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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빼어난 자연환경과 달리 윤택하지 못했던 ‘양평군’

① 이름의 유래와 변천

 

양평(陽平)은 삼국시대 이후 별개의 행정구역으로 존재했던 양근(楊根)과 지평(砥平)이 합쳐진 지명이다. 한강을 중심으로 취락을 형성했던 양근과 용문산을 생활기반으로 했던 지평의 사람들은 때로는 혹독한 자연을 극복하면서, 때로는 중앙정부의 수탈에 맞서면서 삶의 터전을 지켜왔다.

 

양근 지역은 본래 백제의 영토에 속했으나 고구려의 남진으로 고구려의 양근군이 되었다가 산라가 한강 유역을 지배하면서 신라의 영역에 속하게 된다. 통일신라 시대에는 빈양(濱陽)으로 명명되었다가 고려 시대에는 영화(泳化),익화(益和)로 불리었다가 공민왕 5년에 태고 보우(普愚)의 고향이라는 이유로 양근군으로 승격된다.

 

지평 지역은 고구려에 속해 있을 때 지현(砥峴)이었다가 삼국통일 후 지평으로 개칭되었으며 이후 지제(砥堤)라고 불리기도 했다.

 

양근과 지평 지역은 고려시대 지방제도의 개편 이후 조선 전기에 이르러 행정체제가 고착되어 유지되다가 1908년 대한제국 칙령에 의하여 합쳐져 각기 한 글자씩을 따서 오늘날의 양평이 됐다. 오랜기간 별개의 행정구역으로 존재해 역사적 배경과 문화적 기반이 달랐던 양근과 지평은 그렇게 산과 강이라는 천혜의 자연을 동시에 가진 지역으로 재탄생했다.

 

 

그러나 이곳에 터잡은 민초들의 삶은 결코 쉽지 않았다.

 

조선 중기 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 新增東國與地勝覧’에는 양평의 자연환경을 ‘왼쪽으로 용문산을 의지하고 오른쪽으로 호수를 베고 누웠다’고 묘사하고 있다. 양평군은 북쪽 중앙에 솟은 해발고도 1157m의 용문산을 중심으로 해발고도 400m 이상의 산지가 전체 군 면적의 70% 이상을 차지하며, 남한강과 북한강을 중심으로 하는 하천과 충적지가 나머지를 차지한다.

 

이곳에 터잡은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산과 강에 의지해 삶을 영위했지만 혹한과 강우 등 특유의 기후와 자연재해로 인하여 삶은 척박하고 피폐했다. 조선 후기의 인문지리지 ‘택리지 擇里志’에서 실학자 이중환은 양평지역을 ‘산 속이 넓게 열렸으나 지세가 깊이 막혔고 공기가 한랭하며 사방의 산까지 아름답지 못하며 시냇물조차 탁한 소리를 내니 살만한 곳이 못된다’라고 설명하고 있으니 자연이 주는 혜택과 경관의 빼어남이 민초들의 윤택한 삶으로 귀결되지 않았음을 짐작할수 있다.

 

양평 지역은 주산(主山)인 용문산은 맛좋은 산나물과 경기도 내에서 손꼽히는 목재의 산지로 문헌을 통해 언급된다. 15세기 관찬사서인 ‘세종실록지리지 世宗實錄地理志’에는 대추, 석이, 느타리, 지초(영지)와 산겨자, 신감채(당귀) 등이 양근현과 지평현의 토공(土貢)과 토산(土産)으로 설명되어 있다. 조선중기 관찬 인문지리서에는 지평현에서 송이, 녹반, 산개, 신감채, 오미자 등이 진상된다고 기록돼 있다. 조선후기 실학자 유형원은 ‘동국여지지’ 토산조에서 용문산의 산나물이 으뜸이라고 칭찬한다.

 

또한 양평지역에서 생산되는 목재는 활을 만들거나 숯을 만드는 용도로 다양하게 활용됐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양평지역의 임산자원은 질이 좋아 수탈대상이 되기도 했는데, 중앙과의 거리가 가까워 울창한 삼림이 왕실의 사낭터로 이용되거나 군대의 강무장(講武場)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사낭터에 몰이꾼으로 지역민이 차출되거나 강무장 노역에 동원되어 생활고를 겪었다는 기록이 등장하기도 한다.

 

[ 경기신문 = 김영복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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