일까지 전국 법원의 1심 판결문 152건을 분석한 결과, 가해자 159명 중 절반에 가까운 47.17%(75명)가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실형은 42.77%(68명), 벌금형은 6.92%(11명)로 집계됐으며, 무죄나 선고 유예는 3.14%(5명)였다. 집행유예 사유로는 ‘초범’(69명)과 ‘동종 전과 없음’이 주로 고려된 것으로 나타났다. 피해자는 152건 중 98.7%(150건)가 여성으로, 남성 피해자는 단 2건에 그쳤다. 가해자는 총 159명으로, 이 중 15.09%(24명)가 미성년이었다. 지인을 대상으로 한 범죄가 40.25%(64명)로 가장 많았고, 연예인은 25.78%(41명)였다. 특히 친밀한 관계(전 애인·애인) 피해자는 6.92%(11명), 아동·청소년 연예인은 5.66%(9명)으로 집계됐다. 연예인 피해자는 텔레그램 채팅방에서 유포되는 경우가 많았다. 가해자의 88.68%(141명)는 성폭력처벌법을 적용받았고, 청소년성보호법(44.65%), 정보통신망법(35.22%) 등이 뒤를 이었다. 실형 선고 시 형량은 6개월에서 12년까지 다양했으며, 벌금형은 1000만 원 미만 수준이었다. 지난 2019년 ‘N번방 사건’ 직후 우리 국가사회는 일대 혼란이 일어났다. 엄청난 후유증과 함께 백가쟁명식 대책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이후에도 ‘서울대 딥페이크 사건’, ‘목사방 사건’ 등 새로운 형태로 범죄행위가 지속되고 있다. 특히 최근 몇 년 사이, AI와 생성형 챗봇(ChatGPT 등)의 발전으로 딥페이크 기술이 대중화되면서 위험성은 더욱 높아졌다. 전문가만이 가능했던 영상 합성 기술이 이제는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하나로도 쉽게 구현된다. 문제는 청소년들이 범죄를 일으키는 경우가 급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2024년 딥페이크 성범죄로 검거된 682명 중 10대 이상이 무려 80%에 달했다. 청소년들은 문제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채 단순한 호기심이나 장난으로 성착취물을 제작하고 유포하는 경우가 많다. 신속한 피해물 삭제와 법적 대응을 선도할 정부의 디지털성범죄피해자지원센터(디성센터)의 운영을 내실화하는 작업부터 단행해야 한다. 관련 예산이 삭감, 감소, 동결된 상태라는 건 중대한 문제다. 지난해 법 개정을 통해 지자체도 디성센터를 설립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된 만큼 각 지자체는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피해자 지원 시스템을 강화해야 한다. 디지털 성범죄 예방 교육, 수사기관의 전문성 강화, 관련 법률 개정 등도 병행돼야 한다. 범죄자들에 대한 처벌 및 교화를 강화하는 일 또한 대단히 중요한 개선책이다. 철없는 아이들의 장난이라고 치부하기엔 그 폐해가 너무나 참혹하다. 피해자들은 평생 씻지 못할 수치심과 억울한 마음을 품고 살아가야 한다.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이는 명백한 범죄이며 피해자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 수 있다는 엄중한 현실을 깨우치는 일이 시급하다. 아이들의 범죄라고 사법부가 느슨하게 대응하고 있는 건 아닌지 엄중히 되돌아볼 일이다. 장난으로 던진 돌이라도 개구리가 잘못 맞으면 죽는다. 일벌백계의 정신으로, 엇나가는 아이들이 바른길을 찾도록 해주어야 한다.
