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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학사들이 절개 지키며 숨어살던 ‘광주 칠사산’

① 이름의 유래와 변천

 

칠사산은 고도 364m로 경기도 광주시에 위치한 명문산이다.

 

속설에는 고려 말 학사 일곱 명이 이곳에 은거하여 시 짓고 고기 잡고 나무를 하면서 스스로 즐겁게 살았기 때문에 후세 사람들이 그들의 높은 풍도(風道)를 사모하여 이름을 붙인 것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곳에는 ‘칠학사(七學士)가 숨어살던 칠사산’이라는 설화가 구전되어 오고 있다.

 

때는 조선 초기. 고려왕조를 무너뜨린 이성계는 새로 나라를 세우고 왕위에 올랐으나 마음이 무겁기만 했다. 고려왕조의 악정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구제하고 정치를 바르게 베풀면 천하가 자기를 따르리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던 것이었다.

웬일인지 어리석고 무능한 옛 임금을 그리워 할 뿐 자기를 따르는 자가 별로 없었다. 특히 고려 왕조의 신하로 있던 사람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행방을 감추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 사람들 중에 한림학자로 있던 일곱 사람이 지금의 칠사산으로  숨어 살았다.

 

그들은 산 정상에 올라가 멀리 북쪽 송도를 바라보며 통곡을 하면서 나날을 보냈다. 이 소식 을 들은 이성계는 신하들을 보내어 그들을 입조하도록 청했으나, 응하려 하지 않았다.

 

“상감께서 부르시오, 여러분에게 큰 벼슬을 내리신다 하니 받아들이셔야만 후환이 없을 듯 합니다.”

“아무리 말씀하셔도 그 뜻을 받아들일 수 없소이다. 나라를 잃은 우리들인데 들어갈 수 있는 벼슬자리가 어디 있단 말이오? 옛날부터 여자는 지아비를 잃으면 죽을 때까지 정조를 지키는 것이거늘, 하물며 신하된 자로서 나라와 임금을 잃고도 죽지 못한 몸이 어찌 두 임금을 섬긴단 말이오. 차라리 죽는 이만 못한 일이오.”

 

학사들의 각오는 요지부동이었다.

 

이들을 설득시키지 못하고 발길을 돌린 형조판서는 불쾌하고 괘씸한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자기를 은근히 비꼬면서 고고한 체 하는 그들을 당장 죽이고도 싶었으나, 그대로 꾹 참고 돌아섰다. 그러나 그는 개경으로 돌아오자마자 방원(芳 遠)을 찾아갔다. 방원은 아버지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고려왕좌를 뒤집어엎는 데 큰 공을 세웠으므로 세도가 자못 당당했다.

 

 

그는 방원에게 일곱 명의 한림학자들이 자기들이 숨어있는 곳을 자칭 ‘칠학사(七學士)의 산’이라 하고 각처에 사람을 보내 내통하여 역적모의 중이라 고했다. 이에 대노한 방원은 군사를 풀었고, 형조판서는 대궐로 들어가 태조에게 이같은 말을 전하며 이방원이 군사를 풀었다고 아룄다.

 

그러자 이성계는 깜짝 놀라 버럭 소리를 지르며 군사를 당장 거두라 명했다.

 

“그렇지 않아도 고려의 유신들을 많이 죽였다고 해서 민심이 날로 시끄러워 가는데 그들을 왜 죽인단 말이냐? 그들은 모두 늙은이들뿐이고 글만 아는 아무 힘도 없는 사람들인데 무얼 가지고 역적모의를 한단  말인가? 당치도 않은 소리로다!” 

 

그러나 방원은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부왕의 명으로 군사를 돌아오게는 하였으나 기회가 있는대로 그들을 잡아 죽이려고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염탐꾼을 보내어 학사들의 일거일동을 감시케 하였다.

이러한 기미를 알아차린 고려 수절신(守節臣) 일곱 사람은 더 이상 그곳에 머무르지 않고 송도 동쪽에 있는 광덕산(光德山)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두문동으로 들어간 지 얼마 안되어 그들은 몸에 불을 질러 죽음으로써 숭고한 절개를 지켰다.

 

그 후 조선 숙종 때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이 칠산사에 와서 학사제(學士祭)를 지내고 글을 지어 그들의 영혼을 위로했다. 그리고 일곱 명의 한림학사들이 숨어살던 그 산을 그들이 지칭한 대로 ‘칠사산’이라고 불렀다.

 

[ 경기신문 = 김지백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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