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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조선시대 ‘성내미’로 불려진 현재의 ‘성남(城南)’

 ① 이름의 유래와 변천

 

경기도의 이야기를 발굴해 공유하고자 합니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의 이름, 우리 동네의 옛모습과 오늘모습, 우리 동네 고유의 음식과 문화 등을 하나 둘 독자 여러분께 들려 드립니다. 우선 경기도민의 일상 속에 가장 가까운 소재부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첫 번째 기획으로 우리 동네 이름의 유래와 변천을 시작합니다. 편집자 주

 

 

성의 남쪽. 성남(城南)이라는 지명이 뜻하는 말이다. 그렇다보니 ‘성남’이라는 지명에 담긴 역사의 뿌리는 깊다.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고, 국가조직이 생기면서 ‘성(城)’ 또한 계속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역사유적 중 산성과 읍성 등 ‘성(城)’은 전국에 분포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에도 성과 관련된 지명이 많이 남아 있다. 

조선의 도읍지였던 한양이나 고려의 도읍지였던 개성을 중심으로 ‘성남’이라 일컬었는가 하면, 심지어 중국에서는 중국의 성을 중심으로 ‘성남’이라고 표시하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용산구와 동작구 일대를 ‘성남’이라고 불렀다.

 


경기도 성남시는 남한산성의 남쪽이라는 뜻이다. 1913년 일제강점기에 광주군 군내면과 세촌면을 합쳐 남한산성 안에 중부면 성남출장소가 만들어졌다. 1964년에는 광주군 직할 성남출장소가 되고 광주대단지 사건 이후에는 경기도 직할 출장소가 됐다. 그러다가 1973년 7월 1일 성남시로 승격됐다. 이처럼 성남시가 승격한 과정을 보면 그 이름에는 ‘남한산성의 남쪽’이라는 의미가 담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성의 남쪽’이라는 기본적 의미로 볼 때, 108년 전 일제강점기에 설정된 성남이라는 이름보다 앞서서 성남이라 불려진 기록이 있다.
조선 초기 세조 때 이문형(李文炯, ?~1466)이 압구정에서 지은 시에 ‘빛나는 정자 높이 한강 물가에 임하니, 성남(城南) 지척 사이에 홍진(紅塵)이 막혔구나’라는 구절이 있었으며, 세종 때 헌릉(獻陵, 태종 능)의 지맥을 보호하기 위해 달래내 고개에 토성을 쌓아 사람과 말의 출입을 막았기 때문에 그 남쪽 마을을 ‘성내미 마을’이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세종 때 풍수학자인 최양선(崔揚善)은 현재 경부고속도로 달래내 고개인 천천현(穿天峴)의 길을 막고 통행을 금지하자고 주장했던 사람이다. 세종 때부터 폐쇄 논의가 있었던 이 고개는 세조 때 치열한 논쟁을 거쳐 고갯길에 흙을 북돋우고 한 때 길을 폐쇄하기도 했다. 이것은 헌릉의 주산에서 내려오는 지맥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다. 당시 최양선은 헌릉 앞의 세종 영릉(英陵)의 풍수지리가 ‘장남이 일찍 죽고 손자가 다치게 되는 자리’라며 격렬하게 반대했고, 그 주장이 모두 사실이 되자 릉을 여주로 옮기게 됐다.


판교의 성내미 마을에는 500평 가까이 되는 마당바위가 있는데, 성남문화원은 매년 이곳 마당바위에서 천재봉행 행사를 가지고 있다.


원주민인 김대진 경기도문화원연합회장은 “이곳에서 소원을 빌면 이뤄진다는 전설이 전해온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처럼 성남의 지명유래는 600년 전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 경기신문/성남 = 김대성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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