얼마 전 서울시가 40대의 취업 지원을 위한 ‘40대 직업캠프 취업과정’을 운영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서울시는 40대 직업캠프를 “N잡과 취‧창업을 고민하는 40대 서울시민을 위한 직업전환 유망분야 직업교육훈련을 지원한다”고 소개하고 있다. 40대부터 시작되는 부양 부담과 조기 퇴직, 노후 준비 등 불안한 미래에 대한 고민을 덜어주기 위해 서울시가 국내 최초로 맞춤 정책 지원을 시작한다는 야심찬 설명도 덧붙였다. 일단 내용은 차지하더라도, 40대를 지원한다는 것 자체는 두 팔 벌려 환영하고 싶다. 솔직히 대한민국 40대는 어쩜 이리 운이 없나 싶을 정도로 정부의 혜택을 요리조리 빗겨간 비운의 세대다. 1970년대 중반에서 1980년대 초반 사이에 태어난 이들은 학창시절 급식이 없었다. 매일 도시락을 준비하는 어머니들은 빠듯한 살림에 두 세명 자녀의 도시락을 준비하느라 치열한 아침을 보내야 했다. 그들이 대학에 입학하거나 사회에 첫 발을 내밀 때엔 우리나라에 IMF 사태라는 혹한기가 들이닥쳤다. 거의 매일 두 집 건너 한 집당 아버지들의 실업 소식이 들렸다. 실직한 아버지를 둔 자녀는 대학 입학을 포기하기도 했다. 지금은 국가장학금 제도라는 든든한 학비 지원 시스템이 있지만, 당시엔 그런 제도가 존재하지 않았다.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고, 이따금씩 두 명 이상의 대학생이 있는 집에선 아르바이트와 공부를 병행하거나 두 명이 번갈아가며 휴학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학자금 대출이 있었지만 이자는 비쌌다. 지금은 1%대의 저금리이지만 당시는 대략 7%에 달했던 걸로 기억한다. 혹여 학자금 대출을 제대로 상환하지 못하면 신용불량자가 되어 취업에도 지장이 있었다. 그런 힘든 시절을 보내고 대한민국 경제를 이끄는 중심 세대가 된 40대는 지금도 녹록치 않은 현실을 살고 있다. 퇴직 연령은 점점 낮아지고 평생 직장은 사라졌다. 만 39세 이하까지는 ‘청년’이라는 이름의 다양한 정부 지원이 있지만, 얄궂게도 40대에겐 그런 혜택이 없다. 따지고 보면 40대나 청년 세대나 큰 차이가 나지 않는데도 그 몇 년의 시간 차가 두 세대를 너무나 멀리 갈라놓았다. 40대들 사이에선 ‘세금은 제일 많이 내지만 지원은 전무한 불행한 세대’라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동생들과의 차별도 서러운데, ‘중장년 지원’ 정책에서도 40대는 외면받고 있다. 요즘은 그나마 40대가 해당하는 정책들도 간혹 보이지만, 아직까지 중장년층 지원의 중심은 50대다. 동생에게도 형님에게도 모두 밀린 40대는 일을 할 수 없게 되면 어디에 의지를 해야할지 막막할 뿐이다. 40대가 힘겹다는 사실은 최근 통계청의 한 조사 결과에서도 볼 수 있다. 지난달 통계청이 발표한 ‘2023년 일자리 행정통계 임금근로자 부채 조사’ 결과, 2023년 말 기준 임금근로자의 평균 대출은 5150만원이었고, 연령별로는 40대의 대출이 7790만원으로 가장 높았다. 그 다음이 청년층인 30대(6979만원), 장년층인 50대(5993만원) 순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서울시의 정책은 40대의 설움을 알아봐준 것 같아 그저 반갑기만 하다. 이 일을 계기로 정부가 40대의 어려움을 좀더 세심히 살피게 되길 바란다.
헌법재판소는 4월 4일(금) 윤석열 대통령 탄핵선고를 예고하였다. 지난 해 12월 14일 국회에서 탄핵이 의결된 후 111일이 경과한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이 63일, 박근혜 대통령 탄핵이 91일이었던 데 비해 이례적으로 길다. 그것은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 사유가 그 이전에 비해 더욱 심대하고 그 파장이 크기 때문이다. 헌재의 시간은 사흘 후에 마무리하게 된다. 그 시간은 어느 방향으로 흐르게 될까? 기회인가 아니면 혼돈인가! 정치의 문제를 법에 호소하는 것은 정치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다. 정치가 나라를 바르게(政者正也) 하지 아니하거나 절충과 타협을 이루어내지 못할 때 정치는 법에 의뢰하게 된다. 국가의 원수(헌법 제66조)로서 행정부의 수장으로서 대통령은 국가를 통치하는 책무가 부여된다. 대통령이 정치를 풀어내지 못하면 그는 무능한 대통령이다. 법치에 따르지 않고 자기 망상에 사로잡혀 권력을 행사하면 그는 포악한 대통령이 된다. 그러면 시민(국민)들이 일어나게 된다. 시민들이 잠잠하면 길가의 돌들이 일어나 소리 지르게 될 것이다(눅19:40). 그러므로 시민의 목소리는 하늘의 소리이다. 지금 광화문에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천지를 가른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결과로 이듬해 9월에 설립된 헌법재판소는 일반 법원과 다른 기능을 갖는다. 법원에서 다루기 어려운 문제를 다룬다. 그것은 법률의 위헌 심판, 탄핵의 심판, 정당의 해산 심판, 국가기관 간 권한쟁의 심판, 헌법소원에 관한 판단(헌법 제111조)이다. 그러므로 헌재의 판단은 법원의 판단을 넘어선다. 법원의 판단은 법과 양심에 따르지만, 헌법재판소는 더 나아가 국가와 사회의 존립과 안전을 위하여 판단하여야 한다. 이것이 헌재의 정치적 기능이다. 그러므로 헌법재판소는 법적 기관이면서 동시에 정치적 기관이다. 헌법재판은 헌법을 수호하고 국가사회의 안전을 도모하는데 기여 해야 한다. 세간에서는 헌재의 선고가 늦어지는 것에 대해 재판관 개개인의 정치적인 성향에 경도되어 ‘5:3의 늪’(deadlock)에 빠져 있기 때문이라고 추론하기도 한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헌재는 독립적인 지위와 설립의지를 배반하는 것이다. 