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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정조가 물려준 ‘화성’이라는 이름

① 이름의 유래와 변천

 

‘화성(華城)’은 1794년(정조 18년) 정조가 수원부 읍치와 현륭원을 위호할 성곽의 터를 둘러보면서 장자(莊子)의 ‘화인축성(華人祝聖)’이라는 고사를 생각하며 붙인 이름이다. 이 땅을 풍요의 고을로 만들어 여민동락(與民同樂) 하겠다는 정조의 의지가 담겼다.

 

행정구역상 화성지역은 조선시대 말까지 행정적으로 분리되어 있던 수원부(군)와 남양부(군) 지역이 일제 강점 초기인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개편에 의해 통합되면서 ‘수원군’에 포함된 지역이다.

 

수원부는 조선시대 들어와 400년 가까이 행정적으로 큰 변화를 겪지 않다가 조선후기 1789년(정조13) 7월 이후에 단행된 신 읍치의 이전을 통한 신도시 건설을 계기로 일대 전환기를 맞는다.

 

1793년(정조17) 1월에는 현륭원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수원을 화성(華城)으로 개호하고 유수부로 승격시켰다. 화성유수 역시 품계 상 개성 강화유수보다도 한 등급 올려 정2품 정경(正卿) 가운데 임명됐다. 초대 유수에는 정조가 가장 신임하여 10여 년간 좌·우의정과 영의정을 역임한 채제공(蔡濟恭)이 임명됐다.

 

정조는 왕으로 즉위한 이후 총 13차에 걸쳐 원행(능행길)에 나섰다. 재위 기간을 고려하면 매년 한 차례씩은 방문한 셈이다.

그러면서 화성부와 인근 속읍민들에게 문 무과 별시(別試)를 시행하는 등 이 고장 지역민들을 특별 우대하는 정책을 수시로 베풀었다.

 

그러다가 19세기 말 제국주의 열강의 침입과 문호개방이 이루어지고, 조선정부에 대한 일본의 내정개혁 요구가 가중됐고,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1895년(고종 32)에 8도를 23부로 개편하는 지방제도의 개혁이 이뤄졌다.

 

이후 1914년 4월을 기준으로 수원군은 수원 일형 태장 안룡 매송 봉담 향남 양감 음덕 마도 송산 서신 비봉 팔탄 장안 우정 의왕 정남 성호 동탄 반월 등 21개 면, 279개 리를 관할하기에 이른다.

 

1945년 8월 15일에는 민족해방을 맞았으나 그 해 11월 2일부터 발효된 조선총독부의 지방관제에 따라 행정구역도 일제 식민시대의 그것을 그대로 계승하게 된다.

 

그 뒤 1960년 1월 11일 화성군은 1읍 18개면으로 유지되다가, 1963년 1월 1일 태장면의 권선 원천 매탄 등 3개 리와 안룡면의 장지 대황교 곡반정 고색 오목천 등 5개 리를 수원시에 넘겨준다. 대신 안룡면의 나머지 6개리(배양 안녕 송산 황계 반정 기안)와 8개리(신리 영통 강포 반월 능리 병점 진안 기산)가 신설된 태안면에 속하게 되어 1읍 16면이 된다.

 

그리고 마침내 화성군은 2001년 3월 21일 시로 승격되면서 옛 수원부(군) 지역의 일부와 남양부(군) 지역의 거의 전역을 모태로 농어촌 복합지역으로서 비약적인 발전에 이르게 된다.

 

올 3월 시 승격 20주년을 맞은 화성시의 행정 구역은 4읍 9면 15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재정자립도 5년 연속 전국 1위, 지방자치경쟁력평가 4년 연속 종합 1위, 1인당 GRDP 10,266만원으로 경기도 1위 등 명실상부한 전국 최고의 도시로 성장했다.

 

또한 2001년 인구 19만 명에서 87만 명으로 4.5배, 예산은 2.5천억에서 3조 5천억 원으로 14배 증가하는 등 눈부신 성장과 발전을 이뤄냈다.

 

[ 경기신문 = 최순철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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