헌재는 이러한 세간의 추론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것이 헌재의 사명에 복무하는 것이고 헌재를 영속적인 기관으로 만든다. 2017년 3월 10일 헌재는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재판관 전원(8명)일치로 인용하면서 “헌법 질서에 미치게 된 부정적 영향과 파급 효과가 중대해 헌법수호의 이익이 대통령 파면에 따르는 국가적 손실을 압도할 정도로 크다”고 판시하여 사회의 안정을 회복하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 헌재의 판단은 정치적인 것 이상이 되어야 한다. 1987년 이후 우리사회는 여전히 분단 체제 아래에서 경제적 격차, 사회경제적 불균형과 불평등, 취약계층의 기본적 삶의 저하 등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새로운 체제를 구축하고 국가를 개조하기 위하여 헌재의 심판은 획기적이어야 한다. 지금 탄핵의 관철과 저지를 위해 여-야 정당과 시민사회가 세워놓은 창과 방패를 보라! 이제 헌법재판소가 시중의 주장과 폭력을 잠재우고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는 창조의 시간(kairos) 속에서 새로운 시대를 창출하기를 간곡히 바란다.
1일 헌법재판소가 드디어 4일 오전 11시에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 결정을 선고한다고 발표했다. 헌재는 ‘2024헌나8 대통령(윤석열) 탄핵 사건’에 대한 선고가 4일 헌재 대심판정에서 열릴 것이라고 밝혔다. 지난해 12월 3일 예상 밖의 비상계엄이 선포된 지 123일 만이다. 그리고 국회의 탄핵소추안이 헌재에 접수된 이후 111일만이며, 헌재 변론이 종결된 지 38일만이다. 헌재는 윤석열 대통령이 12·3 비상계엄을 선포했다가 국회의 의결로 해제하는 과정에서 헌법과 계엄법 등을 위반했는지 판단한다. 헌재 재판관 8명 가운데 6명 이상이 탄핵에 찬성하면 윤 대통령은 즉시 파면된다. 반면 3명 이상이 기각이나 각하를 결정하면 곧바로 직무에 복귀한다. 변론이 종결된 지 한 달이 넘었음에도 판결이 길게 늘어진 이유에 대해 각종 설왕설래, 풍문이 떠돌았다. 노무현·박근혜 전 대통령의 경우 변론 종결 후 각각 14일, 11일 만에 선고됐다. 이에 비하면 너무 오래 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에 일부에서는 약 3주 후 임기가 만료되는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과 이미선 헌법재판관이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 그런 것 아니냐는 터무니없는 추측과, 남은 임기를 한덕수 권한대행 체제로 가려는 것 아니냐는 어이없는 얘기도 나왔다. 이에 대해 김상일 정치 평론가는 1일 MBC 뉴스외전에 출연해 너무 높게 올라간 ‘아스팔트(찬반 시위)’의 온도가 너무 높게 올라갔기 때문에 아스팔트의 온도를 낮출 필요도 있었다면서 “올라간 아스팔트의 온도에 맞는 완벽한 판결문을 신중하게 작성할 필요성도 있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분석했다. 같은 방송에 출연한 장성철 공론센터 소장은 “정치적인 판단이나 정무적인 판단”일 수 있다면서 이재명 대표 공직선거법 2심, 4월 2일 날 재보궐 선거에 영향을 주지 않기 위한 고려일 수도 있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무튼 이제 내일(4일)까지 오직 남은 것은 헌재의 결정이다. 헌재는 그동안 11차례 변론을 열었다.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와 이상민 전 행정안전부 장관 등 국무위원, 곽종근·여인형·이진우 전 사령관 등 군 지휘관들, 홍장원 전 국가정보원 1차장과 조지호 경찰청장 등 관여한 이들이 증인으로 나왔다. 비상계엄은 ‘경고성’으로 정치인 체포'나 '의원 끌어내기' 등을 지시한 적 없다는 윤대통령 측의 입장에 대해 증인신문이 이루어졌다. 4일 오전이면 “계엄 선포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위헌 행위”인지 “거대 야당의 폭주를 극복하려는 절박한 호소”였는지 판가름 난다. 그런데 두려운 것은 이후 예상되는 폭력사태와 불상사다. 이미 극렬 지지자들의 ‘폭동’ ‘유혈사태’ 등 충동질이 시작됐다. 헌법 재판관들에 대한 테러 위협도 나왔다. 정계선 재판관의 자택 주소를 공개하고, 집으로 찾아가 정 재판관을 위협한 일도 있다. 이에 경찰은 탄핵심판 선고에 맞춰 헌법재판관 전원에 대한 전담신변 보호와 자택 안전관리 수준을 강화하기로 했다. 아울러 경찰은 선고 당일 전국에 ‘갑호비상’을 발령한다. 치안 사태가 악화하는 등 비상 상황 시 발령하는 경찰비상근무 태세 중 가장 높은 등급으로 경찰력 100%를 동원한다. 특히 극렬 시위대의 표적이 될 수 있는 헌재 인근을 사전에 ‘진공상태화’시켜 일반인들의 접근을 철저히 막겠다고 발표했다. 경찰기동대는 방검복과 방검장갑 등을 착용하고, 캡사이신 분사기, 120㎝ 경찰 장봉 등을 지참해 과격 시위에 대비할 방침이다. 지난 2017년 박 전 대통령 탄핵 선고 때 극렬 지지자들이 경찰 버스를 탈취하고, 헌재 난입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4명이 목숨을 잃는 일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난동으로 인한 인명·재산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 폭력을 행사하는 자들은 즉각 체포해 엄정한 법집행을 해야 한다. 아울러 폭력사태를 부추기는 일부 유튜버와 단체들도 철저히 수사해 엄벌에 처하길 바란다.
최근 학교 현장의 논쟁 중 하나는 교실 내 CCTV 설치다. 일부 학부모 단체와 정치권은 교사의 아동학대를 예방하고, 학부모의 알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교실마다 CCTV를 설치하자고 주장한다. 일부 정치권도 이를 법제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교사로서 나는 이런 변화가 과연 교육을 위한 방향인지, 여전히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교실은 단순한 물리적 공간이 아니다. 수많은 감정과 관계가 오가는 살아 있는 공간이다. 교사를 포함한 매일 수십 명의 아이들이 실수하고 질문하며, 울고 웃는 곳이다. 교사는 아이들의 표정을 살피고, 눈빛을 마주하며 수업의 흐름을 조율한다. 아이가 울먹일 때 조용히 옆에 앉아 어깨를 다독이기도 하고, 실수한 아이의 속상한 마음을 말없이 받아주는 순간도 있다. 교실에 카메라가 설치되는 순간, 교사는 더 이상 아이만 바라볼 수 없다. “지금 이 말투가 오해를 부르지는 않을까?”, “이 장면이 문제가 되진 않을까?” 하루에도 몇 번씩 스스로를 검열하게 된다. 수업은 점점 ‘기록을 위한 문제 없는 장면’으로 바뀌고, 교실은 배움의 공간이 아닌 방어의 공간이 된다. 교사는 완벽하지 않다. 부모가 집에서 늘 최선일 수 없는 것처럼, 교사도 교실에서 실수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실수는 반성의 기회가 되고, 아이들과 함께 성장하는 계기가 된다. CCTV가 켜진 교실에서는 그 과정조차 ‘오해의 증거’가 될 수 있다. 이미 아동학대 노이로제에 걸린 교사들이 많은 상황에서 카메라까지 들어오면 교사는 더욱 방어적, 수동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 학생들도 CCTV 설치에 불편함을 느끼고 있다. 경기도교육청이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다수의 학생들이 교실 내 CCTV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표정 하나, 말 한마디까지 기록된다고 생각하면 위축된다”는 응답도 있었다. 감시받는 환경 속에서 아이들은 질문을 줄이고, 실수를 피하고, 감정을 숨기게 된다. 사고력과 표현력, 사회성이 자라야 할 교실이 오히려 침묵과 눈치가 자라는 공간이 될 수 있다. 교육은 실수하고 표현하면서 자라는 과정이다. 그런데 그 출발점에서부터 학생들을 위축시키는 공간이라면, 과연 우리는 그것을 교육의 장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물론 악의적인 행동이 발생하는 상황에서 녹화된 영상이 억울함을 풀어주는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고, 감시 없는 교실이 위험할 수 있다는 주장에도 일리는 있다. 그러나 그런 극단적인 상황이 모든 교실에 감시를 정당화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몇몇 사건이 시스템을 흔들고, 그로 인해 교사와 학생 모두가 위축된다면, 그 피해는 결국 미래의 교육으로 돌아오게 된다. 교실은 감시받는 곳이 아니라, 함께 실수하고 성장하는 공간이어야 한다. 감시가 있는 교실은 교육 자체를 위협할 수 있다. 아이들이 질문하고, 교사가 응답하며, 서로를 신뢰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진짜 교육이 일어난다. 교실에 카메라를 켜는 일이 정말 교육을 위한 결정인지, 아니면 교육을 멈추게 만드는 선택인지 그 답을 선뜻 말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